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럼로우버키/럼벜] 벜른 전력60분 : 나도 잘 모르겠어
+) NOTICE
캡틴 아메리카 : 시빌워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럼로우가 초코로 버키 꼬시는 이야기
버키 매트리스에서 재우려고 고생중인 럼로우 이야기
적당한 망상과 설정 붕괴가 언제나 함께 합니다 ㅇㅅㅇ)9
write. 환월
※ 시빌워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루마니아에서 지내는 버키와 럼로우 관계 날조중
에셋은 늘 어둠을 무서워했다.
하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죽음과도 같은 어둠에서 혼자 냉동되어있다가 눈을 뜨면 빛이 보였다고 했다. 물론 그 빛은 전혀 따뜻하지 않았다고 힘주어 말하기도 했다. 생각보다 빠르게 제정신을 차리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지만, 럼로우에겐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저러다 갑자기 모든 걸 생각해내면 어쩌지.’
남자는 백치의 뇌가 완전히 망가졌다고 믿고 있으면서도, 한구석으론 영 찜찜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데리고 온 이유가 있다. 일곱 살 먹은 어린애처럼 투정 부리는 걸 받아주고, 강철 팔에 몇 번이나 얻어맞으면서도 내다 버리지 않았던 이유는 다 나중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 녀석은 캡틴 아메리카를 흔들 수 있는 마지막 스위치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데리고 나온 건데. 남자는 자신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을 때가 있었다.
‘차라리 완벽하게 백치 병신이 되었으면 애완동물처럼 키우기라도 할 텐데.’
럼로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셋은 밤새 끙끙 앓다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간신히 잠들었다. 그렇게 기절하듯 눕는다 하더라도 깊은 잠을 자는 것도 아니었다. 유난히 예민한 녀석은 조금만 뒤척이는 소리가 들려도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구물구물 다리를 접으며 눈만 번뜩였다. 그런 꼴을 보고 있으면 괜히 속이 부글부글 끌었다. 그래도 알고 지낸 지 꽤 된 사인데 언제까지 남남처럼 있어야 하나 싶었다.
“…병신.”
럼로우는 그런 녀석을 보면 꼭 이렇게 부르곤 했다. 물론 자신이 멀쩡하단 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한마디 하지 않으면 단단히 쏘인 채 불타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멀쩡하길 바라면서도, 그러지 않기를 동시에 바라고 있었다. 스스로 미쳤다고 말하지만, 누구보다 현실을 바라보았다. 이 녀석을 어떻게 다뤄야 할까. 냉큼 주워오긴 했는데, 영 덩치가 크고 말을 안 들으니 건사하기가 제법 곤란했다.
‘하긴 말은 잘 듣긴 하지.’
자꾸 까먹어서 그렇지만. 버키 반즈. 윈터솔져. 혹은 에셋. 무기. 이런저런 이름으로 불리던 남자는 지독한 트라우마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었다. 기억은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지만, 몸에 새겨진 고통은 하루가 다르게 진해졌다. 럼로우는 오랜만에 얌전히 잠을 자는 에셋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이놈을 데리고 온 이유를 찬찬히 생각해보기로 했다.
“나도 이제 콱 죽어버릴 때가 된 건가, 내 기분을 나도 잘 모르겠다니까.”
“…….”
“안 그러냐. 백치야.”
“…….”
“널 보면 내가 그래. 응?”
“…응.”
“잠꼬대하는 건지. 대답하는 건지.”
쓰레기마냥 잔뜩 구겨진 녀석은 간간이 고른 숨을 내뱉었다. 이유 같은 걸 할 수 없어도, 데리고 온 이상 어느 정도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정을 주지 않는 것도 책임 일부였다. 둘 다 살갑게 살 붙이고 살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어디서 누가 체포하러 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서 언제든지 헤어질 준비를 해야 했다. 자신이야 잊고 살라면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멍청이는 아니지.”
럼로우는 자기도 모르게 에셋 앞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주저앉았다. 등을 보인 채 누워있는 녀석은 나름 푹신한 매트리스를 놔두고 꼭 이렇게 벽을 보고 웅크린 채 잠들었다. 죽으라고 사람을 밀어내면서도 잠깐씩 보여주는 애정을 갈구하는 녀석은 내내 몸이 달았다. 누구도 인간으로 대해주지 않았던 지난 70년간 이 녀석이 기억하고 있는 건 가끔 한 번씩 쥐여주는 사탕 같은 동정 어린 관심뿐이었다. 그런 주제에 어찌나 사람을 무서워하는지 기분을 도대체 종잡을 수 없었다.
“에셋. 예쁜아.”
“…….”
“나 없으면 너 살 수 있겠냐.”
“…….”
“밥은 먹고 살 수 있을까 걱정이 돼서 내가 아직 이러고 있는 거야. 알아?”
“…….”
“웃기지? 근데 나도 웃기는데 이 마음이 왜 이렇게 복잡한지 잘 모르겠다.”
“…….”
