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물론 시계가 걸려있었지만, 스티브의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가장 안쪽 방에서 더 들어가야 있는 공간이었다. 햇빛 한 줌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고 깊은 방에 남아있는 것은 애써 자연을 흉내 내는 부드러운 조명뿐이었다.
“…버키.”
“…….”
“무슨 꿈을 꿔?”
“…….”
분명 오늘 내내 잠에서 깨지 않을 거라는 말을 들었지만, 조금도 참을 수 없었다. 사실 대답은 안 들어도 괜찮았다. 어차피 눈을 뜨면 똑같은 말을 한 번 더 해줄 생각이었다. 그러면서 계속 혼잣말 같은 대화를 하는 까닭은 이러지 않으면 속에 엉킨 것이 금방이라도 심장을 박차고 튀어나올 것 같았다. 스티브는 스스로 감정이 격해졌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누르고 싶지 않았다. 친구가 걱정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스티브는 그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버키. 버키 반즈.”
“…….”
“왜 이렇게 이 이름이 낯설어지는지 모르겠어.”
“…….”
“항상 생각하고 읽어보고, 머릿속에 집어넣었는데 말이야.”
“…….”
“왜 그럴까. 정작 넌 내 앞에 있는데, 이름은 너무 낯설어서 꼭 부서져 내릴 것 같은걸.”
“…….”
“버키.”
오래 만나지 않아서 그렇겠지. 애써 그런 식으로 생각하려 했지만, 그것과는 조금 다른 기분이었다. 오래 만나지 않았다 해도 이름이 가지고 있는 감정을 잃어버릴 리는 없었다. 캡틴은 혹시 자신이 망가져 가는 것은 아니냐는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 뒷목에 소름이 쭉 돋았다.
‘…….’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건 알 수 없었다. 물론 오랜 잠을 자가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치타우리의 침공을 막기 위해 다시 전쟁으로 나갔던 그때부터 묘한 괴리감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지금까지 했던 활동을 부정한다는 말은 아니었다.
다만, 있으면 안 되는 사람에게 세계는 생각보다 냉혹했다. 아무리 친절하게 대한다고 해도 붕 뜬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친절이 계속될수록 외로움은 더 커졌다. 친구들도 다 죽어버리고, 꼭 하나 남았던 그녀마저 스티브의 곁을 떠났다. 세계가 캡틴 아메리카 에게 보이는 호의는 오히려 빈자리를 더 크게 만들고 있었다.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그런 친절이 잘못됐다는 소리는 절대 아니었다.
다만.
아주 가끔 캡틴 아메리카가 아닌 스티븐 로저스로서 끝없는 괴로움의 바다를 헤엄치곤 했다. 숨이 턱에 닿을 때까지 버티다 못해 서서히 바다 아래로 떨어지면 조용한 어둠이 찾아왔다. 이제 끝이라고 생각하면 꼭 그다음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두드렸다. 발을 붙이고 사는 곳에 이제는 정이 들 때도 되지 않았나요. 캡틴? 항상 묘한 말을 하는 그녀는 꼭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굴었다. 그러면 그냥 웃고 말았다.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 거 같았다.
버키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버키는 일종의 마지막 열쇠였다. 스티브가 그렇게 원하던 자신과 비슷한 처지를 가진 사람. 과거를 공유할 수 있을 것 같은 남자. 친구. 형이자 동료. 그 모든 수식어를 붙여도 어울리지 않는 구석이 없을 정도로 반듯한 사람이었다. 항상 빛이 나서 옆에 앉아있으면 그저 기분이 좋아지는 따뜻한 남자였다.
“…그랬었지.”
그땐 말이야. 과거를 곱씹는 것은 좋은 버릇이 아니라는 것쯤을 잘 알고 있었다. 특이 캡틴 같은 경우는 아차 하다 훅 가버릴 수 있단 말이죠. 그냥 오늘을 보고 살아요. 어느샌가 나타난 나타샤가 또 옆에서 잔소리한다. 그녀가 죽어라 여자와 데이트를 주선해주려고 했던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이래서였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스티브가 고개를 휘휘 흔들자, 곧 그녀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그래도 할 말이 한정된 걸. 안 그런가. 나타샤.”
하지만 버키와 할 말은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꼭 사진을 찢어버린 것처럼 기억은 너덜너덜했다. 필름이 잔뜩 손상되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흑백 필름은 어렵게 어렵게 기괴한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버키는 기억이 완전하지 않았다. 아니 기억이 남아있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버키가 알고 있는 제임스 뷰캐넌 반즈. 버키 반즈라는 사람은 그저 이론으로 습득한 인물일 뿐이었다. 스스로 아직 믿지 못했다. 이 기억마저 덮어씌워 진 가짜면 어쩌지. 비틀거리며 걷는 동안 그런 말을 했었다.
‘아.’
스티브의 이마에 굵은 주름이 잡혔다. 목에서 단단하게 굳은 것은 좀처럼 튀어나오지 않고, 자꾸 괴롭게 만들었다. 숨이 턱턱 막혔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새빨갛게 충혈이 된 것처럼 아려왔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너무 어려웠다. 과거와 현재를 모두 파괴당한 친구와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산산이 찢어진 기억 조각을 긁어보아 퍼즐 맞추기를 해야 하나. 스티브는 계속 속으로 곪아갔다.
