눈을 떴을 땐 꼭 꿈같았다. 몽롱하고 따뜻한 기분에 몇 번 뒤척거리면서 다시 눈을 감았다.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평화였다. 귓가에 들리는 이명도 없고. 오감을 괴롭히는 죄의 무게도 오늘은 사라진 것 같았다. 으음. 버키는 이불을 좀 더 당겨 덮으려는 듯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이불이 어딘가에 툭 걸려 움직이지 않았다. 몇 번 이불을 당겨보다 마음처럼 끌려오지 않자 그냥 포기해 버렸다. 사실 이불 좀 안 덮는다고 골골 앓을 몸은 아니었다. 게다가 오늘은 유난히 몸이 따뜻했다.
“…….”
좀 더 잘까. 오랜만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뒤척거리며 편한 자세를 찾아 돌아누웠다. 여전히 툭 잘린 팔이 어색하긴 했지만, 그 정도로 잠이 깨진 않았다. 한껏 따뜻함에 취해있던 버키가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곤 벌떡 일어나려 했지만, 실패했다.
“…아.”
어젯밤 끊어졌던 기억이 모두 살아올라왔다. 그러니까. 어제. 점점 또렷하게 생각나는 기억을 더듬을수록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러고 보니 등 뒤에서 따뜻한 몸이 느껴졌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어제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도 친구가 도망이라도 갈까 싶은지 허리를 꽉 잡고 있었다. 맨살이 닿을 때마다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며 뛰었다.
“…….”
버키는 덜컥 겁부터 집어먹었다. 스티브와 한 일 때문이 아니었다. 이렇게 선을 넘어버린 자신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몇 번이나 이러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아 먹었는데, 하나도 소용이 없었다. 스티브의 살 냄새에서 느껴지는 편안함을 찾자마자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센티넬이란 종족은 이렇게 무력했다. 누구보다 강한 힘을 가졌지만, 보듬어주는 이가 없으면 자멸하고 만다. 그렇게 종족이 사라져갔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스티브를 떠나서 살 수 없는 지경이 되면, 자신도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물론 스티브가 버키를 버릴 일은 없다. 하지만 그런 일방적인 보살핌에 자꾸 눈치를 보게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몸이 정상이 아니다. 이것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귓가에선 매일 비명소리가 들리고, 눈을 감았다가 뜨면 피바다 속에 서 있는 자신이 보였다. 하이드라의 무기로 살면서 짊어졌던 죄의 무게이고, 평생 가져 가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그리고 보이지도 않아. 이렇게 깨끗하고 조용한 아침은 처음이었다. 하이드라에게 잡혀있을 때도, 도망자 신분으로 여기저기 숨어다닐 때도 단 한 번도 이렇게 편안한 아침을 맞이했던 적이 없었다. 이게 문제였다. 사람이란 생물은 한번 편안함을 느끼면 자꾸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을 원하곤 한다.
“…깼어?”
“…….”
뒤에서 느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목덜미에 닿은 입술에선 아직도 뜨거운 불꽃이 뚝뚝 떨어졌다. 자는 척을 하려 했지만, 예민한 군인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스티브가 대놓고 허리를 좀 더 끌어당기자, 별 저항을 하지 않고 품에 안겨버렸다.
“잘 잤어. 버키?”
“…덕분에.”
“응? 너 완전히 기절했었는데, 기억 안 나?”
“안 나.”
“내가 너 씻기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랬어?”
“응.”
“고마워.”
오늘따라 아침 해를 받는 친구가 더 따뜻해 보였다. 그런 밝음에 눈이 시린 버키가 시선을 툭 떨어뜨리며 가슴에 코를 묻었다. 살 냄새가 기분이 좋았다. 끙끙 앓는 친구의 등을 토닥이던 스티브는 마냥 좋은 것 같았다. 결국, 얼굴을 보고 아침 인사를 한다. 커라단 남자 둘이 좁아 보이는 침대에서 뒤척거리는 것은 꽤 신기한 구경거리였다.
“…정말 괜찮겠어?”
“뭐가?”
“나 침대에서 일어나면 바로 나가봐야 해.”
“…….”
“가기 싫긴 한데.”
또 미련이 질질 흐른다. 버키는 눈을 깜박였다. 이 녀석은 잡아달라는 속마음을 숨기지도 않는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건지. 버키는 또 자기 때문인 거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이럴 땐 냉정하게 보내야 했다. 여기서부터 어그러지기 시작하면 정말 돌이킬 수 없었다.
“그래서 캡틴 아메리카 은퇴라도 하려고?”
“…….”
“스티브.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고 생각해.”
“…맞아. 그렇지.”
“…….”