“처음엔 그저 어디 써먹을 생각으로 데려왔는데.”
“…….”
“아니다. 그만하자.”
남자는 잔뜩 오그라든 피부가 덕지덕지 올라앉은 손으로 에셋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형편없이 망가진 푸석한 브루넷이 손끝에 감겼다. 차라리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으면 그런대로 이곳에서 살 수 있었다. 메탈암이야 감추면 되는 일이고, 잔뜩 눈치를 보며 더듬대는 말투는 이 녀석이 열병을 심하게 앓아 멍청이가 되어버렸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아직 소문이 퍼지지 않은 것인지 이곳 사람들은 에셋한테 퍽 친절했다. 아마 화상 입은 형과 조금 모자란 동생이 열심히 살아가려고 한다는 미담쯤으로 치부했다. 그런 관심이 사라지면 아무도 둘을 신경 쓰지 않았다. 걸어만 다녀도 숨이 막히던 도시와는 달랐다.
‘여기 있으면 괜찮지 않을까.’
럼로우는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고향이 될 순 없지만, 비슷하게 만들 순 있었다. 하이드라도 없고, 이 녀석을 다시 찾으려는 세력도 없었다. 물론 캡틴 아메리카도 없지. 여기까지 생각하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캡틴에게서 버키를 떼어놓기 위한 아집이었다. 근데 뭐 어떤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이 쓸데없는 고집 한번 부린다고 세상이 멸망하진 않았다. 이제껏 누군가의 개로 살아오기만 했다. 다 죽다 살아났으니 이젠 사람으로 욕심을 좀 부리고 싶었다.
“…….”
“깼냐?”
“…….”
“오늘은 얌전하다 했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눈을 뜬 에셋이 재빨리 럼로우의 손 밑에서 벗어났다. 후다닥 일어나서 벽에 등을 댄 채 몸을 웅크렸다. 그래 봤자 그 커다란 덩치가 가려질 리도 없는 데 잔뜩 불안한 표정으로 눈만 데록 데록 굴렸다. 항상 이랬다. 곁에 누가 오는 것도 무서워하는 주제에 어둠 속에 혼자 남겨지는 것은 더 싫어했다. 하도 말을 안 들을 때면 럼로우는 늘 일어서서 온 집안의 불을 꺼버렸다. 찢어지는 비명소리를 듣고 나서야 불을 켜준다. 그러면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벌벌 떠는 녀석의 눈엔 항상 눈물이 고여있었다.
“여기서 자지 말고 저기 침대 가서 자.”
“…….”
“딱딱한 바닥이 뭐가 좋다고 이러고 있냐. 나는 정말 알 수가 없다.”
“그건…….”
“내 꼴이 병신 같아서 같이 자기가 좀 그래? 그럼 어디서 매트리스 하나 더 주워오던가.”
“그건 아니야.”
“말은 잘하지.”
럼로우는 에셋을 효과적으로 내리누르는 방법을 잘 알았다. 바로 앞에 앉은 채 시선을 슬슬 맞춘다. 그리고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는 시선을 따라 계속 쳐다보면 그만이었다. 불쌍한 하이드라의 무기는 잔뜩 위축된 채 살아온 세월이 길어 이런 시선을 이겨내지 못했다.
“그건 아니지만…난 여기가 편해.”
“하나도 안 편해 보이는데?”
“…편해.”
“네가 예수야? 고행길 수도승이야? 이런다고 죄가 씻어질 거 같아?”
“…….”
“그런다고 변하는 건 하나도 없어.”
“…….”
에셋의 어깨가 크게 떨렸다. 정곡을 찌른 말은 너무 뾰족해서 살짝만 닿아도 피부가 쭉쭉 찢어졌다. 입술만 잘근잘근 씹는 녀석은 할 말을 찾고 있었다. 아. 그런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다. 이래서 내가 이 녀석을 못 버리지. 남자는 피부를 당기며 웃었다.
“에셋. 예쁜아.”
“…….”
“제발 아저씨 말 좀 듣고 저기 와서 자. 응? 네가 자꾸 이러면 내가 힘들잖아.”
“…….”
“나야 혼자 쓰면 편한데, 아무리 내가 널 막 키운다 해도 이렇게 불쌍하게 자면 내가 꼭 밥도 안 주고 굶기는 사람이 된 기분이잖아. 알아들어?”
“…응.”
“그래 그럼 됐네.”
“…….”
대답이 다시 들려오지 않았다. 럼로우가 에셋의 뺨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또 얻어맞나 싶어 눈을 찌푸린 녀석은 대놓고 벌벌 떨었다. 누구보다 강력한 무기면서 이런 손짓 하나에 무력해지는 모습은 나름 보는 맛이 있었다. 하지만 럼로우는 피어스 총장이 아니므로 이 녀석을 때릴 생각은 없었다. 살살 뺨을 쓸어주면 또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자신을 쳐다본다. 살살 뺨을 만져주고 엄지손가락을 톡톡 두들겨 주면 금방 표정이 풀어진다. 이렇게 얌전하기만 하면 편할 텐데, 시도 때도 없이 감정이 널뛰곤 했다.
