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히삼/제갈유비] 하루의 중심
+) NOTICE
레전드 히어로 삼국전 2차 연성입니다.
50화 이후에 다시 만난 둘에 대한 망상을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레히삼 완결까지 보지 않으신 분들께선 네타 주의해주세요.
적당한 망상과 설정 붕괴가 언제나 함께 합니다 ㅇㅅㅇ)9
write. 환월
커다란 보름달이 뜨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누가 해준 말인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노식 사부일 수도 있고. 헤어진 형일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 어린 날 같이 달구경을 하던 공손찬이 해줬을 것이 분명했다. 이젠 아무도 믿지 않는 전설은 더는 존재하지 못한 채 조용히 사라진다. 하지만 유비는 보름달이 뜰 때마다 뒤뜰에 가서 소원을 비는 날이 많아졌다.
조용히 눈을 감는다. 그리고 두 손을 모으고 소원을 빈다. 모든 사람이 행복했으면. 그리고 제갈량이 행복하고 외롭지 않았으면. 또. 한 번 더 제갈량을 만날 수 있다면. 해줄 말이 너무 많았다. 너무 많아서 이제 기억조차 나지 않는데,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은 여전히 곁에 없었다. 자꾸 후회가 밀려오고 마음이 미어진다. 그럴 때마다 소리 내서 울 수도 없어서 그저 꾹꾹 눌러 참기만 했다.
“주군.”
환청이 들리는 것 같았다. 사실 익숙한 일이라서 놀라지 않았다. 드림 배틀이 끝나고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왔다. 유비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드림 배틀의 존재를 잊었다. 큰일을 치르고 긴장이 풀려서 그런 것일까. 며칠 동안 앓고 일어난 유비는 조금 시들어 있었다. 그리고 자꾸 헛것을 보고 환청을 들었다.
‘유비!’
‘제갈량?’
‘제갈량이 누구야?’
‘어? 아냐.’
‘너 요새 이상한 거 알아? 어디 아픈 거야?’
‘아니. 그럴 리가. 감기가 걸렸었나 봐.’
그러기에 옷 제대로 챙겨 입고 다니랬잖아. 공손찬의 말에선 따뜻함이 느껴졌다. 사실 드림 배틀이란 존재 자체가 감기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스쳐 지나가고 어느새 아무도 기억하지 못 하는 일이려니 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났지만, 그날 그대로인 기억을 가지고 이젠 없는 사람을 자꾸 찾았다. 그래서 갑자기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놀라지 않는 연습부터 했다. 적어도 이러면 이상한 시선은 받지 않는다.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만큼 힘든 일이 있을 줄 몰랐다.
“주군. 이런 곳에서 주무시면 감기 걸리십니다.”
“…….”
“제가 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인제 그만 갈까요?”
“…아니.”
“그럼 왜 눈을 뜨지 않으십니까.”
“또…사라져 버릴까 봐.”
“…….”
“몇 번이나 그랬어. 꿈속에서 만나서 길거리 끝에서 널 봤거든. 그런데 다가설 수도 없고 한 번도 잡아보지 못했어.”
“…….”
“이번에도 그럴 것이 분명하니까 차라리…이러고 있을래. 대화는 할 수 있잖아.”
울기 직전 목소리가 들린다. 유비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신선은 배틀의 도구. 주군을 도와서 이기는 것이 명예. 주군에게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 운명. 처음 의식이 생겼을 때부터 들어온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주군이 슬퍼할 땐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신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제갈량은 신선계에서 내내 그에 대한 해답을 찾고 있었다.
“주군. 눈을 뜨지 않으신다면 그만 돌아가겠습니다.”
“…….”
어설픈 협박을 해본다. 잠깐 함께 있었을 뿐이지만, 유비는 참 알기 쉬운 사람이었다. 물론 제갈량만 그렇게 생각했다. 과연. 그 협박이 먹혔는지 바들바들 떨면서 눈을 뜬다. 하지만 땅만 쳐다보고 있었다. 땅이 꺼지겠습니다. 제갈량은 낮게 웃었다.
“정말 안 갈 거지?”
“네. 일단은요.”
그 한마디에 유비가 앞을 바라본다. 보름달을 등지고 서 있는 사람은 꼭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파랗게 빛났다.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어.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눈에 보이는 건 좋은데 또 사라지면 어떡하지. 걱정부터 몰려온다.
“제갈량?”
“너무 오랜만이라서 목소리를 잊어버리신 건가 했습니다.”
