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간신히 익숙해진 길을 따라 나가는 것은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물론 럼로우의 의지를 그다지 상관없었다. 무슨 말로 포장하려 해도, 럼로우는 이젠 완전히 궤멸한 하이드라의 끄나풀이었다. 그리고 윈터솔져는 그 옆에 붙어있던 불쌍한 전쟁포로였으며, 캡틴 아메리카는 늘 그랬던 것처럼 당당했다.
“…….”
“자네는 데리고 가지 않으려 했어.”
“어련하시겠습니까.”
캡틴의 성정을 잘 아는 남자는 굳이 좋은 말로 할 것은 살살 긁어본다. 캡틴 아메리카는 언제나 진중한 사람이었지만, 럼로우와 버키 앞에 서면 조금 달랐다. 안 그런 사람이 예민하게 굴면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걸 아는 남자는 계속 말꼬리를 빙빙 돌리며 대화를 이어갔다.
“하지만 저 없인 아무것도 못 하시지 않습니까.”
“…….”
“쉴드가 있었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말이죠.”
“럼로우.”
“예?”
“자네는 내가 언제까지 참을 수 있나 시험을 하는 것 같아.”
“캡틴이야말로 그러는 것 같은걸요.”
“…뭐?”
“그걸 꼭 말로 해야 압니까?”
“…….”
하긴 누가 봐도 둘은 불편한 사이가 맞았다. 물론 이 상황을 주도하는 것은 캡틴이었다. 다른 사람이 옮긴다는 걸 극구 거절하고 직접 버키를 안았다. 지금까지 버키를 도와준 사람은 완전히 열외된 상태였다. 캡틴, 아니 스티브가 이렇게 럼로우를 경계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지금처럼 이런 식으로 오면 결국 터지기 마련이었다.
“지금까지 저 녀석 먹여 살린 게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
“내가 그 지옥 같은 곳에서 손수 주워 와서 먹이고 씻겼습니다.”
“…….”
“이제야 간신히 찾아온 주제에 너무 뻔뻔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하이드라가 할 말은 아니지.”
“…….”
“너희만 없었어도 우리는 이렇게 되지 않았어.”
“제가 있어서 둘이 만난 거겠죠,”
“…….”
럼로우가 낮게 으르렁거린다. 물론 그렇다고 자신이 하이드라 앞잡이 노릇을 했다는 것을 부인하겠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말이다. 자신이 이 불쌍한 백치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는 확실히 하고 싶었다. 따지고 보면 저기 안겨있는 백치도 그대로 죽어 자빠질 수 있는 놈이었다. 반쯤 동정이긴 했지만 그런 녀석을 먹이고 씻겨서 사람답게 만들어 놨더니 갑자기 친구라면서 찾아온 사람이 빼앗아간다.
친구였으면 진작 찾으러 왔어야지. 할 거 다 하고, 친구는 고생이란 고생은 다 시켜놓은 다음 이렇게 오면 뭐가 되는 걸까. 남자는 점점 삐뚤게 기울어진 생각만 깊어간다.
“…….”
럼로우는 제법 소유욕이 있는 남자였다. 따지고 보면 캡틴을 처음 만났을 때 당장 목이 떨어지지 않은 것을 감사히 여겨야 할지도 몰랐다. 아마 버키의 거처를 먼저 찾고, 자신을 만났다면 틀림없이 캡틴 아메리카 손에 죽었을 것이다. 또 이렇게 생각하기엔 이미 죽음과도 같은 지옥에서 헤쳐 나온 경험이 있었다. 그러니 죽는 건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미련이 있다면 저 불쌍한 무기이겠거니 했다. 이러나저러나 백치는 참 도움이 안 된다.
“그 녀석은 일어나자마자 그럴 겁니다.”
“…….”
“저 없인 살 수 없다고요.”
“…….”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시죠. 전 사실만 전달해드리는 거니까.”
“…….”
“예쁜이가 곧잘 그런 말을 하곤 했어요.”
“…뭐?”
“예쁜이요. 거기 캡틴이 안고 있는 사람.”
“…….”
“우리. 둘. 사이에 애칭이죠.”
“…….”
럼로우는 일부러 캡틴을 도발한다. 그런 빤히 보이는 수에 흥분하는 캡틴도 그렇지만, 그걸 알고 이런 식으로 움직이는 남자도 대단했다. 그리고 가늘게 떨리는 손을 보며 계속 말을 이어간다.
