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한계까지 몰려있던 친구는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의식을 놓아버렸다. 그 모습이 꼭 죽은 시체 같아 스티브는 와칸다로 이동하는 내내 가슴을 졸일 수밖에 없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윈터솔저가 된 버키를 만나고, 하이드라의 비밀을 알게 된 이후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다. 조금이라도 의연하게 대처하고 싶었지만, 버키를 본 순간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런 둘에게 와칸다 행을 권한 쪽은 티찰라였다. 방패도 없이 맨몸으로 친구를 둘러업고 걸어 나오는 캡틴 아메리카를 가만히 바라보던 티찰라가 둘을 불러 세웠다. 당연히 무시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한다. 그러면 쫓아가서 억지로 명령이라도 해야 하나. 이렇게 생각하던 순간 캡틴 아메리카가 티찰라를 바라보았다. 잔뜩 상처 입은 푸른 눈이 추위에 닿아 형형하게 빛났다.
“폐하?”
“내가 제안할 것이 있어 불렀네.”
“말씀하시면 됩니다.”
“…….”
“괜찮습니다.”
“그래.”
티찰라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할 말이 있지만, 일단 이 녀석을 안전하게 넘겨서 심판을 받게 해야 한다. 기다려 줄 수 있겠는가.”
“…….”
“그대의 친구에겐 해가 가지 않게 하겠네.”
“…그렇다면야.”
“그래 내 전용기 안쪽으로 들어가면 비밀 공간이 있지. 이 녀석을 인도할 때까진 그곳에 있으면 된다네. 응급 처치를 할 사람을 보내주겠다.”
“그러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군인은 딱딱하게 거절한다. 티찰라는 유난히 흔들리는 캡틴 아메리카의 표정을 그대로 읽을 수 있었다. 캡틴 아메리카의 가면을 쓴 스티브 로저스가 말을 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저 내 착각인가. 왕은 갑자기 어려운 문제를 골라잡은 기분이 들었다.
“그럼 일단 움직이지.”
“예, 폐하.”
물론 이렇게 쉽게 사람을 믿을 순 없었다. 하지만 몸이 성치 않은 버키를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은 힘들 것 같았다. 퀸젯이 있었지만, 이미 추적을 당하고도 남았을 것 같아 쉽게 사용할 수 없었다. 최대한 버키가 안전한 곳으로 피하고 싶었다. 그런 캡틴의 마음을 알기도 하듯 티찰라는 기꺼이 자신의 전용기 한쪽을 내주었다.
“좀 쉬고 있거라.”
“아닙니다. 폐하.”
“…걱정되는가.”
“안된다고 하면 폐하를 기만하는 것이 될 테니, 그렇게 말하진 않겠습니다.”
“그런가.”
티찰라는 미세하게 떨리는 군인의 목소리를 완벽하게 알아들었다. 캡틴 아메리카로서 감정을 숨기고 있지만, 친구를 걱정하는 친우로선 그렇지 못했다.
“이대로 영영 일어나지 않을까 항상 그런 생각을 합니다.”
“…….”
“예전엔 버키가 제게 해줬던 걱정입니다만…….”
“그랬군.”
“그게…아닙니다.”
“왜 그러지?”
“남자답지 못하게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하던 것이 떠올라서 그만.”
“…….”
“웃으셔도 됩니다.”
“…….”
“…괜찮습니다.”
“…….”
티찰라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계속 둘을 바라보자 약간 민망한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군인은 말을 길게 잇지 않았다. 티찰라는 예상외의 대답에 약간 놀란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누가 누굴 걱정한 것인지 다시 생각하려는 그 순간 버키의 몸이 축 늘어졌다. 마치 숨이 끊어진 것 같아 급히 코 밑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희미한 숨이 손가락에 닿고 나서야 간신히 안심했다. 가짜 혈청을 맞았지만, 그것이 죽음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스티브도 그랬고, 버키도 그랬다. 주렁주렁 매달린 수액 병에선 계속 약이 떨어져 내렸다. 깨어있는 것이 고통스러울 테니 진통제와 수면제를 같이 처방해 달라 말한 것은 자신이지만, 막상 재워놓고 보니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불편 할 테니 이리 와서 앉아있으란 소리도 극구 사양했다. 티찰라는 몇 번 권하다 입을 다물었다. 그 캡틴 아메리카가 이렇게 싸고돌만한 인물이면 분명 이유가 있겠지. 적당히 둘에 대해 듣긴 했지만, 둘 사이의 기구하고 끈끈한 운명을 모두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티찰라는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었기에, 일단은 모른척하기로 정했다.
“…버키.”
스티브의 손이 잔뜩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얼굴에 피 칠갑을 한 채 슬쩍 웃고 있던 표정이 또 아프게 살아났다. 심장에 쿡 박힌 채 움직이지 않는 거대한 파편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단단하게 박혔다. 반대쪽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무슨 감정일까. 스티브는 알 수 없었다. 분노도 아니었고, 슬픔도 아니었다. 좀 더 복잡하고 묘한 감정이었다.
“널 다시 볼 수 있어서 다행이야.”
“…….”
“버키.”
“…….”
수면제를 맞고 잠이 든 사람에게 들릴 리 없지만, 계속 이름을 불렀다. 완전히 날아간 왼쪽 팔은 쳐다볼 수 없었다. 깨끗하게 잘린 것도 아니라 군데군데 끊어진 전선에선 연신 마찰열이 일어났다. 이식한 메탈암이라 해도 신경은 살아있었다. 팔이 잘리는 순간부터 무슨 생각을 했을지 알 수 없었다. 한번이 아닌 고통을 또 받았을 것을 생각하니 심장이 저릿했다.
