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희미했다. 작은 아이가 감당하기엔 너무 위함하고 커다란 도시에서 그다지 좋은 기억은 없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구원의 손길이 내밀어지기 전까지 그렇게 낮이면 태양을 따라 밤이면 어둠의 길을 따라, 그러다 너무 무서우면 잠시 달이 비추는 길을 따라 걸으며 생활했었다. 찬찬히 되짚어보는 어린 시절의 최초이자 최후의 기억은 배트맨의 커다란 손이었다. 자신의 허벅지를 베고 누운 채 잠이든 막내의 머리를 살살 쓸어보던 딕이 피식 웃으며 망토를 좀 더 당겨 덮어주었다.
그는 배트맨이 처음으로 들인 작은 울새였다.
메타휴먼들이 피라미드의 정점에 서서 모든 것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세상은 부모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작은 소년이 살아가기엔 너무 차가웠다. 조금의 엇나감도 용납하지 않는 사회는 고작 한사람 몫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떠돌이 아이에겐 일말의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분명 저 아이에게도 부모란 존재가 있었을 테지만, 두려움에 가득 차서 굳어버린 입은 한마디 변명조차 하지 못했다.
거리에 돌아다니는 아이들은 이 도시의 질서를 해칠 위험이 있다. 그러니 한 곳에 모아 관리해야한다. 그것이 지침이었고 절대적인 명령이었다. 수많은 고아들이 감시의 눈을 피해 도시의 가장 어두운 곳으로 도망쳤으나 성공한 사람은 없었다. 그런 와중에 어깨를 잡힌 채 질질 끌려온 작고 마른 남자아이는 이 구역에서 잡혀온 서른다섯 번 째 고아였다.
“이름은?”
“…….”
“다시 한 번만 더 묻겠다. 이름은?”
“…….”
벌벌 떨리는 입술을 진정시키기 위해 꾹 깨문 채 고개를 푹 숙인 아이는 말이 없었다. 사실 이름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보호 시설에 들어가면 사회에서 불리던 이름 따윈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두어 번 더 다그치듯 이름을 묻던 어른은 이내 포기하고 서류에 적당히 신상명세를 적고 사인을 했다. 마지막이었다. 동물을 팔아넘기는 것처럼 너무나 간단한 절차는 뭐라고 변명을 생각해낼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데려가.”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끼고 억지로 버텨보았지만 형편없이 마른 몸은 성인 남자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 질질 끌려가던 아이가 우뚝 멈춘 건 뒤에서 들려오는 낮고 단단한 목소리 때문이었다. 철저하게 복종을 훈련받은 병사는 상관의 말에 한마디 불만도 표하지 않은 채 멈춰 섰다.
그 순간 자신의 어깨를 움켜쥔 힘이 느껴지지 않자 아이가 크게 어깨를 틀었다. 유연한 몸이 틈을 놓치지 않고 손아귀를 빠져나왔다. 최대한 이 곳을 벗어나려고 달리던 아이는 단단한 벽에 부딪혀 그대로 넘어졌다. 마른 몸이 땅바닥에 뒹굴었다. 다시 일어나서 도망가려고 생각을 했지만 좀처럼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대로 달려온 어른이 아이의 어깨를 쥐고 뺨을 때렸다. 부러질 듯 휙 돌아간 얼굴은 곧 새빨갛게 부어올랐다. 정말 끝이었다. 신이 아닌 악마라도 자신을 여기서 구원해 준다면 기꺼이 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입안에 퍼지는 비릿한 피를 꿀꺽 삼킨 아이가 고개를 푹 숙였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에서 하얗게 마른 목이 언뜻 보였다.
“죄송합니다. 이런 일이 없었는데 이 녀셕이…당장 시정하겠습니다.”
“아냐. 그대로 있도록”
“네? 아, 네!”
“…….”
물러선 채 뒷짐을 선 사람을 훑어보던 눈이 자신에게 부딪혔던 작은 아이에게 머물렀다. 먼지가 묻어 더러워졌지만 결이 좋은 검은 머리카락과 푸른 눈이 보였다. 긴 속눈썹 아래에서 불안하게 이리저리 움직이는 눈동자를 보았을 때 갑자기 변덕이 생겼다.
“나와 함께 가면 이 곳에서 꺼내주마. 어떻게 생각하지?”