“어떻게…….”
“이젠 제가 보고 싶지 않으셨나요?”
“그럴 리가…난…그냥.”
“근데 왜 이렇게 절 믿어주지 않으십니까.”
“한번 보면 더 보고 싶을까 봐 그러지.”
유비다운 말이었다. 차라리 계속 못 보면 어느 정도 마음이 정리되긴 한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세상에 남아있다는 증거를 보게 된다면 희망을 놓지 못하고 계속 맴돌 수밖에 없었다. 간신히 정리해놓은 마음이 꼭 둑이 터진 것처럼 무너져 내렸다. 아무도 알아줄 사람이 없어 속으로 삭였던 감정이 흘러나오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 유비를 보던 제갈량은 이때처럼 한쪽 무릎을 꿇었다.
“신선 제갈량. 다시 한번 주군을 뵙습니다.”
“…….”
“그간 무사하셨습니까. 아프시긴 않았고요?”
“응. 응. 제갈량.”
“전혀 달라지지 않으셨군요. 철들어 계실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물론 그게 주군다운 모습이긴 합니다만…….”
“보고 싶었어.”
“저도 그렇습니다. 주군.”
정말 보고 싶었어. 제갈량.”
제갈량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유비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가끔 소원을 비는 모습을 스크린으로 지켜보긴 했지만 부족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들을 수 있는 이가 없었다. 서로 기억을 가진 채 떨어져 있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어떻게 온 거야? 이제 괜찮아?”
“옥새의 관리자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습니까. 그저 일이 있어서 왔지요.”
“…일?”
“네. 일이요.”
“그랬구나…….”
“…….”
“하긴 맘대로 나올 수 없는 거니까…….”
더는 이야기도 하지 않고 금방 시무룩해진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렇게 애타게 부르는 소리에 들은 척도 하지 않더니 말이다. 일 때문에 왔다는 한마디에 이렇게 울먹거리는 표정을 지을 일인가 싶었다. 그런 재미가 있어 굳이 이렇게 한마디씩 덧붙이곤 한다. 제갈량은 삶이 허무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적어도 유비 앞에선 아닌 것처럼 굴었다.
“주군. 당신에게 일이 있습니다.”
“나?”
“물론이죠. 이곳에서 절 아는 분은 유비 님 당신뿐인걸요.”
“…….”
“주군은 정말 하나도 변하지 않으시네요.”
“…제갈량.”
“건강하신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아니…….”
“예?”
하나도 안 건강해. 나 아파. 아프다고. 웅얼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하긴 이런 걸 누구에게 어리광을 부릴까 한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처를 입어서 아프다고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제갈량의 과거를 생각해보면 그리 어리광을 받아주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 따윈 생각도 하지 못했다. 제갈량은 한숨을 쉬면서도 입가에 웃음을 띤다.
“제가 주군을 잘못 키웠군요. 드림 배틀 우승자이신 주군이 이렇게 나약하실 줄이야.”
“맞아. 제갈량 때문이야.”
“맞습니다. 제 탓이라고 하죠.”
“…….”
“왜 그러십니까.”
“당연히 혼날 줄 알았는데.”
“이제 누가 주군을 혼낼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좋다. 다시는 못 볼 줄 알았어.”
으앙. 그 순간 낯선 목소리가 들린다. 익숙한 것 같으면서도 묘한 울음소리에 유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갈량 얼굴만 내내 쳐다보느라 채 주변을 살펴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혹시 누군가 보지 않았나. 들킨 것은 아닐까. 오만 걱정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조용히 있으라 하지 않았느냐.”
“…….”
그제야 제갈량 품에 안긴 낯선 생명체를 발견한다. 꼬물거리며 품 안을 파고들던 아이를 잠시 바라보는 얼굴이 그렇게 인자할 수 없었다. 유비는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제갈량이 누군가에게 저렇게 따뜻하게 웃어주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 주군을 바라보던 제갈량의 표정은 부드럽기만 했다. 옥새의 관리자가 되면 다 저런 것일까. 머릿속이 복잡해서 살 수가 없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응?”
“아까 이야기를 하려 했는데, 주군이 너무 아이처럼 구셨기에…….”
“…….”
“저와 주군의 아이입니다.”
“응?”
“왜 놀라십니까. 어서 안아서 얼러주셔야죠.”
“…….”
