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히삼/제갈유비] 창공의 전기(蒼空之傳記) 015
+) NOTICE
레전드 히어로 삼국전 2차 연성입니다.
유비와 제갈량 / 조조와 사마의 / 손책과 주유가 각각 궁의 주인과 신선으로 나옵니다.
제갈유비 연성으로 시작했지만, 둘이 만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수 있습니다.
동양 AU 및 설정 날조가 항상 함께합니다.
적당한 망상과 설정 붕괴가 언제나 함께 합니다 ㅇㅅㅇ)9
write. 환월
“…….”
“그렇게 보지 마시죠.”
“…….”
“신수들께선 이 상황을 도와줄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차라리 저쪽으로 가서 각자 가진 힘이나 마저 연마하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
짜증 나는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았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제갈량을 보면서 사납게 으르렁거린다. 하지만 신선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그런 모습은 익히 알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제대로 된 형체조차 갖추지 못하고 간신히 그림자 같은 모습만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물론 제갈량이 주문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군주의 힘을 직접 받지 못하는 신수가 이 정도로 움직이는 것도 대단한 일이었지만, 제갈량의 마음엔 차지 않는 것 같았다.
“주군께서 너무 느린 신수 때문에 다치시면 안 되는 거지.”
“…….”
“그렇게 날 노려볼 시간이 아깝지 않습니까.”
“…….”
“이기지도 못할 일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수 네 마리가 크게 울면서 사라진다. 늘 있던 일인데 여전히 제갈량을 이기진 못한다. 이 궁의 주인은 늘 오호 대장군과 제갈량을 모아두고 친하게 지내라는 말을 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제갈량은 사라진 신수를 찾는다.
“그런데 말입니다.”
“…….”
“마초는 어디 있습니까.”
“…….”
“응룡궁의 신수는 다섯이어야 하는데, 도대체 주군은 어디다 신수를 두고 오신 것인지.”
“…….”
신수는 답이 없다. 제갈량은 자신이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신수는 자연스럽게 궁 곳곳에 자리 잡았다. 물론 주군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지금은 궁 안팎으로 다가오는 위험을 감지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다 무너져가던 궁이 살아났다는 이야기는 쉽게 퍼진다. 아니 이미 모두 짐작하고 있을 일이었다. 신선은 하늘을 읽는다. 게다가 사마의와 주유라면. 당장 쳐들어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 일 하나하나를 생각하면서 주군의 몸을 보해야 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주군.”
“…….”
“들어가겠습니다.”
“…….”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누워있는 주군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궁에 들어오면서 안색을 훨씬 좋아졌는데 왜 이렇게 눈을 뜨지 못하는지. 제갈량은 늘 침착했지만, 지금은 그러지 못했다. 당장 들어가서 어깨를 흔들고 싶었다. 물론 군주의 건강을 위해 그러면 안다는 사실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마음이 먼저 뜨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언제 눈을 뜨실 생각이십니까.”
“…….”
“궁으로 돌아오셨는데, 계속 이렇게 누워계시기만 하면.”
“…….”
“아닙니다. 제가 좀 조급한 것 같군요. 그저 이유가 있으실 텐데.”
제갈량은 늘 자기 객관화가 빠르다. 자신이 조급해하는 이유를 알면서도 마지막 한 조각 미련을 털어내지 못했다. 당장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주군을 경애하는, 아니 은애하는 마음은 그 어떤 신선이라도 평범하게 가지는 감정이었다. 옥새가 막 태어난 신선에게 심어주는 감정은 언제나 군주를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감정이 조금씩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
“그저 좀 더 빠르게…말씀을 드리고 싶은 일이 많아서.”
“…….”
“그저 그랬습니다.”
들고 있던 약을 탁자에 내려놓는다. 몸을 보해야 정신이 깨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신을 맘대로 조정할 수 없으니 육신이라도 챙겨야 했다. 정신을 깨는 것은 온전히 군주의 몫이었다. 제갈량이 걱정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사실 응룡의 힘을 인간의 육신이 온전히 담아낼 수 없었다.
물론 인간이 군주가 된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인지를 하지 못한 채 힘을 품고 살아온 경우는 없었다. 게다가 언제부터 그 힘이 스며들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육체가 흔들리면 정신도 온전할 수 없다. 응룡의 힘을 담은 이 평범한 그릇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그것부터 알아야 했다. 작은 몸으로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버티는 유진을 바라본다. 아니 이제 유비라고 불러야 한다. 제갈량은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히면서 몸 어딘가에 있을 역린을 찾았다.
“…….”
