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키는 오래간만에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 없었다. 침착하게 들고 있던 봉투를 내려놓자 소파에 늘어져 있던 발이 이제야 꿈질거리며 움직인다.
“너…진짜.”
“아저씨 왔어?”
“…….”
“기다리다가 졸았지 뭐.”
“너…….”
“아, 왜.”
누가 잘못한 것인지. 참 뻔뻔하기 이를 데 없었다. 소파에서 일어나 등받이에 턱을 댄 녀석은 아직도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멍든 얼굴에 씩 웃다가 아픈지 얼굴을 찡그린다. 내가 미쳤지. 버키를 혀를 끌끌 차면서 봉투를 뒤적였다.
“그래. 언제쯤 나을 예정이고?”
“그거야. 난 모르지.”
“…….”
“내가 의사야? 그걸 어떻게 알아.”
“죽다 살아난 주제에 말이 많다.”
“살아있으니 아저씨 얼굴도 다시 보고, 집에도 들어오고 좋네.”
“주둥이만 살아서.”
“흥.”
그대로 소파에 다시 누워버린다. 그리곤 들으라는 듯 끙끙 앓기 시작한다. 갈비뼈가 아프네. 발목이 부러진 것 같네. 얼굴이 아프네. 버키가 때린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렇게 온갖 아픈 척을 하다 보면 버키가 가까이 다가온다. 물론 럼로우는 약간 기대를 하지만 버키는 모르는 척 가슴을 꾹 눌러서 제대로 눕히곤 했다.
“악!”
“…….”
“아저씨 일부러 그랬지.”
“내가 뭘?”
“와, 진짜 이럴 거?”
“이럴 건데.”
“아저씨가 이럴 줄 몰랐네. 다친 청소년 보호는 못 할망정…….”
“네 입으로 어른이란 소리를 한 이십번은 들은 것 같아.”
“…….”
“오늘은 밥 먹고 일찍 자.”
“맥주는?”
“다친 녀석이 무슨 술을 찾아.”
“쳇.”
럼로우의 입술이 오리 주둥이 만큼 나와 버린다. 얼음 주머니가 볼에 닿았다. 얌전히 있어. 사실 발목이 완전히 부러진 상황이라 움직일 기력도 없어 보였지만, 꼭 이렇게 말해야 마음이 놓인다. 럼로우는 아직도 입이 댓 발이나 나온 채 얼음 주머니를 문지른다. 버키는 봉투 안에서 이것저것 음식 재료를 꺼냈다.
“오늘 메뉴는 뭐야?”
“굶겨서 내쫓기 전에 얌전히 얼음이나 문질러.”
“너무하네.”
“너야말로 내 인생에 너무 하다고 생각 안 해?”
“음…그 건은 지금부터 생각해보고 있을게.”
“어휴. 내가 진짜 멍청했지.”
럼로우는 늘 따박 따박 말대답을 한다. 눈도 똑바로 마주치면서 말이다. 그러면 먼서 한숨을 쉬는 쪽은 버키였고, 먼저 돌아서기까지 해버린다. 버키는 늘 사람을 오래 대하는 것을 부담스러워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자신의 인생에 훌쩍 뛰어들어온 이 망나니 같은 녀석은 사적인 영역은 생각도 안 하는 것처럼 버키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오늘은 그냥 샌드위치나 먹어.”
“그거 사 온 거야?”
“그래.”
“나 샌드위치 좋아해.”
“어련하겠어.”
“정말이야.”
“…….”
“기왕이면 아저씨랑 같이 먹는 게 더 좋고.”
이 녀석을 지금이라도 내쫓아야 하지 않을까. 버키는 이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렇게 모질지 못한 사람이었다. 저런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었다면 애초에 새벽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집 안에 들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도…아직 멀었어.’
버키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냉장고를 열었다. 다행히 반쯤 남은 우유가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 버터를 꺼내서 올려두었다. 사실 늘 대충 먹고 때우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라 집 안에서 많은 요리를 하지 않았다. 그나마 해 먹는 것은 간단한 달걀 요리나 베이컨 종류였고,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은 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그렇게 먹고산다고 다친 녀석까지 막 먹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유와 버터를 냄비에 넣고 천천히 끓이기 시작했다. 눈감고도 만든다는 매쉬 포테이토 가루는 이럴 때 제법 쓸모가 있었다. 보글보글 고소한 냄새와 함께 끓어오르는 소리가 나면 은박 봉투에 들어있던 가루를 한 번에 와르르 쏟아버렸다. 감자를 직접 으깨서 만들어줘야 할 것 같지만, 그런 건 버키도 해 먹으면서 살지 않아서 할 수 없었다.
“또 그거 만들어?”
“싫으면 먹지 마.”
“아니야. 나 그거 좋아해.”
“그래. 많이 먹어.”
저 멀리서 무슨 소리가 들린다. 이럴 때마다 버키는 럼로우에게 등을 돌린 채 가늘게 웃곤 했다. 저 녀석 앞에서 슬쩍 웃기라도 하면 늘 세상이 시끄러워진다. 적당히 저어주기 시작하면 가루가 사정없이 우유를 빨아들인다. 아무래도 우유 계량에 실패했는지 점점 더 퍽퍽해진다. 버키는 옆에 있는 우유를 들어서 대충 끼얹은 다음 계속 주걱을 저었다. 적당히 만들어진 것을 접시 옆에 덜고, 남은 공간에 샌드위치를 올린다. 그리고 옆에 커피 한잔까지 놓으면 간단한 저녁이 완성된다.
