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스티브가 돌아온 직후부터 버키는 눈에 띄게 진정된 것 같았다. 당황하면 얼굴에 그대로 나타나던 표정은 조금 차분하게 가라앉았고, 혼란스러워 하는 것도 많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가다듬었다. 능숙하다면 능숙한 일이었다.
그런 친구를 보는 스티브는 가슴이 아팠다. 역시 두고 가는 것이 아니었다고 자책했지만, 그렇다고 데리고 갈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아무리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은 세상에 많았다. 스티븐 로저스가 아닌 캡틴 아메리카는 공사를 구분하는데 능했다. 그래서인지 돌아오자마자 연신 미안한 얼굴로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스티브?”
“응. 버키. 왜 그래?”
“난 괜찮아.”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버키는 스티브의 얼굴만 보아도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입 밖으로 말을 내지 않았다. 그저 눈을 한번 깜박거리면서 듣고 있다는 표시를 했다.
“내가…역시 일찍 돌아왔었어야 했나 봐.”
“그게 무슨 소리야?”
“역시 널 혼자 두는 것이 아니었어. 내가 역시 잘못 생각한 거야.”
“그럴 리가.”
“아냐. 이게 맞아. 네 옆에서 떠나면 안 되겠어.”
“…….”
“버키. 제발.”
“스티브…….”
버키는 단호하게 이름을 불렀다. 그러면 잔뜩 날 선 녀석이 금방 풀어져서 자신을 쳐다본다. 그 모습이 꼭 커다란 강아지 같았다. 나이도 먹고 클 만큼 큰 녀석은 친구 앞에선 그 누구보다 작은 아이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건 네 책임이 아니야.”
“…….”
“내 머리가 망가져서 그런 걸, 그렇게 떠안으면 어떻게 해.”
“그야…….”
“이번에 내가 쓰러진 건, 그제 내가 망가진 뇌로 너무 어려운 걸 찾아봐서 그래.”
“…….”
“내가 멍청했어. 자극적인 것에 반응하는 걸 알면서도…궁금해서 꾸역꾸역 들어버렸으니까.”
“네 책임이 아니야.”
“그렇다면 스티브. 네 책임도 아니지.”
“…….”
“그냥 그런 거야.”
버키는 침착한 목소리로 스티브를 어루만졌다. 사실 스티브가 이렇게 전전긍긍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가이드는 자연스럽게 센티넬을 챙기게 된다. 버키가 듣던 테이프에 그런 대목이 있었다. 물론 꼭 그렇진 않았다. 누구보다 비니지스 적인 관계인 페어도 많았다. 하지만 스티브는 그런 쪽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단 한 번도 자신 외의 센티넬을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물론 정의감이 넘치는 녀석이니 혹시 자기 구역에 들어온 센티넬을 밀어내진 않았을 것 같았다. 그런 녀석이 친구를 감싸 안은 채 조금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애착 관계인가. 아니면…보호본능인가.’
버키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스티브를 싫어한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먼저 선을 넘어버린 것은 자신이라 생각했지만, 스티브는 그것보다 좀 더 끈끈한 본능으로 친구를 끌어안았다. 왜지.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사실 버키는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 중 극히 일부분만 인지하고 있었다. 망가진 뇌를 아무리 움직여도 한계가 있다. 그래서인지 스티브의 애정만 받아도 머리가 꽉 차는 기분이 들어 쉽게 다른 일을 시작할 수 없었다.
“스티브. 넌 그냥 네 할 일을 하면 되는 거야.”
“…….”
“세상은 캡틴 아메리카가 있어야 하잖아.”
“버키…….”
“하지만 윈터솔져는 더는 이곳에 필요 없어.”
“…….”
“난 그냥 그림자 속에 숨어서 살아가면 될 거야. 그리고 네가 필요하다면 언제든 널 따라서 전쟁터로 나갈 수도 있어,”
“…….”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난 괜찮아, 스티브.”
난 괜찮다. 그 말이 너무 무거웠다. 누가 괜찮다는 말을 재단할 수 있을까. 물론 스티브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스티브의 눈으로 보기엔 버키는 너무 불안했다. 금방이라도 죽어 넘어갈 것 같은 얼굴로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다. 왜 스티브가 아닌 캡틴 아메리카를 먼저 보는 걸까. 저번에 말하던 좋아한다는 말은 괜찮다는 말보다 가벼운 걸까. 파란 눈에 조금 그늘이 서렸다. 스티브는 괘나 고집스러운 사람이었기에 그런 버키의 말을 반쯤 흘려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보는 것이 맞았다. 물론 버키가 환자라는 말은 아니었다. 그 녀석은 그저 조금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그래도 돌아오니까 좋다.”
“…….”
“내 친구가 옆에 있으니까 이렇게 편한데…내가 욕심을 부릴 수도 없고.”
“왜 욕심을 부릴 수 없어. 그냥 편하게 말해줘. 버키.”
“…….”
“왜 계속 속으로만 삼키는지, 난 정말 모르겠어.”
“그게…익숙하니까.”
“…….”
“그렇게 살아왔던 시간이 너무 많아서…아직은 어색해.”
“…….”
“그리고 내가 욕심을 부리면…세상에 너무 손해라서.”
여기까지 들은 스티브는 버키를 와락 껴안았다. 누가 옆에서 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펄떡펄떡 불규칙하게 뛰는 심장이 느껴졌다. 버키. 버키 반즈. 이름을 부르면서 좀 더 꽉 끌어안자 그제야 더듬더듬 한쪽 손이 스티브의 등에 닿았다. 꾹꾹 참았던 것이 또 울컥 넘어왔다. 자꾸 기대는 버릇을 들이지 않으려 하는데, 그게 참 쉽지 않았다.
