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사는 게 팍팍했던지라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민호는 딱히 이런저런 해결법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런 민호를 보는 뉴트도 비슷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그냥 둘이 붙어있는 정도로 만족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누구보다 가까운 듯 그렇지 않은 듯 미묘한 상태로 둘은 여전히 항상 비슷한 거리를 둔 채 서 있었다.
“너희 둘은 이제 어쩌려고?”
토마스가 둘을 가만히 바라보다 툭 던진 말이었다. 물론 이런 말이 나올 수 없을 정도로 큰일이 있었다. 민호를 따르던 사람들은 모두 경비대에 끌려갔었다. 그 소식이 저 먼 곳에 살던 토마스한테 들어가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말로 꼬박 사흘은 달려야 올 수 있는 거리는 밤새 말을 바꿔 타면서 달려온 친구는 당장 신변 보증을 요청하며 경비대에 자리를 잡았다. 경비대 대장은 갑자기 나타난 부잣집 도련님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며 자리만 빙빙 돌았다.
“내 친구는 무사한가요?”
“곧 도착할 것이니 조금만…….”
“정말 내가 이래서, 그렇게 그만두라고 했는데.”
“…….”
사실 이곳에선 다른 것보다 큰 가문의 가주나 오래된 어르신의 말씀이 더 효과가 있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알려졌을 법한 부자라면 더했다. 토마스가 가져온 아버님의 말씀이 담긴 문서 한 장이 배달되자마자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이렇게 권력이라는 걸 눈으로 보고 싶진 않았는데, 토마스는 쓴 입맛을 다시면서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때 저 멀리서 인기척이 들렸다.
“…민호!”
“토마스?”
“내가 진짜 못 살겠어.”
저 멀리서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민호를 보자마자 토마스가 벌떡 일어났다. 그나마 크게 다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할 만큼 상황이 무시무시했던지 온몸엔 자잘한 상처가 가득했다. 민호의 팔엔 아직도 피가 배어 나오는 붕대가 꽉 묶여 있었다. 그 뒤에 따라 들어오는 뉴트는 잔뜩 쓸린 얼굴에 피딱지가 올라앉아 있었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잔뜩 다친 곳에 붕대를 하나둘 싸매고 있었다.
냉큼 뛰어나가 민호의 온몸을 살펴보던 토마스는 내내 한숨을 쉬었다. 민호 옆에 있는 뉴트 꼴도 말이 아닌지 한숨이 더욱 깊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대충 듣긴 했지만, 험하게 다친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그러기에 정리하고 우리 집에 오라고 했잖아. 도대체 이게 뭐야.”
“일이 좀 있었다.”
“좀 있는 게 아닌데. 뉴트는 괜찮아?”
“나야. 뭐. 다들 더 많이 다쳤지.”
너덜너덜한 옷을 벗고 경비대한테 빌린 가벼운 옷을 입은 뉴트가 눈썹을 떨어뜨리며 웃었다. 토마스는 이후 민호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모든 일은 보증한다는 말을 남긴 채 곧 떠날 준비를 했다. 더는 이곳에 머물게 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태도는 민호도 꺾지 못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대장님.”
“아버님께 제가 최대한 할 수 있는 모든 편의를 봐 드렸다고 꼭 전해주시길 바랍니다.”
“물론이죠. 그럼.”
“토마스…어딜 간다는.”
“어디긴. 우리 집이지.”
“…….”
“어차피 여기서 더 살 수도 없잖아. 겨울이 오면 더 추워,”
“…….”
“우리 집에 와서 천천히 겨울나면서 계획을 짜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딱히 할 일이 없어도 되지만, 나도 심심하니까 말동무 해주면서 공부나 하면 되는 거지.”
“그래도…….”
“아, 하는 김에 둘이 식도 올리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민호가 토마스의 입을 막았다. 하지만 토마스는 굴하지 않았다. 일단 우리 집에 들어가면 할 일부터 마저 끝내고, 천천히 생각해. 친구들도. 그런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프라이는 은근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친구?”
“민호 친구면 내 친구기도 하지.”
“그래?”
“웅. 우리 집으로 가려면 좀 멀긴 한데, 말을 갈아타고 급하게 갈 필요도 없으니 천천히 가는 거로 하면 되지 않을까? 다들 배고프지 않아?”
“그러고 보니…….”
경비대에 잡혀있으면서 밥 몇 술 얻어먹은 것이 다였다. 그나마 물이라도 넉넉하게 먹을 수 있게 해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해서 배가 고프다는 느낌을 잘 받지 못했는데, 막상 저런 소리를 들으니 위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일단 밥 좀 먹고 움직이자.”
토마스가 웃으며 민호와 뉴트의 팔을 이끌고 찻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
“아…안 입을 거야!”
“뉴트. 그러면 어쩔 건데.”
“지겹도록 입다가 겨우 찢어져서 내다 버렸는데, 또 입으라고? 난 싫어!”
“…….”
“이젠 좀 벗고 살아도 되는 거 아닐까?”
“…….”
옥신각신 씨름하던 뉴트는 방석에 터럭 주저앉았다. 그런 뉴트를 보는 민호는 뭐라고 한마디 말도 못한 채 그 앞을 왔다 갔다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둘을 지켜보며 한마디씩 훈수를 두던 토마스는 이미 웃음을 참지 못하고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냥 안 해도 된다고.”
“하지만…….”
“뭐 자랑할 것도 아니고, 우리 둘만 알고 있으면 되는 거 아니야?”
나름 논리적인 뉴트의 말에 말문이 막혀버린 민호는 좀처럼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하지 않는 민호를 대신해 토마스가 쑥 끼어들었다.
“민호는 네가 예쁜 옷 입는 쪽이 보기 좋다고 하던데.”
“…뭐?”
“기왕이면 예쁜 거 입고하면 좋잖아.”
“여자 옷…싫은데.”
“다른 사람 부를 것도 아니고 우리끼리 할 건데 뭐.”
“…….”
뉴트는 가만 생각을 하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얼굴이 풀리는 민호를 바라보던 토마스는 슬쩍 자리를 비켰다. 조용히 치르기로 했지만, 준비할 것이 생각보다 많았다. 비어있는 별채를 청소하고 새로 만든 방석과 벽걸이를 걸어둘 생각이었다. 색은 화사한 쪽이 좋으려나.
큰일을 해야 하니 괜히 먼저 시집간 누나들 생각이 났다. 남자가 할 수 있는 것엔 한계가 있었다. 조금이라도 꼼꼼하게 해주고 싶은데, 토마스는 사실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결국, 유모의 손을 빌리기로 했는지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별채엔 하인들이 분주하게 들락거렸다.
**
가장 맑은 날을 골라 조촐한 예식이 있었다. 멀끔한 차림으로 앉아있는 친구들은 민호를 가운데 둔 채 한마디씩 덕담을 보태고 있었다. 함께 있던 동료들 외엔 연고가 없는 사람이었다. 새신랑 옷을 입은 민호는 영 민망한 듯 자꾸 물만 들이켜고 있었다. 그런 민호를 보며 자꾸 술을 권하던 프라이는 껄껄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앞에 앉아있던 토마스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뭐랄까. 어릴 때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누나와 형들의 결혼식을 다시 보는 것 같았다. 얼굴에 상처가 가실 때까지 기다려야 해서 조금 늦어지긴 했지만, 그때보다 훨씬 날이 좋아서 잘한 선택이라 생각했다. 상 가득한 음식에 특별한 날에만 먹는 달콤한 과자들까지 줄지어 나왔다. 술에 고기까지 넉넉하게 들어가자 제법 잔치 분위기가 났다. 민호가 친구들을 상대하는 동안 뉴트는 내내 방 안에 있었다.
사실 신부 측에서 마련한 방에서 혼인 의식을 치러야 했지만, 뉴트는 그럴 수 없었다. 갈 곳이 없는 것은 민호도 마찬가지였기에, 토마스 쪽에서 방을 준비하기로 했다. 혼인 의식엔 증인이 필요했지만, 이것도 거의 불가능했다. 대신 프라이와 토마스가 양측의 증인이 되어주기로 했다. 혼인 의식을 하는 방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신랑과 신부. 그리고 증인 두 명과 의식을 주관해줄 고명한 승려 한 사람뿐이었다.