“네?”
“난 여러 번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 그리고 똑똑하지 않은 어린이도 싫어하지.”
“가요. 갈게요! 제발 날 데려가줘요.”
볼이 부어오르고 눈 주위에 그새 멍이 든 아이가 허겁지겁 망토를 붙잡고 매달렸다. 악마라도 상관없었다. 그것이 비록 자신을 노리고 말하는 달콤한 유혹일지라도 아이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었다. 차마 누군지 올려다보지 못하고 망토를 움켜쥔 채 벌벌 떨던 아이를 내려다보던 검은 그림자가 점차 가까이 오더니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쑥 일으켰다.
“지금부터 일어날 일은 모두 네가 선택한 것이다. 알았나?”
“…….”
“대답.”
“네.”
“좋아. 널 여기서 꺼내주마.”
찬찬히 아이를 훑어 내리는 시선이 사라지자 그는 망토로 작은 몸을 덮어씌운 채 그 곳을 빠져나갔다. 딕 그레이슨. 지옥 같은 곳에서 처음으로 박쥐의 손에 이끌려 빠져나온 아이였다.
***
“주인님 돌아오셨습니까. 그런데…….”
“오늘부터 이 집에서 살게 될 아이니까 적당히 씻겨서 방을 내주도록.”
“…….”
“이런 일은 처음이군요. 곧 로드께서 주인님을 소환하시겠습니다.”
아이를 집사 앞에 세워둔 배트맨은 곧 자신의 서재로 들어갔다. 불안하게 눈만 이리저리 움직이며 집 안을 쳐다보는 아이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시선을 맞춘 늙은 집사는 가볍게 웃으며 아이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온몸에 묻은 먼지와 더러운 것들을 씻어내고 적당한 옷을 입히자 제법 그럴듯한 얼굴이 나타났다. 벌겋게 부어오른 볼과 눈을 보자 집사가 짧게 혀를 차고 아이를 소파에 앉힌 후 얼음주머니를 만들러 부엌으로 사라졌다.
거실로 돌아온 집사의 눈에 보인 것은 긴장이 풀려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아이였다. 작게 웃은 후 가볍게 어깨를 흔들어 깨우고 손을 잡았다.
“침대로 가시죠.”
“…….”
그렇게 딕이 반나절을 자고 일어났을 때 배트맨은 저택에 없었다. 여전히 불안하게 방안을 배회 하다 이내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웅크린 아이는 좀처럼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았다. 집사가 어르고 달래 아침을 먹인 것이 전부였다. 배트맨이 돌아왔을 때 아이는 배트맨의 사이드 킥이 되어있었고, 최초의 로빈이 되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
“좋아. 이름은 그다지 상관없지.”
“…딕.”
“딕이라 부르면 되겠나?”
말없이 끄덕이는 아이가 자꾸 배트맨에게서 멀어지려 했다. 하지만 배트맨이 말하는 것을 거부하진 않았다. 아이답지 않게 눈치가 빨랐고, 적응도 빨랐다. 사이드 킥으로 일하기 위해 천천히 훈련을 받으면서 점차 집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으응,”
“조금 더 자도 괜찮아 데미안.”
“…응.”
뒤척거리는 동생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리며 딕이 마저 생각을 하려나 이내 그만둬 버렸다. 결국 이 집에서 자라고 나이트 윙이 되었다. 둘째인 제이슨이 들어오고 셋째인 팀, 그리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막내가 들어오면서 점차 어깨가 무거워진 딕은 강박적으로 형제들을 싸고돌았다. 자신이 받았던 과거의 기억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동생들을 위해선 그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살짝 비틀어진 채 굳어버린 가치관은 생각보다 위험했지만, 역린을 건들이지만 않으면 괜찮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데미안에 대해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예민한 반응을 보였기에, 항간엔 헛소문이 떠돌기도 했다. 그렇게 자라온 나이트 윙은 자신의 가족을 제외한 모든 이들을 경계의 눈으로 쳐다보았다. 브루스가 자리를 비우면 실질적으로 집안을 건사하는 것은 딕이었다. 그런 딕에게 불만을 표하는 것은 곧 배트맨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과도 같았기에 사람들은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난 너희들을 아무도 건들이지 못하게 할 거야.”
