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물론 시계가 걸려있었지만, 스티브의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가장 안쪽 방에서 더 들어가야 있는 공간이었다. 햇빛 한 줌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고 깊은 방에 남아있는 것은 애써 자연을 흉내 내는 부드러운 조명뿐이었다.
“…버키.”
“…….”
“무슨 꿈을 꿔?”
“…….”
분명 오늘 내내 잠에서 깨지 않을 거라는 말을 들었지만, 조금도 참을 수 없었다. 사실 대답은 안 들어도 괜찮았다. 어차피 눈을 뜨면 똑같은 말을 한 번 더 해줄 생각이었다. 그러면서 계속 혼잣말 같은 대화를 하는 까닭은 이러지 않으면 속에 엉킨 것이 금방이라도 심장을 박차고 튀어나올 것 같았다. 스티브는 스스로 감정이 격해졌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누르고 싶지 않았다. 친구가 걱정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스티브는 그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버키. 버키 반즈.”
“…….”
“왜 이렇게 이 이름이 낯설어지는지 모르겠어.”
“…….”
“항상 생각하고 읽어보고, 머릿속에 집어넣었는데 말이야.”
“…….”
“왜 그럴까. 정작 넌 내 앞에 있는데, 이름은 너무 낯설어서 꼭 부서져 내릴 것 같은걸.”
“…….”
“버키.”
오래 만나지 않아서 그렇겠지. 애써 그런 식으로 생각하려 했지만, 그것과는 조금 다른 기분이었다. 오래 만나지 않았다 해도 이름이 가지고 있는 감정을 잃어버릴 리는 없었다. 캡틴은 혹시 자신이 망가져 가는 것은 아니냐는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 뒷목에 소름이 쭉 돋았다.
‘…….’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건 알 수 없었다. 물론 오랜 잠을 자가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치타우리의 침공을 막기 위해 다시 전쟁으로 나갔던 그때부터 묘한 괴리감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지금까지 했던 활동을 부정한다는 말은 아니었다.
다만, 있으면 안 되는 사람에게 세계는 생각보다 냉혹했다. 아무리 친절하게 대한다고 해도 붕 뜬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친절이 계속될수록 외로움은 더 커졌다. 친구들도 다 죽어버리고, 꼭 하나 남았던 그녀마저 스티브의 곁을 떠났다. 세계가 캡틴 아메리카 에게 보이는 호의는 오히려 빈자리를 더 크게 만들고 있었다.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그런 친절이 잘못됐다는 소리는 절대 아니었다.
다만.
아주 가끔 캡틴 아메리카가 아닌 스티븐 로저스로서 끝없는 괴로움의 바다를 헤엄치곤 했다. 숨이 턱에 닿을 때까지 버티다 못해 서서히 바다 아래로 떨어지면 조용한 어둠이 찾아왔다. 이제 끝이라고 생각하면 꼭 그다음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두드렸다. 발을 붙이고 사는 곳에 이제는 정이 들 때도 되지 않았나요. 캡틴? 항상 묘한 말을 하는 그녀는 꼭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굴었다. 그러면 그냥 웃고 말았다.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 거 같았다.
버키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버키는 일종의 마지막 열쇠였다. 스티브가 그렇게 원하던 자신과 비슷한 처지를 가진 사람. 과거를 공유할 수 있을 것 같은 남자. 친구. 형이자 동료. 그 모든 수식어를 붙여도 어울리지 않는 구석이 없을 정도로 반듯한 사람이었다. 항상 빛이 나서 옆에 앉아있으면 그저 기분이 좋아지는 따뜻한 남자였다.
“…그랬었지.”
그땐 말이야. 과거를 곱씹는 것은 좋은 버릇이 아니라는 것쯤을 잘 알고 있었다. 특이 캡틴 같은 경우는 아차 하다 훅 가버릴 수 있단 말이죠. 그냥 오늘을 보고 살아요. 어느샌가 나타난 나타샤가 또 옆에서 잔소리한다. 그녀가 죽어라 여자와 데이트를 주선해주려고 했던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이래서였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스티브가 고개를 휘휘 흔들자, 곧 그녀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그래도 할 말이 한정된 걸. 안 그런가. 나타샤.”
하지만 버키와 할 말은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꼭 사진을 찢어버린 것처럼 기억은 너덜너덜했다. 필름이 잔뜩 손상되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흑백 필름은 어렵게 어렵게 기괴한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버키는 기억이 완전하지 않았다. 아니 기억이 남아있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버키가 알고 있는 제임스 뷰캐넌 반즈. 버키 반즈라는 사람은 그저 이론으로 습득한 인물일 뿐이었다. 스스로 아직 믿지 못했다. 이 기억마저 덮어씌워 진 가짜면 어쩌지. 비틀거리며 걷는 동안 그런 말을 했었다.
‘아.’
스티브의 이마에 굵은 주름이 잡혔다. 목에서 단단하게 굳은 것은 좀처럼 튀어나오지 않고, 자꾸 괴롭게 만들었다. 숨이 턱턱 막혔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새빨갛게 충혈이 된 것처럼 아려왔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너무 어려웠다. 과거와 현재를 모두 파괴당한 친구와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산산이 찢어진 기억 조각을 긁어보아 퍼즐 맞추기를 해야 하나. 스티브는 계속 속으로 곪아갔다.
“캡틴.”
“…폐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가.”
“아닙니다.”
“오늘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 가서 조금이라도 쉬는 것이 어떻겠나.”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또 거절하고 만다. 티찰라는 캡틴이 튼튼한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마냥 걱정되는 눈치였다. 물론 눈앞에서 몇 번씩 버키를 놓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겪어보지 못한 일이지만, 알 것 같았다. 캡틴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이며, 다시는 놓치기 싫은 사람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렇게 자신의 몸을 혹사하는 것도 역시 두고 볼 수 없었다.
“언제 깨어날지 모르네.”
“…그러니 지켜보고 있어야 합니다.”
“…….”
“일어나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으니까요.”
“…….”
“혹시 사고가 생기더라도 제가 막아야 합니다.”
“캡틴.”
“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
단호한 말은 고지식한 군인의 마음을 단단히 옥죄었다. 티찰라를 신뢰하고 있지만, 버키에 관한 일은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왕은 한 번 더 손을 들었다.
“그럼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방어 코드를 알려주지.”
“…….”
“제압까지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닌가.”
“…….”
“맞군.”
