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히삼/제갈유비] 창공의 전기(蒼空之傳記) 017
+) NOTICE
레전드 히어로 삼국전 2차 연성입니다.
유비와 제갈량 / 조조와 사마의 / 손책과 주유가 각각 궁의 주인과 신선으로 나옵니다.
제갈유비 연성으로 시작했지만, 둘이 만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수 있습니다.
동양 AU 및 설정 날조가 항상 함께합니다.
적당한 망상과 설정 붕괴가 언제나 함께 합니다 ㅇㅅㅇ)9
write. 환월
아침 해가 뜨고 뿌옇게 가라앉았던 안개가 사라질 때까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던 신선이었다. 해가 길게 흘러들어와 무릎에 닿았다. 그 따뜻함을 잠시 느끼더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신수들은 뒤를 따르려다 포기한 듯 바닥에 늘어진다.
오늘도 여전히 약을 준비한다. 이러나저러나. 군주의 몸은 너무 불안정했다.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인간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육체는 좀처럼 힘을 담아두기 어려워 보이기만 했다. 단단한 비늘처럼 짜인 군주의 육체와 달리 인간은 너무 연약하다. 그대로 툭 터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차마 손조차 함부로 대지 못했다.
“…몸이 빨리 회복되셔야 할 텐데.”
제갈량은 약을 준비하면서 내내 한숨을 쉰다. 성인도 버티기 힘든 힘을 어린아이 몸에 담고 있다는 것이 불안하기만 했다. 다행스러운 일이라면 궁에 들어와서 이렇다 할 발작은 없었다는 정도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차라리 다 큰 청년의 몸으로 나타났다면 이만큼 조급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다 저렇게. 여기까지 생각하던 제갈량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깊게 생각을 해봤자, 생각에 먹히기만 할 뿐…….”
이런 상황에서도 묘하게 냉정하고 이성을 유지하는 것을 대단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제갈량은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도 익숙하지만, 주위 상황을 꿰뚫어 보는 것도 빨랐다. 어차피 군주가 돌아왔다. 그러면 분명 다른 곳이 움직이기 시작하겠지만, 당장은 아무런 정보가 없으니 조심스럽게 시기를 엿볼 것이 분명했다.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까지 주군을 잘 보살피면 되는 일이었다.
“문제는 이걸 어떻게 드시게 하는 거겠군.”
탕기에 약을 담는다. 손수 준비한 약이 식기 전에 침전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그런 신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침실엔 여전히 해가 뜨지 않았다. 푹신한 이불에 파묻힌 채 정수리만 간신히 내놓은 작은 아이는 움직임도 없이 순하게 잠을 자고 있었다. 물론 겉으로는 그랬다.
“주군. 기침하셨습니까.”
“…….”
“주군?”
“…….”
돌아오는 답이 없다. 제갈량은 한숨을 쉬면서 몇 번이나 다시 유비를 부른다. 하지만 쥐죽은 듯 조용한 침실에선 인기척조차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얕은수에 속아 넘어갈 제갈량이 아니었다. 대답이 들리지 않으면 침실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예의라고 하지만, 신선은 그런 예의를 지킬 생각이 없어 보인다. 발로 문을 걷어차지 않은 것만으로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들어가겠습니다.”
“…….”
“그럼.”
“…….”
약을 든 채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온다. 혹여 아침 햇빛에 눈이라도 부실까 봐 발을 내려둔 침실은 아직 어둑어둑하기만 했다. 딱 좋은 포근함과 희미한 햇살. 그리고 조용함까지. 늦잠을 자기엔 그 어느 곳보다 좋은 곳이었다. 하지만 그런 평화 속에 툭 걸어 들어온 신선은 한순간 조용한 분위기를 흩어버렸다.
“주군.”
“…….”
“기침하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
“주군?”
“…….”
이렇게 조용한 것은 다 나름의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제갈량은 유비의 머릿속을 훤하게 꿰뚫어보곤 했다. 물론 유비의 그릇 크기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럴 때 어떤 행동을 하더라. 이 정도는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거의 비슷했다.
“주군?”
“…….”