“…좋다.”
“…….”
“너무 좋아서 무서워…….”
“버키.”
순간 말이 없어졌다. 버키를 품에 안은 채 계속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던 스티브는 연신 눈을 깜박였다.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면 그대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이 세상에 남은 보물은 버키 하나뿐인데, 그 녀석은 계속 불안해하기만 했다.
“내가 일찍 왔으니까. 이제 괜찮아.”
“…….”
“다음에도 나가야 하는데…너무 걱정된다.”
“그땐 내가 좀 더 좋아지도록 노력해 볼게. 괜찮을 수도 있잖아.”
“그래도…….”
“나아질 거야.”
버키는 눈을 감은 채 가만가만 말을 걸었다. 버키는 사실 자신이 이 이상 나아질 것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한번 뭉개진 뇌는 마치 푸딩 같아서 다시 제 모습을 찾기 어려웠다. 뭉그러진 것을 잘 모아둔다 해도 예쁜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버키는 자신의 뇌가 그런 모습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노력한다는 것은 망가진 뇌를 정상으로 돌리는 것이 아닌, 이 상태에서 더 나은 방법을 찾겠다는 뜻과 같았다. 이러니저러니 서로 말싸움을 해도, 둘이 붙어있는 것이 좋았다.
“버키.”
“응?”
“나중에 일이 다 끝나고, 세상이 조용해지면 우리 같이 살까?”
“갑자기 무슨 말이야.”
“네가 예전에 그랬어. 같이 살면서 내 구두나 닦아주고 같이 바닥에 매트리스 깔고 자면 된다고. 그냥 그렇게 사는 것이 왜 안 되냐고 물었거든.”
“그랬구나.”
“이번엔 내가 그렇게 하려고.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나랑 같이 살아주면 안 될까? 너무 넓은 집 말고, 브루클린에서 살던 것과 비슷한 작고 아담한 집을 사는 거야.”
“…….”
“해가 안 들면 우울해지니까 자고 일어나면 항상 해가 창문으로 들어오는 곳에서 같이 살고, 먹고. 그냥 그렇게 둘이 지내자. 응?”
“…….”
“버키, 난 너랑 떨어지기 싫어.”
“이런 상태에서 그런 말 하는 건 너무 멋없는 프러포즈야.”
“…….”
“프러포즈는 펍같은 곳에서 좋은 옷을 입고해야지. 안 그래?”
어쩐지 옛날 모습이 겹쳐졌다. 버키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는 눈치였다. 가끔 이렇게 말을 하는 도중 되물으면 말문이 막히곤 한다. 그런 걸 잘 알기 때문에 스티브는 다시 묻지 않았다. 그저 버키가 곁에 있으면 충분했다.
“나중에 꼭 같이 살자.”
“…….”
“버키. 대답해 줘.”
“알았어. 일이 다 끝나면.”
“…이런 말을 들으니 빨리 끝내고 싶은 걸,”
“캡틴 아메리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알면 다들 놀란다니까.”
버키는 또 입꼬리를 말면서 웃었다. 스티브는 그런 입매를 좋아했다. 엄지손가락으로 입매를 죽 쓸어주면 녀석은 눈을 동그랗게 뜨곤 했다. 살이 빠졌나. 괜히 걱정을 한다. 거칠거칠하게 일어난 입술에 당장에라도 자신의 입술을 겹치고 싶었지만, 꾹꾹 참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일찍 돌아온 거야.”
“…응?”
“중요한 일이라며.”
“그런 만큼 바람맞는 일이 잦더라고.”
“…나 때문인가.”
“모두의 문제지.”
스티브는 피식 웃고 말았다. 버키에게 당당하게 말하고 나간 것치곤 첫 대담은 형편없이 빨리 끝나버렸다. 이리저리 얽혀있는 상황은 복잡해도 너무 복잡했다. 물론 스티브는 말이 통하지 않으면 자기가 믿는 방향으로 끌고 가는 사람이긴 했다. 티찰라는 그런 스티브를 알아본 것인지 깨진 대담을 굳이 이어붙이지 않았다.
“왕이…실망했겠군.”
“…….”
“스티브가 좀 고집 쟁이어야지.”
“그렇게 말하니까 좀 이상한데.”
“사실이니까. 찔린 거지.”
“버키!”
“농담이야.”
기분이 완전히 풀어진 것은 확실했다. 이 정도로 안정된 표정을 보니 슬슬 그다음 이야기를 꺼내도 될 것 같았다. 이렇게 오랜 시간 공들여서 토닥거려야하는 녀석을 몇 년 동안 못 찾아서 내버려뒀었다. 스티브는 그 점이 늘 아쉽고, 미안했다.
“…버키.”
“응?”
“오늘 폐하가 식사에 초대하셨어.”
“…….”
“아직 힘들면 거절해도 괜찮아.”
“그럴 수 있나.”
“…….”
“네가 옆에 있으니 적어도 발작은 하지 않을 테니까.”
“…….”
“저녁 식사라.”
“…….”
“괜찮을 거야. 지금 기분이 좀 좋아져서,”
어쩐지 혼이 나간 거 같긴 하지만, 스티브는 자신이 버키를 제어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고개만 끄덕거렸다.
+)
큰 사건인가 싶으면서도 그냥 둘이 복작복작한 이야기가 보고싶은데, 생각보다 너무 잔잔한 기분이 들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