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성위에 언제나처럼 조용히 걸려있던 해가 지면 자연스럽게 밤이 오곤 했다. 그리고 다시 뿌옇게 아침이 밝아오는 것처럼 성 안엔 규칙적인 생활 외에 새로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언제부터였는지 알 수 없었지만 성 안은 큰 소리 조차 나지 않고 죽은 듯 조용했다.
아마 그쯤이었을 것이다. 온 사방에 피비린내가 진동하던 그 날 이후로 성은 얼어붙은 것처럼 싸늘하게 변해버렸다. 그런 숨 막히는 공간에서 하루 이틀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배트맨 일가를 천천히 잊어갔다. 더 이상 찾아보지 않았고, 그들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아니 차마 말하지 못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렇게 잊혀져간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하얀 감옥을 벗어나지 못하고 매인 채 빙빙 맴돌았다.
배트맨이 살았던 저택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망가져서 야생 동물들의 은신처에 가까워져 갔다. 해가 뜨면 그 빛을 그대로 받아 하얗게 빛나던 외관도, 세심한 집사의 손길에 정갈하게 손질되던 정원도 망가질 대로 망가져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머릿속 기억과 점차 괴리감이 드는 외관에 서서히 사람들은 그 곳을 찾지 않았다.
하나 둘 사람의 발길이 끊어지기 시작한 곳에선 비가 오는 밤이면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는 괴담 같은 걸 하나 둘 만들어냈다. 퍼지기 시작한 소문은 꼬리를 물고 점점 더 부풀려졌는데, 어느 날은 푸른빛이 저택 주변을 맴돈다는 소문이 되기도 했고, 창가에 하얀 형체가 어른거리는 것을 봤다는 제법 그럴듯한 목격담이 추가되기도 했다. 실체를 알 수 없이 부풀려질 대로 부풀려진 소문은 점차 사람들로 하여금 저택으로 향하는 발길을 끊기에 충분했다. 가장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몰래 찾아와서 채 피지 못한 작은 꽃을 조심스럽게 두고 가던 발자국이 어느덧 끊어졌다. 그 날 들리던 고통과 비극을 잊은 채 괴담만 남은 그 곳은 어느새 사람들이 들어가선 안 되는 금지된 땅이 되어버렸다.
세간의 사람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로드 쪽은 항상 다른 일로 바빴다. 오히려 너무 바빠서 사람들이 그런 소문에 정신을 쏟는 편이 훨씬 편할 정도였다. 괴담은 사람들에게 쓸데없는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리고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다른 곳을 향한 시선을 무디게 만들어 주었다. 그런 세계에서 로드는 저스티스 리그가 혹시 무슨 일을 낼까 싶어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었지만 이렇다할만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옆에 서있던 콘은 눈을 가늘게 찌푸리며 화면을 쳐다보았다. 자신들과 똑같은 얼굴을 한 사람들이 보였다. 입고 있는 옷은 조금 달라도 얼굴은 같았다. 하지만 행동하는 것도 신념도 모두 다른 그들을 그저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오히려 저런 식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신기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붉은색과 검은색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옷을 입은 채 밤하늘을 가볍게 날아다니는 모습이 순간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자신의 신분을 보호하기 위해 얼굴을 대부분 가린 채 움직이고 있었지만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다지 많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저 쪽 세계가 평행세계인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 팀 드레이크 또한 저 곳에 있는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찬찬히 살펴보면 저쪽 세계의 팀은 콘이 알고 있는 것보다 작았다. 그런 사소한 차이가 점점 두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인식하게 했고, 콘의 흥미를 잃게 만들었다. 흥미를 잃은 푸른 눈이 시리게 빛났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침대에 앉아서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다 웅웅 소리가 울리는 곳을 짧게 쳐다보았다.
“…역시 다르지.”
“…….”