“그래. 착하다.”
“럼로우. 난 안 돼.”
“뭐가.”
“편하게 자면 안 돼.”
“그건 옛날이야기지. 지금 우린 아무것도 아니야.”
“아니야…맞아.”
“난 이미 지독한 화상을 입은 환자고, 넌 그저 뇌가 맛이 간 백치일 뿐이야. 여기선 아무도 우릴 못 알아봐. 그냥 그렇게 살면 돼.”
“난…잘 모르겠어. 그래도 되는지.”
“또 뭘 기억해 냈지?”
“…응?”
“뭔가 또 떠오르는 것이 있으니 이렇게 말이 많아지는 거 아니야?”
“…아니야.”
“맞는 거 같은데.”
“…….”
또 입술이 불룩 튀어나왔다. 얼굴 찌그러진다. 럼로우는 엄지손을 입술을 살살 만졌다. 금방 목 안으로 우는 녀석을 바라보면 가끔 기분이 더러워졌다. 도대체 어떤 식으로 길들여 놨기에, 입술 좀 만져줬다고 고양이마냥 울어대는지 알 수 없었다. 잘한다 잘한다 하면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지만, 럼로우는 이 녀석이 그냥 이런 게 백치로 지냈으면 했다.
“그냥 내 말 들으면 어디 가서 굶진 않게 해줄게.”
“…….”
“내일은 산책하러 나갈까?”
“…….”
“햇빛을 안 봐서 시들어가는 녀석한텐 물과 햇빛을 줘야지.”
“난 식물이 아니야.”
“나한텐 다 비슷해.”
“…….”
“오늘은 매트리스에서 자.”
“…….”
“이런 건 또 대답을 안 하지.”
럼로우의 손이 에셋의 턱을 토닥토닥 두들겼다. 그리곤 끄응 신음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늦은 점심을 차리려 한 뼘짜리 부엌으로 향한 남자는 냉장고를 뒤지면서 짧게 욕을 내뱉었다. 그런 등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에셋의 시선은 또 멍하니 풀려있었다. 구석에 처박힌 녀석을 끌어다 식탁에 앉히고 밥을 먹였다. 음식과 함께 머리카락이 들어갈 것 같아 좀 묶어주려 했는데, 그건 오늘도 실패했다.
“그래 그냥 머리카락도 죄 뜯어 먹어버려라.”
한 마디 소리치고 자리에 앉았다. 상하기 일보 직전인 채소를 모두 때려 넣고 끓인 스튜는 맛이 없진 않았지만, 굳이 먹고 싶은 맛은 나지 않았다. 다음번엔 금방 시드는 채소는 좀 덜 사야겠네. 럼로우는 억지로 스튜를 목구멍으로 넘겼다. 입맛이 없는지 숟가락으로 그릇만 뒤적이던 에셋은 또 한 번 잔소리를 듣고 나서야 스튜를 입안으로 퍼 넣었다.
밤이 되고 럼로우는 노골적으로 매트리스 한구석을 비워놓았다. 하지만 오늘도 에셋은 다가오지 않았다. 좁은 방 한가운데 서서 불안한 표정으로 럼로우와 구석을 연신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곤 결국 또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등신 새끼. 럼로우는 속으로 욕을 냅다 내뱉었다. 이제 될 대로 되라 싶어 그냥 누워버렸다. 불을 끄면 금방 거칠어지는 숨소리가 들렸다. 끙끙거리는 개새끼 소리 같기도 하고, 어린애 울음소리 같기도 했다. 나이는 먹을 만큼 먹은 양반이 하는 짓은 참 어렸다.
“…허 참.”
새벽에 목이 말라 잠이 깬 럼로우는 매트리스 앞에 있는 검은 물체를 냅다 발로 찰 뻔했다. 새벽 내내 조금씩 기어왔는지 겨우 턱만 매트리스에 올려둔 녀석이 웅크린 채 잠을 자고 있었다. 이제야 이곳이 자신의 집이라고 인식을 한 건지, 아니면 포기를 한 것인지. 럼로우는 실실 새어 나오는 비웃음을 꾹꾹 눌러 삼킬 수밖에 없었다. 동물을 새집에 데려오면 익숙해질 때까지 내버려두면 된다.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경계를 풀고 서서히 다가올 것이란 소리를 듣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정석적으로 행동할 줄 정말 몰랐다.
“그래. 병신 둘이서 살 붙이고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럼로우는 동그란 뒤통수를 살살 쓰다듬어 줬다. 하나밖에 없는 이불을 에셋에게 둘러준 후 자신은 대충 외투를 찾아다 덮었다. 좀 웃긴 모양새긴 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나중에 캡틴 아메리카를 만나면 꼭 이야기해줘야 겠어. 그런 상상을 하며 킬킬 웃던 럼로우는 반쯤 흘러내린 코트를 당겨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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