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히삼/손책조조] 불편한 진실 007
+) NOTICE
레전드 히어로 삼국전 2차 연성입니다.
손책조조 메인으로 왕윤 짝사랑하는 조조가 소량 나옵니다.
50화 이후에 다시 만난 둘에 대한 망상을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레히삼 완결까지 보지 않으신 분들께선 네타 주의해주세요.
적당한 망상과 설정 붕괴가 언제나 함께 합니다 ㅇㅅㅇ)9
write. 환월
“…….”
“엄마가 기다리고 계셔.”
“아이…참. 그거.”
“어서 와. 오늘은 꼭 여기서 자래.”
“…….”
반쯤 끌려 들어온 손책은 할 말이 없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걸으려 했다. 하지만 바로 들키고 말았다. 손책이 무술을 익히기 위해 돌아다니다 다친 적은 있어도, 이렇게 칼에 다친 적은 처음이었다. 그런 첫째를 보는 강동관 식구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아무리 혈기가 넘치고 정의감에 불타는 녀석이라지만 이런 식으로 대책 없이 흉기를 든 범인 앞을 막아서리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알았으면 됐다. 정말 내가 걱정이 끊이질 않는구나. 상향이가 바쁘면 너라도 강동관에 붙어있어야지. 밖으로 나돌아다니는 것도 모라자 이젠 이렇게 다쳐서 들어와?”
“…….”
“동생들 보기 부끄럽지 않더냐.”
“그야…정의를 도우려다 다친…….”
“그래서?”
“아닙니다. 어머니.”
“그래.”
“…….”
손책은 아픈 티도 못 내고 땀만 뻘뻘 흘렸다. 어릴 때부터 자유롭게 살았던 터라 영 집을 불편해했다. 물론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손책은 자유로운 것을 좋아했고, 그렇게 살 방법을 조금 늦게 얻었다. 그러다 보니 가족들도 나서서 손책을 말리지 못했다.
“도와주고…싶은 사람이 있어서 그랬습니다.”
“도와주고 싶은 사람? 오빠. 그게 무슨 말이야.”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얼굴을 보면 꼭 아는 사람 같은데.”
“…….”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 아는 사람 같았어요. 그래서 좀 더 가까이서 지켜본다는 것이 그만…….”
“형이 또 아픈가 보네.”
“권아. 너.”
“저것도 병이야. 안 그래? 누나?”
“이 녀석이.”
옆에 앉아있던 막내는 웃으면서 형을 놀린다. 짐짓 무서운 표정을 지어보지만 손책은 가족에게 한없이 약했다. 손책이 그렇게도 보고 싶어 했던 가족 풍경이고, 지금으로선 누가 뭐라 해도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지금 손책의 머릿속엔 작은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중요한 사실을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짐작할 수 없으니 이렇게 이상한 소리만 할 수밖에 없었다.
“형이 기적적으로 살아나서 그런가.”
“…….”
“가끔 이상한 소리를 하더라.”
“권아. 지금 뭐라고 했지?”
“응? 뭘?”
“내가 기적적으로 살아나서…….”
“응. 형 그때 큰일 날 뻔한 거 생각 안 나?”
“…….”
“누나. 형이 이상한 거 같아. 그렇지?”
“그러게. 엄마…다시 검사 좀 받아봐야 하는 거 아니야?”
“…다들 미안하다.”
“응?”
손책이 벌떡 일어난다. 아. 짧은 신음과 함께 옆구리를 쥐었다가 놓았다. 아직 상처도 제대로 붙지 않은 몸을 저렇게 함부로 움직이는 건 무슨 생각인지. 한숨을 쉬기가 무섭게 손책이 뒤돌아서 뛰어나갔다. 아니 뛰진 못하고 빠르게 걸었다.
사실 무술을 익힌 손씨 가문의 사람이라면 쉽게 잡을 수 있을 만한 속도였다. 하지만 손책이 저럴 땐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게다가 말려도 들을 사람도 아니었다. 누가 저런 성격으로 키웠는지. 다친 곳이 더 벌어지지는 않을까. 걱정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엄마가 잘못 키운 거 같아.”
