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007-1] 딕뎀 for 꽃님
꽃님에게 드린 글에서 전연령이 아닌 부분을 쳐낸 공개본 입니다:D!
원본 비밀번호는 트위터(@hwanwol_v2) 쪽으로 맨션보내주시면 성인분에 한해 알려드리겠습니다 ><
타임라인에서 잠깐 이야기 했던 인큐버스 AU입니다
예...뭐 마영전 서큐버스를 기반으로 썼는데 딱히 게임 안하셔도 읽으시는데 전혀 지장이 없는...
여기에 들어온 것이 잘못이었다.
보통 때의 데미안 이라면 아무리 짜증나는 일이 있다하더라도 금지된 곳에 들어가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하지만 아침부터 짹짹거리는 딕의 입을 바라보다 울컥 짜증이 나서 그대로 문을 박차고 뛰어나왔다. 뒤통수를 쭉 잡아당기는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바보 같은 딕 그레이슨. 속으로 수 도 없이 이름을 부르며 데미안은 저 좋을 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무거운 갑옷이 철컹 거리며 서로 부딪혔다. 화려하게 달린 장식들이 찰랑거리며 눈앞을 어지럽혔다. 긴 망토를 손으로 한번 감아 휙 잡아당기자 바람의 궤적을 타고 펄럭였다.
나이치고 검술에 능숙한 데미는 또래보다 상위급 던전에 자주 드나들었다. 배운 것이 있었고, 항상 하던 것이 그러하듯 데미안은 몬스터를 베어 넘기는 걸 나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데미안에게도 분명히 아직 들어가선 안 되는 곳이 존재했다. 그것은 일종의 금기 같은 것이라 좋던 싫던 모두 지켜야 하는 것이었고, 데미안도 딕도, 그리고 제이슨과 팀조차도 한 반도 이를 어긴 일이 없었다.
“…바보같은.”
다시 한 번 말을 꾹꾹 눌러 담은 데미안이 가볍게 지도를 훑었다. 기분이 더 나빠지기 전에 던전 한 바퀴 돌고 사냥이라도 하고 나면 될 거라 생각했다. 허리에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는 두 자루의 검을 살짝 쓸어보고 피식 웃었다. 어릴 때부터 장난감보다 먼저 쥐었던 것이었다. 손에 맞춘 듯 찰싹 붙어오는 검 자루를 엄지손가락으로 슥 쓸어올렸다. 항상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선택하던 곳이었다. 데미안은 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곤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
“헉…헉. 젠장.”
거칠게 숨을 콱 뱉어낸 입이 굳게 다물어졌다. 잔뜩 흙먼지를 뒤집어쓴 작은 체구가 날렵하게 몬스터 사이를 파고들었다. 두 자루의 칼을 손에 들고 가장 약한 부분을 노렸다. 칼에 몬스터들의 살이 베어질 때 마다 역한 냄새가 나는 체액이 온몸에 뿌려졌다. 얼굴에 튄 체액을 급하게 닦으며 한걸음 물러선 데미안이 중심을 잃고 잠깐 비틀거리며 벽을 짚었다.
인간 냄새를 맡았는지 끊임없이 몰려드는 몬스터들의 체액으로 길게 두르고 있던 망토는 이미 축축하게 젖어 무겁게 늘어졌다. 게다가 몸을 풀기도 전에 입구부터 몰려든 적을 급하게 처지하다 보니 제대로 풀리지 못한 근육이 팽팽하게 당기기 시작했다. 한 무리 몬스터를 처지하고 나서야 겨우 한숨을 돌린 데미안이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두 손에 꼭 쥐고 있던 칼이 카랑카랑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바닥에 널부러진 칼이 유난히 무겁게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던전을 잘못 들어온 것이 분명했다. 데미안은 어린아이들이 제법 하는 이런 실수를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체감 난이도로 생각해보면 자신을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다.
“젠장. 여기는 어디지.”