고통을 참는 것이 익숙했던 친구는 바득바득 발걸음을 옮기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면서 스티브를 먼저 챙겼다. 괜찮아? 그 한마디를 듣는 순간 눈앞이 뿌옇게 변했다. 누가 할 소리를. 울먹이지 않으려고 애써 천천히 한마디씩 끊어서 말을 했다.
아직 기억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친구는 그 순간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짧은 신음과 함께 한숨을 훅 토해냈다. 지칠 대로 지친 몸뚱이는 한 번에 무너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애써 잊어버리고 있던 고통이 밀려왔다. 신경이 연결된 부분이 그대로 파괴되면서 온몸을 잡아먹고 있었다. 있어야 할 것을 다시 잃어버린 버키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땅바닥을 긁었다. 결국, 진통제를 몇 번이나 맞고 수면제를 처방받은 후에야 기절하듯 잠을 잘 수 있었다.
“널 재우고 싶진 않았어.”
“…….”
“다시 못 일어날까 봐.”
“…….”
“하지만 고통스럽다는데, 내 욕심만 챙길 순 없었으니까…….”
“…….”
“날 이해해?”
“…….”
스티브의 목소리에 물기가 서렸다. 나직하게 말하는 목소리는 너무 무거웠다. 뚝뚝 떨어지는 온갖 감정은 그대로 뒤섞인 채 굳어갔다. 채 지워지지 않은 핏자국을 몇 번이나 지워보고, 얼굴을 만져봤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버키가 맞는데, 왜 이리 낯선지 알 수 없었다. 금방이라도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갈 것 같았다.
‘혼자서 생각을 거듭하면 점점 깊게 파고들어 가더라.’
스티브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분명 버키가 말을 걸었다. 하지만 무릎을 베고 누워있는 친구는 여전히 잠이 든 상태였다. 환청이라도 들었나 싶어 머쓱해졌다. 방금 들린 말은 어느 날 버키가 자신을 보며 흐르듯 한 것이었다. 혼자 속으로 삭이면 힘들다면서 어깨를 툭툭 치던 모습이 선했다.
“…버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눈을 감은 스티브가 고개를 숙이며 친구를 찾았다. 눈앞에 있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이 고통이 끝나면 우린 어떻게 될까. 답을 해줄 수 없는 질문을 자꾸 던지기만 했다. 차라리 목 놓아 울기라도 하면 이 답답함이 조금은 가실까 싶었다. 하지만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아니 울 수 없었다. 어린애처럼 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때가 언제였을까. 이런 생각을 했지만, 그것조차 너무 먼 과거의 이야기였다. 이젠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잠들기 전에 나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까.”
“…….”
“물어보려 했는데, 자려는 걸 깨울 수 없어서…….”
“…….”
“그래서 되묻지 않았어. 일어나서 이야기를 해줬으면 하는데…….”
“…….”
듣는 이 없는 일방적인 대화가 띄엄띄엄 이어졌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말은 점점 작아지더니 이내 들리지 않았다.
스티브는 꿈을 꾸었다. 어릴 적 이유도 모른 채 앓아누운 자신과 그 옆을 지키는 버키가 있었다. 느릿느릿 흑백 영화처럼 흘러가는 공간에 그저 존재할 뿐인 스티브는 과거의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괜한 말을 꺼냈던 것이 틀림없었다. 몇 번이나 제 손을 이마에 대보고, 그것도 마땅치 않은지 이마와 이마를 맞닿으면서 연신 걱정을 하던 친구는 대뜸 손가락을 내밀었다.
‘뭐야.’
‘약속해.’
‘…….’
‘건강해지란 소린 안 해.’
‘…….’
‘계속 나랑 같이 있어 준다고 약속해.’
‘계집애처럼…그게 뭐야. 됐어.’
‘안 할 거야?’
‘…….’
하지만 버키를 이길 수 없었다. 겨우겨우 손가락을 걸고 고개를 끄덕였다. 흐릿하게 남은 기억이 이리도 생생하게 꿈으로 나타나는지 알 수 없었다. 꿈속의 어린 버키는 내내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너무 따뜻해서 마냥 햇살 아래 있는 것 같았다. 어린 스티브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침부터 훌쩍 나갔다 온 남자는 침대라고 부르기도 미안한 매트리스에 걸터앉으면서 이런저런 속풀이를 했다. 물론 그 소리를 듣고 있는 에셋은 저 멀리 구석에 약간 웅크린 채 말이 없었다. 미쳐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그렇다고 미친 건 아니었다. 밥도 잘 받아먹고 불안한 행동을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직도 사람을 믿지 못하는지 저렇게 내내 날만 세우고 있었다. 좋다고 주워오긴 했는데, 저렇게 귀염성 없이 행동하면 조금 귀찮아지긴 했다.
“…내가 너 밥 챙겨주려고 여기 사는 줄 알아?”
“…….”
“살갑게 굴진 못해도 기척 정도는 내고 앉아있을 수 있잖아. 내가 너한테 밥을 해놓으라고 하냐, 벗고 침대에 누워있으라고 하냐. 어?”
“…….”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알아듣는 척 눈 굴리지 마.”
“…….”
“새끼.”
