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100분/제갈유비] 여행,가족, 빼빼로데이
+) NOTICE
레전드 히어로 삼국전 2차 연성입니다.
대학 AU
근로장학생 유비(선배) 억지로 대학 끌려온 제갈량(후배) 이야기
적당한 망상과 설정 붕괴가 언제나 함께 합니다 ㅇㅅㅇ)9
write. 환월
제갈량은 대학에 왜 가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가득했다.
어차피 그런 곳에 가봤자 자신의 지식에 도움이 되는 것이 하나도 없으리라 생각했다. 대학에서 배울 수 없는 무한한 지식이 이 연구소에 있는데 왜 귀찮게 그런 곳에. 제갈량은 내내 거부했고, 연구소조차 그 뜻을 꺾지 못했다. 그렇게 한해가 지나가고 다시 해가 바뀌었다.
“제갈량. 넌 왜 그렇게 밖으로 나가는 걸 싫어해?”
“…….”
“여기에 매여 있던 삶이 허무해질까 봐?”
“가고 싶으면 너나 가도록 해. 주유.”
“사람이 걱정해준대도 싫다고 하기야?”
“난 그런데 관심 없어. 귀찮다고.”
“그래. 여기서 평생 살아라!”
주유는 늘 그랬다.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곳에서 주유는 형제자매와 같았다. 기억의 기억을 더듬다 보면 늘 연구원과 동기들뿐이었다. 또래를 제외하곤 어른만 득실거리는 곳에서 아이들은 서로 뭉쳐서 자랐다. 그러다 보니 서로 말은 하지 않아도 같은 핏줄처럼 지냈다. 주유는 그중에서도 바깥을 궁금해한다. 서서 같은 단순한 호기심은 아니었다. 분명히 이 곳에서 얻을 수 없는 다양한 경험이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래서 스스로 대학에 가겠다고 말했다. 물론 그런 주유를 보는 제갈량은 늘 표정이 밋밋했다.
“그런데 가서 무슨 이득이 있다고.”
“…바보 같은 제갈량.”
“너만큼은 아니겠지.”
“사마의도 나도 모두 갈 텐데. 그럼 네가 더 뒤처지는 거야. 그거 참을 수 있어?”
“내가.”
“…….”
“뒤처진다고?”
“그래. 경험이란 건 무시 못 하니까.”
“그럴 리가.”
이럴 때 보면 정말 싸가지가 없어도 너무 없다. 주유는 보통 제갈량의 언변을 이기지 못했고, 제풀에 화가 나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이제야 조용하네. 제갈량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가만히 옛 생각을 한다.
어느 정도 철이 들 때까지 평생 이 연구소에서 살았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낳아준 부모가 있었겠지만,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 것을 보니 애초에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이 확실했다. 아니면 누군가 버렸을 수도 있겠지. 인제 와서 부모나 핏줄을 찾을 생각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곳은 누가 뭐라 해도 최고의 시설을 갖춘 곳이었고, 제갈량 가진 지식에 대한 갈망을 채워줄 유일한 장소였다.
“……”
제갈량이 이렇게 싫어하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똑똑하고 총명한 만큼 자기 생각에 호불호가 강했다. 그런 제갈량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연구소장이나 총장 정도일까. 아무도 그 고집을 꺾지 못했다. 지금에서야 명령 식으로 서문이 전달되었다. 그래서 아마 주유가 왔을 것이다. 몇 년 전부터 같이 들어가서 같이 졸업하는 식으로 이야기가 들어온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제갈량이 거부해서 지지부진했으니까 미룰 수 없다는 윗선의 말에 제갈량은 바로 호출을 받았다.
“어째서.”
“어째서긴. 우린 네 지식에 대해 감탄하고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 얻지 못하는 지식 또한 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굳이 필요 없습니다.”
“왜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
“사마휘님…그건.”
“난 너희를 거두어 키우면서 이 연구소에 도움이 되길 기도했다. 하지만 내 아이들이 인간적인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 채 어른이 되어버린다면 그것 또한 슬픈 일이 아니겠느냐.”
“…….”
“난 적어도 그렇게 생각한단다.”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하지만.”