목 언저리에 있을 것이라 여겼지만, 눈에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심장도 살펴본다. 약하지만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심장을 덮은 피부만 보인다. 가볍게 손을 대보지만, 부드러운 인간의 육신일 뿐 그 어느 곳에서도 응룡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일단 몸이 좀 더 단단해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당장 힘에 걸맞은 육신으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할 수 있을 만한 일은 모두 해야 했다. 당장은 의식이 없으니 응룡의 힘이 나타나진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때때로 발작하듯 찾아오는 위기를 현명하게 넘기기 위해선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주인이 의식이 없으면 옆에서 대신 지켜야 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 그래서 자꾸 손이 간다.
“…….”
주군은 늘 쓴 약을 싫어했다. 어린아이처럼 굴면 안 된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지만, 그럴 때마다 싫은 건 어쩔 수 없다며 눈을 찌푸리곤 했다. 아무리 몸에 좋은 약이라 하더라도 혀가 닿는 쓴맛이 더 싫어서 어쩔 줄 몰라 한다. 제갈량은 주군 체통과 나이를 생각하라며 가볍게 나무란다. 하지만 그렇다고 들은 남자가 아니었다. 탕약 그릇을 받은 채 오만상을 쓴다.
‘너무 쓰다니까.’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기 마련입니다.’
‘그래도…….’
‘주군께서 이런 하찮은 일에 그리 신경을 쓰십니까.’
‘…….’
‘군주의 몸이 무사한 것이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법.’
‘제갈량은 좋겠다.’
‘예?’
주군은 가끔 뜬금없는 말을 던지곤 한다. 제갈량은 그럴 때마다 짧게 되물어보기만 한다. 어차피 주군의 머릿속을 모두 알 순 없으니 설명을 요구하는 쪽이 나았다. 그러면 어땠지. 유비는 그런 제갈량이 늘 익숙하다며 웃곤 했다.
‘제갈량은 이런 고민 같은 거 안 할 거잖아.’
‘…….’
‘똑똑하고, 이성적이고.’
‘…….’
‘여기 와서 고생만 하다가…….’
‘약이 식습니다.’
‘…….’
들켰나 봐. 네. 짧은 말로 유비의 말을 끊고는 약을 앞으로 밀어준다. 오만상을 찌푸리는 유비는 도통 약을 먹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무리 제왕의 자질을 타고 났다 해도 그것을 마음껏 펼치지 못한다면 쓸모가 없는 것과 같았다. 유비는 흠잡을 곳 없이 건강했지만, 아주 가끔 응룡의 힘에 휘둘릴 때가 있었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몸을 다치면 더 심했다. 그런 힘을 진정시키고 몸에 쉽게 스며들기 위해 이런저런 방법을 찾고 있었지만, 딱히 효과가 있지 않았다.
‘으…….’
‘다음번엔 제발 약이 식기 전에 드셨으면 좋겠군요.’
‘하지만 엄청 쓰다니까.’
‘식으니까 그렇죠.’
‘…….’
유비는 냉큼 단 것에 손을 댄다. 우리 주군은 저렇게 어리셔서 어찌하나. 제갈량의 한숨이 깊어진다. 물론 젊은 시절은 누구나 그렇다고 하지만, 늘 걱정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주군이 사라지기 전까진 그랬다. 막상 궁이 비게 되자 모든 것이 후회로 다가오곤 했다.
“그렇게 드시기 싫어하던 약을 또 드셔야겠군요.”
“…….”
“정신을 차리셔야 합니다. 주군.”
“…….”
의식이 없는 사람에서 약을 먹이는 것은 꽤 힘든 일이었다. 어린아이인 모습이 다행일 수도 있었다. 제갈량은 침상 옆에 걸터앉았다. 여전히 이불에 푹 싸인 채 미동도 하지 않는다. 혹여 숨을 쉬지 않는가 싶어 가슴이 오르내리는 것을 살펴본다. 그것도 잘 보이지 않으면 손가락은 코끝에 대서 확인을 한다. 약하긴 하지만 호흡도 편하고,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는데 좀처럼 눈을 뜨지 않는다. 육체의 문제가 아니라면 혹시 혼과 정신의 문제일까. 제갈량은 걱정을 애써 누른다.
“이런 생각을 해봤자…….”
이불을 걷어내서 유비를 안아 일으킨다. 축 늘어진 몸은 생각보다 가벼웠다. 고개가 자꾸 뒤로 넘어가서 가슴에 푹 안을 수밖에 없었다. 한쪽 손으로 입술을 벌린다. 바짝 말라서 거칠어진 입술에 손끝이 닿자 안쓰러움이 뚝뚝 묻어난다.