너무 세게 말했다 싶었다. 잠깐 아쉬움이 스쳐 지나가던 얼굴엔 곧 단단한 웃음이 흩어졌다. 드디어 마음을 정한 것이 틀림없었다. 버키는 볼에 닿는 불덩이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저 내 친구가 걱정되는 것뿐이야.”
“난 괜찮을 거야.”
“그걸 어떻게 장담해?”
스티브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 센티넬을 진정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 육체관계임을 알면서도 하는 말이었다. 굳이 버키에게 이런 것을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이런 것쯤 몰라도 버키는 늘 혼란스러워했다. 이제 항상 옆에 자신이 붙어있을 텐데, 무슨 걱정일까 싶었다.
“오늘은 아침이 평화롭거든.”
“…….”
“늘…눈을 뜨면 전쟁 통 속에 서…있었어.”
버키는 단어를 고르고 또 골랐다. 자신이 보고 듣는 것을 스티브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캡틴 아메리카는 이런 그늘은 몰라도 된다. 버키의 고집이었다.
“피 냄새가 너무 심해서 항상 머리가 아팠지.”
“…….”
“정확히는 여기쯤이 말이야.”
버키가 간신히 꺼낸 손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짚었다. 여기. 안쪽에서 계속 들려. 내 뇌는 아직도 전쟁 중이야. 스티브. 혼잣말 같은 대화를 툭툭 내뱉었다. 탕. 그리고 가볍게 소리를 내면서 손가락을 움직이자 스티브의 표정이 대번에 구겨졌다.
“그런 거 하지 마.”
“이렇게 몇 번이나 죽고 싶었어.”
“…….”
“너무 괴로워서. 차라리 귀가 먹고 눈이 뽑히면 괜찮을까 싶기도 했고.”
“…….”
“그런데 안 죽고 살아있네.”
“다행이야.”
“…….”
스티브가 친구를 와락 껴안았다. 스티브. 숨 막혀. 장난처럼 투닥거리던 손이 뚝 멎었다. 살아서 다행일까. 정말 그런 걸까. 버키는 요즘 생각이 많아졌다. 하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불안함은 혼자 삼켜야 하지, 남에게 옮길만한 건 아니었다. 그렇게 믿고 있었다.
“이제 내가 그런 거 안 들리게 해줄게.”
“스티브. 너무 자신만만한 거 아닐까?”
“난 할 수 있어.”
“…흠.”
“못 믿는 거야?”
“그건…아니지만.”
“못 믿는 것 같은걸?”
“난 언제나 그래,”
시답지 않은 농담이었다. 몇 번이나 킬킬거리면서 버키를 끌어안던 스티브는 시간이 아슬아슬하다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침대를 벗어났다. 버키는 약간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이불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아, 이제야 서로가 나신인 걸 알아채고 흠흠 헛기침을 한다. 속옷을 입고 겉옷을 찾는다. 열심히 셔츠 단추를 잠그던 스티브는 한 손으로 옷을 든 채 가만히 생각에 잠긴 버키를 바라보더니 냉큼 다가왔다.
“도와줄까?”
“…….”
“거절하지 마. 응?”
“내가 캡틴 아메리카가 입혀주는 옷도 다 입어보네.”
“지금 놀리는 거 맞지? 나도 이제 알아.”
“아니야.”
방금 꼭 예전 전쟁터에서 주고받던 말 같았다. 스티브도 버키도 다 기분이 좋았다. 꼼꼼하게 옷을 내려주고 여기저기 쪽쪽 거리고 나서야 아쉬운 듯 떨어졌다. 아침이라도 같이 먹고 나가면 좋을 텐데, 시간도 장소도 모두 하나같이 애매했다. 버키 식사야 티찰라가 알아서 챙겨주겠지만, 또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늦어. 어서 가봐,”
“괜찮겠어?”
“내 몸은 내가 알아. 혹시 또 발작이 일어날 것 같으면 바로 연락할 게.”
“…….”
“날 믿지?”
“믿지.”
“그럼 됐어. 어서 가봐.”
친구의 한 쪽 손이 가볍게 등을 떠밀었다. 그러자 다시는 돌아볼 수 없었다. 여기서 친구를 돌아보면 분명 와락 껴안은 채 침대로 쓰러질 것 같았다. 조금도 떨어지기 싫은데, 캡틴 아메리카는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무거운 걸음으로 걸어갔다. 방문이 닫히기 직전 새파란 눈이 버키를 훑고 지나갔다. 문이 닫히고 발자국이 멀어졌다. 버키는 눈을 감은 채 발소리를 따라갔다. 저벅. 저벅. 꼭 머릿속에 직접 울리는 것 같았다.
