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히삼/제갈유비] 창공의 전기(蒼空之傳記) 009
+) NOTICE
레전드 히어로 삼국전 2차 연성입니다.
유비와 제갈량 / 조조와 사마의 / 손책과 주유가 각각 궁의 주인과 신선으로 나옵니다.
제갈유비 연성으로 시작했지만, 둘이 만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수 있습니다.
동양 AU 및 설정 날조가 항상 함께합니다.
적당한 망상과 설정 붕괴가 언제나 함께 합니다 ㅇㅅㅇ)9
write. 환월
며칠 조용한가 싶었다.
하지만 서서가 그렇게 얌전할 리 없는 일이었다. 처음 갔을 때보다 더 대담하게 놀러 다니곤 했다. 이젠 기거하는 곳이 궁인지 인간계인지 알 수 없었다. 제갈량은 몇 번이나 서서를 붙잡고 도술을 가르치려 했지만, 도통 말을 듣지 않았다.
‘서서, 오늘은 해야 합니다.’
‘하지만…별로 재미없는걸.’
‘그렇게 싫다고 안 하면 나중에 어쩌려고 그럽니까.’
‘그야. 제갈량이 해주지 않을까?’
‘…….’
‘도술 같은 거 재미없고, 제갈량이랑 있는 쪽이 훨~씬 재밌는데.’
‘내가 없으면 어쩌려고…….’
‘흐응.’
서서가 웃기 시작하면 천하의 제갈량도 당해낼 수 없었다. 이렇게 말에 독기가 빠진 것은 처음이었다. 혼자 있던 시간이 길어서인지, 훌쩍 들어온 서서의 존재가 생각보다 더 컸다. 어차피 이렇게 평생 주군을 기다리다 사라질 운명이었다. 애써 나쁜 생각은 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성이 침착하게 현실을 물고 들어온다. 눈을 돌린다고 해서 끝날 일은 아니었다. 차라리 인정하는 편이 나을까. 아니면 죽기 직전까지 버둥거리면서 응당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나을까. 제갈량의 속은 복잡하게 꼬인 개미굴과도 같은데, 서서는 그런 제갈량의 마음을 다 읽지는 못한다.
물론 그러니까. 마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달라는 표현은 아니었다. 이런 고통은 혼자 지고 가면 충분했다. 힘든 쪽이 있으면 그저 즐거운 방향도 있어야 한다. 제갈량은 전자였고 서서는 후자였다. 혹시나 다음 대 군주가 나타난다면. 적어도 서서는 궁에 대해 좋은 기억만 가지고 살아갈 수 있으리란 생각을 했다.
“제갈량은 항상 최악의 상황까지 생각해?”
“그래야 이곳이 계속 이어질 수 있으니까요.”
“늘 이렇게 있으면 심심하지 않아?”
“익숙합니다.”
“…….”
“요새 인간을 만나러 자꾸 인간계에 가는 거 알고 있어요.”
“어…알았어?”
“모를 리 가요.”
가볍게 한숨을 쉰다. 물론 크게 혼낼 생각은 아니었다. 신선이 움직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본능적인 일이다. 분명 인간계에 뭔가 있으니 서서가 그리도 내려가고 싶어 하는 것이겠지. 그렇지만 제갈량은 아직 인간계에 정이 붙지 않았다. 한발만 비틀리면 그대로 원망이 인간계에 옮아붙을 것이 뻔했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되는 일이기에 꾹꾹 참고 있었다.
“하지만…너무 가까이하진 마세요.”
“알았어.”
“모든 인간이 그렇다는 소리는 아니지만…….”
“…….”
“서서 생각보다 비틀린 쪽이 많으니까요.”
“…….”
“그냥 그렇단 소립니다.”
“알았어. 조심할게!”
“그리고 괜히 다른 곳에 기웃거리다 다른 신선 눈에 띄지 말고요. 그럼 좀 일이 복잡해집니다. 애초에 신선이 마음대로 인간계를 오가는 건…….”
