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말꼬리가 늘어졌다. 하지만 긴장을 풀지 않았다. 주변에 지켜봐서 저놈의 위험성은 잘 알고 있었다. 얌전하다가도 뭔가 돌아버리면 손을 쓸 수 없다. 게다가 진정시키는 방법은 몇 가지 있지도 않았다. 진정시키길 포기하고 다시 얼리거나. 죽기 직전까지 묶어놓고 때리거나. 아니면 피어스가 직접 와서 살살 달래거나.
하지만 알고 있는 방법 중 병기 앞에 서 있는 남자가 할 수 있는 것은 딱히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성치 않은 몸으로 저 인간 병기를 대적할 자신이 없었다. 그나마 승산이 있는 건 빈틈을 노려보는 정도일까. 물론 이것도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닐 것이 확실했다.
“…….”
“널 해치려는 건 아니야.”
“…….”
“난 널 알아.”
“…….”
“음…그러니까.”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는 놈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길이 찌푸려졌다. 죽은 건 아닌데 숨도 쉬지 않는 척 널브러져 있었다. 척 보아하니 저쪽도 몸이 말이 아니었다. 자신처럼 화상을 입거나 어디 하나 날아가지 않았을 뿐 당장 죽어 자빠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오래 나와 있으면 안 되는 녀석이라 했던가. 몇 번 얼굴을 보지도 않아서인지 자꾸 가물가물했다. 하니 사실 그건 아니었다. 분명 하이드라에 있을 때 내내 신경을 썼다. 말 한번 해보지 못한 사이긴 했지만, 끝의 끝까지 가선 한 두 마디쯤 건네 봤던 것 같았다.
화염에 기억이 같이 타버리기라도 한 것이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을까.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오래 해동되어있던 녀석이 아무리 백치 같고 얌전하다 해도 쉽게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메탈암에 잡히기라도 하면 그대로 뼈가 으스러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명령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놈이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넌…누구야.”
“…….”
“누구지?”
이것 봐라. 남자의 입꼬리가 씰룩거리며 올라갔다. 아무리 뇌가 뭉개지고 지져진 병신이라 하더라도 한 줌 기억은 남아있을 거라며 멋대로 생각했었다. 적어도 하이드라 수족인 것은 알아서 경계하지 않을까. 그러면 싸우다 죽을까. 아니면 도망칠까. 이런 생각을 했었는데, 의외의 대답을 듣고 나니 맥이 탁 풀렸다. 저런 백치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호기심이 돋았다. 이런 곳에서 꼭 호기심을 누르지 못한다. 남자는 그렇게 당하고도 못 말린다며 허허 웃기만 했다. 그런 목소리에 푸른 눈이 슬며시 따라왔다.
“내가 누군지 몰라?”
“…….”
대답이 없었지만 대충 알아듣기로 했다. 어차피 저 병기는 말이 많은 타입이 아니었으니 무표정이 긍정과도 같았다. 이러고 있으니 괜히 꼬인 심사가 스물스물 기어 올라왔다. 이런 기회는 쉽게 오지 않는다. 그러면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남자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흠.’
그 곱상한 얼굴의 캡틴이 내가 이러고 있는 걸 알면 어떻게 생각할까. 여기까지 계획이 미치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당장 죽을 수 있는 상황인데 어쩐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손에 들고 있던 칼을 저 멀리 치워버렸다. 어차피 도박이었다. 도박에서 큰돈을 따려면 어지간한 위험은 떠안은 채 시작해 야했다. 여전히 막다른 골목 가장 깊숙한 곳에 몸을 숨기고 있는 녀석은 불안한 눈빛으로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내가 정말 누군지 모르겠어?”
“…….”
가늘게 고개를 젓는다. 너무 오래 나와 있어서 아주 맛이 갔군. 괜히 입맛이 썼다. 상한 것도 아닌데 눈에 초점이 없다. 삐거덕거리는 메탈 암은 둘째 치고, 멀쩡한 팔 한쪽마저 골절이 된 건지 엉망진창이었다. 옷은 어디서 주워 입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꼴에 위장은 할 생각이었는지 아무렇게나 뒤집어쓴 거적 데기가 눈에 들어왔다. 다 해진 옷 밑으로 윈터솔저 유니폼이 비죽 보였다. 입으려면 제대로라도 걸치고 있지. 하나부터 열까지 모자란 놈을 보고 있는 남자는 답답하기만 했다.