럼로우는 벗어둔 외투를 쭉 끌어당겼다. 주머니를 이리저리 휘젓자 구겨진 담뱃갑이 툭 떨어졌다. 아, 젠장. 담배 한 개비도 없는 상자를 구겨서 던져버린 남자는 그대로 매트리스에 누워버렸다. 아이고. 일부러 들으라는 듯 끙끙 소리를 내며 돌아누웠다. 여전히 구석에 웅크린 채 어둠 속에 숨어있는 녀석은 눈만 빛났다. 한쯤 맛이 간 눈이지만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예쁘긴 하다. 럼로우는 괜히 그 불안한 시선을 따라가며 눈을 맞췄다. 그럴 때마다 속눈썹을 파르르 떨면서 애써 다른 곳을 본다.
‘귀여운 새끼.’
아까까지만 해도 욕을 하고 있으면서도 속마음은 정직했다. 당장 가서 머리라도 쓰다듬어 줄까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저 무시무시한 메탈암에 그대로 얻어맞을 수 있으니 그만두기로 했다. 몸으로 벌어 먹고사는 사람이 몸뚱이를 마구 굴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하긴 기척을 지우지 말라고 하는 것도 어불성설인가.’
럼로우는 항상 그것이 궁금했다. 물론 답이 나와 있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굳이 에셋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뭉개진 뇌엔 어려운 이야기를 해봤자 전혀 소용이 없다. 몇 개월 동안 저 녀석과 씨름하면서 나름대로 얻은 교훈이었다.
“…왜.”
“응?”
“왜 쳐다봐.”
“비싼 입이 이제야 떨어지나 보네.”
“…….”
“오늘은 운이 좋군. 그 입에서 대화가 흘러나오는 것도 구경을 다 하고 말이야.”
“…….”
“또 입이 붙었어?”
놀리는 건 귀신같이 알아챈다. 입술이 비죽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물론 에셋의 표정은 늘 한결같았지만, 럼로우가 보는 시선은 조금 달랐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기도 하고, 축 처지기도 한다. 눈만 봐도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예쁜이가 심심해하니 아저씨가 놀아 줘야지.”
“…….”
“안 그래?”
“안 그래.”
“대답도 하면서, 매일 이러면 얼마나 좋아. 너 그러다가 몇 개 모르는 단어도 다 까먹는다.”
“…….”
“그러면 정말 백치가 되는 거야.”
물론 지금도 백치지만. 럼로우는 다시 한 번 외투를 뒤졌다. 분명 이쯤에. 이것저것 잡동사니를 넣은 주머니를 하나하나 다 뒤지고 나서야, 뭔가를 찾았다. 은색 포장지에 싸인 걸 들고 천천히 걸어갔다. 사실 저 녀석이 한마디라도 하는 건 어느 정도 낯선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는 표시기도 했다. 이럴 땐 좀 놀아줘야 표정이 풀어진다.
‘꼭 하는 짓도 유기견 같아서.’
화상에 일그러진 남자의 얼굴에 미소가 슬쩍 드리워졌다. 한 번 버림받고 학대당한 녀석이라 살붙이고 살기 쉽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어려울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나마 처음 루마니아로 건너왔을 때보단 많이 나아진 편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발작하는 녀석에서 얻어맞는 것보단 이런 사소한 입씨름이 더 나았다.
“내가 너 생각나서 사 왔어.”
“…….”
“단 거 좋아하잖아.”
“…….”
“안 먹으면 내가 먹고.”
“…아니야.”
“그럼 주세요. 해야지.”
“…….”
“초콜릿 주세요. 해봐. 어디서 공으로 먹으려고 해.”
“…….”
꼴에 자존심이 있어서 그런 소리는 죽어도 안 한다. 이미 눈은 럼로우 손바닥 위에 올려진 초콜릿에 고정된 주제에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어이구. 럼로우도 슬슬 오기가 발동했다. 손바닥 위에 올려진 달콤한 것이 체온에 따끈따끈해질 때까지 둘 사이에선 불꽃만 튀었다.
“고집도 세라.”
“…….”
“하긴 그런 말 할 거라곤 생각 안 했어.”
“…….”
“아. 해봐.”
“…….”
“아.”
또 불안한 눈으로 눈알을 굴린다. 입을 벌리면 곧바로 마우스피스를 물고, 곧 뇌를 지지는 기계에 앉혀진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에셋은 그 기계를 몹시 싫어했다. 그러니 남이 하는 이런 명령은 자연스럽게 거부한다. 하지만 그걸 아는 럼로우는 또 살살 에셋을 긁었다. 아. 해봐. 이 곳에 그 기계가 없다는 걸 스스로 인식해야 얌전히 말을 듣는다.
“난 아무것도 없어.”
“…….”
“싫으면 말고.”
“…….”
에셋이 눈치를 보며 입술을 살짝 벌렸다. 손가락 반절도 들어가지 않을 녀석의 입 모양을 보던 럼로우는 껄껄 웃으면서 손가락을 푹 집어넣었다. 그리곤 치열을 슬슬 쓸어줬다. 바짝 긴장한 몸이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물러서진 않았다.
“이러면 아저씨가 나쁜 짓 하는 거 같잖아.”
“…….”
“왜 그래. 사람 민망하게.”
점점 거칠어지는 숨이 손에 닿았다. 불규칙하게 오르내리는 가슴을 보아하니 당장에라도 기절할 것 같았다. 지워진 기억 속에 각인된 고통이라도 떠오르려나. 그렇게 생각했다. 당연히 이렇게 반응한다는 걸 알면서도 놀리는 걸 그만둘 수 없었다. 럼로우의 호기심과 궁금증은 조금 이상한 방향으로 비틀어 자라고 있었다. 이 남자는 에셋의 모든 반응을 궁금해했다.
“누가 잡아먹는 데?”
“…….”
“입에 묻힐까 봐 벌려주는 거잖아.”
