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럼로우버키/럼벜] 벜른 전력60분 : 추억의 책장을 넘기면 + 담요
+) NOTICE
캡틴 아메리카 : 시빌워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루마니아에서 있었던 일을 망상 날조중입니다
윈터솔져 와 이어지는 내용이 있습니다
적당한 망상과 설정 붕괴가 언제나 함께 합니다 ㅇㅅㅇ)9
write. 환월
럼로우는 천천히 이 녀석과 정을 떼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몇 번이나 이대로 모른 척 살자고 생각하긴 했지만, 둘의 팔자는 그런 작은 소원을 이룰 수 없을 만큼 망가져 있었다. 사실 일찌감치 끝내야 할 인연이었다. 하지만 욕심이 들어 끝까지 잡고 있었는데, 그것마저 더는 미룰 수 없었다.
“나 참.”
“…….”
“그렇게 시간이 많은 땐 싸워대기만 하더니, 왜 요즘은 이러냐.”
“…….”
“응? 에셋. 왜 그래.”
“…….”
럼로우는 잠이 안 오는지 자꾸 뒤척거렸다. 그러다 결국 일어나 앉았다. 그 옆엔 에셋이 있었다. 그렇게 매트리스에서 자라고 할 땐 듣는 척도 하지 않더니 요즘 들어 얌전히 잔다. 약간 웅크리고, 옆으로 누운 채 말이다. 그런 에셋을 바라보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 녀석을 여기다 혼자 둬도 괜찮을까. 그런 생각만 들었다. 반쯤 욕심으로 이용하고자 데리고 온 무기일 뿐인데, 왜 이렇게 인간적인 연민이 흐르는지. 럼로우는 자신이 죽을 때가 된 거로 생각했다.
“예쁜아.”
“…….”
“…넌 빨리 잊으니까 그냥 잊고 편하게 살아.”
“…….”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진 모르지만. 네 녀석이 살아가는 덴 차라리 빨리 잊어버리는 편이 나을 테니까. 내가 아무래도 끝이 보이는 것 같다.”
“…….”
오늘따라 칭얼거리며 잠투정도 하지 않는다. 이렇게 주변에서 혼잣말이 들리면 부스스 일어나 눈을 번득이던 녀석은 오간데 없고, 팔자 좋게 웅크린 남자가 있을 뿐이었다. 럼로우의 손이 천천히 에셋의 뒤통수를 어루만졌다. 그러더니 괜히 푸석푸석한 브루넷을 만져본다. 망가진 머리카락이 툭툭 끊어질 것처럼 손가락에 감겨들었다. 이렇게 쓰다듬어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 테니까. 조금은 욕심을 부려보기로 했다. 머리를 만지작거리던 손이 천천히 볼로 넘어갔다. 까칠한 수염이 손에 쿡쿡 박혔다. 럼로우가 눈을 찌푸렸다. 다른 준비가 바빠 제일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
‘아. 가기 전에 면도 좀 해줘야겠는데.’
머리도 확 잘라줄까. 옷은 어쩌지. 럼로우는 자신에 대한 걱정은 그리하지 않았다. 어차피 살 만큼 살면 죽을 것이 확실한데, 굳이 그런 고민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 녀석은 조금 달랐다. 좋든 싫든 자신이 주워온 놈이었고, 지금까지 먹이고 입히면서 데리고 살았다. 살가운 성격은 아니었지만, 같은 집에서 계속 지내는 동안 알게 모르게 마음이 쓰였던 것은 사실이었다. 아무것도 못하는 녀석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 덜렁 놔두고 가자니 영 찝찝했다.
“에셋. 나 없이 괜찮겠냐.”
“…….”
“어차피 너 평생 데리고 살 생각도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복잡한지 모르겠다.”
“…….”
“이 백치가 잘살 수 있으려나.”
“…….”
“백치야.”
“…….”
“이제 이렇게 부를 날도 얼마 안 남았어.”
나름 귀여워 해줬다고 생각했다. 물론 욕도 하고, 구박도 좀 하긴 했지만. 남보다 잘해준 건 없어도, 안 먹이고 안 입히긴 않았다. 처음 주워왔을 때보다 확실히 살도 붙고 제정신을 찾아가는 녀석을 보면 불안하면서도 뿌듯했다. 물론 애초에 시작하면 안 될 인연이란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버린 걸 되돌릴 수 없었다. 럼로우는 새벽 동이 틀 때까지 그렇게 뜬 눈으로 매트리스에 올라앉아 에셋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침 해가 좁고 더러운 방 안에 흘러들어오면 녀석은 곧 일어난다. 편하게 늘어져 있던 자신을 보고 놀라며 몸을 웅크린다. 그리고 뒤를 돌다 럼로우와 마주친다.
“…….”
“깼냐.”
“…….”
“더 자지. 왜 벌써 일어났어.”
“럼로우.”
“오늘은 운이 좋은가. 왜 일어나자마자 날 부르고 그래.”
“…어디 가?”
“…….”
“이번엔 밤이 몇 번이나 지나면 돌아오는 데?”
