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화를 신고 오는 사람은 모두 무서웠다. 뚜벅. 뚜벅. 무겁고 거친 굽이 바닥에 닿으면 소름 끼치는 소리를 만들었다. 그 소리가 멀리서 들리기 시작하면 눈을 질끈 감았다. 귀를 막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간신히 숨만 내쉬는 불쌍한 무기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조만간 닥쳐올 고통을 준비한다.
“…….”
늘 여기서 그대로 지나가면 좋을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빠르고 급하게 걷던 발자국이 뚝 멈추면 항상 무거운 철문에 열쇠를 집어넣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열쇠가 돌아간다. 철컥. 자물쇠가 열리자 몇 겹이나 단단히 묶인 쇠사슬이 풀어진다. 그러면 무겁고 녹슨 문이 천천히 열린다. 냉골 같은 방에 방치되어있던 녀석은 최대한 구석으로 몸을 숨기려 했지만, 사각지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
“솔져?”
“…….”
“덜 녹았군.”
“…….”
세뇌 상태가 아닌 윈터 솔져는 늘 겁이 많다. 고통에 대한 공포에 푹 잠겨 있다. 하긴 이젠 죽어버린 이름인 버키 반즈였을 때도 그랬을 것 같았다. 전쟁에 나온 것도 원하지 않았다. 다 죽어가는 외팔이를 주워와서 몇 번이나 뇌를 갈아버려도 마지막 본성을 지우지 못했다. 세뇌 중일 땐 멀쩡하게 말을 듣다가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곧장 발작을 일으킨다.
“솔져. 총장님이 부르신다.”
“…….”
“끌어내.”
“…….”
하지만 지독할 정도로 끔찍한 고문에서 살아남은 인간적인 면은 하이드라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눈앞에 보이는 군화들도 그랬다. 버키, 아니 윈터솔져가 어떤 것을 두려워하던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목적만 달성하면 그만이었다.
해동이 덜 된 몸에선 겨울 냄새가 난다. 그런 남자를 양쪽에서 겨드랑이에 팔을 끼우고 일으킨다. 제대로 굽혀지지 않은 발목 관절 때문에 발끝이 툭툭 바닥에 걸린다. 그 상태로 끌고 가기 시작하면 윈터 솔져 뒤로 긴 물기가 남았다.
“…….”
“늦었군.”
“좀 문제가 있었습니다.”
“또 그 일이겠지. 정말 지독하군. 이 정도면 아무 생각이 나지 않을 텐데.”
“그렇습니다.”
“하여튼…이놈이고 저놈이고.”
날카로운 눈매가 조용히 돌아간다. 억지로 끌어다 의자에 묶어둔 무기는 좀처럼 진정할 줄을 모른다. 크게 부푸는 가슴은 자꾸 헛숨을 들이쉰다. 온몸에 연결된 기계 장치는 불안한 상태를 가감 없이 보여줬다. 우는 법을 잊어버린 녀석은 표정조차 모호하다. 우는지 무서워하는 것인지. 도통 알아챌 수 없었다.
“참 손이 많이 가는 무기야.”
“…….”
“저번에 사용하고 나서 가이드가 출장 중인 터라 그대로 얼렸더니, 좀 불안한 모양입니다.”
“가이드? 어디 갔지?”
“캡틴과 함께 잠입 수사를 나서는 바람에.”
“…아 그랬군.”
“…….”
무기는 말이 없다. 이 의자에 앉아 있으면 모든 말이 저 멀리서 들리는 것 같다. 들어봤자 전혀 도움이 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저 위에서 결정하면 그만인지라 선택권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늘은 그저 조금 덜 아팠으면 했다.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속눈썹에 불안함이 주렁주렁 열린다.
“솔져.”
“…….”
“가이드가 없지만, 이번에도 잘 해주리라 믿는다.”
“…….”
“솔져?”
“…….”
“네가 하는 일은 모두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야. 비록 지금 고통이 심하겠지만, 돌아오면 가이드를 바로 붙여주마.”
“…….”
“대답해.”
“…내가.”
“내가?”
“여기는…어디지.”
안타까운 무기는 자꾸 짚어서 안 될 곳을 짚는다. 이미 망가진 뇌가 계속된 리셋으로 제대로 작동을 하지 못하니 최근 기억은 모두 잊어버린다. 그러니 자꾸 한 줌 남은 과거의 파편을 그러쥔 채 되물어 보곤 한다. 물론 그러면 꼭 아픔이 뒤따른다.
“…….”