유비의 눈이 등잔만큼 커졌다. 갑자기 찾아온 자신의 신선이 하는 말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눈만 껌벅거리는 주군을 바라보던 제갈량은 너무 당연한 듯 아이를 품에 안겨준다. 그러더니 늘 그랬던 것처럼 뒷짐을 지고 웃기만 했다.
“그러니까…뭐?”
“주군과 저의 아이라고 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신선은 아닙니다. 저희 세대가 생겨난 이후 나타난 2세대라고 할까요.”
“…….”
“주군에겐 이 개념이 너무 어려우신가요.”
“바보 취급하지 마. 제갈량.”
“…….”
“그러니까 어린아이라는 소리잖아.”
어쩐지 뜬구름 잡는 소리긴 했지만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유비의 품을 차지한 아이를 칭얼거리지도 않고 푹 안긴 해 눈만 깜박거렸다. 그렇게 다른 것도 아닐 텐데 왜 제갈량 품에선 그렇게 불편한 듯 울었는지 모를 일이다.
“예. 맞습니다. 제 유전자가 반이 섞인 반신선 반 인간 상태의 남자아이지만, 유전자는 확실하니 주군의 자식이 맞습니다.”
“그걸 어떻게…….”
“얼굴을 보면 아시겠죠.”
“어…맞네. 꼭 이 얼굴이었어야 했을까.”
“그건 저도 모릅니다. 저와 주군의 유전자야 반반씩 섞을 수 있지만, 외모는 제가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
“주군과 많이 닮았습니다.”
모른다고 말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닮은 얼굴이었다. 거울을 바라보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마지막 드림 배틀 때. 죽어가는 자신을 살리기 위해 제갈량이 신선패를 내놓았다. 유비의 몸을 빼앗아 대신 드림 배틀을 이어나간다고 했지만, 실상은 자신의 몸을 내어준 것이었다. 그렇게 신선패로 합쳐진 모습을 그대로 어리게 만든 것 같았다.
“우리 둘의 아이라고?”
“네.”
“어떻게 데려온 거야? 아니 어디서 태어났기에…….”
“이 아이 말씀입니까.”
“응. 누가 낳아줬어?”
“주군과 제 아이라고 했을 텐데요. 누가 낳을 수 있겠습니까.”
“옥새 관리자는 이런 것도 할 수 있어?”
“…….”
“아니면 모르는 새에 내가 낳았나.”
“예?”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기간이 일 년쯤 되는 거 아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응. 제갈량은 똑똑하니까 하는 말이 맞겠지. 제갈량 말을 들어서 틀린 적은 없으니까 말이야.”
말과는 달리 영 이해를 하지 못하는 표정이었지만 진지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제갈량은 웃음이 흘러나와 참을 수 없었다. 입술을 꾹 깨문 채 고개를 숙인다. 겨우겨우 진정하고 고개를 들었다. 늘 꼿꼿하던 모습 그대로, 하지만 눈은 애정을 가득 담은 채 주군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설명을 시작하면 유비가 할 행동은 뻔했다. 하나하나 설명하면 호기심에 가득 차서 눈이 반짝인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거리고. 두 손을 모으면서 알았다고 한다. 신선은 늘 침착해야 하는데 유비 앞에만 서면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이것도 인간 세계에서 지냈던 부작용이겠거니 했다.
“신선계에 배추밭이 하나 있습니다.”
“배추밭?”
제갈량이 뜬금없는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유비는 신선계의 지형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리고 신선들이 사는 세계인데 배추밭쯤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보통은 제갈량이 하는 말이 다 맞으니 그러려니 했다. 그런 말을 듣는 와중에 아이는 자꾸 품을 파고들고 제갈량은 진지했다. 이 상황이 꼭 꿈같아서 마냥 기분이 좋았다.
“예. 배추밭에선 신선들이 태어나죠.”
“마더 컴퓨터는…그러니까.”
“비유적인 표현이었습니다. 신선계는 만들어진 곳이니까요.”
“그렇구나.”
“적당한 배추를 골라서 잘 키우면 어느 날 신선이 태어납니다. 바로 이 아이처럼요.”
“정말?”
“네.”
“아…그래서. 우리 인간계에도 비슷한 전설이 있어.”
“…….”
최대한 이해해보려는 표정이 마냥 귀엽기만 했다. 옥새의 관리자로 살면서 대화를 오래 하지 못한 탓인가. 제갈량은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이며 유비의 말을 기다렸다. 드림 배틀 중이라면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며 단칼에 잘랐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황새가 보자기에 싼 아이를 물어다 준다던가. 그런 거?”