길을 외울 만큼 드나들었던 곳과 달리 전혀 처음 보는 곳이었다. 입구에서 알아차렸으면 좋으련만, 발을 딛자마자 붉은 시선이 한 번에 자신을 향하더니 다짜고짜 달려들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발톱이 볼에 긴 상처를 내고 나서야 자세를 잡고 칼을 꺼내들었다. 으르렁 거리며 침을 뚝뚝 흘리는 개는 이세상 것의 아니었다. 죽었다 살아난 것처럼 근육과 약간의 가죽으로 이루어진 것은 이성을 잃고 데미안에게 달려들었다. 단단한 근육 때문에 제대로 박히지 않는 공격에 몇 번이나 같은 곳을 베어 넘기고 나서야 한 마리를 쓰러뜨릴 수 있었다.
“제대로 된 도구도 안 들고 나왔는데.”
벌써부터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는 각종 포션을 세어보던 데미가 이를 뿌득 갈았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스스로 창피해서 견딜 수 없었다. 눈이 내리는 흐릿한 하늘이 유리가 다 깨져버린 창밖에 펼쳐졌다. 간간히 눈이 성 안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금세 녹아버렸다. 이미 들어온 던전을 다시 돌아 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이미 입구를 막아선 엄청난 무리의 몬스터들을 제치는 것과 끝까지 가는 것 어느 쪽이 더 나을까 생각하던 데미는 길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앞으로 갈 수밖에 없잖아.”
혼자 들어온 던전에서 대답이 들릴 리 없었다. 아니 대답이 들리는 것이 더 무서울지도 모를 일이었다. 잠깐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던 데미안이 천천히 더 깊은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 번도 들어온 적이 없는 곳이라 알고 있는 정보가 전혀 없었다. 아니 이런 던전이 있을 줄이야. 오늘 처음 알았다.
방금 걸어온 곳의 구조조차 알지 못했고 어디서 몬스터가 기습을 해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긴장된 공기 어깨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체액이 말라붙은 망토가 무겁게 목을 졸랐다. 아무도 도와주러 올 거라 생각하지 않았기에 데미는 좀 더 칼을 다부지게 잡았다.
나쁜 일은 한꺼번에 찾아온다고 했던가. 예상대로 데미의 상태는 좋지 못했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아주 나빠지기 바로 직전에 간신히 멈춰있는 상태였다. 처음 와본 곳에서 길을 잃었다. 일단 배운 대로 움직였다. 이곳이 어딘지 확인하기 위해 성 꼭대기로 올라가려 했지만 그마저도 그리 녹록치 않았다.
올라가는 계단이 있는 곳이라고 생각해 들어간 방에선 정체모를 마력에 침식된 병사들이 쏟아져 나왔다.자아는 오래전에 죽어 버린 병사들은 그저 움직이는 인형이었다. 움직일 때마다 녹슨 갑옷이 소름끼치는 마찰음을 만들어냈다. 멋대로 찌르고 들어오는 날카로운 칼을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나면 궁수 병들이 쏜 화살이 날아왔다. 심장을 겨냥해 아슬아슬하게 지나가는 화살을 간신히 피했다고 생각했지만 피곤에 잔뜩 지친 발이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허억”
중심이 무너지자 그대로 쓰러져서 한 바퀴 굴렀다. 아이 티를 벗지 못한 얼굴은 먼지와 피 그리고 몬스터의 체액으로 엉망이었다. 좀비처럼 변한 병사들을 베어 넘기면 속이 뒤집히는 냄새가 가득한 피가 흘러나왔다. 간신히 길을 뚫고 복도를 돌아 달려 나갔다. 등 뒤를 따라오는 소란스러운 쇳소리가 줄어들고 나서야 벽에 기댄 채 그대로 주저앉았다. 잔뜩 긴장해 덜덜 떨리는 몸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팔을 꾹 누른 채 무릎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이보다 더한 수라장도 헤쳐 나왔지만 이상하게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반쯤 부서지기 시작한 팔 갑옷은 방어를 하기엔 적당하지 않았다. 체액과 피가 엉겨 붙은 망토는 납처럼 무거워져서 목을 조리기 시작했다 짜증스럽게 망토를 풀어서 던져버린 데미가 그대로 높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깜깜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편이 좋지 않을까 처음으로 후회를 해봤지만, 이미 걸어온 길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게 들어왔다. 게다가 익숙하지 않은 지형을 거꾸로 돌아가다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나저러나 최선의 선택은 있을 수 없었다.
“내려갈 수 없으니 끝까지 올라가 봐야지.”
“…….”
“바보 같은 딕 그레이슨. 뭘 하고 있는 거야.”
