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민호/토민호] Here I am 002
+) NOTICE
영화 1편을 기반으로 원작 네타(메이즈러너 파일분량)를 맛내기로 섞었습니다.
토민호인데 토마스랑 민호 한참동안 안만남 주의
적당한 망상과 설정 붕괴가 언제나 함께 합니다 ㅇㅅㅇ)9
어느정도까지 연재 후 뒷부분을 추가해 회지로 만들 예정입니다.
책이 나와도 연재한 분량 자체를 지우진 않습니다..
write. 환월
“들었어?”
“뭐가?”
“뭔가 움직이고 있는 거 같아.”
뉴트의 짧은 말에 민호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바쁘게 움직이던 발이 툭 멈추는가 싶더니 이내 가만히 눈을 감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선두가 멈춰 서자 자연스럽게 뒤따르던 무리가 그 주위를 둘러쌌다. 워낙 장소가 자잘한 소음으로 가득 차있어서 쉽게 파악하기 어려웠다. 눈을 감고 최대한 귀를 쫑긋거리며 저 멀리서 들리는 희미한 소리를 들으려 노력했다. 그러던 민호가 짧은소리를 내뱉으며 눈을 떴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아니지만?”
“우리를 여기에 가두고 뭔가 장난을 치고 있는 거 같아. 약한 진동이 벽에 계속 느껴지는 건 뭔가 큰 것이 움직이고 있다는 소리고, 여기엔 벽밖에 없으니까…….”
“점점 이 공간이 좁아지고 있다?”
“그럴 수도 있지.”
“그러면 이제 어떡하지?”
민호의 한마디에 아이들은 크게 동요했다. 부산스럽게 호들갑 떠는 아이들을 진정시킨 알비가 민호의 말을 기다렸다. 알비. 민호. 뉴트. 갤리. 자연스럽게 위로 올라온 아이들은 일종의 우두머리였다. 물론 서로 추구하는 바가 너무 달라 때때로 싸우기도 했지만, 적어도 네 명의 울타리 안에선 조금이라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자잘한 마찰이 계속되자 알비도 더는 동료들을 말릴 수 없었다.
“일단 계속 가보자.”
“아니 아무것도 모른다면서 그냥 가자 이거야?”
“…갤리. 잠깐만.”
“뭐? 내가 틀린 말 했어?”
뉴트가 불붙으려는 말싸움을 딱 자르고 막아섰다. 사소한 도발이라도 이런 곳에선 큰 혼란을 만들 수 있었다. 침착하고 냉정하게. 한 번만 더 생각해서. 뉴트는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어른스럽다 해도 어린아이는 아이일 뿐이었다. 초조한 듯 손톱을 잘근잘근 씹는 뉴트를 바라보던 민호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 꼴을 보고 있던 갤리는 팔짱을 낀 채 약간 물러섰다. 아무리 체력에 자신이 있다 해도 좁은 곳에서 민호와 싸우는 건 너무 손해 보는 일이었다. 그저 누군가에게 하는지 모를 짧은 욕을 내뱉으며 끝없이 펼쳐진 미로를 쏘아볼 뿐이었다.
“…움직이지 않아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야.”
“어떻게 그걸 단정하지?”
“갤리. 그건 내가 설명할게.”
“아까 큰 소리는 우리 뒤에서 들렸어. 그리고 동시에 앞에서도 들렸지. 우리 앞엔 거대한 무리가 있었고, 뒤에도 마찬가지야.”
“…….”
“왜 하필 머리와 꼬리를 잘랐을까.”
“눈치를 봐라?”
“그래. 하지만 이제 우리가 눈치챘으니 다른 방법으로 압박하겠지. 계속 머물러 있는 건 확률적으로도 좋지 않아.”
“…….”
뉴트는 따박따박 할 말을 하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이곳의 벽이 움직인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한곳에 오래 머무르는 것은 좋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장소를 이동하면서 정보를 모아야 했다. 하지만 한 번 지나간 곳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면.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점점 당황하기 시작했다. 뒤로 돌아갈 수도 없이 계속 걸어가다 막다른 길이라도 발견하면 큰일이었다.