“오늘 혼인에 앞서 간단한 맹세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성전에 손을 얹고 맹세의 기도를 한다. 그리고 축복의 말과 함께 밀가루를 뿌려주고, 의식에 따라 빵과 고기를 나눠 먹고 마지막으로 소금물을 마신다. 물론 정식으로 하자면 이것보다 조금 더 복잡한 의식이 있지만, 모두 생략하고 약식으로 진행했다. 뉴트는 칭칭 감은 옷이 영 불편한 얼굴이었다. 마지막 축복의 말이 끝나자 승려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프라이와 토마스가 먼저 밖으로 나갔다. 민호가 가만히 뉴트를 바라보더니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뉴트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그 손을 잡았다.
“…….”
어쩐지 심장이 손끝에서 뛰는 것 같았다. 좁고 어두운 방에서 나오자마자 둘을 축복하는 것처럼 햇살이 쏟아졌다. 가늘게 웃는 뉴트가 민호의 손을 좀 더 꽉 쥐었다.
“…솔직히 말이야.”
“응?”
“뭐가 바뀌게 되는 건진 잘 모르겠어.”
“나도 그래.”
“잘 부탁해.”
“…나도.”
둘은 잠시 같은 높이로 눈을 맞추다 웃었다. 내내 같이 있었는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심장이 간질간질한지 알 수 없었다.
생각보다 도적 무리와 함께 사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물론 뉴트 뒤에 대장인 민호가 버티고 있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그것도 어떻게 보자면 뉴트가 얻은 행운이었다.
“…….”
하지만 그런 행운을 손에 쥐었음에도, 뉴트의 표정은 언제나 찝찝함이 가득했다. 그럴 만한 일이 있었다. 사람을 납치해왔으면 재빠르게 팔아버리던가,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각오한 일이기도 했다. 그나마 목숨이라도 부지하려면 잘했던 노동 종류라도 말해야 하는 걸까. 이곳에 양이라도 있으면 그쪽을 돌보면 될 텐데. 이런 쓸데없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런데 생각만큼 일이 흘러가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어쩌라는 거지.
차라리 끌고 나가서 말 먹이라도 주라고 떠미는 편이 훨씬 마음이 편했을 것 같았다. 뭔가 할 일을 시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잘 단장해 팔아버릴 것 같지도 않았다. 두목이라는 놈은 하루에 세 번 밥을 가지고 들어와서 네 말은 잘 있다는 둥 헛소리나 해댔다. 아, 물론 누르가 무사하다는 소리는 굉장히 기뻤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하긴 뭐 좋다고 얼굴 맞대고 대화하면서 밥을 먹겠어.’
여전히 몸에 주렁주렁 감긴 천을 정리하던 뉴트는 가늘게 한숨을 쉬었다. 밥도 잘 챙겨주고, 험한 일도 시키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이 천막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잠자리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호화로웠다. 도적단 두목의 천막을 차지한 녀석은 뻔뻔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어쩔 수 없을 만큼 황송한 대접을 받았다.
사실 불편해서 죽을 것 같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여기서 자라면 잘 수밖에 없었다. 민호가 사용하던 이불과 잠자리는 어느새 뉴트의 차지가 되어 있었다. 물론 천막 주인은 일주일 째 밖에서 밤을 새우다 한 소리를 들었는지 죽을상을 한 채 안으로 들어왔다.
“…….”
“내가 나갈까?”
“아니야.”
사실 밖에서 자도 상관없는데, 뭐 그리 큰일 날 소리를 들은 건지 무뚝뚝하게 대화를 확 끊어버리곤 했다. 그리고 천막 가장자리가 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그렇게 이불 하나 방석 하나 나눠가며 잠을 자기 시작한 것이 벌써 일주일도 넘었다.
민호는 민호대로 맨바닥에 누워있으니 온몸이 결리고, 뉴트는 뉴트대로 이 상황이 너무 불편해서 잠을 설쳤다. 그래도 불편하단 소리를 입 밖에 낼 수 없어 꾹꾹 참으며 삼일을 같이 지냈다. 하지만 몸이 결리고 불편한 것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거기서 자지 마.”
“…응? 불편해? 나갈까?”
“…….”
“미리 이야기하지.”
“아니…내 말은 그게 아니고!”
벌떡 일어서는 민호를 다시 잡아 앉혔다. 도대체 이런 눈치로 대장 자리는 어떻게 꿰어찬 건지. 뉴트는 직접 말하기도 부끄러운 소리를 하나하나 밖으로 풀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민호는 머리를 긁으며 가만히 앉아있었다. 긍정도 그렇다고 부정도 하지 않는 얼굴을 바라보던 뉴트는 괜한 말을 했다면서 돌아앉았다.
결국, 어쩔 수 없이 같은 이불을 쓰기로 한 날부터 둘의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뭐 주변을 맴도는 부하 녀석들은 좋은 소식이라도 있을까 싶은 모양이었지만, 둘은 당장 이 어색한 공기에서 탈출하고 싶은 생각 만 가득했다. 자고 일어나서 서로 마주 보는 상황은 며칠 겪다 보니 조금 익숙해지긴 했지만, 도저히 그 아래로는 시선을 내릴 수 없었다. 천막에선 옷을 입는 쪽이 감기에 쉽게 걸린다. 이 이야기가 그렇게 억울하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누가 처음 시작했는지. 안 그래도 작은 이불 끝과 끝에 자리 잡은 둘은 금방이라도 구를 것 같았다.
“…….”
물론 해가 뜨기 한참 전부터 둘은 눈을 뜬 채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먼저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고 자는 척 고른 숨만 내쉴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기다리다 보면 바깥에서 해가 떠올랐다. 이 정도 시간이 흐르면 더는 버틸 수 없었다.
“…….”
민호가 일부러 잠이 덜 깬 척하며 끝까지 등을 돌리고 누워있으면, 뉴트가 먼저 일어나 옷을 입기 시작했다. 이불이 스르르 구겨지는 소리가 들릴 때면 민호의 귀가 또 벌겋게 물들었다. 죽은 듯 누워있으면 뉴트는 손끝으로 더듬어 옷을 끌고 왔다.
“…이걸 또 언제 입지.”
낮은 투덜거림조차 천막 안에선 너무 크게 들리곤 했다. 뉴트는 몇 번이나 한숨을 쉬면서도 제법 빠르게 옷을 챙겨 입었다. 민호는 여전히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뜨며 자는 척했다.
처음엔 빠르게 이 자리를 벗어나려고 서로 일어나 각자 옷을 입긴 했다.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물론 허겁지겁 손을 놀리다 보면 꼭 실수했다. 손이 서로 엉켜서 서로 남의 옷을 들고 가기도 하고, 소매가 서로 엉켜서 끙끙거리며 풀기도 했다. 그러다 알몸 상태로 서로 마주 보고 난 이후로 유난히 내외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한데, 뉴트는 입을 옷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끙끙거리며 옷을 입던 녀석은 결국 자기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겉옷을 내팽개쳤다. 절그럭거리는 장신구 소리도 요란했다. 아이 씨. 짜증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민호의 귀에 쿡 박혔다. 그런 소리까지 들었는데 계속 자는 척을 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왜 그래.”
“…….”
“뭐가 그렇게 또 짜증이…….”
“너 같으면 안 그러겠어?”
“…….”
민호가 모른 척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물론 진작 민호가 깨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뉴트는 샐쭉하게 눈을 흘겼다. 반쯤 걸치다가 만 옷을 추스를 생각도 하지 않고 민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속살을 본 것도 아닌데 어쩐지 눈을 둘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어차피 나 팔아버릴 거 아니지 않아?”
“응?”
“맞아? 아니야? 대답해 봐.”
“그야……”
민호는 또 말끝을 흐렸다.
자신은 이제 그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부하들의 생각을 알 수 없었기에 함부로 단언할 수 없었다. 뉴트는 딱히 감정이 보이지 않은 녀석의 얼굴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뭐…좋아.”
“…….”
“사실 팔아버린다 해도 그 때 되면 알아서 옷을 주겠지.”
“그게 무슨 소리야?”
“답답하네. 진짜.”
뉴트가 또 미간을 구겼다. 잠깐 같이 있는 동안 민호가 겨우 눈치를 챈 뉴트의 버릇이었다.