툭 터져 나온 말을 애써 수습 하려는 듯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바닥을 보이는 회복 포션의 뚜껑을 이로 벗기고 한 모금 꿀꺽 삼켰다. 바닥을 치던 체력이 손톱만큼 돌아온 것 같았다. 반쯤 남은 것을 한 번에 마셔버리고 포션 병을 어둠 쪽으로 던졌다. 희미하게 유리가 박살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아 막다른 곳이었다.
“저기는 막혔다 이거지.”
“…….”
“그럼 위로 올라가야겠네.”
여기서 이어진 계단이 성의 가장 상층부이길 빌었다. 하지만 예상은 번번하게 빗겨나갔고, 몇 번이나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병사들을 베어 넘겼다. 숫자가 너무 많이 쫓기듯 들어온 계단 입구에서 크게 발을 헛딛었다. 단단한 돌로 만든 계단을 피하기 위해 한 바퀴 크게 뒹굴었다. 오랫동안 쌓인 먼지 구덩이에서 뒹굴고 일어난 꼴은 말이 아니었다.
“제길.”
금방이라도 몸을 찢고 생명을 나눠가지기 위해 달려들던 병사들이 주춤주춤 문 앞에서 멈춰 섰다. 벌겋게 타오르는 눈은 데미안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무엇인가 막힌 듯 더듬거리기만 할 듯 좀처럼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생각하지도 못한 안전한 곳이었다. 하지만 그런 기쁜 생각도 잠시 이젠 더 이상 이 문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데미안이 주춤 주춤 계단 쪽으로 움직였다. 마지막 남은 길은 이 계단뿐이었다.여기가 막힌 길이라면……. 상상 하기 조차 싫었다. 어느새 잔뜩 몰려들어 문 앞을 꽉 매운 병사들을 가만히 바라보던 데미안은 어쩔 수 없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
아까 겪었던 상황과는 전혀 달랐다. 좁고 조용한 계단엔 단단한 신발이 돌을 딛는 발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무슨 이유 인지 몰라도 사방을 돌로 쌓아올린 통로는 좁고 답답했다. 오랫동안 계단 안에 고여 있던 공기는 가끔 나타나는 손바닥만한 창을 통해 순환되는 것 같았다. 조용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생각보다 높이 올라 온 것인지 핑클 현기증이 돌았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천천히 탑을 올라가는 데미안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긴 칼이 돌바닥을 긁다 떨어졌고, 반쯤 부서진 갑옷의 파편이 계단 아래로 떨어져 굴러갔다.
“손님이 오셨나 보네.”
탑이 꼭대기, 가장 최상층에 위치한 것은 무거워 보이는 문이었다. 다른 봉인은 없었지만 문을 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위압감을 주고 있었다. 문 안쪽엔 촛불만이 빛을 대신하고 있었다. 어스름한 붉은 빛이 감도는 방 한가운데에 놓인 것은 커다란 침대였다. 화려한 천으로 가려져서 좀처럼 안쪽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침대에서 무엇인가 움직였다. 흐릿한 불빛으론 제대로 알아 볼 수 없었다. 침대 천이 구겨지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어머…귀여운 도련님이네.”
탑의 주인이기에 알 수 있는 정보였다. 하지만 탑의 최상층을 향해 걸어 올라가는 당사자인 데미안은 자신의 앞에 무엇이 있는지 조차 알지 못했다. 그저 이곳이 마지막 남은 루트였기에 올라가고 있을 뿐이었다.
간신히 가장 꼭대기에 있는 문 앞에 도달해서야 가쁜 숨을 내뱉었다. 혹시나 무엇인가 튀어나오지 않을까 하는 긴장감이 목을 짓눌러서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이미 무기나 방어구라고 말하기 민망한 것을 내려다보던 데미가 눈썹을 찌푸리며 한숨을 푹 쉬었다. 갑옷은 이미 반쯤 망가져서 떨어져내렸고, 칼은 제대로 수리를 하지 못해 날이 무뎌졌다. 이런 칼로 얼마나 더 싸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밀었다. 무거운 문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조금 더 힘을 주어 밀었지만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빗장 같은 것도 없는데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 열리지 않는 문을 바라보던 데미안의 표정이 어두워 질 때 쯤 천천히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열리지 않아 녹이 슬어버린 경첩에서 나는 소리가 탑을 가득 채우며 서서히 사라졌다. 마치 들어오라는 것처럼 열린 문을 바라보던 데미안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방 안으로 들어섰다.