“다녀와. 스티브.”
텔레파시라도 쓰는 것 같았다. 그렇게 친구를 보내고 다시 침대에 주저앉았다. 어젯밤 흔적이 가득한 걸 보니 어쩐지 민망했다. 청소를 먼저 해야 하나. 아니면 이대로 뻔뻔하게 있어야 하나. 버키는 고민했다. 하지만 그런 고민도 잠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다음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버키는 입술이 허전한지 계속 안기기만 했다. 물론 한쪽 팔이 없는 상태론 마음대로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조금만 균형을 잃어도 휙 넘어가곤 했다. 무거운 메탈암을 떠받치고 있던 척추는 휘어지다 못해 단단히 굳어버렸다.
“…음.”
“버키?”
“스티브…….”
길게 늘어지는 말꼬리가 입술에 걸렸다. 분명 눈앞에 있는 것은 친구인데, 자꾸 정신이 저 멀리 날아갔다. 아. 스티브는 어쩐지 눈이 무거워서 몇 번이나 감았다가 다시 떴다. 버키는 눈을 깜박이며 스티브의 품 안을 파고들었다. 이미 선을 넘은 것은 확실했다.
“스티브…내가 좀 이상한가 봐.”
“…….”
“안 그래?”
“안 그래,”
“이상한데…….”
헛숨을 들이킨 버키가 스티브의 옷을 붙잡고 매달렸다. 스티브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꾹꾹 참고 있었지만, 버키의 손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온몸에 불이 붙는 것 같았다. 잠깐 긴장을 놓으면 도무지 몸을 제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몇 번이고 버키를 진정시키려고 토닥였지만, 오늘은 도무지 들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스티브의 손이 닿을 때마다 바짝 긴장한 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
그러면 스티브는 덜컥 겁이 났다. 이대로 자신의 가이드도 무시한 채 영영 사라져버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러다 버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으면 어쩌지. 스티브는 괴로운 마음에 눈을 꾹 감았다.
“스티브.”
“…….”
“스티브…….”
버키의 입술이 자신을 몇 번이나 더 불렀을 때, 스티브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품에 꼭 안고 있던 버키를 놓은 채 몸을 일으켰다. 안타까운 외팔이 허공에서 친구를 찾았다. 스티브. 스티비. 스팁. 아. 헉헉 넘어가는 목소리에 쇠 냄새가 섞였다.
“버키.”
“나 좀 도와줘.”
“…….”
“응? 스티브. 우리 친구잖아.”
“…….”
“스티…브.”
“…….”
위에 올라탄 채로 가만히 친구를 내려다보았다. 잔뜩 긴장한 것이 눈물로 몰려나왔는지, 눈 밑이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불규칙하게 숨을 쉬는 입술을 잔뜩 터졌지만, 예쁜 붉은색이었다. 스팁이 눈을 한번 깜박거리자, 버키의 손이 볼로 다가왔다.
“스팁.”
“…….”
“스티브.”
“…….”
마치 허락이라도 구하려는 것처럼 볼 주위에 손이 맴돈다. 살짝 닿았다가 파르르 떨려 떨어지는 손끝이 너무 아쉬웠다. 더는 참을 수 없어졌을 때, 스티브는 그런 손을 덥석 낚아챘다. 그와 동시에 친구를 향해 고정되어있는 시선이 파랗게 빛났다. 약간 놀랐는지 동그랗게 뜨는 눈에는 온갖 감정이 섞여 있었다. 버키. 스티브는 어쩐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우리 친구지?”
“친구지.”
“알았어. 버키.”
스티브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버키의 입술을 탐했다. 파르르 떨면서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입술에선 묘한 맛이 났다. 까칠하게 튼 입술을 혀로 문지르다 급하게 빨아들이면 목 안에서 우는 소리가 났다. 으응. 으. 버키는 눈을 감지도, 뜨지도 못한 어정쩡한 표정으로 뭔가를 계속 조르고 있었다.
몇 번이나 닿았던 입술인데, 계속 처음 느끼는 기분이었다. 허겁지겁 입을 맞추던 스티브는 눈을 감은 채 한쪽 손으로 버키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 도대체 뭐에 자극이 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버키의 입술에서 짤막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잔뜩 긴장한 얼굴엔 피가 몰려 따끈따끈했다.
“버키 미안해.”
“…….”
“내가 널 힘들게 해서…….”
“그런 거 아니야.”
“…….”
“스티브. 난…….”
