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히삼/제갈유비] 창공의 전기(蒼空之傳記) 019
+) NOTICE
레전드 히어로 삼국전 2차 연성입니다.
유비와 제갈량 / 조조와 사마의 / 손책과 주유가 각각 궁의 주인과 신선으로 나옵니다.
제갈유비 연성으로 시작했지만, 둘이 만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수 있습니다.
동양 AU 및 설정 날조가 항상 함께합니다.
적당한 망상과 설정 붕괴가 언제나 함께 합니다 ㅇㅅㅇ)9
write. 환월
“…….”
“왜 그래. 제갈량?”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예. 봉황 궁 군주가…오셨군요.”
“그럼 내가.”
“예?”
“왜…….”
“주군은 지금 남의 눈에 보이실 때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계시죠?”
“…….”
“제가 나가보겠습니다.”
“하지만 군주가 찾아왔는데…어떻게 내가 안 나가.”
“그런 걱정은 몸을 회복하신 다음 생각하시면 됩니다. 전 계속 이곳에서 다른 사람의 출입을 막고 있었기에.”
“…….”
“그런 것은 아주 익숙하니까요.”
“제갈량…….”
“그러니 부디 제가 돌아올 때까지 이곳에서 움직이시지 말아 주시길.”
“…….”
“신수들에게도 일러두었으니 혹여 움직이신다면 제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알았어…….”
“그렇게 상심하지 마세요. 돌아와서 하나하나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왜 이렇게 서두르는 거야?”
“그야…당연히.”
제갈량은 유비를 빤히 바라본다. 그, 곧은 시선에 절로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곧은 시선을 왜 이제야 알아차렸을까. 제갈량은 항상 이렇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일을 당연한 것처럼 말한다. 유비는 괜히 이불을 쭉 끌어당겼다.
“당연히? 뭐?”
“당연히 궁에 다른 사람을 들이지 않기 위해섭니다.”
“…….”
“아직 이 궁은 제힘에 의해 봉인되어있는 상태. 굳이 이 안쪽으로 들어와서 저희의 상황을 모두 알릴 필요는 없지요.”
“…그렇구나. 하지만 봉황 군주는 분명히…….”
“나중에 따로 인사를 가시면 됩니다. 저희가 찾아뵈면 되겠죠. 그러니 몸을 회복하는 것에 가장 많이 신경을 써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알았어.”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응.”
“다녀오겠습니다. 주군.”
“다녀와. 제갈량.”
“…예.”
“빨리 오고?”
“알겠습니다,”
“난 계속 제갈량한테 신세만 지네.”
유비는 괜히 팔을 벌리면서 투정을 부린다. 몸이 어려진다고 해서 정신이 따라가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어리광이 느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뭐 그런 것도 나쁘지 않았다. 모른 척 장단을 맞춰준다. 제갈량은 그런 유비를 모른 척 품에 안은 채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작은 주군을 언제까지 뵐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 조금이라도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렇게 등을 몇 번 토닥이고 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애초에 유비는 가만히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 이래저래 좀이 쑤신 모양이었다. 아마 몸이 조금이라도 좋아지고 있다면 무슨 말을 해서라도 제갈량을 쫓아갔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저번에 잘못한 일이 있어 제갈량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걸 알기에 제갈량은 좀 더 쉽게 유비를 떼어낼 수 있었다. 아직은 이런 모습을 밖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맨날 나는 제갈량한테 짐만 되는 것 같아.”
“…….”
“에이 그렇게 쳐다보지마.”
“…….”
“그래도 제갈량은 항상 나보다 한걸음 앞서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신수가 유비 주위로 몰려든다. 사실 제갈량이 시킨 것도 있지만, 이러나저러나 주군을 지키기 위한 존재였다. 제갈량이 자리를 비운 상태에서 유비는 아직 제대로 된 힘을 쓰지 못한다. 어쩔 수 없이 신수들이 해야 할 몫이 많았다. 다른 궁보다 숫자가 많은 신수는 장점도 있었지만, 단점도 존재했다. 유비의 힘이 얼마나 강하냐에 따라서 극명하게 차이가 나는 탓에 다들 이렇게 많은 숫자의 신수는 좋지 않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유비는 자신을 찾아온 녀석들을 내칠 수 없다며 모두 거둬들였다.
“그래도 너희가 있어서 다행이야.”
유비는 늘 그랬던 것처럼 살살 웃기만 한다.