“캡틴.”
“…폐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가.”
“아닙니다.”
“오늘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 가서 조금이라도 쉬는 것이 어떻겠나.”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또 거절하고 만다. 티찰라는 캡틴이 튼튼한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마냥 걱정되는 눈치였다. 물론 눈앞에서 몇 번씩 버키를 놓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겪어보지 못한 일이지만, 알 것 같았다. 캡틴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이며, 다시는 놓치기 싫은 사람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렇게 자신의 몸을 혹사하는 것도 역시 두고 볼 수 없었다.
“언제 깨어날지 모르네.”
“…그러니 지켜보고 있어야 합니다.”
“…….”
“일어나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으니까요.”
“…….”
“혹시 사고가 생기더라도 제가 막아야 합니다.”
“캡틴.”
“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
단호한 말은 고지식한 군인의 마음을 단단히 옥죄었다. 티찰라를 신뢰하고 있지만, 버키에 관한 일은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왕은 한 번 더 손을 들었다.
“그럼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방어 코드를 알려주지.”
“…….”
“제압까지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닌가.”
“…….”
“맞군.”
“저도 아직 많이 모자랍니다.”
속마음을 다 들킨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캡틴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눈치 못 챌 리 없는데, 괜한 고집을 부린 것 같았다. 티찰라는 곧 방어 코드 제어권은 캡틴에게 양도했다. 물론 티찰라는 왕으로서 모든 권한에 접속할 수 있으니, 관리자가 둘이 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부디 일어났을 때 아무 일이 없으면 좋겠군.”
“저도 그러길 빌고 있습니다.”
“우린 할 말이 많지.”
“그렇습니다.”
“풀어가야 할 일이 많지만, 시간이 허락한다면 분명 잘 해결될 거라 믿고 있네.”
“…….”
캡틴 아메리카는 저 말의 뜻하는 바를 잘 알고 있었다. 살짝 웃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돌아갈 길은 까마득하지만, 도착 지점이 확실하면 된다. 그런 말을 남긴 채 왕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스티브는 다시 침대에 주저앉았다. 사실 죽도록 피곤했다. 하지만 정신은 그렇게 맑을 수 없었다.
하루 정도 잠들어 있을 거라는 소리만 들었지 언제쯤 깨어난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그래서 잠을 잘 수 없었다. 자신이 막지 못하면, 티찰라가 나서야 했다. 안 그래도 둘은 숨겨준 고마운 사람인데 그런 짐까지 지울 수 없었다.
‘…차라리.’
스티브는 핼리캐리어 위에서 했던 말을 다시 곱씹었다. 버키에게 했던 말은 모두 진심이었다. 차라리 같이 죽었으면 했다. 같이 죽지는 못했지만, 살아서 만났다. 이젠 놓칠 수 없다고 생각한 그 순간부터 스티브는 버키의 손을 붙들고 놓지 않았다. 이젠 헤어지지 말자고 몇 번이나 다짐했다.
“일어나서…다시 마주 봤을 때.”
입안에서 맴도는 말은 좀처럼 흘러나오지 않았다. 꼭 실어증에 걸린 것 같았다. 버키를 바라보면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마무리가 되지 않았다. 이 녀석이 이런 자신을 보고 있으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활짝 웃으면서 다 안다는 표정을 짓겠지. 여기까지 생각하던 캡틴은 또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런 거 기대하면 안 되는 건데…….”
“…….”
“내가 아직도 어른이 아닌가 봐.”
“…….”
“버키. 미안해.”
“…….”
“혼란스러운 건 너일 텐데, 난 자꾸 과거를 찾으려고 하네.”
버키가 혼란스러운 만큼 캡틴도 자꾸 속으로 곪아갔다. 물론 버키는 버키가 맞았다. 무슨 일을 겪었던지, 버키는 존재 자체로 버키일 뿐이었다. 하지만 버키가 당한 일은 그런 당연한 일마저 쉽게 떠올릴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왜 내가 버키지. 이런 의문을 품고 마는 녀석은 늘 자신에 대해 공부했다. 제삼자가. 입에서 입으로. 혹은 박물관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최대한 모두 모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이렇게 하면 조금은 버키와 버키가 맞닿을 공간이 생겼다. 그렇게 살았을 것 같았다.
스티브는 조심스럽게 버키의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혹시 잘못 만져서 주삿바늘이 혈관이라도 찌르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괜한 두려움이 들어 마음껏 안아볼 수 없었다. 침대에 앉아있던 남자는 일어나서 한참 버키 주위를 맴돌았다. 그러더니 다시 간이침대에 걸터앉았다. 이젠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빨리 일어났으면 좋겠다.”
“…….”
“할 말이 너무 많아.”
“…….”
“버키.”
대답하려고 했던 건지 고른 숨소리가 약간 흐트러졌다. 또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 어떤 전쟁을 겪었어도 이보다 더 무서운 광경은 겪어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