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히삼/손책조조] 불편한 진실 005
+) NOTICE
레전드 히어로 삼국전 2차 연성입니다.
손책조조 메인으로 왕윤 짝사랑하는 조조가 소량 나옵니다.
50화 이후에 다시 만난 둘에 대한 망상을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레히삼 완결까지 보지 않으신 분들께선 네타 주의해주세요.
적당한 망상과 설정 붕괴가 언제나 함께 합니다 ㅇㅅㅇ)9
write. 환월
며칠 동안 귀찮은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딱히 궁금하거나 마음을 쓸 생각은 없었기에 천천히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지독하게 들러붙어서 떨어지지 않던 감기도 어느 순간 사라졌다. 시간이 지나면 또 아플 것이 분명하다만 당장 몸이 개운하니 조금 살 것 같았다. 물론 늘 앓고 나면 심장이 아파지곤 했다. 그럴 때면 멈춰 서서 숨을 몇 번이나 내쉬어야 했다. 호흡할 때마다 지그시 폐를 누르는 낯선 감각은 숨을 멈추게 하려는 것처럼 조용히 스며들었다. 얼마나 더 아파야 감각이 무뎌질까. 조조는 가끔 이런저런 생각을 하곤 한다.
“…….”
꿈속에 자꾸 모르는 사람과 아는 사람이 섞여 보인다. 수많은 사람을 헤치며 걷는다. 몇몇은 조조의 팔을 붙들었고, 다리를 잡으며 늘어졌다. 끈적끈적한 어둠 같은 것을 빠져나오면 항상 끝엔 아는 사람이 나온다. 늘 보던 얼굴. 기다려주던 모습. 항상 같은 얼굴을 하고 조조를 바라본다.
‘선배?’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몇 번이나 부르고 싶어도 누군가 틀어막은 것처럼 답답했다. 한참 동안 자신을 바라보던 남자는 서서히 사라진다. 그렇게 공기 중으로 부서지는 남자를 만질 수도 만류할 수도 없이 꿈은 끝난다. 몇 번이고 반복된 꿈은 희망을 품는 것이 부질없다는 생각만 심어준다. 꿈이라고 자각하는 그 순간부터 단 한 번 도 결말은 바뀌지 않았다.
“…….”
오늘은 이상했다. 실컷 앓고 나면 적어도 몇 주는 꿈 때문에 고생을 하는데, 이번엔 그렇지 않았다. 꿈도 꾸지 않고 푹 잤다. 워낙 예민한 체질에 스트레스까지 꾹꾹 눌러 담고 살면 당연한 일이라지만 깊은 잠을 자지 못하는 것은 꽤 위험했다. 꿈이 생각나지 않는 것은 처음이었다. 꼭 잠을 자는 시간이 그대로 사라진 것 같았다. 조조는 낯선 감각에 눈을 깜박인다.
지나치게 넓은 침대와 이불 가운데 덩그러니 앉아있는 모습이 우스웠다. 딱히 큰 침대를 원한 것은 아니지만 집안을 채우려면 이 정도는 해야 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채우는 것은 희미한 햇살이었다. 일어나면 늘 머리가 아팠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뭐지.”
몸 상태가 갑자기 좋아져도 의심이 깊어간다. 딱히 예전과 달라진 것은 없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혼자 사는 곳에서 머리를 굴려봤자 거기서 거기였다. 이런 생각에 먹히느니 차라리 출근을 일찍 해버리자 싶었다. 그땐 정신이 없어서 선배한테 온 전화를 어떻게 받았는지 희미했다. 몇 년 동안 반복된 일이긴 하지만 이렇게 정신이 들면 늘 민망했다. 극복하려고 애쓰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일단…출근을 해서.”
할 일을 하고. 밀린 서류 정리하고. 또. 할 게 뭐가 있더라. 가면서 생각을 하는 편이 낫겠지. 급히 출근 준비를 한다. 먹을 것 하나 남아 있지 않은 부엌 상황을 보면서 오늘은 마트에 들려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초선이와 시간이 맞으면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았다. 그 생각을 하니 조금 표정이 풀어졌다.
**
“출근해?”
“…….”
“출근하냐고. 형사 양반.”
“…….”
“정말 너무하네. 내가 보이긴 해?”
“…누구신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지? 그래도 우리 좀 친해졌잖아.”