결국, 매를 번다. 뺨을 맞고 기계에 팔이 구속된 채 뇌를 다시 한 번 갈아버린다. 물론 이렇게 하면 가이드가 없어도 센티넬 능력을 뽑아 쓸 수 있다. 아마 무기가 순순히 명령에 따랐어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백치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또 한 번 마우스피스를 물고 꺽꺽 소리를 지를 뿐이었다.
*
“…….”
센티넬 능력을 발휘하면 밤을 뛰노는 맹수만큼 눈이 좋아진다. 하지만 그것도 가이드가 내내 붙어있어서 컨디션을 조절해 줄 때 이야기였다. 한계까지 몰린 녀석은 결국 순간적으로 눈이 멀어버렸다. 발작을 일으키며 땅을 뒹구는 녀석에겐 동물에게도 쓰지 않을 것 같은 독한 마취제가 푹푹 꽂힌다.
“…….”
“저쪽으로 옮겨. 그리고 빨리 가이드 수배해서 데려와.”
“알겠습니다.”
완전히 늘어진 녀석을 독방에 밀어 넣는다. 한참 그렇게 정신을 놓고 있으면 아주 조금씩 몸이 진정된다. 하얗게 타버렸다가 간신히 돌아온 시력은 아직 형편없었다. 눈을 천천히 깜빡여 봐도 도통 초점이 잡히지 않았다. 흐릿한 시야에 뭔가 움직이지만, 귀조차 먹어버렸는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능력을 심하게 끌어다 쓰면 꼭 이렇게 지독한 리바운드가 온다.
“…또.”
완전히 갈라지고 메마른 입술에서 신음소리에 섞인 혼잣말이 흘러내린다. 조금씩 시야가 밝아지면 또 바쁘게 움직이는 군화가 보인다. 늘 그런 식이었다. 군화를 벗어나지 못하면 고통도 끝나지 않는다. 그걸 알지만 불쌍한 무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미친 거 아냐? 내가 지금 얼마나 눈치 보이는 줄 알아?”
“그러면 어찌합니까. 무기가 죽어 넘어가는데.”
“그러니까 누가 나 없을 때 막 굴리랬어? 아니면 대타라도 하나 만들어 오던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죠.”
“너희도 말이 되는 일을 좀 시켜라. 나 참.”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귀가 트인다. 끈 떨어진 인형처럼 늘어져 있던 손가락이 조금씩 움직인다. 하지만 바쁘게 지나다니는 군화는 그걸 알지 못한다. 아. 성대가 쩍쩍 갈라졌는지 숨이 갈래갈래 찢어진다. 당장에라도 죽을 것 같은데,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안다.
“에셋. 일어나 봐.”
“지금 움직이지도 못할 걸요.”
“…미쳤군. 이럴 때까지 굴리다니.”
“…….”
“뭘 봐. 문 닫고 나가”
“아, 예.”
싸늘한 한마디에 군화가 우르르 물러난다. 이제야 조금 숨이 트인다. 버키의 눈엔 먼지가 가득 쌓인 군화가 한가득 맺혀있었다. 자신에게 그리 아프게 대하지 않는 군화였다. 말은 험하지만 적어도 직접 위해를 가하진 않는다. 뻣뻣하게 굳어있던 몸이 슬슬 풀어진다.
“안 죽은 거 알아. 일어나.”
“…….”
“새끼.”
가이드란 남자는 단 한 번도 먼저 손을 내밀어주지 않는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선다. 그러다 팔이 푹 꺾이면서 앞으로 쓰러진다. 얼굴을 부딪힌 것인지. 아닌 건지. 구분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둘이 있으면 조금씩 바짝 선 신경이 누그러지기 시작한다.
“내가 이러다 제 명에 못 살지.”
“…….”
“어쩌다 이런 녀석을 떠맡아서.”
투덜거리는 목소리조차 자장가 같다. 둘이 있을 땐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다. 별것 아닌 상황이지만 에셋에겐 꿀 같은 휴식이었다. 담요 한 장 없는 맨바닥에 널브러진 채 눈만 껌벅거린다. 그렇게 한동안 둘은 말이 없다가 군화가 먼저 자리를 비킨다. 가지 말라고 잡아볼까 하지만 역시 그만둔다. 착한 군화는 그런 행동을 몹시 싫어했기 때문에, 할 수 없었다.
“…….”
“괜찮냐?”
“…….”
죽었다 살아난 남자가 옆으로 누운 채 눈만 흐릿하게 뜬다. 온몸에 열이 오르고 힘이 빠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눈만 끔벅거리고 있으니, 그 모습이 측은한지 남자가 아무렇지 않게 다가온다.