버키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갑자기 몰려온 센티넬 인자는 온몸을 갉아 내리면서 스티브를 조르고 있었다. 가이드가 주변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온몸이 간질간질할 정도로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하지만 스티브에게 폐가 되지 않으려고 꾹꾹 참았었는데, 한번 이탈한 궤도는 좀처럼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몸이 형질에 순응하기 시작했다. 가이드를 원한다. 어서 이 고통을 눌러 없애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한 이후로 버키는 뇌를 움직이는 것을 그만두었다.
“아, 스티브.”
“쉬. 버키. 괜찮아.”
“아…응.”
“…….”
“으…….”
애써 입술을 깨물며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몸은 그렇지 않았다. 스티브의 입술이 지나간 자리마다 붉은 꽃이 피는 것처럼 얼룩덜룩하게 달아올랐다. 이상한 일이었다. 입고 있던 상의는 이미 가슴 끝까지 말려 올라갔다. 버키가 불편한 기색을 보이자 스티브는 눈썹을 늘어뜨리며 친구의 상체를 일으켜주었다. 그리고 옷을 벗겨냈다. 갑자기 온몸에 찬 기운이 달라붙자, 버키가 가늘게 떨었다.
“추워.”
“응? 뭐라고?”
“스티브. 추워.”
“…….”
“…이상하다. 너무 추워.”
“…….”
정말 이상한 것투성이였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친구는 내내 스티브만 찾았다. 조금이라도 살이 닿으려는 노력에 스티브는 그대로 버키 위에 푹 쓰러졌다. 이제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이 감정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도 상관없었다.
“버키.”
“…응.”
“어디 가지마.”
“안 가.”
버키는 늘 스티브에게 상냥했다. 뇌가 뭉개지고 나서도 간신히 찾은 기억은 오로지 스티브에 관한 것이었다. 처음은 헬리캐리어. 그다음은 다리 위. 점점 과거로 돌아가는 기억은 어느 순간 말라깽이 브루클린 소년 옆에서 멈춰버렸다. 희미하게 떠오른 기억 조각을 붙잡은 버키는 그 옆에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이 녀석은 한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으면서 꼭 어미 새가 된 것처럼 굴었다. 그런 버키였기에 자신이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이길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괜히 물었던 말을 또 묻고, 들었던 대답을 다시 듣곤 했다. 그렇게 듣고 싶은 말이 흘러나오면 그대로 만족해 버리고 말았다. 대답과 동시에 살짝 벌어진 입술에 다시 입술을 가져다 댔다.
“버키.”
“나도 그렇고, 내 이름도 어디 도망가지 않아. 스티브”
“…….”
“그렇게 불안해하지 않아도 괜찮아.”
수십 년을 넘어 다시 나타난 친구는 계속 이렇게 다독였다. 물론 스티브가 저렇게 절절매는 이유를 알긴 했다. 죽은 줄 알았어. 다시는 못 만나는 것 같았어. 이런 이야기가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한 사람에게 집착하는 것은 좋지 않다. 버키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
그 순간 스티브의 입술이 목덜미에 닿았다. 살짝 깨물 때마다 온몸에 전기가 통하는 것 같았다. 물론 의자에 앉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느낌은 아니었다. 저릿저릿하게 온몸을 달아오르게 하는 기분에 기분 좋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온몸에 파편처럼 박혀있는 형질이 바짝 살아나는 것 같았다. 수십 년 동안 억눌러진 형질이 자꾸 눈앞에 있는 가이드를 찾았다.
물론 스티브도 마찬가지였다. 자신 외에 다른 센티넬은 본 적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만 잘 다독이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눈앞에 센티넬을 보고 있으니 도무지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센티넬이 친구든 동료든 그리 상관없었다. 눈을 감으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도와줘야 한다. 그 생각뿐이 들지 않았다. 처음엔 손을 잡는 정도의 가벼운 접촉이면 충분했다.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한 센티넬은 그런 짧은 자극에도 곧 온몸의 긴장이 풀어지곤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옆에 가이드가 있다는 사실을 안 녀석은 자꾸 조르고 있었다. 서로 힘든 시기가 되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달려들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마음에도 선을 넘을 수도 없었다. 누가 뭐라 해도 둘은 서로가 소중했다. 쉽게 선을 넘고 난 뒤 나타날 미래를 두려워했었다. 다른 일은 냉정하게 사리판단을 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버키에 관한 일은 너무 불러도 한참 무르곤 했다. 그렇게 고민이 중첩된 사이 선선히 넘쳐흐른 감정은 더는 주체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녀석은 자연스럽게 입을 벌려줬다. 가늘게 웃는 눈꺼풀 위에 한 겹짜리 긴장감이 내려앉았다. 스티브가 허리를 숙이면 후끈한 체온이 그대로 느껴졌다. 키스에 정신이 팔린 버키가 좀 더 입술을 조르고 있던 사이 스티브의 한쪽 손이 허리를 만지작거렸다. 처음엔 손이 닿는 것조차 민망해하더니 이젠 제법 대담하게 만져왔다. 손바닥에 차지게 달라붙는 허리를 죽 쓸어내리면 버키는 목으로 으르렁거리며 울었다. 꼭 맹수를 길들이는 것 같았다.