“그건 아니라고 보는데.”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강동관인 조조가 사는 곳과 제법 떨어져 있었다. 몇 번 이곳을 오긴 했지만, 그렇다고 시간 맞춰 올 만한 거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일반인은 말이다. 저 무술 바보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체력이 넘쳐났다. 설마 여기가 운동을 하는 코스는 아닐 테고, 아무리 봐도 자신을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아는 척을 하고 싶지 않았다.
“아침부터 이게 무슨 소란이야.”
“괜찮나 싶어서 와봤지.”
“…그게 며칠 전인데. 정말 할 일도 없군.”
“그야. 무술가의 예의가 있으니 어쩔 수 없지. 아픈 사람을 알고 있는데, 언제까지 그대로 내버려 둘 순 없는 것 아닌가.”
“…….”
“괜찮은 얼굴을 보았으니 됐다.”
“내가 괜찮으면 도대체 뭐가 좋은 건지 모르겠어.”
“내 마음이 좋지. 내가 동생들한텐 모자란 형이지만 그래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려고 노력하고 있거든. 그중 하나가 아픈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것이다.”
“그런가. 정말 속이 편하군.”
“뭐…그렇지.”
“그럼 멀쩡한 걸 확인했으니 그만 갈 길 가는 게 어떤가? 강동관 첫째 손책.”
“내 이름 기억하고 있네?”
“…….”
그 말은 듣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아차 싶었다. 이런 녀석은 길게 말을 걸면 안 되는데, 이상하게 손책과 얽히면 자꾸 말이 길어진다. 조조는 농담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고, 할 말이 없는데 대화를 억지로 이끌어가는 것도 내켜 하지 않았다. 그렇게 냉정한 남자가 갑자기 쑥 밀고 들어온 사람에게 휘둘리고 있었다.
“기억하는 걸 기분 좋아하면 될까?”
“…….”
“역시 대답을 안 하네. 그런데 말이야.”
“귀찮게 자꾸…….”
“우리 진짜 어디서 만난 기억 없어?”
“…….”
무술 바보가 또 뜬구름을 잡는다. 조조가 조금 더 감상적인 사람이었다면 나한테 관심 있냐고 되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머릿속에서 약한 두통이 몰려왔다. 으. 절로 눈을 찌푸리자 손책이 펄쩍 뛴다.
“또 아픈 거냐? 그러기에 좀 천천히 다니라니까.”
“네 녀석 때문인 거 같아. 이 두통의 원인 드디어 찾았군.”
“나?”
“그래. 머리 울리니까 그만 가. 나도 일해야 해.”
“…….”
“이젠 내 생활에 신경 꺼줬으면 좋겠어.”
“…….”
“우리 그렇게 가까운 사이 아니잖아.”
“난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뭐?”
또 미간을 팍 찌푸린다. 저 얼굴은 초선이 만날 때 빼곤 웃으면 죽는 병이라도 걸린 모양이다. 늘 다른 사람에게 벽을 치면서 다가오지 못하게 한다. 물론 그런 제스처를 알아들어도 모르는 척하는 손책에겐 그리 먹히는 방법이 아니었다.
“늘 그런 표정을 짓나?”
“무슨 소리야.”
“이상하잖아. 사람이 웃지도 않고. 어떻게 늘 한결같은 표정이지.”
“너한테 그런 걸 알려줄 의무는 없지.”
“그런 말투까지 포함해서 하는 말이야.”
“내가 분명 고맙다고 이야기했을 텐데. 도대체 뭐가 더 필요한가?”
“필요?”
“그래. 도대체 뭐가 필요해서 이렇게 내 주위를 얼쩡거리느냔 말이야.”
조조는 그리 부드러운 화법을 구사하지 않았다. 게다가 눈앞에 귀찮은 것이 있으면 더한다. 대놓고 뾰족한 말을 퍼붓지만 손책은 웃기만 한다. 바보 같은 건지 아니면 이 정도는 포용할 수 있을 만큼 마음이 넓은 건지. 어지간한 말로는 상처조차 나지 않았다.
“고마워. 됐지.”
“갑자기 무슨 일이야.”
“저번에. 도와준 거. 정말. 고마워.”
“…….”
“우리 이제 보지 말자.”
