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히삼/제갈유비] 창공의 전기(蒼空之傳記) 001
+) NOTICE
레전드 히어로 삼국전 2차 연성입니다.
유비와 제갈량 / 조조와 사마의 / 손책과 주유가 각각 궁의 주인과 신선으로 나옵니다.
제갈유비 연성으로 시작했지만, 둘이 만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수 있습니다.
동양 AU 및 설정 날조가 항상 함께합니다.
적당한 망상과 설정 붕괴가 언제나 함께 합니다 ㅇㅅㅇ)9
write. 환월
큰 강으로 나누어진 공간이 있었다.
부드럽고 넓은 강줄기는 맑고 깨끗했다. 하지만 특별한 도구 없이는 건너기 힘들 정도로 그 폭이 아득했다. 어딘가에서 시작되어 밖으로 흘러 사라지는 강은 아무도 그 끝을 알지 못했다. 넓고 깊이 흘러 한 번도 넘치거나 물이 줄어든 적이 없는 강은 늘 옅은 안개를 품고 있었다. 그러다 내리쬐는 햇살을 받으면 보석을 갈아서 뿌린 것처럼 빛나곤 했다. 누군가는 그곳에 황금 비늘을 가진 물고기가 산다 말하기도 했다.
강 전체가 눈부시게 빛날 때 안개가 뭉클 피어오르면 고문 무지개가 보이기도 했다. 해가 떠 있는 동안 볼 수 있는 장관이었다. 해는 시간이 지나면 쉬이 진다. 천천히 어둠을 몰고 오는 밤에도 안개 너머에 있는 공간은 희미하게 빛이 난다. 늘 밝은 곳에서 바깥을 바라본다면 강에 달과 별을 한없이 수놓은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언제나 마르지 않는 강은 밤마다 묘한 음악 소리가 섞인 물결을 만들며 흘렀다.
항상 한 겹 물에 잠긴 것 같은 곳이었다. 늘 따뜻했고, 밤이 오지 않았기에 부드러운 공기가 가득한 곳이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다른 곳에 비하면 그리 소란스러운 것도 아니겠지만, 이곳에서는 충분히 큰일 이었다.
“다들 왔는가.”
“…신선. 주유 방금 도착했습니다.”
“…….”
“아, 그게.”
방금 도착한 신선은 주변을 둘러보면서 몸을 감싼 망토를 벗었다. 푹신하고 하얀 털이 가득한 망토는 이런 날씨에 사용하기엔 조금 두꺼워 보였다. 망토를 벗어 팔에 걸기도 전에 매서운 눈길을 먼저 맞았다. 하지만 익숙한 것처럼 별다른 표현을 하지 않는다. 그저 우아하게 고개를 돌려서 주변을 살펴볼 뿐이었다. 앞에 서 있는 자는 말이 없었고, 조금 뒤에 도착한 신선 또한 그러했다.
“…….”
“제갈량은 역시 오지 않을 모양입니다.”
“…….”
“정기 회의라고 서신을 보내긴 했지만, 그 궁의 경비를 통과했는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귀찮은 녀석이군.”
“세상은 셋인데, 남은 사람은 둘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그래. 나중에 내가 한 번 더 찾아가 보겠다.”
“네, 사마의님.”
주유는 제법 고분고분하게 굴었다. 이미 익숙한 일인 듯 길게 말을 하지 않았다. 자리를 잡고 앉자 곧 회의가 시작되었다. 원래대로라면 군주와 신선이 한자리에 모였어야 궁의 군주를 모시지 않은 약식 회의였다. 하지만 군주 간의 맹약이 있는 것처럼 군주를 모시는 신선끼리 할 말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런 중요한 일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 제갈량의 빈자리가 오늘따라 텅 비어 보였다. 사마의의 눈빛이 좀 더 날카롭게 빛났다.
“언제까지 저렇게 고집을 피우려는 건지.”
“벌써 수십…아니 수백 년은 족히 되었을 겁니다. 사마의님도 그 녀석의 고집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물론…할 말을 많지만, 저렇게 강경해서야…….”