“난 일단 움직이겠어.”
“갤리!”
“가만히 있다가 죽는 건 질색이니까 말이야.”
“…….”
“살아서 만나자고.”
강하게 말하는 갤리의 목소리에 몇몇 아이들이 동조하며 무리를 만들었다. 뉴트는 딱히 그것을 말리지 않았다. 동년배 아이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갤리를 막기엔 시간도 힘도 모두 부족했다.
절대 비켜주지 않을 것 같던 민호가 잠자코 물러섰다. 서로 싸우는 것은 가장 최악이라고 판단했다. 같이 모여서 살아남는 게 최선이긴 하지만, 갈라지더라도 살아있으면 그만이었다. 민호는 자연스럽게 뉴트와 아이들을 뒤로 보내고 알비와 함께 선두에서 막아섰다. 더는 내어줄 동료가 없다는 암묵적인 행동이었다.
그런 둘을 재수 없다는 듯 쏘아보던 갤리는 마음에 맞는 몇몇 아이들을 이끌고 무리에서 떨어져 나왔다. 바로 앞에 두 갈래 길이 있었고,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은 채 오른쪽으로 꺾어서 사라졌다.
“…….”
“두 그룹으로 나뉘었군.”
“벌써 갈라서다니, 한 턴 정도는 버틸 줄 알았어요.”
“좀 빠르긴 하지만, 뭐 그럴 수 있지. 어린아이들이란. 난 두 그룹의 선택이 흥미로워지는구나.”
“저도 그래요.”
토마스는 적당히 대답하면서 빠르게 다음번 움직일 미로 벽을 찾고 있었다. 사실 실험 군의 이동 경로를 바라보고 있다가 유동적으로 조작하는 것에 가까워 보였지만,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규칙성을 찾아내야 했다. 사람이 손으로 만든 기계가 불규칙하게 움직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실험실이 실내에 만들어진 간이 시설이라고 해도 꽤 넓었기에 빼곡하게 들어찬 벽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이런 곳에서 단순한 이니셜만 가지고 원하는 것을 찾는 일은 꽤 어려웠다.
‘A-08. A-08.’
물론 일단 벽의 위치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그다음이 더 문제였다. 움직임을 미리 알아낸다고 해도 그 정보를 민호에게 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정보는 휴지 조각만큼이나 쓸모가 없었다. 시간이 지날 수록 토마스는 점점 초조해졌다. 혹시 들킬까 애써 평정심을 가장하려 했지만, 얼굴에 하나둘 나타나는 불안함은 좀처럼 숨길 수 없었다. 어른들은 그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토마스가 도와줄 만한 일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민호가 조금이라도 오래 버틸 수 있도록 잠자코 지켜볼 뿐이었다.
‘찾았다.’
다음번 움직이길 예정된 벽은 왼쪽에 있었다. 갤리가 이끄는 무리가 반대 방향으로 간 것을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생명을 걸고 움직이는 곳에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하지만 갤리가 움직였기에 민호가 오히려 그쪽으로 움직일 수도 있었다.
토마스의 주먹이 바짝 힘이 들어갔다. 차라리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는 쪽이 좀 더 생존에 보탬이 될 것 같았다. 당장 실험실 안으로 들어가서 민호의 손을 잡고 출구를 향해 뛰고 싶었다. 흐릿하게 본 것이진 했지만, 출구까지 충분히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
물론 계획을 실행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커다란 유리창으로 가로막혀있는 연구실을 몰래 빠져나가는 것도 힘들지만, 사방에 감시카메라가 돌아가는 실험실에 몰래 들어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몇 번이나 민호 옆에서 길을 찾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잠시 딴생각을 하던 토마스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토마스.”
“…….”
“토마스!”
저 멀리 정신을 놓고 온 아이를 몇 번 부르던 연구원은 곧 고개를 돌려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이어갔다. 사실 토마스는 견학차 온 것이기 때문에 이 실험에 대해 모두 알아야 할 의무가 없었다. 토마스의 눈은 여전히 저 먼 곳을 보고 있었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가늘게 떨리는 속눈썹이 금방이라고 축축하게 젖어들 것 같았다.