“…….”
“가족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가볍게 웃으며 데미안을 안아든 딕이 침실로 향했다. 겉과 속이 다른 긴 망토가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며 계단에 늘어졌다. 오늘은 브루스가 돌아왔으면 좋겠다 생각했지만,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데미안을 침실에 데려다 두곤 배트맨의 대리로 저스티스 로드에 가야했다. 딕은 그 곳에 가는 것을 싫어했지만, 가야만 했다. 그래야 가족이 편안할 수 있었으니까. 배트맨이 없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신을 불러들인 로드의 속셈을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살짝 눈을 찌푸리며 멈춰 선 딕의 귀에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하얀 성위에 언제나처럼 조용히 걸려있던 해가 지면 자연스럽게 밤이 오곤 했다. 그리고 다시 뿌옇게 아침이 밝아오는 것처럼 성 안엔 규칙적인 생활 외에 새로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언제부터였는지 알 수 없었지만 성 안은 큰 소리 조차 나지 않고 죽은 듯 조용했다.
아마 그쯤이었을 것이다. 온 사방에 피비린내가 진동하던 그 날 이후로 성은 얼어붙은 것처럼 싸늘하게 변해버렸다. 그런 숨 막히는 공간에서 하루 이틀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배트맨 일가를 천천히 잊어갔다. 더 이상 찾아보지 않았고, 그들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아니 차마 말하지 못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렇게 잊혀져간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하얀 감옥을 벗어나지 못하고 매인 채 빙빙 맴돌았다.
배트맨이 살았던 저택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망가져서 야생 동물들의 은신처에 가까워져 갔다. 해가 뜨면 그 빛을 그대로 받아 하얗게 빛나던 외관도, 세심한 집사의 손길에 정갈하게 손질되던 정원도 망가질 대로 망가져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머릿속 기억과 점차 괴리감이 드는 외관에 서서히 사람들은 그 곳을 찾지 않았다.
하나 둘 사람의 발길이 끊어지기 시작한 곳에선 비가 오는 밤이면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는 괴담 같은 걸 하나 둘 만들어냈다. 퍼지기 시작한 소문은 꼬리를 물고 점점 더 부풀려졌는데, 어느 날은 푸른빛이 저택 주변을 맴돈다는 소문이 되기도 했고, 창가에 하얀 형체가 어른거리는 것을 봤다는 제법 그럴듯한 목격담이 추가되기도 했다. 실체를 알 수 없이 부풀려질 대로 부풀려진 소문은 점차 사람들로 하여금 저택으로 향하는 발길을 끊기에 충분했다. 가장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몰래 찾아와서 채 피지 못한 작은 꽃을 조심스럽게 두고 가던 발자국이 어느덧 끊어졌다. 그 날 들리던 고통과 비극을 잊은 채 괴담만 남은 그 곳은 어느새 사람들이 들어가선 안 되는 금지된 땅이 되어버렸다.
세간의 사람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로드 쪽은 항상 다른 일로 바빴다. 오히려 너무 바빠서 사람들이 그런 소문에 정신을 쏟는 편이 훨씬 편할 정도였다. 괴담은 사람들에게 쓸데없는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리고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다른 곳을 향한 시선을 무디게 만들어 주었다. 그런 세계에서 로드는 저스티스 리그가 혹시 무슨 일을 낼까 싶어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었지만 이렇다할만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옆에 서있던 콘은 눈을 가늘게 찌푸리며 화면을 쳐다보았다. 자신들과 똑같은 얼굴을 한 사람들이 보였다. 입고 있는 옷은 조금 달라도 얼굴은 같았다. 하지만 행동하는 것도 신념도 모두 다른 그들을 그저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오히려 저런 식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신기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붉은색과 검은색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옷을 입은 채 밤하늘을 가볍게 날아다니는 모습이 순간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자신의 신분을 보호하기 위해 얼굴을 대부분 가린 채 움직이고 있었지만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다지 많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저 쪽 세계가 평행세계인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 팀 드레이크 또한 저 곳에 있는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찬찬히 살펴보면 저쪽 세계의 팀은 콘이 알고 있는 것보다 작았다. 그런 사소한 차이가 점점 두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인식하게 했고, 콘의 흥미를 잃게 만들었다. 흥미를 잃은 푸른 눈이 시리게 빛났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침대에 앉아서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다 웅웅 소리가 울리는 곳을 짧게 쳐다보았다.
