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럼로우버키/럼벜] 벜른 전력60분 : 호감
+) NOTICE
캡틴 아메리카 : 시빌워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둘이 루마니아 가는 이야기
럼로우 답답터지는 중
적당한 망상과 설정 붕괴가 언제나 함께 합니다 ㅇㅅㅇ)9
write. 환월
남자가 무기를 꼬드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깊은 생각을 하지 못하는 녀석에겐 어려운 미사여구는 필요하지 않았다. 애초에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것이 전부인 병기였다. 이런 백치에게 긴말을 하며 살살 구슬릴 수 있는 사람은 피어스 정도였다. 이 녀석은 긴 대화를 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처음 만났던 날도 똑 같았다. 다친 상처를 숨기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녀석을 토닥거려줄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뭐가 예뻐서? 내가 그렇게까지 해줘야 하지? 남자는 이렇게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일방적으로 얼굴을 오래 본 사이일 뿐 둘은 초면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당장 도망가지 않고 저렇게 털만 세우는 건 분명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사실 따지자면 이 녀석은 귀찮은 짐이었다. 하이드라가 관리할 때는 누구보다 잔혹한 살인 기계였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었다. 해동된 지 너무 오래되어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것은 물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저 본능이 시키는 대로 그늘에서 그늘로 옮겨 다니면서 사람들의 눈을 피할 뿐이었다.
무기가 보기에도 눈앞에 버티고 서있는 남자가 이상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윈터솔저는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 남자는 알아차렸다. 얼굴이 흉측하다거나 못 볼 꼴이라거나. 이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도대체 누구기에 내 움직임을 알아차렸지. 무기의 머릿속은 이 한 가지 생각으로 꽉 차있었다.
“뭐? 왜 그렇게 보는 거야.”
“…….”
“나도 좋아서 여기 온 게 아니야.”
“…….”
“네 녀석이 너무 시끄럽게 굴잖아. 마치 날 좀 봐달라고 하는 것처럼 움직이면서 모르는 척하기야?”
“…….”
“…이봐. 그러니까.”
영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런 표정을 읽은 남자는 혀를 쯧쯧 찼다. 이거 완전히 상해버렸구먼. 사람에게 쓰기 적당하지 않은 단어가 되는대로 튀어나왔다. 경계하고 있지만, 어딘가 부족해 보이긴 했다. 아무리 맛이 간 백치라 해도 쉽게 다가설 순 없었다. 저렇게 헐렁해 보여도 눈 깜작할 새에 목을 비틀어버릴 수 있는 녀석이었다. 남자는 일부러 손을 어깨까지 올렸다.
“나 아무것도 안 들고 있어.”
“…….”
“정말이야.”
“…….”
“네 녀석이 너무 시끄럽게 굴잖아.”
그래서 어떻게 했더라. 적당히 긴장을 풀어주고 살살 달랬다. 덩치 커다란 무기를 붙잡고 조근조근 말하는 건 성격에 맞지 않았다. 차라리 때리고 눕혀서 복종을 강요하는 편이 나았다. 그렇게 하지 않은 건 너무 불안해 보이는 눈빛 때문이었다.
“이거 원.”
“…….”
“내가 잘못한 거 같잖아. 난 그저 상처 입은 개새끼 한 마리 주우러 왔을 뿐이라고. 알아들어?”
“…….”
“경계심도 많지.”
“…….”
앞에서 주절주절 떠들기 시작하자 어지럽다는 듯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그러면서 눈을 피한다. 얼씨구. 사람이 이야기하는데 듣는 척이라도 하지. 남자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긴 이렇게 사람다운 대화를 해본 적도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그저 명령만 따르던 녀석이 이렇게 반항을 하는 것도 나름 귀여웠다.
❢
저 백치야 생각하는 것을 힘들어하니 계획을 세우고 움직이는 것은 전적으로 럼로우 몫이었다. 물론 고분고분 따라오진 않았다. 수동적이면서도 어찌나 고집이 센지. 럼로우는 그 무거운 발을 떼게 하느라 며칠 동안 끙끙 앓았다.
“제발 좀 가자. 이 멍청아.”
“…….”
“못 알아듣는 척하지 마. 다 알고 있어.”
“…….”
“여기 있으면 우리 둘 다 다시 끌려간다고. 그러고 싶어?”
“…어?”
“뭐 좋아. 널 자유롭게 하려고 놔두는 건데. 굳이 그렇게 사지로 기어들어가고 싶다면 나도 말리지 않겠어.”
“아니…그게.”