빛이 전혀 들지 않는 방 안은 어두웠다. 어둠에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 눈을 몇 번이나 깜박 깜박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완전히 망가져버린 칼 한 자루를 한 쪽으로 치우고, 나머지 칼의 자루를 꾹 쥐었다. 예전에 들어본 적이 있었다. 분명.
“귀여운 손님이네.”
“누구냐!!”
“남의 방에 멋대로 들어온 주제에 소리를 지르다니 너무 하잖아?”
방금 전 까지 인기척이라곤 없던 공간에서 낯선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흐릿하게 타오르던 촛불이 어둠을 몰아내며 새빨갛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길게 하늘로 올라가며 일렁이는 불꽃 너머로 침대에서 누군가 일어났다. 느릿하게 다리를 쭉 폈다 접으며 바닥에 발을 딛었다. 천천히 일어서서 길게 늘어뜨려진 휘장을 걷었다. 매끈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바닥에 굽이 부딪히면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얼굴은 데미안을 보면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
“안녕?”
“…딕.”
“그렇게 보여? 그럼 그렇다고 하지.”
생글거리는 웃음 뒤로 새빨갛게 흘러나오는 기운을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울컥 울컥 흘러내려서 바닥에 고이기 시작했다. 허벅지까지 탄탄하게 올라오는 부츠를 신은 채 또각 또각 발소리를 내며 걸어오는 모습을 빤히 보면서도 좀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파랗게 타오르는 저 시선이라도 피하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방 한가운데 멍하니 서서 굳어버린 데미안의 어깨를 가볍게 손가락으로 쓸며 빙글 뒤로 돌아간 것이 뒤에서 허리를 안아왔다. 매끈한 검은 가죽 장갑을 낀 손가락이 허리부터 타고 올라와 목덜미에 닿더니 가장 예민한 곳을 살살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반쯤 떨어져 내린 장비는 끈적하게 붙어오는 손길을 보호해 줄 수 없었다. 살짝 허리를 굽혀 목 가까이 입술을 댄 채 낮게 으르렁거리며 웃었다.
“아직 이곳에 오기엔 많이 어려 보이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지? 정말 대단해.”
“…….”
“처음 이 곳에 들어왔을 때부터 보고 있었어. 솔직히 금방 죽을 거라 생각했는데.”
“…져.”
“응?”
“꺼지라고! 딕 목소리로 지껄이지 마!!!”
뒤로 크게 돌아들어오는 칼이 곡선을 만들었지만, 사람이 베인 느낌은 나지 않았다. 연기처럼 흐물흐물 사라진 형체가 데미안의 눈앞에 다시 나타났다. 여전히 눈은 웃고 있었지만 입은 그렇지 않았다. 어린애인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까탈스러워. 부드럽게 옆으로 손을 쭉 뻗자 긴 배틀 사이드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것을 잡은 채 팔을 앞으로 뻗으니 데미안의 가슴에 날이 쿡하고 닿았다. 파랗게 빛나는 날은 잔뜩 이가 나간 검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예리했다.
“어차피 넌 날 못 이겨.”
“…개새끼가.”
“이 얼굴 좋아하잖아. 정말 싸울 수 있어?”
“어차피 진짜가 아니잖아. 어디서 요상한 술수로.”
“술수라니, 네 마음이 보여주는 허상인데.”
“…….”
“어떤 관계지? 좋아해? 자보긴 했니? 아, 어린애라서 그건 무리일까?”