“…….”
“저희 쪽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허락을 받지 않으면 다른 궁에 출입조차 못 하는 것이 저희 신선의 처지니 말이죠.”
“사마휘님께 한번 여쭈어보아야겠다.”
“…….”
“약식 회의니 간단하게 끝내도록 하지.”
일찍이 세상을 관장하는 수장이 셋으로 나누어졌다. 하지만 지금 회의에 참석한 신선은 둘 뿐이었다. 익숙한 듯 행동하였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제대로 된 일은 아니었다. 주유는 잠시 서신을 꺼내 읽었다. 최근 영지 내에서 일어난 사건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세상이 비틀어졌군.”
“…그렇습니다.”
“이래서야 점점 더 이쪽만 힘을 쓰게 되는 상황이니…….”
“…….”
“하지만 어쩌겠는가. 궁을 지키고 주군을 모시는 것이 신선의 숙명. 우리의 생은 궁에 매여 있으니, 다른 말을 할 수 없다.”
“손책님도 항상 애쓰고 계십니다.”
회의가 약식이 된 이유는 간단했다. 원래 중앙을 차지하고 있던 가문이 흔들린 것이 그 이유였다. 애초에 회의는 당연히 응룡궁에서 주재해야 했다. 늘 그랬었기에 그 누구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 하지만 그 가문이 한순간에 몰락했다. 멸족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하게 망가진 채 방치되었다. 후계자가 나타나기 전까지 전대의 왕이 늘 자리를 지키며 세상의 균형을 맞춰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니 바로 인간 세상엔 크고 작은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봉황 궁과 백호 궁이 할 일이 많아진다. 약식 회의로 서로 정보를 교환하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법도를 따지자면 대행 가문을 골라야 하지만, 먼저 나선 쪽이 사마의였다. 사마휘는 일정 기간 대행을 맡기기로 정했다. 사마휘가 허락한 이상 결정에 토를 달 순 없는 일이었다. 비록 약식 회의지만 꾸준히 만나서 마물에 대한 정보를 교환한다. 그만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기에 주유는 약간의 불만을 가진 것을 밖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응룡 가문은 여전히 소식이 없는가.”
“후계자가 나타났다면 제갈량이 가장 먼저 바깥으로 나와서 주인을 맞이했을 겁니다. 허나 아직도 움직이지 않으니…좋은 소식은 여태 없는 것 같습니다.”
“흠.”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요. 스스로 궁 안에 유폐되기로 한 것도 제갈량의 뜻이니. 전 그의 결정을 꺾을 자신이 없습니다.”
“…….”
사실이었다.
주유는 제갈량과 미묘하게 대립하고 있었지만, 단 한 번도 그를 넘어본 적이 없었다. 지금 가장 뛰어나다고 하는 사마의조차 제갈량의 진면목을 보지 못했다고 하니 그 역량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사마휘 이후 태어난 신선 중 가장 뛰어나다고 칭해지곤 했었다. 그렇기에 그런 신선이 응룡 가문에 태어난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 권세가 하루아침에 무너지자 제갈량은 스스로 몸을 감추었다.
주유와 제갈량은 굳이 따지자면 동문과 같은 사이였다. 같이 수학하고 어울려 지냈지만, 가문과 가문으로 갈라진 이후 점점 발길이 뜸해졌다. 정기적으로 회의 때 얼굴을 보았지만, 예전만큼 가까이 지내진 못했다. 그러다 보니 주유는 제갈량의 소식을 궁금해했지만, 굳이 응룡궁으로 발걸음을 옮기진 않았다.