“하…….”
“…….”
“숨…막혀서 죽는 줄 알았네.”
“…….”
“스티브.”
길게 늘어지는 자신의 이름을 듣는 것이 좋았다. 입술을 바라보니 얼마나 물고 빨았는데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뜨거운 불덩이는 입술에서 코로 옮겨갔다. 콧대를 지나 이마에 머무르면 꼭 낙인을 찍는 것 같았다. 스티브의 입술이 닿은 곳마다 활활 타올랐다. 그러면 온몸에 힘이 빠지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혈청이 상처를 아물게 하였는지, 피부는 탄탄하고 깨끗했다. 다만 강철과 맞닿은 곳은 형편없이 오그라든 채 흉한 상처를 가지고 있었다. 스티브의 눈이 찌푸려졌다. 저 상처를 아직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런 시선을 따라가던 버키는 곁눈질로 자신의 팔을 바라보았다.
“…….”
“좀 별로지? 나도 알아.”
“아니…그런 게 아니라.”
“다른 흉터는 빨리 낫는데 이쪽은…좀처럼 없어지지 않더라고.”
“…….”
“그래서…….”
“아니야. 버키. 그런 생각하는 거 아니야.”
“난…….”
버키의 생각이 또 안쪽으로 파고들 기미가 보이자 스티브는 마음이 급해졌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지만, 굳이 말을 꺼내지 않은 것은 버키가 혼란스러워하고 울적해 할까 봐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스티브의 행동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답답하면서도 짠했다. 그러지 마. 그런 말 하지 마. 버키. 몇 번이나 그렇게 달랬다.
“아…….”
짧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매끈한 가슴에 입술 대면 그대로 크게 부풀어 올랐다. 수많은 전쟁의 상처는 안쪽으로 다 숨어버렸는지 매끈매끈한 피부는 잘근잘근 씹어보면 단맛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 수 없으니 아쉬운 표정으로 혀를 댔다. 흐. 응. 비음이 섞인 느릿한 반응이 귀에 들리는 시간이 그렇게 길 수 없었다. 버키가 놀라지 않게 최대한 천천히 움직이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느릿한 진도도 스티브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고 있을 뿐이지 이미 한껏 흥분한 상태였다. 굳이 두려움을 심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시간을 들여 천천히 긴장을 풀어주고 있었다. 눈으로 보는 시각적인 상황은 말할 것도 없고,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뇌가 자꾸 느리게 움직이며 이성을 마비시키곤 했다. 차라리 술에 취했다면 더 편했을 뻔했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반신에 그대로 이마를 댄 채 기도를 하는 사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약간 흐트러진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스티브의 호흡이 살에 닿을 때마다 버키는 가늘게 떨면서 손끝으로 친구를 찾았다.
“버키 어쩌지.”
“응?”
“나 진짜 더는 못 참겠어.”
“…….”
“미안.”
“왜 참아?”
“…….”
“난 괜찮아. 스티브.”
왜 지금까지 고민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미 당겨진 불씨를 끌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쉽고 조심스러운 마음에 허리만 만지작거리던 손이 좀 더 대담하게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꼭 그런 스티브를 기다렸던 표정이었다. 버키가 스티브의 목에 손을 둘렀다. 이성의 끝이 툭 하고 끊어졌다. 아니 이미 끊어진 것을 간신히 붙잡고 있던 것에 불과했다.
버키는 친구를 진정시킬 생각이 없었다. 기분이 나쁜 것도 아니었고, 힘들지도 않았다. 자주 보이던 환각마저 버티지 못하고 물러갔다. 게다가 늘상 귓가에서 지겹게 울리던 핏빛 비명대신 스티브 목소리밖에 들리지 않으니 오히려 살 것 같았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서 자꾸 시선을 맞췄다. 그러면 스티브는 활짝 웃으며 버키의 몸을 껴안았다. 자연스럽게 허리 뒤로 돌아간 손가락이 탄탄한 척추를 죽 훑어 내렸다. 그러나 괜히 손톱을 세워 긁기라도 하면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척추 끝 움푹 들어간 곳을 천천히 쓰다듬던 스티브가 버키의 콧대에 가볍게 키스를 하면서 웃었다.
“버키.”
“응…왜 그래.”
“아프면 이야기해.”
“더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
“나 제법 튼튼하니까.”
