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말꼬리가 늘어졌다. 하지만 긴장을 풀지 않았다. 주변에 지켜봐서 저놈의 위험성은 잘 알고 있었다. 얌전하다가도 뭔가 돌아버리면 손을 쓸 수 없다. 게다가 진정시키는 방법은 몇 가지 있지도 않았다. 진정시키길 포기하고 다시 얼리거나. 죽기 직전까지 묶어놓고 때리거나. 아니면 피어스가 직접 와서 살살 달래거나.
하지만 알고 있는 방법 중 병기 앞에 서 있는 남자가 할 수 있는 것은 딱히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성치 않은 몸으로 저 인간 병기를 대적할 자신이 없었다. 그나마 승산이 있는 건 빈틈을 노려보는 정도일까. 물론 이것도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닐 것이 확실했다.
“…….”
“널 해치려는 건 아니야.”
“…….”
“난 널 알아.”
“…….”
“음…그러니까.”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는 놈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길이 찌푸려졌다. 죽은 건 아닌데 숨도 쉬지 않는 척 널브러져 있었다. 척 보아하니 저쪽도 몸이 말이 아니었다. 자신처럼 화상을 입거나 어디 하나 날아가지 않았을 뿐 당장 죽어 자빠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오래 나와 있으면 안 되는 녀석이라 했던가. 몇 번 얼굴을 보지도 않아서인지 자꾸 가물가물했다. 하니 사실 그건 아니었다. 분명 하이드라에 있을 때 내내 신경을 썼다. 말 한번 해보지 못한 사이긴 했지만, 끝의 끝까지 가선 한 두 마디쯤 건네 봤던 것 같았다.
화염에 기억이 같이 타버리기라도 한 것이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을까.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오래 해동되어있던 녀석이 아무리 백치 같고 얌전하다 해도 쉽게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메탈암에 잡히기라도 하면 그대로 뼈가 으스러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명령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놈이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넌…누구야.”
“…….”
“누구지?”
이것 봐라. 남자의 입꼬리가 씰룩거리며 올라갔다. 아무리 뇌가 뭉개지고 지져진 병신이라 하더라도 한 줌 기억은 남아있을 거라며 멋대로 생각했었다. 적어도 하이드라 수족인 것은 알아서 경계하지 않을까. 그러면 싸우다 죽을까. 아니면 도망칠까. 이런 생각을 했었는데, 의외의 대답을 듣고 나니 맥이 탁 풀렸다. 저런 백치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호기심이 돋았다. 이런 곳에서 꼭 호기심을 누르지 못한다. 남자는 그렇게 당하고도 못 말린다며 허허 웃기만 했다. 그런 목소리에 푸른 눈이 슬며시 따라왔다.
“내가 누군지 몰라?”
“…….”
대답이 없었지만 대충 알아듣기로 했다. 어차피 저 병기는 말이 많은 타입이 아니었으니 무표정이 긍정과도 같았다. 이러고 있으니 괜히 꼬인 심사가 스물스물 기어 올라왔다. 이런 기회는 쉽게 오지 않는다. 그러면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남자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흠.’
그 곱상한 얼굴의 캡틴이 내가 이러고 있는 걸 알면 어떻게 생각할까. 여기까지 계획이 미치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당장 죽을 수 있는 상황인데 어쩐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손에 들고 있던 칼을 저 멀리 치워버렸다. 어차피 도박이었다. 도박에서 큰돈을 따려면 어지간한 위험은 떠안은 채 시작해 야했다. 여전히 막다른 골목 가장 깊숙한 곳에 몸을 숨기고 있는 녀석은 불안한 눈빛으로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내가 정말 누군지 모르겠어?”
“…….”
가늘게 고개를 젓는다. 너무 오래 나와 있어서 아주 맛이 갔군. 괜히 입맛이 썼다. 상한 것도 아닌데 눈에 초점이 없다. 삐거덕거리는 메탈 암은 둘째 치고, 멀쩡한 팔 한쪽마저 골절이 된 건지 엉망진창이었다. 옷은 어디서 주워 입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꼴에 위장은 할 생각이었는지 아무렇게나 뒤집어쓴 거적 데기가 눈에 들어왔다. 다 해진 옷 밑으로 윈터솔저 유니폼이 비죽 보였다. 입으려면 제대로라도 걸치고 있지. 하나부터 열까지 모자란 놈을 보고 있는 남자는 답답하기만 했다.
“누가 이런 거야.”
“…….”
“넌 날 모르겠지만, 난 널 알아. 그러니까 날 믿어.”
꼭 피어스가 달랠 때 하는 말투 같았다. 그 역겨운 놈이랑 똑같은 짓을 하는 자신이 너무 웃겨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어린애 같은 뇌가 쉽게 화를 낸다. 남자는 그렇게 인내심이 긴 편은 아니었지만, 조금 더 참아보기로 했다.
“난…그러니까.”
“안다니까. 캡틴 로저스의 친구잖아.”
“…….”
순간 녀석의 표정이 확 굳었다. 이런 잘못 짚었나. 남자의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알아. 그러니까…날 버키라고 불렀는데.”
“그래. 내가 널 안다고 했잖아.”
“다리 위에…그러니까. 잘 생각은 안 나지만.”
“생각이 안 날수도 있지.”
“자꾸 머리를 지져대서 잘 몰라. 그게…….”
