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희미했다. 작은 아이가 감당하기엔 너무 위함하고 커다란 도시에서 그다지 좋은 기억은 없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구원의 손길이 내밀어지기 전까지 그렇게 낮이면 태양을 따라 밤이면 어둠의 길을 따라, 그러다 너무 무서우면 잠시 달이 비추는 길을 따라 걸으며 생활했었다. 찬찬히 되짚어보는 어린 시절의 최초이자 최후의 기억은 배트맨의 커다란 손이었다. 자신의 허벅지를 베고 누운 채 잠이든 막내의 머리를 살살 쓸어보던 딕이 피식 웃으며 망토를 좀 더 당겨 덮어주었다.
그는 배트맨이 처음으로 들인 작은 울새였다.
메타휴먼들이 피라미드의 정점에 서서 모든 것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세상은 부모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작은 소년이 살아가기엔 너무 차가웠다. 조금의 엇나감도 용납하지 않는 사회는 고작 한사람 몫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떠돌이 아이에겐 일말의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분명 저 아이에게도 부모란 존재가 있었을 테지만, 두려움에 가득 차서 굳어버린 입은 한마디 변명조차 하지 못했다.
거리에 돌아다니는 아이들은 이 도시의 질서를 해칠 위험이 있다. 그러니 한 곳에 모아 관리해야한다. 그것이 지침이었고 절대적인 명령이었다. 수많은 고아들이 감시의 눈을 피해 도시의 가장 어두운 곳으로 도망쳤으나 성공한 사람은 없었다. 그런 와중에 어깨를 잡힌 채 질질 끌려온 작고 마른 남자아이는 이 구역에서 잡혀온 서른다섯 번 째 고아였다.
“이름은?”
“…….”
“다시 한 번만 더 묻겠다. 이름은?”
“…….”
벌벌 떨리는 입술을 진정시키기 위해 꾹 깨문 채 고개를 푹 숙인 아이는 말이 없었다. 사실 이름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보호 시설에 들어가면 사회에서 불리던 이름 따윈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두어 번 더 다그치듯 이름을 묻던 어른은 이내 포기하고 서류에 적당히 신상명세를 적고 사인을 했다. 마지막이었다. 동물을 팔아넘기는 것처럼 너무나 간단한 절차는 뭐라고 변명을 생각해낼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데려가.”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끼고 억지로 버텨보았지만 형편없이 마른 몸은 성인 남자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 질질 끌려가던 아이가 우뚝 멈춘 건 뒤에서 들려오는 낮고 단단한 목소리 때문이었다. 철저하게 복종을 훈련받은 병사는 상관의 말에 한마디 불만도 표하지 않은 채 멈춰 섰다.
그 순간 자신의 어깨를 움켜쥔 힘이 느껴지지 않자 아이가 크게 어깨를 틀었다. 유연한 몸이 틈을 놓치지 않고 손아귀를 빠져나왔다. 최대한 이 곳을 벗어나려고 달리던 아이는 단단한 벽에 부딪혀 그대로 넘어졌다. 마른 몸이 땅바닥에 뒹굴었다. 다시 일어나서 도망가려고 생각을 했지만 좀처럼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대로 달려온 어른이 아이의 어깨를 쥐고 뺨을 때렸다. 부러질 듯 휙 돌아간 얼굴은 곧 새빨갛게 부어올랐다. 정말 끝이었다. 신이 아닌 악마라도 자신을 여기서 구원해 준다면 기꺼이 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입안에 퍼지는 비릿한 피를 꿀꺽 삼킨 아이가 고개를 푹 숙였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에서 하얗게 마른 목이 언뜻 보였다.
“죄송합니다. 이런 일이 없었는데 이 녀셕이…당장 시정하겠습니다.”
“아냐. 그대로 있도록”
“네? 아, 네!”
“…….”
물러선 채 뒷짐을 선 사람을 훑어보던 눈이 자신에게 부딪혔던 작은 아이에게 머물렀다. 먼지가 묻어 더러워졌지만 결이 좋은 검은 머리카락과 푸른 눈이 보였다. 긴 속눈썹 아래에서 불안하게 이리저리 움직이는 눈동자를 보았을 때 갑자기 변덕이 생겼다.
“나와 함께 가면 이 곳에서 꺼내주마. 어떻게 생각하지?”
“네?”
“난 여러 번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 그리고 똑똑하지 않은 어린이도 싫어하지.”
“가요. 갈게요! 제발 날 데려가줘요.”