“왕윤 님이 이곳까지 어쩐 일로.”
“응룡 군주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네.”
“…예. 그렇습니다.”
“날 세우지 말게. 응당 축하를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오나.”
“사마의와 태오. 여포까지 모두 궁에 놔둔 채 나 혼자 왔네.”
“…….”
“자네도 이 상태로 다른 궁의 신선을 만나는 것은 부담스럽지 않은가.”
“…….”
“내가 가진 것은 몸뚱이와 적은 힘뿐이니. 혹여 이것조차 두렵다고 말하진 않겠지.”
군주가 신수를 두고 왔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일이었다. 애초에 군주의 안위를 보장하기 위해 있는 존재였다. 왕윤의 직접적인 화평 책에 제갈량은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어느 군주도 신수를 함부로 떼어놓고 다니지 않는다.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그 힘을 온전히 발휘하기 위해선 필요한 조건이 있기 마련이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왕윤은 그 정도로 자신감이 있다는 소리였다. 맨몸으로 다른 군주를 찾아올 만큼 자신감이 있었고, 지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쉽게 궁에 들일 수는 없었다. 제갈량은 이런 행동이 예의에 어긋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신선이라고 하지만 다른 군주를 바깥에 세워둔 채 문전박대를 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작은 궁의 군주에게도 쉽게 하지 못 하는 일인데, 눈 앞에 있는 이는 봉황궁의 수장이었다.
“내가 일찍이 응룡 군주와 친분이 있어 찾아왔네.”
“…….”
“…그리 미덥지 않은 것은 나도 잘 알아. 하지만 이번에 온 것은 그저 사적인 친분 때문이지. 공적인 일은 아니네.”
“알고 있습니다.”
“애초에 내가 이번 일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려 했으면 사마의를 대동하고 왔을 거야. 안 그런가?”
“…….”
맞는 말이었다. 사마의가 이런 일에 함께 나타나지 않은 것은 놀랄만한 일이었다, 당연히 신선은 군주와 함께 다녀야 했다. 하지만 왕윤이 혼자 왔다는 것은 다른 명령이 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배려는 감사했다. 솔직히 놀랐다. 그래도 궁엔 들일 수 없었다. 제갈량은 눈을 가늘게 뜨면서 부채로 입을 가린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계속 말을 골랐다.
“죄송하지만, 주군께서 아직 심신이 혼란하시어.”
“…허어.”
“대면하실 수 없습니다.”
“이거 너무 문전박대 아닌가.”
왕윤이 웃으면서 말하지만, 눈빛은 서늘했다. 그러면서도 이러는 이유를 단번에 알아차린 것처럼 행동한다. 사실 사마의보다 이쪽이 더 힘든 상대일지도 몰랐다. 웃음 사이에 가려져 있는 무거운 위엄이 제갈량을 그대로 덮치려 했다. 유비보다 오랫동안 군주의 자리를 지킨 이였다. 세상 풍파를 그대로 맞으면서 군주 자리에 오른 사람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순 없었다.
“전 응룡궁의 신선. 그 무엇보다 제 주군의 안위가 가장 중요합니다. 조금이라도 나아지셨다면 응당 안으로 모셔야 하겠습니다만…….”
“…….”
“당장 그러지 못한 점 부디 용서를.”
“그랬군.”
“…….”
“군주가 아직 혼란하다. 무슨 일이 있는지는 물어봐도 그대는 대답하지 않겠지?”
“송구합니다.”
“아니야. 내가 혹여 이런 일이 생겼다고 해도 나의 신선 또한 비슷하게 행동했겠지.”
“…….”
“그럼 응룡 수장에세 내 말을 대신 전해주겠나. 어쩐지 오늘따라 서신을 남기고 싶더니.”
“…예. 그러겠습니다.”
“그리고 날 못 믿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생각하네.”
“…….”
“당장 믿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아닌가.”
“헤아려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제갈량은 적당히 예의를 차린다. 유비의 상태를 어느 정도까지 알려야 하는가. 그 깊은 고민의 끝은 왕윤의 대화로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혔다. 게다가 왕윤은 경험이 많은 군주이니 저 짧은 대화에서 자신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을 확실히 짚어낼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말이 길어지고, 대화가 늘어질수록 숨기고 싶은 것이 더 잘 보이는 법이었다. 제갈량은 방자해 보이더라도 차라리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어차피 모든 일을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빨리 건강을 회복해야 할 텐데.”
“곧 좋아지시겠죠.”