“제갈량. 무엇이 두려운지 잘 안다. 하지만 그런 것도 모두 네가 이겨내야 진정한 어른이 될 수 있어.”
“…….”
별건 아니었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 자유롭게 살다가 졸업을 하면 어떨까. 모든 인연을 싹둑 잘라내고 다시 연구소로 들어와야 했다. 제갈량은 그런 것이 싫었다. 강하게 말하자면 연구소의 도구로 키워지는 기분이었고, 이별은 굳이 경험해야 할 감정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마휘의 생각은 단호했다. 늘 자애로운 얼굴로 아이들을 보살폈다. 제갈량 또래의 아이들이 모두 사마휘가 거두어들인 세대인지라 그 누구도 반항할 수 없었다. 제갈량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꺽이지 않을 것 같은 고집이 툭 부러졌다. 꼭 대나무가 꺾이는 소리 같았다.
“…알겠습니다.”
“그래. 난 이해해주리라 생각했다.”
“다만…이 이후로 절 밖으로 내보내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십시오.”
“그건. 왜지?”
“전 이별이란 감정을 별로 알고 싶지 않으니까요.”
“…일단 그렇게 약속하마.”
“…….”
“정 그렇게 탐탁지 않다면 그저 긴 여행을 다녀오는 것으로 생각는 방향은 어떠하냐.”
“여행…말씀이신가요.”
“그래. 여행이라면 언젠간 돌아와야 할 곳이 이곳이 되겠지.”
“괜찮은 생각이군요. 참고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차라리 절 교수로 보내시는 편이 좋았을 텐데요.”
“교수?”
“예. 대학에선 제가 배울 것보다 가르치는 쪽이 더 이득일 테니까요.”
제갈량의 말은 당돌했지만, 맞는 말이었다. 제갈량의 기초 공부를 담당했던 선생들은 모두 자기 분야에서 한 자리씩 하는 학자들이었다. 원하는 자료는 어설픈 대학 도서관보다는 이곳에 많았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요청하는 것에 익숙했다. 이런 곳에서 이십 년 가까이 살아온 청년은 대학이란 공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스트레스는 받는 눈치였다.
“그런데…왜 갑자기 저희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 건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굳이 말하자면 외부에서 이쪽 일에 관심이 커지고 있다. 우리 재단의 유망주들을 아동 학대 식으로 감금하는 것 아니냔 소리가 나오고 있지.”
“멀쩡하단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런 어리석은 연극을 해야 한다는 소리군요.”
“하지만…난 역시 너희들이 평범한 생활을 경험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단다.”
“네.”
“난 너희들이 정말 자랑스럽구나.”
이런 말까지 들었는데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제갈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재단을 제 발로 나가리란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될 줄이야. 하지만 한번 정해진 일을 바꿀 수 없다면, 차라리 효율적으로 시간을 쓸 방법을 생각하는 편이 나았다. 주유도 기뻐하겠고, 사마의도 마찬가지겠지. 서서는 당연히 좋아하겠고. 하긴 저 혼자 싫다고 버티던 일이었다.
“뭐? 진짜 갈 거야?”
“그래.”
“해가 서쪽에서 떴다. 그 고집쟁이 제갈량이 이리도 순순히 뜻을 꺾었다니.”
“좋으면 좋다고 해. 주유.”
“좋지. 난 가서 잘 적응할 자신이 있어. 너 같은 외톨이가 아니라 이 말씀이야.”
“…….”
“기숙사에 들어가려나. 아니면 따로 집이 생길까.”
“따로 방 얻어주신대.”
“그래?”
“그렇다더라.”
“재밌겠다.”
“재밌으면 좋겠네.”
한번 정해지면 그 뒤는 언제나 빠르게 진행된다. 제갈량이 손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으로 공식적인 일 없이 재단을 떠난다. 짐은 단출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다시 돌아와야 할 곳이니 많은 것을 가져가지 않기로 했다. 제갈량은 점점 멀어지는 건물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
처음 만남은 그리 신통치 않았다.