“B그룹이 움직이는군.”
“네?”
“역시 노련하군요. 겁에 질려 움직이지 않는 쪽이 더 위험하다고 판단한 모양이네요.”
“그렇다면 ‘그곳’에 들어가서도 저 아이의 성격이 변수로 작용할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그렇지. 모두 고분고분하게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진 않을 테니까. 물론 ‘그곳’에선 살아남는 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
토마스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반도 알아듣지 못했다. 자신이 모르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엘리트 그룹인 토마스가 모를만한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려 했지만, 딱히 걸리는 것은 없었다. 아마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알리지 않은 정보가 있지 않을까 추측만 할 뿐이었다.
결국, 이 삭막한 곳에서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지켜보는 것밖에 없었다.
“움직이자.”
“뭐?”
“가만히 있다가 죽느니 움직이면서 살길을 찾는 쪽이 좋겠어.”
“하지만.”
“처음 벽이 움직이고 시간이 지났어. 다음번 벽이 언제 움직이는지 알아야 우리가 갈 방향을 정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우리는 이 곳 지리를 하나도 몰라.”
“알 수 있어.”
민호가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그 목소리에 모두 민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직 성장기가 오지 않아 조그만 아이는 생각보다 훨씬 다부진 목소리로 무리를 하나둘 설득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민호가 이곳의 지리를 어떻게 아는가는 알 수 없었다. 옆에서 작은 소란을 가만히 듣고 있던 뉴트가 슬며시 대화에 끼어들었다. 가만히 두면 멱살잡이를 해서라도 서로 이기려고 할 녀석들이었다.
“어떻게 알아?”
“움직이면서 외우면 돼.”
“뭐?”
“우리는 지금까지 쭉 걸어오다가 한번 오른쪽으로 꺾었어. 그리고 갤리는 오른쪽으로 다시 갔지. 이렇게 계속 외워서 새로운 길을 향해 계속 걸으면 되는 거야.”
“그러니까 민호가 지금 헛소리를 하는 거라고.”
“…….”
“뉴트. 날 믿어.”
“…….”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 이번에 목숨을 구하려면 당장 움직여야 한다니까. 이 바보들아!”
“…좋아.”
지금까지 조용히 지켜보던 알비가 입을 열었다.
다른 아이들보다 나이를 더 먹은 소년이 입을 열자 곧 소란이 가라앉았다. 뉴트는 슬쩍 민호 곁에 붙어선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알비는 민호의 말에 긍정했다. 이러나저러나 비슷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곧 움직이기로 하자 민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앞장섰다. 그리곤 조금 고민하더니 뉴트의 옷을 잡아끌어서 앞에 세웠다. 갑작스러운 민호의 행동에 조금 놀란 뉴트가 까만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우리 둘이 길을 찾는 거야.”
“뭐?”
“혼자서는 힘들어.”
“난 너만큼 길을 잘 외울 자신이 없는데.”
“뉴트는 할 수 있어.”
“…….”
“뉴트.”
“알았어.”
둘이 조심스럽게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갈림길을 맞닥뜨렸다. 세 갈래로 갈라진 미로는 흉흉한 벽을 가진 채 새까맣게 웃고 있었다. 잠시나마 갤리가 간 곳을 따라갈까 고민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확률을 높이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세 갈래 길을 바라보던 민호가 곧게 뻗은 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쪽으로 가자. 무리를 가장 앞쪽에 서 있는 사람의 말은 곧 무리가 가야할 방향에 대한 결정이었다. 알비가 고개를 끄덕이자 무리는 두말없이 민호를 따랐다. 꽤 흥미로운 사건이었다.
“흥미롭네요.”
“저 정도 리더십을 발휘하기 쉽지 않을 텐데.”
“지금까지 실험군을 한곳에 모아뒀으니 이미 그쪽에서 우열이 나뉜 것이 아닐까 하는데요.”
“그렇다고 보기엔…음.”