고맙다는 말 한번 정말 뻣뻣했다. 꼭 연극을 하는 것처럼 한 단어 한 단어 힘주며 끊어서 말하던 녀석은 슬쩍 웃으면서 손책을 지나쳐간다. 그 입가만 쳐다보던 손책은 순순히 길을 비켜주었다. 뒤통수에 대고 한 번 더 조조를 불러보았지만 당연하게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중에 또 보자! 응?”
“…….”
“너 진짜 어디서 많이 본 거 같다니까. 익숙해!”
“…….”
“한번을 대답해주는 법이 없네.”
다부진 얼굴에 시원섭섭함이 뚝뚝 떨어진다.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으니 오가며 얼굴 정도는 늘 볼 수 있는 거지만, 이런 식으로 쌩쌩 찬바람이 부는 녀석을 어디 가서 잡아 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손책은 관심 있는 부분에서 굉장히 집요한 사람이었다.
“뭐…나중에 또 보면 되는 거겠지.”
저 멀리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만 한참 바라보다 반대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볍게 공원이라도 좀 뛰고 들어가기로 했다. 이렇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것은 뿌옇게 안개가 낀 머리 때문이리라. 증거를 댈 수 없지만 분명 아는 사람이었다. 도원관에서 처음 얼굴을 볼 때부터 조조의 얼굴이 익숙했고, 목소리가 기억에 남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왜 그렇게 생각되는지 알 수 없었다.
이 궁금증은 어디에서 풀어야 할까. 손책은 기억을 되살리려 부던히 노력했다. 꿈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상황은 머릿속에 남아있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면 금방 사라진다. 아무리 기억하려고 노력해도 되지 않았다. 그 중 꼭 조조를 만난 것 같았다. 그래서 몇 번이나 떠봤지만,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이 답답함을 해결하려면 저 녀석을 더 만나야 하는데. 마음처럼 되지 않아서인지 점점 더 머리가 아팠다.
**
“다들 출동 준비해!”
“알겠습니다.”
“3차방에 5구역. 그 녀석들이 다시 나타났다.”
“예?”
“이름만 빌린 조무래기들이겠지. 하지만 금품을 훔쳐 달아났다고 하니 무력 충돌도 예상하도록.”
“네. 알겠습니다.”
“다들 몸조심하고.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이다. 경찰과 시민 모두. 알겠나!”
“예!”
경찰서는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진다. 한동안 조용했던 놈들이 다시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동탁이 이끄는 무리는 이미 괴멸되고 잔챙이들은 간신히 살아남아 음지로 기어들어 갔다. 하지만 그렇게 숨을 죽이고 사는 것도 한계가 있는 모양인지 하나둘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런 경우였다. 경찰의 눈에 들키지 않게 조용히 움직이던 녀석들이 이번엔 무슨 일인지 대범한 행동을 한다. 가게 창문을 깨고 들이닥쳐서 물건을 훔쳤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다고 하지만 삽시간에 마을을 공포로 덮기엔 충분했다.
“다들 일단 차로 움직이고, 현장에 도착해서는 내 명령에 따른다.”
“네.”
“조조. 특히 너 말이야.”
“…….”
“새끼. 대답 한 번 들을 수가 없어. 빨리 출동해. 오늘에야말로 놈들을 모두 잡아넣는다!”
자자. 어서 움직여. 빨리. 놈들이 계속 이동 중이다. 선배들은 이제 조조의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나마 이렇게 입을 꾹 다물고 있지만, 명령을 들으면서 움직이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급하게 도구를 챙긴다. 늘 그렇지만, 이번에도 큰 사고가 없기를 다시 한번 기도했다. 출동 전 마지막 의식 같은 셈일까. 조조는 늘 이렇게 기도를 한다.
“조조 잘 따라오고 있나.”
“네.”
“그래. 3차방 4구역. 뭐 어디로 움직인다고?”
“…….”
“공사장? 아니 공사장으로 왜 가는 건데.”
“공사장이라면…저 옆에 짓다 만 건물이 있습니다.”
“이놈들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기동력 빠른 쪽부터 움직이라고 해.”
“알겠습니다.”