“알았다니까. 우리만의 비밀?”
“…….”
“헤헤.”
허. 제갈량은 허탈하게 웃어버린다. 순수한 것도 나쁘진 않겠지. 게다가 말린다고 안 갈 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갈 거면 안전하게라도 돌아오라고 하는 편이 나았다. 서서를 만나고 나서 자꾸 한 발짝 물러서게 된다. 주군한테도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누가 보면 웃을 일이었다.
“그럼 다녀올게.”
“도대체 인간계에 무슨 보물이 있어서…….”
“신기한 게 엄~청 엄청 많다니까.”
“…….”
“제갈량도 보면 좋아할 거야.”
“나중에 생각해 보죠.”
“매일 그러더라.”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한다. 제갈량은 어서 가보라며 서서를 보낸다. 서서가 사라지면 오늘은 편전 정리도 해야 했고, 며칠 동안 하지 못한 명상도 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힘이 흔들리면 궁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서서의 미미한 도술이 도움이 되긴 하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은 늘 제갈량이 감당해야 했다.
‘또 저렇게 가는군.’
궁을 나서는 이가 모두 무사히 돌아오길 빌었다. 주군도 저렇게 가볍게 웃으면서 궁을 나섰고 다신 돌아오지 않았다. 제갈량은 그 기억 때문에 서서를 과보호하려고 하는지도 몰랐다. 떠난 이가 돌아오지 않으면 기다리는 사람은 하염없이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했다. 몇 번이나 그만둘까 싶은 생각이 들어도 결국 다시 제자리로 올 수밖에 없었다.
서서가 돌아오면 그렇게까지 인간계에 가는 이유와 거기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좀 더 자세하게 물어봐야겠다. 제갈량은 이렇게 생각한다. 신선의 감은 쉽게 흘려보낼 것이 못 되었다.
**
“아, 안녕하세요!”
“우리 또 만났다! 그렇지?”
“정말 그러네요.”
“못 찾을까 봐 걱정했는데.”
“…절요?”
“응. 내 친구니까.”
서서는 큰 장이 열리지 않으면 항상 유진을 찾았다. 신선의 능력을 조금만 이용하면 사람 하나 찾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물론 그렇게 자꾸 나타나는 서서를 보는 유진의 눈이 점점 반짝이는 것은 덤이었다. 어린 소년은 서서를 선녀 정도로 취급하는 모양이었다. 사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그리 틀린 소리도 아니었다. 어디 사는지도 알려주지 않고, 훌쩍 사라졌다가 훌쩍 나타난다. 그리고 언제나 곱고 좋은 옷을 입고 다니는데 세상 물정을 하나도 모르기까지 했다.
“왜 이렇게 잘해주는지 모르겠어요.”
“왜?”
“그냥요. 난 맨날 혼나기만 하는데…….”
“우린 친구잖아.”
“그것도 이상하다니까요. 형이 자꾸 높은 분들이랑 엮이지 말라 했거든요.”
“나 높은 사람 아니야.”
“에이.”
“정말인데…….”
서서는 금방 시무룩해진다. 애초에 높은 사람이라는 뜻도 모르겠거니와 이제 겨우 사귄 친구가 자신을 서먹하게 대하는 것 같아서 슬펐다.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 한 소년은 또 서서가 그러는 것을 지나치지 못한다. 애써 밝게 웃으면서 옷자락을 덥석 잡는다.
“저쪽으로 가요.”
“…응?”
“여긴 사람이 많으니까.”
“그래!”