깔깔 웃으면서 자신을 조롱하는 목소리는 나이트 윙이 것이었다. 눈을 깜박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얼굴조차 점점 닮아가 현실과 허상을 구분할 수 없었다. 감정이 없다고 부인하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조롱받을 만한 것도 아니었다. 심장에 닿은 날카로운 것이 살짝 떨어지는 것을 느끼자 데미가 크게 몸을 숙이고 앞으로 튀어나오면서 칼을 휘둘렀다. 칼의 궤적이 간신히 콧대에 닿으려했다. 하지만 유연하게 그것을 피한 것이 무기를 지지대로 삼아 뒤로 한 바퀴를 크게 돌아 저 멀리 물러섰다. 정말 싫었다. 몸놀림마저 딕을 닮아가고 있었다. 그러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데미 앞에 나타났다. 날카로운 날이 목에 바싹 붙어왔다. 날에 스쳤는데 절로 눈썹이 찡그려졌다. 목에서 무엇인가 울컥 흘러내렸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
데미안은 인큐버스와 서큐버스의 방에 걸린 제약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무엇보다 빠르게 처치해야 하는 마물이었다. 시간을 끌수록 마물들은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로 변해갔다. 처음엔 목소리만 그다음은 얼굴이, 종래엔 행동마저 닮아가고 자신의 방에 침입한 자들을 조롱하곤 했다. 그들이 말을 걸고 시간을 끄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이런 곳은 경험이 풍부한 전사들이라도 쉽게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라 조심스럽게 구전으로만 전해 올 뿐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날 잡겠다고? 웃기고 있어. 데미안. 데미안 웨인.”
“그만해!”
“…내 사랑스러운 동생.”
“그만하라고!!!”
“괜찮아? 많이 힘들어 보여.”
“…….”
“위험한 곳에 가지마.”
딕이 말하는 것처럼 가볍게 데미안의 앞으로 다가와 어깨를 감싸며 물어왔다. 체온은 살아있는 인간의 것이 아닌 것처럼 차가웠고, 볼에 찰싹 붙어왔지만 좀처럼 떨쳐낼 수 없었다. 슬슬 주박에 걸려든 가련한 먹잇감을 바라보며 눈으로 웃었다. 그 순간 멍하게 서있던 데미안이 칼을 가슴에 푹 꽃아 넣었다. 채 도망가기도 전의 일이라 깊게 박힌 상처가 벌어지고 검은 재같은 것이 푸스스 떨어졌다. 심장을 움켜쥐고 뒤로 떨어지는 것이 무기를 휘둘러 왔다. 데미안이 한손으로 간신히 그 것을 막아내었으나 힘이 부족했다. 정신에 걸린 속박을 깨기 위해 한 쪽 손을 희생했다. 줄줄 피가 흘러내리는 손은 움직일 때마다 핏자국을 바닥에 새겼다.
“…이번 공격은 제법 아팠어.”
“다음번엔 심장을 도려내주지.”
“…….”
“널 죽이고 여기서 살아 나가겠다.”
***
길고 지루한 싸움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제대로 된 공략 패턴을 숙지하지 못한 데미안을 절대적으로 불리했지만, 천성적으로 가진 싸움의 감각이 도움이 되었다. 비틀비틀 움직이던 인큐버스가 다시 사라졌다. 급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긴장을 하는 데미 눈앞에 반쯤 찢어진 가죽장갑에 싸인 손이 덮쳐왔다.
“…!!!”
“걸렸다.”
무엇에 홀린 듯 그대로 주저앉은 데미가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여전히 칼로 베인 곳에서 검은 연기를 흐리고 있는 몸이 데미 위로 올라탔다. 피가 잔뜩 흘러내려 그대로 굳은 목덜미 쪽에 입술을 댔다. 그대로 혀로 조금 쓸어보기도 했다. 인간의 체온과는 전혀 다른 차가운 것이 닿자 눈에 띄게 당황하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불안하게 뛰는 심장 고동이 그대로 입술에 느껴졌다. 살짝 입을 맞춘 뒤 날카로운 이를 세워서 목을 물어뜯자 어린아이 특유의 약한 살은 금방 찢어졌다. 소리 없는 비명에 작은 몸이 들썩였다. 피가 줄줄 흘러내렸지만 마시진 않았다. 이런 걸 마시는 건 하급 뱀파이어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내 몸이 망가져서 고쳐야 할 거 같아서.”
“…….”
“걱정 마 금방 기분 좋아질 테니까.”
단지 조금 들뜨게 해주려는 것 뿐 이었다. 조금씩 가빠지는 호흡이 느껴지자 만족한 듯 미소를 짓는 인큐버스의 얼굴은 나이트윙과 꼭 닮아있었다. 물어뜯은 곳에선 피가 콸콸 흘러나왔고, 점차 눈 앞이 흐려지더니 핑글 핑글 돌았다.