“누가 이런 거야.”
“…….”
“넌 날 모르겠지만, 난 널 알아. 그러니까 날 믿어.”
꼭 피어스가 달랠 때 하는 말투 같았다. 그 역겨운 놈이랑 똑같은 짓을 하는 자신이 너무 웃겨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어린애 같은 뇌가 쉽게 화를 낸다. 남자는 그렇게 인내심이 긴 편은 아니었지만, 조금 더 참아보기로 했다.
“난…그러니까.”
“안다니까. 캡틴 로저스의 친구잖아.”
“…….”
순간 녀석의 표정이 확 굳었다. 이런 잘못 짚었나. 남자의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알아. 그러니까…날 버키라고 불렀는데.”
“그래. 내가 널 안다고 했잖아.”
“다리 위에…그러니까. 잘 생각은 안 나지만.”
“생각이 안 날수도 있지.”
“자꾸 머리를 지져대서 잘 몰라. 그게…….”
어법과 문법이 하나도 맞지 않았다. 뭉그러진 뇌를 긁어모아 겨우겨우 인간의 단어를 말하고 있었다. 쉭쉭 쇳소리가 배어 나올 때마다 가늘게 피 냄새가 났다. 세뇌는 시간이 갈수록 풀리지만, 그만큼 불안해진다. 하지만 그런 상태라면 눈치가 제법 빨라진다. 어리숙하지만 주변에 명령을 내리거나 도와줄 만한 사람이 없다는 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랑 갈래?”
“…뭐?”
“내 꼴을 봐. 나도 피해자야. 당했다고.”
“…….”
“여기에 있어 봤자 굶어 죽기 밖에 더하겠어?”
“…….”
길고 어려운 말은 잘 알아듣지 못한다. 그래서 피어스가 다섯 살 먹은 아이 대하듯 쉬운 말로 어르고 달랬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남자는 그렇게 사려 깊고 인내심이 넘치는 사근사근한 성격이 아닐뿐더러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널 도와주겠다고.”
“하지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 불쌍한 무기는 그걸 표현할 만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단어라곤 지져진 뇌에 남아있는 한 줌이 전부였다. 어떻게든 그걸 조합해서 말을 해보려 하지만,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더 많았다.
남자는 그런 녀석의 마음을 하나하나 헤아려줄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이 녀석에게 위험을 무릅쓰고 접근한 것은 나중에 캡틴 아메리카 에게 돌려줄 한방이 필요해서였다. 얼마나 걸릴 진 알 수 없지만, 꼭 복수하려 했다. 그러면서 멘탈에 깊고 아픈 상처 조금 내주면 더 좋겠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최대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곤 했다. 물론 화상으로 우그러진 피부 때문에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여기 있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그건 싫은데.”
“그렇지? 그러니까 나랑 같이 가자.”
“하지만…여길 떠나면…아니…나는 사라져야 하는데…그게.”
“다시 뇌가 지져지고 싶은 건가?”
“아니…그건.”
그 한마디에 예민하게 반응한 눈이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남자의 거짓말은 구멍이 숭숭 뚫려있었지만, 백치는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기세를 몰아 하이드라를 들먹이며 협박을 던지니 눈을 깜빡인다. 기억은 지워졌지만, 몸이 기억하는 고통은 생각보다 심했다.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는 녀석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움직이지 않으면 그냥 포기할 생각이었다. 혼자 넘어가기도 힘든 곳을 둘이 간다는 건 더 귀찮은 일이었다. 위조 여권부터 돈과 신분증. 모두 두 배로 준비해야 했다. 게다가 남자는 억지로 데려갈 힘도 없었다. 메탈 암으로 한 번 후려치기라도 하면 뼈가 성하지 못한다.
“더 고집 피우면 나도 그만둘 거야.”
“…….”
“여기서 계속 헤매고 다니다가 모르는 사람한테 잡혀가라고. 그러면 네 인생은 계속 그렇게 꼬이는 거지.”
“…….”
젠장. 잘 숨겨뒀다가 최후의 한방으로 써먹을 생각이었는데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죽다 살아난 하이드라 앞잡이 인생이란 이렇지. 온갖 욕을 속으로 삼키며 돌아선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돌멩이를 걷어찼다. 명령을 받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백치 새끼 주제에 고집이 더럽게 세다. 피어스는 저런 녀석을 어떻게 어르고 달래면서 써먹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것도 뱃속에 능구렁이가 세 마리쯤 들어앉아야 가능한 일인 것 같아 짜증이 두 배로 솟아올랐다.