“뭐가.”
“그런 눈치로 잘도 이런 무리를 이끌고 있네.”
“…….”
“어차피 팔아먹을 것도 아니고, 그냥 이렇게 가둬만 둘 거라면 옷 좀 바꿔 입으면 안 될까?”
“…뭐?”
“매일매일 이 많은 옷을 껴입어야 하는 내 생각을 좀 해 달라 이거야. 지금 당장 날 팔진 않을 거니까.”
“…….”
민호는 뭐라고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런 녀석을 보는 뉴트는 생각보다 훨씬 필사적이었다. 당장 이 거추장스러운 옷만 벗게 해준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민호는 그 부탁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입을 꾹 다문 채 뉴트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왜?”
“…….”
“내내 여기 있을 건데 대충 아무거나 입으면 또 뭐 어때서. 어차피 원래 내 것도 아닌 옷이었어.”
“…….”
“뭘 원하는지 정말 모르겠네.”
뚱한 민호 앞에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댄 뉴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긴 원래 그리 말이 많은 녀석은 아닌 것 같았다. 어차피 자기가 입고 지낼 옷은 아니었다. 차라리 이곳에 오는 과정에 어딘가에 걸려 갈기갈기 찢어졌으면 하고 빌 만큼 귀찮은 옷이었다.
하지만 얼마나 튼튼하게 만든 옷인지 하나 찢어진 곳 없이 곱게 끌려왔다. 그러고 나서 지금까지 매일 아침 몇 겹이나 되는 옷을 껴입고 장신구까지 주렁주렁 달고 앉아있어야 했다. 물론 장신구야 목숨값 정도로 생각하면 들고 있을 수라도 있지, 도무지 이 옷은 한군데 쓸 곳이 없었다. 누군가 일한 만큼 먹으라면서 일을 시킨다 해도 이렇게 치렁치렁한 것을 걸치고선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이 뻔했다.
“응? 안되냐고.”
“그냥 그러고 있어.”
“가만히 있으면 누가 공짜로 밥이라도 먹여준대? 나도 어차피 여기 계속 있어야 하겠다. 밥값은 해야 할 거 아냐.”
“그럴 필요 없어.”
“뭐?”
“그럴 필요 없다고.”
민호는 한 마디 한 마디 힘주어 말한 뒤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뉴트는 민호의 옷자락을 잡으려 했지만, 한 박자 늦었다.
“그냥 여기 있으면 돼.”
“…….”
“그렇게 알아둬.”
또 한 번 정적이 찾아왔다. 천막 문이 단단하게 막히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뉴트는 다리를 쭉 뻗으며 짜증을 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여기에 갇혀있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사실 곱게 자랐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는 집이었다. 비록 지금 꼴은 이 모양이지만 한 사람 몫을 충분히 할 수 있는데.
입에서 쓴맛이 돌았다.
***
“민호 왜 표정이 그래?”
“응?”
“다 죽어가는 표정에 미간엔 그냥 주름이 펴지질 않네.”
프라이가 껄껄 웃으며 손가락으로 민호의 미간을 꾹꾹 눌러 펴줬다. 민호는 한쪽 눈을 찡그리면서 피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프라이는 그런 친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결국, 민호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서고 나서야 손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무슨 일이냐니까?”
“…그게.”
“뉴트 때문에?”
“…….”
이렇게 쉽게 티가 날 것이면서 왜 저렇게 빙빙 돌아가는지. 프라이는 뒤늦게 찾아온 친구의 사춘기를 보며 약간 짠한 마음이 들었다. 뭐라고 해줘야 할지. 아니면 모른 척해야 할지. 프라이도 그런 것을 볼 때마다 나름대로 속이 복잡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냥 놔두면 저 녀석은 내내 가슴앓이만 할 것이 분명했다. 누구 하나라도 좀 이리 밀고 저리 당겨줘야 하는데, 정작 저 친구는 영 그런 쪽에 재능이 없었다.
“그래도 얼굴 좀 펴고 다녀. 애들이 불안해한다.”
“알고 있어.”
“첫사랑이라도 하는 건지.”
“그런 거 아니다.”
“그래? 그럼 말고.”
“…….”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돌렸다. 여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분명 와락 화를 낼 것이 분명했다. 이럴 땐 그만 말해야지. 프라이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듣고 왔는지 시커멓게 얼굴이 죽어가는 놈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넌 항상 알아서 잘 하잖냐. 뭘 걱정해. 오랜 친구의 말에 민호는 조금 얼굴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뉴트가…….”
“왜?”
몇 번 망설이던 민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제야 말을 해주나 싶어서 프라이는 귀를 쫑긋 세웠다.
“아무래도 여기서 사는 게 불편한 걸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하신 네가 저렇게 귀하게 모셔놓는 사람이 처음이라 다들 놀라긴 했지만…….”
“그런 말이 아니고.”
“그러면?”
“그러니까.”
결국, 이야기를 풀어놓는 민호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프라이의 표정은 점점 미묘해졌다. 뭐라고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민호의 이야기가 끝나길 기다렸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나 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정말 그것 때문에?”
“이게 심각하지 않다는 거야?”
“아니 뭐…심각할 순 있겠지만.”
“…….”
“그러면 그냥 옷을 가져다주는 게 낫지 않아? 어차피 여기 애들도 다 아무거나 적당히 걸치고 지내잖아.”
“…….”
“뭐 같이 약탈 일하러 나갈 거 아니면 적당히 옷 입혀서 돌아다니게 하면 되는 거잖아?”
“하지만…….”
민호는 뭔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게 제일 잘 어울리니까. 굳이 여기 있다고 똑같이 어울릴 필요도 없고.”
“…….”
“안 그래? 옷이라고 해봤자 이것저것 껴입고 다니는 것이 전부인데. 내가 뭐 일을 시키는 것도 아니고.”
“뉴트는 그냥 그 일을 안 시킨다는 거에 굉장히 불만이 있고, 불안해하는 것 같은데.”
“그게 무슨 소리야?”
아. 프라이는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도대체 이 친구를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저렇게 빙빙 돌려 이야기를 하지만, 결론은 자기가 보기에 예쁘고 좋으니 벗기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간신히 내보이는 자기 욕심이 귀엽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그 나이다운 것 같기도 했다. 물론 프라이와는 그리 나이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어차피 여기 떠나서 갈 곳이 없다는 확답을 받으면 그냥 좀 밖에 돌아다니게 놔둬도 괜찮잖아.”
“그런가.”
“그래. 그러면 적당히 할 일도 생길 거고.”
“하지만…….”
“네가 그렇게 싸고도는데 누가 감히 뉴트를 건드리겠냐.”
“아니라니까.”
“아니긴. 다른 애들은 죄다 네가 그 녀석이 마음에 들어서 천막 안에 들여앉혀 놓고 얼굴도 안 보여주는 거로 생각할 걸.”
“…….”
얼굴이 또 한 번 벌겋게 익었다.
일하러 간다고 나갈 때면 이 세상에 다시없을 남자처럼 굴면서, 이럴 때 보면 천상 소년이었다. 이러나저러나. 이렇게 한마디 해서 뭔가 진전이 있으면 좋겠지. 프라이는 마음을 편히 먹기로 했다.
“어지간하면 같이 살 건데, 얼굴도 좀 보여주고 그래.”
“…….”
“진짜 부인으로 들여앉힐 거면 말리진 않겠지만.”
“아니라니까!”
“그러니까 적당히 안면 트고 지내자는 거지. 말은 안 해도 그날 네가 뉴트 안고 들어간 이후로 굉장히 궁금해하는 눈치던데.”
“…….”
“알았어?”
“알긴 뭘 알아. 그리고 뭐가 그렇게 궁금해서.”
민호가 볼을 마구 문지르며 빙글 돌아섰다. 은근히 섞인 성적인 농담에 유난히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것 같더니, 주변을 둘러보고 오겠다며 말을 끌고 나왔다.
“어디가.”
“아무래도 밖을 한 번 둘러봐야 할 것 같아. 너무 오랫동안 긴장을 풀고 가만히 있었어.”
“…….”