어차피 찾아가도 문을 열어주지 않을 것이 뻔했다. 제갈량이 응룡궁의 모든 문을 폐쇄하기 전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렇게 싸늘한 눈빛은 생전 처음 보았다. 주군을 잃은 신선의 분노가 깊고 깊어 자신을 좀먹어 들어갔다. 파랗게 타오르는 시선은 곧게 뻗어 주유를 향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유는 결국 제갈량이 응룡궁의 모든 문을 단단히 봉인할 때까지 그저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궁에 매인 신선은 다른 궁에 함부로 들어가지 못한다. 사마휘의 뜻인지 아니면 태어나길 그렇게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기에 그 누구도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아.”
잠시 딴생각을 했다. 주유는 눈을 깜박이면서 들고 있던 서신을 움켜쥐었다. 사마의는 그런 주유를 가만히 쳐다보더니 그저 눈을 살짝 찌푸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젠 꿈같았던 과거 이야기도 끝맺음해야 했다.
예전 같았으면 수많은 사람이 모여서 회의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녹록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궁의 후계자가 나타나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러다 보니 군주의 권속들은 하나둘 떠나거나 죽기 일쑤였다. 군주와 군주가 교체되는 그 짧은 시간이 권속에겐 영겁과도 같았고, 그 틈이 벌어질수록 수많은 일이 벌어지곤 했다. 주작 궁이야 아직 현 군주가 위엄을 떨치고 있었고, 백호 궁도 마찬가지였다. 백호 궁은 후계자가 셋이나 되니 그리 문제 될 것이 없다는 말을 덧붙이곤 했다.
“주작 궁은 큰일은 없으십니까?”
“주군께서 늘 강녕하시니 신하 된 자로서 무슨 말을 덧붙이겠는가.”
“북쪽 흉수로 토벌을 떠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랬지.”
“구영(九嬰)이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들리기에…….”
“원래는 주군이 직접 토벌전을 지휘하시려 했다만…….”
“…….”
사마의는 잠시 대답을 미룬다. 늘 있던 버릇과 같았다. 항상 고심해서 말을 고르기에 때때로 말이 끝까지 이어지지 않고 멈추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말을 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주유는 별다른 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뒤에 따를 말을 기다렸다.
“어린 궁주께서 걱정이 깊으시어. 부득이하게 태오 장군이 대신 토벌 작전을 맡기로 하고 출병을 하셨으니 큰일이 없는 한 달이 차면 돌아오실 것이다.”
“아…….”
“나의 주군께서 궁주를 목숨처럼 아끼시고, 장군도 그러하니 이를 기쁘게 받아들이셨다.”
“그러셨군요.”
“궁주께 떠나는 모습을 보이면 놀란다며 새벽같이 떠나셨지.”
“부디 무사히 돌아오시길 빌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사실 구영(九嬰)이란 환수가 녹록한 녀석은 아니었다. 기괴한 머리가 아홉 개 달린 녀석은 북방 흉수에 자리를 잡았다. 거친 물살에 몸을 숨긴 채 인간 세상에 해악을 끼치곤 했다. 최근 화재를 일으켜 죄 없는 민가가 모두 타버린 사건이 있었다. 한번 토벌하러 갔다 안개가 심해 어쩔 수 없이 퇴각하였더니 천지를 분간하지 못하고 이번엔 수신이 된 것처럼 물을 뿜어 홍수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런 환수를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궁을 지키는 군주란 인간 세상을 두루 보살피는 것이 의무이자 권리였다.
이번에야말로 구영(九嬰)을 없애고 돌아오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어린 장군의 얼굴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사실 주유는 태오 장군의 출신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하지만 군주인 왕윤이 어릴 때부터 특별히 애중하는 장군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딱히 얼굴을 숨기는 것도 아니고, 늘 왕윤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신뢰만큼 주작 궁의 일을 대행하는 존재였다. 이보다 더 깊은 이야기는 주작궁 내부의 일이니 차마 말을 얹지 못하고 속으로 씹어 삼킬 뿐이었다.
“인간에게 직접 손해를 끼치는 구영(九?)이 가장 문제였으니, 그 외에 다른 것은 백호 궁에서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
“저런 환수가 인간세계까지 내려가는 것은 드문 일인데…혹여 결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저 이곳의 균형이 깨져서 생긴 빈틈으로 비집고 들었겠지.”