공사장에서 무슨 일을 벌이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먼저 출동한 팀이 도망치던 벤을 붙잡았는데, 꼴사납게도 함정이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꼭 놀리는 것처럼 차 안에 연결된 스피커로 다음 경로가 줄줄 흘러나왔다. 동탁이 하던 짓과 똑같았다. 그 녀석은 사람을 놀리기를 좋아하고, 가장 수치스러운 방법으로 모욕하곤 했다. 예를 들면 정의의 잣대인 경찰을 일어설 수 없게 부순다던가. 경찰로서 가장 불행한 것을 선물한다던가. 악질 중 악질이었다.
그런 녀석이 이제야 사라졌다고 믿었는데, 생각보다 악의 씨앗은 곳곳에 퍼져있는 모양이었다. 조조는 자꾸 온몸에 힘이 들어간다. 이럴 때마다 흥분하고 호흡이 거칠어지는 것을 고쳐야 하는데, 쉽지 않았다. 온몸에 새겨진 문신처럼 자꾸 과거 생각이 난다. 그러면 참을 수 없었다.
“저 녀석 또 저런다.”
“…….”
“등 좀 쳐줘. 저러다 또 사고 치면 진짜 큰일이니까.”
“야. 말썽꾸러기. 괜찮아?”
“…….”
“숨 좀 쉬어라. 응? 아이고 범인보다 얠 먼저 잡겠네.”
“…….”
숨을 쉬지 못하니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하얗게 질렸다가 간신히 제 색을 찾는 시야가 답답하지만 했다. 간신히 숨을 토해내고 축 처진다. 이런 녀석이 경찰을 끝까지 하겠다고 부득부득 우기니 주변 사람들은 늘 걱정이 깊었다. 그래도 미운 정이 쌓인 선배들은 아직 솜털 까칠한 어린 경찰을 걱정한다. 그렇게 까칠하게 튀어나오고 미운 짓을 골라 하지만, 그렇다고 또 사고가 나게 둘 순 없었다.
“조용히 돌아 들어간다.”
“네.”
“조조. 괜찮겠어?”
“네. 멀쩡합니다. 신경 쓰지 마시죠.”
“꼭 저런다니까. 그래 한 번 더 믿어본다.”
“나랑 기동대는 왼쪽으로 돌아가고 나머지는 오른쪽.”
“…….”
“조조. 넌 우리가 돌아 들어가는 사이에 중앙으로 움직여라. 분명 그쪽으로 누군가 뛰쳐나올 거야.”
“네.”
“다들 조심하고. 보호 장비 확인하고 움직인다.”
“알겠습니다.”
“좋아.”
간단한 브리핑이 끝나자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공사장에서 무슨 일을 하려는지 알 순 없지만, 저놈들이 훔친 것을 이곳에 숨기려는 것이리라 짐작했다. 이곳은 곧 공사가 재개될 예정이고 그 전까진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지 않는다. 그렇게 본다면 훔친 것을 숨겨 놨다가 나중에 슬그머니 빼돌릴 장소로 아주 적합했다. 당장 유통을 할 수 없는 장물을 이런 식으로 관리하는 것도 어둠 조직 특유의 수법이었다.
“조조.”
“네.”
“조심해라.”
“…….”
“그분도 널 보면 이렇게 말해주셨을 거다.”
“…….”
“그럼. 가자. 조심하고. 단체 명령 잘 듣고. 알겠지?”
“…네.”
오랜만에 고분고분 대답한다. 아마 왕윤이 겹쳐 보였을지도 모른다. 둘로 나눠진 경찰 무리가 안쪽으로 들어가고 조조는 정면을 마주 본 채 퇴로를 차단한다. 예전 같으면 누구보다 빨리 안쪽으로 뛰어들어갔을 것이 분명하겠지만, 오늘은 말을 잘 듣는 편이었다.
하나. 둘. 셋. 총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날카롭게 노려본다. 총을 쥔 손가락이 규칙적으로 박자를 센다. 현장에 출동하면 항상 하는 버릇이었다. 보통 이렇게 박자를 세면서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따라 시간이 더디게 간다. 녀석들의 저항이 거센 걸까. 조조는 점점 초조해졌다. 그 순간 큰 소리와 함께 누군가 밖으로 뛰어나왔다.
“움직이지 마! 멈춰서 무기를 버리고 투항해라.”
“저리 비켜!”
“…….”