한 번 더 불러본다. 이렇게 끈질기게 달라붙는 신선을 뿌리칠 재간이 없었다. 결국, 뒤돌아 누워있던 유비가 졌다. 빙글 돌아 눈만 빠끔하게 내놓은 채 제갈량을 바라보았다. 아직 어려도 한참 어린 얼굴로 저러고 있으니 낯설기만 했다.
“예전에도 이러시더니 전혀 변하지 않으셨군요.”
“하지만…….”
“이런다고 해서 드셔야 할 약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직도? 그래야 해?”
“더 해야 할 수도 있죠.”
“…….”
“일어나세요. 약이 식습니다.”
그저 유비의 몸이 조금 어릴 뿐 늘 하던 말과 달라진 것은 없었다. 주군은 예나 지금이나 쓴 것을 싫어한다. 약이 입에 맞지 않는다는 어처구니없는 변명도 한다. 약은 입에 맞아서 드시는 것이 아닙니다. 차근차근 주군의 말에 반박하는 신선의 목소리가 길게 따라온다.
“어려지셨다고 하지만, 어린아이처럼 구시면 안 될 일입니다.”
“…….”
“궁의 체통도 생각해 주셔야죠.”
“하지만…난 이렇게 건강한데.”
“…….”
건강? 제갈량은 그 한마디에 유비를 가만히 바라본다. 더할 나위 없이 단정하게 생긴 얼굴이 빤히 바라보는 것은 좀처럼 뿌리치기 어려운 일이었다. 유비는 제갈량이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을 무서워한다. 누구보다 귀한 자리에 오른 이인데,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모습이야 이렇지만. 아픈 곳도 없고.”
“…….”
“내가 좀 늦게 일어나긴 했지만…계속 약을 먹을 만한 일은 아닌 것 같아서.”
“…….”
“…그러는 거지. 응?”
“주군.”
“알았어. 제갈량. 먹으면 되는 거지?”
“네.”
어차피 이렇게 못 이길 걸 알면서도. 유비는 늘 한 번씩 반항 아닌 반항을 해보곤 했다. 군주의 지위를 가진 자가 이렇게 절절매는 것은 그리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었다. 제갈량은 이것은 자신의 주군이 너무 착해서 그런 것이라고 평했다. 누구나 굽어살필 수 있고, 품으려고 하는 성정 때문이라 하면서도. 늘 그런 식으로 대하면 안 된다고 말하곤 했다.
“…그래서 역시 싫다.”
“빨리 드시는 편이 덜 쓰지 않을까 합니다만.”
“제갈량은 늘 냉정하구나.”
“조금이라도 나은 방법을 고한 것뿐입니다.”
“…….”
오만상을 쓰면서 약을 바라본다. 대접에 구멍이라도 뚫을 생각인지. 사약을 받는 사람처럼 표정이 점점 죽어간다. 하지만 제갈량이 지키고 있으니 몰래 버릴 수도 없고. 계속 버틸 수도 없었다. 눈을 감고 약을 마신다. 혀끝부터 피어오르는 쓴맛에 절로 눈을 찌푸린다.
“…으.”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짧게 실랑이를 하면 좋겠군요.”
“너무 써.”
“그야 약이니까…….”
“너무 쓰다. 제갈량.”
“다음부터는 입가심으로 드실 다과를 같이 준비하겠습니다.”
“정말?”
“예.”
그런 작은 것 하나에 기뻐하는 주군을 보며 제갈량은 피식 웃고 말았다. 몸이 작아지니 그냥 어린아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차라리 좀 더 일찍 태어나 주군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봤으면 이보다 덜 놀라지 않았을까. 가끔 이런 상상을 했다.
신선은 어린 시절이 존재하지 않는다. 옥새가 군주를 보필하기 위해 최상의 상태로 태어나게 하는 탓에 그 누구도 어린 시절을 경험하지도 만나지도 못한다. 게다가 보통 군주로 오르는 자의 나이는 거의 비슷했다. 갓 성인이 된 이부터 불혹의 나이까지. 비슷한 구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어린 군주가 그간 없었기에 제갈량은 어린 유비를 잘 다루지 못한다.