“…뭐야?”
“…….”
남자가 발걸음을 멈췄다. 어느새 뒤로 다가온 백치가 옷자락을 덥썩 잡았다. 메탈 암으로 옷을 잡자 묵직함이 그대로 전해졌다. 남자는 일부러 돌아보지 않았다.
“뭔데? 할 말 있으면 해.”
“그게.”
“난 바쁜 사람이야. 알아? 내 몸을 이렇게 만든 이 지옥 같은 곳을 조금이라도 벗어나고 싶다고.”
“이름이 뭐야?”
“뭐?”
멍청한 놈이 멍청한 소리를 한다. 갑자기 이름을 물어보니 맥이 탁 풀렸다. 하지만 어쩌랴. 물어보면 대답을 해줘야지.
“브록 럼로우. 럼로우라 불러.”
“럼로우. 스티브를 알아?”
“뭐?”
“내가…뭐라고 했지? 그…남자 알아?”
“…….”
“다리 위에서…나랑.”
잠깐 똘똘하게 말을 하나 싶었더니 또 딴소리를 한다.
“알지. 내 상사였는데.”
“상…사.”
“친했다니까.”
일방적으로. 뒷말을 씹어 삼켰다. 어차피 이 녀석은 들은 말을 내일이면 모두 까먹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갈 거야 말 거야?”
“…….”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도망을 가지도 않았다. 좋으면 따라오겠지 싶어 발을 뗐다. 저벅. 저벅. 불규칙하게 엇박자로 들리는 발걸음이 열심히 뒤통수를 잡아당겼다.
“따라 올거냐?”
“…….”
“새끼. 대답이라도 하지.”
“…….”
“그럼 가자. 솔져.”
“…….”
“아니, 널 뭐라고 불러야 하지.”
“…버키.”
“그래.”
오랜만에 맞는 대답을 했지만, 럼로우의 표정은 영 읽을 수 없었다. 덩치가 커다란 백치를 뒤에 매단 남자는 거리가 끝날 때까지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도망칠 수 없을 만큼 큰 불길에 반쯤 타버렸다 간신히 살아남은 남자는 자기 몸 하나 건사하는 것도 힘들었다. 아직도 해가 지기만 하면 코에서 탄 냄새가 났다. 비릿한 피 냄새와 온몸에서 흘러내리는 고약한 냄새의 진물. 그리고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끔찍한 고통이 주위를 맴돌았다. 꿈인가 싶어 몸을 더듬어보면 끔찍한 현실만 만져졌다. 이런 상황에 다른 놈한테 눈이 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과거 일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잊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계속 잊지 못하면 욕하면서 되씹기라도 할 텐데, 꼭 찝찝할 만큼 갑자기 기억이 살아올라 왔다. 어땠더라. 이럴 땐 아주 조금 생각에 잠기곤 했다.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다친 놈이 병원에는 어떻게 도착했는지 알 수 없었다.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런 거 알아봤자 뭘 할까. 남자는 항상 그런 생각을 했다. 좋지도 않은 과거 따위 알아낸다고 당장 도망자 생활이 편해지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예전이 편했다는 건 아니지.”
갑자기 담배 맛이 입안에 맴돌았다. 씁쓸하고 독한 연기로 폐까지 꽉 막아버리면 좀 시원할까 싶었지만, 손안엔 아무것도 없었다. 젠장. 도망자 신세가 된 것도 억울한데 담배 한 개비도 마음대로 필 수 없었다. 이럴 땐 누굴 욕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병원에서 기어 나온 후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아프기도 아팠고, 제대로 치료를 하지 못한 상처는 날로 엉망이 되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최대한 눈을 피한 곳에 있어야 했다. 멀쩡한 상태로 돌아다녀도 의심을 사서 받을 판에, 몸이 반쯤 타고 남은 놈이라면 더했다. 의심하지 않는다 해도 세상엔 항상 착한 누군가가 걸어 다닌다. 그런 사람이 남자를 불쌍하게 여겨 손이라도 잡아 이끈다면 어떻게 될까. 분명 병원으로 가겠지. 하지만 간신히 그 끔찍한 곳에서 도망쳐 나왔는데 또다시 병원 침대에 묶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것은 사양이었다.