“…역시 다르지.”
“…….”
“안 그래?”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한참동안 한 곳을 바라보던 콘이 침대에서 일어섰다. 항상 이렇게 기다리곤 했지만 딱히 대답을 바라진 않았다. 기분이 이상한 것은 오랜만에 팀의 얼굴을 봐서 일거라 생각했다. 자신이 아는 팀이 아니니 이런 호기심 따윈 곧 사그라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만큼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몇 번이나 고민 해봐도 더 이상 타오를 만한 감정은 몸에 남아있지 않았다. 잠깐이나마 웃던 입은 단단히 다물어 진 채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
하지만 그렇게 관심 없다는 듯 통신 시설을 떠났던 콘은 무엇인가에 홀린 것처럼 다시 돌아왔다. 상당히 예외적인 상황이었지만 로드의 후계자인 콘이 시설 안으로 들어가는 걸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따라오는 사람들을 다 내쫓고 아무도 없는 곳에 홀로 의자에 앉아 화면 안의 저스티스 리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나자 자연스럽게 팀을 찾았다. 워낙 바쁘게 움직이는 탓에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청소년과 어른 사이의 미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날렵한 몸이 빌딩 사이로 휙 사라졌다. 고담의 밤은 지나치게 어둡고 끈적해서 작은 사람 하나 정도는 금방 삼켜버리곤 했다.
의미 없는 빌딩의 불빛만 가득한 화면을 바라보는 콘의 눈이 찌푸려졌다. 다시 통신을 조작해 기어코 팀의 뒷모습을 찾아냈다. 한참동안 그렇게 청년의 뒤를 쫓던 콘의 시선이 뚝 멎었다. 겨우 잡아낸 화면엔 빌딩 위에 서있는 팀이 달을 등지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바람을 따라 길게 휘날리는 망토는 고담의 밤하늘을 머금은 것처럼 까맣게 섞여들었다. 제멋대로 바람을 타고 움직이는 망토를 정리하며 돌아서던 팀이 무엇인가 들은 듯 눈을 깜박이다 하늘 위를 쳐다보았다. 별다른 것 없는 히어로 질에 반쯤 재미를 잃은 채 한손으로 턱을 괴고 있던 콘이 가볍게 화면을 위로 올렸다.
“…하.”
하늘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달에서 내려오는 것 마냥 천천히 아래로 활강하는 것이 빌딩에 내려서자 팀이 얼굴을 슬쩍 기울이며 쳐다보았다. 뭐라 말하는 것 같은데 이 화면은 안타깝게 소리를 지원하지 않았다. 연신 입을 움직이는 팀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던 사람이 팀을 푹 안아 올렸다. 까만 부츠에 싸인 발이 땅에서 한 뼘은 떨어진 채 등을 퍽퍽 치는 모습까지 지켜보던 콘이 잔뜩 짜증이 난 상태로 화면을 꺼버렸다.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꾹 주먹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며 분노를 받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또다시 집착과 소유의 불길이 가슴 속 부터 타올랐다. 어디서부터 틀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이 세계에서 둘은 저렇게 친근할 수 없는 상황이란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로 이해한다 해서 몸도 함께 이해하는 것은 아니었다. 차갑게 식었던 가슴에서 무엇인가 스물 스물 기어 올라왔다. 가장 깊은 곳에서 기어 올라오는 것은 뇌를 흔들고 심장을 잡아 뜯을 기세로 온 몸을 돌아다니면서 콘을 괴롭혔다.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렇게 자신과 팀을 꼭 닮은 둘의 애정행각만 실컷 보던 콘은 짜증스럽게 의자에서 일어났다. 잔뜩 화가 난 사람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오기까진 조금 시간이 걸렸다. 여느 때처럼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사방이 하얗고 모든 공기가 바닥에 무겁게 내려앉은 것 같은 방엔 아무도 없었다. 아니 누군가 있었다. 미동도 없고 움직이지 조차 못했지만 분명 있었다.
