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훌쩍 나갔다 온 남자는 침대라고 부르기도 미안한 매트리스에 걸터앉으면서 이런저런 속풀이를 했다. 물론 그 소리를 듣고 있는 에셋은 저 멀리 구석에 약간 웅크린 채 말이 없었다. 미쳐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그렇다고 미친 건 아니었다. 밥도 잘 받아먹고 불안한 행동을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직도 사람을 믿지 못하는지 저렇게 내내 날만 세우고 있었다. 좋다고 주워오긴 했는데, 저렇게 귀염성 없이 행동하면 조금 귀찮아지긴 했다.
“…내가 너 밥 챙겨주려고 여기 사는 줄 알아?”
“…….”
“살갑게 굴진 못해도 기척 정도는 내고 앉아있을 수 있잖아. 내가 너한테 밥을 해놓으라고 하냐, 벗고 침대에 누워있으라고 하냐. 어?”
“…….”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알아듣는 척 눈 굴리지 마.”
“…….”
“새끼.”
럼로우는 벗어둔 외투를 쭉 끌어당겼다. 주머니를 이리저리 휘젓자 구겨진 담뱃갑이 툭 떨어졌다. 아, 젠장. 담배 한 개비도 없는 상자를 구겨서 던져버린 남자는 그대로 매트리스에 누워버렸다. 아이고. 일부러 들으라는 듯 끙끙 소리를 내며 돌아누웠다. 여전히 구석에 웅크린 채 어둠 속에 숨어있는 녀석은 눈만 빛났다. 한쯤 맛이 간 눈이지만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예쁘긴 하다. 럼로우는 괜히 그 불안한 시선을 따라가며 눈을 맞췄다. 그럴 때마다 속눈썹을 파르르 떨면서 애써 다른 곳을 본다.
‘귀여운 새끼.’
아까까지만 해도 욕을 하고 있으면서도 속마음은 정직했다. 당장 가서 머리라도 쓰다듬어 줄까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저 무시무시한 메탈암에 그대로 얻어맞을 수 있으니 그만두기로 했다. 몸으로 벌어 먹고사는 사람이 몸뚱이를 마구 굴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하긴 기척을 지우지 말라고 하는 것도 어불성설인가.’
럼로우는 항상 그것이 궁금했다. 물론 답이 나와 있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굳이 에셋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뭉개진 뇌엔 어려운 이야기를 해봤자 전혀 소용이 없다. 몇 개월 동안 저 녀석과 씨름하면서 나름대로 얻은 교훈이었다.
“…왜.”
“응?”
“왜 쳐다봐.”
“비싼 입이 이제야 떨어지나 보네.”
“…….”
“오늘은 운이 좋군. 그 입에서 대화가 흘러나오는 것도 구경을 다 하고 말이야.”
“…….”
“또 입이 붙었어?”
놀리는 건 귀신같이 알아챈다. 입술이 비죽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물론 에셋의 표정은 늘 한결같았지만, 럼로우가 보는 시선은 조금 달랐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기도 하고, 축 처지기도 한다. 눈만 봐도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예쁜이가 심심해하니 아저씨가 놀아 줘야지.”
“…….”
“안 그래?”
“안 그래.”
“대답도 하면서, 매일 이러면 얼마나 좋아. 너 그러다가 몇 개 모르는 단어도 다 까먹는다.”
“…….”
“그러면 정말 백치가 되는 거야.”
물론 지금도 백치지만. 럼로우는 다시 한 번 외투를 뒤졌다. 분명 이쯤에. 이것저것 잡동사니를 넣은 주머니를 하나하나 다 뒤지고 나서야, 뭔가를 찾았다. 은색 포장지에 싸인 걸 들고 천천히 걸어갔다. 사실 저 녀석이 한마디라도 하는 건 어느 정도 낯선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는 표시기도 했다. 이럴 땐 좀 놀아줘야 표정이 풀어진다.
‘꼭 하는 짓도 유기견 같아서.’
화상에 일그러진 남자의 얼굴에 미소가 슬쩍 드리워졌다. 한 번 버림받고 학대당한 녀석이라 살붙이고 살기 쉽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어려울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나마 처음 루마니아로 건너왔을 때보단 많이 나아진 편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발작하는 녀석에서 얻어맞는 것보단 이런 사소한 입씨름이 더 나았다.
“내가 너 생각나서 사 왔어.”
“…….”
“단 거 좋아하잖아.”
“…….”
“안 먹으면 내가 먹고.”
“…아니야.”
“그럼 주세요. 해야지.”
“…….”
“초콜릿 주세요. 해봐. 어디서 공으로 먹으려고 해.”
“…….”
꼴에 자존심이 있어서 그런 소리는 죽어도 안 한다. 이미 눈은 럼로우 손바닥 위에 올려진 초콜릿에 고정된 주제에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어이구. 럼로우도 슬슬 오기가 발동했다. 손바닥 위에 올려진 달콤한 것이 체온에 따끈따끈해질 때까지 둘 사이에선 불꽃만 튀었다.
“고집도 세라.”
“…….”
“하긴 그런 말 할 거라곤 생각 안 했어.”
“…….”
“아. 해봐.”
“…….”
“아.”