꼭 이렇게 뭔가 할 말이 떨어지면, 휙 사라지곤 했다. 저녁 먹기 전엔 들어와! 프라이가 냅다 지른 소리가 민호의 뒤꽁무니에 철썩 날아가 붙었다. 딱히 경비대가 올 것 같진 않지만, 그렇다고 말리진 않기로 했다. 프라이는 민호가 그러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민호는 자기만의 시간이 조금 필요한 것 같았다.
***
‘…어쩌지.’
마구 말을 재촉해서 달리는 와중에도 민호는 복잡한 머리를 도무지 정리할 수 없었다. 몸은 자꾸 고삐를 잡고 말을 다그치는데 머릿속은 딴생각만 가득했다. 아차 싶으면 그대로 낙마를 할 수 있는 아슬아슬한 상황이었지만, 민호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걷기 시작할 무렵부터 말을 더 오래 탔던 녀석이었다.
“…….”
몇 번이나 고개를 저으면서 좋을 대로 말을 몰았다. 거친 숨을 내뿜으며 달리던 말이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 민호가 이래저래 마음이 심란할 때마다 곧잘 오곤 했던 호수였다.
“…….”
민호는 훌쩍 말에서 뛰어내렸다. 여기에 얌전히 있어. 말 콧잔등을 몇 번 석석 쓸어주고 나서, 천천히 호숫가로 걸어갔다. 주변에 수북하던 풀 더미는 노랗게 죽어가고 있었다.
“벌써 겨울이 오는 건가.”
그러고 보니 바람이 쌀쌀해진 것 같았다. 민호는 볼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결을 느끼며 가늘게 눈을 떴다. 아직은 그렇게 춥진 않았지만, 겨울은 빠르게 다가올 것이 분명했다. 금방 찬바람이 불고, 얼음이 얼기 시작하면 이 부근은 바짝 말라 아무것도 남지 않겠지. 민호는 몇 해나 봤던 풍경이지만, 내내 새로웠다.
“…춥다.”
하얀 숨이 금방이라도 불어오는 겨울바람에 얼어버릴 것 같았다. 도적들이야 양을 많이 키우지 않았다. 하지만 유목 생활은 하는 사람의 재산인 양을 먹이려면 빨리 떠나야 할 시기였다. 하나둘 사람들이 떠나면 이 구역에 남는 것은 민호와 그의 무리뿐이었다.
“너도 마찬가지지.”
민호의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옆에 다가온 녀석이 주둥이로 주인의 팔을 툭툭 쳤다. 그런 애마를 바라보던 민호는 피식 웃으며 단단한 손으로 목을 두드렸다. 말은 오랫동안 함께 있으면 종종 이렇게 생각을 읽는 것 같은 행동을 하곤 했다. 민호는 그래서 동물을 좋아했다.
“좀 더 추워지기 전에 여기에 한 번 더 올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이렇게 좋은 곳인데 좀처럼 모른다. 이 말이지.”
“…….”
“안 그래? 야쿠브.”
민호는 낮게 웃으면서 말에 슬쩍 기댔다. 사람보다 높은 따뜻한 체온이 온몸에 스며들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민호는 한껏 늦장을 부리고 있었다. 프라이에겐 저녁 먹을 때까지 돌아가겠다고 했지만, 이미 해가 저 멀리 기울어지고 있었다.
“너무 늦었나.”
길게 그림자가 늘어지는 걸 눈치를 챈 민호가 말에 얹어진 안장을 다시 조절해줬다. 몇 번 주변을 살피다 발판에 발을 걸고 훌쩍 뛰어올랐다. 그리곤 고삐를 바짝 당겨서 돌아갈 길을 재촉했다.
‘…이런 아무래도 저녁 시간이 끝나서 도착하겠는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차 싶었다. 당장 저녁 시간에 꽁꽁 갇혀있어야 할 뉴트를 떠올리니 괜히 미안해졌다. 좀 더 빠르게 부탁해. 야쿠브. 민호가 고삐를 바짝 당기며 걸음을 재촉했다.
보통은 한군데 모여서 밥을 먹곤 했다. 민호도 예외는 아니었다. 큰 접시에 음식을 잔뜩 쌓아두고 필요한 만큼 가져가서 먹는 것에 익숙한 무리는 일찌감치 흥분하고 있었다.
“고기가 나온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어떻게 된 거야?”
“일단 주는 대로 먹어. 먹다가 뺏길라.”
“잔치 날이야?”
수북하게 담긴 고기를 바라보던 녀석들이 하나 둘 고기를 접시에 덜기 시작했다. 각자 가지고 있는 작은 칼을 들더니 먹고 싶은 만큼 이것저것 슥슥 썰어서 접시를 채우고 있었다. 양고기에, 소시지까지 이것저것 가져가는 손이 점점 빨라졌다.
“두목, 뭐해?”
“…응?”
“안 먹어?”
“아니, 먹는다. 먼저들 먹어.”
“오늘 두목이 이상하네.”
“…….”
문득 공중에 멈춰있는 손이 보였다. 손가락에서 팔목을 따라 시선이 쭉 올라갔다. 얼굴을 확인하니 민호였다. 보통 때면 같이 어울려서 식사했을 텐데, 오늘은 유난히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프라이는 그런 민호를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민호가 구워달라고 했는데, 이미 반절도 넘게 없어진 양고기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모른 척 민호 옆에 자리를 잡은 프라이가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민호.”
“…왜?”
“고기 구워달라며, 그 녀석 때문인 거 아냐?”
“…….”
“신경 쓰려 했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 한창 배고플 시간일 텐데 언제까지 저렇게 가둬둘 거야.”
“뭐라는 거야.”
“등 한번 떠밀어 주는 거지.”
“…….”
“친구 좋다는 게 뭐냐.”
“그런 거 아니야.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어,”
아무것도 아닌 척 빵을 찢어 입에 넣던 민호는 애써 시선을 천막으로 돌리지 않았다. 하지만 씹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는 것을 보아하니 여전히 온통 신경은 그쪽에 가있었다.
어휴. 프라이는 한숨을 쉬며 큰 접시에 이것저것 담기 시작했다. 접시 한쪽에 잘 익은 양고기를 담고, 그 옆에 몇 가지 고기와 내장으로 만든 순대도 조금 얹었다. 넓적하게 구운 빵을 크게 잘라서 척척 쌓은 다음 과일과 치즈까지 옆에 와르르 쏟았다. 프라이는 자신의 작품을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프라이가 열심히 움직이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민호는 아까 들고 있던 빵을 내내 든 채 공중에 시선이 멈춰 있었다.
“가봐.”
“…뭐가.”
“어차피 지금 밥이 넘어가지도 않잖아.”
“…….”
“하루 정도 따로 밥 먹으면 뭐 어때. 다들 적당히 먹으면 알아서 할 일 하러 갈 테니까.”
“…….”
“자. 2인분 담았다.”
“…….”
“어서 가보라니까.”
“…….”
음식이 수북하게 담긴 쟁반을 넘겨준 프라이가 자꾸 민호의 등을 떠밀었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민호는 약간 민망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당장 고기파티에 신난 녀석들은 딱히 그런 대장을 신경 쓰지 않았다. 으음. 항상 같이 먹던 시간에 빠지려고 하니 뭔가 찝찝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결국 프라이가 이겼다.
“…그럼 애들 좀 부탁해.”
“네가 걱정 안 해도 알아서 먹고 놀고 있을 거야. 이번 주엔 딱히 할 일이 없잖아?”
“…….”
결국, 민호는 음식을 들고 조용히 무리를 빠져나왔다. 민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프라이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다시 음식에 집중했다. 긴 그림자가 민호를 쫓아갔다.
“으음.”
민호는 천막으로 걸어가면서도 내내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뭐라고 할까. 지금까지 도적질하며 사는 동안 이렇게 따로 챙겨야 했던 적이 없었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뉴트를 굳이 천막에 가둬둔 사람이 자신이니 뭐라고 불평할 수도 없었다. 민망함에 자꾸 헛기침이 나왔다. 손에 들고 있는 쟁반이 점점 무거워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영원히 도착하지 않을 것 같던 천막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긴 그렇게 넓은 부지에 집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흠. 흠. 걸음이 자꾸 느려졌다. 몇 번이나 멈춰선 민호는 뒤를 돌아보았지만, 돌아갈 순 없었다.
“…어쩐다.”