“맞아.”
“이 녀석들이.”
“그래도 건강하니까 다행이야. 정말 큰일 나는 줄 알았어.”
“그건 그렇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권이가 말한 대로 기적이겠지?”
막내는 벌써 흥미를 잃고 게임기만 만지작거렸다. 손책이 나갔으니 한참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 익숙한 강동관 식구들은 하나둘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래도 몸 성히 돌아오겠지. 이번에 다친 것과는 별개로 함부로 몸을 해칠만한 일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강동 관은 손책을 이런 식으로 믿었다. 그리고 손책은 그런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세상에.”
“손책님께서 나가시다가…….”
“오늘부터 그 믿음은 없었던 걸로 할래. 엄마.”
“그래. 나도 심각하게 고민해봐야겠구나.”
“무술 바보.”
멀쩡하게 보이려 노력했던 것과 달리 몸은 솔직했다. 어지럽다고 몇 번 말하던 것이 도졌는지 걸어가다 그대로 쓰러지려던 것을 옆에서 붙잡았다. 손책의 병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고, 이렇게 된 이상 손책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대로 보낼 수 없었다. 사랑하는 가족이 병으로 쓰러져 목숨은 부지할 수 있지만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수 있다는 소견을 받은 기분이 어땠는지는 말로 설명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눈을 떴으니 강동관 식구들이 싸고도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어서 방으로 옮기거라.”
“네.”
“난 교수님 부를게.”
“그래. 상향이는 주치의 연락하고, 권이는…….”
“난 형 옆에 있을래. 형이 내가 옆에 있으면 힘 난다고 했다며.”
“그렇게 하렴.”
손권은 바로 손책이 사용하는 방으로 따라 올라갔다. 잠시 조용하다 싶었다. 하지만 손책의 상태가 갑작스레 나빠지자 부산한 움직임이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혹시나 겨우 얻은 기적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까 봐.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모두 불안함을 지고 살았다. 손책의 몸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심지를 길게 늘여놓았을 뿐 끝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형은 정말 바보라니까.”
“…….”
“내가 옆에 있을게요.”
“알겠습니다. 손권 도련님.”
“정말 무술 바보에, 남 생각만 하고. 그래서 대단하지만.”
“그럼 혹시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 주세요. 전 그만 나가보겠습니다.”
손책이 조용한 것을 보면 늘 걱정이 많았다. 손권은 이럴 때마다 게임기를 들고 자리를 지켰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가만히 형을 내려다보니 흐릿하게 움직이는 이불이 눈에 들어왔다. 다행히 숨은 쉬고 있었다. 어디선가 이런 비슷한 상황을 겪은 적이 있었다.
‘형이 한두 번 쓰러진 것도 아니고. 한숨 자면 괜찮겠지.’
어쩐지 믿음이 생겨서 그리 무섭지 않았다. 물론 예전에 손책이 쓰러진 것은 큰일이 맞았다. 집안이 발칵 뒤집히다 못해 마음 정리를 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소견까지 들었다. 그렇게 강하고 당당하던 남자는 죽을 것 같이 하얗게 질려서 내내 침대에 누워있었다.
하지만 기적이 일어났다. 갑자기 호전되기 시작한 몸 상태를 시작으로 다시 의식을 회복하지 못할 수 있다는 소견은 받은 남자가 눈을 떴다. 처음부터 씩씩하게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처음을 눈을 떴다가 감았다. 다음 날은 손가락을 조금 움직였고, 일주일이 지나자 희미하지만,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차곡차곡 건강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형은 괜찮을 거야. 난 믿어.”
“…….”
“저번에도 꼭 그랬잖아. 누군가의 생명을 나눠 받은 것처럼.”
“…….”
“나아서 빨리 같이 무술 연습하면 좋겠어.”
손권은 조금 더 자랐다. 예전 같았으면 보기도 싫다고 모른 척했을 녀석은 의젓하게 침대 옆을 지키고 있었다. 곧 손상향과 함께 도착한 주치의가 급히 뛰어들어 들어왔다. 누나는 동생을 챙겨서 밖으로 나간다. 옆에 있겠다고 몇 번이나 이야기했지만, 누나를 이길 수 없었다.