“…….”
흐릿한 시야에 낯선 것이 잡힌다. 럼로우는 늘 신던 군화를 벗고 구두를 신고 있었다. 낯선 모습에 좀 놀랐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언젠간 너에게 구두를 신고 가련다. 그땐 너도나도 전쟁 통에선 살지 않을 거니까. 남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니 정말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모습이었다. 어디서 봤을까. 백치는 열이 잔뜩 오른 머리를 잡고 끙끙거린다.
“백치야.”
“…….”
“우리 이제 여기서 못 살게 됐어.”
“…….”
“알아들어?”
“…….”
덤덤하게 말하는 남자는 옷도 멀끔하게 바꿔 입었다. 뭘까. 백치는 불안해한다. 늘 화약 냄새를 묻히고 살던 남자가 사라진 것 같았다.
“인사 끝났으면 옮길 거니까. 비켜 럼로우.”
“하여튼 산통 깨는 덴 뭐가 있다니 까요.”
“비켜.”
“예. 예. 알겠습니다.”
구두가 멀어진다. 아프지 않은 군화가 구두로 바뀐 채 시야 멀리 사라진다. 그리고 익숙한 향기가 성큼 다가온다. 열이 올라서 코가 망가진 걸까. 백치는 아파서 내내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크고 시원한 손이 이마에 닿았다 눈 밑을 쓱 쓸고 지나간다.
그 순간 정신이 아득히 멀어진다. 꼭 아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뇌는 깊은 생각을 하는 것을 거부한다. 이럴 땐 정말 쓸모없는 몸뚱이였다.
이 새끼는 여전히 말이 없다. 잔뜩 상처받은 얼굴엔 멍한 눈빛만 흘러내렸다. 금방이라도 와장창 깨질 것 같은 눈을 바라보던 럼로우는 짧게 욕을 내뱉으면서 괜히 짜증을 부린다. 누구 하나 잘못 한 것이 없는 짜증이었다. 하지만 뇌가 갈린 백치는 꼭 자기에게 하는 것 같은지 굼실굼실 몸을 움츠릴 뿐이었다.
“내가 너 많이 도와줬잖아?”
“…….”
“나 없으면 어쩌려고?”
“…….”
그 한마디에 저 먼 곳을 바라보던 시선이 천천히 다가왔다. 잔뜩 상처받은 얼굴로 반쯤 타버린 남자를 꼼꼼하게 훑어내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그런 시선이 썩 나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히려 익숙했다. 이 백치는 늘 이런 식으로 사람을 바라보곤 한다. 조금만 더 하면 넘어올 것 같은데, 갈려버린 뇌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고집쟁이가 아직 에셋을 단단하게 붙잡고 있는 모양이었다. 완전히 우그러진 입술이 절로 씰룩거렸다. 어차피 이기지도 못할 일인데 이렇게 고집을 부리곤 한다.
“내가 다 도와줄게.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나가버리자.”
“…난.”
“길바닥에서 굶어 죽는 것보단 나을걸?”
“난…그러니까.”
“…….”
백치는 여전히 횡설수설할 뿐이었다. 해동된 지 너무 오래 지났습니다. 꼭 물건을 다루는 것 같은 딱딱하고 감정 없는 말이 귓가에 어른거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럼로우는 이 무기한테 별 감정을 가지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무기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좀 더. 할 수 있는 것까지. 이 불쌍한 백치에게 해주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갈 거야? 안 갈 거야?”
“…….”
“내가 없으면 나중에 어쩌려고?”
“…….”
“역시 내가 있는 쪽이 편하지?”
“…….”
“봐. 벌써 노골노골 누그러지네.”
“…….”
남자는 슬쩍 백치 가까이 다가섰다. 흉터가 잔뜩 오그라든 손끝으로 백치의 머리를 슬슬 쓰다듬는다. 잔뜩 날이 서 있던 숨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뻣뻣한 머리카락을 만져주다 천천히 턱선을 타고 내려온다. 얼마나 밖을 헤맸는지 거칠거칠한 수염이 손끝에 쿡쿡 박혔다.
“…하지 마.”
“좋으면서 튕기긴.”
“…그런 거 아니야.”
“아니. 넌 지금 거짓말을 하는 거야.”
“…….”
“내가 척 보면 알거든.”