민호의 행동을 모두 지켜보던 연구원들이 바쁘게 프로필을 꺼내 들었다. 비슷한 나잇대 치고는 작은 체격의 동양인 아이는 놀랍게도 거의 모든 시험에서 상위권에 속해있었다. 짧은 감탄과 함께 모두 민호의 시험 성적을 돌려보며 한마디씩 던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토마스는 그 대화에 끼지 않았다. 걱정이 활활 타오르는 눈동자는 오직 민호의 뒤통수에 고정되어 있었다. 까맣고 반질반질한 머리카락을 따라 긴장이 뚝뚝 묻어나는 것 같았다. 민호의 작은 움직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눈을 떼지 않았다. 때때로 한숨을 쉬는 작은 얼굴에서 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실험실 안은 그리 덥지 않았고 오히려 서늘한 편이었다. 그러니 민호가 얼마나 긴장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토마스는 그런 얼굴마저 놓치고 싶지 않았다.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 짜증스럽게 찌푸리는 눈썹부터 입술을 깨무는 동작 하나하나가 모두 마음에 들어서 참을 수 없었다. 왜 이렇게까지 한 사람에게 집착을 하는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시선이 뚫어져라 뒤를 따르고 있었다.
“잠깐만.”
“왜?”
“…소리가 들리는데.”
벽이 움직이기로 설정된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조금씩 시끄러운 태엽 소리가 크게 들리기 시작하자 아이들이 점차 동요하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시끄러운 소음이 들렸기 때문에, 어느 쪽 벽이 살아 움직일 것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민호가 점차 발걸음을 늦추고 조심조심 사방을 살폈다. 벽에 바짝 붙어 선 채 사방을 돌아보며 귀를 기울였다.
“…….”
“민호?”
“곧 한 곳이 막힐 거 같은데. 이쯤에서 멈춰서 기다려 볼까?”
“아까는 멈추지 말라면서.”
“하지만 움직이다 벽에 끼기라도 하면 순식간에 팬케이크가 될 걸? 적어도 벽의 경계 부분에 얼씬거리는 것은 좋지 않을 거야.”
“히익. 농담 그만해. 민호.”
“농담 아닐걸,”
“뉴트도. 그만해!”
“그러니까 일단 여기서 기다려보자.”
민호가 애써 아이들을 다독이기 시작했다. 어지간히 없는 말솜씨로 설득하는 모습을 보니 좀 웃기기도 하고 재밌기도 했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서 웃음이 나온다니, 아무래도 미친 것 같았다.
“…그런데 여기가 움직이면.”
“끝인 거지.”
“…….”
잔인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민호를 보며 다들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하지만 맞는 말이었다. 괜히 서성거리다 움직이는 벽에 끌려 들어가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어린 펭귄들처럼 꾸물꾸물 모여든 아이들은 점점 불안하게 다가오는 미래를 두려워했다. 이 시간이 무사히 지나가길 빌었다. 민호가 가장 밖에 서서 끝없는 어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에 살아남아도 과연 출구까지 얼마나 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지 알 수 없었다. 전체 지형을 알지 못하니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앞으로 나가는 것밖에 없었다.
“…….”
쾅!
제법 가까운 곳에서 벽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금속이 맞물리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귀를 찢을 것 같았다. 모두 두 손으로 귀를 꾹 막은 채 소란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끝났다?”
“…살았네?”
하아. 민호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모습을 보니 한 번에 긴장이 확 풀어진 듯 다들 주섬주섬 모이기 시작했다. 애써 담담한 척 하고 있지만 민호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순간의 판단이 자신이 이끌고 있던 무리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이 간신히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축축하게 젖은 손으로 얼굴을 연신 문질러 닦았다. 잔뜩 더러워진 옷이 깊게 주름졌다. 한 번 고비를 넘겼으니 이제 조금 시간이 있었다.
“대단하네. 민호.”
“그냥 한 번 우겨 본 거야.”
“뭐?”
“어쩐지 여기서 죽을 거 같진 않았거든.”
“농담이라면 재미없어. 민호 덕분에 모두 목숨을 건졌네.”
“누군가 갇혔을까?”
“모르지.”
“혹시 우리가 아는 사람이었을까?”
“그것도 몰라.”