유진은 이리저리 쏘다니면서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이 장터의 지리에 밝았고, 어디로 가야 사람이 좀 덜한지도 알고 있었다. 그런 유진이 내내 신기한 서서는 자꾸 질문이 늘었다. 묻고 싶은 것도 많았고, 유진이 데려가 주는 장소에 신기한 것도 많았다. 서서가 알고 있는 사람이라 치면 제갈량과 주유. 그리고 사마의와 사마휘님. 유진이 전부였다. 애초에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선인 데다 군주가 없는 궁에 들어와 살다 보니 권속조차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런 서서에게 유진은 신기한 존재였다. 나무 그늘에 앉아서 계속 종알종알 말을 건다. 장터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까지 올라오는 이는 별로 없었다. 큰 나무는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면서 베어 넘기지 않아서 이곳은 제법 울창하기까지 했다. 서서는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런 손에 잡힐 리 없었다. 괜히 민망해서 머리를 만지작거린다.
“여기에 장터 말고 또 뭐가 있어?”
“네?”
“나 사실 여기 밖에 안 와봤거든. 이곳을 벗어나면 또 뭐가 있을까.”
“…….”
“응? 유진. 너라면 알 것 같아. 빨리 말해줘. 궁금해.”
“정말 몰라요?”
“정~말 모른다니까. 제갈량은 매일 여기 오면 안 된다는 소리만 하고……. 말도 안 해주고.”
“제갈량이랑 사람은 서서를 귀찮게 하나 보네요.”
“응?”
서서는 눈을 동그랗게 뜬다. 어. 그러니까. 뻐끔뻐끔. 입이 열심히 움직이는데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당황해도 보통 당황한 것이 아니었다. 아마 저 한마디에 엄청나게 놀란 모양이다.
“아냐. 아냐. 오히려 내가 제갈량을 귀찮게 하는걸.”
“뭐…그러면 그런 거죠.”
“제갈량은 내 첫 친구 거든.”
“언젠 내가 첫 친구라면서요.”
“여기서 첫 친구.”
“정말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유진이 먼저 손을 든다. 애초에 신선과 인간의 개념이 다르니 서서의 말을 이해할 리 없었다. 하지만 서서를 약간 별종 취급하는 것 같으니 대충 머릿속으로 이해 아닌 이해를 하고 넘어가는 모양이었다. 날씨 너무 좋다. 서서는 다리를 쭉 뻗었다.
햇살 아래 나뭇잎이 일렁이는 그림자가 눈동자에 그대로 닿았다. 순간 눈앞이 하얗게 변한다. 유진은 가만히 서서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버렸다. 사람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곱게 곱게 집에서만 큰 아가씨라면 더했다. 애써 서서의 반짝이는 시선을 무시한다.
“서서는 너무 착해서…….”
“응?”
“형이 그랬거든요. 세상은 사나우니까…알아서 몸을 지켜야 한다고.”
“…….”
“너무 착하면 손해 본다고 했어요.”
“유진도 착하잖아.”
“서서는 더해요.”
“하지만 난 아직 손해를 본 적이 한 번도 없는걸?”
“그렇단 이야기죠.”
서서는 이 세상에 처음 보는 것이 많았다. 늘 유진의 옷자락을 잡으면서 이것저것 물어본다. 정말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살아온 귀한 집 여식인가 싶었다. 그런 사람이 장터를 맘대로 돌아다닌다는 것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뭐 세상엔 가끔 있을 수 없는 일이 종종 일어나곤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했다. 모든 사람은 고루 평등하게 대해주면서도 늘 존중해준다. 유진은 그런 서서가 마음에 들었다.
“오늘은 언제쯤 돌아갈 거야?”
“조금만 더 있다가요. 형이 며칠 집을 비워야 한다고 해서 오늘은 일찍 들어가 있으려고…….”
“그렇구나. 나도 곧 가야 해.”
“정말요?”
“응. 늦게 가면 제갈량한테 혼나거든. 사실 오늘 수업 있는데 그것도 빼먹고 놀러 온 거라서.”
“그렇게 할 일 안 하면 큰일 날 텐데.”