어법과 문법이 하나도 맞지 않았다. 뭉그러진 뇌를 긁어모아 겨우겨우 인간의 단어를 말하고 있었다. 쉭쉭 쇳소리가 배어 나올 때마다 가늘게 피 냄새가 났다. 세뇌는 시간이 갈수록 풀리지만, 그만큼 불안해진다. 하지만 그런 상태라면 눈치가 제법 빨라진다. 어리숙하지만 주변에 명령을 내리거나 도와줄 만한 사람이 없다는 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랑 갈래?”
“…뭐?”
“내 꼴을 봐. 나도 피해자야. 당했다고.”
“…….”
“여기에 있어 봤자 굶어 죽기 밖에 더하겠어?”
“…….”
길고 어려운 말은 잘 알아듣지 못한다. 그래서 피어스가 다섯 살 먹은 아이 대하듯 쉬운 말로 어르고 달랬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남자는 그렇게 사려 깊고 인내심이 넘치는 사근사근한 성격이 아닐뿐더러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널 도와주겠다고.”
“하지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 불쌍한 무기는 그걸 표현할 만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단어라곤 지져진 뇌에 남아있는 한 줌이 전부였다. 어떻게든 그걸 조합해서 말을 해보려 하지만,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더 많았다.
남자는 그런 녀석의 마음을 하나하나 헤아려줄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이 녀석에게 위험을 무릅쓰고 접근한 것은 나중에 캡틴 아메리카 에게 돌려줄 한방이 필요해서였다. 얼마나 걸릴 진 알 수 없지만, 꼭 복수하려 했다. 그러면서 멘탈에 깊고 아픈 상처 조금 내주면 더 좋겠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최대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곤 했다. 물론 화상으로 우그러진 피부 때문에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여기 있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그건 싫은데.”
“그렇지? 그러니까 나랑 같이 가자.”
“하지만…여길 떠나면…아니…나는 사라져야 하는데…그게.”
“다시 뇌가 지져지고 싶은 건가?”
“아니…그건.”
그 한마디에 예민하게 반응한 눈이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남자의 거짓말은 구멍이 숭숭 뚫려있었지만, 백치는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기세를 몰아 하이드라를 들먹이며 협박을 던지니 눈을 깜빡인다. 기억은 지워졌지만, 몸이 기억하는 고통은 생각보다 심했다.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는 녀석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움직이지 않으면 그냥 포기할 생각이었다. 혼자 넘어가기도 힘든 곳을 둘이 간다는 건 더 귀찮은 일이었다. 위조 여권부터 돈과 신분증. 모두 두 배로 준비해야 했다. 게다가 남자는 억지로 데려갈 힘도 없었다. 메탈 암으로 한 번 후려치기라도 하면 뼈가 성하지 못한다.
“더 고집 피우면 나도 그만둘 거야.”
“…….”
“여기서 계속 헤매고 다니다가 모르는 사람한테 잡혀가라고. 그러면 네 인생은 계속 그렇게 꼬이는 거지.”
“…….”
젠장. 잘 숨겨뒀다가 최후의 한방으로 써먹을 생각이었는데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죽다 살아난 하이드라 앞잡이 인생이란 이렇지. 온갖 욕을 속으로 삼키며 돌아선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돌멩이를 걷어찼다. 명령을 받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백치 새끼 주제에 고집이 더럽게 세다. 피어스는 저런 녀석을 어떻게 어르고 달래면서 써먹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것도 뱃속에 능구렁이가 세 마리쯤 들어앉아야 가능한 일인 것 같아 짜증이 두 배로 솟아올랐다.
“…뭐야?”
“…….”
남자가 발걸음을 멈췄다. 어느새 뒤로 다가온 백치가 옷자락을 덥썩 잡았다. 메탈 암으로 옷을 잡자 묵직함이 그대로 전해졌다. 남자는 일부러 돌아보지 않았다.
“뭔데? 할 말 있으면 해.”
“그게.”
“난 바쁜 사람이야. 알아? 내 몸을 이렇게 만든 이 지옥 같은 곳을 조금이라도 벗어나고 싶다고.”
“이름이 뭐야?”
“뭐?”
멍청한 놈이 멍청한 소리를 한다. 갑자기 이름을 물어보니 맥이 탁 풀렸다. 하지만 어쩌랴. 물어보면 대답을 해줘야지.
“브록 럼로우. 럼로우라 불러.”
“럼로우. 스티브를 알아?”
“뭐?”
“내가…뭐라고 했지? 그…남자 알아?”
“…….”
“다리 위에서…나랑.”
잠깐 똘똘하게 말을 하나 싶었더니 또 딴소리를 한다.
“알지. 내 상사였는데.”
“상…사.”
“친했다니까.”
일방적으로. 뒷말을 씹어 삼켰다. 어차피 이 녀석은 들은 말을 내일이면 모두 까먹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갈 거야 말 거야?”
“…….”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도망을 가지도 않았다. 좋으면 따라오겠지 싶어 발을 뗐다. 저벅. 저벅. 불규칙하게 엇박자로 들리는 발걸음이 열심히 뒤통수를 잡아당겼다.
“따라 올거냐?”
“…….”
“새끼. 대답이라도 하지.”
“…….”
“그럼 가자. 솔져.”
“…….”
“아니, 널 뭐라고 불러야 하지.”
“…버키.”
“그래.”
오랜만에 맞는 대답을 했지만, 럼로우의 표정은 영 읽을 수 없었다. 덩치가 커다란 백치를 뒤에 매단 남자는 거리가 끝날 때까지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