태엽 소리에 묻혀있었지만 희미하게 비명 소리가 들렸다. 민호는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굳이 말을 하지 않았다. 간신히 가라앉은 불안감을 다시 불러일으킬 필요는 없었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좀처럼 일어서지 못하는 민호를 부축한 알비와 뉴트가 서로 쳐다보면서 씩 웃었다. 놔라. 놔. 아무렇지 않은 척 둘을 밀어냈다. 그리고 바지를 툭툭 털었다. 한층 더 날카로워진 민호의 눈이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점점 물이 차는 거 같아.”
“…….”
“깊이 들어갈수록 물이 차는 거 아닐까?”
“가봐야지.”
“도대체 저 위에선 무슨 개 같은 일을 꾸미고 있는 거야.”
“우린 그냥 살아남을 생각만 하면 돼. 아무런 정보가 없는데 깊게 생각해봤자 머리만 아프니까.”
“맞는 말이야. 다들 계속 들어갈 거지?”
뉴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뒤를 몰아보았다. 세 사람에게 쏠려있던 시선이 아래위로 흔들렸다. 이미 셋에게 의지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두려움과 공포가 가득 찬 시선이 하나둘 겹쳐졌다. 어쩐지 어깨가 무거워지는 느낌에 민호는 가볍게 몸을 풀었다.
미로는 안쪽으로 걸어갈수록 점점 선택해야 하는 거리가 짧아졌다. 처음엔 이백 미터 쯤 걸어가야 꺾이는 길이 보였지만 지금은 열 걸음만 옮겨도 곧장 다시 선택해야 했다.
사실 이쯤 되니 어른들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민호가 외울 수 있는 구조 한계치는 넘은 지 오래였다. 똑같이 생긴 벽만 바라보고 있자니 슬슬 인지 부조화가 오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 한껏 뭉친 작은 무리는 꼬불꼬불 얽힌 곳을 위태롭게 헤쳐나가고 있었다. 이번만 돌아가면 끝이겠지. 이번만 넘기면 살 수 있겠지. 똑같은 생각을 하면서 부질없는 희망을 잡으려 애썼다.
“물이…….”
“응?”
“언제 이만큼 찼지? 어디서 물 흐르는 소리 들은 사람?”
“아니.”
“…전혀.”
뉴트가 알아채고 한마디 하고 나서야 모두 종아리까지 차오른 물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정도로 수면이 높아졌다면 지금까지 꽤 첨벙거리면서 이동했을 텐데, 아무도 몰랐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였다. 물론 살아남는데 온 신경을 다 쏟고 있는 아이들이 그런 것을 알아챌 여유가 있지 않았다. 하지만 한 번 인식하기 시작하자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그나마 흐르는 물은 아닌 것이 다행이었다. 종아리부터 발목까지 진득하게 감싸고 늘어지는 것을 뿌리치지 못했다.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발이 무거워졌고, 피로는 첩첩이 쌓여만 갔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더 깊어질 거 같은데.”
“나도 그렇게 생각해.”
“뉴트. 민호. 괜찮을까?”
“물이 점점 깊어진다는 걸 전제로 하면, 출구가 맞긴 할 거 같은데. 어느 정도까지 깊어지느냐가 문제네. 안 그래? 민호?”
“맞아.”
“아까도 한번 벽이 움직인 거 보니까 점점 시간도 짧아지는 거 같아. 움직이려면 빨리 방향을 정하자.”
맞는 말이었다. 사방에서 벽이 움직이면서 점점 공간을 나누고 있었고, 그 안쪽에 살아남은 아이들은 좁아지는 미로 안을 헤매고 있었다. 벽이 한 번 움직여서 공간을 차단할 때마다 물이 점점 차올랐다.
그렇게 키가 크지 않은 아이들은 금방 허리까지 물에 잠기고 말았다. 안 그래도 낯선 곳을 계속 헤매야 하는데 물까지 방해를 하기 시작하니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절반도 넘게 떨어진 속도로 헤매다 보니 아슬아슬한 상황이 계속 벌어졌다. 뚝 떨어진 기동력에 슬슬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면서 춥기 시작했다. 몇 시간 동안 물을 잔뜩 뒤집어쓰다시피 푹 젖어있으니 체력이 훨씬 빠르게 떨어졌다.