“안 그래?”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한참동안 한 곳을 바라보던 콘이 침대에서 일어섰다. 항상 이렇게 기다리곤 했지만 딱히 대답을 바라진 않았다. 기분이 이상한 것은 오랜만에 팀의 얼굴을 봐서 일거라 생각했다. 자신이 아는 팀이 아니니 이런 호기심 따윈 곧 사그라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만큼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몇 번이나 고민 해봐도 더 이상 타오를 만한 감정은 몸에 남아있지 않았다. 잠깐이나마 웃던 입은 단단히 다물어 진 채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
하지만 그렇게 관심 없다는 듯 통신 시설을 떠났던 콘은 무엇인가에 홀린 것처럼 다시 돌아왔다. 상당히 예외적인 상황이었지만 로드의 후계자인 콘이 시설 안으로 들어가는 걸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따라오는 사람들을 다 내쫓고 아무도 없는 곳에 홀로 의자에 앉아 화면 안의 저스티스 리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나자 자연스럽게 팀을 찾았다. 워낙 바쁘게 움직이는 탓에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청소년과 어른 사이의 미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날렵한 몸이 빌딩 사이로 휙 사라졌다. 고담의 밤은 지나치게 어둡고 끈적해서 작은 사람 하나 정도는 금방 삼켜버리곤 했다.
의미 없는 빌딩의 불빛만 가득한 화면을 바라보는 콘의 눈이 찌푸려졌다. 다시 통신을 조작해 기어코 팀의 뒷모습을 찾아냈다. 한참동안 그렇게 청년의 뒤를 쫓던 콘의 시선이 뚝 멎었다. 겨우 잡아낸 화면엔 빌딩 위에 서있는 팀이 달을 등지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바람을 따라 길게 휘날리는 망토는 고담의 밤하늘을 머금은 것처럼 까맣게 섞여들었다. 제멋대로 바람을 타고 움직이는 망토를 정리하며 돌아서던 팀이 무엇인가 들은 듯 눈을 깜박이다 하늘 위를 쳐다보았다. 별다른 것 없는 히어로 질에 반쯤 재미를 잃은 채 한손으로 턱을 괴고 있던 콘이 가볍게 화면을 위로 올렸다.
“…하.”
하늘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달에서 내려오는 것 마냥 천천히 아래로 활강하는 것이 빌딩에 내려서자 팀이 얼굴을 슬쩍 기울이며 쳐다보았다. 뭐라 말하는 것 같은데 이 화면은 안타깝게 소리를 지원하지 않았다. 연신 입을 움직이는 팀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던 사람이 팀을 푹 안아 올렸다. 까만 부츠에 싸인 발이 땅에서 한 뼘은 떨어진 채 등을 퍽퍽 치는 모습까지 지켜보던 콘이 잔뜩 짜증이 난 상태로 화면을 꺼버렸다.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꾹 주먹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며 분노를 받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또다시 집착과 소유의 불길이 가슴 속 부터 타올랐다. 어디서부터 틀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이 세계에서 둘은 저렇게 친근할 수 없는 상황이란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로 이해한다 해서 몸도 함께 이해하는 것은 아니었다. 차갑게 식었던 가슴에서 무엇인가 스물 스물 기어 올라왔다. 가장 깊은 곳에서 기어 올라오는 것은 뇌를 흔들고 심장을 잡아 뜯을 기세로 온 몸을 돌아다니면서 콘을 괴롭혔다.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렇게 자신과 팀을 꼭 닮은 둘의 애정행각만 실컷 보던 콘은 짜증스럽게 의자에서 일어났다. 잔뜩 화가 난 사람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오기까진 조금 시간이 걸렸다. 여느 때처럼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사방이 하얗고 모든 공기가 바닥에 무겁게 내려앉은 것 같은 방엔 아무도 없었다. 아니 누군가 있었다. 미동도 없고 움직이지 조차 못했지만 분명 있었다.