“…….”
아.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 백치는 자기가 기억하는 습관은 잊어버리지도 않았다. 럼로우가 늘 하던 말을 믿고 있었다. 남자가 자신을 버리지 않겠다는 확신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럼로우는 늘 어느 정도 지나면 돌아온다 말했고, 거의 지켰다. 딱 한 번 일이 늦어지고 시간이 애매해 이틀 정도 늦은 적이 있었다.
럼로우가 피곤함에 찌든 몸으로 방문을 열었을 땐 눈이 불타는 것처럼 번뜩이는 버림받은 개새끼 하나가 앉아있었다. 눈물 흘리는 방법도 까먹어버린 불쌍한 백치는 마른 눈물 대신 새빨간 불똥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울고 있었다. 버림받는 것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찾았다. 럼로우는 짠한 마음에 그 불쌍한 개새끼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먹지 않고 가져온 군용 초콜릿을 까서 입에 넣어주곤 했다.
“며칠이나 있어야 하는데? 어려운 일이야?”
“…….”
“럼…로우?”
“음…그러니까. 예쁜아. 내 말 좀 들어 봐.”
“싫어.”
눈치 빠른 새끼가 고개를 저었다. 분명 몸으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진실을 입으로 듣는 것이 무서워 귀를 막았다. 에셋이 귀찮게 굴 때마다 럼로우는 이러다 나 그대로 칵 죽어버릴 거라 하긴 했었다. 어느 순간 내가 널 버려도 너무 슬프게 생각하지 말고 알아서 살라는 말도 했었다. 하지만 그땐 그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어서 귀담아듣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들어.”
“싫어.”
“…….”
“집 며칠 동안 비울 건지만 이야기해. 다른 건 안 들어.”
“새끼…진짜.”
“…….”
“나도 할 일이 있어. 네 녀석 뒤치다꺼리하면서 늙어 죽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 엉? 이 멍청한 백치가 좀 귀찮게 해야지.”
“…….”
“그래서 그러는 거야. 어차피 사람은 살면서 끊임없이 헤어지고 만나는 거잖아.”
“난…그런 거 몰라.”
“…….”
또 백치인 척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하이드라의 무기 시절마냥 아는 것이 없다면서 어깃장을 놓았다. 럼로우의 표정이 점점 나빠졌다. 그런 녀석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에셋은 럼로우의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자꾸 다른 쪽을 보면서 눈을 굴렸다.
“예쁜아. 눈 굴러가는 소리 들린다.”
“…….”
“별거 아니야. 그냥 원래 여기 혼자 있었던 것처럼 살아.”
“…….”
“아니면 내가 한 천일 밤 정도 지나면 돌아온다고 생각해. 그러면 되잖아.”
“…….”
무릎 위에 올라앉은 손을 쓰다듬는다. 시간도 없는데 이 녀석은 자꾸 칭얼거리기만 한다. 어쩌면 면도도 해줄 시간이 없을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깨끗하게 씻겨두고 나가야 어디 가서 주인 없는 개새끼 소리는 듣지 않고 살 텐데. 남자의 마음이 급해졌다. 시간은 남자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째깍 거리는 시곗바늘은 자꾸 재촉만 했다. 럼로우는 결국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에셋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싫다는 녀석을 억지로 화장실로 끌고 들어가 천천히 설명하면서 수염을 깎아줬다.
“…….”
“어디 가서 거지꼴로 다니지 말고 내가 하는 거 잘 보고 배워.”
“…싫어.”
“새끼. 진짜.”
“싫어. 럼로우.”
“…….”
“왜 자꾸 이러는 거야.”
“그냥 닥치고 얌전히 있어.”
남자의 손이 조금 바빠졌다. 수염을 말끔하게 깎아냈지만, 머리까지 다듬어줄 시간은 없을 것 같았다. 매트리스 구석에 가서 한껏 웅크린 채 럼로우를 쳐다보지도 않는 에셋은 또 새빨간 불똥을 뚝뚝 떨어뜨렸다. 차라리 가지 말라고 울기라도 했으면 이렇게 마음이 무겁지 않았다.
“예쁜아.”
“…….”
“예쁜아. 내 말 좀 들어봐.”
“…….”
“혹시 다시 돌아올 수도 있어. 그때까지 집 잘 지키고 있어. 집세는 내가 알아서 해놨고, 먹을 건 대충 나가서 사 먹어.”
“…….”
“굶지 말고,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먹고.”
“…….”
“그냥 그렇게 살아.”
그렇게 말하자 에셋이 주춤주춤 고개를 들었다. 새빨갛게 변한 눈 한쪽에서 채 식지 않은 불덩이가 주르륵 떨어졌다. 이젠 정말 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럼로우는 에셋이 바라보는 시선을 무시하면서 집을 나가버렸다. 갑자기 혼자 남겨진 동물은 늘 하던 일만 했다. 멍하니 매트리스에 걸터앉아 몇 시간씩 벽만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뭔가 잊어버리고 나갔다며 한 소리 하는 럼로우가 돌아올 것 같았다.