제갈량은 생각보다 낙후된 시설에 이래저래 불만이 많았다. 사마의는 늘 그랬던 것처럼 목적에 따라 충실히 움직였고 주유와 서서는 모든 것이 신나는 모양이었다. 그런 형제 가운데 제갈량만 혼자 쓸데없이 스트레스를 쌓아간다. 그리고 재단이 얼마나 좋은 곳이었는지 깨달았다.
‘도대체…있는 게 뭐야.’
괜히 화가 치밀어 올라 키보드를 거칠게 두드렸다. 이런 서적 하나 배치해두지 않고 과연 대학이라 할 수 있을지. 이래서 오기 싫었는데. 하지만 불평을 해봤자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검색 결과는 늘 텅텅 비어있었다. 아, 미치겠네. 제갈량은 갑자기 바보가 된 기분이 들었다. 이런 곳에서 과연 배울 것이 뭐가 있을까. 이제라도 다시 돌아가겠다고 하고 싶을 만큼 한심했다. 겨우겨우 남아있는 책 두 권을 골랐다. 참고 문헌 찾는 것부터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는데 남은 시간은 어떻게 보낼지. 정말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만큼 눈앞이 캄캄했다.
“대출이신가요?”
“…네.”
“대여 기간은 일주일이고, 혹시 연체하시면 그만큼 책 못 빌리세요. 그리고 잃어버리면 같은 책 사와야 하니까 주의하세요.”
“네.”
“학생증 이쪽에 대주세요. 어…이거 잘 안 빌려 가는 건데.”
“…….”
재잘재잘 말이 들리는 것을 한 귀로 흘린다. 얼굴을 쳐다보는 것도 피곤해서 책만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좀처럼 책을 넘겨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뭐야. 잔뜩 짜증이 나서 한마디 하려고 고개를 들었다.
“…저 학생증 인식해줘야 하는데.”
“아.”
맞다. 그랬지. 화난 표정을 다 봤을 텐데. 제갈량은 어쩐지 민망해졌다. 눈앞에 강아지 같은 얼굴에 키만 큰 사람이 눈만 깜박이면서 계속 인식 기계를 쿡쿡 찔렀다. 이때만큼 허둥댄 기억이 없다. 사람이 거의 없어서 다행이지 많았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미안합니다. 잠깐 딴생각 하느라.”
“괜찮아요. 이쪽에 인식하면 바로 대출 처리 도와드릴게요.”
삑. 붉은빛이 학생증 바코드를 스캔한다. 앞에 보이는 모니터엔 아직도 낯선 학번과 익숙한 이름이 떠오른다. 도서 신청을 하면 얼마나 걸릴까. 차라리 사마휘님한테 기부식으로 부탁을 할까. 제갈량은 여전히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삑. 삑. 바코드 찍는 소리가 들리더니 눈앞에 책이 턱 걸렸다.
“여기요.”
“…네.”
“몇 번 불렀는데 대답을 안 해서.”
“감사합니다.”
가볍게 책을 받아들었다. 뭐가 그렇게 신났는지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쌀쌀맞게 굴던 것이 부끄러워질 정도로 말이다. 제갈량은 책을 받아서 곧바로 나가려다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고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큰 키에 생각보다 다부진 몸인데 이상하게 걸친 옷을 헐렁하기만 했다. 사람 좋게 웃어서 남는 것이 있을까. 한참 바라보다 조용히 도서관을 나섰다.
“누구? 아, 알지.”
“안다고? 어떻게?”
“내가 친구가 좀 많거든.”
“…….”
“우리보단 선배고 휴학도 많이 한대. 그리고 지금은 근로 장학생인데 워낙 성실해서 오래 일하나 봐. 이름이 뭐라 했지.”
“…….”
“그런데…제갈량이 관심을 가지려는 거 보니까 쉽게 알려주기 싫다.”
“뭐?”
“왜 그렇게 궁금해해?”
“…….”
“응?”
“알려주기 싫으면 그만둬. 다 알아볼 방법이 있으니까.”
제갈량은 주유의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바라보다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하긴 저 녀석이 쉽게 알려주리란 생각을 했다는 것부터 정신이 없다는 방증이었다. 정 안되면 직접 물어봐도 되겠지. 그런 제갈량 뒤통수에 주유의 목소리가 찰싹 붙었다.