순간 환청이 들렸다. 중요한 물품은 잘 챙겼어야지. 누가 한 말이었을까. 아니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꼭 누가 몸을 붙들고 늘어진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귀에 도망치는 남자의 숨소리가 들렸다. 자신을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숨도 쉴 수 없어서 그대로 굳어있던 조조를 깨운 것은 뒤따라 나오며 소리치는 경찰서 동료였다. 아.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이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이렇게 멍청한 표정으로 범인을 놓쳤던 적은 없었다. 꼭 뭐에 씐 것 같아 차마 변명 한마디고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너 또 왜 그래!”
“아뇨. 아닙니다. 쫓아가겠습니다.”
“저거 진짜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잔소리 말고 어서 쫓아가.”
사실 이렇게 느긋하게 말을 주고받을 시간이 없었다. 다시 제 눈빛으로 돌아온 조조는 누구보다 먼저 뛰어나갔다. 다행히 다른 이동 수단을 구하지 못했는지 저 앞에 달려가는 녀석이 보였다. 오늘은 절대 놓치지 않겠어. 거친 숨소리만큼 눈빛이 싸늘했다. 왕윤 선배는 이런 것을 바라지 않았을 텐데. 늘 선배의 그림자를 쫓아가고 있다. 이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림자를 쫓아가긴커녕 절대로 해선 안 될 실수를 하고 말았다. 정신없이 뛰면서 품 안을 더듬었다. 다행히 총은 멀쩡했다.
“…….”
아무도 자신에게서 총을 빼앗아갈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했던 걸까.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하자 조조는 좀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생각은 독과 같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저 녀석을 붙잡아 넣어야 했다. 할 일은 그것 뿐이었다.
“거기서!”
“…….”
“저 새끼 진짜.”
“…….”
“지치지도 않나. 도대체 얼마나…….”
조조는 체력은 떨어지지 않는 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유난히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물론 아슬아슬하게 쫓아가는 것은 아니다만 이상할 정도로 계속 달리기만 했다. 그렇다고 해서 검거를 포기할 수도 없으니 마냥 따라 뛸 수밖에 없었다. 기동대가 출동할 법도 한데 아직 소식이 없다.
“비켜. 이 새끼야!”
“…뭐야.”
“안 비키면 다친다!”
“…….”
“이 새끼가 진짜.”
“뭐 하는 거야. 피해!”
“…….”
“피하라고!”
언제 손에 흉기를 들고 있었는지. 피할 생각도 없이 멍하니 길 한가운데 서 있는 인영을 보자 급하게 소리를 지른다. 평소 조조의 목소리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음이 높았지만, 누군지도 모르는 녀석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대로 가면 분명 큰일이 생길 것 같았다. 내가 좀 더 빨랐다면. 아니 애초에 이상한 생각에 넘어가 못 움직이지만 않았어도. 조조는 자꾸 후회할 일이 늘어만 갔다.
“피해!”
“…….”
“비켜!”
서로 다른 목소리가 한데 섞이는 그 순간 앞서 달리던 녀석이 뒤로 훌쩍 넘어갔다. 위협하기 위해 휘두르던 칼은 잠시 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땅에 떨어졌다. 손목을 잡아서 흉기를 떨어뜨리고 바로 어깨를 잡아 그대로 꺾어서 움직임을 봉쇄했다. 죽는소리가 난 것 같은데, 확실하진 않았다.
“아악!”
그대로 뒤로 넘어간 녀석은 보도블록 위에 대책 없이 떨어져 일어나지 못했다. 낙법도 쓰지 못하고 그대로 넘어졌으니 아마 뼈 한군데쯤 나갔을지도 몰랐다. 조조는 눈앞에 상황을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범인을 쫓던 중 앞에 나타난 사람이 이렇게 완벽하게 대항할 확률은 어느 정도 될까. 자기보다 덩치 큰 남자를 뒤로 메치고도 멀쩡하게 서 있는 남자를 보던 조조는 급하게 다가갔다.
“……”
“괜찮으십니까.”
“…….”
“감사합니다. 쫓던 범인이었습니다.”
“…….”
“곧 경찰이 도착할 테니 잠시만…….”
“조조?”
“…….”
“조조 맞지?”
“…손책? 네 녀석이 왜 여기 있는 거냐.”
“우연히 지나가고 있었지.”
“…….”