“밥 먹어.”
“잠깐만.”
아닌 척 해도 많이 다친 것은 맞는 모양이다. 절뚝거리며 한 발로 뛰어온 녀석이 의자에 앉는다. 갈비뼈를 문지르며 끙끙 앓는다.
“잘한다. 아주.”
“식탁 앞에서 왜 또 혼을 내.”
“그럼 그 꼴을 보고 혼을 안 내게 생겼어?”
“…….”
“왜 자꾸 술 먹고 그렇게 새벽에 행패 부리고 다녀.”
“그거야…….”
“잘못한 건 알아?”
“행패 안 부렸어.”
“뭐?”
버키가 웃으며 물었다. 럼로우는 내심 억울한 얼굴로 버키를 바라본다. 뺨에 시커멓게 멍이 든 주제에 할 말은 많은 모양이었다. 어서 말해보라는 듯 손을 휘휘 젓고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호기심이지.”
“호기심에 목숨 걸고 다녀?”
“그거야…좀 위험해서…….”
“위험?”
“아, 아니.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너 뭐 하고 다니는 거야.”
“…….”
“새벽에 그렇게 쓰러져서 집에도 못 찾아갈 정도로 맞고 다니는 게 호기심 해결 때문이라고?”
“…….”
럼로우는 묵묵히 샌드위치를 씹어 넘겼다. 말실수했다. 이런 표정을 숨기지도 않는다. 버키는 밥 먹고 두고 보자는 표정으로 럼로우를 노려본다. 사실 버키가 이렇게 표정을 대놓고 굳히면 등골이 금방 서늘해질 정도로 무서웠다. 럼로우는 애써 그 시선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오늘 저녁은 제법 살벌했다.
*
그러니까 버키가 럼로우를 만난 것은 새벽 운동 길이었다. 사람이 많으면 불편하다는 이유로 버키는 늘 새벽에 운동하곤 했다. 물론 새벽길이 공기도 맑고, 차가운 공기를 들이켜면 잠이 빨리 깬다는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가 큰 부분을 차지하진 않았다.
아직 쌀쌀한 날씨는 긴 숨을 금방 하얗게 얼려버린다. 버키는 길게 흩어지는 자신의 숨을 바라본다. 후우. 괜히 크게 숨을 내쉬면 꼭 담배 연기처럼 뭉클 피어올랐다. 그리곤 천천히 길을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늘 지나가던 곳에 낯선 검은 물체가 하나 있었다.
‘뭐지.’
처음엔 쓰레기 봉지인 줄 알았다. 하지만 점점 가까이 다가가자 그건 웅크린 채 쓰러진 사람이었다. 깜짝 놀라 의식을 확인한다. 코끝에 약한 숨이 느껴지고, 그다음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얼굴엔 울긋불긋한 멍은 물론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
모르는 사람이라도 당황할 판에 아는 얼굴이었다. 새벽길 문을 연 약국도 병원도 찾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매정하게 다친 사람을 놔두고 갈 성격도 되지 못했다. 버키보다 약간 작은 녀석을 간신히 부축해서 일어난다. 의식이 없어 늘어진 녀석을 겨우겨우 끌어서 집에 데려왔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온몸은 추운 날에도 땀범벅이었다. 그렇게 겨우겨우 소파에 눕힌 녀석은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끙끙 앓았다.
눈에 보이는 외상은 확실하지만, 안쪽은 장담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살살 먼지만 씻어낸 후 약을 바른다. 그렇게 반나절을 내리 잔 녀석이 간신히 눈을 떴을 때 버키는 자리에 없었다. 럼로우는 낯선 공간에서 도망칠 만큼의 체력도 없어서 그대로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아…저씨?”
“그래.”
“아저씨가 어떻게. 악!”
“누워있어.”
급하게 일어나려다 옆구리를 붙잡고 스러진다. 미운 놈 한 번 더 잘해준다는 심정으로 버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병원은 죽어도 안 간다기에 그냥 그러라고 했던 것이 벌써 일주일째다. 아예 소파에 자리 잡고 누운 녀석은 버키가 보면 더 아픈 척을 한다. 버키도 어느 정도 응급 지식은 있어서 갈비뼈나 장기를 다치지 않은 것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더 걱정되는 터라 그냥 놔두었다. 그걸 잘 아는 녀석은 오늘도 열심히 소파에서 시위한다. 늘 그랬다.
*
“아저씨.”
“…….”
“아저씨!”
“…어. 왜.”
“나한테 물어본 거 다 대답했다?”
“뭐?”
“아저씨가 안 들은 거야.”
“너. 잠깐만!”
“잘 먹었습니다. 환자는 접시만 치우고 다시 누워야지.”
버키를 뒤로한 채 럼로우가 일어선다. 접시를 물속에 담가두고 절뚝거리며 버키 곁을 지나친가. 그리고 소파까지 느릿하게 걸어가더니 앓는 소리를 내며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