“약을 언제까지 먹어야 할까.”
“몸이 힘을 견딜 수 있을 때까진 드셔야 합니다.”
“그건…….”
“지금도 약간 불안하긴 마찬가집니다. 도대체 무슨 공격을 받으셨기에 몸에 난 상흔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건지.”
“…….”
“이 신선은 알 길이 없군요.”
“그건…….”
유비는 가만히 생각한다. 그러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버린다. 제갈량은 대답을 들을 수 있으리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눈앞에서 서서가 소멸하는 것을 본 사건이 아닌가. 굳이 이 일을 상기시켜서. 안 그래도 불안한 몸에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잠시.…제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응?”
“볼에 있는 상처는 제가 옮겨갔습니다만.”
“…….”
유비는 저 짧은 한마디는 듣는 것만으로 제갈량이 무슨 일을 하려는지 짐작한다. 하지만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제갈량이 먼저 훅 치고 들어왔다.
“다른 쪽은 의식이 없으셔서 지금까지 그대로 두었습니다. 허나 시간을 더 끌 수 없는 일. 주군의 육체가 아직 온전치 못하니 제가 대신 상처를 회복하겠습니다.”
“아니. 그건 허락 못 해.”
“어째서.”
“그야…이건 내가 다친 거고. 제갈량이 상처를 입을 필요는 없어.”
“신선은 군주를 보필하기 위한 존재. 당연히 상처도 떠안아야 합니다. 게다가 제가 회복하는 쪽이 더 빠를 것 같군요.”
“그래도…….”
“주군께서 빨리 자리를 털고 일어나시는 것을 바랄 뿐입니다.”
“…….”
여러 번 말했지만, 유비는 보통 제갈량을 이기지 못했다. 물론 고집이 센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이럴 땐 제갈량의 말을 듣는 편이 낫더라. 군주는 늘 그렇게 말을 했다. 더 똑똑하고 영민하다. 모든 것을 살피고 가장 좋은 방법을 찾아낸다. 제갈량에게 쏟아지는 찬사는 유비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힘을 실어주곤 했다. 그리고 보통 그 생각이 맞았다.
제갈량은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저번엔 의식이 없어서 입술로 옮겨갔지만, 지금은 약간의 접촉만으로 충분했다. 유비가 허락하고 하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균열을 일단 막아야 했다. 다행히 몸이 버티고 있다지만 어디서부터 갈라지고 물이 샐지 알 수 없었다. 제갈량이 조바심을 내는 부분은 바로 이쯤이었다. 하지만 착해도 너무 착한 유비는 자신보다 늘 신선을 먼저 걱정하곤 했다.
“제갈량…그러니까.”
“안됩니다.”
“응?”
“조금이라도 빨리 몸을 회복하시는 것이 중요하기에…이번만큼은 절 생각해주시는 주군의 명에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
“전 괜찮습니다.”
부드럽게 손과 손이 얽힌다. 제갈량의 손끝으로 상처가 옮겨간다. 유비는 자신의 몸에서 사라지는 상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떻게 다쳤더라. 흐릿한 기억도 함께 쓸려 내려가는 것처럼 사라진다. 제갈량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가만히 유비의 눈동자를 바라본다.
“제…갈량?”
“도대체 주군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야 마음이 놓일 것 같군요.”
“…….”
“인간의 몸에 어떻게 들어가신 것인지…이렇게 계시면서 왜 돌아오지 않으셨는지.”
“…….”
“하나하나 다 알아낼 것입니다. 그리고.”
“또…뭘?”
“이 모든 상황을 조종한 배후인물을 찾아야죠.”
“…….”
“분명 있지만 아직 꼬리조차 잡지 못했으니. 시간은 조금 걸리겠군요.”
“그건…….”
“제가 그렇게 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주군이 건강하셔야 합니다. 회복하시면서 무술 연습도 하시면 더 좋겠군요.”
“…….”
“약은 식사 후 한 번 더 올리겠습니다.”
“아프지 않아?”
“…예?”
“몸에 상처가…….”