“으악!”
“서로 손을 잡아. 이제 더 깊어지면 진짜 위험 할 수도 있으니까. 알비. 척 좀 끌어줘.”
“알았어.”
“프라이. 윈스턴!”
“뉴트.”
“어?”
“너도 이리와.”
민호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한군데 뭉쳐있는 무리에서 조금 비켜선 채 이것저것 사람들을 돌보던 뉴트가 눈을 깜박였다. 뜻밖의 호의에 잠시 생각을 하다 씩 웃으면서 민호의 손을 잡았다. 자신보다 작은 아이가 뭐 그리 대단하게 느껴지는지 알 수 없었다.
수면은 한 걸음만 걸어도 눈에 보일 만큼 점점 위로 올라왔다. 허리에서 가슴 그리고 목까지 차오르자 숨 쉬는 것도 불편해졌다. 키가 작은 아이들은 부축해주는 친구에게 거의 매달리다시피 이동하고 있었다. 민호는 가장 앞장서서 있기에 코만 간신히 내놓은 형국이었다. 하지만 물속에 잠긴 손은 뉴트를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한 손으로는 벽을 더듬으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그나마 이곳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구조물이라 파도 같은 거센 물결이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이 고마울 정도로 연구실 안 상황은 점점 지독해졌다.
“…….”
토마스는 민호와 아이들이 하는 행동을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물에 푹 젖은 옷이 움직이지 귀찮을 정도로 민호의 몸에 달라붙고 있었다. 푹 젖어서 목에 달라붙은 까만 머리카락도 잔뜩 지친 얼굴도 모두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토마스의 예민한 신경 줄을 긁어내리는 점이 있다면 민호의 행동이었다.
당연한 일이긴 했다. 연구실에서 몇 달 동안 구르고 서로 부대끼며 살아온 친구들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민호가 이야기하는 것을 전적으로 지지해주는 몇 안 되는 녀석이기도 했다. 하지만 울컥 솟아오르는 감정을 누를 순 없었다. 왜 저 녀석은 특별대우를 받고 있는가. 이런 의문이 들기 시작하자 뜻 모를 질투가 흘러넘쳤다.
‘…뉴트.’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왜곡해서 받아들인 상황은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에 찜찜함만 남겼다. 당장 저 둘을 갈라놓고 싶었지만, 그럴 힘이 없었다. 아직 실험은 계속 진행 중이었고, 용케 살아남은 무리는 작게 뭉쳐서 서로 다른 곳을 헤매고 있었다. 처음 시작했을 때에 비해 절반도 넘게 사라진 프로필을 바라보았다.
‘역시 대단해. 민호.’
민호가 속한 그룹에선 아직 탈락자가 없었다. 물론 이 생존 확률이 무리를 이끄는 아이들의 능력인 것은 사실이었다. 그저 앞선 사람의 등만 보고 따라온 아이들도 여럿 살아남았다. 연구원들이 몇 명을 향해 손가락질하면서 상세 프로필을 열었다.
민호. 뉴트. 알비. 갤리. 네 명의 신체 수치를 비교하고 또 다시 뭔가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토마스는 그런 순위엔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아무리 토론을 해봐도 민호의 능력이 뛰어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니 갑자기 다리라도 다치지 않는 한 상위권에서 탈락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다리가 부러져도 다시 고쳐서 실험실로 내몰 것이 분명했다.
“…….”
다시 현장 카메라로 눈을 돌리자 뉴트를 끌어당기는 민호와 알비의 모습이 보였다. 약간 높은 턱이 있는 곳을 지나가야 했는데, 먼저 아이들을 보내고 가장 늦게 올라오는 뉴트를 끌어올리는 중이었다. 잔뜩 생채기가 난 상처가 온몸 가득한데도 애써 담담한 척하는 민호의 표정에 슬쩍 웃음기가 어렸을 때, 그걸 보고 있던 토마스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답답하다는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고통이 심장을 쥐어뜯으면서 온몸을 파먹고 있었다. 분노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는 걸까. 심장 부근을 손으로 쥐어뜯어도 그 고통이 사라지지 않았다.