물론 고민한다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자기가 민망하다 해서 아무 잘못이 없는 뉴트를 굶길 순 없었다. 하지만. 그러니까. 아. 이 민망함을 어떻게 해야 할지. 또 귀가 따끈따끈해졌다. 민호는 거의 죽어가는 표정으로 뉴트를 가둬둔 천막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
그 시각, 뉴트는 슬슬 허기를 느끼는 자신의 몸을 탓하고 있었다. 민망할 정도로 몸은 정직했다. 뭐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남으려고 하는지, 착실하게 배가 고프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끙.”
잔뜩 찌푸린 얼굴로 좀 더 웅크려 앉은 뉴트는 좀처럼 열리지 않는 문을 내내 바라보기만 했다. 안쪽에선 열 수 없으니, 밖에서 들어올 수밖에 없는데 영 인기척이 나지 않았다.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가 살짝 들리는 것을 보면 분명 저녁 시간이 된 것 같은데, 이대로 굶겨 죽이려는 건지. 아니면 반항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내버려두려는 건지. 시간이 지날수록 최악의 상상만 골라 하는 뉴트는 점점 더 심각해졌다.
“뭐…죽기밖에 더 하겠어.”
그러려니 했다. 어차피 이렇게 끌려온 이상 평범한 삶을 기대하는 것은 어려웠다. 누군가 지나가는 말로 굶는 것도 익숙해지면 배가 고프지 않다고 했던가. 누워있고 싶지만, 그렇게 무방비한 상태로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조금씩 자세를 바꿔가며 부득불 앉아있는 뉴트의 귀에 반가운 소리가 들렸다.
“…….”
절대 열릴 것 같지 않던 천막 문이 덜컹거렸다. 밖에서 들리던 인기척이 순간 뚝 끊겼다. 그러더니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뉴트는 잔뜩 긴장한 채 문을 노려보았다.
물론 민호가 들어온다면 그나마 나은 상황이었다. 그나마 이 곳에서 자신에게 아주 조금이나마 호감을 보이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대장인 민호 밑에 있는 녀석들은 달랐다. 안 그래도 눈도장 찍지 말라며 민호가 당부했던 것이 휙 스쳐 지나갔다.
“아, 도대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괜한 짜증이 왈칵 올라왔다. 어차피 갈 곳도 없는 몸인 데다, 몸 하나 지킬 수 있는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지금 밖에서 문을 열고 있는 사람이 만호가 아니라면, 생각보다 더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뉴트의 어깨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
뭘 그렇게 열심히 묶어 놨는지 좀처럼 열리지 않는 문은 불안함을 더욱 자극했다. 뉴트가 조금씩 뒤로 물러서다 못해 천막에 등이 닿을 무렵이 되어서야 문이 열렸다.
“…왜 그러고 있어?”
“…….”
“안 잡아먹어.”
“…….”
커다란 접시를 든 민호가 잔뜩 웅크리고 앉은 뉴트를 바라보며 이상하단 표정을 지었다. 뉴트는 그런 얼굴을 봐도 좀처럼 긴장이 풀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잘해준다 해도 순간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여전히 다가오지 않는 뉴트를 설득하길 포기한 민호는 직접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말하면 실례일지도 모르지만 사람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고양이 같은 느낌이 들었다.
조금 더 뒤로 물러나려는 뉴트는 애써 날카로운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겁먹은 표정을 내보였다간 그대로 잡아먹힐 것 같았다. 하지만 민호는 그런 뉴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막 가운데 깔린 덮개 위에 접시를 툭 내려놓았다.
“저녁 먹을 시간이라…….”
“…….”
“안 먹을 거야?”
“…….”
“여기선 제시간에 찾아 먹지 않으면, 그 이후에 제대로 된 음식이 남아나지 않아. 듣고 있어?”
“…….”
“먹지 않으면 지쳐서 죽는다고.”
“…….”
여전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조개처럼 입을 다문 뉴트를 보고 있자니 또 머리가 아팠다. 접시를 조금 밀어주고 자신도 털썩 주저앉았다. 약간 놀란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까만 시선이 자기도 모르게 흔들렸다. 민호는 마른 입맛만 다시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어쩔 수 없어.”
“…뭐가.”
“나도 밥 못 얻어먹고 너 먹이면서 같이 먹으라고 쫓겨났거든.”
“뭐? 대장이라며? 누가 널 쫓아내.”
웃기는 소리 한다는 표정이 민호의 눈에 가득 들어왔다. 하나도 믿고 있지 않은 눈치였다. 물론 당연한 일이었지만, 구구절절 설명해야 하는 쪽은 답답하기만 했다.
“원래 이런 곳에선 밥 주는 사람이 제일 강한 거야.”
“…….”
“그러니까 잔말 말고 먹을 수 있을 때 먹어둬.”
“왜? 잘 먹인 다음 데려다 팔려고?”
“…….”
“까칠하게 마르면 사주는 사람이 없을 거 같아서?”
“그런 거 아니야!”
“…….”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르는 민호의 기세에 깜짝 놀란 뉴트가 입을 다물었다. 민호는 잔뜩 표정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고 있었는데, 도대체 저 녀석은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적어도 여기선 사람을 굶기는 짓은 안 해.”
“…….”
“제발 의심하지 말고 좀 먹어.”
“…….”
뉴트는 그제야 약간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도적 무리라고 해서 괜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걸까. 눈을 깜박이던 뉴트가 주춤주춤 접시 앞으로 다가왔다. 물론 계속 버티려 했지만, 일단 음식을 보고 나자 두 배로 배가 고파졌다. 약간 식긴 했지만, 아직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고기를 보고 있으니 입에 침이 고였다.
“먹어.”
“…….”
“왜 또.”
“나…칼이.”
“…….”
민호가 발로 차서 없애버린 칼이 생각났다. 휴대용 칼이 없으니 제대로 고기를 썰어서 가져올 수 없었다. 뉴트는 손으로 애꿎은 빵만 뜯어서 입으로 가져갔다. 깨작깨작 뭔가 먹기 시작하는 뉴트를 보던 민호도 그제야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
치즈도, 고기도 뭐 하나 제대로 자르지 못하는 것을 보다 못한 민호가 자신의 칼을 꺼냈다. 이것저것 먹기 편한 크기로 썰어서 접시에 나눠 담았다. 그리고 한 말마디 없이 쑥 뉴트의 가슴 쪽으로 내밀었다.
“…왜?”
“칼이 없으니까 이거라도 먹으라고.”
“…….”
“빵만 먹어서 뭐할 거야.”
“…….”
작은 접시에 이것저것 담긴 음식을 바라보던 뉴트는 잠자코 그것을 받아들었다. 민호는 자기가 부탁해서 음식을 준비했다는 소리 한마디 하지 않은 채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던 뉴트는 아직도 경계를 풀지 않은 얼굴로 음식을 집어 들었다.
한마디 말도 주고받지 않는 어색한 식사는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다. 뉴트가 접시를 비워 가면 말없이 그릇을 거둬 갔다. 그리고 다시 새 음식을 담아 건네주던 민호는 계속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
그러다 보니 미묘하게 변하는 뉴트의 표정을 도무지 알아차릴 방법이 없었다. 배부른데. 배가. 몇 번이나 그런 마음을 알아차려 주길 기대했지만, 민호는 도통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더 먹으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뉴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배불러.”
“…응?”
“배부르다고. 얼마나 먹일 셈이야.”
“아니…그게.”
민호는 또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음식을 건네주는 손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뉴트는 살짝 눈을 찌푸렸다.
“많이 먹었어.”
“…….”
“고마워.”
흘러가듯 한 한마디에 민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깜짝 놀라 허둥지둥 접시를 끌어모았다. 그리고 뉴트가 한마디 더 하기도 전에 벌떡 일어선 민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천막 밖으로 걸어나가 버렸다. 빠른 속도로 천막에서 멀어지는 녀석을 붙잡을 수 없었다.
갑자기 또 혼자 남겨진 뉴트는 당황한 표정으로 눈만 깜박거렸다. 굶기진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영 기분이 이상한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도대체 저 두목이란 녀석의 의중을 알 수 없었다.
“…이상한 녀석이야.”