사실 돈이 없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하이드라 스파이 질을 하며 꾸역꾸역 모아둔 돈은 아직 무사했고, 병원비를 내지 못할 정도도 아니었다. 하지만 남자는 그 돈을 병원비 따위로 날리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죽고 말지.’
남자는 날이 갈수록 비관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때. 언제라고 해야 할까. 하이드라에 처음 들어갔을 때. 그것도 아니면 쉴드에 들어와서 그 곱상한 얼굴을 처음 봤을 때라고 해야 할까. 쓸데없는 기억을 많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이 이상 생각하는 것도 귀찮아서 결국 그만두었다.
“살다 보면 살아지는 거니까.”
죽기 싫으면 살아야 한다. 남자는 조직에 들어간 이후부터 늘 이런 생각을 했다. 살다 보면 사는 것일 테고, 그러다 죽으면 죽는 것이 될 테지. 삶에 대한 미련은 딱 이 정도면 충분했다. 아무리 아등바등 기어올라도 한계가 있었다. 최전선에서 방탄조끼에 총이나 들고 구르던 놈이 말단 부하들이라도 휘두를 수 있는 이 정도 위치까지 올라온 것이 기적이었다. 이 빌어먹을 조직은 조금만 과한 꿈을 꾸면 그대로 목을 잘라버린다. 그래서 더는 올라가지 못한 곳을 쳐다보기보단 있는 자리에서 한 줌 권력을 쥐고 사는 쪽을 택했다. 남자는 몇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그 자리에 조금씩 익숙해졌다.
“내가 진짜 죽을 때가 됐나. 옛날 생각이 나는군.”
이런 말을 해도 사실 죽지 않았다. 그 끔찍한 사고에서도 어떻게 질긴 목숨을 붙잡고 살아남았다. 쓴 입맛을 다시던 남자는 다 죽어가는 손을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어쩐지 그 상황이 너무 처량했다. 얼굴은 푹 숙인 채 최대한 어둠에 붙어 걸었다. 이렇게 걷다 밤이 되면 조금 나았다. 하염없이 걸음을 옮기던 남자는 가로등 불빛조차 들지 않는 골목 안쪽으로 꾸역꾸역 걸어 들어갔다. 밝은 곳보단 어두운 곳이 나았다.
귓가엔 자꾸 환청이 들렸다. 빌딩이 무너지는 소리부터 철근이 구부러지는 소리. 누군가의 뼈가 부러지는 소리까지. 온갖 끔찍한 소리가 엉켜서 귀에 들러붙었다. 멀쩡한 팔로 귀를 세게 문질렀지만 변한 것은 없었다. 제기랄. 낮게 욕을 내뱉으면 찬바람이 냉큼 그 단어를 물어갔다.
“…음?”
남자는 뭔가 이상한 듯 어둠이 깔린 골목 안쪽을 바라보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지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항상 죽음에 노출되어 살아온 남자는 조금 달랐다. 남보다 삶에 예민했고, 사소한 것에도 의심이 많았다.
“…뭐야.”
그런 마음과 다르게 입에선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툭 흘러나왔다. 아닌척하지만 한껏 긴장한 몸에선 살기가 풀풀 흘러나왔다. 조금 멀쩡한 손으로 옷 안쪽에 숨겨둔 나이프를 쥐었다. 눈에 띄는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누군가 자신을 노린다면 말이 달라졌다.
“…지금이라도 아무것도 모른다 하면 그냥 지나가지.”
“…….”
“이봐. 다 보인다고. 그렇게 숨죽이고 있어도 말이지. 내가 직업상 밤눈이 좀 밝아. 어?”
“…….”
“서로 좋게 끝내는 것이 낫지 않아?”
“…….”
여전히 답이 없었다. 뭔가 움직이는 것은 확실했다. 공격의 신호인지. 아니면 도망가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남자가 어둠을 찾아 이 후미진 곳까지 들어온 만큼 저쪽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예를 들면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라던가. 아니면 뭔가 미친놈이던가. 이런 곳에서 숨을 죽인 채 숨어있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서로 잘 해결하자고. 안 그래?”
“…….”
“젠장.”