“이름은 유비래. 이 싸가지 없는 놈아!”
“그래. 고맙다.”
“하여튼 저 성질을 누가 이겨!”
주유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조금 빠듯하긴 하지만 오늘 내로 책을 다 읽고 내일쯤 돌려주러 가면 될 것 같았다. 사람에게 관심이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전혀 좋아할 구석이 없어 보이는데, 이상하게 눈이 간다. 주유가 건네준 정보는 생각보다 많았고, 제갈량은 혼자 사는 집에 돌아가서도 내내 유비 생각을 했다.
재단에서 내어준 집은 생각보다 컸다. 적당히 방 한두 개 정도 있는 곳이라 생각했지만, 거실 부엌 개인 창고까지 갖춰진 본격적인 모양새에 제갈량은 약간 질려 했다. 게다가 오래 비워둔 곳인지 급하게 새 가구를 채워 넣어서 새집 냄새가 났다. 이렇게 넓으면 차라리 같이 사용하는 편이 나을 텐데. 제갈량은 사람과 부대끼는 것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넓은 곳에 혼자 있는 것보단 나았다. 애초에 기숙사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한쪽도 자신이니 탓하려면 자신을 꾸짖어야 했다.
“…먹을 걸 사와야 했는데.”
늘 챙겨주는 식사에 익숙해져서 종종 먹어야 할 때를 놓친다. 냉장고엔 어느 정도 필요한 음식 재료가 들어있지만, 제갈량은 먹을 만한 음식을 만드는 방법을 몰랐다. 집안을 담당하는 도우미가 아침에 만들어둔 샌드위치를 꺼냈다. 딱히 먹는데 흥미가 없어서 다행일지도 몰랐다. 적당히 커피를 내리고,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많이 차갑긴 했지만, 먹고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귀찮아.”
정말 세상은 힘든 일투성이다. 그냥 연구소에 콕 박혀서 하고 싶은 일이나 하고 살까 싶다가도, 그게 윗선이 이야기하는 도구화 일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나빠졌다. 사마휘는 자신의 아이들을 보살피려 노력했지만, 그보다 위에 있는 권력은 늘 모두를 내리누르곤 했다.
내일도 뭔가 먹을 생각을 하니 귀찮았다. 적당히 건강을 해치지 않을 정도만, 배만 채울 수 있으면 뭐든 좋았다. 제갈량은 커피를 한잔 더 내려서 책상에 앉았다. 오늘 이 책을 다 읽어야 내일 도서관에 가서 말이라도 한번 붙여볼 수 있겠지. 이러나저러나 목표가 생기면 항상 최선을 다하는 녀석이었다. 특히 이런 일이라면 그 총명한 머리가 더 빛을 발했다. 너무 어려워서 빌려 가는 사람조차 거의 없던 서적이 휙휙 넘어간다. 아무래도 여기서 모자란 정보는 연구실 데이터를 활용해야 할 것 같았다. 제갈량은 앞머리를 쓸어올리면서 책을 읽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
“어제 있던 사람은 어디 있습니까.”
“네?”
“어제 이쯤…….”
“아…아 유비요? 오늘은 여기 나오는 날이 아닌데. 일이 없으면 도와주긴 하지만, 보통은 다른 일을 할 거예요. 워낙 바쁘게 사는 녀석이라.”
“그런가요.”
“네. 이거 반납 하실 건가요?”
“아뇨. 나중에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제갈량은 어색하게 책을 감추면서 물러났다. 괜히 혼자 들뜬 거 같아 부끄러웠다. 제갈량은 혼자 있던 시간이 길어서 사람 마음을 재는 법을 몰랐다. 어디부터 사적인 영역인지 몰라서 아예 발조차 딛지 않으려 했다. 아마 사마휘가 걱정한 부분이 이쯤이 아닐까 했다. 이유 없이 잘해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앞에 떡하니 나타난 유비의 존재는 너무 컸다.
“…….”