“저도 아직 많이 모자랍니다.”
속마음을 다 들킨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캡틴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눈치 못 챌 리 없는데, 괜한 고집을 부린 것 같았다. 티찰라는 곧 방어 코드 제어권은 캡틴에게 양도했다. 물론 티찰라는 왕으로서 모든 권한에 접속할 수 있으니, 관리자가 둘이 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부디 일어났을 때 아무 일이 없으면 좋겠군.”
“저도 그러길 빌고 있습니다.”
“우린 할 말이 많지.”
“그렇습니다.”
“풀어가야 할 일이 많지만, 시간이 허락한다면 분명 잘 해결될 거라 믿고 있네.”
“…….”
캡틴 아메리카는 저 말의 뜻하는 바를 잘 알고 있었다. 살짝 웃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돌아갈 길은 까마득하지만, 도착 지점이 확실하면 된다. 그런 말을 남긴 채 왕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스티브는 다시 침대에 주저앉았다. 사실 죽도록 피곤했다. 하지만 정신은 그렇게 맑을 수 없었다.
하루 정도 잠들어 있을 거라는 소리만 들었지 언제쯤 깨어난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그래서 잠을 잘 수 없었다. 자신이 막지 못하면, 티찰라가 나서야 했다. 안 그래도 둘은 숨겨준 고마운 사람인데 그런 짐까지 지울 수 없었다.
‘…차라리.’
스티브는 핼리캐리어 위에서 했던 말을 다시 곱씹었다. 버키에게 했던 말은 모두 진심이었다. 차라리 같이 죽었으면 했다. 같이 죽지는 못했지만, 살아서 만났다. 이젠 놓칠 수 없다고 생각한 그 순간부터 스티브는 버키의 손을 붙들고 놓지 않았다. 이젠 헤어지지 말자고 몇 번이나 다짐했다.
“일어나서…다시 마주 봤을 때.”
입안에서 맴도는 말은 좀처럼 흘러나오지 않았다. 꼭 실어증에 걸린 것 같았다. 버키를 바라보면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마무리가 되지 않았다. 이 녀석이 이런 자신을 보고 있으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활짝 웃으면서 다 안다는 표정을 짓겠지. 여기까지 생각하던 캡틴은 또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런 거 기대하면 안 되는 건데…….”
“…….”
“내가 아직도 어른이 아닌가 봐.”
“…….”
“버키. 미안해.”
“…….”
“혼란스러운 건 너일 텐데, 난 자꾸 과거를 찾으려고 하네.”
버키가 혼란스러운 만큼 캡틴도 자꾸 속으로 곪아갔다. 물론 버키는 버키가 맞았다. 무슨 일을 겪었던지, 버키는 존재 자체로 버키일 뿐이었다. 하지만 버키가 당한 일은 그런 당연한 일마저 쉽게 떠올릴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왜 내가 버키지. 이런 의문을 품고 마는 녀석은 늘 자신에 대해 공부했다. 제삼자가. 입에서 입으로. 혹은 박물관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최대한 모두 모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이렇게 하면 조금은 버키와 버키가 맞닿을 공간이 생겼다. 그렇게 살았을 것 같았다.
스티브는 조심스럽게 버키의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혹시 잘못 만져서 주삿바늘이 혈관이라도 찌르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괜한 두려움이 들어 마음껏 안아볼 수 없었다. 침대에 앉아있던 남자는 일어나서 한참 버키 주위를 맴돌았다. 그러더니 다시 간이침대에 걸터앉았다. 이젠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빨리 일어났으면 좋겠다.”
“…….”
“할 말이 너무 많아.”
“…….”
“버키.”
대답하려고 했던 건지 고른 숨소리가 약간 흐트러졌다. 또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 어떤 전쟁을 겪었어도 이보다 더 무서운 광경은 겪어보지 못했다.
이미 한계까지 몰려있던 친구는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의식을 놓아버렸다. 그 모습이 꼭 죽은 시체 같아 스티브는 와칸다로 이동하는 내내 가슴을 졸일 수밖에 없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윈터솔저가 된 버키를 만나고, 하이드라의 비밀을 알게 된 이후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다. 조금이라도 의연하게 대처하고 싶었지만, 버키를 본 순간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런 둘에게 와칸다 행을 권한 쪽은 티찰라였다. 방패도 없이 맨몸으로 친구를 둘러업고 걸어 나오는 캡틴 아메리카를 가만히 바라보던 티찰라가 둘을 불러 세웠다. 당연히 무시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한다. 그러면 쫓아가서 억지로 명령이라도 해야 하나. 이렇게 생각하던 순간 캡틴 아메리카가 티찰라를 바라보았다. 잔뜩 상처 입은 푸른 눈이 추위에 닿아 형형하게 빛났다.
“폐하?”
“내가 제안할 것이 있어 불렀네.”
“말씀하시면 됩니다.”
“…….”
“괜찮습니다.”
“그래.”
티찰라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할 말이 있지만, 일단 이 녀석을 안전하게 넘겨서 심판을 받게 해야 한다. 기다려 줄 수 있겠는가.”
“…….”
“그대의 친구에겐 해가 가지 않게 하겠네.”
“…그렇다면야.”
“그래 내 전용기 안쪽으로 들어가면 비밀 공간이 있지. 이 녀석을 인도할 때까진 그곳에 있으면 된다네. 응급 처치를 할 사람을 보내주겠다.”
“그러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군인은 딱딱하게 거절한다. 티찰라는 유난히 흔들리는 캡틴 아메리카의 표정을 그대로 읽을 수 있었다. 캡틴 아메리카의 가면을 쓴 스티브 로저스가 말을 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저 내 착각인가. 왕은 갑자기 어려운 문제를 골라잡은 기분이 들었다.
“그럼 일단 움직이지.”
“예, 폐하.”
물론 이렇게 쉽게 사람을 믿을 순 없었다. 하지만 몸이 성치 않은 버키를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은 힘들 것 같았다. 퀸젯이 있었지만, 이미 추적을 당하고도 남았을 것 같아 쉽게 사용할 수 없었다. 최대한 버키가 안전한 곳으로 피하고 싶었다. 그런 캡틴의 마음을 알기도 하듯 티찰라는 기꺼이 자신의 전용기 한쪽을 내주었다.
“좀 쉬고 있거라.”
“아닙니다. 폐하.”
“…걱정되는가.”
“안된다고 하면 폐하를 기만하는 것이 될 테니, 그렇게 말하진 않겠습니다.”