“…만해.”
“응?”
“그만하라고. 빌어먹을 딕 그레이슨 새끼야!!!”
“난 그 사람이 아닌데. 봐 결국 이럴 거면서.”
쩌렁쩌렁 소리치는 데미 위에 올라탄 인큐버스가 큭큭 웃으면서 식은땀과 피로 범벅이 된 이마를 슥 쓸어올렸다. 한번 정기를 흡수당한 인간은 끝까지 풀어주지 않으면 영원히 풀리지 않는다. 조금 더 귀여워해줄까 싶어서 바락바락 대드는 파란 눈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당장이라도 데일 것 같은 눈빛을 피하기 위해 조금씩 움직이는 것이 한계였다. 물어뜯긴 목이 아릿하게 아파오며 정식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간신히 잡고 있던 정신은 스르르 풀려서 그대로 녹아내릴 것 같았다. 여전히 피가 멎지 않은 것 같았다. 졸음이 밀려왔다.
손길에 따라 민감하게 반응하던 몸이 점점 둔해졌다. 여기 저기 손이 닿는 대로 괴롭히던 것 또한 점점 느려졌다. 이렇게 반응이 없어서야 재미가 없었다. 흥미가 반 쯤 꺾인 표정으로 몸 위에 올라 타 있던 인큐버스가 무엇인가 들은 듯 눈을 깜박거렸다.
“이럴 수가.”
“…손님이 오셨네.”
엄청난 소리와 함께 봉인되어있던 문이 안쪽으로 부서져 내렸다. 오래된 나무가 부서진 먼지가 자욱한 문 밖에서 방금 문을 걷어찬 포즈로 서있는 사람이 보였다. 곧게 수평으로 뻗어있던 다리가 내려가자 가벼운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본능적으로 그 사람이 얼굴의 주인이란 것을 안 인큐버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 안에서 무슨 허상을 보여주던지 능력만 된다면 무엇이든 가능했지만, 얼굴의 주인이 직접 나타난 경우는 불가능했다. 연기처럼 사라지는 허상의 얼굴이 불에 탄 종이처럼 흩날려 사라졌다. 끝까지 재미를 보지 못한 것은 조금 아쉬웠지만 자신이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딕이 입고 있던 갑옷을 본 딴 허상이 벗겨져 내렸다. 이내 파리한 피부와 딱 달라붙는 옷을 입은 원래의 모습이 나타났다. 길게 펼쳐진 검은 날개가 온 몸을 가리고 있었다. 여전히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꼿꼿하게 서있던 몸이 점차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싸우고 싶어도 싸울 수가 없네요. 이 방에 둘 이상의 사람이 들어온 이상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으니 말입니다.”
“…….”
“아, 저기 있는 도련님은 아직 제댈 풀지 못하셨을 테니 알아서 해주시길.”
“…….”
“그럼 이만. 나중에 다시 오시면 그때 다시 대접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반쯤 부서져 내린 몸이 한 번에 와르르 쏟아져 내리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어두운 방 안에 하나 둘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계단 아래쪽에서 햇빛에 몸이 타들어가는 몬스터들의 비명이 처절하게 울려왔다. 인큐버스가 제어를 포기한 오래되고 낡은 성은 점차 햇살 속에 삼켜지기 시작했다.
“데미…데미안!”
“…….”
“정신 좀 차려봐. 괜찮아?”
“…….”
멍하니 방 안을 쳐다보던 딕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데미안을 허겁지겁 안아 올렸다.피를 제법 흘렸는데도 불구하고 유난히 뜨거운 몸이 온몸에 찰싹 붙어왔다. 펄펄 끓는 몸과는 반대로 파랗게 질린 입술은 도통 제 색을 찾지 못했다. 회복제도 넘기지 못해 결국 입으로 옮겨주었다. 한참동안 입을 맞추고 간신히 물약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입술을 뗐다.
“…설마.”
“…….”
간신히 붉은 빛이 돌아오는 입술에서 얕은 숨이 터져 나왔다. 몇 번 기침을 하고나자 발갛게 달뜬 눈이 딕을 쳐다보았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느껴지자 한시름 놓은 딕이 작은 몸을 좀 더 안으며 얼굴을 푹 숙였다. 그때 딕의 입술에 펄펄 끓는 것이 닿았다.