몇 번이나 말했지만, 백치는 어려운 대화는 곧잘 포기해 버린다. 뭉그러진 머릿속에 남아있는 것은 지극히 간단한 일상용어 몇 가지와 임무에 필요한 말뿐이었다. 그러기에 럼로우처럼 능글능글하게 남을 가지고 노는 대화는 좀처럼 따라가기 힘들어했다. 어차피 자신이 하는 말로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입을 다물어버리자 럼로우는 껄껄 웃으면서 턱을 잡았다.
‘그새 살이 쪽 빠졌네.’
이젠 손톱조차 남아있지 않은 손끝은 무디기만 했다. 하지만 적어도 에셋의 상태 정도는 진단할 수 있었다. 아무리 임무 동안 제대로 먹이지 않아도 꽤 오랜 시간 버틸 수 있다지만, 이렇게 지치고 여기저기 상처입고 터진 상태로는 영 못 미더웠다. 먹을 것이라도 대충 주워 넣었으면 괜찮았겠지만, 이 녀석이 이런 흉한 꼴을 하고 거리를 어슬렁거렸을 것 같지도 않았다. 먹지도 못하고 치료도 받지 못한 녀석은 밤에 잠도 제대로 청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내가 내 담당 무기가 이렇게 진창에 구르고 있으면 기분이 어떨 거 같아.”
“…엿 같겠지.”
“그건 잘 아네. 일어서.”
“…….”
“먹여주고 재워줄게. 그러면 되잖아.”
“…….”
“새끼 진짜…….”
럼로우는 백치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약간 커진 눈동자엔 혼란스러움이 가득 담겼다. 아마 언어가 눈에 보인다면 에셋 주변엔 물음표가 종류별로 잔뜩 매달려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남자는 그 손목을 놓을 생각이 없었다. 여기서 이 녀석을 놓친다면 어쩐지 다시 만나지 못할 것 같았다. 자꾸 뻗대던 것과는 달리 백치는 얌전히 럼로우를 따라왔다.
*
도망치듯 도시를 떠나서 구한 집은 너무 작았다.
둘이 누우면 답답하게 붙어야 하는 매트리스부터, 가구 하나하나까지 언제든 버리고 떠날 수 있을 만큼 별거 없는 살림살이뿐이었다. 최소한 필요한 것만 들여놓고, 최대한 짐을 만들지 않는다. 집에 정을 붙이지 말고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항상 준비해둔다. 럼로우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백치를 매트리스 위에 앉혀놓고 한 시간 동안 잔소리를 했다.
“…알아들어?”
“…….”
“알아듣는 척하지 말고, 모르겠으면 다시 물어봐.”
“나도…그런 것쯤은 알아.”
“알긴. 아무것도 모르는 실험실 비글 같은 녀석이.”
“…….”
“그냥 넌 내가 하라는 것만 해.”
“…….”
“그리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꼭 물어보고.”
“…응.”
해동이 너무 오래되면 그대로 상해버리나 했는데, 운이 좋았다. 백치는 조금씩 제정신을 찾고 있었다. 물론 보통 사람에 비하면 한참 멀었다. 백치 기준으로 생각하면 그랬단 소리다. 벙어리마냥 입을 꾹 다문 채 고갯짓만 하면서 좋고 싫음을 표현하던 녀석은 조금씩 말문이 트이기 시작했다. 작은 문제가 있자면 그 말문이 럼로우에 모든 말에 태클을 거는 방향이라는 사실이랄까. 하지만 백치를 주워온 남자는 그런 것도 일종의 애교로 보고 있는 것 같으니 별 상관없는 것 같았다.
“백치야. 이리 와봐.”
“…….”
“어허.”
“…….”
“너 안 만져주면 또 폭발할 거잖아.”
“…….”
그건 맞는 말이었다. 주춤주춤 럼로우 옆에 걸터앉은 녀석은 큰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자기 자신의 형질조차 모르는 녀석은 럼로우의 행동에 반박할 만한 재간이 없었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는 걸 봐선 아직 다 풀린 것은 아니었다. 그나마 일찍 발견하긴 다행이라 생각했다. 오감이 마비되기 시작하면 럼로우가 손 쓸 틈도 없이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난 어쩌다 너 같은 녀석이랑 맞아서.”
“…….”
“내가 전생에 죄를 많이 지었나 보지. 안 그러냐?”
“…….”
“이리 와봐.”
껄껄 웃으면서 턱을 잡는다. 그리곤 부루퉁하게 내민 입술에 그대로 입술을 겹쳐버린다. 하이드라에 있을 때 지겹게 했던 일이었는데, 백치는 꼭 처음 하는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다. 거친 호흡이 뚝뚝 끊기면서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간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어주면 거짓말처럼 벌어진다. 혀로 치열을 쓸어주면 전기에 튀겨진 것처럼 펄떡 뛰어오른다.