품에 작은 아이를 안고 다른 손으로 약을 뜬다. 한 손으로 약을 먹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슬금슬금 침대 곁으로 몰려든 신수가 뭔가 도와주려고 했지만, 제갈량은 손을 흔들면서 저지한다. 저 녀석들이 도와줘서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입술을 살짝 벌리고 수저로 약을 떠 넣는다. 조금씩 먹일 수밖에 없으니 시간이 오래 걸린다. 하지만 이 정도 시간이 걸리는 것은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겨우 반절을 먹였을 뿐인데 유비가 고개를 흔든다.
“몸은 작아도 싫어하는 건 똑같으시네요.”
“…….”
“정말…….”
“…으.”
“약 투정을 하시는 걸 보니 금방 일어나시겠군요, 그럼 다음을 준비해야겠습니다.”
“…….”
조금이라도 몸이 힘을 버텨주면 좋을 텐데. 다시 침대에 눕히려 한순간 몸이 털컥 걸린다. 음? 제갈령은 가만히 고개를 숙인다. 유비의 손이 제갈량의 옷을 단단히 잡은 채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언제는 기척도 없이 누워있는 것도 다행인 것 같더니, 지금은 금방 품을 파고들었다.
“주군.”
“…….”
“전 주군의 어린 시절을 본 적은 없습니다만…….”
“…….”
“어쩐지 알 것 같군요.”
“…….”
“뭐 좋습니다. 산책이라도 하실 생각이시라면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제갈량은 유비를 안아 들었다. 품에 안긴 아이는 자꾸 안쪽으로 파고든다. 더는 갈 곳도 없으면서 제갈량과 떨어지기 싫은지 애써 옷을 잡고 놓지 않는다. 예전 같았으면 칼같이 쳐냈을 제갈량이지만 지금은 그럴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품에 유비를 안은 채 침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 신수들이 주춤주춤 주위로 몰려온다. 둘은 제갈량의 소매 안쪽에 자리를 잡았고, 둘은 유비의 품속을 파고든다.
“오호 대장군이 마중을 나오셨구먼.”
“…….”
이곳에서 이리도 따뜻한 햇볕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죽어가던 모든 것들이 새 생명을 찾는다. 군주가 궁의 뿌리인 것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제갈량은 침전을 빙 돌아서 걷는다. 낮은 담을 따라 쭉 걷고, 작은 문을 지난다. 가장 안쪽에 있는 후원은 유비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었다. 이곳은 유비와 오호 대장군, 그리고 신선인 제갈량밖에 들어오지 못하는 공간이었다. 그마저도 유비가 가끔 힘이 들 땐 아무도 들이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제갈량은 빨간 동백이 가득 피어있는 후원을 바라보았다. 다 죽은 채 가지만 남아있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싱싱하고 화려했다. 동백 밑엔 작은 꽃이 무리를 지어 피어있었고, 담장을 타고 넘는 넝쿨도 수북하게 자랐다.
“주군이 좋아하실 것 같아서 이리로 왔습니다.”
“…….”
“아무리 몸을 보호해야 한다지만, 궁의 기운을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하니.”
“…….”
“이런 것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되는군요.”
“제갈…량.”
“네. 신선 제갈량 여기 있습니다.”
“…….”
“이렇게 절 애타게 하시고도 아직 패가 남아계십니까.”
“…….”
“그렇군요.”
바람이 불어온다. 제갈량와 유비의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엔 꽃향기가 배어있었다. 저 멀리 대나무 숲이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소리를 듣는다. 권속도 제대로 된 신하도 남지 않은 곳이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로웠다. 작은 아이를 안은 채 후원에서 다시 정원으로. 그리고 편전 앞으로. 제갈량은 끊임없이 걸어 다닌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 해보려는 생각이었다.
다행히도 봉황궁과 백호궁에서 큰 움직임이 없었다. 아직 여유가 있으나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은 응룡궁의 군주가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 큰 힘이 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의문을 가질 것이 분명하다. 신선들이 짐작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군주가 강건하다는 증거를 보여야만 했다.
“…….”
차라리 홀로 궁을 지키기가 더 쉬웠다. 단단하게 문을 닫아걸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주군을 지키는 방법은 많으나 가장 중요한 조건은 유비가 스스로 일어나 앉아야 했다. 제갈량은 땀에 푹 젖은 아이의 이마를 쓸어준다. 이렇게 열이 올랐다가도 금방 얼음장처럼 몸이 차가워진다. 밤낮없이 앓다가도 죽은 것처럼 숨을 쉬지 않기도 했다. 제갈량은 걱정이 많았지만 밖으로 표현하지 않으려 했다.