“…….”
“정말이야.”
이상한 허락이었다. 그 말이 또 가슴이 아픈지 스티브는 눈을 감은 채 버키의 얼굴에 볼을 부볐다. 그러면 터질 듯 두근거리는 버키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귀를 통해 들리는 버키의 생존 신호에 어쩐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더 기분이 이상해지기 전에 키스 세례를 퍼부으면서 버키의 바지를 벗겼다. 마치 도와주려는 것처럼 허리를 움직이던 버키가 잠시 눈을 깜박이며 멈춰 섰다. 친구는 가끔 이렇게 버퍼링에 걸릴 때가 많았다. 그러면 꼭 끈 떨어진 인형처럼 멍한 표정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스티브는 서두르지 않고 친구의 볼을 쓰다듬었다. 천천히 돌아온 초점이 다시 푸른 눈에 닿았다.
“버키.”
“…미안.”
“왜 자꾸 미안하다 해.”
“…….”
“괜찮아.”
그렇게 위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의 그림자에 푹 파묻힌 버키가 눈만 빛내고 있었다. 이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으리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잔뜩 다치고 헤진 얼굴이지만, 늘 생각하던 버키가 맞았다. 이젠 어떤 버키라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자 스티브는 마음이 한결 더 편해졌다.
스티브는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파닥거렸다. 어리다 어려. 버키는 킥킥 웃으면서 부드럽게 시선을 돌렸다. 푸른 눈에 겨울이 닿으면 쩡 하고 소리가 났다. 그리고 파문이 일었다. 얼음이 깨지는 것처럼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버키는 늘 자신 때문이라 자책하고 있었다. 스티브는 절대 아니라고 했지만, 한번 생긴 마음을 영 지울 수 없었다.
“스티브 무슨 할 말 있어?”
“…….”
“있지?”
“그게…….”
“무슨 일인데? 우리 스티비가 이렇게 축 처질까.”
전혀 작지 않은 스티브의 품에 안긴 버키가 웃으면서 물었다. 사실 계속 빙글빙글 말을 돌리는 걸 알고 있었다. 계속 저런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 분명한데다 이렇게 표정이 죽어가는 것은 뻔했다. 분명 출장이 겹쳐있는 상황이었다. 캡틴 아메리카가 와칸다에 온 것을 아는 사람은 티찰라 외에 아무도 없었다. 그러면 왕과 할 일이 있겠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버키는 약간 머리가 아팠다.
“가기 싫어.”
“스티브로서?”
“응?”
“아니면 캡틴 아메리카로서?”
“…….”
“어느 쪽 일이야?”
“그건…….”
금발의 잘생긴 청년은 목 안으로 말을 고르고 있었다. 다부지게 자리 잡은 눈썹이 계속 꿈틀거리는 것을 보아 꽤 고민하는 것이 확실했다. 거짓말을 못 하는 성격이면서 꼭 저렇게 고민을 해대곤 한다. 버키는 딱히 재촉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스티브는 버키를 품에 안았다가 다시 떼어냈다. 그리고 목에 고개를 묻었다. 한창 그러고 있더니 하는 말은 역시 같았다.
“…가기 싫어.”
“가야 하는 일 아니야?”
“맞아.”
“그런데 어째서?”
“캡틴 아메리카로선 가야 하는데, 스티브 로저스는 내 친구 옆을 떠나고 싶지 않아.”
“…….”
“내가 없을 때 혹시 발작이라도 일어나면 어쩌지.”
“…….”
버키는 대답을 하기도 전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네가 또 아플까 봐 그게 걱정되어서 떠날 수가 없어.”
“…스티브. 설마 그것 때문에 고민한 거야?”
“그럼 내가 뭐로 고민해야 하는데.”
“난 네 신변이 다른 곳에 알려질까 봐 그러는 줄 알았지.”
“그런 건 이제 상관 안 해.”
“어떻게 상관 안 해. 와칸다를 끌어들일 셈이야?”
“왕궁 밖으로 가는 게 아니니까 괜찮아. 수트도 없고 방패도 없어. 날 알아볼 사람은 와칸다 내에 그렇게 많지 않단 말이야.”
“…….”
“다만 오래 떨어져 있는 게 마음이 놓이질 않아.”
“난 괜찮아.”
“안 괜찮아.”
스티브는 단호했다. 하긴 몇 번이나 못 볼 꼴을 보였으니, 저럴 만도 했다. 하지만 버키는 정말 괜찮은 것 같았다. 물론 눈에 보이는 헛것과 환청만 들리지 않으면 좀 더 나을지 모르지만 사실 그것조차 상관없었다. 언제나 그런 지옥에서 살아왔으니 그 정도로 놀라거나 겁먹지 않는다. 아니 태연한 척했다.