“…….”
“그런 거랑 비슷한 거 아니야? 신선계나 여기나 별로 다른 것이 없나 봐.”
“그러십니까.”
“응. 다 비슷한 거 같은데. 아닌가?”
헤헤. 웃는 모습에 달그림자가 주렁주렁 걸렸다.
“제갈량. 응? 맞는 거지?”
“…….”
“그런데 어떻게 내 유전자가 신선계에 갔지.”
“…….”
“신기해라…….”
나름 머릿속으로 충격적인 상황을 정리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당연한 일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자신의 신선이 둘 사이의 아이라면 덥석 안겨준 상황을 뭐라고 해석해야 할까. 아마 유비 정도 되는 성정을 가진 사람이어야 이해할 수 있는 것일지 몰랐다. 그러니 제갈량도 이런 표정을 짓는 거겠지.
“그럼 내가 아빠가 되는 건가? 찬이한테 보여줘도 돼?”
“주군.”
“응?”
“…….”
“왜?”
“농담입니다.”
“뭐?”
“농담이었단 말이죠. 주군.”
“에이.”
“주군 이렇게 사람을 잘 믿으시면 나중에 어쩌시려 그럽니까.”
“…….”
아. 이렇게 상처받고 놀란 표정을 보려던 것은 아니었다. 제갈량은 자신이 조금 심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런 표정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마음이 이미 생겨난 것을. 이래서 신선은 인간계에 함부로 내려오면 안 되는 일이었다. 태어나길 도구로 태어났지만, 후천적으로 학습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특히 이렇게 스스럼없이 대해주는 사람을 주군으로 모신다면 더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농담을 좀 심하게 했습니다.”
“…….”
“오랜만에 주군을 보니 기뻐서 그랬나 봅니다.”
“제갈량.”
“이제 제가 미우신가요?”
“그럴 리가. 하나도 안 미우니까 가지마. 응?”
“…….”
“조금만 더 있다가. 밥도 먹고. 알았지?”
“예 그러겠습니다.”
“그럼 여기 와서 앉아봐.”
“…….”
“자꾸 그렇게 서 있으니까. 또 훌쩍 떠날 거 같잖아.”
“네. 원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주군.”
제갈량이 옆에 앉고 나서야 조금 안심하는 눈치였다. 달은 어느새 구름 속에 가려서 빛을 숨긴다. 머리 위에 드리운 나무 그늘이 둘의 표정을 가려주었다. 처음엔 그저 농담이었는데,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제갈량은 아주 조금 후회를 한다.
“그래서.”
“네?”
“어디부터 진짜야?”
“…….”
“사실대로 말해줘. 그리고 어떻게 여기에 다시 온 거야. 옥새를 떠나면 안 된다며.”
“궁금증이 너무 많으신 거 같군요.”
“제갈량 탓이야. 안 그래?”
“그렇군요. 인정하겠습니다. 그래도 제가 싫어지진 않으셨죠?”
“그런 걸 왜 물어봐.”
입술이 씰룩거린다. 제갈량한테 한 소리를 듣거나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으면 곧잘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한다. 참 고쳐지지 않는 버릇이었다. 하나하나 이렇게 보고 싶었던 걸 보니 어지간히 외로웠던 것이리라. 제갈량은 생각 외로 자기 객관화가 잘되는 축이었다.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되묻는다. 주군은 절 아직도 가족이라 생각하십니까. 아무도 남지 않은 선계에 홀로 머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이미 감정을 깨달아버리고 인간의 삶을 이해하게 된 신선은 선계엔 존재하지 않는 시간의 흐름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외로움이란 감정이 생겼다.
“다행입니다. 혹여 주군이 절 이제 보고 싶지 않아 하면 어쩌나.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농담은 좀 심했어.”
“반 정도는 농담이나. 나머지는 진실입니다.”
“…그래도.”
“들어주시겠습니까.”
“응. 물론이지!”
“저도 선계에 아무도 없으니 쓸쓸하더군요.”
“근데…아이가 자는 거 같은데. 불편하지 않을까?”
“전혀요. 제 품보다 훨씬 편해 보이는 걸요.”
“그래? 그럼 다행이고.”
꼭 자기 방석이 생긴 강아지 같다고 하면 실례일까. 제갈량은 굳이 입 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그 모습을 내심 뿌듯해했다. 초선보다 작은 아이는 칭얼거리는 법도 없이 얌전히 안겨 있었다. 때때로 숨을 쉬는 건지 놀라서 확인할 정도로 조용했다. 유비는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아이를 재운다.