“그게 싫으면 빨리 와.”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다. 이 지긋지긋한 도시에 뭐 그리 좋은 것이 남아있다고 이렇게 미련을 가지는지 알 수 없었다. 하긴 저 멍청한 녀석이 입만 안 열었다뿐이지 머릿속은 훤했다.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
최대한 다정하고 좋은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그러면서도 발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불안한 표정으로 손을 꼼지락거리던 녀석은 저를 두고 갈까 봐 냉큼 따라붙는다. 사람을 그렇게 경계하던 녀석은 조금만 잘해주면 이유 없이 믿음을 준다. 정말 이상한 녀석이었다. 하긴 그렇게 뇌를 지지고 고문을 해댔는데, 그중에 잘해준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싶어 괜히 입맛이 씁쓸했다.
“예쁜아. 아저씨가 말하잖아. 뭐가 그렇게 맘에 안 들어서 이러는 거야. 우리가 이 도시를 떠나려고 한 것도 벌써 이주나 지났어.”
“여기…그러니까.”
“그러니까?”
“날 아는 사람이 있…는데. 그게…그러니까.”
또 말끝이 늘어진다. 분명 뭉그러진 기억을 긁어모아도 알 수 없는 답답한 마음이 가득 담겨있었다. 하지만 럼로우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저렇게 제대로 된 말 한마디 안 해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있었다. 에셋은 꼭 대신 좀 말해달라는 것처럼 럼로우는 붙잡고 늘어졌다. 왜 자꾸 어리광이 느는지. 럼로우는 혀를 끌끌 차면서 매몰차게 남자의 팔을 잡아당겼다.
“안 돼. 우린 지금 바빠.”
“하지만…….”
“어차피 이번에 떠나면 다시 안 돌아올 곳이야. 뭐가 좋다고 미련을 남겨두려는 거야.”
“…….”
“내 말이 맞지?”
“…그런가.”
“그래. 넌 내 말만 들으면 적어도 굶지 않고 누워서 자게 해줄게. 멍청한 백치야.”
“…….”
“알았지? 내 말만 들어.”
“…….”
대답이 없는 것은 아마 긍정의 뜻 일 거다. 이 녀석은 늘 그랬고, 그래 왔으니까. 럼로우는 입술 사이로 욕이 나오려는 것을 꾹꾹 참았다. 이 바보 같은 놈은 눈앞에 있는 자신과 캡틴과의 관계가 어떤지도 모르는 채 내내 친구를 찾으면서 칭얼댔다. 하긴 둘 사이의 관계를 팔아 이 녀석의 호감을 얻은 것은 럼로우 자신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 눈앞에서 징징거리는 건 듣기 싫단 말이야.’
럼로우는 묘한 짜증에 사로잡혔다. 애초에 그 말을 하지 말걸 그랬나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 말 하나 믿고 이렇게 의지를 하는데 어떻게 아니라고 하겠는가. 애써 마음을 다잡으려 했지만, 연신 캡틴 아메리카, 아니 스티븐 로저스를 찾는 백치가 영 마음에 차지 않았다.
“백치야.”
“…응?”
“그만 좀 징징거려. 주변 사람들이 다 너 쳐다보는 거 안 보여?”
“난…그냥.”
“그래. 일단 이 지옥 같은 곳을 벗어나서 이야기하자. 그럼 다 들어줄게. 알았지?”
“그래.”
“아이고, 착하다. 정말.”
정말이란 단어에 악센트를 줘가면서 꾹꾹 누른 발음으로 말하던 럼로우는 그나마 멀쩡한 손을 들어 녀석의 머리를 툭툭 쳤다. 쓰다듬어주긴 눈이 너무 많았다. 이런 접촉에도 마냥 마음이 편한지 덩치만 커다란 백치는 남자 뒤를 졸졸 따라왔다.
그렇게 루마니아로 데리고 온 것까진 좋았다. 물론 도시를 떠나 이렇게 멀리까지 옮겨온 것은 다 생각이 있어서였다. 그 긴 여행 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지 건너오는 내내 얌전했다. 항상 긴장하느라 밤에 제대로 잠도 못 자던 녀석이 남자의 어깨에 기댄 채 꾸벅꾸벅 졸았다. 그래 봤자 밀입국이라 더는 편하게 해줄 수 없었다. 오냐오냐하다 어깨까지 허락한 남자는 좋을 대로 놔둔 채 딱딱한 짐에 허리를 기댔다.
“얌전하니 좋네.”
얼굴을 가득 덮은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슬쩍슬쩍 넘겨주던 남자는 혼잣말을 툭툭 내뱉었다. 담배가 절실했지만, 여기서 피울 수 없었다. 이 녀석이 이렇게 그곳을 떠나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그곳에는 없는 녀석이었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비릿한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피부가 엉겨 붙은 얼굴에서 오래간만에 생기가 돌았다.
“그 고고한 캡틴이…이런 백치 녀석을 찾으려고 꽁지가 빠지게 이리저리 움직일 생각을 하니 내가 기분이 좋네.”