최대한 사람 좋게 웃으려고 노력했다. 그래 봤자 우그러진 얼굴이겠지만, 화를 내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쪽이 좋았다. 에셋의 입을 벌리고 혀에 초콜릿을 놓아주었다. 이미 말랑말랑해진단 것이 혀 위에서 슬슬 녹아내렸다.
“묻히지 말고 먹으라고.”
“…….”
“맛있지?”
“…….”
불쌍한 백치는 아까 상황을 금방 잊었다. 럼로우가 손가락을 빼주자 금방 볼을 오물오물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어린애도 아니고 단 걸 퍽 좋아했다. 하긴 냉동되고 해동되는 내내 미각이 남아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깨어 있는 동안은 제대로 된 음식조차 먹이지 않았다. 최대한 짜낼 만큼 짜낸 다음 곧바로 얼려버렸다. 그러면 뭔가 먹일 필요가 없었다. 영양은 알약과 수액으로 보충했다고 들었다. 그렇게 파괴된 미각에 단 음식은 꽤 자극적인 감정을 선물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맛있어?”
“…응.”
“그래. 그래도 잘 먹으니 좋네.”
자기 덩치보다 더 큰 시커먼 녀석을 어르고 달래던 럼로우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그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기척을 내면 죽도록 맞았던 터라 쉽게 그 버릇이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 정도로 럼로우에게 날을 세우지 않는 것은 어쩌면 행운이었다. 이게 망가진 얼굴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이 백치가 뇌내 망상으로 믿고 따를 만한 사람이라 믿어버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운이 좋아.’
럼로우는 에셋이 고개를 숙인 탓에 부스스하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줬다. 머리 좀 단정하게 자르면 좋을 텐데, 머리에 날붙이를 대려는 것만 보면 발작을 해대니 쉽게 잘라줄 수도 없었다. 날이 점점 더워지는데 이 산만한 덩치를 어떻게 먹이고 씻겨야 하나 벌써 고민이었다.
“에셋. 예쁜아.”
“…….”
“내가 궁금한 게 한가지 있는데 대답해 줄래?”
“…들어보고.”
제법 똘똘하게 말을 한다. 분명 초콜릿을 먹고 기분이 좋아진 것이 틀림없었다.
“나 따라온 거 후회 안 하냐?”
“…응?”
“이 먼 곳까지 나 따라서 온 거 후회 안 하냐고.”
“…….”
백치는 잠시 우물거리는 입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들어 럼로우를 바라보았다. 상처가 처덕처덕 덧발라진 눈은 시릴 정도로 깊었다.
“아직까진.”
“그거 다행이네.”
“근데 그건 왜 물었어?”
“그냥.”
“…….”
럼로우의 대답이 간단하게 끝나자 곧 초콜릿을 먹는데 온 신경을 집중했다. 아직 자신을 믿고 있다는 뜻이었다. 남자는 속으로 껄껄 웃었다. 이 꼴을 캡틴 아메리카가 보면 어떨까. 캡틴 아메리카로서 날 죽이고 싶을까. 아니면 이 백치의 친구 스티븐 로저스로서 행동할까. 정말 궁금했다. 하지만 에셋을 쉽게 넘겨줄 생각이 없었기에, 굳이 알리지 않고 여기까지 와서 자리를 잡았다.
“예쁜아.”
“…….”
“나중에 누가 날 찾거든. 이야기 좀 잘해줘라.”
“무슨 소리야?”
“그냥 그렇게만 알아둬. 어차피 복잡하게 말해도 못 알아듣잖아.”
“…….”
“네가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는 기억 노트 한 귀퉁이에 적어놓던가.”
“…….”
“티 나게 숨기면 이 좁은 곳에선 다 보이니까.”
“…….”
에셋은 말없이 손바닥을 벌렸다. 하나로 모자라니 더 달라는 소리였다. 남자는 끌끌 혀를 차며 다 녹은 초콜릿을 꺼내 백치의 손에 쥐여주었다.
남자가 무기를 꼬드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깊은 생각을 하지 못하는 녀석에겐 어려운 미사여구는 필요하지 않았다. 애초에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것이 전부인 병기였다. 이런 백치에게 긴말을 하며 살살 구슬릴 수 있는 사람은 피어스 정도였다. 이 녀석은 긴 대화를 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처음 만났던 날도 똑 같았다. 다친 상처를 숨기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녀석을 토닥거려줄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뭐가 예뻐서? 내가 그렇게까지 해줘야 하지? 남자는 이렇게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일방적으로 얼굴을 오래 본 사이일 뿐 둘은 초면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당장 도망가지 않고 저렇게 털만 세우는 건 분명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사실 따지자면 이 녀석은 귀찮은 짐이었다. 하이드라가 관리할 때는 누구보다 잔혹한 살인 기계였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었다. 해동된 지 너무 오래되어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것은 물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저 본능이 시키는 대로 그늘에서 그늘로 옮겨 다니면서 사람들의 눈을 피할 뿐이었다.
무기가 보기에도 눈앞에 버티고 서있는 남자가 이상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윈터솔저는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 남자는 알아차렸다. 얼굴이 흉측하다거나 못 볼 꼴이라거나. 이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도대체 누구기에 내 움직임을 알아차렸지. 무기의 머릿속은 이 한 가지 생각으로 꽉 차있었다.
“뭐? 왜 그렇게 보는 거야.”
“…….”
“나도 좋아서 여기 온 게 아니야.”
“…….”
“네 녀석이 너무 시끄럽게 굴잖아. 마치 날 좀 봐달라고 하는 것처럼 움직이면서 모르는 척하기야?”
“…….”