제갈량은 이제야 자신의 손바닥을 쳐다본다. 같은 구역에 생기는 상처는 대부분 큰 부위였다. 작은 것은 손바닥이나 볼 쪽에 한 번에 몰아서 생기기도 한다. 늘 해오던 일이라 그렇게 고통이 심한 것 같진 않은데, 주군은 늘 이런 신선을 걱정한다. 찢긴 것 같은 상처가 제갈량의 몸에 새겨진다. 도술과 생명을 사용해 조금씩 회복하면 그만인 일이었다. 하지만 꼭 유비를 다시 만난 제갈량이 그랬던 것처럼 유비도 걱정을 내려놓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렸다.
“이정도야 아무것도 아닙니다.”
“…….”
“어차피 이 사건의 실마리를 찾으려면 그 당시에 있었던 모든 것을 살펴봐야 하니 어차피 제가 가져와야 할 몫이었습니다.”
“그래도…….”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인간의 육체보단 단단한 편이니까요.”
“…….”
“전 그저…….”
“응?”
“주군을 다시 만나지 못할까 봐. 그것을 가장 걱정했습니다. 제 몸에 몇 번이나 상처를 옮겨와도 좋았습니다. 그저 주군이 돌아오신 것이 기쁠 뿐.”
“…….”
“정말입니다.”
“그게…저.”
제갈량의 한마디에 유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그러더니 결국 이불을 푹 뒤집어쓴 채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사실 작은 아이가 무슨 일을 하든지 제갈량은 귀엽기만 하다. 그래서 더 이런저런 말을 보태는 것일 수도 있다. 귀엽다. 이런 생각을 감히 자신이 모시는 군주에게 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모시는 주군의 의외인 면을 보면서 약간의 즐거움을 찾는 제갈량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비는 한참 동안 이불 속에 숨어서 나오지 않았다.
**
물론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큰일이 나지 않고 조금 나아진다 싶었다. 아주 조금이지만 응룡의 힘도 돌아오기 시작했다. 궁 주변의 숲이 살아나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었다. 인간의 몸에 깃들은 군주는 제대로 된 힘을 사용하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무리하면 인간의 육체가 힘을 감당하지 못하기에 제갈량은 억지로 권하지 않았다.
물론 이런 쪽에선 유비의 고집이 더 셌다. 제갈량이 걱정을 하면서 맥을 짚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결국, 일이 났다. 궁에 사는 신선과 신수는 힘에 대한 이야기를 입 밖으로 올리지 않았다. 어차피 드나드는 이가 없기에 몇몇 입만 단속하면 편했다.
하지만 그렇게 조심해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유비의 머릿속이었다. 조용히 흘러가는 시간에 의문을 가진다. 천성이 착한 군주는 자신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일찍 눈치챈다. 처음엔 그저 조심스럽게 연습을 한 번 해봤을 뿐이었다. 괜찮은 것 같았다. 희미하게 손끝을 감으면서 사라지는 응룡의 힘이 느껴진다. 눈에 보일 만큼 가시화되진 않는다. 그래도 느낄 순 있었다. 혹여 자신의 가족이 눈치챌까 봐. 조금씩 조금씩 연습을 한다. 군주는 궁을 지키면서 동시에 단단한 뿌리가 되어야 한다.
제갈량은 시간이 해결해준다고 말했지만, 그 뒤에 숨겨진 의미를 멋대로 읽어낸다. 유비는 눈치가 빨랐고, 자신이 뒤떨어져서 다른 이가 힘들어하는 것을 두고 보지 못했다. 비록 몸이 불안정하다고 하나 그만큼 연습으로 맞출 수 있다면. 이런 생각이 들자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었다. 그렇게 눈을 피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유비의 생각과 달리 조금씩 쌓인 피로는 어느 순간 단번에 몸을 잡아먹기 위해 조용히 몸속에 들어앉은 채 몸집을 불리고 있었다.
“주군!”
“…….”
“주군…제가 뭐라고 말씀드렸습니까.”
“제갈량…난 열심히 하려고 했는데…….”
“인간의 몸으로 힘을 사용하시다니요. 제가 아무리 주군께 잔소리했다고 하지만, 제 말을 듣지 않으시는 것도 정도가 있지.”