“예쁜이가 그러더군요. 럼로우. 난 너없이 살 수 없어.”
“…….”
“없으면 죽을거 같아. 그렇게 말입니다.”
“…….”
“매일밤 그러건데. 밤에 칭얼거리는 버릇은 캡틴이 만들어 두셨습니까? 별로 안좋은 버릇이라 생각하는데.”
“그만 해.”
결국 캡틴이 먼저 폭발한다. 하지만 럼로우는 그 정도로 물러날 사람이 아니었다. 좀 더 긁을 수 있으면 한번이라도 더 물고 늘어지고 싶었다. 브록 럼로우는 그런 남자였다.
“뭐 이제 필요 없을 거 같으면 죽이시던가요.”
“…….”
“하지만 제가 뒈진 이후에 저 녀석이 미쳐가도 전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것만 알아주면 됩니다.”
“…….”
“그럼 편히 기쁜 마음으로 죽죠.”
“…….”
“저도 이제 슬슬 사는 것이 지겹고 힘드니까 하는 말입니다,”
“…럼로우.”
“이런 상황이 엿 같으시면 미리 찾으러 오셨어야죠. 아니면 형질을 잘 가지고 태어나던가.”
“넌 정말.”
“안 그래요?”
“…….”
스티브는 여기서 럼로우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왜 이렇게 이성을 잃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물론 버키에 관한 일이라면 다소 무리한 일이라도 자꾸 밀어붙이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품엔 버키가 있었고, 조금 마르고 아픈 것 외엔 외상은 없다. 이제 더는 헤어지지 않아도 괜찮은데, 왜 이렇게 기분이 복잡한지 알 수 없었다.
“지금은 버키의 안전이 먼저니 내가 아무 말 하지 않겠지만.”
“…….”
“그때 가선 확실하게 상황 설명을 해야 할 거야.”
“여부가 있겠습니다. 하라는 대로 해야죠.”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걸 말해야 해. 물론 하이드라에 관한 정보도 말이지.”
“굳이 듣고 고통스러워하고 싶다면야 하나도 남김없이 말하죠.”
“자넨 말이야.”
“예?”
럼로우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꾸민 표정으로 웃었다. 물론 잔뜩 오그라든 피부가 쭉 땅겨지면서 표정이 이상해졌지만,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못 봐줄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캡틴은 아닌 모양이다. 그런 표정을 보고 짧게 혀를 찬다.
“남의 기분을 긁는 재주가 있군.”
“예. 뭐 먹고 사려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더라고요.”
“…….”
마지막까지 이런다. 스티브는 괜히 버키를 한 번 더 추슬러 안았다. 여전히 열이 올라 따끈따끈한 몸이 두꺼운 유니폼 너머 느껴진다. 듣기론 이렇게 체온이 높은 몸은 아니라고 했다. 그만큼 걱정이 된다. 물론 럼로우가 보라고 하는 행동이기도 했다.
두 남자는 나잇값을 못하고 또 기 싸움을 시작한다. 쉽게 풀릴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서로 져주긴 죽기보다 싫어한다. 이런다고 좋은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둘은 내내 버키를 사이에 두고 으르렁거린다.
**
“…뭐라고 하셨죠?”
“복합적인 경우라고 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다른 쪽이 좀 심하긴 하지만 말입니다.”
“…….”
“이 정도로 크게 반응이 올 만한 상태가 아닌데, 아무래도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실히 알아야 뭐라고 진단을 내릴 것 같네요.”
“…….”
“그래도 진통제와 다른 약을 처방했으니 푹 자고 일어나면 확실히 좋아질 겁니다.”
죽은 듯 자는 버키는 눈꺼풀조차 움직이지 않는다. 가늘게 오르내리는 이불로 간신히 살아있음을 알려온다. 열은 쉴드에 도착하고도 내내 내리지 않았고, 정신도 차리지 못해 스티브는 생가슴을 앓았다. 금방이라도 녹아 없어질 것 같은 친구를 품에 안고 놔주지 않으려는 것은 간신히 설득했다. 두려운 마음도 알지만, 끌어안고 있기만 해선 될 일이 아니었다.