“…이봐. 그러니까.”
영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런 표정을 읽은 남자는 혀를 쯧쯧 찼다. 이거 완전히 상해버렸구먼. 사람에게 쓰기 적당하지 않은 단어가 되는대로 튀어나왔다. 경계하고 있지만, 어딘가 부족해 보이긴 했다. 아무리 맛이 간 백치라 해도 쉽게 다가설 순 없었다. 저렇게 헐렁해 보여도 눈 깜작할 새에 목을 비틀어버릴 수 있는 녀석이었다. 남자는 일부러 손을 어깨까지 올렸다.
“나 아무것도 안 들고 있어.”
“…….”
“정말이야.”
“…….”
“네 녀석이 너무 시끄럽게 굴잖아.”
그래서 어떻게 했더라. 적당히 긴장을 풀어주고 살살 달랬다. 덩치 커다란 무기를 붙잡고 조근조근 말하는 건 성격에 맞지 않았다. 차라리 때리고 눕혀서 복종을 강요하는 편이 나았다. 그렇게 하지 않은 건 너무 불안해 보이는 눈빛 때문이었다.
“이거 원.”
“…….”
“내가 잘못한 거 같잖아. 난 그저 상처 입은 개새끼 한 마리 주우러 왔을 뿐이라고. 알아들어?”
“…….”
“경계심도 많지.”
“…….”
앞에서 주절주절 떠들기 시작하자 어지럽다는 듯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그러면서 눈을 피한다. 얼씨구. 사람이 이야기하는데 듣는 척이라도 하지. 남자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긴 이렇게 사람다운 대화를 해본 적도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그저 명령만 따르던 녀석이 이렇게 반항을 하는 것도 나름 귀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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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백치야 생각하는 것을 힘들어하니 계획을 세우고 움직이는 것은 전적으로 럼로우 몫이었다. 물론 고분고분 따라오진 않았다. 수동적이면서도 어찌나 고집이 센지. 럼로우는 그 무거운 발을 떼게 하느라 며칠 동안 끙끙 앓았다.
“제발 좀 가자. 이 멍청아.”
“…….”
“못 알아듣는 척하지 마. 다 알고 있어.”
“…….”
“여기 있으면 우리 둘 다 다시 끌려간다고. 그러고 싶어?”
“…어?”
“뭐 좋아. 널 자유롭게 하려고 놔두는 건데. 굳이 그렇게 사지로 기어들어가고 싶다면 나도 말리지 않겠어.”
“아니…그게.”
“그게 싫으면 빨리 와.”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다. 이 지긋지긋한 도시에 뭐 그리 좋은 것이 남아있다고 이렇게 미련을 가지는지 알 수 없었다. 하긴 저 멍청한 녀석이 입만 안 열었다뿐이지 머릿속은 훤했다.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
최대한 다정하고 좋은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그러면서도 발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불안한 표정으로 손을 꼼지락거리던 녀석은 저를 두고 갈까 봐 냉큼 따라붙는다. 사람을 그렇게 경계하던 녀석은 조금만 잘해주면 이유 없이 믿음을 준다. 정말 이상한 녀석이었다. 하긴 그렇게 뇌를 지지고 고문을 해댔는데, 그중에 잘해준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싶어 괜히 입맛이 씁쓸했다.
“예쁜아. 아저씨가 말하잖아. 뭐가 그렇게 맘에 안 들어서 이러는 거야. 우리가 이 도시를 떠나려고 한 것도 벌써 이주나 지났어.”
“여기…그러니까.”
“그러니까?”
“날 아는 사람이 있…는데. 그게…그러니까.”
또 말끝이 늘어진다. 분명 뭉그러진 기억을 긁어모아도 알 수 없는 답답한 마음이 가득 담겨있었다. 하지만 럼로우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저렇게 제대로 된 말 한마디 안 해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있었다. 에셋은 꼭 대신 좀 말해달라는 것처럼 럼로우는 붙잡고 늘어졌다. 왜 자꾸 어리광이 느는지. 럼로우는 혀를 끌끌 차면서 매몰차게 남자의 팔을 잡아당겼다.
“안 돼. 우린 지금 바빠.”
“하지만…….”
“어차피 이번에 떠나면 다시 안 돌아올 곳이야. 뭐가 좋다고 미련을 남겨두려는 거야.”
“…….”
“내 말이 맞지?”
“…그런가.”
“그래. 넌 내 말만 들으면 적어도 굶지 않고 누워서 자게 해줄게. 멍청한 백치야.”
“…….”
“알았지? 내 말만 들어.”
“…….”
대답이 없는 것은 아마 긍정의 뜻 일 거다. 이 녀석은 늘 그랬고, 그래 왔으니까. 럼로우는 입술 사이로 욕이 나오려는 것을 꾹꾹 참았다. 이 바보 같은 놈은 눈앞에 있는 자신과 캡틴과의 관계가 어떤지도 모르는 채 내내 친구를 찾으면서 칭얼댔다. 하긴 둘 사이의 관계를 팔아 이 녀석의 호감을 얻은 것은 럼로우 자신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 눈앞에서 징징거리는 건 듣기 싫단 말이야.’
럼로우는 묘한 짜증에 사로잡혔다. 애초에 그 말을 하지 말걸 그랬나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 말 하나 믿고 이렇게 의지를 하는데 어떻게 아니라고 하겠는가. 애써 마음을 다잡으려 했지만, 연신 캡틴 아메리카, 아니 스티븐 로저스를 찾는 백치가 영 마음에 차지 않았다.
“백치야.”
“…응?”