“…그렇지. 그래야지. 이렇게 돌아왔는데 다른 것에 꺾이겠는가.”
“원체 모든 것을 품고 천천히 움직이시는 분이라 시간이 좀 더 필요하지만, 그렇게 걱정할만한 일은 아닙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왕윤도 자신의 사정에 대해 모두 밝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제갈량의 방자함을 눈감아 준다. 어느 누가 봉황궁의 수장을 문 밖에 세워 든 채 대화를 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서로 필요한 정보를 알아낸다. 제갈량은 왕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두 알 순 없었다. 허나 사마의를 굳이 궁에서 대기하라고 했다는 점을 미루어볼 때 둘 사이에 아주 작은 균열이 생기지 않았을까.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몸이 낫거들랑 궁으로 한번 오도록 하게.”
“…예.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안 그래도 주군께서 그리 하리라 말씀을 하셨으니까요.”
“그래도 응룡궁이 제자리로 돌아와서 다행이군. 이제야 균형을 이루고 돌아갈 수 있겠어.”
“…….”
“다들 힘들었지 않은가. 물론 자네와 응룡 군주가 제일 힘들었겠지만.”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팽팽한 대화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나긋하고 덤덤하게 말하지만, 그 저변에 깔린 의미는 쉽게 지나칠 것이 아니었다. 그걸 알기에 굳이 깊은 말을 여기서 하지 않는다.
어차피 유비의 몸이 회복되면 가장 먼저 할 일이 다른 군주를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닌가. 벌써부터 밑천을 내보일 필요는 없었다. 왕윤은 제갈량을 격려하면서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제갈량도 그러했다.
“슬슬 돌아가 봐야겠군.”
“무례를 용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닐세. 나중에 다시 만나지.”
“…….”
“일찍 돌아가지 않으면 나도 곤란해 질 테니까.”
사마의에게 관해 묻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굳이 데리고 오지 않은 이에 대해 캐물을 필요는 없었다. 왕윤은 제갈량에 손수 적은 서신을 건네주고 미련 없이 돌아선다. 긴 망토가 바람에 날리면서 시선을 어지럽혔다. 제갈량은 고개를 숙인 채 군주를 배웅한다. 기묘한 상황이었지만, 왕윤과 제갈량만 입을 다물면 아무도 모를만한 일이었다.
“서신이라.”
제갈량은 왕윤이 남기고 간 것을 바라본다. 유비가 쓸데없이 마음이 여리고 넓은 것만큼. 왕윤도 그런 면이 없진 않았다. 강한 군주로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면서 이런 식으로 행동하기는 쉽지 않았다. 강한 군주만이 보일 수 있는 여유였다. 제갈량은 왕윤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문 앞을 지켰다. 반은 예의로. 나머지는 혹시나 모를 습격에 대비해서. 이런 식으로 행동하고 싶진 않았지만, 유비를 지키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
“…제갈량이 늦네.”
유비는 침대에서 좀이 쑤신 모양이었다. 하긴 힘을 쓰지 못할 뿐 사지는 지극히 멀쩡했다. 걸을 수도 있고 달릴 수도 있는데, 제갈량은 그런 유비가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유리처럼 다루곤 했다. 이해를 못 할만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계속 침대 위에 묶여 있기엔 너무 지루했다. 궁에는 많은 것이 있지만 당장 유비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괜히 창밖을 기웃거린다. 바람이 스치고 지나간 나뭇잎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굴다가 천천히 멈춘다. 그걸 구경하는 것도 이젠 질려버렸다. 제갈량이 발목을 묶어둔 것도 아니라서 그저 땅에 딛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제갈량이 하지 말라는 일을 억지로 했을 때 그리 좋은 결과를 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제갈량이 냉랭한 얼굴로 가만히 있으라고 말해서 더 그랬다.
“괜히 걱정 끼쳐서 이게 뭐야.”
도통 제대로 돌아오지 않는 몸이 원망스러웠다. 애초에 아무리 인간 몸에 깃들었다고 해도 계속 그렇게 살 순 없는 노릇이었다. 몸에 깃든 힘이 천천히 체질을 변화시킨다. 하지만 유비의 몸은 도통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성장기도 제대로 지내지 못한 아이의 몸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제갈량은 은근 귀여워하는 눈치였지만, 이런 상태로 군주가 할 일을 모두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좀 무리를 했을 뿐인데 인간 육체는 그걸 버티지 못하고 바로 티가 나버린다.