“버키, 안 괜찮잖아.”
“…….”
“내가 널 두고 어떻게 나갔다 와.”
“하지만 날 데리고 갈 수 없는 곳이잖아.”
“…….”
“맞지?”
“그야…….”
“난 정말 괜찮아. 혹시 또 발작이 오거나 폭주상태가 되면 바로 약 먹고 잠들 생각이니까.”
“…….”
“네가 돌아와서 깨워주면 되잖아.”
“널 그런 이유로 잠들게 하고 싶지 않아.”
“…….”
목소리에 약간 물기가 섞였다. 이 녀석은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손이 너무 많이 갔다. 모든 걸 이해하면서도 이러는 녀석을 받아주기에 힘이 부치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왕을 난처하게 할 순 없잖아. 버키가 최대한 또박또박 말을 했다. 하지만 스티브는 막무가내였다.
“왜 이렇게 고집을 부려.”
“내가 이젠 놓치고 싶지 않은 게 생겨서.”
“…….”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데…….”
“유아기가 다시 오는 거야? 이제 다 컸다며.”
“버키. 제발.”
“…….”
나도 참 못났어. 저 얼굴에 약해지면 안 되는데 좀처럼 힘을 쓸 수 없었다. 결국, 하자는 대로 다 해주기로 하고 약속을 받아냈다. 이렇게 해도 될까. 감정이 더 깊어져도 될까. 내내 머릿속은 복잡했지만, 버키도 스티브와 가까이 있는 편이 편했다. 제멋대로 날뛰는 센티넬 인자가 심장을 쥐어짜지도 않았고, 온몸이 쪼개지는 것처럼 아프지도 않았다. 분명 하이드라가 놓은 혈청의 부작용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온몸을 잡아먹으려고 덤빌 리가 없었다. 잠시라도 긴장을 풀면 심장 깊숙이 숨어있던 괴물이 이빨을 들이민다. 그대로 물려서 빠져나올 수 없을 때가 많았다. 하지만 스티브를 만난 이후 그럴 때마다 한 줄기 빛이 보였다. 괜찮다며 말하곤 하지만, 불안한 것은 버키도 마찬가지였다.
“스티브…….”
“응?”
“역시…나 그냥 약 먹고 자고 있을까?”
“그게 무슨 소리야.”
“그게 편하잖아. 나 재워놓고 나갔다가…돌아와서 깨워주면…….”
“그렇게는 못 해!”
“…….”
큰소리에 버키는 눈만 깜박였다.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 몸에 새겨진 고통의 기억을 거스를 수 없었다. 남이 목소리를 높이면 자연스럽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런 버키를 보는 스티브는 괴로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스티브도 이러고 싶지 않은데, 요새 유달리 감정 조절이 힘들었다. 친구를 보고 있으면 그 누구보다 행복하다가 아차 싶은 순간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면 어김없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미안, 미안해. 버키.”
“아냐…내가 더.”
“나한테 어떻게 그러라고 말해. 내가 널 어떻게 그래.”
“…….”
“밤에 잠이 드는 그 순간에도 네가 사라질까, 다시 일어나지 못할까 걱정이 되는데. 응? 그런 내가 널 어떻게 재우고 가,”
“…미안.”
“…….”
“내…생각이 짧았어.”
“버키 제발 그런 말 하지 마.”
“응…….”
안 그럴게. 버키의 말끝이 길게 늘어졌다. 자신의 망가진 뇌보단 스티브가 더 똑똑할 테니 그냥 그 말을 따르고 싶었다. 스티브한테 안겨 있으면 아무런 생각도 하기 싫어진다. 이 편안함에 취해 그대로 눈을 감아도 좋을 만큼 따끈따끈했다. 비명을 지르며 몸 안쪽부터 흘러나오는 냉기가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그렇게 스티브의 품을 빌리고 싶었다.
“오늘은 같이 자자.”
“언젠 안 그랬고?”
“그땐 정신이 없었잖아. 오늘은 정식으로 물어보는 거야.”
“맘대로 해.”
이렇게 해서라도 스티비를 안심시킬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옛날에도 해봤던…것이니까. 잘 생각 나지 않지만 그랬던 것 같다. 매트리스 깔고 베개를 놓고…그다음은 뭘 했지. 가물가물한 기억은 꼭 이리저리 죽죽 찢긴 사진 같아서 좀처럼 알아볼 수 없었다. 버키는 뭉개진 자신의 뇌를 탓했다. 여기서 그런 말을 해주면 스티브가 더 좋아할 텐데. 약간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정원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내내 둘은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버키는 어깨에 걸쳐진 스티브의 옷을 좀 더 잡아당겼고, 스티브는 버키를 끌어안았다. 사람이 없는 공간까지 걸어온 뒤 어색하게 떨어졌다. 최대한 빨리 돌아가자며 스티브가 팔을 끌어당겼고, 브루넷은 굳이 싫다고 하지 않았다.