“괜찮습니다.”
“…….”
“주군과 더한 어려움도 함께 이겨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지요. 게다가 전 선계 신선 중 최고. 제가 못 하는 일은 없습니다.”
“…….”
“꼭 주군을 깨우겠습니다.”
그렇게 꼬박 삼일을 고생했다. 그리고 사흘째가 되던 밤. 작은 아이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스스로 일어나 앉았다. 하지만 아직 몸에 의식이 완전히 깃들지 못했다. 텅 빈 눈으로 저 먼 곳을 바라보더니 꼭 졸음에 취한 것처럼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주군.”
“…….”
이름을 부르면 반응을 한다. 하지만 그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 제갈량은 몇 번이나 탕약을 지어 올리고, 자신의 생명을 깎아 주군의 들끓는 힘을 진정시키려 했다.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 제갈량은 확신했다. 아주 조금. 조금만 더. 그렇게 표현할 만큼의 시간이 필요할 뿐이었다.
“마초 패도 곧 찾아와야 하겠군요.”
“…….”
“그대들은 마초가 어디 있는지 아는가.”
“…우린 모르는 일이오.”
“그래. 그럴 테지.”
신수가 한마디 말을 얹는다. 신수란 늘 군주의 힘에 비례하곤 한다. 그래서 말을 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존재였다. 그래도 몸이 꽤 회복된 모양이라며 제갈량은 가볍게 웃어넘긴다.
“곧 일어나실 모양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들이 말을 할 리가.”
“그 전에 할 일이 많군.”
“…그렇겠죠. 일단 주군께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응?”
“신수들도 열심히 하셔야 할 것입니다.”
“뭐라?”
“전 늘 준비가 되어있으니까요.”
차라리 당당한 편이 낫다. 제갈량은 늘 비슷하게 움직였다. 유비의 몸을 살펴보고 탕약을 올린다. 약을 먹은 후엔 아이를 안은 채 이리저리 걸어 다닌다. 이렇게 해도 좋아지지 않으면 직접 양의 기운을 받기 위해 산에 있는 연못을 찾아갈지도 모른다는 소리를 한다. 도대체 뭐가 모자라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걸까. 저 머릿속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의문이 깊어질수록 불안함도 같이 자랐다.
“물…….”
“…….”
“…제갈량.”
“주군?”
“물 좀…….”
“예…예. 주군.”
이렇게 손이 떨릴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제갈량은 허겁지겁 주군을 안아 일으킨다. 그리고 미리 옆에 놔두었던 물을 건넨다. 겨우 한 모금을 마신 아이는 작게 기침을 한다. 식은땀에 흠뻑 젖은 채 일어난 주군의 모습은 당장 쓰러질 것처럼 하얗기만 했다.
“주군.”
“제갈량?”
“네. 제갈량입니다.”
“이게…무슨.”
“기억이 나십니까?”
“…….”
“주군…….”
“미안해. 미안해. 제갈량.”
“아닙니다. 그런 말씀을 원하는 게 아니라. 그저…….”
“…….”
혼란한 머릿속을 아직 정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린 것만으로 다행이었다. 제갈량은 품 안에 주군을 안은 채 목덜미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이 모습을 그렇게 보고 싶었다. 비록 헤어질 때 모습과는 조금 다르지만 분명 자신의 주군이었다.
“제갈량…갑자기 왜 이래.”
“주군. 정말 기억이 안 나십니까.”
“내가…그러니까.”
“…….”
“어…….”
“지금 혼란하실 테니 억지로 기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차차 시간이 해결할 문제일 테니.”
“난.”
가만히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다. 놀라지 않는 것을 보니 짐작하는 바가 있으리라. 제갈량은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주군의 생각을 훤히 알 수 있다면서 귀가 닳도록 잔소리를 했을 것이 분명했지만 말이다. 유비는 얌전히 제갈량 품에 안겨서 눈만 깜박거린다. 제갈량한테선 항상 풀냄새가 났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는 체취가 신선에겐 없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필요 없는 몸은 늘 주변에 있는 향기가 옮아 붙곤 했다. 제갈량은 대나무 숲을 좋아해 항상 그곳에 있었기에 대나무 향이 자주 옮겨붙었다. 지금도 그리 달라지진 않았다. 향냄새가 좀 더 진하긴 했지만, 제갈량은 항상 똑같았다.
“결국, 이렇게 된 건가.”
“몸이 불편하십니까.”
“그렇다기보단…이렇게까지 될 것이란 생각을 못 해서.”
“…….”
“누가 보면 웃겠어.”