“그만 좀 징징거려. 주변 사람들이 다 너 쳐다보는 거 안 보여?”
“난…그냥.”
“그래. 일단 이 지옥 같은 곳을 벗어나서 이야기하자. 그럼 다 들어줄게. 알았지?”
“그래.”
“아이고, 착하다. 정말.”
정말이란 단어에 악센트를 줘가면서 꾹꾹 누른 발음으로 말하던 럼로우는 그나마 멀쩡한 손을 들어 녀석의 머리를 툭툭 쳤다. 쓰다듬어주긴 눈이 너무 많았다. 이런 접촉에도 마냥 마음이 편한지 덩치만 커다란 백치는 남자 뒤를 졸졸 따라왔다.
그렇게 루마니아로 데리고 온 것까진 좋았다. 물론 도시를 떠나 이렇게 멀리까지 옮겨온 것은 다 생각이 있어서였다. 그 긴 여행 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지 건너오는 내내 얌전했다. 항상 긴장하느라 밤에 제대로 잠도 못 자던 녀석이 남자의 어깨에 기댄 채 꾸벅꾸벅 졸았다. 그래 봤자 밀입국이라 더는 편하게 해줄 수 없었다. 오냐오냐하다 어깨까지 허락한 남자는 좋을 대로 놔둔 채 딱딱한 짐에 허리를 기댔다.
“얌전하니 좋네.”
얼굴을 가득 덮은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슬쩍슬쩍 넘겨주던 남자는 혼잣말을 툭툭 내뱉었다. 담배가 절실했지만, 여기서 피울 수 없었다. 이 녀석이 이렇게 그곳을 떠나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그곳에는 없는 녀석이었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비릿한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피부가 엉겨 붙은 얼굴에서 오래간만에 생기가 돌았다.
“그 고고한 캡틴이…이런 백치 녀석을 찾으려고 꽁지가 빠지게 이리저리 움직일 생각을 하니 내가 기분이 좋네.”
그러면서 버키의 볼을 토닥였다. 바짝 마른 얼굴엔 살이 하나도 없었다. 뭘 먹고 다닌 지도 알 수 없었다. 이렇게 극한 상황에 몰려서도 정신을 잃지 않고 부득불 버틸 수 있던 것은 하이드라 때문일까. 아니면 이 녀석의 정신력일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마음이 복잡해졌다. 남자는 곧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아마 네가 찾는 그 남자는 내내 널 찾아다닐 거다. 허상을 보겠지. 네 녀석이 좀 여러 군데를 쑤시고 다녔어야 말이지.”
“…….”
“그러면서 희망을 놓지 않겠지. 어딘가엔 살아있을 거라고. 안 그러냐.”
“…….”
“살아는 있겠지. 그 녀석이 닿을 수 없는 거리에.”
그리고 난 닿을 수 있고 말이야. 럼로우의 입술이 잠깐 가까워지는 것 같다가 이내 다시 멀어졌다. 그리고 비스듬하게 벌어진 입술에서 묘한 열등감이 흘러내렸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것은 부서지지도 않고 새까맣게 변해있었다. 보통 때의 무기였다면 럼로우가 입을 뗌과 동시에 벌떡 일어나는 것이 정상이겠지만, 한계까지 몰린 몸은 전원을 내리는 것처럼 기절해버렸다.
“못 듣는 게 나아.”
“…….”
“그냥 날 믿고 의지하면 되는 거다.”
❢
그리고 새집에 와서는 이곳이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주입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호감을 보였던 것이 꿈이라도 되는 양 멍청한 녀석을 내내 까칠하게 굴었다. 물갈이하는 것도 아니고, 잠투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낯선 사람을 보는 눈동자를 보는 럼로우도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뭐야. 네 녀석이 좋아서 따라와 놓고, 이젠 모르는 사람 취급하겠다 이거야?”
“…….”
“말해두겠는데, 여기서 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나가서 몸이라도 팔래?”
“…….”
“네 여권이며 위조 신분증까지 내가 다 만들어서 도와줬더니. 사람 냉대하기는.”
한바탕 소리를 지른 럼로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창문에 신문지를 붙이면서 한 손으로는 담배를 찾았다. 젠장. 어딨는 거야. 아무리 옆을 더듬어도 담뱃갑이 잡히지 않았다. 결국, 짜증이 나서 고개를 돌리니 한 손에 담뱃갑을 콱 움켜쥔 녀석이 저 멀리 웅크린 채 럼로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
“장난칠 생각 없어. 그거 이리 가져와.”
“…….”
“새끼가.”
호감을 표현하려는 건지. 아니면 그저 귀찮게 굴려는 건지. 너무 단순한 뇌는 오히려 읽어내기 어려웠다. 간신히 한쪽 창에 신문지를 마저 붙인 남자가 뚜벅뚜벅 무기 앞으로 걸어갔다.
“뭐야. 왜 도망가.”
“…….”
꼭 하는 짓도 유기견 같아서 계속 애정을 갈구하면서도 자기 영역에 누군가 들어오는 것을 못 견뎌 했다. 유기견은 한번 상처가 있으므로 조심히 다뤄야 한다고 떠들던 TV 프로그램 나레이션이 들리는 것 같았다. 젠장. 병신 둘이 뭐 하는지 모르겠네. 럼로우는 그렇게 착한 인간이 라니라 저런 멍청한 놀이에 하나하나 맞춰줄 생각이 없었다.
“난 바빠.”
“…….”
“널 먹여 살리려면 잡혀도 안 되고 말이야. 그래서 이렇게 귀찮은 일까지 도맡아 하는데 왜 이렇게 귀찮게 해.”