왜 이렇게 아픈지 알지 못했다. 오랫동안 머릿속에 들어있어 존재를 잊어버리고 있던 칩이 오작동을 일으킨 것 같았다. 뇌가 쪼개질 정도로 두통이 몰려왔다. 숨을 쉬고 싶었지만, 목 한가운데에 커다란 돌이 단단하게 박힌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가슴을 쥐어뜯던 손이 목으로 옮겨갔다. 하지만 좀처럼 숨이 트이지 않았다.
“…허억.”
“토마스?”
“…….”
“토마스? 토마스 왜 그러니.”
“……”
심상치 않음을 느낀 연구원들이 하나둘 토마스 곁으로 다가왔다. 눈은 붉게 충혈되다 못해 피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간신히 숨을 쉬면 심장이 아프고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왜 자신이 아파야 하는지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뜻 모를 분노가 토마스의 몸을 완전히 삼켜버리자 더 버티지 못한 아이가 앞으로 쓰러졌다. 쿵 소리가 날 정도로 그대로 넘어진 몸이 경련을 일으키다 뻣뻣하게 굳기를 반복했다. 손끝이 하얗게 질려가면서 체온이 뚝 떨어졌다.
“세상에.”
“빨리 수술실에 연락하고 의료진들 모으라고 해. 그리고 어서 총장님께 연락드리고.”
“네…네.”
“이게 무슨…….”
갑작스러운 토마스의 발작에 놀란 쪽은 연구원들이었다. 급하게 실험 종료를 누른 연구원들이 급하게 토마스를 안아 들었다. 이번 실험이 중요하긴 하지만, 어느 정도 상위권의 윤곽이 잡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사람이 빠진 상태로 계속 진행을 할 수도 없었다. 아이들은 천천히 꺼내주기로 한 연구원들이 급하게 밖으로 달려 나갔다. 실험실을 바라보던 공간은 순식간에 텅 비어버렸다.
“물이 계속 차오르는데, 이거 움직이는 벽이 다 닫힌 거 아냐?”
“우리도 계속 위로 올라가고 있어.”
“그렇겠지. 방향을 헷갈리지 않는 건 참 좋은 일이네. 거꾸로 가면 꼼짝없이 빠져 죽겠어.”
“알고 있으면 빨리 움직여.”
어느 순간부터 자꾸 위로 올라가는 길만 나와서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지금 상황을 보니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키가 작은 아이들을 끌어올리는데 꽤 시간이 걸렸다. 몸이 날쌘 사람들이 먼저 올라가서 하나하나 손을 잡고 끌어올릴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뉴트가 올라오자 바로 물이 와르르 쏟아졌다. 무리에서 낙오됐다간 꼼짝없이 물에 빠져 죽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찰랑거리며 어느새 발목까지 차오른 물을 멍하니 보고 있던 아이들은 점점 절망에 잡아먹히고 있었다.
“진짜 끝난 건가.”
“…….”
“더 갈 곳이 있어?”
“저 위? 다 막힌 거 같은데.”
“…….”
어린아이들이 느끼는 죽음의 공포는 아무런 색이 없었다. 그냥 까맣게 입을 벌린 채 천천히 스며들고 있을 뿐이었다. 종아리까지 차오른 물이 어느새 가슴까지 찼다. 위로 올라갈 수는 있었지만, 이미 늦은 것 같았다. 적어도 둘이 밑에서 지지를 해야 간신히 한 명을 위로 올려보낼 만큼 높이가 높았다. 빠르게 차오르는 물을 보면서 서로서로 모인 아이들이 손을 꾹 잡은 채 눈을 질끈 감았다.
“…….”
“…….”
마지막인데 머릿속엔 아무것도 스쳐 지나가는 것이 없었다. 실험실. 실험. 연구원. 소독약 냄새. 위키드에 들어오기 전 기억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쩐지 슬퍼서 견딜 수 없었다.