“…쉬. 괜찮아.”
“…….”
“백치야. 숨 쉬어야지.”
“…….”
“숨 막혀 죽겠다.”
“…….”
간신히 밭은 숨이 흘러나온다. 헐떡거리는 녀석의 목소리에서 쇠 냄새가 났다. 럼로우는 속으로 껄껄 웃으면서 좀 더 입술을 깊게 묻었다. 혀를 얽다가 송곳니를 쓸어올린다. 백치는 이상하게 입안이 예민했다. 조금만 자극을 줘도 금방 스르르 녹아내린다. 그대로 뒤로 넘어가자 매트리스가 출렁거렸다.
“왜 오늘 땡겨?”
“…….”
“내가 자꾸 이렇게 덥석덥석 눕지 말라고 했지?”
“…….”
“백치가 아직…머리가 나빠서. 참.”
“…….”
“걱정이야.”
럼로우는 잡아먹힐 것을 기다리는 노루를 보는 포식자의 눈빛으로 백치를 훑어내렸다. 탄탄한 몸에선 늘 겨울 냄새가 났다.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귓가에 쨍하게 울렸다. 입안 몇 번 헤집어줬다고 눈가엔 눈물이 축축하다. 이럴 때면 진짜 못할 짓을 하는 것 같아서 영 입맛이 찝찝했다.
“싫어도 그냥 즐겨라.”
“…….”
“네놈 체질이 지랄인 걸 어쩌겠냐. 어?”
“…….”
“너 폭주하면 아저씨는 힘이 없어서 많이 힘들다.”
“…….”
“그러니까 얌전히 있어.”
모르는 척 상의 안에 손을 넣고 탄탄한 배를 죽 긁어 내렸다. 파르르 떨리는 피부가 손끝에 찰싹 달라붙었다. 당장에라도 이 녀석을 잡아먹고 싶은데, 아직은 아니었다. 센티넬과 가이드의 관계는 오묘해서 처음부터 큰 자극을 주면 쌍방이 힘들었다. 럼로우는 그걸 잘 알고 있어서 이렇게 손으로 적당히 희롱하고 말았다. 물론 그런 정보를 알 리 없는 백치는 내내 헐떡거리면서 축축한 눈만 깜박였다.
*
물론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었다. 백치는 럼로우가 같이 산지 꼭 두 달쯤 되던 날 그대로 앓아누워서 사경을 헤매기 시작했다. 불같이 달아오른 체온은 온몸을 태울 것 같았다. 럼로우는 부지런히 물수건으로 백치의 몸을 닦아주었지만, 소용없었다. 끙끙 앓다가 지친 입술은 허옇게 말라갔다. 버석버석한 성대에서 앓는 소리마저 나오지 않을 정도로 비틀어진 녀석은 눈도 뜨지 못했다.
“백치야.”
“…….”
“왜 아프고 그래.”
“…….”
“조금만 기다려.”
“…….”
“금방 돌아올 거니까. 조금만 더 참고 있어.”
“…로우.”
“왜 이럴 때 이름을 부르고 그래.”
“럼로우…어디 가지 마.”
“내가 어딜 가. 조금만 기다려 금방 돌아올게. 약 먹어야지.”
“약…안 먹어도 되는데. 나 괜찮아.”
“괜찮긴.”
다 죽어가는 새끼를 이럴 때마다 옛날 기억이 떠오르는지 자꾸 남 걱정만 한다. 럼로우는 초조한 표정으로 옷을 걸쳤다. 그리고 바닥에 숨겨둔 가방에서 두툼한 돈뭉치를 몇 개나 꺼냈다. 그리고 더 굳은 표정으로 이리저리 연락한다. 이런 식으로 통화하면 바로 도청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저 백치를 죽게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뭔가를 주문한 럼로우가 급하게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활활 타는 손이 옷자락을 콱 잡았다. 물론 그것도 힘이 없어서 툭 아래로 떨어진다. 럼로우는 그런 녀석을 보지 않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천천히 돌아보자 온몸에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녀석이 끙끙 앓으면서 남자를 올려다본다.
“금방 돌아올 거지?”
“…….”
“응?”
“그래. 예쁜이 더 안 아프게 약 사서 올게. 그러니까 어디 가지 말고 여기서 웅크리고 참아.”
“…….”
“내 말 알아들어? 절대 밖으로 나가지 말고 여기서 이불로 입이라도 틀어막고 버티고 있으라고.”
“…으응.”