“스티브.”
“…….”
“스티브. 가서 무슨 일인지 들어야겠어.”
“…….”
“그래야 내가 마음이 편해.”
결국, 방에 돌아와 스티브의 입에서 들은 내용은 생각보다 별것 아니었다. 왕이 여러 가지 일을 해결하기 위해 캡틴 아메리카를 부른 것이었다. 멀리 가는 것도 아닌 데다, 원한다면 버키가 기거하는 방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물론 꽤 먼 길이기 때문에 버키는 그 방법을 만류했다. 스티브는 이번 일이 끝나면 천천히 모든 일이 순서대로 돌아갈 거라 말했다.
“무슨 일?”
“너와 나의 일. 그리고 우리들의 일까지 모두.”
“…….”
“긴 싸움이 되겠지만…나는 포기하고 싶지 않아. 버키.”
“그런가. 나한테도…그런 일이 일어나려나.”
“그러려고 내가 움직이는 거야.”
“알았어. 내 스티비를 믿어.”
“날 밝으면…빨리 갔다 최대한 서둘러서 돌아올게. 혹시 아프거나 공황상태가 올 거 같으면 바로 이야기해야 해. 알았어?”
“내 몸은 내가 더 잘 알아.”
“…….”
“스티브가 없을 때도 견뎠는걸, 괜찮을 거야.”
“…….”
“자자. 일찍 나가야 한다며.”
걱정이 늘어진 스티브의 얼굴을 툭툭 두드려준 버키가 먼저 침대에 누웠다. 둘이 자긴 약간 작은 듯해 보이지만, 붙어 자면 못 잘만한 사이즈도 아니었다. 버키가 한쪽을 보고 누워있자니 바로 뒤에서 스티브의 숨결이 느껴졌다. 자연스럽게 버키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오랫동안 뒷목에 입술을 대로 있었다. 한쪽 팔이 없는 것은 아직 익숙하지 않아 때때로 없는 것을 움직이려 한다. 그럴 때마다 참 입맛이 썼다.
“버키.”
“응?”
“모든 일이 끝나면 우리 브루클린에 집을 하나 사서…같이 살까?”
“갑자기 무슨 말이야.”
“그냥 그러고 싶어졌어.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림도 그리고, 같이 산책하고 그렇게 살아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너무 먼 미래 같은 걸.”
브루넷의 청년은 씁쓸하게 웃었다. 영원히 안 올 수도 있지. 굳이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아 꾹꾹 눌러 삼켰다. 스티브의 손이 허리를 감았다. 그리곤 건반을 누르는 것처럼 배를 꾹꾹 짚어보기 시작했다.
“간지러워.”
“그러라고 하는 거야.”
“…….”
“버키.”
“…응.”
“우리 친구 맞지?”
“맞지.”
“그래.”
이 녀석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버키는 스티브의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버키는 내내 고민하고 있었다. 이렇게 캡틴 아메리카 곁에서 있어도 될까. 이 선택이 최악의 수면 어쩌지.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잔뜩 뭉쳐진 채 굴러다녔다.
‘모르겠다.’
버키가 돌아눕자, 바로 앞에 스티브의 입술이 보였다. 눈을 감은 채 스티브의 입술에 슬쩍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댔다. 깜짝 놀라는 단단한 몸이 그대로 느껴졌다. 장난이라고 하기엔 너무 고약했다. 이미 선을 넘어버린 감정은 주체할 수 없었다. 친구면 어떻고 전우면 어떤가. 고민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왜 그런 것으로 끙끙 앓았는지조차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따뜻한 입술에서 체온이 넘어왔다. 항상 차갑게 식어있던 거친 입술이 촉촉해지는 것 같이 기분이 좋았다. 천천히 입술을 떼어내다가 못내 아쉬운 듯 다시 붙어왔다.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스티브.”
“…….”
“내가 진짜 이상해졌나 봐.”
“…….”
“너도 그렇게 생각해?”
“아니.”
그다음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
원래 이 뒤는 성인본의 그렇고 그런 것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여러모로 고민중입니다
둘이 연애 하랬더니 이제야...싶은 것이...
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절반정도 온것 같아요!
사실 제일 보고 싶은 부분은 시빌워 쿠키 이후 이야기인데, 앞부분이 이렇게나 길어져 버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