“…언제쯤이면.”
사실 궁이 제갈량의 힘으로 버티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로 자꾸 조급증이 일었다. 당연히 군주가 해야 할 일을 어쩔 수 없이 신선이 대신한다. 물론 이런 일이 하나씩 모여 제갈량에게 부담이 어마어마하게 갈 것을 알기에 더 미안했다. 손을 쥐었다가 다시 편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응룡의 힘이 손끝을 스치고 사라진다. 아직 제대로 힘을 품지조차 못하는 몸은 조금만 무리하면 그대로 뭉개질 것처럼 굴었다. 제대로 제어가 되지 않는 몸은 늘 아슬아슬하게 한계를 넘나들었다.
“주군. 돌아왔습니다.”
“…제갈량!”
“생각보다 얌전히 계셨군요.”
“제갈량은 나를 너무 아이 취급하는 거 아니야?”
“뭐…지금은 아이 맞으시잖아요.”
“…….”
저렇게 대놓고 말하면 또 할 말이 없었다. 언제는 주군이 돌아왔다고 좋아하더니. 이젠 어린아이의 몸을 하고 있다고 대놓고 아이 취급을 했다. 유비의 볼이 절로 불룩하게 나오는 것을 보던 제갈량이 가늘게 웃었다. 분명히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언제부터 제갈량이 이렇게 감정 표현에 능해졌지. 유비는 짧은 의문을 가졌다. 그리고 아무리 자제하려 해도 어린 몸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감정 표현의 고저가 유난히 높다. 유비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제갈량의 말이 그저 섭섭한 모양이었다.
“주군께서 빨리 자라셔야 할 텐데.”
“자꾸 놀릴 거야?”
“하지만 계속 자라시지 않아 전 걱정이 된답니다.”
“…….”
“멋대로 사라지셨다가 돌아오시니 어린애가 되셔서.”
“…그거야.”
“곧 자라시겠죠. 시간이 걸릴 뿐이지.”
“그건 그렇고. 왕윤 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죄송하게 됐네.”
“어쩔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상황을 알렸다간 신선들에게 퍼지는 것은 시간문제이니까요.”
“…….”
“그리고 서신을 남기셨습니다. 아마 왕윤 님도 이곳에 들어올 수 있으리란 생각을 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서신?”
“네. 차차 읽어보세요.”
제갈량은 곱게 말린 서신을 건넨다. 유비는 당장 풀어서 읽어볼까 하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지금은 제갈량이 해주는 말을 듣는 편이 나았다. 도대체 왕윤과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그런 유비의 표정을 읽었는지 제갈량은 한숨을 쉬면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냉큼 제갈량의 무릎을 차지한 유비는 괜히 되지도 않는 어리광을 부렸다.
“이야기 해줘. 응?”
“…주군.”
“아이참. 나 얌전히 있었잖아. 그리고 돌아와서 이야기해준다고 한 건 제갈량이었어. 안 그래?”
“…….”
“어서, 응?”
“그렇게 보채지 않으셔도 곧 해드릴 생각입니다. 절 어떻게 생각하시는진 몰라도, 제가 설마 봉황궁 수장과 나눈 말을 제 주군에게 알리지 않을까요.”
“…….”
“…주군은 항상. 아닙니다.”
늘 이렇게 말끝을 흘려버린다. 유비는 모르는 척 제갈량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제갈량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도 굳이 유비를 밀어내지 않았다. 천천히 이야기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보채기 시작하니 버틸 재간이 없었다. 유비는 자신이 절대 제갈량을 이기지 못한다고 말했지만, 실상은 반대일지도 몰랐다.
“왕윤님이 뭐라고 하셨어? 사마의도 왔을까?”
“아뇨. 혼자 오셨던걸요.”
“신수는?”
“궁주님 곁에 두고 오셨답니다.”
“그럼 호위도 없이 혼자 오신 거야?”
“네.”
“…그랬구나. 죄송해지네.”
“왕윤 님이야 늘 지혜롭고 강건하시니. 제가 다른 말씀을 올리지 않아도 모두 이해를 해주셨습니다.”
“다행이야.”
“혼자서 오신 까닭이 있으시겠죠. 신선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사실이라던가. 아니면 군주와 군주가 아닌 채로 만나실 계획이었다던가.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그중 어떤 것이 맞을지는 왕윤 님만 아실 듯 합니다.”
“…대단하신 분이야.”
“예.”