습관처럼 방안을 가로질러 걸어가 유리관 앞에 섰다. 그리고는 단 한 시간도 꺼지지 않고 돌아가는 냉동 장치 덕에 하얗게 성에가 내려앉은 유리 안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한참동안 그렇게 바라보기만 하다 간신히 손을 대면 차가운 유리가 둘 사이를 가로막으며 차갑게 손바닥에 붙어왔다. 마치 꽁꽁 얼어버린 호수의 표면을 만지는 것처럼 따뜻한 체온에 살짝 녹은 성에가 묻어나다 이내 금세 얼어붙었다. 그런 모습에 어쩔 수 없어서 후욱 한숨을 쉬면 입김의 궤적을 따라 얼어있던 표면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한숨에 자신을 가로박고 있는 유리마저 녹아버리면 좋을 텐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었다. 어른어른 안쪽에 보이는 하얀 것들은 예전 모습 그대로 꽁꽁 얼어있었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빛나는 하얀 꽃잎은 표면에 성에를 인 채 바닥에 잔뜩 깔려 있었다. 부서지지 않을까 녹아내릴까 싶어 차마 길게 만지지도 못했다. 그저 콘이 할 수 있는 건 차가운 유리에 잠깐 입술을 대고 있다 떼는 것이 전부였다.
“…팀.”
그리곤 습관처럼 침대 가에 앉아서 그것을 쳐다보았다.
당장이라도 저 안에서 꺼낸 다음 품에 안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다른 할 일이 없으면 그렇게 해가 지고 푸른 달이 방 안을 가득 채울 때 까지 앉아있기만 했다. 그러다 잠을 자야하면 쓰러져서 잠이 들었다. 강박 중세에 가까울 정도로 정형화 되어버린 하루 일과는 몇 달이 지나도록 깨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단단하게 굳어져 갔다. 냉동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작게 울리는 기계의 진동 소리마저 크게 느껴지는 방 안에서 콘은 그렇게 계속 가라앉고만 있었다.
하얗게 빛이 날정도로 얼어붙은 것은 푸른 달빛을 받으면 더 환하게 빛이 났다. 끝없는 설산을 바라보면 아마 저런 느낌일지도 모른다. 침대에 누워서 뒤척거리다 문득 잠이 깨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면 기울어진 세상 속에 홀로 고고하게 서 있곤 했다. 냉기가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표면에 부스러진 달이 닿으면 영혼마냥 밝게 타오르다 사라지곤 했다.
하염없이 바라보다 눈을 감으면 그만이었다. 잠든 자세 그대로 일어나서 다시 그것을 바라보았다. 지독한 집착의 끝은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계속해서 아래로만 쌓이고 있었다. 하얀 빛은 그에게 잘 어울렸다. 새빨갛게 물들던 노을을 받던 모습도 물론 마음에 들었지만 이젠 좋아하지 않았다. 노을을 보면 애써 가라앉힌 과거가 떠올라 머릿속을 휘저었다. 단말마의 소리. 저주와도 같던 한마디. 푸른 눈에 낙인을 찍듯 새겨진 모습.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콘은 애써 가장 좋은 모습은 하얗게 빛이 나는 것이라 단정했다.
002
콘이 움직인 것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심지어 로드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독단적으로 저스티스 리그가 있는 곳으로 건너갔다. 조작이야 듣고 배운 것이 있으니 간단했다. 후계자의 권한을 방패삼아 벌인 일은 곧 로드의 귀에 들어갔으나 딱히 제지하진 않았다. 콘은 적어도 저스티스 로드에 해가 되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란 묘한 신뢰 때문이었다. 기왕 넘어간 김에 그쪽을 좀 휘저어주고 오면 더 좋지. 로드는 싸늘하게 웃으면서 의자에 기댄 채 조용히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 시간 콘도 같은 색으로 물들어 있지만 전혀 다른 하늘 아래서 고개를 든 채 조용히 떠 있었다. 까만 물감이 울컥울컥 새어나온 것 같은 밤하늘에 절대 녹아들지 않은 망토가 하얗게 빛나며 바람을 따라 가볍게 펄럭였다. 가늘게 눈을 찌푸리며 어지럽게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을 쳐다보았다. 흐릿한 반짝거림은 어둠에 먹혀들어갔다 다시 빛이 있는 곳으로 헤쳐 나오기를 반복했다.
“…….”