볼이 부어오르고 눈 주위에 그새 멍이 든 아이가 허겁지겁 망토를 붙잡고 매달렸다. 악마라도 상관없었다. 그것이 비록 자신을 노리고 말하는 달콤한 유혹일지라도 아이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었다. 차마 누군지 올려다보지 못하고 망토를 움켜쥔 채 벌벌 떨던 아이를 내려다보던 검은 그림자가 점차 가까이 오더니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쑥 일으켰다.
“지금부터 일어날 일은 모두 네가 선택한 것이다. 알았나?”
“…….”
“대답.”
“네.”
“좋아. 널 여기서 꺼내주마.”
찬찬히 아이를 훑어 내리는 시선이 사라지자 그는 망토로 작은 몸을 덮어씌운 채 그 곳을 빠져나갔다. 딕 그레이슨. 지옥 같은 곳에서 처음으로 박쥐의 손에 이끌려 빠져나온 아이였다.
***
“주인님 돌아오셨습니까. 그런데…….”
“오늘부터 이 집에서 살게 될 아이니까 적당히 씻겨서 방을 내주도록.”
“…….”
“이런 일은 처음이군요. 곧 로드께서 주인님을 소환하시겠습니다.”
아이를 집사 앞에 세워둔 배트맨은 곧 자신의 서재로 들어갔다. 불안하게 눈만 이리저리 움직이며 집 안을 쳐다보는 아이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시선을 맞춘 늙은 집사는 가볍게 웃으며 아이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온몸에 묻은 먼지와 더러운 것들을 씻어내고 적당한 옷을 입히자 제법 그럴듯한 얼굴이 나타났다. 벌겋게 부어오른 볼과 눈을 보자 집사가 짧게 혀를 차고 아이를 소파에 앉힌 후 얼음주머니를 만들러 부엌으로 사라졌다.
거실로 돌아온 집사의 눈에 보인 것은 긴장이 풀려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아이였다. 작게 웃은 후 가볍게 어깨를 흔들어 깨우고 손을 잡았다.
“침대로 가시죠.”
“…….”
그렇게 딕이 반나절을 자고 일어났을 때 배트맨은 저택에 없었다. 여전히 불안하게 방안을 배회 하다 이내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웅크린 아이는 좀처럼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았다. 집사가 어르고 달래 아침을 먹인 것이 전부였다. 배트맨이 돌아왔을 때 아이는 배트맨의 사이드 킥이 되어있었고, 최초의 로빈이 되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
“좋아. 이름은 그다지 상관없지.”
“…딕.”
“딕이라 부르면 되겠나?”
말없이 끄덕이는 아이가 자꾸 배트맨에게서 멀어지려 했다. 하지만 배트맨이 말하는 것을 거부하진 않았다. 아이답지 않게 눈치가 빨랐고, 적응도 빨랐다. 사이드 킥으로 일하기 위해 천천히 훈련을 받으면서 점차 집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으응,”
“조금 더 자도 괜찮아 데미안.”
“…응.”
뒤척거리는 동생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리며 딕이 마저 생각을 하려나 이내 그만둬 버렸다. 결국 이 집에서 자라고 나이트 윙이 되었다. 둘째인 제이슨이 들어오고 셋째인 팀, 그리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막내가 들어오면서 점차 어깨가 무거워진 딕은 강박적으로 형제들을 싸고돌았다. 자신이 받았던 과거의 기억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동생들을 위해선 그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살짝 비틀어진 채 굳어버린 가치관은 생각보다 위험했지만, 역린을 건들이지만 않으면 괜찮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데미안에 대해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예민한 반응을 보였기에, 항간엔 헛소문이 떠돌기도 했다. 그렇게 자라온 나이트 윙은 자신의 가족을 제외한 모든 이들을 경계의 눈으로 쳐다보았다. 브루스가 자리를 비우면 실질적으로 집안을 건사하는 것은 딕이었다. 그런 딕에게 불만을 표하는 것은 곧 배트맨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과도 같았기에 사람들은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난 너희들을 아무도 건들이지 못하게 할 거야.”
“…….”
“가족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가볍게 웃으며 데미안을 안아든 딕이 침실로 향했다. 겉과 속이 다른 긴 망토가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며 계단에 늘어졌다. 오늘은 브루스가 돌아왔으면 좋겠다 생각했지만,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데미안을 침실에 데려다 두곤 배트맨의 대리로 저스티스 로드에 가야했다. 딕은 그 곳에 가는 것을 싫어했지만, 가야만 했다. 그래야 가족이 편안할 수 있었으니까. 배트맨이 없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신을 불러들인 로드의 속셈을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살짝 눈을 찌푸리며 멈춰 선 딕의 귀에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