“그런가.”
티찰라는 미세하게 떨리는 군인의 목소리를 완벽하게 알아들었다. 캡틴 아메리카로서 감정을 숨기고 있지만, 친구를 걱정하는 친우로선 그렇지 못했다.
“이대로 영영 일어나지 않을까 항상 그런 생각을 합니다.”
“…….”
“예전엔 버키가 제게 해줬던 걱정입니다만…….”
“그랬군.”
“그게…아닙니다.”
“왜 그러지?”
“남자답지 못하게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하던 것이 떠올라서 그만.”
“…….”
“웃으셔도 됩니다.”
“…….”
“…괜찮습니다.”
“…….”
티찰라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계속 둘을 바라보자 약간 민망한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군인은 말을 길게 잇지 않았다. 티찰라는 예상외의 대답에 약간 놀란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누가 누굴 걱정한 것인지 다시 생각하려는 그 순간 버키의 몸이 축 늘어졌다. 마치 숨이 끊어진 것 같아 급히 코 밑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희미한 숨이 손가락에 닿고 나서야 간신히 안심했다. 가짜 혈청을 맞았지만, 그것이 죽음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스티브도 그랬고, 버키도 그랬다. 주렁주렁 매달린 수액 병에선 계속 약이 떨어져 내렸다. 깨어있는 것이 고통스러울 테니 진통제와 수면제를 같이 처방해 달라 말한 것은 자신이지만, 막상 재워놓고 보니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불편 할 테니 이리 와서 앉아있으란 소리도 극구 사양했다. 티찰라는 몇 번 권하다 입을 다물었다. 그 캡틴 아메리카가 이렇게 싸고돌만한 인물이면 분명 이유가 있겠지. 적당히 둘에 대해 듣긴 했지만, 둘 사이의 기구하고 끈끈한 운명을 모두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티찰라는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었기에, 일단은 모른척하기로 정했다.
“…버키.”
스티브의 손이 잔뜩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얼굴에 피 칠갑을 한 채 슬쩍 웃고 있던 표정이 또 아프게 살아났다. 심장에 쿡 박힌 채 움직이지 않는 거대한 파편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단단하게 박혔다. 반대쪽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무슨 감정일까. 스티브는 알 수 없었다. 분노도 아니었고, 슬픔도 아니었다. 좀 더 복잡하고 묘한 감정이었다.
“널 다시 볼 수 있어서 다행이야.”
“…….”
“버키.”
“…….”
수면제를 맞고 잠이 든 사람에게 들릴 리 없지만, 계속 이름을 불렀다. 완전히 날아간 왼쪽 팔은 쳐다볼 수 없었다. 깨끗하게 잘린 것도 아니라 군데군데 끊어진 전선에선 연신 마찰열이 일어났다. 이식한 메탈암이라 해도 신경은 살아있었다. 팔이 잘리는 순간부터 무슨 생각을 했을지 알 수 없었다. 한번이 아닌 고통을 또 받았을 것을 생각하니 심장이 저릿했다.
고통을 참는 것이 익숙했던 친구는 바득바득 발걸음을 옮기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면서 스티브를 먼저 챙겼다. 괜찮아? 그 한마디를 듣는 순간 눈앞이 뿌옇게 변했다. 누가 할 소리를. 울먹이지 않으려고 애써 천천히 한마디씩 끊어서 말을 했다.
아직 기억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친구는 그 순간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짧은 신음과 함께 한숨을 훅 토해냈다. 지칠 대로 지친 몸뚱이는 한 번에 무너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애써 잊어버리고 있던 고통이 밀려왔다. 신경이 연결된 부분이 그대로 파괴되면서 온몸을 잡아먹고 있었다. 있어야 할 것을 다시 잃어버린 버키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땅바닥을 긁었다. 결국, 진통제를 몇 번이나 맞고 수면제를 처방받은 후에야 기절하듯 잠을 잘 수 있었다.
“널 재우고 싶진 않았어.”
“…….”
“다시 못 일어날까 봐.”
“…….”
“하지만 고통스럽다는데, 내 욕심만 챙길 순 없었으니까…….”
“…….”
“날 이해해?”
“…….”
스티브의 목소리에 물기가 서렸다. 나직하게 말하는 목소리는 너무 무거웠다. 뚝뚝 떨어지는 온갖 감정은 그대로 뒤섞인 채 굳어갔다. 채 지워지지 않은 핏자국을 몇 번이나 지워보고, 얼굴을 만져봤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버키가 맞는데, 왜 이리 낯선지 알 수 없었다. 금방이라도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갈 것 같았다.
‘혼자서 생각을 거듭하면 점점 깊게 파고들어 가더라.’
스티브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분명 버키가 말을 걸었다. 하지만 무릎을 베고 누워있는 친구는 여전히 잠이 든 상태였다. 환청이라도 들었나 싶어 머쓱해졌다. 방금 들린 말은 어느 날 버키가 자신을 보며 흐르듯 한 것이었다. 혼자 속으로 삭이면 힘들다면서 어깨를 툭툭 치던 모습이 선했다.
“…버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눈을 감은 스티브가 고개를 숙이며 친구를 찾았다. 눈앞에 있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이 고통이 끝나면 우린 어떻게 될까. 답을 해줄 수 없는 질문을 자꾸 던지기만 했다. 차라리 목 놓아 울기라도 하면 이 답답함이 조금은 가실까 싶었다. 하지만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아니 울 수 없었다. 어린애처럼 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때가 언제였을까. 이런 생각을 했지만, 그것조차 너무 먼 과거의 이야기였다. 이젠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잠들기 전에 나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까.”
“…….”
“물어보려 했는데, 자려는 걸 깨울 수 없어서…….”
“…….”
“그래서 되묻지 않았어. 일어나서 이야기를 해줬으면 하는데…….”
“…….”
듣는 이 없는 일방적인 대화가 띄엄띄엄 이어졌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말은 점점 작아지더니 이내 들리지 않았다.
스티브는 꿈을 꾸었다. 어릴 적 이유도 모른 채 앓아누운 자신과 그 옆을 지키는 버키가 있었다. 느릿느릿 흑백 영화처럼 흘러가는 공간에 그저 존재할 뿐인 스티브는 과거의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괜한 말을 꺼냈던 것이 틀림없었다. 몇 번이나 제 손을 이마에 대보고, 그것도 마땅치 않은지 이마와 이마를 맞닿으면서 연신 걱정을 하던 친구는 대뜸 손가락을 내밀었다.