몸도 성치 않은데 이렇게 일이 또 꼬이고 말았다. 괜한 사건을 만들어 구설수에 오르고 싶지 않았다. 몸에 있는 상처가 나으려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었다. 오그라든 피부를 깨끗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고통만 조금 사라질 때까지 시간이 필요했을 뿐인데. 그것도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이렇게 계속 몰아붙여 지다 결국 어딘가에 쓰러져 죽어버릴 것이 분명했다. 운이 꼬여도 이렇게 꼬일 수 없었다. 남자는 내내 욕을 내뱉었다.
“내 말 안 들려?”
“…….”
“지금이라도 서로 모른 척하고 갈 길 가는 것이 어때? 나도 꽤 바쁜 사람이란 말이야.”
“…….”
입이 붙은 놈인지. 아니면 할 말이 없는 건진. 한 번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럴수록 남자는 손에 든 칼을 꾹 쥐었다. 여차하면 한 번에 쑤셔버릴 생각이었다. 어설프게 살려두면 뒷일이 귀찮아진다는 것은 몇 번이나 겪어서 잘 알고 있었다. 한 번에 최대한 고통 없이. 이런 말이나 생각하면서 계속 주변을 살폈다.
몇 번이나 불렀지만, 전혀 듣는 것 같지 않았다. 대화를 거부한 놈을 굳이 어르고 달랠 필요는 없었다. 남자는 구겨진 캔을 신발 끝으로 밀었다. 그러다 들으라는 듯 냅다 걷어찼다. 캉. 캉. 어둠 속으로 사라진 캔은 몇 번 튀기는 것 같더니 금방 조용해졌다.
“아저씨가 좀 바빠. 그냥 넘어가자니까.”
“…….”
“…말을 안 듣네.”
이렇게 죽는 것도 자기 팔자라고 생각해야지. 경고할 만큼 했다 생각한 남자는 냉정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아무것도 아닌 척 품 안에 숨겼던 칼을 꺼내 들었다. 조금 더 다가가서 한 번에 찔러버릴 생각이었다. 한걸음. 두 걸음. 뚜벅뚜벅 거칠게 걷는 발걸음 소리가 골목을 채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히려 저 안쪽에 처박혀 있는 인기척은 점점 더 희미해졌다. 그새 소리 없이 벽을 뚫고 나갔을 리는 없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발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살짝 움직이는 걸 보니 살아 있는 건 확실했다. 꼭 어린애 달래는 투로 주절주절 떠들던 남자의 눈에서 살기가 흘렀다.
“후회하지 말고.”
“…….”
“응?”
“…….”
입이 붙었나. 투덜거리던 남자가 순간 우뚝 멈춰 섰다.
“…이럴 수가.”
꿈인가 싶어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하지만 꿈이 아니었다. 형형하게 빛나는 눈에 달이 스쳐 지나갔다. 이제야 끙끙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오랜만에 듣는 사람 목소리였다.
짧은 대화가 끝나고 캡틴 아메리카는 병원에서 빠져나왔다. 나타샤도 말려보고, 옆에 있던 팔콘도 한마디 거들었지만 스티브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항상 그래서 익숙하다는 듯 나타샤가 어깨를 으쓱 올려 보이며 반걸음 쯤 뒤로 물러섰다.
병원에서 돌아온 이후로 스티브는 항상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날짜는 착실하게 달력을 넘기고 있었지만, 스티브의 머릿속 한 구석은 헬리 케리어가 폭발하던 그 날에 잠시 멈춰있었다. 캡틴 아메라카로 활동하는 동안 잊지 못하는 사건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길을 걸어가다 문득 생각이 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쩔 수 없이 멈춰 서서 눈을 감고 한숨을 길게 쉬어야 했다. 그럴 때마다 저릿하게 뭉쳐진 심장이 아프게 삐걱대곤 했다.
버키. 스티브는 더는 부를 수 없는 친구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부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입에서 나온 이름은 찬 공기에 그대로 얼었다가 이내 부서져 내렸다. 눈앞에서 삽시간에 하얗게 바스러지는 단어는 바람에 날려 공중으로 흩어졌다. 스티브가 아무리 이름을 불러도 친구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버키. 버키 반즈.’
스티브는 정신을 차린 그 순간부터 버키를, 원터솔져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헬리 케리어가 침몰하던 날 그렇게 죽이려고 했던 캡틴아메리카를 굳이 물 밖으로 끌어올린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이후로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마치 그대로 하늘에 녹아내린 것처럼 사라졌다.