습관처럼 방안을 가로질러 걸어가 유리관 앞에 섰다. 그리고는 단 한 시간도 꺼지지 않고 돌아가는 냉동 장치 덕에 하얗게 성에가 내려앉은 유리 안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한참동안 그렇게 바라보기만 하다 간신히 손을 대면 차가운 유리가 둘 사이를 가로막으며 차갑게 손바닥에 붙어왔다. 마치 꽁꽁 얼어버린 호수의 표면을 만지는 것처럼 따뜻한 체온에 살짝 녹은 성에가 묻어나다 이내 금세 얼어붙었다. 그런 모습에 어쩔 수 없어서 후욱 한숨을 쉬면 입김의 궤적을 따라 얼어있던 표면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한숨에 자신을 가로박고 있는 유리마저 녹아버리면 좋을 텐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었다. 어른어른 안쪽에 보이는 하얀 것들은 예전 모습 그대로 꽁꽁 얼어있었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빛나는 하얀 꽃잎은 표면에 성에를 인 채 바닥에 잔뜩 깔려 있었다. 부서지지 않을까 녹아내릴까 싶어 차마 길게 만지지도 못했다. 그저 콘이 할 수 있는 건 차가운 유리에 잠깐 입술을 대고 있다 떼는 것이 전부였다.
“…팀.”
그리곤 습관처럼 침대 가에 앉아서 그것을 쳐다보았다.
당장이라도 저 안에서 꺼낸 다음 품에 안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다른 할 일이 없으면 그렇게 해가 지고 푸른 달이 방 안을 가득 채울 때 까지 앉아있기만 했다. 그러다 잠을 자야하면 쓰러져서 잠이 들었다. 강박 중세에 가까울 정도로 정형화 되어버린 하루 일과는 몇 달이 지나도록 깨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단단하게 굳어져 갔다. 냉동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작게 울리는 기계의 진동 소리마저 크게 느껴지는 방 안에서 콘은 그렇게 계속 가라앉고만 있었다.
하얗게 빛이 날정도로 얼어붙은 것은 푸른 달빛을 받으면 더 환하게 빛이 났다. 끝없는 설산을 바라보면 아마 저런 느낌일지도 모른다. 침대에 누워서 뒤척거리다 문득 잠이 깨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면 기울어진 세상 속에 홀로 고고하게 서 있곤 했다. 냉기가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표면에 부스러진 달이 닿으면 영혼마냥 밝게 타오르다 사라지곤 했다.
하염없이 바라보다 눈을 감으면 그만이었다. 잠든 자세 그대로 일어나서 다시 그것을 바라보았다. 지독한 집착의 끝은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계속해서 아래로만 쌓이고 있었다. 하얀 빛은 그에게 잘 어울렸다. 새빨갛게 물들던 노을을 받던 모습도 물론 마음에 들었지만 이젠 좋아하지 않았다. 노을을 보면 애써 가라앉힌 과거가 떠올라 머릿속을 휘저었다. 단말마의 소리. 저주와도 같던 한마디. 푸른 눈에 낙인을 찍듯 새겨진 모습.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콘은 애써 가장 좋은 모습은 하얗게 빛이 나는 것이라 단정했다.
002
콘이 움직인 것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심지어 로드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독단적으로 저스티스 리그가 있는 곳으로 건너갔다. 조작이야 듣고 배운 것이 있으니 간단했다. 후계자의 권한을 방패삼아 벌인 일은 곧 로드의 귀에 들어갔으나 딱히 제지하진 않았다. 콘은 적어도 저스티스 로드에 해가 되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란 묘한 신뢰 때문이었다. 기왕 넘어간 김에 그쪽을 좀 휘저어주고 오면 더 좋지. 로드는 싸늘하게 웃으면서 의자에 기댄 채 조용히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 시간 콘도 같은 색으로 물들어 있지만 전혀 다른 하늘 아래서 고개를 든 채 조용히 떠 있었다. 까만 물감이 울컥울컥 새어나온 것 같은 밤하늘에 절대 녹아들지 않은 망토가 하얗게 빛나며 바람을 따라 가볍게 펄럭였다. 가늘게 눈을 찌푸리며 어지럽게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을 쳐다보았다. 흐릿한 반짝거림은 어둠에 먹혀들어갔다 다시 빛이 있는 곳으로 헤쳐 나오기를 반복했다.