‘뭐야.’
‘약속해.’
‘…….’
‘건강해지란 소린 안 해.’
‘…….’
‘계속 나랑 같이 있어 준다고 약속해.’
‘계집애처럼…그게 뭐야. 됐어.’
‘안 할 거야?’
‘…….’
하지만 버키를 이길 수 없었다. 겨우겨우 손가락을 걸고 고개를 끄덕였다. 흐릿하게 남은 기억이 이리도 생생하게 꿈으로 나타나는지 알 수 없었다. 꿈속의 어린 버키는 내내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너무 따뜻해서 마냥 햇살 아래 있는 것 같았다. 어린 스티브는 그렇게 생각했다.
“…버키.”
스티브의 입술에서 익숙하고 가슴 아픈 이름이 흘러나왔다.
“응. 왜 그래 스티브.”
“…….”
“스티브. 스티비. 내 친구.”
“…….”
“또 아파?”
익숙한 대답이 아주 작은 소리로 들렸지만, 스티브는 듣지 못했다. 항상 작은 친구를 걱정하던 녀석은 만신창이가 되어서도 그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 가물가물 입안에서 맴돌던 말이 또 한 번 끊어졌다. 조금이라도 편히 잠을 자면 좋을 텐데, 어깨가 무거운 둘은 그마저도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익숙한 곳을 떠나 낯선 장소로 향하는 마음은 알 리 없었지만, 짐작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드디어 잠이 들었군.”
“…….”
“다행이야.”
아주 잠깐이지만, 걱정 많은 두 사람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저 둘이 얼마나 몰려있었는지 충분히 알고 있는 티찰라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사실 둘을 데리고 와칸다로 건너가는 것은 의외로 갑작스러운 결정이었다. 티찰라는 현명했고, 진중한 사람이었다. 물론 오해가 있어 버키, 아니 윈터솔져를 살인자로 지목하긴 했다. 하지만 오해가 풀린 다음 바로 사과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깊은 심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지모가 죽으려고 하는 걸 막았겠지. 주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지모를 넘겨주는 일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물론 블랙팬서로서 소란을 일으킨 것은 맞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나라의 왕이 된 사람을 함부로 가둘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바삐 오갔다. 최대한 좋은 방향으로 끝내고 싶었지만, 국가와 국가가 만나는 일은 언제나 복잡하기만 했다. 티찰라가 약속대로 캡틴 아메리카와 윈터솔져는 가만히 숨어있으면 그만이었다. 전용기를 뒤질 리는 없다는 계산이었지만, 혹시 몰라 이중 삼중으로 트랩을 설치해두긴 했다.
“피곤하실 텐데…….”
“아닙니다.”
“하지만…….”
“어서 돌아가 할 일이 많습니다.”
“알겠습니다.”
둘의 일도 있고 하니 티찰라는 조용히 일을 끝내고 돌아가고 싶어 했다. 길게 말을 해봤자 예상치 못한 일이 터질 확률만 높아졌다. 지모 일은 알아서 밝혀내 줄 것을 부탁하면서 말을 맺었다. 해야 할 일을 다 했으니, 이제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남자를 잡을 수 없었다. 티찰라가 전용기로 돌아오는 그 순간에도 둘은 깨지 않았다. 한 사람은 약에 취해있을 테고, 다른 한 사람은 피로가 쌓일 대로 쌓였을 것이 분명했다. 왕은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희미하게 웃었다.
“천하의 캡틴 아메리카의 이런 헐렁한 모습을 보다니. 영광이군.”
“…….”
“…갈 길이 머니 좀 더 자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굳이 자는 사람은 흔들어 깨울 이유는 없었다. 전용기가 조용히 날아올랐다. 약간 덜컹거림이 있었지만, 그리 신경 쓰일 정도는 아니었다. 저 두 사람을 데려가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무엇을 해줘야 할까. 왕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일단 다친 상처부터 치료하는 것이 옳았다.사실 캡틴 아메리카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워낙 부상 회복 속도도 빠른 데다 크게 베이거나 절단된 다친 상처도 없었다. 헬리캐리어에서 떨어지고도 살아남은 것을 보면 걱정이 될 만한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터진 상처들은 벌써 아물기 시작했다. 경이로운 회복속도였다.
“하지만…….”
문제는 윈터솔저였다. 메탈암이 완전히 날아가 버린 탓에 몸의 균형조차 잡기 어려워했다. 게다가 몸과 완전히 이식된 메탈암이 그 정도로 정교하게 움직인다는 것은 신경계와 관련이 있었다. 티찰라는 과학자만큼 풍부한 지식을 가지진 못했지만, 어느 정도 굴러가는 지식은 알고 있었다. 위험한 상태였다. 그나마 멀쩡한 팔이 절단된 것은 아니라 출혈이 크진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하지만 신경이 눌리고 찢긴 고통을 생각하면 그런 쉬운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조금만 베어도 아프기 마련이었다. 윈터솔저의 악명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몸보다 미션 완수가 먼저인 기계와도 같았다. 조금 찢기고 베인 상처로는 그의 발목조차 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몸을 학대에 가까울 정도로 굴렸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랬었지.’
지모의 계락에 넘어가 자신과 맞섰던 모습을 잠시 되짚어 보았다. 윈터솔져, 아니 버키는 사람을 죽이려고 하지 않았다. 캡틴도 그렇게 말했고, 자신도 그렇다고 했다. 하지만 세뇌코드가 발동되면 말이 좀 달라졌다. 메탈암을 쓰지 않고 도망가려고 하던 아파트 때와는 달랐다. 그런 몸이 과연 견딜 수 있을까. 왕의 근심은 점점 깊어졌다.
❢
와칸다에 도착하자마자 캡틴이 깨어났다. 늘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버키를 보호했다. 제 몸처럼 지니고 다니던 방패마저 없는 상황에서 캡틴은 좀처럼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잔뜩 긴장한 표정을 풀어주기라도 하듯 티찰라가 일어섰다.
“도착했네.”
“…….”
“여기는 안전해.”
“…….”
“내가 보장하지.”
“감사합니다.”
그 말을 듣고 싶었던 군인은 깍듯하게 대답했다. 간신히 손에 잡은 친구를 더는 떠나보낼 수 없었다. 캡틴 아메리카는 벌떡 일어섰지만, 버키는 여전히 약에 취해 있었다.