열에 들뜬 녀석이 대답은 잘한다. 럼로우가 급하게 밖으로 나가자 단 냄새가 가득 섞인 숨이 훅 흘러나왔다. 백치는 몇 번 손끝을 까딱거리다 그대로 까무룩 잠이 들었다.
“…아, 캡틴이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자네한테 볼일이 있어서 왔지.”
“하 참. 내가 이래서 전화 같은 건 안 쓰려 했는데.”
“…….”
“이게 또 이렇게 걸려 들어갈 줄 알았나.”
럼로우는 밀수업자가 건넨 약봉지를 슬그머니 옷 안쪽에 집어넣었다. 그리곤 능글능글하게 웃으면서 단호한 표정을 한 금발 남자를 돌아보았다.
“자네가 크로스본즈인 줄 알았지만, 이렇게 만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는데.”
“뭐 거기까지 알면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지 마시죠.”
“…….”
“그리고 내가 좀 바빠서. 일이 있으면 다음에 오시는 것이 좋겠군요…. 그럼.”
“그 약은 뭐지?”
“집에서 키우는 개새끼가 좀 아픕니다.”
“…….”
“내가 그런 것까지 캡틴한테 하나하나 보고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럼로우는 한껏 캡틴을 비꼬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빨리 돌아가야 하는데, 저 답답한 양반은 비킬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슬그머니 자리를 뜨려다 몇 대 얻어맞았다. 그건 사적인 감정은 아니네. 럼로우는 헛웃음이 나왔다. 품 안에서 떨어진 약을 주워든 캡틴은 잘생긴 미간에 주름을 만들면서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남자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애초에 의문이란 것을 가져서는 안 될 곳이긴 하다. 늘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남자의 머리는 이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있었다. 뭐라고 할까. 기묘하고 비틀린 곳. 하이드라의 내부는 딱 그런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뭔가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무슨 생각하지?”
“예? 아닙니다. 오늘 잠을 못 자서요.”
능글능글하게 대화를 넘겨버린다. 남자는 적당히 꼬리 말고 살아가는 법을 익혔고, 송곳니는 감추는 쪽이 좋다는 것을 일찍부터 깨달았다. 그런 남자를 영 못 미더운 표정으로 살피는 상사는 딱히 잡을 트집이 없는지 곧 시선을 돌려버렸다.
‘큰일 날 뻔 했군.’
럼로우는 조용히 마른 침을 삼켰다. 매번 이렇게 한 번씩 의심을 받으면서도 자꾸 시선이 다른 쪽을 향하곤 한다. 물론 왜 그런 진 잘 알고 있다. 아무리 근본 없이 전쟁터에서 굴러먹고 살아왔던 남자지만, 요새 하이드라 내부에서 보는 일은 그것보다 더 끔찍했다. 잔인한 일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곤 한다. 물론 남자는 먹고 살기 위해 하이드라를 선택했느니 양심의 가책은 가지지 않았다.
“무기를 준비시킬 테니 데리고 이동하게.”
“절 너무 믿으시는 것 같습니다?”
“뭐?”
“그 녀석을 다룰 사람이 그렇게 없으신가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나마 네가 쓸 만하지.”
“보모 질에 소질이 있다는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자네는 참 웃긴 사람이군.”
“감사합니다.”
짧은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난다. 물론 럼로우는 이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대충은 짐작하고 있었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귀한 무기를 꺼내지 않는다. 어쩐지 꽤 길고 고통스러운 일이 될 것 같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갑자기 몇 년 동안 쓰지도 않던 윈터솔져를 꺼냈다. 물론 무기는 녹이 슬기 전에 한 번씩 손질을 해줘야 한다. 하지만, 이 무기는 아니었다. 해동하는 그 순간부터 괴로워하곤 한다. 오히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는 쪽이 더 나은 녀석이었다. 하지만 하이드라는 그런 녀석의 상태를 고려해줄 만한 집단이 아니었다.
“…….”
“맛이 갔군.”
“…….”
“어서 준비해.”
제대로 해동이 되지 않은 몸에선 버석버석 녹다가 만 얼음이 뚝뚝 떨어진다. 식도부터 장기까지 안쪽은 아직도 얼어붙어서 말을 하지 못한다. 딱딱한 관절로 걷는 덴 무리가 있으므로 덩치 좋은 남자 둘이 그 무기를 어깨에 들쳐 메고 질질 끌어서 옮기곤 했다. 그런 다음 맛이 가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는 녀석을 의자에 앉혀서 전기로 잘 튀겨서 억지로 움직이게 하였다. 턱이 덜덜 떨리면서 말도 못하고, 눈은 자꾸 풀어지는 녀석은 의지라곤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망가진 인형 같았다.
