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둘은 어떻게 되었던지 적당히 담백한 편이었다. 물론 그게 의지가 아닌 주변 상황에 휩쓸린 것이긴 해도, 이런 식으로 감정의 둑이 터질 줄은 정말 몰랐다. 몇십 년 동안 잠들어 있던 감정이 이제 정말 미쳐버렸나 봐. 둘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번 넘친 감정은 좀처럼 주체하기 어려웠다. 입술을 떼자마자 사라지는 온기가 너무 아쉬워서 다시 다가갔다.
“…….”
음. 짧은 한마디가 목으로 꿀꺽 넘어갔다.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버키의 입술에 스티브가 닿으면 불길이 솟는 것처럼 뜨거웠다. 숨을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다 슬쩍 멀어졌다. 눈 밑이 벌겋게 변한 걸 보니 둘 다 민망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뭐 어떤가.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다. 한참 엉겨 붙어있던 둘이 간신히 떨어졌다.
“이러는 거 아직은 어색해.”
“난 안 그런데.”
“…….”
“정말이야. 버키.”
“많이 바뀌었네.”
“왜 자꾸 바뀌었다고 그러지?”
“내가 아는 스티브는…….”
“스티브는?”
“좀 더 작고…당당하고……. 음…….”
계속 말이 늘어졌다. 분명 드문드문 생각나는 기억을 짜 맞추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버키는 하이드라가 괴멸되고 도피생활을 하는 동안 점점 나아지고 있었다. 스티브가 버키의 은신처를 찾아갔을 때도 분명 또렷하게 친구를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 그냥 여기 있자.”
“무슨 소리야? 캡틴 아메리카가 이러고 방에 처박혀 있겠다고?”
“…….”
“그러면 안 돼. 숨어 지내고 속죄할 사람은 나 혼자로 충분해. 스티브.”
“그런 말 아닌 것 알고 있잖아.”
“스티브. 넌 밝은 곳으로 다시 걸어가야 해.”
“…….”
“나랑 같이 있으면 안 될 사람이야.”
“내가 왜 너랑 같이 있으면 안 되는 거지? 자꾸 그런 말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 버키.”
“…….”
“나 지금 누구랑 이야기하고 있는 거야?”
“…….”
스티브의 목소리에 약간 감정이 실렸다. 방금까지 죽고 못 살 것처럼 서로 감정에 불타오르다 이젠 계속 자신을 밀어내고 있었다. 버키가 이렇게 변덕이 심했던가. 스티브는 내내 옛날 버키를 기억했다. 하지만 이렇게 감정이 널뛰진 않았다. 이러다 보니 슬슬 짜증이 날 법도 했다. 물론 캡틴 아메리카로선 감정을 절제하는 것에 능숙했지만, 스티브 로저스는 아니었다.
“말해봐. 버키. 나 지금 누구랑 이야기 하는 거냐고 물었어.”
“…….”
친구는 입을 다물었다. 분명 머릿속에서 돌아가지 않는 뇌를 붙잡아 생각을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당장 어깨를 잡고 흔들고 싶은 마음을 꾹꾹 내리눌렀다.
“…버키 반즈,”
“…….”
“버키 반즈랑 이야기하고 있겠지. 안 그래?”
“그런데 왜 자꾸 나를 떠나려 해? 안 그랬잖아.”
“…….”
“버키 반즈는 내가 싫다고 해도 끝까지 쫓아 와서 나한테 한마디 하던 녀석이었어.”
“…….”
“그런데 왜.”
물론 스티브는 이 말을 하자마자 곧 후회했다. 자꾸 버키에게서 과거를 보고 있었다. 이제 그러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너무 자연스럽게 대화가 옮아갔다. 친구의 표정이 또 한 번 아프게 일그러졌다. 난 누구지. 그 물음이 들렸을 때 스티브는 버키 앞에 무릎을 꿇는 것처럼 무너져 내렸다.
“…미안.”
“…….”
“내가 잘못했어. 버키.”
“…….”
“내가…….”
“망가진 건 나인데 왜 스티브가 미안하다 해.”
“…….”
“내가 기억을 못 해서 그러는 거니까 그런 생각 안 해도 괜찮아.”
“버키…….”
“기억이 많이 돌아오긴 했는데…아직 많이 부족해서. 스티브가 아는 그 사람이 아닐 수 있어.”
“…….”
“아니…이젠 완벽하게 그때로 돌아가지 못할 거야. 내 친구는 똑똑하니까 무슨 말인지 충분히 알 거라 생각해.”
“…….”
“하지만, 스티브가 원한다면 노력할 순 있어.”
“그게…무슨.”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 이야기가 듣고 싶어.”
“…….”
스티브는 잠시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입술을 벌렸다. 버키의 입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아무리 자신이 버키한테 기대하는 것이 있었다 해도 이런 식으로 학습하듯 만들어내고 싶진 않았다. 그건 아니야. 버키. 그건. 스티브가 급히 고개를 가로저으려는 순간 한쪽밖에 없는 손이 뺨에 닿았다. 그 순간 스티브는 온몸이 얼어붙은 것 같았다.
“아니. 이게 맞아.”
“…….”
“사실 지금 기억 하는 것도 확실하지 않아. 하이드라가 나에게 버키 반즈의 기억을 주입한 것인지. 내가 끝까지 잊어버리지 않았던 것인지조차 불분명해.”
“…….”
“스티브가 도와줘야 할 것 같아.”
“하지만…….”
“과거를 잊으면 난 정말 하이드라한테 먹혀버려.”
“…….”
“기억하고 있어야만 해.”
“…….”