이렇게 운이 없을 일도 아니었다. 저 녀석은 왜 이곳을 시시덕거리며 걸어 다니고 있었고, 자신은 왜 별거 아닌 녀석을 놓쳐서 뒤쫓고 있었는가. 다른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운명이라고 하겠지만, 조조 입장에서는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뒤쫓던 녀석?”
“…그래.”
“어서 데려가.”
“…….”
“천하의 조조가 이런 실수를 하고 범인 뒤를 쫓아 달리고 있다니, 좋은 구경 했네.”
“뭐?”
“아이고…아야야.”
“갑자기 약한 척이냐.”
“그런 거…아니거든.”
갑자기 옆구리를 붙잡고 주저앉는다. 조조는 설마 저 튼튼한 놈이 아플까 싶어 아무렇지 않게 지나친다. 수갑을 꺼내서 쓰러진 녀석의 팔을 등 뒤로 돌린 후 구속한다. 팔이 덜렁거리는 걸 보니 대차게 다친 것 같고, 움직일 생각을 못 하는 것에 보아하니 떨어지면서 충격이 심했나 싶었다.
“아…….”
“뭐야. 왜 갑자…….”
“…….”
“기.”
저 녀석이 새파란 도복을 입고 다닐 때부터 알아봐야 했다. 파란색에 붉은색이 닿으면 얼마나 검게 변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손책이 꾹 누르던 손을 떼자 피가 묻어나왔다. 아무리 바보라고 하지만 무술 한다는 녀석이 칼도 못 피하고. 조조는 놀라서 눈만 깜박거린다. 그때 뒤늦게 경찰이 도착했다.
“잡았어?”
“…네.”
“이쪽은?”
“도와주신 시민입니다.”
“도와줘?”
“예. 무술을 아주 많이 잘하시거든요.”
“…….”
목소리가 영 기분 좋아 보이진 않지만, 원래 그런 녀석이라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 그리고 조조와 손책을 번갈아 쳐다보다 손책의 다친 부분에 눈이 갔다.
“아니. 다치셨습니까?”
“별거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죠. 으.”
“이거…저희를 도와주다가 다치셨는데 이렇게 보내드리면 안 되는 거고.”
“천하제일 무술가가 이런 것쯤은…괜찮다니까.”
“막내야. 넌 이 분 모시고 병원 갔다가 경찰서로 복귀해라.”
“뭐요?”
“뭐긴 뭐야. 너 도와주다가 다친 거 아니냐. 병원 가서 신원 확인이랑 치료하고, 복귀해서 보고해.”
“하지만…….”
“너 자꾸 말대답하지. 하여튼 처음 새파란 게 들어올 때부터 하나도 안 변하냐.”
“…….”
“자. 다들 움직여. 저놈 데리고 가고. 복귀할 사람들 복귀하고. 검거 현장 확인해서 넘기고. 알았지!”
“네.”
모두 일사불란한 가운데 조조와 손책만 멍하니 멈춰있었다. 범인 녀석이 끌려갈 때까지 둘은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아있던 손책이 먼저 조조를 불렀다.
“내가 이번에도…너 도와준 거야. 알았어?”
“…내가 언제 도와달라고 했었나.”
“다친 사람한테 너무하네.”
“…….”
“아. 좀 아프긴 한데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고.”
“…….”
“내 이름이랑 주소는 알 테니 알아서 처치하고 들어가. 난 그냥 가면 되니까.”
조조가 멍한 사이 손책이 먼저 일어섰다. 나 그만 간다. 옆구리를 꾹 누른 채 한걸음 걸어가려는 찰나 조조가 손목을 턱 잡았다.
“뭐야. 귀찮은 사람 사라져 준다니까.”
“네 녀석이 그냥 가면 내가 얼마나 곤란한 줄 알아?”
“뭐?”
“잠자코 따라와.”
“야…야 조조!”
“어서 따라와. 천하제일 무술가라더니.”
“…….”
“허풍은.”
혼잣말 같은 한마디에 손책을 아픈 것도 잊어버렸는지 자꾸 웃음을 터뜨린다. 웃으면 상처 터진다. 분명 웃기려고 한 말은 아닐 텐데 자꾸 웃을 수밖에 없다. 조조는 그럴 때마다 손책을 한심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이 녀석은 수술할 때 마취하지 않아도 아픔을 못 느낄 것이 분명해. 조조 안에서 손책이란 남자는 딱 이 정도의 감상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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