“너도 똑같은 소리를 하는구나. 하지만 난 여기가 훨씬 더 재밌고 신기하거든.”
“…….”
저런 말을 들으면 갑자기 마음이 허해진다. 유진은 서서가 물어보는 장터 너머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지만, 정작 자신도 가본 적이 없었다. 이곳에 올 땐 너무 어렸던 데다 형은 절대 이 마을을 벗어나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곤 했다. 물론 부모 없는 형제 둘이 살아남으려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유진도 그런 호기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형을 생각하면 멋대로 행동할 수 없었다.
“집에 데려다줄까?”
“아뇨. 형이 그런 거 싫어해요.”
“왜?”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 말라고 했거든요.”
“…….”
“아이참. 서서가 싫어서 그러는 건 아니니까.”
“알았어. 다음에 또 같이 놀자.”
“뭐…좋아요. 나도 심심했으니까.”
“이제 가야 하지?”
“…네.”
“잘 가. 다음에 또 보자?”
“서서도 조금만 더 있다가 들어가요.”
“응.”
유진은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깡마른 몸에는 좀 커 보이는 옷이 잔뜩 구겨져서 풀물이 들었다. 가볍게 아래로 뛰어내리고 곧장 두 걸음쯤 걸었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서서는 붕붕 소리가 날정도로 팔을 흔들어 준다. 계속 만났으니 다음에도 또 만날 수 있으리라. 몇 번 만나지 않았지만 서서도 유진도 그런 생각을 당연하게 했다.
‘아직 형이 오려면 좀 멀긴 했지만…….’
돌아가야 하는 시간보다는 꽤 이른 시간에 자리를 떴다. 서서도 돌아가야 한다고 했으니 이 정도에서 헤어지는 것이 맞을지도 몰랐다. 정작 형은 언제 돌아올지 몰랐다. 큰 상단을 따라갔다 오면 고기를 먹을 수 있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하던 모습만 기억났다. 이제야 약간 배가 고픈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정도로 우울해지는 건 싫었다. 일부러 씩씩하게 걸어가는 모습 뒤로 길게 햇살이 걸렸다.
**
“제갈량. 제갈량!!”
“또 무슨 일입니까.”
“할 말이…있어. 그…헉헉.”
“뭘 이렇게 급하게 뛰어와선.”
“그…….”
“숨넘어가겠습니다. 들어오세요. 차를 준비할 테니.”
“응…으응.”
“궁이 무너지는 줄 알았네요.”
“헤헤.”
괜한 타박을 들었지만, 마냥 기분이 좋았다. 제갈량은 이미 서서가 돌아올 줄 알고 있었던 눈치였다. 냉정하게 돌아서서 걷는 것 같았지만, 서서의 발걸음에 맞춰주고 있었다. 서서가 잠시 궁을 떠나 놀러 간 사이 생각보다 궁은 많이 변해있었다. 예전 제갈량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단장이었다. 꼭 손님을 맞이하려는 것처럼 꾸며진 공간은 예전보다 조금 생기가 차올랐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이렇게…급히.”
“그게…….”
“차가 식어요.”
“응. 그것도 그렇네.”
“인간계에 다녀올 때마다 한 번씩 사건을 들고 오니 이곳에서 심심할 일이 없어서 좋군요.”
“정말?”
“물론이죠.”
약간 돌려 말하는 것 같지만, 뭐 어떤가. 제갈량은 찻잔을 들면서 서서에게도 그러길 권한다. 가만히 두면 너무 흥분해서 끝없이 재잘대는 터라 이렇게 한 번씩 끊어주는 일이 필요했다. 서서가 좋아하는 차를 내려놓고 조금 가라앉히길 기다린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지나고 촛불이 타들어 간다. 아주 조금 심지가 짧아졌을 무렵 제갈량이 먼저 물었다.
“무슨 일인가요?”
“그러니까…좀 이상한 말이긴 한데.”