또 불안한 눈으로 눈알을 굴린다. 입을 벌리면 곧바로 마우스피스를 물고, 곧 뇌를 지지는 기계에 앉혀진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에셋은 그 기계를 몹시 싫어했다. 그러니 남이 하는 이런 명령은 자연스럽게 거부한다. 하지만 그걸 아는 럼로우는 또 살살 에셋을 긁었다. 아. 해봐. 이 곳에 그 기계가 없다는 걸 스스로 인식해야 얌전히 말을 듣는다.
“난 아무것도 없어.”
“…….”
“싫으면 말고.”
“…….”
에셋이 눈치를 보며 입술을 살짝 벌렸다. 손가락 반절도 들어가지 않을 녀석의 입 모양을 보던 럼로우는 껄껄 웃으면서 손가락을 푹 집어넣었다. 그리곤 치열을 슬슬 쓸어줬다. 바짝 긴장한 몸이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물러서진 않았다.
“이러면 아저씨가 나쁜 짓 하는 거 같잖아.”
“…….”
“왜 그래. 사람 민망하게.”
점점 거칠어지는 숨이 손에 닿았다. 불규칙하게 오르내리는 가슴을 보아하니 당장에라도 기절할 것 같았다. 지워진 기억 속에 각인된 고통이라도 떠오르려나. 그렇게 생각했다. 당연히 이렇게 반응한다는 걸 알면서도 놀리는 걸 그만둘 수 없었다. 럼로우의 호기심과 궁금증은 조금 이상한 방향으로 비틀어 자라고 있었다. 이 남자는 에셋의 모든 반응을 궁금해했다.
“누가 잡아먹는 데?”
“…….”
“입에 묻힐까 봐 벌려주는 거잖아.”
최대한 사람 좋게 웃으려고 노력했다. 그래 봤자 우그러진 얼굴이겠지만, 화를 내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쪽이 좋았다. 에셋의 입을 벌리고 혀에 초콜릿을 놓아주었다. 이미 말랑말랑해진단 것이 혀 위에서 슬슬 녹아내렸다.
“묻히지 말고 먹으라고.”
“…….”
“맛있지?”
“…….”
불쌍한 백치는 아까 상황을 금방 잊었다. 럼로우가 손가락을 빼주자 금방 볼을 오물오물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어린애도 아니고 단 걸 퍽 좋아했다. 하긴 냉동되고 해동되는 내내 미각이 남아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깨어 있는 동안은 제대로 된 음식조차 먹이지 않았다. 최대한 짜낼 만큼 짜낸 다음 곧바로 얼려버렸다. 그러면 뭔가 먹일 필요가 없었다. 영양은 알약과 수액으로 보충했다고 들었다. 그렇게 파괴된 미각에 단 음식은 꽤 자극적인 감정을 선물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맛있어?”
“…응.”
“그래. 그래도 잘 먹으니 좋네.”
자기 덩치보다 더 큰 시커먼 녀석을 어르고 달래던 럼로우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그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기척을 내면 죽도록 맞았던 터라 쉽게 그 버릇이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 정도로 럼로우에게 날을 세우지 않는 것은 어쩌면 행운이었다. 이게 망가진 얼굴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이 백치가 뇌내 망상으로 믿고 따를 만한 사람이라 믿어버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운이 좋아.’
럼로우는 에셋이 고개를 숙인 탓에 부스스하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줬다. 머리 좀 단정하게 자르면 좋을 텐데, 머리에 날붙이를 대려는 것만 보면 발작을 해대니 쉽게 잘라줄 수도 없었다. 날이 점점 더워지는데 이 산만한 덩치를 어떻게 먹이고 씻겨야 하나 벌써 고민이었다.
“에셋. 예쁜아.”
“…….”
“내가 궁금한 게 한가지 있는데 대답해 줄래?”
“…들어보고.”
제법 똘똘하게 말을 한다. 분명 초콜릿을 먹고 기분이 좋아진 것이 틀림없었다.
“나 따라온 거 후회 안 하냐?”
“…응?”
“이 먼 곳까지 나 따라서 온 거 후회 안 하냐고.”
“…….”
백치는 잠시 우물거리는 입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들어 럼로우를 바라보았다. 상처가 처덕처덕 덧발라진 눈은 시릴 정도로 깊었다.
“아직까진.”
“그거 다행이네.”
“근데 그건 왜 물었어?”
“그냥.”
“…….”
럼로우의 대답이 간단하게 끝나자 곧 초콜릿을 먹는데 온 신경을 집중했다. 아직 자신을 믿고 있다는 뜻이었다. 남자는 속으로 껄껄 웃었다. 이 꼴을 캡틴 아메리카가 보면 어떨까. 캡틴 아메리카로서 날 죽이고 싶을까. 아니면 이 백치의 친구 스티븐 로저스로서 행동할까. 정말 궁금했다. 하지만 에셋을 쉽게 넘겨줄 생각이 없었기에, 굳이 알리지 않고 여기까지 와서 자리를 잡았다.
“예쁜아.”
“…….”
“나중에 누가 날 찾거든. 이야기 좀 잘해줘라.”
“무슨 소리야?”
“그냥 그렇게만 알아둬. 어차피 복잡하게 말해도 못 알아듣잖아.”
“…….”
“네가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는 기억 노트 한 귀퉁이에 적어놓던가.”
“…….”
“티 나게 숨기면 이 좁은 곳에선 다 보이니까.”
“…….”
에셋은 말없이 손바닥을 벌렸다. 하나로 모자라니 더 달라는 소리였다. 남자는 끌끌 혀를 차며 다 녹은 초콜릿을 꺼내 백치의 손에 쥐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