“하지만…….”
“아, 됐어.”
“…….”
“그런 멍청한 변명을 안 들으련다.”
“…….”
“예쁜아. 에셋. 응? 아저씨 귀찮게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내가 잡혀가. 그럼 넌 또 혼자야.”
“…….”
“그래. 이렇게 얌전하면 얼마나 좋아.”
녀석이 얌전해진 것은 어쩐지 호감보다는 두려움이 먼저인 것 같지만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럼로우가 입을 꾹 다물고 노려보자 표정이 축 처졌다. 끙끙거리는 녀석에 입에 초코바를 물렸다. 뭐라도 입에 물려놓으면 조용하겠지. 아저씨 일하는 동안 그거 먹고 있어. 뒤도 돌아보지 않은 럼로우가 땅에 떨어진 신문지를 주워들었다.
‘이렇게 내버려두면 저절로 걸어오겠지. 저 녀석은 날 거부할 수 없을 거야.’
그런 생각만 했다. 뇌가 녹아내린 불쌍한 백치는 연고도 없는 곳에 와서 유일하게 아는 사람을 포기할 만큼 독하지 못했다. 조금만 윽박지르면 금세 겁을 집어먹는 주제에 뭐가 저렇게 억울한 건지. 럼로우는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남자는 이런 상황이 생길 것이라는 예상은 미처 하지 못했다. 그저 집 없이 돌아다니는 짐승 한 마리 거둔다는 느낌으로 시작한 일인데, 정신을 차려보니 수습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집 안이 엉망이었다. 생각보다 자신의 영역을 더럽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남자는 내내 미간에 주름을 굵게 새긴 채 언짢은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어쩐지 발에 먼지가 차이는 것 같고, 채 치우지 못한 유리 조각이 굴러다니는 것 같았다. 물론 집을 비울 일이 많은 용병 시절에도 돌아오면 꼭 청소부터 하곤 했는데, 지금은 집에 마냥 붙어있는 백수인데도 이 꼴을 하고 살고 있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스트레스가 쌓인다. 그리고 그 스트레스가 폭발하면 꽤 커다란 소란을 만들곤 했다.
“정말 계속 이럴 거야?”
“…….”
“에셋. 이쁜아. 내가 지금 너한테 말을 하고 있잖아.”
“…….”
“뇌가 지져지더니 이젠 귀도 망가져 버린 건가?”
“…….”
“새끼.”
럼로우가 짧게 욕을 내뱉었다. 그리곤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의자를 끌었고, 팔로 식탁을 콱 내려치면서 앉았다. 둘 사이에 놓인 컵이 가늘게 울었다. 한 입도 마시지 않은 우유가 이리저리 출렁거렸다. 꽤 시끄러운 소리가 났지만, 식탁에 앉아있는 시커먼 인영은 움직이지 않았다.
“왜 안 먹는 건데.”
“…….”
“내가 못 먹을 걸 줬어? 거기에 먹고 뒈지는 약이라도 탔나? 그것도 아닌데 왜 주는 대로 안 처먹고 이렇게 고집을 피워.”
“…….”
“내가 널 데려온 건 불쌍 해서지 상전으로 모시겠다는 뜻은 아니야.”
“…….”
“알아들었어?”
대답이 돌아올 리 없었다. 꼭 이럴 땐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처음이야 그 깜찍한 연기에 속아 넘어갔지만 이젠 봐줄 생각이 없었다. 듣는 둥 마는 둥 멍한 눈은 초점이 나간 채 저 멀리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술이 가늘게 떨리더니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덥수룩하게 자린 머리카락을 바라보던 럼로우는 결국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머리채를 휘어 감았다. 튼튼한 몸이 볏짚처럼 휙 넘어갔다. 머리카락이 뚝뚝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왜 밥을 안 먹고 시위 질이냐고 물었잖아.”
“…….”
“수저로 떠서 입에다 넣어줄까?”
“…….”
“못 먹는 걸 준 것도 아니고. 평범한 우유일 뿐이잖아.”
“…….”
“괜히 주워왔어.”
이럴 때마다 럼로우는 폭언을 퍼부었다. 하긴 억지로 끌고 온 것도 아니었다. 그냥 같이 가자고 조금 꼬드겼을 뿐인데 쫄래쫄래 따라온 녀석이 잘못했다. 그래도 제 손으로 거둔 짐승이라 잘 대해주려 했는데 꼭 이렇게 큰소리를 내게 한다. 머리채를 한 번 더 휘어잡으니 목 안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기견 주제에 어디서 주인한테 이를 드러내려고.”
“…….”
“주인이 생겼으면 알아서 얌전하게 행동할 것이지.”
“난…….”
겨우 입을 열었다. 어지간히 비싼 입이라며 럼로우가 코웃음을 친다. 저 꾹 다문 입술이 언제쯤 열리나 궁금했었다. 에셋이 말을 하려 하자 럼로우의 손이 자연스럽게 턱을 향했다. 턱을 쓰다듬으면서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와 동시에 파르르 떨리는 볼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래. 계속 말해봐.”
“난…우유가 싫어.”
“하.”
맥빠진 소리에 럼로우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편식을 할 군번인가 했다. 돈 한푼 벌어오라고 하지 않고 예쁘게 집에서만 키워주고 있는데, 유기견이 제 주제를 모르고 칭얼거린다. 하긴 뇌가 지져져서 제대로 된 대화조차 하지 못하던 녀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놀라 자빠질 만큼 엄청난 변화였다. 하지만 지금은 타이밍이 나빠도 너무 나빴다.
“그래서?”
“우유는 안 먹을래.”