“선생님.”
“네?”
“형…괜찮겠죠?”
“물론입니다.”
“네. 알겠어요.”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 계세요.”
“…….”
“권아. 어서.”
“응.”
더는 떼를 쓸 수 없었다. 방문이 닫히기 직전까지 눈을 떼지 못하던 손권은 누나의 손을 잡고 복도를 걸었다. 형을 믿지만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오늘은 꽤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
주치의가 돌아가자 손책의 방은 조용하기만 했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상주하는 인원이 한 명 있었지만, 밤이 깊어갈수록 쏟아지는 잠을 참을 수 없는지 꾸벅꾸벅 조는 횟수가 많아졌다. 수면 등 하나만 켜둔 방 안엔 어둠에 섞인 달빛이 흘러들어왔다. 어딘가 푸른빛을 머금은 달빛은 그대로 부스러져 이불 위에 쌓이기 시작했다. 손책은 여전히 죽은 듯 누워있었고, 꼭 시간이 멈춘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주군.”
“…….”
“아직도 이러고 계시기예요? 이젠 건강해지겠다고 저랑 약속하셨잖아요.”
“…….”
“제가 주군의 심장이 되었는데, 왜 이렇게 누워계시는지 알 수 없습니다.”
“…….”
“정말 주군은 저 없인 아무것도 못 하시는 군요.”
손책은 붕 뜬 의식을 간신히 잡고 있었다. 눈을 떴지만, 초점이 맞지 않아 어지러웠다. 얼굴에 뭔가 한 겹 덮은 것처럼 흐릿하게 보이는 시선에 누군가가 잡혔다. 아는 사람인 것 같지만, 알아볼 수 없었다. 익숙하게 침대에 걸터앉은 사람은 금방이라도 달빛에 스며들어 사라질 것 같았다.
“주군.”
“…….”
“오랜만에 다시 뵙습니다.”
“…….”
“이젠 그만 아프셔야죠. 왜 이렇게 자꾸 절 슬프게 하시는지. 신선 주유 정말 모르겠습니다.”
“…….”
“어차피 잠에서 깨면 기억도 나지 않으시겠지만, 다시 만나서 행복했습니다. 주군.”
“…….”
“그럼 건강하세요.”
“…유.”
“조조 님과 유비 님께도 잘 해주시고요. 이러나저러나 같이 드림 배틀을 했던 사이 아닌가요.”
“…주유.”
“예, 신선 주유 여기 있습니다.”
“…….”
“이름이라도 들으니 기분이 좋네요.”
이젠 인간계에 있어선 안 될 존재였다. 애초에 드림 배틀이 끝난 이후 소멸될 것이 분명했고, 대신 손책의 생명이 되겠다고 정한 것도 주유였다.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공간에서 시간은 조금이라도 더 있으라는 듯 천천히 흘러갔다. 하지만 실체가 없는 것은 오래 있을 수 없기에 신선은 조용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차라리 손책의 꿈속에 나타났으면 좋았을 텐데. 약간 아쉽긴 했지만 나쁘진 않았다.
“…주군 안녕히.”
한번 사라진 신선이 다시 나타날 수 있는 경우가 있을까. 주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이번 드림배틀이 끝난 이후 뭔가 달라진 점이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했다. 제갈량에게 직접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 답답했다. 아니 지금 이렇게 손책을 바라보고 있는 것 자체가 자신이 착각을 하는 상황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돌아온 침실은 조용했다. 달은 구름 속으로 파고들면서 잠시 모습을 감췄다. 한결 편해진 표정의 손책은 여전히 깊이 잠들어 있었다. 아까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던 것은 꿈일지도 모른다. 달이 뜬 밤엔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곤 했다.
푹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거예요. 주군. 그 한마디가 흐릿하게 들린 이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손책의 손끝이 목소리를 따르는 것처럼 몇 번 움직이긴 했지만, 그 이후 큰 발작은 없었다. 상처가 덧나지도 않았고, 병이 재발하지도 않았다.