조용히 눈을 감자 온갖 소리가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시끄러운 도시의 소음은 귀를 시끄럽게 하다못해 머리를 울리며 빠져나가곤 했다. 천천히 원하는 것을 찾았다. 수많은 소음 속에서 작은 단서를 잡아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파도가 밀려오듯 한 번에 몰려왔다 급하게 사라지는 소리의 끝을 잡았다. 조그만 숨소리 하나, 발자국 소라 하나를 읽어가면서 찬찬히 쫓기 시작했다.
귀에 들리는 방향대로 한 걸음 다가가면 숨소리가 들리고 다시 두 걸음 걸어가면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가볍지만 묵직하게 빌딩을 딛고 뛰어내리는 소리에 눈썹을 찡그리며 방향을 가늠했다.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것 같지만 좀처럼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 미묘한 혼자만의 술래잡기가 계속되다 슬슬 짜증이 날 무렵 드디어 망토 끝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높은 빌딩 위에 홀로 서있는 인영은 금방이라도 바람에 쓸려서 떨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거센 바람을 따라 망토가 펄럭일 때마다 콘의 시선이 그 끝을 좇았다.
“…팀.”
“…….”
작게 내뱉은 목소리는 도시의 소음에 섞여 들어가 흩어져서 닿지 않았다. 한참동안 그렇게 어두운 밤하늘 사이에서 그를 지켜보던 콘이 가볍게 웃으며 빌딩 위로 날아갔다.
“…응?”
“…….”
자신의 발밑을 내려다보던 팀이 등 뒤에서 덮쳐오는 어른어른한 그림자를 발견했다. 하지만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몇 번 있었던 것 마냥 고개를 좀 더 숙이면서 손으로 허리를 짚었다. 그러다 얼굴의 대부분을 가리고 있던 카울을 만지작거리면서 숙이고 있던 허리를 곧게 폈다. 다부지게 닫혀있던 입에선 예상외로 단단한 말투가 툭 튀어나왔다. 목소리는 거의 비슷했지만 다른 점을 굳이 찾아보자면 이쪽이 조금 더 음색이 높았다.
“내가 이 시간에 여기 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
“뭐야. 이젠 대답도 안하겠다 이거지?”
“…….”
“…화났어?”
“…….”
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보통 때 이곳을 찾아온 코너와는 반응이 달랐다. 그렇다고 해서 최근 며칠간 코너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을 정도로 화나게 만든 기억도 없었다. 고개를 왼쪽으로 천천히 기울이며 엄지손가락으로 입술을 만지작거리던 팀이 휙 돌아섰다. 바닥에 하늘대는 그림자를 따라 천천히 시선을 올리다 그대로 고개를 바짝 들었다. 그리고 파란 하늘같은 눈과 불투명한 필름에 가려진 푸른 바다를 닮은 눈 마주쳤다. 얼굴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저 사람은 코너지만 코너가 아니었다. 하지만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뭇 긴장한 모습으로 팀이 한걸음 물러서는 가 싶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고양이가 난간을 걷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한 걸음 두 걸음 공중에 떠있는 콘을 향해 다가왔다.
“음…저기…….”
“…….”
“코너?”
“…….”
여전히 들리는 대답이 없었다. 팀은 이건 또 무슨 장난이냐면서 웃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몸이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위협이 느껴지면 생각보다 빨리 움직이던 몸은 오늘따라 무디기만 했다. 파랗게 타오르는 눈은 코너를 닮았지만 그 본질은 맹수에 가까웠다. 활활 타오르는 눈 안에는 금방이라도 팀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 같은 날카로운 위협이 가득 담겨있었다. 항상 입고 다니는 검은 티셔츠가 아닌 하얀 망토를 뒤집어 쓴 모습도 너무 낯설었다. 게다가 자신이 아는 코너는 이런 식으로 사람을 내려다보지 않았다.
“…….”
미묘한 대치상황은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카울에 반쯤 가려진 얼굴이었지만 표정정도는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가늘게 떨리는 입술부터 꿀꺽 침을 삼키는 목 줄기까지 어느 하나 콘의 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콘을 보던 팀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본능이 이 자리를 떠나라고 재촉했다. 평소에 하지 않던 실수를 하던 팀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이거 무슨 짓이야!”
“…….”