“의료진을 불렀으니 이동 침대로 옮기기로 하지.”
“그렇게까지 해주시지 않으셔도…….”
“내 성의일 뿐이니 부담가지지 않아도 괜찮아.”
“…….”
“난 저자에게 사과를 해야 하니까.”
“…….”
“우리 모두 서로에게 빚이 있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사실 셋뿐이 아니겠지만, 일단 동의했다. 여전히 불안한 눈으로 버키를 침대에 눕힌 스티브는 내내 헐렁하게 굴었다. 티찰라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 버키의 팔에 영양제와 수액이 주렁주렁 매달리고 기본적인 검사를 하는 동안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몇 번이나 상처치료를 해야 한다며, 불렀지만 고집이 얼마나 센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푸르고 단단한 눈은 항상 친구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잠시 눈이라도 떼면 금방 사라질 것 같이 굴었다. 결국, 반쯤 타협한 의료진이 버키의 침대 옆에 간이침대를 하나 더 놓고 캡틴 아메리카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끙끙 소리를 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프면 말씀하세요.”
“괜찮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야…….”
상처마다 소독약을 마르고 붕대를 감았다. 눈에 띄게 부러진 곳은 없지만, 멍투성이인 온몸은 금방 나을 것 같지 않았다. 약한 상처는 금방 사라질지 몰라도, 몇 번이나 발에 챈 상처는 꽤 오래갈 것이 분명했다. 그런 와중에도 계속 시선은 버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저.”
“예?”
“저 녀석은 괜찮겠죠?”
“약에 취해있을 뿐이니까요. 절단된 팔은 좀 더 자세한 신경계 검사를 해야 해서 일단 좀 강한 진통제와 수면제를 처방했습니다. 일단 하루 정도는 푹 잠들어서 깨어나지 않을 겁니다.”
“그게 사실 마음에 걸려서.”
“네?”
“아닙니다. 제가 실언을 했군요.”
캡틴은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깊은 이야기는 아직 할 수 없었다. 주사기를 들고 조용히 다가온 의료진이 캡틴의 피를 조금 뽑았다. 혹시 모르니 기본적인 검사를 해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아직 실감이 안 나는데.’
눈앞에 친구가 누워있지만, 꼭 붕 뜬 것 같았다. 계속 만져보고 확인하지 않으면 또 안개처럼 사라질 것 같았다. 그래서 윈터솔져라고 불렸다지. 갑자기 나타샤의 목소리가 왜 들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한참 그렇게 버키만 바라보고 앉아있던 캡틴 곁으로 티찰라가 심각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 옆엔 뭔가 잔뜩 적인 종이를 든 의료진이 함께 서 있었다.
“캡틴.”
“예, 폐하.”
“혹시 자네 체질이 조금 특이한가.”
“…….”
“맞군.”
“굳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되는 일이라 생각해 말을 아꼈습니다. 어차피 일상생활에선 그리 눈에 띄지 않으니까요.”
“그렇군.”
티찰라는 종이를 손가락으로 슥 긁어 내렸다. 뛰어난 신체 능력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는 듯 선명한 단어가 도장이 되어 종이에 찍혀있었다.
“센티넬이라.”
“…….”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눈으로 보는 것은 처음이군.”
“한동안은 많기도 했습니다.”
“그랬군.”
“제가 살았던 그 당시에는 말이죠. 지금은 알지 못합니다.”
“내가 알기론 센티넬은 감정 증폭을 다스리기 위해 가이드가 필요하다고 들었네. 그래서 물어본 것이기도 하지.”
“…….”
“우리 영토 내엔 가이드가 없어.”
티찰라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잔뜩 몰린 센티넬이 얼마나 괴로운지 확실히 알진 못했지만, 몇 되지 않는 사료를 읽어봤던 터라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이러면 좀 위험했다. 폭주하기라도 하면 당장 도와줄 사람이 없기에 일을 마치자마자 급히 의료실로 돌아왔다.
“그건 괜찮습니다.”
“…뭐?”
“전 이미 센티넬 인자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혈청 실험으로 인해 운이 좋게도 일종의 가이드 인자가 생겼습니다.”
“…….”
“운이 좋았죠.”
“…그랬군.”
“센티넬 쪽에 관해선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언제나 그렇게 스스로 조절할 수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다행이야. 난 걱정을 많이 했지.”
그제야 표정이 풀어졌다. 어쩐지 그의 능력의 원천을 알게 된 것 같았다. 물론 모든 사람이 혈청을 맞는다고 해서 캡틴처럼 되는 것은 아니었다. 옛날 일을 주절주절 떠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대화는 곧 끊기고 말았다. 버키의 몸 상태에 대한 결과가 나오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
하지만 캡틴에게 휴식을 권해도 듣지 않을 것을 알기에 티찰라는 잠자코 자리를 비켜주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꼭 너스 콜을 누르라는 말과 함께 의료진도 모두 밖으로 나갔다. 그제야 크게 한숨을 쉰 스티브는 천천히 손끝으로 버키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왜 이렇게 체온이 차가운지. 걱정되는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미 한계까지 몰려있던 친구는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의식을 놓아버렸다. 그 모습이 꼭 죽은 시체 같아 스티브는 와칸다로 이동하는 내내 가슴을 졸일 수밖에 없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윈터솔저가 된 버키를 만나고, 하이드라의 비밀을 알게 된 이후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다. 조금이라도 의연하게 대처하고 싶었지만, 버키를 본 순간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런 둘에게 와칸다 행을 권한 쪽은 티찰라였다. 방패도 없이 맨몸으로 친구를 둘러업고 걸어 나오는 캡틴 아메리카를 가만히 바라보던 티찰라가 둘을 불러 세웠다. 당연히 무시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한다. 그러면 쫓아가서 억지로 명령이라도 해야 하나. 이렇게 생각하던 순간 캡틴 아메리카가 티찰라를 바라보았다. 잔뜩 상처 입은 푸른 눈이 추위에 닿아 형형하게 빛났다.
“폐하?”
“내가 제안할 것이 있어 불렀네.”
“말씀하시면 됩니다.”
“…….”
“괜찮습니다.”
“그래.”
티찰라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할 말이 있지만, 일단 이 녀석을 안전하게 넘겨서 심판을 받게 해야 한다. 기다려 줄 수 있겠는가.”
“…….”
“그대의 친구에겐 해가 가지 않게 하겠네.”
“…그렇다면야.”
