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이런 상황이 생길 것이라는 예상은 미처 하지 못했다. 그저 집 없이 돌아다니는 짐승 한 마리 거둔다는 느낌으로 시작한 일인데, 정신을 차려보니 수습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집 안이 엉망이었다. 생각보다 자신의 영역을 더럽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남자는 내내 미간에 주름을 굵게 새긴 채 언짢은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어쩐지 발에 먼지가 차이는 것 같고, 채 치우지 못한 유리 조각이 굴러다니는 것 같았다. 물론 집을 비울 일이 많은 용병 시절에도 돌아오면 꼭 청소부터 하곤 했는데, 지금은 집에 마냥 붙어있는 백수인데도 이 꼴을 하고 살고 있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스트레스가 쌓인다. 그리고 그 스트레스가 폭발하면 꽤 커다란 소란을 만들곤 했다.
“정말 계속 이럴 거야?”
“…….”
“에셋. 이쁜아. 내가 지금 너한테 말을 하고 있잖아.”
“…….”
“뇌가 지져지더니 이젠 귀도 망가져 버린 건가?”
“…….”
“새끼.”
럼로우가 짧게 욕을 내뱉었다. 그리곤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의자를 끌었고, 팔로 식탁을 콱 내려치면서 앉았다. 둘 사이에 놓인 컵이 가늘게 울었다. 한 입도 마시지 않은 우유가 이리저리 출렁거렸다. 꽤 시끄러운 소리가 났지만, 식탁에 앉아있는 시커먼 인영은 움직이지 않았다.
“왜 안 먹는 건데.”
“…….”
“내가 못 먹을 걸 줬어? 거기에 먹고 뒈지는 약이라도 탔나? 그것도 아닌데 왜 주는 대로 안 처먹고 이렇게 고집을 피워.”
“…….”
“내가 널 데려온 건 불쌍 해서지 상전으로 모시겠다는 뜻은 아니야.”
“…….”
“알아들었어?”
대답이 돌아올 리 없었다. 꼭 이럴 땐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처음이야 그 깜찍한 연기에 속아 넘어갔지만 이젠 봐줄 생각이 없었다. 듣는 둥 마는 둥 멍한 눈은 초점이 나간 채 저 멀리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술이 가늘게 떨리더니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덥수룩하게 자린 머리카락을 바라보던 럼로우는 결국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머리채를 휘어 감았다. 튼튼한 몸이 볏짚처럼 휙 넘어갔다. 머리카락이 뚝뚝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왜 밥을 안 먹고 시위 질이냐고 물었잖아.”
“…….”
“수저로 떠서 입에다 넣어줄까?”
“…….”
“못 먹는 걸 준 것도 아니고. 평범한 우유일 뿐이잖아.”
“…….”
“괜히 주워왔어.”
이럴 때마다 럼로우는 폭언을 퍼부었다. 하긴 억지로 끌고 온 것도 아니었다. 그냥 같이 가자고 조금 꼬드겼을 뿐인데 쫄래쫄래 따라온 녀석이 잘못했다. 그래도 제 손으로 거둔 짐승이라 잘 대해주려 했는데 꼭 이렇게 큰소리를 내게 한다. 머리채를 한 번 더 휘어잡으니 목 안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기견 주제에 어디서 주인한테 이를 드러내려고.”
“…….”
“주인이 생겼으면 알아서 얌전하게 행동할 것이지.”
“난…….”
겨우 입을 열었다. 어지간히 비싼 입이라며 럼로우가 코웃음을 친다. 저 꾹 다문 입술이 언제쯤 열리나 궁금했었다. 에셋이 말을 하려 하자 럼로우의 손이 자연스럽게 턱을 향했다. 턱을 쓰다듬으면서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와 동시에 파르르 떨리는 볼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래. 계속 말해봐.”
“난…우유가 싫어.”
“하.”
맥빠진 소리에 럼로우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편식을 할 군번인가 했다. 돈 한푼 벌어오라고 하지 않고 예쁘게 집에서만 키워주고 있는데, 유기견이 제 주제를 모르고 칭얼거린다. 하긴 뇌가 지져져서 제대로 된 대화조차 하지 못하던 녀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놀라 자빠질 만큼 엄청난 변화였다. 하지만 지금은 타이밍이 나빠도 너무 나빴다.
“그래서?”
“우유는 안 먹을래.”
“그리고?”
“이후에도 먹고 싶지 않아.”
두 사람 사이에 있던 컵은 어느새 두 사람 앞에 놓여있었다. 럼로우는 제법 당돌한 소리를 듣고 나니 어쩐지 이 불쌍한 유기견이 귀여워졌다. 럼로우의 손이 턱에서 머리 위로 올라갔다. 그래. 그래. 몇 번 쓰다듬던 손길은 부드러웠지만, 소름이 돋았다. 그 순간 불안하게 흔들리던 유리잔이 넘어갔다. 우유가 식탁 위에 흐르고 굴러간 유리컵은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귀엽다 하니까 눈에 보이는 것이 없구나.”