뉴트는 문 잠그는 것조차 잊어버린 저 두목이란 녀석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잠시 혼란스러웠다. 도망가라고 제사라도 지내는 걸까. 물론 문이 열려있다고 해서 밖으로 나갈 생각은 없었다. 절대 나가지 말라는 소리와 함께 꼼꼼하게 문단속을 하던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유난히 허둥거리는 모습을 잠깐 되새겨 보던 뉴트는 결국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느새 불안하던 마음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어떻게든 되겠지. 뉴트는 조금 더 편하게 마음을 먹기로 했다.
“다 먹였어?”
“…….”
“민호!”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채 빠르게 걸어오는 친구를 바라보던 프라이가 발걸음을 붙잡았다. 민호는 여전히 시선을 제대로 고정하지 못한 채 프라이의 품속에 빈 그릇을 냅다 던져버렸다.
“다 먹었냐고.”
“어…그래. 다 먹였어.”
“왜 그렇게 진정을 못 하고 있어?”
“아무 것도 아니야.”
“…….”
“왜 그렇게 봐!”
갑자기 내 친구가 사람이구나 싶어서.”
“무슨 소리야.”
민호는 친구의 말을 도통 이해하지 못하겠단 표정을 지었다. 그런 얼굴을 빤히 보고 있던 프라이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다른 일을 할 땐 누구보다 예민하고 정확한 판단을 하는 녀석인데, 이렇게 자기감정엔 무뎠다. 옆에서 말을 해줘도 못 알아들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잘 해줘.”
“잘 해주고 있어.”
“뉴트가 이곳이 익숙해지고 도망치지 않을 것 같으면 아예 같이 살아도 괜찮을 텐데.”
“…….”
“너도 나쁘지 않잖아.”
“그 녀석 마음이 문제지. 내가 결정할 일은 아니야.”
“그 소리 다른 사람들이 들었으면 진짜 놀랄 거야. 누가 두목이 그런 말을 하리라 생각하겠어.”
“됐어. 뉴트 이야기는 그 정도만 하자.”
또다시 화제를 돌려버리는 민호는 여전히 어설펐다. 프라이는 여기서 더 했다간 친구가 진심으로 화를 낼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민호가 건네준 접시를 들고 설거지하는 곳으로 걸어갔다.
민호는 그런 프라이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사실 프라이가 하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안 그래도 머릿속이 복잡한데, 마치 그런 생각을 꿰뚫어보기라도 하는지. 오랜 친구는 너무나 쉽게 그의 의중을 파악했다.
“…어쩔까.”
물론 필요하다면 사람을 사고, 팔 수 있었다. 도적이라면 보통 물건을 빼앗고 사람을 팔아 필요한 것을 마련했다. 하지만 민호는 그런 것을 싫어해 오랫동안 사람을 매매하지 않았다.
‘…뉴트.’
물론 팔아버릴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곳에 있기 싫어한다면 억지로 잡아놓을 수도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물론 한번 도적 단에 끌려갔던 사람이 평범한 생활로 돌아갈 확률은 낮기만 했다.
특히 뉴트처럼 다른 곳으로 팔려가던 처지라면 더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절대 놔줘선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도적 무리를 이끄는 자신의 지위와 평범한 인간으로서 생각하는 심장의 괴리감이 점점 심해졌다. 민호는 잠시 멈춰 서서 심장 부근을 손으로 꽉 쥐었다.
‘답답하네.’
이상하게 심장이 크게 뛰면서 숨이 찼다. 몸이 아픈 것 같진 않은데 자꾸 이렇게 온몸이 통증을 호소했다. 아무래도 뭔가 잘못되고 있는 것은 확실한데, 정확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제야 어젯밤 일이 생각났다. 무슨 용기였는지 도적 두목한테 하나부터 열까지 대든 것도 모자라서, 주인인 남자를 쫓아내고 천막까지 점거해서 잠을 잤다. 뉴트는 잠이 덜 깨 핑핑 도는 머리를 붙잡고 끙끙 앓았다. 하나 둘 생각나는 기억을 더듬자니 어젯밤에 그대로 목이 달아나지 않은 것이 용하다 싶었다.
“…내가 눈에 보이는 게 없어서.”
이러고도 아직 살아있는 걸 보면 확실히 당장 죽은 팔자는 아닌가 싶었다. 뉴트가 괴로움에 버둥거리자 간신히 덮고 있던 두툼한 이불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아. 자신의 꼴이 어떤지 알아챈 뉴트가 허겁지겁 이불을 끌어당겼다. 밤에 금방 추워지는 천막에선 옷을 입고 자면 감기에 걸리기 쉬워서 벗고 자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이런 사지에서 그러고 잤다는 것도 참 어이가 없을 정도로 태평스러웠다.
“아주 그냥 미쳤었네.”
옆을 돌아보니 수북하게 쌓인 옷더미가 눈에 들어왔다. 슬슬 옷을 입어야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대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저 옷을 다시 입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슬쩍 천막 안을 돌아보며 입을 만한 것이 있나 찾았다. 하지만 무슨 천막이 이렇게 삭막한지, 정말 필요한 생활도구 외엔 있는 것이 없었다. 있어 봤자 방석이나 여분의 이불 정도였다.
날붙이는 다 치운 건지, 아니면 원래 없었는지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어제 떨어뜨린 칼 생각이 났다. 보통 하나씩 품에 들고 다니는 거라 없으면 불편할 수밖에 없는 물건이었다. 바닥을 살폈지만 역시 가지고 나간 듯 보이지 않았다.
“망했군.”
짧게 혀를 찬 뉴트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알몸으로 있다가 사람이라도 들이닥친다면 저항을 할 수 없을 거란 생각이었다. 물론 틀린 말도 아니었다. 지금 당장 끌려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입기 싫은 표정으로 옷을 하나하나 주워 입었다. 화려한 자수로 마무리된 겉옷까지 입은 뉴트가 한쪽에 모여 있는 팔찌를 바라보았다.
‘저건 어쩔까.’
잠깐 고민을 했다. 굳이 끼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저걸 모두 버려둘 순 없을 것 같았다. 도적들이 자신을 데려온 이유가 패물이라면, 목숨값인 물건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았다. 뉴트는 번쩍거리는 장신구 앞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몇 번 망설이다가 목걸이를 들어서 목에 걸었다. 작은 구슬과 장식품을 하나하나 꿰어서 만든 목걸이는 꽤 거추장스러웠다. 몇 개나 되는 팔찌로 줄줄 흘러내리는 소매를 고정했다. 어쩐지 온몸이 묵직해지는 기분에 눈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 남은 장신구를 손가락으로 세어봤다. 반지는 너무 많았다. 저걸 다 끼고 있으면 주먹조차 제대로 쥘 수 없을 것 같았다. 가장 단순하게 생긴 반지 두어 개만 골라서 손가락에 끼우곤 나머지는 한곳에 모아두었다.
뉴트가 옷도 다 입고, 이젠 뭘 해야 하나 대책을 세우는 동안 천막엔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하다못해 주변에 누군가 지나다니는 기척조차 들리지 않았다. 조용하면 조용할수록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사실 이곳이 감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쪽으로 머리가 기울기 시작하자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얼굴이라도 가려보자 싶어서 머리쓰개를 손으로 끌어왔다.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지만, 여기에 내내 앉아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좀처럼 밖으로 나가기 어려웠다. 그나마 안전한 공간을 벗어나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뉴트가 심호흡을 하며 옷자락을 꾹 쥐었다. 아직 몸에 아무런 위해를 가하지 않고 살려둔 것을 보면 분명 쓸모가 있을 거란 계산이었다. 그 쓸모란 것이 뉴트의 몸이든 아니면 걸치고 있는 패물이던 살려둘 이유만 된다면 충분했다.
“…….”
조심스럽게 천막 문을 걷었다. 완전히 떠오른 해가 길게 빛을 이으며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뉴트는 잠깐 멈칫하며 바깥으로 귀를 기울였다. 드문드문 들리는 낯선 목소리들이 모래바람 속에 섞여들었다. 말 울음소리와 물건 옮기는 소리가 마구 뒤섞여 들렸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직 뉴트가 바깥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사람이 없었다. 침착하게 주변 상황을 둘러보던 까만 눈에 익숙한 말이 눈에 들어왔다. 거칠게 반항하던 녀석은 고삐를 잡아당기는 힘에 더는 버티지 못하고 억지로 발을 떼고 있었다.