**
“…….”
조조는 피곤함에 지친 몸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아무도 없는 집은 쓸쓸하기만 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이곳에 머문다는 것은 사치이리라. 조조는 이 외로움을 자신이 짊어져야 할 죄 정도로 여겼다. 애초에 친하게 지낸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러니 큰일이 있고 난 뒤 더는 자신과 함께 다닐 사람이 없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직장 동료는 그저 큰일을 안타까워하고 조조에게 약간의 편의를 봐주는 것 외엔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조조는 그 정도도 나름대로 감사하고 있었다. 멋대로 경찰을 뛰쳐나갔던 새파란 신입이 복귀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노력 덕분 아니었는가. 하지만 이곳에 돌아올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텅 비어버리는 기분을 느끼는 것을 참을 순 없었다.
“…몇 년째 이런 곳이었는데.”
집에 사람을 들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언제나 이런 분위기가 당연했다. 집안과 연을 끊다시피하고 나온 곳이라 굳이 자랑할 만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이상하게 가슴 한구석이 싸하게 아려왔다. 조조는 크게 한숨을 쉬며 가슴에 쌓은 것을 털어내려 했다.
“…….”
그러는 것도 한순간. 갑자기 몰려온 피로가 온몸을 두들기기 시작하자 피곤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차라리 이럴 땐 빨리 잠이 드는 편이 나았다. 조조는 거실에 불도 켜지 않은 채 비틀비틀 침실로 향했다. 어차피 침실로 들어가면 아무도 남지 않을 공간이었다.
“…….”
아무래도 체력이 떨어진 것 같았다. 이럴 때 옆에 누군가 있으면 조금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이미 아무도 남아 있지 않으니 차라리 생각조차 하지 않는 쪽이 나았다. 시간이 흐르면 밤은 지나가고 아침이 온다. 그 잠깐의 우울함조차 참을 수 없다고 믿지 않는다.
“…아.”
머리까지 울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침대는 푹신했다. 몸이 피곤하니 정신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차라리 한 번에 잠이 들길. 이유를 알 수 없는 불면증은 사양이었다. 꿈도 꾸지 말았으면. 조조의 소원은 이 정도 뿐이었다.
“…….”
커다란 침대에 웅크린 듯 누운 남자는 말이 없었다. 이불을 둘둘 만 채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유난히 침대가 넓고 비어 보이는 것은 착각일까.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잠을 가득 머금은 눈만 깜박거린다. 따뜻한 이불을 덮고 있어도 한기가 돌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꿈은 늘 사나웠다.
조조의 팔자가 그런 것인지. 아니면 마음이 허한 것인지. 원인을 하나로 짚어낼 순 없지만, 조조가 이 집에서 살기 시작한 이후로 좋은 기분으로 잠에서 깬 적은 거의 없었다. 늘 일어나면 머리가 아팠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꿈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이 멍청해서 살 수가 없었다. 분명 기억해야 하는 것인데 촛불이 꺼지는 것처럼 한순간 사라져 버린다.
“…여긴.”
안개가 가득한 길 가운데 선 남자는 멍한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꿈인 것은 알 수 있었다. 어떻게 알아차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정도 반복된다면 알기 싫어도 알 수밖에 없었다. 꿈속이란 사실을 알아차렸으니 이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정해야 했다. 앞으로 걸을까. 그대로 멈춰있을까. 주변을 둘러봐도 도움을 줄 만한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꿈이 늘 쓸쓸했던 이유가 궁금했다.
“내 꿈은 늘 이랬지.”
시간이 가야 꿈에서 깰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주변을 가득 채운 안개가 옷을 축축하게 적셨다. 축축 늘어지는 몸이 점차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자 계속 한 자리에 서 있을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여야 이 무게를 털어버릴 수 있을 듯했다.
일단 발걸음이 닿는 대로 계속 걷기 시작했다. 걷다 보면 이 지겨운 꿈의 끝이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적어도 누군가를 만날 수도 있겠지. 아니 꼭 만나고 싶었다. 이제 꿈에서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너무 많은데 이런 꿈엔 나타나지 않을 것 같았다. 마음이 쓸쓸해졌다.