“그거야…….”
“언제까지 이렇게…….”
작은 몸이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덜덜 떨린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같이 버석거리는 몸을 조심스럽게 안아 일으킨 제갈량은 눈썹을 잔뜩 찡그리면서 한숨을 쉬었다. 피부가 힘을 버티지 못하고 비늘 모양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이러다 주군까지 위험해지십니다.”
“하지만…서서 때처럼.”
“…….”
“그때처럼 아무것도 못한 채 모두를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으니까.”
“…….”
“그러면 조금이라도 빨리 회복해야 하는 거잖아.”
“그렇게 말씀하신 후 주군이 하신 일은 회복은 고사하고, 몸이 무너지기 직전까지 혹사하신 것에 가깝지만 말이죠.”
“…….”
“일단 과부하를 옮겨 받는 방향을 찾아보겠습니다. 곧 몸을 진정시킬 약과 술법을 준비할 테니 제발 침대에 누워계셔 주세요.”
“…미안해.”
유비는 자신의 몸이 얼마나 너덜너덜해진 것인지 이제야 안 것 같았다. 곁에 머물던 신수들은 저 멀리 처마 그림자에 숨은 채 가까이 내려오지도 않았다. 유비를 침실에 모신 후 걸어 나온 제갈량이 신수를 부른다. 하지만 대답조차 없었다. 허. 짧은 한숨이 툭 떨어진다. 그러자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더니 신수가 뚝뚝 떨어진다. 그리곤 뭘 잘못 했는지 제갈량의 주위를 빙빙 돌 뿐이었다.
“제가…주군께 힘을 빌리지 말라고 말을 했을 텐데…….”
“…….”
“물론 주군께서 마음이 조급하시어 그렇게 요청했으리란 사실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
“허나.”
“…….”
목소리가 서늘해진다. 제갈량의 감정이 이번만큼 요동치는 일도 드물었다. 유비는 젊은 군주답게 이런저런 사고를 많이 치는 편이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주군의 행동을 책망하지 않았다. 그저 다시 떠날까 봐. 마음에 조급증이 생겨서. 제갈량은 자신의 마음에 여러 감정이 깃드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을 곧게 바라보는 눈은 이럴 때 아주 약간 불편했다.
“주군의 몸이 온전치 않다는 것을 알고 계셨을 텐데.”
“…….”
“이번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시면 뭐든 이야기를 해봐야겠습니다.”
“…….”
“주군을 지킬 수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요.”
신수는 입을 열지 않았지만, 충분히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제갈량은 급히 약을 준비한다. 강한 약으로 응룡의 기운을 누르는 것은 한계가 있지만, 그렇다고 손을 놓을 수도 없었다. 몸이 조금만 더 회복된다면 직접 도술을 써볼 수도 있겠지만, 그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결국, 인간의 육신이 문제였다. 이렇게 발목을 잡을 줄 알았을까. 아마 제갈량도 몰랐을 것이 분명했다.
“…….”
“이번엔 쓰다고 하시지 않는군요.”
“그야 내가…잘못했으니까.”
“군주에게 누가 감히 잘못이란 말을 입에 올리겠습니까. 그저…….”
“미안해. 제갈량.”
“그저 조금만 더 건강하시길 빌 뿐입니다.”
“…응.”
“힘이 조금 가라앉으면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
“그저.”
“…….”
“아닙니다.”
그렇게 사흘을 침대에서 보냈다. 앓아누운 유비를 보살피던 제갈량은 남몰래 한숨을 쉰다. 뭔가 생각이 있음은 분명하지만, 속 시원히 말을 해주진 않았다. 유비는 꾹 참고 기다린다. 지금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너무 커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주군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신선은 작은 상자를 가져왔다. 유비는 그 상자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침대 곁에 머물던 신수 넷이 한 번에 사라진 것을 보아하니 그리 좋은 물건은 아닌 듯싶었다.
“이게 뭐야?”
“…….”
“응?”
“주군의 몸에 무리가 가는 이유가 있을 것 같아서 생각을 해봤습니다.”
“…….”