“누르!”
그 모습에 크게 놀란 뉴트는 조금 전까지 조심스럽게 주변 상황을 살피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천막을 박차고 뛰어나왔다. 비단 실로 자수를 놓은 붉은 옷이 햇살을 받아 눈이 부시게 빛났다. 그런 뉴트를 보던 사람들이 수군거리더니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뭐야 저 녀석 잡아! 웅성거리는 소리를 헤치고 달려온 뉴트가 조금 더 빨랐다. 그대로 말 앞을 막아선 채 끌고 가던 사람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런 거로 물러설 도적들이 아니었다. 그런 맹랑한 인질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뭐하는 거야.”
“내 말이에요. 어디로 데려가는 거죠?”
“지금 네 녀석이 이렇게 당당해 할 상황이 아닐 거 같은데, 앞뒤 분간을 못 하고 덤벼들긴.”
“내 말이라고 했어요. 다른 건 다 필요 없어도 얜 안돼요.”
“허 참.”
절로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뭐가 그렇게 소중한 것인지는 몰라도 말 앞에서 떨어지지 않는 녀석은 누르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미 주변을 둘러싼 도적들은 그 모습이 웃긴 듯 저마다 한마디씩 보탰다. 소란스러움이 커졌다. 하긴 누가 봐도 이상한 상황이었다.
자기 목숨을 먼저 걱정해도 모자랄 판에 말을 지키려고 한다니. 그러고 보니 옷차림도 기묘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푹 덮어쓴 천 때문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당돌한 녀석임은 틀림없었다.
“이깟 말보단 네 목숨이 더 소중할 텐데.”
“내 목숨만큼 소중한 아이예요.”
“하긴 가끔 이렇게 돌아버린 녀석이 있긴 하더라니까.”
“…….”
“이곳으로 끌려와서 제정신이 아니거나. 아니면 당장 죽어도 아쉽지 않다는 소리지.”
거칠게 살아온 녀석들은 뉴트의 말이 그다지 의미 있게 들리는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그리곤 억지로 말에서 떼어놓았다. 잠깐. 뉴트는 온몸을 붙잡는 손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장정 몇 명의 힘을 당해낼 수 없었다.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놔둬.”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대장 하지만…….”
“그냥 놔두라 했다.”
“쳇.”
다시 한 번 명령이 떨어지자 뉴트의 팔을 붙잡고 있던 손이 툭툭 떨어졌다. 이곳에서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잔뜩 비틀린 채 잡혀있던 손목이 자유로워지자 뉴트가 눈을 찡그리며 손목을 주물렀다. 얼마나 세게 잡아당겼는지 온몸에 새빨간 손자국이 남은 것 같았다.
뉴트를 빤히 쳐다보던 녀석들이 말 고삐를 놓고 낮게 구시렁거리며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대장이 하지 말라고 했는데, 억지로 끌고 갈 수도 없었다. 뉴트가 달려가서 누르의 목을 와락 껴안았다. 그리곤 여기저기 손으로 쓸어주며 다친 곳이 없는지 살피기 시작했다.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
그런 뉴트를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민호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리곤 잠시 뒤 뚜벅뚜벅 걸어가서 누르의 고삐를 잡았다. 또 화들짝 놀란 눈이 민호를 쳐다보았다.
“여기서 계속 이러고 있으면 다들 널 의심할 거야.”
“어째서.”
“도망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겠지.”
“…….”
“그리고 난 다음 우리들의 본거지를 경비대에 알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말이야.”
“…….”
“이제 이 녀석은 아무도 건드리지 않을 테니 조용히 따라와.”
“…….”
민호는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먼저 말고삐를 잡고 걷기 시작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세게 반항하던 말은 무슨 일인지 민호를 따라 얌전히 걷기 시작했다. 뉴트는 한 걸음 두 걸음 멀어져가는 둘을 바라보다 급히 뒤를 따랐다. 반쯤 뛰듯 걸음을 따라잡은 뉴트는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쓰개를 두 손으로 단단히 잡았다. 참 묘한 광경이었다.
아무 말 없이 말을 데려간 민호는 전용 마구간에 고삐를 묶었다. 처음 민호를 만났을 때 봤던 커다란 덩치의 검은 말만 있는 곳에 얌전히 들어간 녀석은 가볍게 머리를 흔들 뿐 별다른 반항을 하지 않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런 모습을 보던 뉴트는 쉽게 말을 걸지 못했다. 민호가 말의 콧잔등을 슥슥 쓸어주다 고개를 돌렸다.
“됐지?”
“뭐가.”
“이 녀석이 안전하길 바란 것이 아니었나.”
“그야 그렇지만…….”
어물어물 말을 삼켰다. 갑자기 이런 친절을 받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분명 다른 의도가 있는 것 같았다. 수상한 것을 보는 표정이 점점 심각해지는 걸 빤히 바라보던 민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경계하려면 처음부터 하던가, 아니면 살갑게 굴면서 목숨이라도 부지하려고 하던가. 이도 저도 아닌 녀석은 내내 뾰족하기만 했다.
“너는 어젯밤에도 그랬지만 정말 이상한 녀석이다. 보통 말보다 스스로 목숨을 더 중히 여기지 않던가.”
“내 목숨과도 같은 녀석이야.”
“그래서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거다.”
“…….”
“보통 사람들은 자기 목숨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던데.”
“그렇지.”
“지금 이 상황이 너한테 위험하다고 생각하진 않아?”
“…….”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
아차 싶었다. 몸에 지니고 다니는 칼도 무기도 없는 상황에서 도적 두목과 독대를 하고 있다니. 뉴트의 까만 눈에 당황스러움이 사렸다. 그런 뉴트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보던 민호는 입꼬리만 슬쩍 당기며 웃었다. 애써 침착함을 가장하려 했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민호는 몸을 완전히 돌려 뉴트를 바라보았다. 뉴트는 그 시선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잠깐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대로 평정심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앞만 바라보고 있었지만, 따지고 보면 같은 상황이었다. 민호가 슬쩍 몸을 움직여 시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고 나서야 둘은 서로의 얼굴을 이제야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
“지금 이 상황에 네가 할 수 있는 가장 영리한 행동이 뭐라고 생각해? 똑똑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야 할지.”
“…….”
뉴트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확실히 지금 당장 민호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차라리 말고삐라도 손에 쥐고 있었다면 조금 더 마음을 놓을 수 있을 텐데, 그것도 아니었다. 누르는 얌전히 마구간에 들어가 있었고, 그 앞은 민호가 지키고 서 있었다.
“뭐해?”
“아니…그러니까.”
급하게 한 걸음 더 물러서려던 뉴트가 뒤로 넘어졌다. 발꿈치로 옷자락을 콱 밟자 완전히 몸의 균형이 무너졌다. 그러다 더 당황하며 손을 뻗으려 했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넘어간다. 뉴트가 눈을 질끈 감았다. 곧 와장창 소리를 내며 온몸에 멍이 들 정도로 구를 것으로 생각했다. 어. 하지만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뉴트가 잔뜩 감고 있던 눈을 조심스럽게 떴다.
“…어.”
“…….”
시선 가득 민호의 얼굴이 들어왔다. 깜박. 깜박. 뉴트는 황당한 표정으로 눈만 감았다가 떴다. 으윽. 민호가 잔뜩 찡그리며 허리를 잡은 팔에 힘을 줬다. 일어나 무겁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뉴트는 버둥거렸지만, 결국 민호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일어날 수 있었다.
“하아.”
흙 발자국이 선명한 옷자락을 바라보던 뉴트는 끙끙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뭘 하려 그랬지. 어쩐지 절망이 커지는 기분이었다.
“가만있으면…….”
“응?”
“그냥 가만히 있으면 다들 널 건드리지 않을 거다.”
“…….”
“무슨 소린지 알아들어? 내가 널 놔두라고 한 건 돌발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달렸다는 이야기다.”
“…….”
“아까처럼 돌발 행동을 한다거나, 괜히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면 적어도 몸에 위해를 가하진 않을 거라고.”
“그건…….”
“그렇게 말꼬리 잡는 것도 그만 둬.”