“그리고?”
“이후에도 먹고 싶지 않아.”
두 사람 사이에 있던 컵은 어느새 두 사람 앞에 놓여있었다. 럼로우는 제법 당돌한 소리를 듣고 나니 어쩐지 이 불쌍한 유기견이 귀여워졌다. 럼로우의 손이 턱에서 머리 위로 올라갔다. 그래. 그래. 몇 번 쓰다듬던 손길은 부드러웠지만, 소름이 돋았다. 그 순간 불안하게 흔들리던 유리잔이 넘어갔다. 우유가 식탁 위에 흐르고 굴러간 유리컵은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귀엽다 하니까 눈에 보이는 것이 없구나.”
“…….”
“우리 이쁜이가 오늘을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을까.”
사실 럼로우는 그저 화풀이하고 있었다. 보통 때라면 이 정도 칭얼거림은 오냐오냐하면서 넘어갈 수 있었다. 그깟 우유 한잔 안 마신다고 저 튼튼한 몸이 당장 죽어 넘어가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저 녀석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마음에 안 들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 않았다. 그냥 화를 내는 남자는 몸속에 간신히 잠재워둔 불씨가 다시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제발 조용히 좀 살아.”
“…난.”
“말대답 하지 마.”
“…….”
“그래 그냥 이렇게 있어.”
럼로우의 손이 머리에서 목으로 넘어간다. 노골적으로 목덜미를 주무르면서 명령을 한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등에서 허리고 다시 엉덩이까지 내려갈 것이 번했다. 버키는 자신이 앉아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식탁을 축축하게 적힌 우유에서 비릿한 냄새가 났다.
“우유는…싫어.”
“나도 네가 싫다.”
“…….”
버키의 속을 알 리 없는 럼로우는 자꾸 맞불을 놓았다. 버키는 버키대로 할 말이 많았다. 우유만 보면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러면 자꾸 머릿속에 희생자들이 찾아왔다. 억지로 입안으로 흘러들어 가는 우유에선 비릿하다 못해 피 냄새가 났다. 고개가 젖혀진 채 코와 입으로 쏟아지는 액체를 거부할 수 없었다. 물론 이런 고통을 똑똑하게 정리해 말할 정신이 없었다. 몇 번 이렇게 거부하다 보면 어느샌가 왜 무서워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게 된다. 몸의 기억으로만 남은 것은 몇 번이고 되돌아왔다.
“됐다. 그만하자.”
“…….”
“우유가 싫다니 억지로 먹이진 않겠어.”
“…….”
당장 뺨이라도 칠 기세였던 남자는 갑자기 다정해진 말투로 말을 걸었다. 이럴 때마다 버키는 휙휙 바뀌는 상황을 따라가지 못해 멍해진다. 조각난 뇌를 열심히 굴려서 따라가도 어느새 저만큼 앞서간 남자는 말로 채근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도 이 멍청한 뇌가 대답을 못할 테니까.”
“…….”
“이 나이 먹고 편식 투정 받아주는 것도 우습고 말이지.”
“그게…….”
“됐어. 별로 듣고 싶지 않아.”
“…….”
또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냥 한마디 해도 될 텐데, 이 불쌍한 백치는 남이 조금만 소리를 지르면 금방 움츠러들었다. 힘이 훨씬 센 주제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몸에 새겨진 억압의 흔적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그런 백치의 습성을 잘 아는 럼로우는 껄껄 웃으면서 녀석을 가지고 놀았다.
“불쌍한 예쁜아. 왜 그렇게 심술이 난 거야.”
“…….”
“하긴 그걸 알았으면 우리가 이러고 있지도 않겠지.”
“…….”
“병신끼리 잘 좀 부대끼고 살아보자니까 꼭 이렇게 큰소리를 내게 만들어.”
“…….”
“다음부터는 우유 말고 다른 걸 사올게. 그럼 된 거지?”
“…….”
“싫으면 코로 우유를 먹여버리겠어.”
“아냐…고마워.”
“엎드려서 절 받는 것도 기분이 찝찝하네.”
럼로우라면 정말 말하는 대로 할 것 같아서 백치는 냉큼 대답한다. 아, 우유 비린내. 럼로우는 투덜거리며 수건을 가져와 식탁에 엎질러진 우유를 닦았다. 바닥에 떨어져 산산이 조각난 유리컵도 치우고, 마른 수건으로 식탁을 한 번 더 정리했다. 그래도 비린내가 사라지지 않는지 연신 혀를 찼다. 그리곤 잠시 우두커니 서서 에셋을 바라보았다.
“흠.”
“…….”
다시 새로운 유리컵을 꺼낸다. 그리고 냉장고를 열었다. 럼로우가 움직이는 소리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하던 녀석은 뒤로 남자가 다가오자 금방 움츠러들었다. 에셋의 볼과 어깨 사이로 팔이 쭉 뻗어 나갔다. 탁. 짧고 단단한 소리와 함께 컵이 같은 자리에 놓였다. 럼로우는 백치의 볼을 한 번 토닥거리곤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다시 두 남자 사이에 컵이 생겼다.
“우유 아니야.”
“…….”
“마셔.”
“…….”
“에셋. 안 들려? 내가 말하잖아.”
“…….”
“어서.”
별것 아닌 말이었지만, 에셋은 거부할 수 없었다. 홀린 것처럼 컵을 집어 들었다. 오렌지 냄새가 확 풍기는 불투명한 액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멀쩡하게 오렌지 주스가 있는데 굳이 몇 번이나 거부한 우유를 내놓은 이유는 뻔했다. 럼로우는 에셋을 길들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