“모든 힘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로 신수를 부리려니 안 그래도 불안정한 육체가 버티질 못하는 모양입니다. 물론 신수의 숫자가 많기도 하지만요.”
“그럼…….”
“신수를 봉인할 수 있는 상자입니다.”
“…….”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주군의 안전. 그 안전을 위협하는 것을 애초에 곁에 놔주지 않겠습니다. 이것이 신수라고 해도 말입니다.”
“저기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데?”
“깊은 잠을 잘 겁니다.”
“…….”
신선의 대답은 확고했다. 유비는 가만히 그 단단한 눈을 바라보다 상자를 내려다본다. 그저 작은 상자일 뿐인데 들여다보면 볼수록 빠져드는 것 같았다. 제갈량은 그런 유비의 눈을 가볍게 가리면서 상자 뚜껑을 닫는다. 분명 무슨 도술이 걸려있는 것은 확실한데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이럴 땐 제갈량의 힘을 온전히 알아차릴 수 없는 몸이 아쉽기만 했다.
“불필요한 힘의 소멸을 막는 방법입니다. 주군의 육체가 조금이라도 빠르게 회복되기 위해선 신수에게 나눠주는 힘도 아까우니까요.”
“그래도…가두는 건 좀.”
“…….”
“언제나 날 지켜주던 아이들인데…미안하잖아.”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 궁에 풀어놓을 수도 없는 일이니까요.”
“…….”
유비는 말문이 탁 막힌다. 제갈량의 목소리엔 이유 모를 화가 깃들어 있었다. 분명 자신에게 실망했으리라. 그렇게 어림짐작을 하자 가슴에 또 돌이 쌓였다. 분명 머릿속엔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다. 그것을 정리해 똑똑하게 말하고 싶은데 늘 제갈량이 원하는 답을 해주지 못한다.
“신수에게 하나하나 힘을 나눠주는 것 때문에 주군의 몸에 무리가 가고 있습니다.”
“…….”
“제가 신수를 임의로 집어넣을 수는 없는 법.”
“…….”
“명을 내려주시지요.”
“하지만…….”
“지금 같은 상태로는 응룡의 힘을 반절, 아니 그 반절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합니다.”
“…….”
“군주가 힘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하면 그다음은 권속에게 해가 가겠지요. 이 궁도 마찬가지일 테고. 언제까지 제가 이 궁을 떠받치고 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제갈량…….”
“…….”
솔직히 아픈 말을 많이 하긴 했다. 작은 아이의 얼굴에 금방 눈물이 고인다. 정말 쓸데없이 정이 많은 남자는 제 몸을 보전하기 위한 것임에도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물론 이런 성격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 성격이기에 이렇게 지낼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당장 몸에 무리가 가는 것을 보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주군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빨리 회복하면 되는 거지?”
“지금처럼 무리하시면 두 번째는 몸이 완전히 소멸할 수도 있습니다.”
“…….”
“신수는 군주의 명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으니, 주군께서 그런 일을 저어하신다면 저로선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설마, 아니지?”
“무슨 생각을 하시죠?”
“아냐. 미안…….”
“일단은 두고 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진 힘이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가 관건이군요.”
“정말?”
“그렇게 좋아하진 마세요. 주군의 몸이 조금이라도 더 안 좋아진다면, 전 무슨 일이 있어도 신수를 저 상자 안에 봉인하겠습니다.”
“응! 알았어. 내가 빨리 건강해질게.”
“…….”
“아이참. 정말이야.”
“네. 목소리는 이미 자리를 털고 일어나신 것 같습니다.”
“…….”
“그럼 상의를 벗고 뒤로 돌아 앉아주세요.”
“알았어!”
“…….”
“어…방금 뭐라고 했어?”
이제야 뭔가 이상한 것을 눈치챘다. 제갈량은 정말 흘러가는 것처럼 말을 했다. 그래서 유비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긍했다. 하긴 언제나 이런 식으로 대화가 흘러갔기에 크게 한마디 듣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생각했다. 누군가 이 상황을 본다면 당장 신선의 본분을 지키라고 할 만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엔 이런 것이 익숙하다고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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