뉴트는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숙이자 머리쓰개가 와르르 흘러내렸다. 민호는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눈앞이 아득해졌다. 분명 머리로는 남자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저렇게 햇살을 받고 있으면 자꾸 다른 생각이 들었다. 하긴 처음 데리고 왔을 때도 착각한 부분이 있긴 했다. 옷을 벗기면 헷갈릴 이유도 없을 텐데, 어쩐지 그러긴 싫었다.
“돌아가.”
“뭐?”
“내 천막으로 돌아가 있으라고.”
“…….”
“저녁 때까지 괜히 나돌아다니지 말고 가만히 앉아있어.”
“내가…어째서.”
“우리 애들이 내가 하는 말에 복종하는 걸 보니 그다지 무섭지 않은가 본데 말이야.”
“…….”
“생각보다 거친 녀석들이야. 이런 곳에서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해야 하거든.”
“알았어.”
뉴트가 생각보다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민호는 약간 헛기침을 하며 앞장섰다. 옷자락을 살짝 든 채 뒤따라 걸음을 옮겼다. 얌전히 있던 자리로 돌아온 뉴트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민호가 말했던 것이 맞았다.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지긴 했지만,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그런 것을 눈으로 보고나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민호는 발을 멈춘 채 멍하니 서 있는 뉴트를 천막 안으로 밀어 넣었다. 버텨보려 했지만, 뒤에서 강하게 미는 힘을 당해낼 수 없었다.
“잠깐!”
“그 안에 얌전히 있어. 안에서 절대 문을 못 열게 할 거니까 괜히 힘 빼지 말고.”
“…….”
와장창 소리를 내며 바닥에 주저앉은 뉴트는 온몸에 엉겨드는 옷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 모습을 보던 민호가 문을 한 손으로 붙잡고 말을 이었다.
“저녁 시간이 되면 음식 가져다줄 거니까 너무 걱정하진 마.”
“밥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야!”
“그럼 잠이라도 한숨 자면 되겠네.”
“너! 이거 안 열어!”
안쪽에서 문을 열려고 하는 소리가 점점 시끄러워졌지만, 민호는 한 줌 미련을 남기지 않고 자리를 떴다. 좀 편하게 놔두고 싶어도 영 도움을 주지 않는 통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젠장.”
뉴트는 단단하게 잠긴 문을 연실 쥐어뜯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것도 없는 이런 곳에서 시간을 보내라는 것도 짜증이 나는데, 혼자 있는 것도 싫었다.
“도대체 여기서 뭘 하라고.”
바느질에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이곳엔 바느질할 수 있을 만한 도구가 없었다. 뉴트는 바닥에 깔아놓은 이불 위에 앉았다. 잔뜩 긴장했던 온몸이 찌르르 아파져 왔다. 옷은 내내 불편했고, 천막은 점점 조용해졌다. 이리저리 눈을 돌리며 문양의 개수를 세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쉽게 잠이 오곤 했다.
“…….”
꾸벅꾸벅 졸던 고개가 갑자기 푹 꺾였다 그리고 깜짝 놀라 고개를 든 채 눈을 깜빡거렸다. 아. 그제야 자신이 졸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괜히 딴 짓을 했다. 그래도 오는 졸음을 막을 수 없었다. 고개만 끄덕끄덕하며 졸던 뉴트는 어느샌가 이불 위에 웅크린 채 잠이 들었다.
뉴트를 천막 안에 가두고 나자 민호는 금방 할 일이 많아졌다. 물론 아까부터 해야 할 일을 일부러 미루고 있는 것에 가까웠다. 오늘은 밖으로 나가지 않기로 했으니, 며칠 동안은 이곳에 머물러야만 했다.
사실 도적질이란 것은 너무 자주 나타나면 꼬리 밟히기 딱 좋은 일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멀쩡히 말을 타고 있던 사람까지 납치해서 떠났는데, 며칠 동안은 죽은 척하고 사는 것이 편했다. 이번엔 뉴트 외엔 이렇다 할 약탈물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굶어 죽는 것도 아니었다.
“…….”
민호는 마른 입맛을 다셨다. 다들 그런 생활을 잘 알고 있어서 두목이 어슬렁거리며 주위를 돌아다녀도 딱히 말을 걸지 않았다. 물론 이런 시기에 제일 안절부절못하고 불편해하는 것은 민호였지만, 그렇다고 제 욕심만 차리려 부하들을 사지로 몰아넣을 생각은 없었다. 며칠 몸을 혹사한 말들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고, 무기를 정비하는 곳에도 들렸다.
“작업은 좀 어때?”
“언제나 그렇죠. 대장.”
“그런가.”
“대장이야말로 재미 좀 보셨습니까?”
“…무슨 소리야?”
“다 아시면서 왜 이러실까.”
킬킬 웃는 목소리가 하나둘 섞여들었다. 민호는 그런 녀석들의 엉덩이를 더 한번 걷어찼다. 하여튼 조금만 틈이 있으면 농담을 못 해 죽은 귀신이라도 붙은 듯 굴었다. 잔말 말고 저녁 먹기 전에 무기 손질이나 끝내놓으라고 큰소리치고 돌아섰다.
“두목, 우리도 다 안다니까!”
“시끄럽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소리 지르는 민호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새삼스레 다른 생각이 들었다. 얼굴의 열기가 가라앉지 않는 민호는 수건에 물을 적셔 얼굴에 뒤집어썼다. 축축한 수건이 얼굴에 철썩 붙었다. 하지만 뜨끈뜨끈한 볼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
이놈들은 사람 놀리는데 재주가 있어서. 몇 번이나 속으로 투덜대던 민호는 미지근해진 수건을 집어 들었다. 괜한 소리를 들었더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이래서야. 영 못 써먹겠어. 아직도 벌겋게 익은 얼굴을 몇 번이나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그리고 음식을 준비하는 곳으로 갔다. 많은 사람을 먹이는 곳은 벌써 저녁 준비가 한창이었다. 물론 정착해서 사는 사람처럼 먹지 못하지만, 그래도 제법 번듯한 음식이 하나둘 완성되고 있었다. 민호는 문간에 기댄 채 바쁘게 움직이는 부엌 담당들을 바라보았다.이 시간에 가장 바쁜 장소였다. 쉼 없이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부글부글 끓는 냄비가 보였다.
“준비는 잘 돼 가는 건가?”
“물론이죠. 대장. 조금만 더 있으면 금방 완성될 겁니다.”
“탄다. 타.”
민호가 말을 건 틈을 타 딴짓을 하던 녀석의 등짝을 철썩 내려친 부엌 담당이 민호를 보고 씩 웃었다. 민호가 처음 이 도적 단에 들어왔을 때부터 같이 있었던 친구였다. 동료는 계속 바뀌었지만, 항상 곁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소중한 동료였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밥에 신경을 써?”
“…응?”
“뭐 부탁할 거라도 있어?”
“아니…뭐 그런 건 아니고.”
민호가 말끝을 흐렸다. 그런 대장을 바라보던 프라이의 얼굴엔 뭔가 알겠다는 표정이 생생하게 올라왔다. 그리곤 냄비에 들어있는 음식을 솜씨 좋게 뒤집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지금 말해.”
“…….”
“시간 더 지나면 해주고 싶어도 못 해줘.”
“…그럼.”
몇 번이나 망설이던 녀석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프라이는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민호의 입을 바라보았다.
“어제 사온 양고기 좀 구워봐.”
“개인적인 이유야?”
“…그런 거 아니야.”
“정말?”
“…….”
짓궂게 물어보는 녀석의 얼굴이 보이자 민호는 또 홱 돌아섰다. 하여튼 눈치 빠른 녀석들은 상대하기 껄끄러웠다. 그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뚜벅뚜벅 자리를 벗어났다. 그런 친구의 듬직한 등을 바라보던 프라이를 내내 웃으면서 몇에 있던 조수에게 양고기를 가져오라고 소리쳤다.
그 와중에 넓적하고 두툼한 빵이 김을 내며 구워졌다. 뜨끈뜨끈한 빵을 커다란 접시에 가득 담더니, 그 옆 접시에 양젖으로 만든 치즈를 뭉텅뭉텅 잘라서 놓았다. 밥과 빵. 그리고 치즈. 약간의 과일. 눈짐작으로 음식의 양을 가늠하던 프라이는 어느 정도 고기를 덜어내서 굽기 시작했다. 그나마 고기가 남아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