“버키.”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아직도 정하지 못했다. 윈터솔져가 아닌 버키 반즈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한다면 솔직히 쉽게 입을 뗄 수 없을 것 같았다. 죽은 줄 알고 살아왔다. 그 높이에서 떨어져서 살아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고, 수색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스티브 로저스의 친구는 그곳에서 살아남았다. 하이드라의 실험체로 끌려가 정신도 차리지 못한 사이에 강철로 된 팔을 이식받았다.
그것도 부족해서 강제로 냉동 수면을 취하게 했다. 죽지못해 살아있는 친구를 필요할 때마다 냉동된 몸을 끄집어내 멋대로 움직였다. 기억도 지우고, 과거도 지워버렸다. 태엽이 떨어진 인형처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보통은 냉동된 상태로 지내지만, 해야 할 일이 많아 가끔 오랫동안 깨어있을 때도 있었다고 했다.
원터솔져는 때때로 자신에 대해 반문하곤 했다. 물론 누구도 속 시원한 답을 주지 않았다. 윈터솔져가 명령받은 일 외에 다른 곳에 의문을 품을 때마다 쓸데없는 것이 묻어왔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언제나 비슷한 수순이었다. 브레인 워싱을 받기 위해 의자에 앉곤 했다.
“…….”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마우스피스 사이로 새어나오는 친구의 비명이 들리는 것 같아 눈을 질끈 감았다. 버키에 관한 서류를 본 것을 잠시 후회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윈터솔져에 대해 알지 않으면 영영 버키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더는 친구가 망가지기 전에 찾아야 했다. 예전에 그가 자신을 돌봐주었던 것처럼 이번엔 자신이 버키를 찾아가 안아줄 차례였다.
하지만 쉴드도 무너지고, 퓨리 국장도 죽은 것으로 된 이 마당에 쉽게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나타샤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캡틴 아메리카인 자신도 원치 않은 휴가를 받은 상태였다. 점점 더 추워지는 밤이 야속하기만 했다.
무거운 발걸음이 저 멀리 사라지고 텅 빈 거리엔 나무에서 떨어진 늦은 낙엽만 바람에 날려 굴러다녔다.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여기저기 엉켜 들었다
(중략)
모처럼 쉬는 날이었다.
온종일 버키를 찾아 헤맸던 스티브가 채 잠에서 깨기 전에 고양이가 침대 위로 훌쩍 뛰어 올라왔다. 익숙하게 침대 안쪽으로 걸어가 스티브를 깨우기 시작하던 고양이가 가늘게 울었다. 귓가에서 들리는 고양이 특유의 울음소리에 눈을 뜨자 시선 가득 검은 털 뭉치가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손을 들자 머리를 들이밀며 슬슬 비비기 시작했다.
“버키, 왜 그래.”
“…….”
“물이 떨어졌나.”
한참 동안 동물의 따끈함을 느끼던 스티브가 일어나자 곧 흥미가 떨어진 것인지 홱 돌아섰다. 스티브가 밖으로 나와서 사료와 물을 살펴보았지만 떨어지지 않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소파 위에서 그루밍을 하고 있는 녀석을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기왕 일어난 김에 물그릇을 비우고 새 물을 채워주었다. 그새 다가와서 몇 번 물을 핥아 먹은 녀석이 또 종아리에 달라붙어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버키 왜 그래?”
“…아우응.”
“이상한 녀석이네.”
어쩐지 하루 내내 치대는 녀석이 스티브를 귀찮게 했다. 보통 때면 옆에 굴려준 공 하나 가지고도 잘 놀던 녀석이었는데, 몇 번이나 장난감에 흥미를 잃었다. 그리고 나선 소파 위로 뛰어 올라와 스티브의 무릎에 당당히 자리를 잡았다.
“버키. 지금 일하잖아.”
필요한 것이 있을 때는 말도 잘 알아듣고 착하게 굴더니 오늘은 왜 이렇게 귀찮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손에 들고 있던 볼펜은 버키의 맹렬한 공격으로 인해 바닥으로 떨어졌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볼펜을 바라보던 스티브는 결국 반대쪽 손으로 잡고 있던 지도를 마저 내려놓았다.
잠깐 놀아주면 괜찮겠지 싶어 소파에 편하게 기댄 채 원하는 만큼 놀아주었다. 얌전히 웅크리고 누워있나 싶더니 어느새 창문 앞으로 쪼르르 달려가 앉아있었다.