“전 주군이 이곳에 오신 이후 태어나서…어릴 적 모습을 뵙지 못했는데.”
“…….”
“이렇게라도 뵙게 되니 좋군요.”
“…….”
“꼭 깨어나실 거라 믿었습니다. 제 속을 이렇게 까맣게 태우시다니. 이제 좀 속이 풀리십니까?”
“내가 뭘…….”
“그렇게 제가 같이…….”
“…….”
“아닙니다. 제가 말이 많았군요.”
“제갈량.”
“네, 주군.”
유비는 자신을 안고 있는 제갈량의 손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준다. 꼭 유비가 제갈량은 어르는 것 같았다. 응룡의 신선은 그런 손을 몰아내지 않았다.
“걱정 많이 했지?”
“…….”
“미안. 내가 잘못했어.”
“…….”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해서…….”
“정말…제 속을 까맣게 태우시는 것이 취미라면 꼭 그렇게 말하도록 하세요.”
“…….”
“그러면 그저 장난이 지나치셨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응.”
이 정도로 말하는 것을 보니 화는 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신수들이 침대 위로 올라온다. 군주가 정신을 차리자 신수는 조금 더 원래의 모습에 가까워진다. 예전보다 많이 단출해진 식구였다. 권속을 다시 불러 모으면 좋으련만. 막 깨어난 군주에겐 꽤 부담되는 일이었다.
“제갈량.”
“네, 주군.”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물론입니다. 그럼…….”
“아니. 여기 말고.”
“…….”
“둘이서만 조용히. 응?”
“…….”
“어서.”
“알겠습니다. 걷는 것은 몸에 부담이 갈 테니 제가 모시겠습니다.”
“…….”
그건 좀 부끄러운데. 유비는 손사래를 친다. 하지만 제갈량을 이길 수 없었다. 꼭 업혀 가는 모양새였다. 유비의 볼이 이만큼 부푸는 것을 보면서도 제갈량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애초에 이런 몸으로 제 신선을 이기기엔 역부족이었을 지도 모른다. 유비는 보통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하는 것을 좋아한다. 당연히 시동이 도와야 하는 일도 혼자 할 수 있다고 말해서 몇 번이나 하얗게 질린 시종 장이 뛰어오게 만들곤 했다. 그런 유비가 지금 이 상황에 가만히 안겨있는 것은 그저 지금껏 홀로 남겨진 신선의 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미안한 일이었다. 이런저런 말 한마디 못하고 사라진 주군을 기다리며 지금까지 이 궁을 지켜온 신선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상처로 뒤덮여있을 것이 뻔했다. 그런 고통을 이런 식으로 천천히 치유하는 것을 모를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엔 잠시 참기로 했다.
“제갈량.”
“네.”
“많이 기다렸지?”
“네.”
“미안해…….”
“첫해는 그저 고통으로 보냈고.”
“…….”
“그다음 부터는 희망을 품었고.”
“…….”
“주군이 다시 오시기 전까진…….”
“미안해. 응?”
“아닙니다. 그저 무사히 돌아오셔서…다행이라 생각합니다.”
“…….”
유비는 자꾸 미안하다는 말만 한다. 제갈량이 그렇게 말을 하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가르쳤었다. 감히 군주의 말에 토를 달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제갈량도 말끝이 매우 무거웠다. 대답하지 않는 대신 유비를 좀 더 힘주어 안았다. 긴 옷자락이 나뭇 바닥에 스치는 소리가 발자국에 섞여들었다. 시종조차 남아 있지 않아 모든 것을 제갈량이 한다.
“차를 내올까요?”
“아니. 괜찮아.”
“어린 주군을 모시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군요.”
“…….”
“농담입니다.”
“자꾸 놀리는 거 맞지?”
신선은 대답이 없었다. 유비는 제갈량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본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 같았고, 기억마저 희미해지는 시간을 지났다. 꿈속에서 간신히 만나도 흐릿하게 떠오르기만 하던 얼굴을 다시 보니 퍽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서로 해야 할 말이 많은 건 알고 있어.”
“…….”
“내가 다시 돌아온 것도 모든 것이 옥새의 의지일까?”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렇구나.”
“하지만…적어도 선계 최고인 신선은 주군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고마워.”
“신선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
유비는 해야 할 말을 고른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할 말이 너무 많아도 탈이었다. 하나. 둘. 셋. 숨을 쉰다. 다시 눈을 감았다. 두서없이 복잡한 생각을 조금이라도 정리하려 했다. 제갈량을 만나서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 데 기억이 온전치 않았다. 그래서 이 답답함을 해소할 수 있는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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