“…….”
“우리 이쁜이가 오늘을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을까.”
사실 럼로우는 그저 화풀이하고 있었다. 보통 때라면 이 정도 칭얼거림은 오냐오냐하면서 넘어갈 수 있었다. 그깟 우유 한잔 안 마신다고 저 튼튼한 몸이 당장 죽어 넘어가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저 녀석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마음에 안 들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 않았다. 그냥 화를 내는 남자는 몸속에 간신히 잠재워둔 불씨가 다시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제발 조용히 좀 살아.”
“…난.”
“말대답 하지 마.”
“…….”
“그래 그냥 이렇게 있어.”
럼로우의 손이 머리에서 목으로 넘어간다. 노골적으로 목덜미를 주무르면서 명령을 한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등에서 허리고 다시 엉덩이까지 내려갈 것이 번했다. 버키는 자신이 앉아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식탁을 축축하게 적힌 우유에서 비릿한 냄새가 났다.
“우유는…싫어.”
“나도 네가 싫다.”
“…….”
버키의 속을 알 리 없는 럼로우는 자꾸 맞불을 놓았다. 버키는 버키대로 할 말이 많았다. 우유만 보면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러면 자꾸 머릿속에 희생자들이 찾아왔다. 억지로 입안으로 흘러들어 가는 우유에선 비릿하다 못해 피 냄새가 났다. 고개가 젖혀진 채 코와 입으로 쏟아지는 액체를 거부할 수 없었다. 물론 이런 고통을 똑똑하게 정리해 말할 정신이 없었다. 몇 번 이렇게 거부하다 보면 어느샌가 왜 무서워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게 된다. 몸의 기억으로만 남은 것은 몇 번이고 되돌아왔다.
“됐다. 그만하자.”
“…….”
“우유가 싫다니 억지로 먹이진 않겠어.”
“…….”
당장 뺨이라도 칠 기세였던 남자는 갑자기 다정해진 말투로 말을 걸었다. 이럴 때마다 버키는 휙휙 바뀌는 상황을 따라가지 못해 멍해진다. 조각난 뇌를 열심히 굴려서 따라가도 어느새 저만큼 앞서간 남자는 말로 채근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도 이 멍청한 뇌가 대답을 못할 테니까.”
“…….”
“이 나이 먹고 편식 투정 받아주는 것도 우습고 말이지.”
“그게…….”
“됐어. 별로 듣고 싶지 않아.”
“…….”
또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냥 한마디 해도 될 텐데, 이 불쌍한 백치는 남이 조금만 소리를 지르면 금방 움츠러들었다. 힘이 훨씬 센 주제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몸에 새겨진 억압의 흔적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그런 백치의 습성을 잘 아는 럼로우는 껄껄 웃으면서 녀석을 가지고 놀았다.
“불쌍한 예쁜아. 왜 그렇게 심술이 난 거야.”
“…….”
“하긴 그걸 알았으면 우리가 이러고 있지도 않겠지.”
“…….”
“병신끼리 잘 좀 부대끼고 살아보자니까 꼭 이렇게 큰소리를 내게 만들어.”
“…….”
“다음부터는 우유 말고 다른 걸 사올게. 그럼 된 거지?”
“…….”
“싫으면 코로 우유를 먹여버리겠어.”
“아냐…고마워.”
“엎드려서 절 받는 것도 기분이 찝찝하네.”
럼로우라면 정말 말하는 대로 할 것 같아서 백치는 냉큼 대답한다. 아, 우유 비린내. 럼로우는 투덜거리며 수건을 가져와 식탁에 엎질러진 우유를 닦았다. 바닥에 떨어져 산산이 조각난 유리컵도 치우고, 마른 수건으로 식탁을 한 번 더 정리했다. 그래도 비린내가 사라지지 않는지 연신 혀를 찼다. 그리곤 잠시 우두커니 서서 에셋을 바라보았다.
“흠.”
“…….”
다시 새로운 유리컵을 꺼낸다. 그리고 냉장고를 열었다. 럼로우가 움직이는 소리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하던 녀석은 뒤로 남자가 다가오자 금방 움츠러들었다. 에셋의 볼과 어깨 사이로 팔이 쭉 뻗어 나갔다. 탁. 짧고 단단한 소리와 함께 컵이 같은 자리에 놓였다. 럼로우는 백치의 볼을 한 번 토닥거리곤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다시 두 남자 사이에 컵이 생겼다.
“우유 아니야.”
“…….”
“마셔.”
“…….”
“에셋. 안 들려? 내가 말하잖아.”
“…….”
“어서.”
별것 아닌 말이었지만, 에셋은 거부할 수 없었다. 홀린 것처럼 컵을 집어 들었다. 오렌지 냄새가 확 풍기는 불투명한 액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멀쩡하게 오렌지 주스가 있는데 굳이 몇 번이나 거부한 우유를 내놓은 이유는 뻔했다. 럼로우는 에셋을 길들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