단단히 엮여있던 손깍지가 간신히 풀어진다. 스티브는 내내 버키를 품에 안고 움직이지 않았다. 꼭 새끼를 지키는 야생동물 같았다. 그 진중하고 바른 캡틴 아메리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로운 모습에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만다. 간신히 손깍지를 풀었더니, 이젠 자기가 다 봐야 한다면서 병실에 따라 들어왔다. 그리고 지금까지 의사 옆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고집이 센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정말 몰랐다.
“옛날 일이라.”
“예?”
“제가 알아오죠. 버키가 빨리 깨어나면 좋겠군요.”
“그렇네요. 이렇게까지 몰린 사람을 본 적 없어서…….”
의사는 가늘게 말끝을 흐렸다. 스티브는 강한 이성으로 간신히 화를 억누르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버키가 누워있는 병실을 나오자마자 잔뜩 화난 발걸음으로 뚜벅뚜벅 걷기 시작했다. 한 걸음 두 걸음 걸을수록 표정이 점점 무서워진다. 당장 누구 하나 잡아 죽일 것 같은 표정을 숨기지 못한다. 주위에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아마 이 꼴을 본 사람들은 설설 귀신을 본 것처럼 피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 모습으로 찾아간 곳은 럼로우 구금실이었다. 살려준다고 했지. 편하게 먹고 자게 둔다는 소리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나마 쉴드 내 구금실이라 고문은 없었다는 점이 다행일까. 몇 겹이나 되는 보안 장치를 열고 들어가자 손에 수갑을 찬 채 침대에 대충 걸터앉아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캡틴이 여기까지 무슨 일로 행차를 하셨을까.”
“…….”
“뭐 이런 꼴 구경하러 오셨습니까?”
럼로우가 두 손을 들고 흔들었다. 하지만 스티브는 그 모습을 보며 웃지 않았다. 허 참. 럼로우는 대놓고 한숨을 쉰다. 눈치가 빠른 남자는 무슨 용무로 캡틴 아메리카가 찾아왔는지 짐작한다. 그리곤 또 이상한 표정으로 웃어버린다.
“…….”
“물어볼 게 있으면 제대로 말해요. 캡틴.”
“…….”
“나도 이런 취급 받는 거 썩 좋아하지 않으니까.”
“…….”
“멍청하고 귀여운 예쁜이에 대한 말이면 내가 할 말이 아주 많은…….”
그 순간 눈앞에 손이 불쑥 다가온다. 그대로 목을 잡고 벽에 밀어버린 캡틴은 표정조차 변하지 않았다. 럼로우는 꺽꺽 넘어가는 목소리로 웃으면서 간신히 캡틴의 손을 툭툭 두드린다.
군화를 신고 오는 사람은 모두 무서웠다. 뚜벅. 뚜벅. 무겁고 거친 굽이 바닥에 닿으면 소름 끼치는 소리를 만들었다. 그 소리가 멀리서 들리기 시작하면 눈을 질끈 감았다. 귀를 막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간신히 숨만 내쉬는 불쌍한 무기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조만간 닥쳐올 고통을 준비한다.
“…….”
늘 여기서 그대로 지나가면 좋을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빠르고 급하게 걷던 발자국이 뚝 멈추면 항상 무거운 철문에 열쇠를 집어넣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열쇠가 돌아간다. 철컥. 자물쇠가 열리자 몇 겹이나 단단히 묶인 쇠사슬이 풀어진다. 그러면 무겁고 녹슨 문이 천천히 열린다. 냉골 같은 방에 방치되어있던 녀석은 최대한 구석으로 몸을 숨기려 했지만, 사각지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
“솔져?”
“…….”
“덜 녹았군.”
“…….”
세뇌 상태가 아닌 윈터 솔져는 늘 겁이 많다. 고통에 대한 공포에 푹 잠겨 있다. 하긴 이젠 죽어버린 이름인 버키 반즈였을 때도 그랬을 것 같았다. 전쟁에 나온 것도 원하지 않았다. 다 죽어가는 외팔이를 주워와서 몇 번이나 뇌를 갈아버려도 마지막 본성을 지우지 못했다. 세뇌 중일 땐 멀쩡하게 말을 듣다가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곧장 발작을 일으킨다.
“솔져. 총장님이 부르신다.”
“…….”
“끌어내.”
“…….”
하지만 지독할 정도로 끔찍한 고문에서 살아남은 인간적인 면은 하이드라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눈앞에 보이는 군화들도 그랬다. 버키, 아니 윈터솔져가 어떤 것을 두려워하던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목적만 달성하면 그만이었다.