멱살을 단단히 잡은 채 자신을 들어 올린 손을 떼려고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단단한 바위마냥 목을 틀어잡은 손이 조금 힘을 주자 약한 신음소리가 들렸다. 그대로 공중에서 한참동안 눈을 찌푸린 채 팀을 바라보던 콘이 다른 손으로 카울을 잡았다.
“안 돼!”
“…….”
의미 없는 저항이었다. 너무 손쉽게 벗겨진 검은 가면 아래에선 제법 긴 머리카락이 왈칵 쏟아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스러움이 가득 담인 파란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뼘도 넘게 공중에 떠있으니 점차 숨이 가빠지는지 팔을 긁어내리는 손에 힘이 점차 빠지고 있었다. 짧게 컥컥 넘어가는 소리에 살짝 웃으면서 목을 좀 더 틀어쥐었다. 팀은 생각보다 좀 작았고, 콘은 더 컸다. 싸늘한 웃음이 팀의 얼굴에 왈칵 흘러내렸다. 목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아서 간신히 팔을 긁어내리거나 버둥거리는 것이 전부였다. 달을 등진 채 웃고 있던 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같은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팀은 사실 이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네가 조용히 따라오면 다른 사람들의 안위는 보장하지.”
“역시 코너가 아니잖아. 넌 누구…….”
“쓸데없는 대답은 하지 말도록.”
“…컥!”
대답은 듣지 않았고, 제대로 된 설명 또한 해주지 않았다. 그 대신 목을 콱 조르자 팔에 힘이 풀리면서 몸이 축 처졌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이 무엇인가 꼬물대는 것을 보자 카울을 벗겨냈던 손으로 그것을 빼앗아 들었다. 패트롤을 돈다면 당연히 몸에 지니고 있을 통신장치였다. 콘의 손에 들려나온 작은 통신기계는 달빛을 받아 까맣게 빛이 났다. 그런 손을 저지할 만한 힘조차 남아있지 않은 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두 손가락으로 장치를 든 채 이리저리 투시해보던 콘이 피식 웃었다. 이 통신 장치는 뱃 케이브와 연결이 되어있을 것이 뻔했다. 어느 곳이던 박쥐와 울새들이 하는 짓은 항상 비슷했다.
“정말 귀여운 장치야.”
“…….”
“하지만 이제 이런 건 필요 없을 테니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강한 힘으로 짓눌려 형체도 없이 으스러진 것은 짧은 파열음과 함께 완전히 기능을 상실했다. 손끝에서 흩날리며 떨어지는 잔해들은 그대로 고담 밤하늘의 일부가 되었다.
“널 오랫동안 찾아다녔어. 팀 드레이크.”
“…….”
“나와 함께 가자.”
“…무슨…넌 코너가 아니…….”
“역시 새들은 너무 말이 많아.”
금방 짜증이 난 콘이 목을 잡은 손에 점점 힘을 주었다. 다 마셔버린 캔 하나를 찌그러트리는 것처럼 아무런 죄책감 없는 표정으로 점차 허옇게 질려가는 팀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강한 힘에 눌려 기도가 막히고 호흡을 제대로 할 수 없자 크게 부풀던 가슴이 점차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눈앞이 번쩍 했던 것 같았다. 축 늘어진 팀의 몸을 콘이 가볍게 들어올렸다. 원래도 체격이 콘보다 작았지만 이번 팀은 그보다 더 작았다. 한품에 가볍게 들어오는 팀을 잠시 바라보던 콘이 두 손으로 그 몸을 든 채 천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 납치였다. 뱃 케이브엔 통신 장치가 부서질 때 나는 작은 파열음이 들렸을 뿐이었다. 사람들이 무엇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팀은 사라지고 난 뒤였다. 잠시 패트롤을 중단하고 팀의 행방을 찾아 나섰지만 그 어디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이상하고 알 수 없는 밤이었다. 혹시나 어딘가 크게 부상을 당해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닐까 싶어 구석진 곳까지 찾아보았지만 소용없었다. 통신의 마지막 신호가 끊긴 지점으로 가보았지만 아무 것도 발견 할 수 없었다. 둥그렇게 뜬 달은 모든 것을 보고 있었지만 아무런 말을 해줄 수 없었다. 그렇게 갑작스레 한 사람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도시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천천히 움직이며 달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