“솔져?”
“…….”
“됐어. 이 정도면 이동하는 새에 정신이 들겠지.”
“…….”
“다들 준비하고, 둘은 이 녀석 옮겨다 싫어. 럼로우는 따로 좀 오라고 하고.”
“알겠습니다.”
참 직장생활이 어려웠다.
*
“아, 젠장. 이 새끼는 또 왜 이래?”
“아직 제정신이 안 든 것 같습니다.”
“무거워 죽겠는데, 이 녀석을 어떻게 끌고 저기까지 올라가란 말이야.”
“…….”
“팔을 떼서 따로 옮겨주던가. 이 덩치에 이 무게를 어떻게 감당하라고 하는 건지.”
“…….”
“어쩔까요?”
“뭘 어쩌겠어. 옮겨야지.”
“…하지만.”
“적당히 끌고 올라가다가 뺨이라도 몇 번 쳐줘. 정신이 들면 움직이겠지.”
안 그래도 뜬금없는 출장에 짜증이 날 대로 난 럼로우는 연신 시커먼 산길을 보며 투덜거렸다. 달이 구름에 숨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나무가 빽빽한 숲을 통해 올라가자니 눈앞에 먹물을 푼 것처럼 새카맣기만 했다. 구불구불 이어진 길을 사람 한 무리와 망가진 무기가 걸어 올라간다. 물론 제 발로 걷지 못하는 녀석이 하나 있었다.
“야.”
“…예?”
“그 새끼 잘 잡고 있어 봐.”
“무슨…….”
결국 짜증이 난 럼로우가 냅다 뺨을 쳤다. 휙 돌아간 얼굴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럼로우는 얼얼한 주먹을 몇 번 쥐었다가 다시 폈다. 꼭 얼음을 때리는 것 같았다. 해동 된 지 시간이 꽤 지났는데, 아직도 몸이 얼음장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오냐오냐 봐주기엔 지금 상황이 너무 엿 같았다. 다시 한 번 손을 들자 그새 알아챘는지 무기의 얼굴이 슬슬 움직인다.
“정신 차린 거 알아.”
“…….”
“일어서. 에셋.”
“…….”
“더 맞을래?”
“…….”
사실 럼로우는 그나마 이 불쌍한 무기한테 잘해주는 축에 드는 사람 중 하나였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갑자기 이렇게 외진 곳까지 출장을 나와서 본 꼴이 이거니 더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적당히 거칠고 사나웠다. 그런 남자의 성격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셋은 천천히 자신을 떠받치고 있던 둘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곤 조용히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제 정신이 들어?”
“…….”
“됐네. 가자.”
“…….”
“싫으면 머리채 잡고 끌고 올라갈 줄 알아.”
“…….”
에셋은 그 말을 듣자마자 척척 걸음을 옮겼다. 물론 럼로우가 좀 더 빨랐다. 책임자보다 먼저 가는 무기가 어디 있느냐며 화도 낸다. 그러면서도 때린 곳에 상처가 나지 않았는지 슬쩍 살펴본다. 워낙 튼튼한 녀석이니 평범한 인간이 한두 대 때린다 해서 상처가 날 것 같진 않다. 하지만 또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도 그나마 잘해주던 기억이 있으니 자꾸 신경이 쓰인다.
녀석이 움직이는 발자국에선 하얗게 성에가 일어나는 것 같았다. 럼로우는 그 이후로 에셋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구불구불 어지럽게 얽힌 길을 찾을 뿐이었다. 깊게 들어갈수록 점점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없어진다. 하지만 손전등을 쓸 수도 없었다. 짧게 혀를 차면서 감에 의지해 움직인다. 저벅. 저벅. 발소리는 자꾸 멀어졌다가 다시 줄어든다.
“…뭐야?”
“…….”
“말 좀 하고 다가와라.”
“…….”
어느 순간 럼로우 옆까지 다가온 녀석은 슬쩍 눈만 흘길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그저 저 앞에 목표가 있다는 듯 계속 걸어 올라갈 뿐이었다. 그런 녀석의 뒷목을 콱 잡아챈 럼로우는 짜증이 가득 섞인 목소리로 한마디를 툭 던졌다.
“어디서 나보다 먼저 올라가려 해.”
“…….”
“여기 책임자는 나야. 넌 내 말을 들어야 한다고. 알아들어?”
“…….”
“못 알아들어도 어쩔 수 없어.”