약간 이상한 기분이었다. 책을 얼른 챙겨 넣고 밖으로 나왔다. 배가 고프진 않아서 계속 커피만 마신다. 커피를 손에 들고 천천히 걸었다. 아직도 화끈하게 달아오른 귀 끝이 그대로 느껴졌다. 누군가 이 꼴을 봤다면 큰일인데. 이런저런 걱정을 하면서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간다. 급하게 책을 볼 이유가 사라졌으니 한 번 더 읽고 천천히 반납하기로 했다.
적당히 인적 없는 곳을 찾았다. 큰 나무가 많은 풀밭 위에 덩그러니 의자가 있다. 대학이야 언제든 공사를 하니 원래는 이곳이 사람이 많이 다니는 거리일수도 있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뭐 원인이 뭐라고 해도 제갈량이 찾아 헤매던 곳이었다. 의자에 앉아서 가방을 옆에 내렸다. 급하게 읽은 책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한숨을 푹 쉬면서 가방 속을 뒤지기 위해 허리를 왼쪽으로 틀었다.
“…어.”
“…….”
“안녕?”
“…그쪽은.”
“저번에 도서관…맞지?”
“…….”
도시락을 손에 든 남자와 정면으로 눈을 마주쳤다. 아니 이렇게 대놓고 앉아있는데 어떻게 몰랐을까. 제갈량은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방금 뭘 하려 했더라.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눈을 깜박이며 웃는 사람은 분명 자신이 찾던 이가 맞았다. 하지만 그 앞에서 입술조차 뗄 수 없었다.
“뭐하러 왔어? 여신 사람도 잘 안 다니는데.”
“…….”
“밥은 먹었고?”
“…….”
“이름이 뭐랬지. 아…제갈량. 많이 못 본 얼굴인데 신입생?”
“…….”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귀 끝에서 뭉글뭉글 뭉치기 시작한 목소리는 그대로 어깨에 뚝뚝 떨어졌다. 유비는 그런 벙한 얼굴을 보면서 크게 웃었다. 너 정말 귀엽다. 보통 때라면 왈칵 화를 냈겠지만, 지금은 그런 간단한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밥 안 먹었으면 이거 먹을래?”
“…….”
“자.”
“…….”
“안 먹을 거야? 아.”
아. 유비가 뭔가를 집어서 앞으로 내밀었다. 제갈량은 순간 입을 벌렸다. 입에 뭔가 쑥 들어왔다. 입에 들어왔으니 뱉진 못하고 천천히 씹었다.
“별건 아닌데, 자꾸 커피 많이 먹으면 건강 버려.”
“…….”
“이런 거…싫어해?”
“…….”
“하긴 아직도 이런 반찬 도시락으로 싸 들고 다닌다면 웃겠다. 그렇지?”
“…맛있습니다.”
“정말?”
별거 아닌 반찬이었다. 비엔나소시지를 문어 모양으로 볶은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제갈량의 입속에선 세상 처음 먹어본 것 같은 충격이 일었다. 아직도 멍한 표정으로 소시지를 씹는 모습을 보던 유비는 웃으면서 하나를 더 권했다.
“아뇨. 그쪽 점심인데…….”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거절한다. 하지만 유비는 막무가내였고 결국 하나를 더 받아먹을 수밖에 없었다. 볼이 불룩하게 차오른 것을 뿌듯하게 바라본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리도 붙임성이 좋을 수 있을까. 아니면 타고 난 걸까. 제갈량은 처음으로 부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저런 성품은 비슷하게 흉내 낼 순 있지만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괜찮아. 많이 싸왔거든.”
“하지만…….”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먹어.”
“…….”
맛있는 것은 사실이라 잠자코 몇 개 더 받아먹었다. 어느새 도시락을 정리한 유비는 옆에 올라앉아서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제갈량은 평소처럼 매몰차지 못하고 계속 들어주기만 한다. 아무래도 머릿속이 단단히 고장 나버린 것이 분명했다.
“그랬구나. 새로 들어왔어?”
“예.”
“난 휴학을 많이 해서 신입생들은 잘 모르거든.”
“…….”
“그래도 만나서 반가웠어. 다음에 또 만나도 인사하자? 알았지.”
“네. 그러겠습니다.”