“밖에 나가려고?”
“……”
“같이 산책하러 갈까?”
“…….”
귀를 쫑긋거리며 돌아보는 녀석의 얼굴을 보자마자 원하는 것을 제대로 짚었다 생각했다.
문을 열어주자마자 쏜살같이 뛰어 나가는 녀석을 두 번 정도 소리쳐 부른 뒤 스티브는 거실 전등을 껐다.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니 저만큼 앞으로 뛰어간 버키가 담장 위에 올라앉아 있었다. 어둑하게 땅거미가 내린 거리를 천천히 걷기 시작하자 조금씩 둘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다.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오자 버키는 담장에서 훌쩍 뛰어내려서 앞으로 뛰어갔다.
“…….”
분명 나타샤한테 들었을 때 고양이는 이런 느낌이 아니었다. 일방적으로 스티브를 재촉하는 산책이긴 했지만, 썩 나쁘지 않았다. 한명의 사람과 한 마리의 동물이 머물고 있는 집 인근엔 커다랗게 조성된 공원이 있었다. 보통 뛰어서 갔다면 얼마 걸리지 않았을 거리지만 오늘은 조금 시간이 지체되었다. 스티브는 몸을 푸는 것처럼 가볍게 뛰면서 버키를 뒤쫓아 왔다.
“…버키?”
순식간에 어둠이 흘러내렸다. 익숙한 기시감에 스티브는 잠시 허리를 굽히며 멈춰 섰다. 순간 눈앞에 스쳐 지나간 환영은 한참 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버키.’
이렇게 버키를 찾았던 적이 있었다. 눈앞에 어른거리는 그 날의 기억은 갑자기 살아나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어느새 넓은 공원 어딘가로 사라진 녀석은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몸을 풀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기다렸지만, 녀석은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밤이 찾아오고 드문드문 별이 돋아났다.
하나둘 사람들이 돌아가기 시작하자 공원은 텅 비어버렸다. 스티브는 참을성 있게 버키를 기다렸다. 하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며칠 동안 마음대로 나가 놀곤 했던 동물이라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뭉친 것처럼 답답했다. 그렇다고 해서 밤새도록 공원에서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스티브의 걱정과 다르게 언제나 집까지 무사히 찾아오는 똑똑한 녀석이니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둘이서 나간 길을 스티브 혼자 걸어왔다. 유난히 돌아오는 길이 길게 느껴진 것은 그저 기분 탓일 거라 생각했다. 눈앞에서 사라지는 거나 문 앞에서 배웅하는 건 비슷한 일이었지만, 한순간 온몸에 느껴진 허탈감은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
하루가 지나도 버키가 돌아오지 않았다. 애써 침착한 척 지도와 볼펜을 들고 분주하게 집안을 오가던 스티브는 결국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당장에라도 찾으러 나가고 싶었지만, 급히 걸려온 전화 한 통에 어쩔 수 없이 오토바이에 몸을 실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돌아오면서 찾아봐야겠네. 공원에서 멀리 안 갔으면 좋겠건만.’
버키에 대한 정보를 알아냈다고 나타샤에게서 온 짧은 연락이었다. 이 부근에서 이상한 차림의 남자를 목격한 사람들이 있다고 하네요. 두 번 물을만한 시간도 없었다. 정보만 넘겨주고 전화를 끊어버린 덕택에 스티브는 일단 그곳으로 달려가야만 했다.
결국 스티브에게 넘어온 정보도 허탕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얻은 정보라 반쯤은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언제나 절망으로 바뀌어 켜켜이 가슴에 쌓이곤 했다. 며칠 전에 그런 남자를 분명 봤다는 소리까지는 확인할 수 있었지만, 그 이후 더는 보이지 않았다는 말이 더해졌다. 거리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이 걱정스러워 말을 걸어보았지만,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고 급하게 도망치듯 몸을 숨기려고 했다는 말도 덧붙었다. 사람들에게 얻어낸 정보가 하나 둘 쌓여갈수록 스티브는 직감적으로 그 남자가 버키라고 확신했다.
‘여기 있었던 건가. 버키.’