해동이 덜 된 몸에선 겨울 냄새가 난다. 그런 남자를 양쪽에서 겨드랑이에 팔을 끼우고 일으킨다. 제대로 굽혀지지 않은 발목 관절 때문에 발끝이 툭툭 바닥에 걸린다. 그 상태로 끌고 가기 시작하면 윈터 솔져 뒤로 긴 물기가 남았다.
“…….”
“늦었군.”
“좀 문제가 있었습니다.”
“또 그 일이겠지. 정말 지독하군. 이 정도면 아무 생각이 나지 않을 텐데.”
“그렇습니다.”
“하여튼…이놈이고 저놈이고.”
날카로운 눈매가 조용히 돌아간다. 억지로 끌어다 의자에 묶어둔 무기는 좀처럼 진정할 줄을 모른다. 크게 부푸는 가슴은 자꾸 헛숨을 들이쉰다. 온몸에 연결된 기계 장치는 불안한 상태를 가감 없이 보여줬다. 우는 법을 잊어버린 녀석은 표정조차 모호하다. 우는지 무서워하는 것인지. 도통 알아챌 수 없었다.
“참 손이 많이 가는 무기야.”
“…….”
“저번에 사용하고 나서 가이드가 출장 중인 터라 그대로 얼렸더니, 좀 불안한 모양입니다.”
“가이드? 어디 갔지?”
“캡틴과 함께 잠입 수사를 나서는 바람에.”
“…아 그랬군.”
“…….”
무기는 말이 없다. 이 의자에 앉아 있으면 모든 말이 저 멀리서 들리는 것 같다. 들어봤자 전혀 도움이 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저 위에서 결정하면 그만인지라 선택권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늘은 그저 조금 덜 아팠으면 했다.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속눈썹에 불안함이 주렁주렁 열린다.
“솔져.”
“…….”
“가이드가 없지만, 이번에도 잘 해주리라 믿는다.”
“…….”
“솔져?”
“…….”
“네가 하는 일은 모두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야. 비록 지금 고통이 심하겠지만, 돌아오면 가이드를 바로 붙여주마.”
“…….”
“대답해.”
“…내가.”
“내가?”
“여기는…어디지.”
안타까운 무기는 자꾸 짚어서 안 될 곳을 짚는다. 이미 망가진 뇌가 계속된 리셋으로 제대로 작동을 하지 못하니 최근 기억은 모두 잊어버린다. 그러니 자꾸 한 줌 남은 과거의 파편을 그러쥔 채 되물어 보곤 한다. 물론 그러면 꼭 아픔이 뒤따른다.
“…….”
결국, 매를 번다. 뺨을 맞고 기계에 팔이 구속된 채 뇌를 다시 한 번 갈아버린다. 물론 이렇게 하면 가이드가 없어도 센티넬 능력을 뽑아 쓸 수 있다. 아마 무기가 순순히 명령에 따랐어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백치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또 한 번 마우스피스를 물고 꺽꺽 소리를 지를 뿐이었다.
*
“…….”
센티넬 능력을 발휘하면 밤을 뛰노는 맹수만큼 눈이 좋아진다. 하지만 그것도 가이드가 내내 붙어있어서 컨디션을 조절해 줄 때 이야기였다. 한계까지 몰린 녀석은 결국 순간적으로 눈이 멀어버렸다. 발작을 일으키며 땅을 뒹구는 녀석에겐 동물에게도 쓰지 않을 것 같은 독한 마취제가 푹푹 꽂힌다.
“…….”
“저쪽으로 옮겨. 그리고 빨리 가이드 수배해서 데려와.”
“알겠습니다.”
완전히 늘어진 녀석을 독방에 밀어 넣는다. 한참 그렇게 정신을 놓고 있으면 아주 조금씩 몸이 진정된다. 하얗게 타버렸다가 간신히 돌아온 시력은 아직 형편없었다. 눈을 천천히 깜빡여 봐도 도통 초점이 잡히지 않았다. 흐릿한 시야에 뭔가 움직이지만, 귀조차 먹어버렸는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능력을 심하게 끌어다 쓰면 꼭 이렇게 지독한 리바운드가 온다.
“…또.”
완전히 갈라지고 메마른 입술에서 신음소리에 섞인 혼잣말이 흘러내린다. 조금씩 시야가 밝아지면 또 바쁘게 움직이는 군화가 보인다. 늘 그런 식이었다. 군화를 벗어나지 못하면 고통도 끝나지 않는다. 그걸 알지만 불쌍한 무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미친 거 아냐? 내가 지금 얼마나 눈치 보이는 줄 알아?”