사실 유비가 감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왕윤은 유비가 새파랗게 어린 군주였을 때부터 늘 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인물이었다. 칠보검을 손에 든 채 앞장서 나가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한다. 지금이야 바깥 활동은 태오 장군이 맡아서 한다지만, 그렇다고 예전 명성이 빛이 바래버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사람이 움직일 때면 다 이유가 있다. 유비는 늘 그렇게 말하곤 했다. 드물지만 제갈량도 그런 유비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아마 그 분이 진심으로 싸우러 오셨으면 이렇게 조용하게 오시지 않았을 겁니다.”
“정말?”
“결계를 세운 중심부부터 파괴하셨을걸요.”
“…….”
“그리고 궁은 반파되었겠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무서운 소리를 한다.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왕윤이 서로 견제하고 싸우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지금까지 큰 잡음이 없이 지낼 수 있었다. 힘이야 응룡궁이 더 강하다지만 노련함으로 따지면 왕윤을 이길 군주가 없었다. 그런 데다 진중하고 사려 깊으니 유비가 사라진 동안 기울어진 균형을 봉황궁이 떠맡을 수 있었다.
“…그래도 잘해주셨는데.”
“예. 뭐. 왕윤님이 꼭 태오장군 보는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하셨습니다.”
“한참 어려 보이나 봐. 난 충분히 컸다고 생각했는데.”
“손책님도 유비님도. 태오장군도 왕윤님에겐 모두 그만그만한 나이일 테니까요.”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손책님도 유비님의 귀환 소식을 아셨을 겁니다.”
“찾아올까?”
“궁에 감금되어 계시다는 소리를 바람을 통해 들었습니다만, 워낙 신출귀몰하신 분이니 어떻게 행동하실지는 확실하지 않네요.”
“또 그랬어?”
“예. 이번엔 궁 전체에 명령이 내려와서 주유도 손을 써주지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손책도 못 본 지 오래되었다.”
“…다들 그렇죠.”
“근데 왜 자꾸 졸리지.”
“키가 크실 모양입니다.”
“자꾸 놀리지 말라니깐.”
그러면서도 눈이 절로 감긴다. 아이들은 잠이 많다고 하는데, 주군이 꼭 그랬다. 제갈량은 이제 대놓고 재우려는 듯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준다. 신선의 허리를 붙잡고 버티던 작은 주군은 그 손길을 거부하지 못한 채 작게 도리질만 한다. 이렇게 잠이 들면 뒤에 올 이야기를 하나도 듣지 못한다. 물론 일어나면 계속 이야기를 이어가겠지만, 기분이 다른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안 잘 거야. 제갈량.”
“이미 눈이 반쯤 감기셨는걸요.”
“…그래도.”
“주무시고 일어나시면 다시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으응…그거 말고.”
“노래라도 불러드릴까요?”
“…….”
제갈량의 한마디에 유비는 긴장이 탁 풀려버린다. 그러자 간신히 버티고 있던 잠이 그대로 쏟아졌다. 요새 왜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잠이 오는지.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졸리곤 했다. 물론 제갈량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자꾸 재운다.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 질 거라는 원론적인 이야기만 하니 유비가 아무리 졸리지 않는다고 해도 이길 수 없었다.
결국, 오늘도 유비가 먼저 잠들어 버린다. 제갈량은 그런 주군을 한참 동안 품에 안고 있었다. 유비의 몸에서 옮겨간 상처가 아직 낫지 않아 조금 불편했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작은 아이의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 정리해준다. 콧대를 쓸어보고, 볼을 토닥이고. 이내 손끝이 입술에 닿았다. 약하게 움직이는 입술 사이로 숨이 훅 밀려온다. 그럴 때마다 심장이 찌르르 소리를 내며 아파져 온다,
“…….”
복잡한 감정은 신선에게 독이었다. 애초에 주군을 위해 움직이면 되는 존재라 태어날 때부터 많은 감정을 학습하지 않는다. 이후 군주의 성향에 따라 후천적인 학습이 가능한데, 유비의 경우 감정의 골조가 깊어 제갈량이 따라가기 버거워했다.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켜켜이 쌓인 채 굳어간다. 울고 웃고. 주군을 따라다니는 모든 감정이 자신의 팔다리를 잡고 늘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 수많은 감정을 무엇이라 정의해야 할까. 똑똑한 신선은 몇 번이나 의문을 풀기 위해 노력했지만, 애초에 입력되지 않은 정보이니 그 답을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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