“…….”
“하지만 이 일은 우리가 더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주작 궁과 백호 궁이 나서서 후계자를 찾는다고 한들, 과연 이미 멸족의 단계에 이른 응룡의 후계자를 찾을 수 있을까도 문제인 것이다.”
“…….”
“후계자가 남아있다면 그 녀석이 눈치를 채지 못할 이유가 없지.”
“이상하긴 합니다.”
“무엇이?”
주유는 총명하고 똑똑하다. 상황을 냉철하게 분석하면서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짚어내곤 했다. 사마의는 때때로 그런 주유의 성격을 탐탁지 않게 여기곤 했다.
“응룡궁의 군주가 사라지셨다고 해도, 지금까지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말입니다.”
“…….”
“제가…아직 여러 군주를 모시진 못했지만, 적어도 군주와 신선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건 사마휘님이 부탁하셔서 내가 직접 가르쳤지.”
“신선이 소멸하면 다음 대 신선이 태어나는 것처럼…군주 또한 후계자를 만드는 것이 세상의 섭리. 그런데 왜 응룡궁은 그 섭리를 거스르고 있는 걸까요.”
“…….”
“혹여…어딘가에 살아계신다면.”
“…….”
“그저 저희가 찾지 못 할 정도로 힘이 미약하실 뿐이라면, 큰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까.”
“…….”
“사마의님?”
“물론 충분히 맞는 이야기이긴 하다. 허나 자신의 군주가 소멸했다고 하는 말을 제갈량의 입에서 직접 듣지 않았는가.”
“그건…….”
“설마 그 제갈량이 멸문의 충격이 커서, 자신의 주군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광증에 걸린 것이라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 않은가.”
“…….”
“이런 말을 쉽게 꺼내선 안 되는 일이지만…….”
“…….”
“사마휘님의 비호 아래 세 가문이 득세한 이후 수많은 가문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저 우리가 강한 군주를 만나서 든든하게 버티고 서있을 뿐이니, 응룡궁은 그 힘을 다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
“…….”
“주유. 자네가 동문을 생각하는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
“우리가 할 말은 아닌 것 같군.”
“…죄송합니다.”
“아니지. 한 번쯤을 말을 꺼냈어야 하니.”
“예.”
“조만간 주군께 허락을 얻어 응룡궁에 가보도록 하지.”
사실상 회의가 끝났다는 말과 같았다. 어차피 둘만 만났던 회의니 헤어짐이 길진 않았다. 각자 돌아갈 길이 머니, 빨리 움직이는 편이 좋았다. 주유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직접 찾아 가볼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사마의가 움직인다면 그것을 거스르기 어려웠다.
같은 대 신선에게도 묘하게 층이 나누어져 있었다. 예를 들면 사마의와 다른 신선이 그랬다. 조금 더 일찍 눈뜬 사마의는 주유와 제갈량보다 아는 것이 많았다. 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껏 충실하게 주군을 모시고 신선의 의무를 다했기에 사마휘조차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지식을 흡수하는 신선으로선 그 짧은 시간이 마치 권력과도 같았다.
“봉황궁이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백호의 신선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영광이군.”
“주군께도 안부 전해주시지요.”
“손책님도 강녕하시길 빌지.”
“다음 회의엔 제갈량도 함께했으면 좋겠습니다.”
“…….”
굳이 대답을 피한 것 같았지만, 딱히 따져 묻진 않았다.
“정말 응룡궁은 괜찮을까요.”
“응?”
“…….”
“무슨 말이지?”
“아…….”
지나가듯 던진 말이었다. 옷매무새를 정리하던 주유의 손길이 우뚝 멈췄다. 너무 감정적이었다. 속에 감춰둔 본심이 결국 흘러나온 것 같아서 민망할 따름이었다. 사마의는 그런 주유를 보며 소리 없이 희미하게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곧 입꼬리를 정돈하고 날카로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 미소가 어딘가 낯설었지만, 그저 당황스러운 질문을 받아서 그런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아닙니다. 제가 괜히…….”