“…….”
조용히 눈을 감자 온갖 소리가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시끄러운 도시의 소음은 귀를 시끄럽게 하다못해 머리를 울리며 빠져나가곤 했다. 천천히 원하는 것을 찾았다. 수많은 소음 속에서 작은 단서를 잡아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파도가 밀려오듯 한 번에 몰려왔다 급하게 사라지는 소리의 끝을 잡았다. 조그만 숨소리 하나, 발자국 소라 하나를 읽어가면서 찬찬히 쫓기 시작했다.
귀에 들리는 방향대로 한 걸음 다가가면 숨소리가 들리고 다시 두 걸음 걸어가면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가볍지만 묵직하게 빌딩을 딛고 뛰어내리는 소리에 눈썹을 찡그리며 방향을 가늠했다.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것 같지만 좀처럼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 미묘한 혼자만의 술래잡기가 계속되다 슬슬 짜증이 날 무렵 드디어 망토 끝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높은 빌딩 위에 홀로 서있는 인영은 금방이라도 바람에 쓸려서 떨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거센 바람을 따라 망토가 펄럭일 때마다 콘의 시선이 그 끝을 좇았다.
“…팀.”
“…….”
작게 내뱉은 목소리는 도시의 소음에 섞여 들어가 흩어져서 닿지 않았다. 한참동안 그렇게 어두운 밤하늘 사이에서 그를 지켜보던 콘이 가볍게 웃으며 빌딩 위로 날아갔다.
“…응?”
“…….”
자신의 발밑을 내려다보던 팀이 등 뒤에서 덮쳐오는 어른어른한 그림자를 발견했다. 하지만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몇 번 있었던 것 마냥 고개를 좀 더 숙이면서 손으로 허리를 짚었다. 그러다 얼굴의 대부분을 가리고 있던 카울을 만지작거리면서 숙이고 있던 허리를 곧게 폈다. 다부지게 닫혀있던 입에선 예상외로 단단한 말투가 툭 튀어나왔다. 목소리는 거의 비슷했지만 다른 점을 굳이 찾아보자면 이쪽이 조금 더 음색이 높았다.
“내가 이 시간에 여기 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
“뭐야. 이젠 대답도 안하겠다 이거지?”
“…….”
“…화났어?”
“…….”
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보통 때 이곳을 찾아온 코너와는 반응이 달랐다. 그렇다고 해서 최근 며칠간 코너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을 정도로 화나게 만든 기억도 없었다. 고개를 왼쪽으로 천천히 기울이며 엄지손가락으로 입술을 만지작거리던 팀이 휙 돌아섰다. 바닥에 하늘대는 그림자를 따라 천천히 시선을 올리다 그대로 고개를 바짝 들었다. 그리고 파란 하늘같은 눈과 불투명한 필름에 가려진 푸른 바다를 닮은 눈 마주쳤다. 얼굴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저 사람은 코너지만 코너가 아니었다. 하지만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뭇 긴장한 모습으로 팀이 한걸음 물러서는 가 싶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고양이가 난간을 걷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한 걸음 두 걸음 공중에 떠있는 콘을 향해 다가왔다.
“음…저기…….”
“…….”
“코너?”
“…….”
여전히 들리는 대답이 없었다. 팀은 이건 또 무슨 장난이냐면서 웃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몸이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위협이 느껴지면 생각보다 빨리 움직이던 몸은 오늘따라 무디기만 했다. 파랗게 타오르는 눈은 코너를 닮았지만 그 본질은 맹수에 가까웠다. 활활 타오르는 눈 안에는 금방이라도 팀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 같은 날카로운 위협이 가득 담겨있었다. 항상 입고 다니는 검은 티셔츠가 아닌 하얀 망토를 뒤집어 쓴 모습도 너무 낯설었다. 게다가 자신이 아는 코너는 이런 식으로 사람을 내려다보지 않았다.
