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칠 수 없을 만큼 큰 불길에 반쯤 타버렸다 간신히 살아남은 남자는 자기 몸 하나 건사하는 것도 힘들었다. 아직도 해가 지기만 하면 코에서 탄 냄새가 났다. 비릿한 피 냄새와 온몸에서 흘러내리는 고약한 냄새의 진물. 그리고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끔찍한 고통이 주위를 맴돌았다. 꿈인가 싶어 몸을 더듬어보면 끔찍한 현실만 만져졌다. 이런 상황에 다른 놈한테 눈이 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과거 일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잊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계속 잊지 못하면 욕하면서 되씹기라도 할 텐데, 꼭 찝찝할 만큼 갑자기 기억이 살아올라 왔다. 어땠더라. 이럴 땐 아주 조금 생각에 잠기곤 했다.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다친 놈이 병원에는 어떻게 도착했는지 알 수 없었다.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런 거 알아봤자 뭘 할까. 남자는 항상 그런 생각을 했다. 좋지도 않은 과거 따위 알아낸다고 당장 도망자 생활이 편해지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예전이 편했다는 건 아니지.”
갑자기 담배 맛이 입안에 맴돌았다. 씁쓸하고 독한 연기로 폐까지 꽉 막아버리면 좀 시원할까 싶었지만, 손안엔 아무것도 없었다. 젠장. 도망자 신세가 된 것도 억울한데 담배 한 개비도 마음대로 필 수 없었다. 이럴 땐 누굴 욕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병원에서 기어 나온 후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아프기도 아팠고, 제대로 치료를 하지 못한 상처는 날로 엉망이 되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최대한 눈을 피한 곳에 있어야 했다. 멀쩡한 상태로 돌아다녀도 의심을 사서 받을 판에, 몸이 반쯤 타고 남은 놈이라면 더했다. 의심하지 않는다 해도 세상엔 항상 착한 누군가가 걸어 다닌다. 그런 사람이 남자를 불쌍하게 여겨 손이라도 잡아 이끈다면 어떻게 될까. 분명 병원으로 가겠지. 하지만 간신히 그 끔찍한 곳에서 도망쳐 나왔는데 또다시 병원 침대에 묶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것은 사양이었다.
사실 돈이 없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하이드라 스파이 질을 하며 꾸역꾸역 모아둔 돈은 아직 무사했고, 병원비를 내지 못할 정도도 아니었다. 하지만 남자는 그 돈을 병원비 따위로 날리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죽고 말지.’
남자는 날이 갈수록 비관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때. 언제라고 해야 할까. 하이드라에 처음 들어갔을 때. 그것도 아니면 쉴드에 들어와서 그 곱상한 얼굴을 처음 봤을 때라고 해야 할까. 쓸데없는 기억을 많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이 이상 생각하는 것도 귀찮아서 결국 그만두었다.
“살다 보면 살아지는 거니까.”
죽기 싫으면 살아야 한다. 남자는 조직에 들어간 이후부터 늘 이런 생각을 했다. 살다 보면 사는 것일 테고, 그러다 죽으면 죽는 것이 될 테지. 삶에 대한 미련은 딱 이 정도면 충분했다. 아무리 아등바등 기어올라도 한계가 있었다. 최전선에서 방탄조끼에 총이나 들고 구르던 놈이 말단 부하들이라도 휘두를 수 있는 이 정도 위치까지 올라온 것이 기적이었다. 이 빌어먹을 조직은 조금만 과한 꿈을 꾸면 그대로 목을 잘라버린다. 그래서 더는 올라가지 못한 곳을 쳐다보기보단 있는 자리에서 한 줌 권력을 쥐고 사는 쪽을 택했다. 남자는 몇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그 자리에 조금씩 익숙해졌다.
“내가 진짜 죽을 때가 됐나. 옛날 생각이 나는군.”
이런 말을 해도 사실 죽지 않았다. 그 끔찍한 사고에서도 어떻게 질긴 목숨을 붙잡고 살아남았다. 쓴 입맛을 다시던 남자는 다 죽어가는 손을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어쩐지 그 상황이 너무 처량했다. 얼굴은 푹 숙인 채 최대한 어둠에 붙어 걸었다. 이렇게 걷다 밤이 되면 조금 나았다. 하염없이 걸음을 옮기던 남자는 가로등 불빛조차 들지 않는 골목 안쪽으로 꾸역꾸역 걸어 들어갔다. 밝은 곳보단 어두운 곳이 나았다.