“그런데 내가 지금 아르바이트 가야 할 시간이거든. 미안 제갈량. 나중에 또 만나?”
“저기…잠깐만.”
“나 내일은 도서관에 있으니까 놀러 와! 갈게! 늦으면 혼나서 그래.”
“저기…….”
이렇게 훌쩍 떠날 일인가. 제갈량은 뻗은 손이 민망한지 헛기침을 했다. 불쑥 들어왔다 나간 곳엔 아직도 온기가 남아있었다. 제갈량은 그 온기가 사라질 때까지 의자에 앉아있었다. 혹시 이곳으로 돌아올까 싶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
“선배 그냥 나랑 같이 살아요.”
“…응?”
“우리 집 넓고 아무도 없으니까 선배 하나쯤 들어와도 상관없어요. 그냥 가족처럼 같이 밥 먹어주고 그러면 되는데.”
“내가…너희 집에.”
“싫어요?”
“아니 싫다기보다. 가족?”
“네. 그냥 같이 집에서 자고 일어나서 학교 가고. 밥 먹어주고. 그런 게 가족 아닌가요?”
“그런가…사실 나도 잘 몰라.”
“그럼 지금부터 가족의 의미에 대해 알아보는 거로 하죠.”
“뭐? 아이참. 제갈량 잠깐만.”
“그럼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
제갈량이 유비와 말을 텄다는 소문도 잠시 더 흉흉한 소문이 동기에게 퍼지기 시작했다. 저 결벽증 싸가지가 자기 집에 사람을 들였다는 소문이었다. 그 누구도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제갈량의 집이었다. 그나마 왕래하는 사람은 몇 되지 않고, 어느 정도 그들이 예전부터 알던 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는 사람이 다섯 다리 건너도 없을 것 같은 유비가 그 싸가지 집에 들어가 산다는 소문을 돌 무렵에 다들 제갈량이 스트레스로 미쳐버린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몇몇은 너무 궁금한 나머지 유비의 뒤를 밟았다. 유비는 늘 그랬던 것처럼 마트에 들려서 장을 본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일 인분이 아니고 조금 많이 산다는 점일까. 야무지게 채소의 신선도를 파악한다. 파도 한 단. 당근 다섯 개. 양파는 작은 망으로 하나. 혼자 메일 도시락을 싸 온다 해도 좀 많아 보이는 재료가 카트에 툭툭 쌓였다. 그리고 비엔나 두 봉지. 과자도 몇 개 집어넣는다. 여기까지 본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저었다. 그냥 대놓고 물어보는 편이 나을지 몰랐다. 우연을 가장해 유비 앞에 나타난다.
“어디 가냐?”
“나? 제갈량 집에 밥하러 가는데.”
“밥?”
“응. 둘이 같이 사는 조건으로 밥은 내가 하기로 약속했거든. 오늘은 할 게 많아서 빨리 가서 해야지. 내일 봐? 그리고 도서관에 연체된 책 있으면 빨리 돌려줘!”
“어…그래.”
“먼저 간다?”
양손에 잔뜩 짐을 들고 무겁지도 않은지 훌쩍 멀어진다. 운동을 배웠다더니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눈앞에서 그 꼴을 본 동기들은 바로 이 소식을 전했고, 전화기가 들들 끓었다. 소문으로 돌던 것과 그걸 직접 보는 것은 비교할 수 없었다. 도대체 제갈량이 왜 저러는지 알 수 없지만, 유비가 당장 행복해 보이니 된 걸까. 아니면 저 콩깍지가 씐 것 같은 녀석의 눈을 제자리로 돌려놔야 할까.
이 소식을 옆에서 전해 들은 주유는 웃겨서 죽을 지경이었다. 천하의 제갈량이? 정말? 깔깔 웃으면서 뒤로 넘어갈 뻔했다. 아 너무 재밌다. 그렇지? 이번 여행이 끝나면 꼭 하나하나 사마휘님께 보고하기로 정했다. 지금부터 제갈량 관찰 일지를 만들어도 재밌을 것 같았다. 분명 그 책은 연구소의 명물이 될 것이 분명했다.
**
“이건…….”