“그래 내 전용기 안쪽으로 들어가면 비밀 공간이 있지. 이 녀석을 인도할 때까진 그곳에 있으면 된다네. 응급 처치를 할 사람을 보내주겠다.”
“그러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군인은 딱딱하게 거절한다. 티찰라는 유난히 흔들리는 캡틴 아메리카의 표정을 그대로 읽을 수 있었다. 캡틴 아메리카의 가면을 쓴 스티브 로저스가 말을 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저 내 착각인가. 왕은 갑자기 어려운 문제를 골라잡은 기분이 들었다.
“그럼 일단 움직이지.”
“예, 폐하.”
물론 이렇게 쉽게 사람을 믿을 순 없었다. 하지만 몸이 성치 않은 버키를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은 힘들 것 같았다. 퀸젯이 있었지만, 이미 추적을 당하고도 남았을 것 같아 쉽게 사용할 수 없었다. 최대한 버키가 안전한 곳으로 피하고 싶었다. 그런 캡틴의 마음을 알기도 하듯 티찰라는 기꺼이 자신의 전용기 한쪽을 내주었다.
“좀 쉬고 있거라.”
“아닙니다. 폐하.”
“…걱정되는가.”
“안된다고 하면 폐하를 기만하는 것이 될 테니, 그렇게 말하진 않겠습니다.”
“그런가.”
티찰라는 미세하게 떨리는 군인의 목소리를 완벽하게 알아들었다. 캡틴 아메리카로서 감정을 숨기고 있지만, 친구를 걱정하는 친우로선 그렇지 못했다.
“이대로 영영 일어나지 않을까 항상 그런 생각을 합니다.”
“…….”
“예전엔 버키가 제게 해줬던 걱정입니다만…….”
“그랬군.”
“그게…아닙니다.”
“왜 그러지?”
“남자답지 못하게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하던 것이 떠올라서 그만.”
“…….”
“웃으셔도 됩니다.”
“…….”
“…괜찮습니다.”
“…….”
티찰라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계속 둘을 바라보자 약간 민망한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군인은 말을 길게 잇지 않았다. 티찰라는 예상외의 대답에 약간 놀란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누가 누굴 걱정한 것인지 다시 생각하려는 그 순간 버키의 몸이 축 늘어졌다. 마치 숨이 끊어진 것 같아 급히 코 밑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희미한 숨이 손가락에 닿고 나서야 간신히 안심했다. 가짜 혈청을 맞았지만, 그것이 죽음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스티브도 그랬고, 버키도 그랬다. 주렁주렁 매달린 수액 병에선 계속 약이 떨어져 내렸다. 깨어있는 것이 고통스러울 테니 진통제와 수면제를 같이 처방해 달라 말한 것은 자신이지만, 막상 재워놓고 보니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불편 할 테니 이리 와서 앉아있으란 소리도 극구 사양했다. 티찰라는 몇 번 권하다 입을 다물었다. 그 캡틴 아메리카가 이렇게 싸고돌만한 인물이면 분명 이유가 있겠지. 적당히 둘에 대해 듣긴 했지만, 둘 사이의 기구하고 끈끈한 운명을 모두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티찰라는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었기에, 일단은 모른척하기로 정했다.
“…버키.”
스티브의 손이 잔뜩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얼굴에 피 칠갑을 한 채 슬쩍 웃고 있던 표정이 또 아프게 살아났다. 심장에 쿡 박힌 채 움직이지 않는 거대한 파편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단단하게 박혔다. 반대쪽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무슨 감정일까. 스티브는 알 수 없었다. 분노도 아니었고, 슬픔도 아니었다. 좀 더 복잡하고 묘한 감정이었다.
“널 다시 볼 수 있어서 다행이야.”
“…….”
“버키.”
“…….”
수면제를 맞고 잠이 든 사람에게 들릴 리 없지만, 계속 이름을 불렀다. 완전히 날아간 왼쪽 팔은 쳐다볼 수 없었다. 깨끗하게 잘린 것도 아니라 군데군데 끊어진 전선에선 연신 마찰열이 일어났다. 이식한 메탈암이라 해도 신경은 살아있었다. 팔이 잘리는 순간부터 무슨 생각을 했을지 알 수 없었다. 한번이 아닌 고통을 또 받았을 것을 생각하니 심장이 저릿했다.
고통을 참는 것이 익숙했던 친구는 바득바득 발걸음을 옮기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면서 스티브를 먼저 챙겼다. 괜찮아? 그 한마디를 듣는 순간 눈앞이 뿌옇게 변했다. 누가 할 소리를. 울먹이지 않으려고 애써 천천히 한마디씩 끊어서 말을 했다.
아직 기억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친구는 그 순간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짧은 신음과 함께 한숨을 훅 토해냈다. 지칠 대로 지친 몸뚱이는 한 번에 무너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애써 잊어버리고 있던 고통이 밀려왔다. 신경이 연결된 부분이 그대로 파괴되면서 온몸을 잡아먹고 있었다. 있어야 할 것을 다시 잃어버린 버키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땅바닥을 긁었다. 결국, 진통제를 몇 번이나 맞고 수면제를 처방받은 후에야 기절하듯 잠을 잘 수 있었다.
“널 재우고 싶진 않았어.”
“…….”
“다시 못 일어날까 봐.”
“…….”
“하지만 고통스럽다는데, 내 욕심만 챙길 순 없었으니까…….”
“…….”
“날 이해해?”
“…….”
스티브의 목소리에 물기가 서렸다. 나직하게 말하는 목소리는 너무 무거웠다. 뚝뚝 떨어지는 온갖 감정은 그대로 뒤섞인 채 굳어갔다. 채 지워지지 않은 핏자국을 몇 번이나 지워보고, 얼굴을 만져봤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버키가 맞는데, 왜 이리 낯선지 알 수 없었다. 금방이라도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갈 것 같았다.
‘혼자서 생각을 거듭하면 점점 깊게 파고들어 가더라.’
스티브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분명 버키가 말을 걸었다. 하지만 무릎을 베고 누워있는 친구는 여전히 잠이 든 상태였다. 환청이라도 들었나 싶어 머쓱해졌다. 방금 들린 말은 어느 날 버키가 자신을 보며 흐르듯 한 것이었다. 혼자 속으로 삭이면 힘들다면서 어깨를 툭툭 치던 모습이 선했다.