“그러면 어찌합니까. 무기가 죽어 넘어가는데.”
“그러니까 누가 나 없을 때 막 굴리랬어? 아니면 대타라도 하나 만들어 오던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죠.”
“너희도 말이 되는 일을 좀 시켜라. 나 참.”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귀가 트인다. 끈 떨어진 인형처럼 늘어져 있던 손가락이 조금씩 움직인다. 하지만 바쁘게 지나다니는 군화는 그걸 알지 못한다. 아. 성대가 쩍쩍 갈라졌는지 숨이 갈래갈래 찢어진다. 당장에라도 죽을 것 같은데,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안다.
“에셋. 일어나 봐.”
“지금 움직이지도 못할 걸요.”
“…미쳤군. 이럴 때까지 굴리다니.”
“…….”
“뭘 봐. 문 닫고 나가”
“아, 예.”
싸늘한 한마디에 군화가 우르르 물러난다. 이제야 조금 숨이 트인다. 버키의 눈엔 먼지가 가득 쌓인 군화가 한가득 맺혀있었다. 자신에게 그리 아프게 대하지 않는 군화였다. 말은 험하지만 적어도 직접 위해를 가하진 않는다. 뻣뻣하게 굳어있던 몸이 슬슬 풀어진다.
“안 죽은 거 알아. 일어나.”
“…….”
“새끼.”
가이드란 남자는 단 한 번도 먼저 손을 내밀어주지 않는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선다. 그러다 팔이 푹 꺾이면서 앞으로 쓰러진다. 얼굴을 부딪힌 것인지. 아닌 건지. 구분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둘이 있으면 조금씩 바짝 선 신경이 누그러지기 시작한다.
“내가 이러다 제 명에 못 살지.”
“…….”
“어쩌다 이런 녀석을 떠맡아서.”
투덜거리는 목소리조차 자장가 같다. 둘이 있을 땐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다. 별것 아닌 상황이지만 에셋에겐 꿀 같은 휴식이었다. 담요 한 장 없는 맨바닥에 널브러진 채 눈만 껌벅거린다. 그렇게 한동안 둘은 말이 없다가 군화가 먼저 자리를 비킨다. 가지 말라고 잡아볼까 하지만 역시 그만둔다. 착한 군화는 그런 행동을 몹시 싫어했기 때문에, 할 수 없었다.
“…….”
“괜찮냐?”
“…….”
죽었다 살아난 남자가 옆으로 누운 채 눈만 흐릿하게 뜬다. 온몸에 열이 오르고 힘이 빠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눈만 끔벅거리고 있으니, 그 모습이 측은한지 남자가 아무렇지 않게 다가온다.
“…….”
흐릿한 시야에 낯선 것이 잡힌다. 럼로우는 늘 신던 군화를 벗고 구두를 신고 있었다. 낯선 모습에 좀 놀랐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언젠간 너에게 구두를 신고 가련다. 그땐 너도나도 전쟁 통에선 살지 않을 거니까. 남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니 정말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모습이었다. 어디서 봤을까. 백치는 열이 잔뜩 오른 머리를 잡고 끙끙거린다.
“백치야.”
“…….”
“우리 이제 여기서 못 살게 됐어.”
“…….”
“알아들어?”
“…….”
덤덤하게 말하는 남자는 옷도 멀끔하게 바꿔 입었다. 뭘까. 백치는 불안해한다. 늘 화약 냄새를 묻히고 살던 남자가 사라진 것 같았다.
“인사 끝났으면 옮길 거니까. 비켜 럼로우.”
“하여튼 산통 깨는 덴 뭐가 있다니 까요.”
“비켜.”
“예. 예. 알겠습니다.”
구두가 멀어진다. 아프지 않은 군화가 구두로 바뀐 채 시야 멀리 사라진다. 그리고 익숙한 향기가 성큼 다가온다. 열이 올라서 코가 망가진 걸까. 백치는 아파서 내내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크고 시원한 손이 이마에 닿았다 눈 밑을 쓱 쓸고 지나간다.
그 순간 정신이 아득히 멀어진다. 꼭 아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뇌는 깊은 생각을 하는 것을 거부한다. 이럴 땐 정말 쓸모없는 몸뚱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