“데미…읍…잠깐.”
어설픈 움직임이 입술을 덮치고 그대로 팔을 목에 둘렀다. 삐그덕 거리는 갑옷들의 마찰음이 시끄러웠지만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끙끙 거리며 앓는 작은 아이를 안아든 딕은 당황스러움에 어쩔 줄 몰랐다.여전히 열이 펄펄 끓는 온몸은 무엇인가 원가는 것처럼 자꾸 붙어왔고, 달뜬 눈은 항상 날카롭게 보이던 푸른 눈을 흐리게 만들었다.
간신히 데미안을 안고 성을 빠져나온 딕은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
가까운 여관을 잡고 데미안을 침대에 눕힌 딕이 한숨을 쉬면서 갑옷을 벗겼다. 이미 날이 다 나가버린 검은 한 구석에 세워두었다. 갑옷이라 부르기도 민망하게 망가진 것을 벗기는 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옷깃을 풀어서 좀 편하게 해주고 자신도 갑옷을 벗었다. 다른 사람보다 가볍게 입고 다니는 딕이지만 오늘따라 어깨가 너무 무거웠다. 침대에서도 끙끙 앓으며 몸을 둥글게 웅크리는 녀석을 보다 식은땀에 푹 젖은 이마를 슥 쓸어주었다. 좀처럼 피가 멎지 않던 목의 상처는 붕대를 몇 번이나 갈았는데도 불구하고 벌써 불그스름하게 피가 비치고 있었다.
“데미…정신 좀 차려봐.”
“…….”
“하아.”
동그랗게 잘생긴 이마를 쓸어주다 볼을 감싸 쥐었다. 자잘한 상처가 손끝에 걸리자 가슴이 뜯기는 것처럼 아팠다. 아직도 열이 펄펄 끓는 이마에 물수건이라도 얹어줄까 싶어 의자에서 일어나는데 누군가 상의를 턱 잡았다. 놀라 뒤를 돌아보니 가늘게 눈을 뜬 데미안의 손이 힘겹게 셔츠를 잡고 있었다.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말을 해봤지만 듣지 않았다. 평소엔 절대 그러지 않을 투정을 부리며 끌어당기는 통에 결국 침대 한켠에 주저앉고 말았다.
“데미안. 잠깐만 나갔다 온다니까?”
“…….”
“데미?”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꾸 셔츠를 당기는 행동에 딕은 잠시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좀 더 힘을 주어 손을 떼어내려 했지만 오히려 더 단단히 잡아오는 작은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멱살을 움켜잡은 채 딕의 상체를 반쯤 굽히게 만든 데미가 다시 입술을 겹쳐왔다. 딕은 빠르게 상황을 알아차렸다. 채 풀리지 못한 인큐버스의 주술의 영향이리라. 성인 전사들도 잘못하면 호되게 고생을 하는 것인데, 그보다 작은 아이가 한 번에 당했다면 볼 것도 없었다.
“안 돼.”
“…….”
“이건 네가 원하는 게 아닐 거야.”
“…….”
그 말을 끝으로 어설픈 놀림의 혀가 입술을 파고들었다. 떨쳐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리드를 할 수도 없는 딕이 어정쩡하게 앉은 채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분명 이성은 남아 있을 것 같아 몇 번이나 불러보았지만 데미안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일부러 대답을 피하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달뜬 숨을 내뱉긴 했지만 눈은 또렷했다. 잔뜩 붉어진 얼굴이 딕의 얼굴에 닿았다. 몇 번이나 망설이던 딕이 데미를 침대에 눕히며 위로 천천히 올라탔다. 어른의 무게가 더해진 침대가 삐걱 소리를 내며 짧은 소리를 냈다.
***
다음날 데미안을 안고 돌아온 딕은 자신을 몬스터 보듯 대하는 사람들의 눈초리를 그대로 느껴야 했다. 조금 억울하긴 했지만 달리 하소연 할 곳이 없었다. 잔뜩 쉰 목소리로 자신을 붙잡는 데미안을 뿌리치지 못하고 잠이 들 때가지 침대 곁을 지켜주었다. 데미안은 이틀을 앓아누웠고, 딕은 이리저리 불려다니며 제법 고생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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