“전 아이를 키우는 방법을 모릅니다.”
“응?”
“신선들은 어린 시절이 없으니까요.”
“그게 무슨 소리야?”
“신선은 배틀의 도구. 그렇기에 마더 컴퓨터가 가장 최적의 상태로 신선을 만들어냅니다. 알맞은 육체를 만들고 의식의 씨앗을 심습니다. 시간이 흘러 꽃이 피면 신선은 눈을 뜨겠죠. 그것이 저희의 탄생이고 소멸이며. 신선의 운명입니다.”
“…어려워.”
“인간처럼 태어나지 않는다는 사실만 아시면 됩니다. 육체가 소멸하면 의식은 공중에 떠오릅니다. 그리고 천천히 흩어지겠죠.”
“…….”
“그래서 이 아이를 발견했을 때 놀랐습니다.”
“어디서 발견했는데?”
“옥새의 핵에서요.”
“…….”
“정확히 말하면 전 관리자인 마더컴퓨터의 백업 본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선계에 혼자 있기 너무 심심해서 조금 뒤져보았습니다.”
“그럼 혹시…….”
“많은 것이 남아있진 않습니다. 이미 소멸한 신선은 살릴 수 없지만, 아직 의식을 집어넣지 않은 육체 정도는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어쩔까. 제갈량은 잠시 말을 끊었다.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데 참 어려운 말만 골라 한다. 하지만 성격이 이런 것을 어쩌겠는가. 마더 컴퓨터가 심어놓은 씨앗이 잘못이라면 잘못이겠지. 차라리 처음부터 사근사근했다면 이런 식으로 돌고 돌아 만날 일도 없었을지도 몰랐다.
“이 아이는 그런 가운데 유일한 어린아이였습니다.”
“…….”
“추측하자면…제가 신선패로 주군과 합쳐질 때 나왔던 정보가 그대로 저장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만.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인간과 합쳐진 신선이 다시 살아난 전례가 없었기에…….”
“왜?”
“보통은 그런 식으로 이긴 사람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옥새의 정보로는 처리할 수 없는 버그라고 할 수 있겠죠.”
“이 녀석도 버그야?”
“맞습니다.”
“하지만…살아 있잖아.”
“저도 살아있지만, 전 인간이 아니죠.”
“…….”
“그 아이는 신선도 인간도 아닌 다른 존재입니다. 마더 컴퓨터…아니 옥새가 어떻게 처리할지도 모르고. 저 아이가 얼마나 버틸지도 모르고.”
“…….”
“당장 내일이 될지. 한 달 후가 될지. 그 미래를 읽을 수 없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좋은 일일지 나쁜 일일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신선과는 달리 삶이 생길 수도 있을 테죠.”
“그랬구나.”
“그래서 인간세계엔 둘 수 없습니다. 신선의 데이터가 섞인 이상 그 아이는 신선계에서 관리해야 합니다.”
“하지만 어리잖아.”
“육체의 나이는 정신과 상관없답니다. 주군.”
“…….”
“특히 저희 같은 신선에게는 말이죠.”
늘 어려운 말이었다. 제갈량은 희미하게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외로움을 알게 된 신선은 자신의 주군에게 돌아와 그간의 감정을 토해냈다. 유비는 그런 제갈량을 토닥여준다.
“그래도 주군을 닮아서 순하고 착하더군요.”
“네가 보살폈어?”
“그렇다고 사방을 기어 다니도록 놔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마 이런 이유로 마더 컴퓨터는 저희를 성인으로 만들어낸 것이겠지만요.”
“그랬구나. 그래도 날 닮아서 좀 좋았지?”
“…….”
“안 그런 거야?”
“신선패로 봉인되었을 때 이렇게 변할 줄 알았으면 그냥 몸을 빼앗을 걸 그랬습니다.”
“…….”
“농담입니다. 유비 님과 비슷한 얼굴을 봐서 한동안은 외롭지 않았답니다. 유비 님이 비는 소원도 항상 듣고 있었고요.”
“제갈량은 행복해졌어? 내가 매일 기도했는데…….”
“행복하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
“지금도 계속 말이죠.”