“…넌 누구지?”
“내가 누군지 알아도 곧 잊어버릴 새끼가.”
“…….”
“호기심만 많아서.”
남자는 절대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렇게 어색하게 대화가 끊긴 채 구불구불 복잡한 산길을 얼마나 올라갔을까. 드디어 은신처가 눈에 들어온다. 누가 보면 그저 버려진 집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낡은 집이었다. 젠장. 그 꼴을 본 럼로우는 눈앞에 선명한 상사의 얼굴에 침을 뱉는 상상을 한다. 아무래도 자신을 엿먹이려고 억지로 만들어낸 미션 같았다.
‘하긴 이 녀석 해동 겸해서 운동이라도 시키는 거겠지.’
그냥 그렇게 타협하고 만다. 어차피 누군가의 장기 말로 살아가려면 깊게 들어가지 않는 편이 좋았다. 그냥 여기서 며칠 노닥거리다 가면 되겠지. 애써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 했다.
“안쪽은 생각보다 최악은 아니군.”
“…….”
“들어가. 뭐해.”
“…….”
에셋은 마치 자기 집인 것처럼 은신처에 들어가 가장 구석에 있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다. 아주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뜨면서 바닥만 묵묵히 바라보았다. 저 눈엔 뭐가 보이는 건지. 럼로우는 문을 짚고 서서 한참 그 꼴을 바라보고 있었다.
뒤이어 조금 늦게 팀원이 하나둘 도착했다. 이상할 정도로 럼로우가 아는 녀석은 하나도 이번 일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게다가 하이드라에서도 처음 쓰는 것 같은 용병이 대부분 이었다. 물론 그게 싫다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대장은 럼로우였고, 그들은 하이드라에게 반항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늘 옆에 끼고 다니던 녀석들이 없으니 좀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아직 명령이 하달되지 않았다.”
“…….”
“일단 여기서 조용히 있으면서 다음번 명령을 기다린다. 알았나?”
“예!”
“좋아. 다들 적당히 쉬도록 해.”
“알겠습니다.”
“다만 소란을 피운다든가. 정해진 공간을 벗어나는 행위를 하면 각오 단단히 하는 편이 좋을 거야.”
“…….”
“난 같은 편이라도 내 눈에 거슬리는 건 그냥 치워버리는 성격이거든.”
“…….”
일부러 기를 꺾으려고 하는 말인 줄 아는 것 같았다. 물론 이러다 진짜 탈주자가 생기면 대가리에 그대로 총알을 박아줄 생각이었다. 대장인 럼로우가 소파를 차지하고 길게 눕자. 나머지 잡졸들은 하나둘 흩어져서 제멋대로 앉아서 쉬었다.
‘이상한데. 왜 아무런 명령이 없는 거지.’
럼로우는 팔베개를 한 채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보통 이렇게 시차로 명령이 하달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아주 급한 상황도 아닌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에셋은 여전히 맛이 간 상태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뭐 그냥 이렇게 하루 지내면 나는 편하지. 럼로우는 눈을 감으면서도 품 안에 잘 챙겨 든 권총의 무게를 생생하게 느끼고 있었다.
*
“…뭐야.”
“…….”
“에셋. 너 미쳤어?”
“…….”
“허.”
럼로우는 찢어지는 비명을 들음과 동시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잠깐 긴장을 풀고 잠이든 것도 문제였다. 하지만 위치가 노출된 것 같진 않았다. 비명은 뭔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뚝 끊겼다. 럼로우는 주위를 돌아보며 품 안에 넣어둔 권총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에셋. 어딨어.”
“…….”
“에셋?”
“…….”
분명 잠들기 전까지 멍청하게 앉아있던 녀석이 오간 데 없었다. 은신처 안에 있는 것은 확실하다. 이 녀석은 명령 없이 독자적으로 움직일만한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백치였다. 럼로우가 조심스럽게 하나밖에 없는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뭐야.”
방 안은 처참했다. 누구한테서 흐르는지 모르는 피가 사방 벽에 뿌려져 있었고, 드문드문 새빨간 손자국이 찍혀있었다. 럼로우는 이 사태의 주인공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방 안에 앉아있는 검은 인영을 본 순간 숨이 턱 막히고 말았다. 그때 항상 귀에 걸고 있던 무전기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무기가 기름을 잘 먹었나?”
“…예?”
“자네가 가끔 움직일만한 연료를 줘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
“식사를 마치는 즉시 창고에 준비된 재료로 은신처 전체가 탈 수 있도록 불을 붙인 후 무기를 데리고 귀환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