“…버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눈을 감은 스티브가 고개를 숙이며 친구를 찾았다. 눈앞에 있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이 고통이 끝나면 우린 어떻게 될까. 답을 해줄 수 없는 질문을 자꾸 던지기만 했다. 차라리 목 놓아 울기라도 하면 이 답답함이 조금은 가실까 싶었다. 하지만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아니 울 수 없었다. 어린애처럼 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때가 언제였을까. 이런 생각을 했지만, 그것조차 너무 먼 과거의 이야기였다. 이젠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잠들기 전에 나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까.”
“…….”
“물어보려 했는데, 자려는 걸 깨울 수 없어서…….”
“…….”
“그래서 되묻지 않았어. 일어나서 이야기를 해줬으면 하는데…….”
“…….”
듣는 이 없는 일방적인 대화가 띄엄띄엄 이어졌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말은 점점 작아지더니 이내 들리지 않았다.
스티브는 꿈을 꾸었다. 어릴 적 이유도 모른 채 앓아누운 자신과 그 옆을 지키는 버키가 있었다. 느릿느릿 흑백 영화처럼 흘러가는 공간에 그저 존재할 뿐인 스티브는 과거의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괜한 말을 꺼냈던 것이 틀림없었다. 몇 번이나 제 손을 이마에 대보고, 그것도 마땅치 않은지 이마와 이마를 맞닿으면서 연신 걱정을 하던 친구는 대뜸 손가락을 내밀었다.
‘뭐야.’
‘약속해.’
‘…….’
‘건강해지란 소린 안 해.’
‘…….’
‘계속 나랑 같이 있어 준다고 약속해.’
‘계집애처럼…그게 뭐야. 됐어.’
‘안 할 거야?’
‘…….’
하지만 버키를 이길 수 없었다. 겨우겨우 손가락을 걸고 고개를 끄덕였다. 흐릿하게 남은 기억이 이리도 생생하게 꿈으로 나타나는지 알 수 없었다. 꿈속의 어린 버키는 내내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너무 따뜻해서 마냥 햇살 아래 있는 것 같았다. 어린 스티브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침부터 훌쩍 나갔다 온 남자는 침대라고 부르기도 미안한 매트리스에 걸터앉으면서 이런저런 속풀이를 했다. 물론 그 소리를 듣고 있는 에셋은 저 멀리 구석에 약간 웅크린 채 말이 없었다. 미쳐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그렇다고 미친 건 아니었다. 밥도 잘 받아먹고 불안한 행동을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직도 사람을 믿지 못하는지 저렇게 내내 날만 세우고 있었다. 좋다고 주워오긴 했는데, 저렇게 귀염성 없이 행동하면 조금 귀찮아지긴 했다.
“…내가 너 밥 챙겨주려고 여기 사는 줄 알아?”
“…….”
“살갑게 굴진 못해도 기척 정도는 내고 앉아있을 수 있잖아. 내가 너한테 밥을 해놓으라고 하냐, 벗고 침대에 누워있으라고 하냐. 어?”
“…….”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알아듣는 척 눈 굴리지 마.”
“…….”
“새끼.”
럼로우는 벗어둔 외투를 쭉 끌어당겼다. 주머니를 이리저리 휘젓자 구겨진 담뱃갑이 툭 떨어졌다. 아, 젠장. 담배 한 개비도 없는 상자를 구겨서 던져버린 남자는 그대로 매트리스에 누워버렸다. 아이고. 일부러 들으라는 듯 끙끙 소리를 내며 돌아누웠다. 여전히 구석에 웅크린 채 어둠 속에 숨어있는 녀석은 눈만 빛났다. 한쯤 맛이 간 눈이지만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예쁘긴 하다. 럼로우는 괜히 그 불안한 시선을 따라가며 눈을 맞췄다. 그럴 때마다 속눈썹을 파르르 떨면서 애써 다른 곳을 본다.
‘귀여운 새끼.’
아까까지만 해도 욕을 하고 있으면서도 속마음은 정직했다. 당장 가서 머리라도 쓰다듬어 줄까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저 무시무시한 메탈암에 그대로 얻어맞을 수 있으니 그만두기로 했다. 몸으로 벌어 먹고사는 사람이 몸뚱이를 마구 굴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하긴 기척을 지우지 말라고 하는 것도 어불성설인가.’
럼로우는 항상 그것이 궁금했다. 물론 답이 나와 있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굳이 에셋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뭉개진 뇌엔 어려운 이야기를 해봤자 전혀 소용이 없다. 몇 개월 동안 저 녀석과 씨름하면서 나름대로 얻은 교훈이었다.
“…왜.”
“응?”
“왜 쳐다봐.”
“비싼 입이 이제야 떨어지나 보네.”
“…….”
“오늘은 운이 좋군. 그 입에서 대화가 흘러나오는 것도 구경을 다 하고 말이야.”
“…….”
“또 입이 붙었어?”
놀리는 건 귀신같이 알아챈다. 입술이 비죽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물론 에셋의 표정은 늘 한결같았지만, 럼로우가 보는 시선은 조금 달랐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기도 하고, 축 처지기도 한다. 눈만 봐도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예쁜이가 심심해하니 아저씨가 놀아 줘야지.”
“…….”
“안 그래?”
“안 그래.”
“대답도 하면서, 매일 이러면 얼마나 좋아. 너 그러다가 몇 개 모르는 단어도 다 까먹는다.”
“…….”
“그러면 정말 백치가 되는 거야.”
물론 지금도 백치지만. 럼로우는 다시 한 번 외투를 뒤졌다. 분명 이쯤에. 이것저것 잡동사니를 넣은 주머니를 하나하나 다 뒤지고 나서야, 뭔가를 찾았다. 은색 포장지에 싸인 걸 들고 천천히 걸어갔다. 사실 저 녀석이 한마디라도 하는 건 어느 정도 낯선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는 표시기도 했다. 이럴 땐 좀 놀아줘야 표정이 풀어진다.
‘꼭 하는 짓도 유기견 같아서.’
화상에 일그러진 남자의 얼굴에 미소가 슬쩍 드리워졌다. 한 번 버림받고 학대당한 녀석이라 살붙이고 살기 쉽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어려울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나마 처음 루마니아로 건너왔을 때보단 많이 나아진 편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발작하는 녀석에서 얻어맞는 것보단 이런 사소한 입씨름이 더 나았다.
“내가 너 생각나서 사 왔어.”
“…….”
“단 거 좋아하잖아.”