끝의 끝까지 보인 진심이 스티브는 그저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어쩌다 우리 둘은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그 답을 해줄 사람은 이미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스티브를 캡틴 아메리카로 만든 사람들은 이미 죽은 지 오래였고, 버키를 끌고 간 하이드라는 이미 궤멸하여 실체가 없어졌다. 결과만 남은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은 채 자꾸 엇갈리는 궤도를 수정하고 있을 뿐이었다.
말은 할수록 엇나가고, 행동은 비틀린다. 몇 번이나 버키를 놓쳐버린 스티브는 친구를 놔줄 생각이 없었고, 포기하는 것이 익숙해진 버키는 친구를 자신이 잡아먹지 않았으면 했다. 서로 떨어져 살 수도 없는 주제에 쌍방 걱정만 늘어놓았다. 결국, 먼저 한 수 접는 쪽은 버키였다.
“스티브. 도와줄 거지.”
“…….”
“난 내가 인간으로…그리고 네 앞에서 버키로 끝까지 남아있고 싶어.”
“…….”
“응?”
이렇게 말하면서 눈썹을 축 늘어뜨린다. 아직 활짝 웃는 것은 좀 어색했지만, 최대한 비슷하게 따라 하려 했다. 스티브는 버키의 웃는 모습을 많이 좋아했고, 그 미소를 보면 한없이 약해진다. 그걸 아는 건지. 아니면 우연히 맞춘 건지. 알 수는 없지만 버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친구를 설득하고 있었다. 몇 번 말했던 것처럼 스티비에겐 그 미소를 거부할 힘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하나만 약속해줘.”
“…그래? 그거야 어렵지 않지.”
무슨 약속을 할지도 모르는데 버키는 냉큼 대답부터 했다. 필사적인지. 아니면 사고가 둔한 것인지.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조금 시간이 필요했다. 스티브는 어지럽게 흩어진 브루넷을 귀 뒤로 깔끔하게 넘겨준 후에야 입을 열었다.
“거짓말하지 말고 다 말해줘야 해.”
“어떤 점에서?”
“모두다.”
“…….”
“왜 대답을 안 해?”
“스티브…난 말이지.”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죄다 터져서 아물지도 않은 입술은 자꾸 물어뜯는 바람에 빨갛게 변해있었다. 그러면서 눈을 굴려서 눈치를 보았다. 주눅이 든 모습을 볼 때마다 스티브의 뱃속에서 하이드라에 대한 증오가 피어났다. 하지만 여기서 화를 낼 수 없었다.
“난 내 친구가 가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단 말이야.”
“…….”
“그냥 그래. 내가 당한 일은 나도 모두 기억하지 못해. 몇 번이나 뇌를 지지고 약을 투여했어. 그런데 굳이 그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아.”
“하지만…….”
“그게 특히 스티브 너라면, 더 그래.”
“…….”
“이건 내가 짊어져야 할 일이니까.”
“하지만 알아야겠어.”
“…….”
버키가 고집을 부리는 만큼 스티브도 똑같았다. 서로 밀고 당겨봤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물러설 수 없었다. 둘 사이에 조율이란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철이 들 무렵부터 그렇게 어울렸던 둘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버키. 난 말이야.”
“…….”
“하이드라가 네 머릿속에 심어둔 모든 걸 다 없애주고 싶어.”
“…….”
“그러니까.”
“스티브는 걱정이 너무 많아.”
버키가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고통인지, 아니면 희망을 본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없는 표정을 바라보던 스티브는 천천히 버키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마치 뱀처럼 차갑고 찰싹 달라붙는 느낌에 스티브는 다시 한 번 흘러넘치는 감정을 꾹 참았다.
“이젠 내가 도와줄게.”
“…….”
“그러니 천천히 해보자. 할 수 있을 거야.”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어.”
“괜찮아.”
어쩐지 가슴 속에 단단히 뭉쳐있던 덩어리가 사라진 것 같았다. 오히려 끝까지 파고 내려다 모든 것을 내보인 후에야 마음이 편해졌다. 처음부터 이랬으면 우린 좀 더 다를 수 있었을까. 이런 쓸모없는 가정을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눈앞에 버키가 있고, 치료 방법을 찾아야 한다. 목적이 생기면 집중하는 것이 편했다. 그런 스티브의 얼굴을 보던 버키가 어색한 표정으로 이마에 이마를 가져다 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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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틴?”
“폐하.”
“반즈가 불안해하지 않던가. 어떻게 여기까지.”
“이목을 피하고자 조금 부지런히 움직였습니다.”
과연 최고의 군인이었다. 하긴 아무리 입단속을 시킨다 하더라도 여기저기 얼굴을 보여봤자 좋을 것이 없었다. 그늘에 숨는 것처럼 왕을 찾아온 군인은 한 가지 부탁을 전했다. 의외의 부탁에 왕은 놀란 표정으로 캡틴은 바라보았다.
“그 자료가 왜 필요한지 물어도 되겠나.”
“친구의 기억을 더듬어보려 합니다.”
“…그런가.”
“서로 필요한 일이니까요.”
“힘들 텐데.”
“어쩔 수 없죠.”
“알았네. 그쪽 자료는 우리도 가진 것이 별로 없어 조금 찾아봐야 할 것이네. 반즈 일도 있고 하니 방에 있으면 내가 믿을만한 사람을 시켜 보내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폐하.”
깍듯하게 인사를 하는 캡틴을 바라보던 왕은 기분이 이상했다. 분명 눈앞에 있는 사람은 캡틴 아메리카인데,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왜지. 반즈 때문인가. 어렴풋이 짐작을 하면서도 참 어려운 인연이라 넘겨짚었다. 최고의 군인. 오래된 전쟁 포로. 히어로. 빌런. 어쩜 이렇게 상반된 단어만 골라 가진 채 서로의 궤도에 닿기 위해 넓은 우주를 헤매고 있는 건지. 왕은 자신이 둘을 도운 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