“…선배.”
보고 싶은 이름이 흘러나온다. 어쨌더라. 선배가 그때 한 이야기가 뭐였을까. 뭐였지. 칠보 검은. 여기까지 생각하면 머리가 쪼개지는 것처럼 아팠다. 가슴 아프게 마음에 묻은 사람은 야속할 정도로 보이지 않았다. 꿈속에라도 보이면 좋을 텐데.
“…주군.”
“…….”
“생각보다 더 강한 사람일 줄이야. 솔직히 몰랐습니다.”
“…….”
“그래서 결국 이렇게 되었지만.”
“넌…….”
“기억조차 못 하는 한낱 인간의 꿈에나 나타날 수 있다니. 누가 들으면 웃겠군요.”
“…….”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그저 아직도 살아있나 보러 온 것이니까요.”
“…….”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쪽이 차라리 낫겠군요.”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이 독설을 퍼붓는다. 그 말을 들으니 심장을 꽉 붙잡고 있던 것이 반응한다. 하지만 제대로 된 진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는 걸까. 눈앞에 보이는 저자는 또 누구인가. 꿈속에서조차 혼란스러웠다.
“드림배틀에서 우승만 했어도…….”
“…….”
“이러진 않았을 텐데. 그깟 유비와 손책이 뭐라고.”
“뭐?”
“이런.”
“도대체…뭐라고.”
“여기까진 알면 곤란한 사항이군요.”
“…….”
“평생 그렇게 답답해하면서 살길 바랍니다. 주군.”
“…….”
어느새 쑥 다가온 손이 조조의 얼굴을 잡고 뒤로 밀었다. 아차 하는 순간 균형이 깨졌고, 대비할 틈도 없이 넘어졌다. 고통이 느껴질 것을 대비해 눈을 질끈 감았지만, 오히려 끝없는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있었다. 아차. 급히 손을 뻗었지만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분명 걸어온 길인데 어느새 천길 절벽으로 변했다. 차라리 이대로 떨어지면 모든 것이 끝날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어쩐지 마음이 편해진다. 떨어지다 보면 끝이 있을 테니 그것을 기다리는 편도 나쁘지 않았다. 답답함이 가시지 않을 거면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길 빌었다. 그렇게 한없이 떨어지던 그 순간 소리도 내지 않고 다가온 검은 어둠이 조조를 집어삼켰다, 끈적끈적한 어둠이 온몸을 잡아먹는다. 꼭 깊은 늪 한가운데 떨어진 것 같았다. 천천히 가라앉는 기분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이대로 끝이길. 조조는 생각보다 많이 지쳐있었다. 기억이 뭉텅 잘려나간 것이 이리도 힘들 줄은 미처 몰랐다. 버틸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이 녀석.”
“…….”
“언제까지 누워 있을 거냐.”
“…….”
“그만 일어나거라. 이 녀석이 참.”
“…….”
“태오!”
“…….”
“일어나! 어서!”
그 순간 머릿속에서 불꽃이 튀었다. 순간 입안에 검은 어둠이 쿨렁 밀려들어 왔다. 숨을 쉬다가 그대로 틀어 막혀서 제대로 호흡을 할 수 없었다. 꺽꺽 넘어가는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면서 손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지만 꼭 품에 안겨있는 것처럼 편하던 느낌은 간 곳이 없었다. 허. 잠깐. 억지로 숨을 쉬려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답답해졌다. 밖으로 나가고 싶은데 손을 휘저어봐도 잡히는 것이 없다.
“허억.”
조조가 벌떡 일어났다. 컥. 숨이 왈칵 몰려나왔다. 새빨갛게 충혈된 눈이 뻑뻑해서 제대로 뜨는 것조차 어려웠다. 간신히 몇 번 눈을 깜박이자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눈물에 허한 마음이 섞여 나오는 것처럼 심장이 서늘해졌다. 방금까지 물속에 빠졌던 것처럼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도대체 무슨 꿈이 이렇게 사나운지. 꿈에 나타난 사람이 누군지. 흐릿하게 떠오를 뿐이었다.