“더 후계자가 생기지 않으면 천천히 쇠퇴하겠지.”
“…….”
“그리고 새로운 가문이 나타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그것은 모두 옥새의 뜻이 아니겠는가.”
“…….”
“우린 그저 운명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거야.”
“예.”
“불안한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너무 조급하게 움직일 필요는 없다.”
“…명심하겠습니다.”
사마의의 말은 틀린 점이 없었다. 오히려 너무 냉정해서 뒤에 말을 덧붙이지 못했다. 아는 것이 있으니 저렇게 당당하게 의견을 낼 수 있는 것이리라. 사마의가 먼저 자리를 뜬다. 주유는 잠시 멈춰선 채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은 회의장을 바라보았다. 흑송을 사용해서 세운 기둥엔 금과 은으로 장식을 새겨 넣었다. 문양 하나하나 장신구 하나하나 허투루 갖춰놓지 않은 곳은 오로지 세 신선과 군주를 위한 곳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와야 마땅한 사람은 좀처럼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정말 괜찮은 건가.’
주유는 군주가 없는 궁이 얼마나 빠르게 황폐해질 수 있는지 확실히 인지하진 못한다. 백호 궁은 단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고, 그럴 일이 생길 리도 없었다. 후계자를 보기 힘들다는 다른 가문과 달리 백호 궁은 늘 형제자매가 많았다. 그런 곳에서 태어날 때부터 생활한 주유가 희미하게 짚어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러면 응룡궁은 어떠한가. 지금 궁내엔 제갈량 말곤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권속은 이미 뿔뿔이 흩어진 지 오래였고, 제갈량이 모시던 군주는 소리 없이 사라졌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실종은 엄청난 결과를 낳았다. 응룡궁의 주인이 책임을 쉽게 내버리는 성정을 가졌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똑똑하다 못해 정이 많고 착했다. 엄할 때는 엄해야 한다고 하지만 모든 인간을 그리고 도구라고 불리는 신선에게까지 골고루 사랑을 주던 군주였다. 제갈량은 그런 주인을 곧잘 따랐다. 그런 주군이 한순간 사라지고 난 뒤에 제갈량이 할 수 있는 일은 한가지뿐이었다.
군주와 신선은 서로 묶여 있어서 어디에 있어도 알아챌 수 있다. 군주에게 충성을 맹세한 신선은 모두 그러했다. 그저 피 한 방울이 떨어져 작은 물결을 만드는 것만으로도 서로를 인지한다. 그 정도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신선이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심각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경애하는 주군이 한순간 사라졌어도 신선은 함부로 궁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궁의 주인과 후계자가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응룡의 힘을 잃은 궁은 쉽게 무너진다. 그런 궁터를 간신히 잡고 있는 존재가 제갈량이었다. 오로지 신선의 힘만으로 유지된다고는 믿을 수 없지만, 기간이 이정도로 지나니 그의 잠재력을 믿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궁의 주인이 사라진 직후부터 제갈량은 자신의 힘으로 궁을 유지했다. 언젠가 돌아온 주인을 기다리는 신선은 그대로 굳어진 것처럼 움직임이 없었다. 언제까지 저렇게 버틸 수 있을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 사마휘조차 답을 내주지 못하는 문제였다.
‘…아무리 사마의 님이 찾아가 본다 하지만 우리 쪽에서도 정보가 필요한 법이지.’
주유는 그 정도로 생각을 정리했다. 세 가문은 서로 돕는 존재기도 했지만, 모든 정보를 내놓진 않았다. 총명한 주유는 자기 생각을 정리하고 나서야 조용히 자리를 떴다. 다음 회의가 소집될 때까지 이 공간은 완벽하게 봉인된 채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어둠에 먹힌 것처럼 결계 안으로 천천히 내린다. 하지만 익숙한 일이기에 돌아보지도 않은 채 모든 신선은 그곳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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