천하의 나타샤도 제대로 된 정보를 알아내기 힘들 정도로 꼭꼭 숨어버린 사람을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사실 숨을 의지가 없어서 더 찾기 힘들 수도 있었다. 단 한 순간도 같은 곳에 머무르지 않고 정처없는 걸음으로 움직이고 있을 수도 있었다. 뭘 먹고 어디서 자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어디서는 멀리서 봐도 위협적인 시커먼 옷을 입고 다닌다고 했고, 이번에 만난 목격자는 다 떨어져 가는 후드에 모자를 쓰고 다닌다고 했다.
스티브의 걱정은 더 깊어졌다. 하지만 이곳에 버키가 없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항상 한발 늦게 도착하는 스티브를 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버키는 이미 다른 곳으로 사라지곤 했다. 기억이라도 찾았으면 좋겠지만, 제대로 된 보살핌조차 받지 못하는 몸을 이끌고 다니는 사람에게 그런 생각은 사치에 불과했다.
“오늘도 허탕이군.”
여기서 하루를 보낼 수 없어 결국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스티브의 머릿속은 나타샤가 넘겨준 극비 문서가 섞여들어 복잡했다. 브레인 워싱을 너무 많이 당해 움직이는 태엽 인형같이 되어버린 정신을 둘째 치고, 몸 상태가 걱정이었다. 엄청난 무게의 강철 의수를 달고 다니는 것은 생각보다 몸에 부담을 많이 주는 일이었다. 예전처럼 팔을 수리해줄 사람도 더는 주위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미 살과 동화되어버린 의수는 조금만 신경이 어긋나도 고통이 찾아올 것이 분명했다. 애초에 그렇게 섬세하게 움직이는 의수에 신경이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버키.’
스티브의 걱정이 커질수록 바이크의 속력이 점점 빨라지다 다시 느려졌다. 일단 버키를 찾으면 토니 스타브에게 연락해서 몸 상태를 한번 보이는 것이 낫지 않을까 했다.
물론 두 사람을 만나게 하는 일이 좋지 않을 거라고 짐작했지만, 당장 버키의 상태를 가장 잘 알아봐 줄 사람은 토니뿐이었다. 정신이 없었다. 버키를 찾아야 실행할 수 있는 일인지라 제대로 진행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버키를 찾아서 무사히 데리고 온다는 전제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맞다. 버키.”
슬슬 헷갈릴 법도 한데 스티브는 애써 버키와 버키를 구분하고 있었다. 애초에 고양이에게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이 잘못이라고 나타샤가 웃었지만, 뭐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공원 근처에 바이크를 세웠다. 이미 폐장 시간이 한참 지난 공원은 드문드문 서 있는 가로등이 간신히 주위를 밝히고 있을 뿐이었다. 조심스럽게 입구를 지나 안쪽으로 걸어갔다. 깊숙하게 들어갈수록 점점 가로등 불빛이 약해지고, 대신 하늘에서 쏟아지는 달빛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뚜벅뚜벅 스티브의 뒤를 따라왔다,
“버키?”
아무리 불러도 반응이 없는 걸 보아하니 이미 집으로 돌아간 것이 아닐까 했다. 아니 그러면 다행이었다. 공원은 넓었고, 스티브가 하나하나 뒤져볼 수도 없었다. 버키와 헤어진 곳에 서서 스티브는 한참 숲과 어둠이 뒤섞인 곳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서 뭔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때마침 바람이 세게 불어서 스티브는 나무가 움직인 거라고 생각했다.
“…음?”
찬찬히 살펴보니 나무가 아니었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는 마치 사람 같았다. 스티브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며 주먹을 꾹 쥐었다. 캡틴 아메리카라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아 방패도 들고 나오지 않는 길이었다. 하이드라의 잔당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눈이 매섭게 찌푸려졌다. 땅에 쌓이기 시작한 어둠은 끈끈해서 좀처럼 그 물체의 정체를 알려주지 않았다.
둘 사이의 거리는 이제 꽤 좁혀졌다. 스티브는 반걸음 정도 물러서며 자세를 잡았다. 일반인이라면 그저 자신이 많이 예민해져 있었다고 넘길 수 있겠지만, 그 반대라면 상황이 좋지 않았다. 하늘에 떠 있던 달이 구름에 가리며 그나마 남아있던 빛이 사라졌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걸어오는 물체는 이제 사람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
순간 스티브의 귀에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버키?”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는 분명 버키의 울음소리였다. 약간 특이한 발음으로 울고 있는 녀석은 스티브와 점점 가까워질수록 더 크게 울면서 자신의 위치를 알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