“…또 비슷한 일의 반복인가.”
분명 자신을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뭐였지. 날 누구라 불렀더라. 익숙한 얼굴이 익숙한 듯 낯선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낯선 사람은 익숙하게 자신을 불렀다. 머릿속이 복잡해지다 점차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호흡이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다.
부들부들 떨던 손을 멈추기 위해 괜히 이불을 움켜쥐었다. 차갑게 식은 공기가 어깨 위에 쏟아졌다. 끙끙거리며 몸을 웅크렸다. 유비. 손책. 왕윤 선배.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분명 익숙한 이름이 입안에 빙글거리며 맴돌기만 했다. 딱 한 번만 발음하면 이 답답하게 꽉 막힌 기억이 모두 살아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러지 못했다.
***
“이건 예상치 못한 일이군요.”
먼 곳에서 세상 사람을 지켜보는 신선이 입을 열었다. 드림 배틀이 끝나고 승자가 결정되면 그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그간의 기억을 잊는다. 드림 배틀도 그에 관계된 모든 것을 잊어버린 채 자연스럽게 예전 생활도 돌아간다. 드림 배틀로 달라진 미래가 있다면 어느 정도 뭉뚱그려서 이해할 수 있는 범위로 맞춰가는 것이 순리였다.
“이건 옥새의 의지입니까. 아니면…….”
홀로 남은 신선은 이 상황이 제법 흥미로웠다. 그래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의 주군이었던 유비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눈길이 가는 쪽은 나머지 두 군주였다. 그것도 신선까지 붙어있던 유력한 우승 후보. 처음 봤을 땐 모든 것을 잊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간간이 소원을 빈다. 물론 빌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둘의 성정을 잘 아는 신선은 한동안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어차피 신선이 인간계에 사는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그래도 눈길이 가면 지켜볼 수는 있었다. 인간 구경은 이제 질릴 만큼 했다고 생각했는데, 희한하게 엮이는 둘을 보니 호기심이 솟았다. 제갈량은 자신이 이상해졌다며 혼자 웃곤 했다.
“그저 이번 드림 배틀 우승자의 소원에 의한 전환점인가요.”
옥새 관리자는 똑똑하고 총명했다. 모든 경우의 수를 찬찬히 따져보았다. 유비의 소원이 일반적이지 않음은 잘 알고 있었다. 삼백 년마다 한 번씩 드림 배틀을 열어 가장 큰 꿈을 모으던 방식을 비틀은 덕분일지도 몰랐다. 이젠 드림배틀이 영원히 없어지게 되어서 이런 식으로 세상이 흐를 수도 있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생각이 미쳐도 찝찝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그것도 아니라면.”
제갈량은 그저 웃었다. 옥새의 관리자가 되면서 마지막 남은 지식의 문을 열어버린 것처럼 수많은 정보를 받아들였다. 워낙 총명하던 신선은 그런 것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옥새의 모든 지식을 흡수하고 이해해도 정확히 집어낼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그저 기적일 수 있겠죠.”
“옥새여. 마더 컴퓨터여. 당신의 생각은 어떠하신가요. 현 옥새의 관리자가 전대의 관리자에게 묻습니다.”
돌아올 대답이 없다는 정도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성적인 제갈량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손책과 조조 두 사람만 겪는 어려움이라면 둘 사이의 공통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제갈량이 기적이라고 하는 부분은 신선이 분명했다. 주유는 자신을 희생해 손책을 살렸고 조조는 사마의에게 몸을 빼앗겼다. 둘 다 신선과 맞닿은 부분이 있으니 그 무의식의 기억이 자꾸 둘을 서로 바라보게 하는 걸 수도 있었다. 같은 경험을 한 사람끼리 드림 배틀로 인해 어그러지고 부족한 부분을 찾기 위해 얽히는 거라면, 옥새라도 막을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옥새의 인도일지니.”
그 한마디를 한 후 제갈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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