그러면서 버키의 볼을 토닥였다. 바짝 마른 얼굴엔 살이 하나도 없었다. 뭘 먹고 다닌 지도 알 수 없었다. 이렇게 극한 상황에 몰려서도 정신을 잃지 않고 부득불 버틸 수 있던 것은 하이드라 때문일까. 아니면 이 녀석의 정신력일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마음이 복잡해졌다. 남자는 곧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아마 네가 찾는 그 남자는 내내 널 찾아다닐 거다. 허상을 보겠지. 네 녀석이 좀 여러 군데를 쑤시고 다녔어야 말이지.”
“…….”
“그러면서 희망을 놓지 않겠지. 어딘가엔 살아있을 거라고. 안 그러냐.”
“…….”
“살아는 있겠지. 그 녀석이 닿을 수 없는 거리에.”
그리고 난 닿을 수 있고 말이야. 럼로우의 입술이 잠깐 가까워지는 것 같다가 이내 다시 멀어졌다. 그리고 비스듬하게 벌어진 입술에서 묘한 열등감이 흘러내렸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것은 부서지지도 않고 새까맣게 변해있었다. 보통 때의 무기였다면 럼로우가 입을 뗌과 동시에 벌떡 일어나는 것이 정상이겠지만, 한계까지 몰린 몸은 전원을 내리는 것처럼 기절해버렸다.
“못 듣는 게 나아.”
“…….”
“그냥 날 믿고 의지하면 되는 거다.”
❢
그리고 새집에 와서는 이곳이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주입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호감을 보였던 것이 꿈이라도 되는 양 멍청한 녀석을 내내 까칠하게 굴었다. 물갈이하는 것도 아니고, 잠투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낯선 사람을 보는 눈동자를 보는 럼로우도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뭐야. 네 녀석이 좋아서 따라와 놓고, 이젠 모르는 사람 취급하겠다 이거야?”
“…….”
“말해두겠는데, 여기서 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나가서 몸이라도 팔래?”
“…….”
“네 여권이며 위조 신분증까지 내가 다 만들어서 도와줬더니. 사람 냉대하기는.”
한바탕 소리를 지른 럼로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창문에 신문지를 붙이면서 한 손으로는 담배를 찾았다. 젠장. 어딨는 거야. 아무리 옆을 더듬어도 담뱃갑이 잡히지 않았다. 결국, 짜증이 나서 고개를 돌리니 한 손에 담뱃갑을 콱 움켜쥔 녀석이 저 멀리 웅크린 채 럼로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
“장난칠 생각 없어. 그거 이리 가져와.”
“…….”
“새끼가.”
호감을 표현하려는 건지. 아니면 그저 귀찮게 굴려는 건지. 너무 단순한 뇌는 오히려 읽어내기 어려웠다. 간신히 한쪽 창에 신문지를 마저 붙인 남자가 뚜벅뚜벅 무기 앞으로 걸어갔다.
“뭐야. 왜 도망가.”
“…….”
꼭 하는 짓도 유기견 같아서 계속 애정을 갈구하면서도 자기 영역에 누군가 들어오는 것을 못 견뎌 했다. 유기견은 한번 상처가 있으므로 조심히 다뤄야 한다고 떠들던 TV 프로그램 나레이션이 들리는 것 같았다. 젠장. 병신 둘이 뭐 하는지 모르겠네. 럼로우는 그렇게 착한 인간이 라니라 저런 멍청한 놀이에 하나하나 맞춰줄 생각이 없었다.
“난 바빠.”
“…….”
“널 먹여 살리려면 잡혀도 안 되고 말이야. 그래서 이렇게 귀찮은 일까지 도맡아 하는데 왜 이렇게 귀찮게 해.”
“하지만…….”
“아, 됐어.”
“…….”
“그런 멍청한 변명을 안 들으련다.”
“…….”
“예쁜아. 에셋. 응? 아저씨 귀찮게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내가 잡혀가. 그럼 넌 또 혼자야.”
“…….”
“그래. 이렇게 얌전하면 얼마나 좋아.”
녀석이 얌전해진 것은 어쩐지 호감보다는 두려움이 먼저인 것 같지만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럼로우가 입을 꾹 다물고 노려보자 표정이 축 처졌다. 끙끙거리는 녀석에 입에 초코바를 물렸다. 뭐라도 입에 물려놓으면 조용하겠지. 아저씨 일하는 동안 그거 먹고 있어. 뒤도 돌아보지 않은 럼로우가 땅에 떨어진 신문지를 주워들었다.
‘이렇게 내버려두면 저절로 걸어오겠지. 저 녀석은 날 거부할 수 없을 거야.’
그런 생각만 했다. 뇌가 녹아내린 불쌍한 백치는 연고도 없는 곳에 와서 유일하게 아는 사람을 포기할 만큼 독하지 못했다. 조금만 윽박지르면 금세 겁을 집어먹는 주제에 뭐가 저렇게 억울한 건지. 럼로우는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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