“오늘 빼빼로 데이더라고. 장 보다가 재료 사 와서 만들어봤어.”
“…….”
“이건 내 아르바이트비로 사서 만들었다? 제갈량 카드는 안 썼어.”
“선배…….”
“이런 거 안 좋아해? 그래도 같이 사니까 기념일 챙겨주고 싶었는데.”
안 봐도 뻔했다. 제일 예쁜 걸 고르고 골라서 비닐에 넣고 리본을 달았을 유비가 눈앞에 선했다. 이건 자신의 몫이지만 부엌엔 친구들 나눠줄 것이 가득하겠지. 유비는 그런 사람이었다. 정이 많고 선한 사람인지라 누구든 챙겨주지 않고는 못 배겼다. 그래서 좋아하긴 했지만 가끔 질투가 나기도 했다. 괜히 질투심 가득한 표정으로 가만히 쳐다보면 금방 걱정스러운 표정을 한다. 제갈량은 유비를 잘 알았다.
“이런 거 싫으면 다음부터 안 할게. 그래도 부엌도 다 치워놨는데…….”
“싫을 리가요.”
“정말? 계속 만들면서도 걱정했거든. 제갈량 단 거 별로 안 먹는 거 같아서.”
“그런데…….”
“응?”
그 한마디 했다고 금방 기분이 좋아진 선배의 뒤에서 꼬리가 보인다. 붕붕 흔들리는 꼬리가. 내가 몸이 허해졌나. 제갈량은 순간 생각이 많아진다. 잠깐 대화를 끊었을 뿐인데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제갈량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유비와 함께 살고 나서 감정 표현이 많아졌다. 웃고 울고. 가끔은 화를 내기도 했다. 그리고 그중에 독점욕과 질투가 피어올랐다. 예전엔 몰랐던 감정이었다. 제갈량은 자신이 이렇게 감정이 풍부한 줄 처음 알았다. 그래서 놀랐고 유비 옆에 더 붙어 있으려 했다.
“제갈량 왜?”
“이 빼빼로는 가족의 의미로 주는 건가요.”
“…….”
“아니면 다른 의미가 들어있을까요?”
“그게…무슨.”
“저희 처음엔 가족의 의미를 알아보기 위해 같이 살자고 했었습니다.”
“그랬지…근데 난 가족이 없어서…….”
“전 선배를 조금 다른 가족으로 보고 싶은데.”
“응?”
“빼빼로 데이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날이라면서요.”
“…….”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사회성이 떨어지는 편은 아니니까요.”
“아…그…저.”
“어떤가요. 선배는 날 아직도 가족이라고 여겨요?”
“…….”
유비는 아무 말도 못 한다. 빼빼로를 쥔 손이 발발 떨리는 것을 보았다. 얼굴은 화끈하게 달아오르다가 이내 홍시를 터뜨린 것처럼 빨갛게 변한다. 제갈량은 아직 선물을 받지 않았다. 눈을 수시로 깜박거리고 시선이 흔들린다.
“그…….”
“난 선배가 좋아요.”
“…….”
“그래서 지금 저 부엌에 쌓인 과자에 질투하고 있는 거고요.”
“너무해. 갑자기 이러기가 어디 있어.”
“여기 있습니다. 전 오래 참았다고 생각하는데…그러면 그저 선배가 눈치가 없는 거죠.”
“…….”
보통 제갈량이 하는 말은 다 맞더라. 옳은 소리만 하더라. 유비는 그걸 알기 때문에 쉽게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제갈량이 먼저 유비를 푹 껴안았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그대로 전달되는 것 같았다. 유비는 아직도 빼빼로를 든 채 굳어있었다. 제갈량이 좀 더 힘주어 허리를 끌어안자 그제야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며 축 늘어졌다.
“정말 너무해.”
“인내심이 먼저 닳는 사람이 움직이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래도 내가 먼저 하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죠.”
“…….”
“제 인내심을 이렇게까지 바짝 소비하게 만든 선배의 책임도 있으니, 책임지세요.”
“…….”
“저 이러는 거 처음이거든요.”
제갈량의 세상에 유비라는 표지판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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