“어지간한 일론 놀라지 않으니까 말해 봐요.”
“혹시…응룡이 인간계에서 태어날 수도 있어?”
“예?”
뜻밖의 질문에 제갈량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지간한 질문이 아니었다. 서서가 내려놓은 것은 너무나 무거워서 천하의 제갈량조차 함부로 입을 댈 수 없는 사안이었다. 손끝이 떨린다. 하지만 애써 침착하려 했다. 서서가 저런 말을 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을 테다. 애써 맑은 시선을 피하며 차를 마신다. 적당히 식은 찻물이 입안을 굴러다니다 꿀꺽 넘어간다.
“왜…….”
“응?”
“왜 그렇게 생각하죠?”
“왜라니.”
“그런 생각이 든 이유를 묻고 있습니다.”
“…….”
“너무 중요한 사안이라 앞뒤를 정확히 짚어주어야…….”
“…….”
“답에 가까워질 수 있기에.”
“그냥…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제갈량은 똑똑하니까 뭐든 알 수 있을 거로 생각했거든. 그래서 물어 본 건데.”
“…….”
문득 들었다. 이런 엄청난 생각을 그저 인간계를 지나가다 떠올릴 수 있다는 말인가. 솔직히 놀랐다. 아직 도술도 미숙하고 사람을 가려볼 줄 몰랐다. 물론 너무 착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신선으로선 그리 좋지 않은 성정이었다. 그런 서서가 갑자기 응룡의 군주에 관해 이야기를 꺼낸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게 확실했다. 제갈량은 천천히 감정을 다스린다. 여기서 목소리가 높아져봤자 좋을 일이 없었다.
“그런 일이 있다면.”
“…….”
“나도 느꼈겠죠.”
“역시…그런가. 하지만 자꾸 주변에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고 그러는데…….”
“착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만.”
“…….”
“확실하지 않으니 뭐라 단정하진 못하겠네요.”
“그럼 태어날 순 있다는 거네?”
“그렇겠죠.”
“아…….”
“군주라는 지위는 핏줄도 중요하지만, 능력과 신수의 허락이 훨씬 더 필요합니다.”
“…….”
“아무리 핏줄이 중하다 한들 신수가 거부하면 절대 군주로 올라설 수 없죠. 현 수장인 왕윤 님도 그렇고, 손책 님도 그렇겠지만요.”
“그렇구나.”
“주군이 인간계로 내려가셨기에. 인간계엔 그분의 힘이 남아있을 수도 있습니다.”
“…….”
서서는 뭔가 더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입을 다물었다. 하긴 자신보다 제갈량이 아는 것이 더 많고 똑똑했다. 게다가 듣고 보니 그저 착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제갈량의 표정은 조금 어두워 보였다. 저렇게 단호하게 말하고도 복잡한 속내를 애써 참아냈다.
“그러니 인간계엔 많이 놀러 가지 마세요.”
“그건 싫은데.”
“오래 머물러 봤자 좋은 곳은 아닙니다.”
“하지만 내가 만난 사람들은 다 착했어.”
“착해서 문제란 소리니까요.”
“…….”
“서서에게 뭐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은 편전 정리를 해야 하니 조금 도와줄래요?”
“나도 들어가도 괜찮아?”
“오랜만에 꽃을 꺾어다 장식해 볼까 합니다. 주군이 좋아하셨으니.”
“좋아. 나도 도와줄래.”
“네.”
애써 다른 곳으로 대화를 이끈다. 자신이 꽃을 꺾겠다며 앞서가는 서서를 내버려 둔다. 화단을 일부러 가꿔둔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해가 지고, 처소에서 혼자가 되면. 제갈량은 늘 할 일이 많았다. 오늘은 좀 더 복잡한 생각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
“…….”