“…….”
갑자기 한기가 느껴졌다. 이곳에 살기 시작하고 꽤 오랫동안 잊어버렸던 고통이었다. 에셋은 두 팔로 어깨를 꽉 끌어안은 채 오들오들 떨었다. 하지만 뼈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냉기를 막을 수 없었다. 더듬더듬 담요를 찾았다. 럼로우가 항상 두르고 자던 낡은 담요가 손끝에 걸렸다. 백치는 그 담요를 냉큼 끌어다 푹 덮어썼다. 담요 한 귀퉁이에 코를 박으니 알싸한 담배 냄새가 났다. 예전엔 그렇게 싫어하던 냄새였는데, 오늘은 그 냄새가 공기 중에 흩어지는 것조차 아까웠다.
“…럼로우.”
대답해줄 사람이 없는 공간에서 몇 번이나 혼잣말하던 녀석은 무릎에 어깨를 푹 박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 동안 먹지도 않은 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혼자 있는 시간이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났다. 일주일쯤 지났을 때 백치는 이제 정말 아무도 이곳에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며칠 동안 움직이지 않은 관절이 비명을 질렀다. 뻣뻣하게 굳은 몸으로 식탁에 주저앉았다. 기억 노트가 정리되지 않은 채 엉망으로 내팽겨져 있었다. 누가 그랬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백치는 펜을 들고 뭔가 적으려 했지만,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
물끄러미 캡틴 아메리카의 사진을 바라보던 에셋은 꼭꼭 숨겨둔 다른 공책을 꺼냈다. 약간 낡고 빛이 바랜 공책은 꼭 럼로우처럼 새카만 색이었다. 그 공책의 첫 장을 펴고, 럼로우에 관한 기억을 썼다. 생각보다 많이 쓸 수 없었다. 분명 머릿속에선 추억의 책장을 넘기는 것처럼 온갖 정보가 생각나는데, 손은 그것을 쓰기 거부했다. 몇 번이나 고르고 골라 이름을 적었다. 브룩 럼로우. 그러자 또 쓸 말이 없어졌다. 살가운 말을 해준 것도 아니고, 보물처럼 다룬 것도 아니었다.
“럼로우.”
몇 번이나 빈 공책을 넘겨보던 백치는 결국 쓰는 것을 포기했다. 추억이라고 하신 간질거리는 처절한 생활은 며칠이 지나자 기억 노트 한쪽에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앞쪽부터 예쁘게 정리하진 않았다. 책장을 넘겨보면 꼭 백치의 뇌처럼 드문드문 적혀있는 글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럼로우가 떠난 지 한 달이 되던 날. 에셋은 처음으로 밖에 나왔다. 백치의 성정을 잘 아는 남자는 한 달 정도론 상하지 않는 저장식품을 빼곡하게 채워두고 나갔다. 그 덕분에 배는 곯지 않았다. 멍하니 시장통을 걸어 다니며 자기도 모르게 자두를 하나 골라잡았다. 럼로우가 기분이 좋으면 곧잘 사서 입에 물려주던 과일이었다. 조금만 힘을 주면 금방 터질 것 같은 과일을 손에 쥔 채 백치는 하염없이 걸었다. 걷고 걷다 더러운 물이 흐르는 하천에 다다랐다. 백치는 자두를 우물거리며 멍하니 물을 쳐다보았다. 럼로우랑 왔던 곳이었을까. 그것까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첨벙.
백치는 럼로우와 루마니아에서 살았던 이야기를 적어둔 공책을 통째로 물에 빠뜨렸다. 더러운 물이 낡은 종이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곧 보이지 않았다. 가슴 한구석이 저릿하게 아파져 왔다. 이렇게 기억을 써내려가고 물에 빠뜨려 없애버려도, 없던 일이 되지 않았다.
아무리 돌아오지 않겠다고 나갔지만, 설마 하는 마음에 기다렸다. 개는 주인이 사라진다는 감정을 모른다. 언젠간 이곳에 돌아올 것을 알고 그저 집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답답한 가슴에 맺혀있던 응어리가 입술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목에 걸려 움직이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개새끼는 주인이 남기고 간 담요를 다시 둘러 감았다. 이젠 희미해진 담배 냄새를 찾기 위해 담요에 코를 박고 킁킁거렸다. 하루가 지날수록 희미해지는 담배처럼 집 안엔 사람 사는 냄새가 나지 않았다. 몇 번이나 끙끙거리던 녀석은 달이 기울고 나서야 간신히 잠이 들었다.
+)
럼로우랑 버키는 미래가 예정 되어있다는 것이 슬프고도 매력적인것 같아요
아마 둘이 루마니아에 살았다면 서로 외사랑에 가까운 익숙해짐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제일 비슷한 관계는 유기견 데려왔는데 사업이 망해서 야반도주하는 주인 정도..일까요?
버키가 사람이 떠난 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은텐데, 어려울 것 같아 늘 쓰면서도 걱정입니다
제가 냈던 럼벜 Some day 에서 한문단정도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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