입 안에 가득 들어차는 물을 상상하며 부르르 떨던 아이들이 점차 웅성거렸다. 누군가 가늘게 눈을 뜬 모양인지 순식간에 사방이 소란스러워졌다. 양쪽에 있는 아이의 손을 꾹 잡은 채 움직이지 않던 민호가 뒤늦게 눈을 떴다. 그리고 얼이 빠진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게…무슨.”
“물이 빠져나갔어.”
“…….”
“뭐야. 이거.”
쫄딱 젖은 아이들은 이 상황을 이해하려 애쓰고 있었다. 당장 자신들을 집어삼킬 것처럼 넘실거리던 물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꿈이라고 생각하기엔 축축하게 젖은 몸이 말이 되지 않았다.
“죽는 줄 알았어.”
“나도. 무슨 일이지? 아직 실험이 끝난 거 같지 않은데.”
주변을 둘러보던 알비가 입을 열었다.
“기계 소리가 멈췄어.”
“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출구를 아직 찾지 못했는데. 설마 여기서 실험이 끝나는 건가?”
“그럴 리 없는데.”
이러다 갑자기 자신들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실험을 시작하지도 않은 것처럼 멈춰버린 공간은 쌀쌀한 공기가 켜켜이 쌓여갔다.
추워. 누군가 한마디 말을 툭 던지자 너도나도 춥다며 아우성을 쳤다. 물에 푹 젖은 아이들은 그제야 추위를 느꼈는지 서로 모여서 체온을 나누기 시작했다. 옷이 천천히 말라가면서 체온을 빼앗았다. 턱이 덜덜 떨릴 정도의 추위가 온몸을 덮쳤다. 바짝 얼어있는 귓가에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헛소리를 듣나 싶었는데 멀리서 들리는 목소리는 점점 또렷해졌다. 게다가 익숙하기까지 했다.
“거기 누구 살아 있냐!”
“…….”
“어이!”
“갤리 목소린데.”
“살아있었네.”
“야…너희들이었어?”
“지금은 싸우지 말자.”
“누가 할 소릴.”
일찌감치 떨어져 나갔던 갤리가 무리를 이끌고 민호를 찾아왔다. 이쪽도 간신히 목숨만 부지했을 뿐 상황은 최악이었다. 살아있는 아이들은 한 시간도 넘게 실험실에 방치된 채 추위와 싸워야 했다. 간신히 출구가 열리자 새파랗게 입술이 언 아이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한 명 한 명 불러내서 건강 상태를 점검한 연구원이 담요를 한 장씩 들려서 돌려보냈다. 담요를 두른 채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있어도 추위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
“토마스.”
“…트리샤. 나 왜…….”
“넌 정말 바보야.”
기억이 뚝 잘라서 없어졌다. 분명 자신은 연구실에서 민호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순간 눈앞이 까맣게 변하나 싶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니 침대 위였다. 몇 번이나 왜 자신이 침대에 누워있는지 생각하려 했지만, 그 시간에 일어난 모든 일이 사라진 것처럼 텅 비어있었다. 애써 생각하려 하면 또 머리가 쪼개지는 것처럼 두통이 몰려왔다. 그리고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시선을 천천히 돌리자 옆에 앉아있는 트리샤가 보였다.
“나…왜 여기 있어?”
“쓰러졌다면서!”
“내가?”
멍청할 정도로 어이없는 대답에 트리샤가 빽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얼마나 걱정했는데. 갑자기 쓰러지고 몇 시간 동안 의식도 없이 누워있던 녀석이 간신히 깨어나서 한다는 소리가 저런 말뿐이었다.
“기억이 안 나.”
“…….”
“내가 왜 쓰러졌는지 까먹었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아. 트리샤. 나 아픈 거 아니겠지?”
“그럴 리 있겠어. 이 바보야. 어서 일어나란 말이야.”
트리샤의 걱정이 침대 한쪽에 똬리를 틀었다. 토마스는 민호가 받던 실험이 어떻게 끝났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 발작 덕택에 한동안 모든 연구실 접근 금지 처분을 받았다. 한동안 받아야 할 치료가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만큼 늘어났다.
토마스는 그렇게 꽤 오랫동안 침대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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