밤이 깊어서도 제갈량은 혼자 깨어 있었다. 서서는 일찍 들어가라고 보냈으니 아마 지금쯤이면 꿈속에서 헤매고 있으리라. 창호지 너머로 희미한 달빛이 비친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는데, 좀처럼 마음이 정리되지 않았다. 의자에서 일어난다. 몇 번 걷다가 괜히 창문을 열어본다. 그리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마지막으로 정리해둔 붓을 하나씩 만져보다 결국 다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내가…이런 말에 휘둘리는 것이 맞는가.”
이젠 마음이 단단히 굳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런 한마디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보니 아직 멀어도 한참 먼 것 같았다. 좋을 것 하나 없는 삶에 서서라는 존재가 나타났고, 그 입에서 주군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정신을 차릴 수 없다니. 스스로 웃겨서 피식 웃고 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마음이 완전히 가라앉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방문을 열고 나와 버린다. 어둠이 궁을 집어삼킨 채 천천히 녹아내린다. 한참 바라보다 편전으로 향한다. 오늘은 이곳에서 밤을 새우면서 홀로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주군을 기다렸다. 그리고 몇 번이나 그만둘 뻔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삶에서 작은 희망을 찾으려 했다. 편전에 조심스럽게 꿇어앉는다.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한다. 단 한 번도 느껴지지 않았던 주군의 기운을 찾아본다. 순간 바람이 불어 촛불이 훅 꺼진다. 간신히 빛을 밝히고 있던 편전이 삽시간에 어두워진다. 하지만 제갈량은 그런 것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
느껴지지 않는다. 주군이 처음 사라졌던 날부터 늘 한결같은 공허함이었다. 아무리 정신을 집중해봐도 간 곳을 알 수 없다. 이런 기분을 견딜 수 없어서 애써 찾지 않았다. 언젠가는 돌아오리라. 그렇게 믿으면서 살았다. 그러기에 서서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만약…주군이 아니라면.”
이 목숨도 끝이 다가오는가. 제갈량은 가만히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본다. 이 손이 투명하게 변하는 그 순간 모든 것이 끝나는 날이 분명했다. 아직은 아니다만. 그렇다고 영원히 그런 날이 오지 않으리란 보장 또한 할 수 없었다.
“주군은 항상 너무 상냥하셨습니다.”
제갈량의 주군은 현명했지만, 그만큼 인간계에 관심이 많았다. 항상 굽어살피면서 조금이라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주려 했다. 물론 제갈량은 몇 번 항변하긴 했다. 그럴 때마다 자신의 주군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잠자코 따르기 시작했다.
신선은 매일 말했다. 이렇게 인간을 좋아해도 그들은 하늘을 읽을 수 없으니 보답받지 못한다. 그러니. 여기까지 말하면 젊은 군주는 늘 활짝 웃었다. 그리곤 제갈량을 끌어안는다. 나의 신선이 하는 말을 흘려들을 수는 없지만 그건 아니라고 했다. 제갈량은 품에 안겨서 그냥 눈을 감았다. 이런 고집을 꺾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인간을 사랑한 것이 저주가 된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왜 하필 나의 주군이었는가. 제갈량은 화를 참지 못한다. 그렇게 인간계를 귀하게 여기던 주군은 그저 가벼운 사찰을 나갔을 뿐이다. 다른 궁에서도 종종 하던 일이지만, 그 횟수가 좀 많았다. 제갈량은 자신도 동행하게 해달라 청했다. 그러나 군주는 부드럽게 거절했다. 금방 돌아온다는 말을 남기고선 훌쩍 떠난 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궁은 시간이 멈췄고, 지금도 그랬다.
“난…정말.”
제갈량은 속에 꾹꾹 뭉쳐놓은 고통을 내뱉는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고통과 회한이 가득 담겨 있었다. 차마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지도 못했던 것이 오늘따라 쉽게 흘러나온다. 서서에게만 느껴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의 실체를 알아야 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아직 주군을 기다리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기를. 제갈량은 홀로 엎드려서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