유비가 눈을 깜박인다. 똑바로 바라본 제갈량의 눈이 너무 깊었다. 그리고 짙은 어둠 사이에서 묘한 불길이 보였다. 신선은 눈동자가 좀 다른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희미하게 구름 사이로 보이던 달이 완전히 어둠에 녹아들었다. 열이 화끈하게 오르는 이 얼굴을 들키지 않을 것 같아 다행이었다.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면서 뛰었다.
“…….”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진다. 화끈한 열기가 옮아붙어서 자글자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뇌가 하얗게 비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인식하는 데 너무 오래 걸렸다. 제갈량은 유비의 콧대에 한 번 더 입술을 맞춘 후 떨어진다. 그러고 나서 코앞에서 웃으니 꼭 눈앞에서 달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제…갈량?”
“저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
“제 처음이자 마지막 꿈은 유비 님 당신이었습니다. 허무한 삶을 접고 꿈을 찾아가는 것이 행복이라면 지금이 가장 행복하겠지요.”
“…….”
“주군을 다시 뵐 수 있어서 정말 기쁩니다. 꿈이 생겨서 행복합니다.”
“…….”
그 한마디에 지금까지 눌러온 모든 감정이 실려 있었다. 눈물이 고장 난 것처럼 흘러내렸다. 그렇게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고 또 끄덕였다. 눈물이 터진 유비를 달래는 건 제갈량의 몫이었다. 내내 외로웠던 신선은 한마디 불평 없이 유비의 감정을 받아주었다. 훌쩍거리던 소리가 점차 줄어든다. 그리곤 그제야 아이가 깨지 않았을까 걱정을 했다.
“다 우셨습니까.”
“그렇게 말하지 마.”
“예?”
“…부끄럽다고.”
“언제부터 저랑 그렇게 예의를 차렸다고. 안 하던 이야기를 하시는지요.”
“하지만…몰라. 그런 거.”
“아이는 한번 자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몸이 작아서 그런지 연료가 많이 필요한 모양이더군요.”
“그건 다행이지만…….”
“신선은 먹지 않아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제갈량이 그렇다고 하면 그게 맞는 일일 것이다. 애초에 유비는 제갈량을 믿었고, 그래서 틀린 적이 별로 없었다. 눈이 퉁퉁 부은 채 웃는 얼굴이 참 못났다면서 한마디 거든다. 그런 말도 기분이 좋은 것을 보니 유비도 어지간히 외로웠던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제갈량.”
“예. 주군.”
“어떻게 다시 여기에 온 거야? 옥새를 맘대로 비워도 괜찮아?”
“그럴 리가요.”
“아, 그렇구나.”
역시 제갈량이야. 늘 그랬던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던 유비가 잠시 눈을 깜박인다. 뭔가 잘못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하면 안 되는 말을 당연하게 하는 제갈량에게 또 한 번 속아 넘어갔다. 물론 속이려고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제갈량은 계속 웃기만 하고, 유비는 혼란함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럼 옥새는 어쩌고?”
“예?”
“관리자가 없으면 큰일 나는 거 아냐? 세상이 멸망하면 어쩌지.”
“주군은 지금 누구와 이야기를 하시고 계시는가요.”
“…그거야.”
“전 선계 최고입니다. 옥새 관리자인 제게 하지 못할 일이란 없지요.”
“…….”
“게다가 슬슬 혼자 선계에 있는 게 지겨워져서 말이죠. 제 나름대로 이것저것 만져보고 있습니다.”
“…….”
“지금도 그걸 실험 중이고 말이죠.”
“그럼…….”
“며칠 있다가 실험이 끝나면 돌아갈 겁니다. 물론 그 전에도 일이 생긴다면 가아겠지요.”
“그렇구나.”
“그러니 그때까지 같이 지내도 괜찮을까요?”
“당연하지!”
당장 도원관에 들어가자며 팔을 잡아끈다. 도원관엔 식구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괜찮을지. 하지만 유비는 이미 일어서서 제갈량에서 손을 내밀었다. 다시 같이 있을 수 있어서 기뻐. 제갈량. 이런 감정은 마약과 같아서 끝없이 부족함에 허덕이게 한다. 차라리 서서히 잊힌 과거의 추억으로 남는 것이 좋을지도 몰랐다.
과연 이것이 옥새의 의지일까. 아니면 나의 의지일까. 아니면 이것조차 하늘이 정해준 운명일까. 제갈량은 그 깊은 뜻까지 헤아릴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감정에 충실해지고 싶었다. 이것이 배틀의 도구로 태어난 운명에 대한 첫 반항이었고, 마지막 열쇠일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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