귓가엔 자꾸 환청이 들렸다. 빌딩이 무너지는 소리부터 철근이 구부러지는 소리. 누군가의 뼈가 부러지는 소리까지. 온갖 끔찍한 소리가 엉켜서 귀에 들러붙었다. 멀쩡한 팔로 귀를 세게 문질렀지만 변한 것은 없었다. 제기랄. 낮게 욕을 내뱉으면 찬바람이 냉큼 그 단어를 물어갔다.
“…음?”
남자는 뭔가 이상한 듯 어둠이 깔린 골목 안쪽을 바라보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지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항상 죽음에 노출되어 살아온 남자는 조금 달랐다. 남보다 삶에 예민했고, 사소한 것에도 의심이 많았다.
“…뭐야.”
그런 마음과 다르게 입에선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툭 흘러나왔다. 아닌척하지만 한껏 긴장한 몸에선 살기가 풀풀 흘러나왔다. 조금 멀쩡한 손으로 옷 안쪽에 숨겨둔 나이프를 쥐었다. 눈에 띄는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누군가 자신을 노린다면 말이 달라졌다.
“…지금이라도 아무것도 모른다 하면 그냥 지나가지.”
“…….”
“이봐. 다 보인다고. 그렇게 숨죽이고 있어도 말이지. 내가 직업상 밤눈이 좀 밝아. 어?”
“…….”
“서로 좋게 끝내는 것이 낫지 않아?”
“…….”
여전히 답이 없었다. 뭔가 움직이는 것은 확실했다. 공격의 신호인지. 아니면 도망가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남자가 어둠을 찾아 이 후미진 곳까지 들어온 만큼 저쪽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예를 들면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라던가. 아니면 뭔가 미친놈이던가. 이런 곳에서 숨을 죽인 채 숨어있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서로 잘 해결하자고. 안 그래?”
“…….”
“젠장.”
몸도 성치 않은데 이렇게 일이 또 꼬이고 말았다. 괜한 사건을 만들어 구설수에 오르고 싶지 않았다. 몸에 있는 상처가 나으려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었다. 오그라든 피부를 깨끗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고통만 조금 사라질 때까지 시간이 필요했을 뿐인데. 그것도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이렇게 계속 몰아붙여 지다 결국 어딘가에 쓰러져 죽어버릴 것이 분명했다. 운이 꼬여도 이렇게 꼬일 수 없었다. 남자는 내내 욕을 내뱉었다.
“내 말 안 들려?”
“…….”
“지금이라도 서로 모른 척하고 갈 길 가는 것이 어때? 나도 꽤 바쁜 사람이란 말이야.”
“…….”
입이 붙은 놈인지. 아니면 할 말이 없는 건진. 한 번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럴수록 남자는 손에 든 칼을 꾹 쥐었다. 여차하면 한 번에 쑤셔버릴 생각이었다. 어설프게 살려두면 뒷일이 귀찮아진다는 것은 몇 번이나 겪어서 잘 알고 있었다. 한 번에 최대한 고통 없이. 이런 말이나 생각하면서 계속 주변을 살폈다.
몇 번이나 불렀지만, 전혀 듣는 것 같지 않았다. 대화를 거부한 놈을 굳이 어르고 달랠 필요는 없었다. 남자는 구겨진 캔을 신발 끝으로 밀었다. 그러다 들으라는 듯 냅다 걷어찼다. 캉. 캉. 어둠 속으로 사라진 캔은 몇 번 튀기는 것 같더니 금방 조용해졌다.
“아저씨가 좀 바빠. 그냥 넘어가자니까.”
“…….”
“…말을 안 듣네.”
이렇게 죽는 것도 자기 팔자라고 생각해야지. 경고할 만큼 했다 생각한 남자는 냉정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아무것도 아닌 척 품 안에 숨겼던 칼을 꺼내 들었다. 조금 더 다가가서 한 번에 찔러버릴 생각이었다. 한걸음. 두 걸음. 뚜벅뚜벅 거칠게 걷는 발걸음 소리가 골목을 채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히려 저 안쪽에 처박혀 있는 인기척은 점점 더 희미해졌다. 그새 소리 없이 벽을 뚫고 나갔을 리는 없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발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살짝 움직이는 걸 보니 살아 있는 건 확실했다. 꼭 어린애 달래는 투로 주절주절 떠들던 남자의 눈에서 살기가 흘렀다.
“후회하지 말고.”
“…….”
“응?”
“…….”
입이 붙었나. 투덜거리던 남자가 순간 우뚝 멈춰 섰다.
“…이럴 수가.”
꿈인가 싶어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하지만 꿈이 아니었다. 형형하게 빛나는 눈에 달이 스쳐 지나갔다. 이제야 끙끙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오랜만에 듣는 사람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