“…….”
“안 먹으면 내가 먹고.”
“…아니야.”
“그럼 주세요. 해야지.”
“…….”
“초콜릿 주세요. 해봐. 어디서 공으로 먹으려고 해.”
“…….”
꼴에 자존심이 있어서 그런 소리는 죽어도 안 한다. 이미 눈은 럼로우 손바닥 위에 올려진 초콜릿에 고정된 주제에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어이구. 럼로우도 슬슬 오기가 발동했다. 손바닥 위에 올려진 달콤한 것이 체온에 따끈따끈해질 때까지 둘 사이에선 불꽃만 튀었다.
“고집도 세라.”
“…….”
“하긴 그런 말 할 거라곤 생각 안 했어.”
“…….”
“아. 해봐.”
“…….”
“아.”
또 불안한 눈으로 눈알을 굴린다. 입을 벌리면 곧바로 마우스피스를 물고, 곧 뇌를 지지는 기계에 앉혀진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에셋은 그 기계를 몹시 싫어했다. 그러니 남이 하는 이런 명령은 자연스럽게 거부한다. 하지만 그걸 아는 럼로우는 또 살살 에셋을 긁었다. 아. 해봐. 이 곳에 그 기계가 없다는 걸 스스로 인식해야 얌전히 말을 듣는다.
“난 아무것도 없어.”
“…….”
“싫으면 말고.”
“…….”
에셋이 눈치를 보며 입술을 살짝 벌렸다. 손가락 반절도 들어가지 않을 녀석의 입 모양을 보던 럼로우는 껄껄 웃으면서 손가락을 푹 집어넣었다. 그리곤 치열을 슬슬 쓸어줬다. 바짝 긴장한 몸이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물러서진 않았다.
“이러면 아저씨가 나쁜 짓 하는 거 같잖아.”
“…….”
“왜 그래. 사람 민망하게.”
점점 거칠어지는 숨이 손에 닿았다. 불규칙하게 오르내리는 가슴을 보아하니 당장에라도 기절할 것 같았다. 지워진 기억 속에 각인된 고통이라도 떠오르려나. 그렇게 생각했다. 당연히 이렇게 반응한다는 걸 알면서도 놀리는 걸 그만둘 수 없었다. 럼로우의 호기심과 궁금증은 조금 이상한 방향으로 비틀어 자라고 있었다. 이 남자는 에셋의 모든 반응을 궁금해했다.
“누가 잡아먹는 데?”
“…….”
“입에 묻힐까 봐 벌려주는 거잖아.”
최대한 사람 좋게 웃으려고 노력했다. 그래 봤자 우그러진 얼굴이겠지만, 화를 내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쪽이 좋았다. 에셋의 입을 벌리고 혀에 초콜릿을 놓아주었다. 이미 말랑말랑해진단 것이 혀 위에서 슬슬 녹아내렸다.
“묻히지 말고 먹으라고.”
“…….”
“맛있지?”
“…….”
불쌍한 백치는 아까 상황을 금방 잊었다. 럼로우가 손가락을 빼주자 금방 볼을 오물오물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어린애도 아니고 단 걸 퍽 좋아했다. 하긴 냉동되고 해동되는 내내 미각이 남아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깨어 있는 동안은 제대로 된 음식조차 먹이지 않았다. 최대한 짜낼 만큼 짜낸 다음 곧바로 얼려버렸다. 그러면 뭔가 먹일 필요가 없었다. 영양은 알약과 수액으로 보충했다고 들었다. 그렇게 파괴된 미각에 단 음식은 꽤 자극적인 감정을 선물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맛있어?”
“…응.”
“그래. 그래도 잘 먹으니 좋네.”
자기 덩치보다 더 큰 시커먼 녀석을 어르고 달래던 럼로우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그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기척을 내면 죽도록 맞았던 터라 쉽게 그 버릇이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 정도로 럼로우에게 날을 세우지 않는 것은 어쩌면 행운이었다. 이게 망가진 얼굴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이 백치가 뇌내 망상으로 믿고 따를 만한 사람이라 믿어버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운이 좋아.’
럼로우는 에셋이 고개를 숙인 탓에 부스스하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줬다. 머리 좀 단정하게 자르면 좋을 텐데, 머리에 날붙이를 대려는 것만 보면 발작을 해대니 쉽게 잘라줄 수도 없었다. 날이 점점 더워지는데 이 산만한 덩치를 어떻게 먹이고 씻겨야 하나 벌써 고민이었다.
“에셋. 예쁜아.”
“…….”
“내가 궁금한 게 한가지 있는데 대답해 줄래?”
“…들어보고.”
제법 똘똘하게 말을 한다. 분명 초콜릿을 먹고 기분이 좋아진 것이 틀림없었다.
“나 따라온 거 후회 안 하냐?”
“…응?”
“이 먼 곳까지 나 따라서 온 거 후회 안 하냐고.”
“…….”
백치는 잠시 우물거리는 입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들어 럼로우를 바라보았다. 상처가 처덕처덕 덧발라진 눈은 시릴 정도로 깊었다.
“아직까진.”
“그거 다행이네.”
“근데 그건 왜 물었어?”
“그냥.”
“…….”
럼로우의 대답이 간단하게 끝나자 곧 초콜릿을 먹는데 온 신경을 집중했다. 아직 자신을 믿고 있다는 뜻이었다. 남자는 속으로 껄껄 웃었다. 이 꼴을 캡틴 아메리카가 보면 어떨까. 캡틴 아메리카로서 날 죽이고 싶을까. 아니면 이 백치의 친구 스티븐 로저스로서 행동할까. 정말 궁금했다. 하지만 에셋을 쉽게 넘겨줄 생각이 없었기에, 굳이 알리지 않고 여기까지 와서 자리를 잡았다.
“예쁜아.”
“…….”
“나중에 누가 날 찾거든. 이야기 좀 잘해줘라.”
“무슨 소리야?”
“그냥 그렇게만 알아둬. 어차피 복잡하게 말해도 못 알아듣잖아.”
“…….”
“네가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는 기억 노트 한 귀퉁이에 적어놓던가.”
“…….”
“티 나게 숨기면 이 좁은 곳에선 다 보이니까.”
“…….”
에셋은 말없이 손바닥을 벌렸다. 하나로 모자라니 더 달라는 소리였다. 남자는 끌끌 혀를 차며 다 녹은 초콜릿을 꺼내 백치의 손에 쥐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