“…….”
미묘한 대치상황은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카울에 반쯤 가려진 얼굴이었지만 표정정도는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가늘게 떨리는 입술부터 꿀꺽 침을 삼키는 목 줄기까지 어느 하나 콘의 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콘을 보던 팀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본능이 이 자리를 떠나라고 재촉했다. 평소에 하지 않던 실수를 하던 팀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이거 무슨 짓이야!”
“…….”
멱살을 단단히 잡은 채 자신을 들어 올린 손을 떼려고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단단한 바위마냥 목을 틀어잡은 손이 조금 힘을 주자 약한 신음소리가 들렸다. 그대로 공중에서 한참동안 눈을 찌푸린 채 팀을 바라보던 콘이 다른 손으로 카울을 잡았다.
“안 돼!”
“…….”
의미 없는 저항이었다. 너무 손쉽게 벗겨진 검은 가면 아래에선 제법 긴 머리카락이 왈칵 쏟아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스러움이 가득 담인 파란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뼘도 넘게 공중에 떠있으니 점차 숨이 가빠지는지 팔을 긁어내리는 손에 힘이 점차 빠지고 있었다. 짧게 컥컥 넘어가는 소리에 살짝 웃으면서 목을 좀 더 틀어쥐었다. 팀은 생각보다 좀 작았고, 콘은 더 컸다. 싸늘한 웃음이 팀의 얼굴에 왈칵 흘러내렸다. 목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아서 간신히 팔을 긁어내리거나 버둥거리는 것이 전부였다. 달을 등진 채 웃고 있던 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같은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팀은 사실 이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네가 조용히 따라오면 다른 사람들의 안위는 보장하지.”
“역시 코너가 아니잖아. 넌 누구…….”
“쓸데없는 대답은 하지 말도록.”
“…컥!”
대답은 듣지 않았고, 제대로 된 설명 또한 해주지 않았다. 그 대신 목을 콱 조르자 팔에 힘이 풀리면서 몸이 축 처졌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이 무엇인가 꼬물대는 것을 보자 카울을 벗겨냈던 손으로 그것을 빼앗아 들었다. 패트롤을 돈다면 당연히 몸에 지니고 있을 통신장치였다. 콘의 손에 들려나온 작은 통신기계는 달빛을 받아 까맣게 빛이 났다. 그런 손을 저지할 만한 힘조차 남아있지 않은 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두 손가락으로 장치를 든 채 이리저리 투시해보던 콘이 피식 웃었다. 이 통신 장치는 뱃 케이브와 연결이 되어있을 것이 뻔했다. 어느 곳이던 박쥐와 울새들이 하는 짓은 항상 비슷했다.
“정말 귀여운 장치야.”
“…….”
“하지만 이제 이런 건 필요 없을 테니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강한 힘으로 짓눌려 형체도 없이 으스러진 것은 짧은 파열음과 함께 완전히 기능을 상실했다. 손끝에서 흩날리며 떨어지는 잔해들은 그대로 고담 밤하늘의 일부가 되었다.
“널 오랫동안 찾아다녔어. 팀 드레이크.”
“…….”
“나와 함께 가자.”
“…무슨…넌 코너가 아니…….”
“역시 새들은 너무 말이 많아.”
금방 짜증이 난 콘이 목을 잡은 손에 점점 힘을 주었다. 다 마셔버린 캔 하나를 찌그러트리는 것처럼 아무런 죄책감 없는 표정으로 점차 허옇게 질려가는 팀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강한 힘에 눌려 기도가 막히고 호흡을 제대로 할 수 없자 크게 부풀던 가슴이 점차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눈앞이 번쩍 했던 것 같았다. 축 늘어진 팀의 몸을 콘이 가볍게 들어올렸다. 원래도 체격이 콘보다 작았지만 이번 팀은 그보다 더 작았다. 한품에 가볍게 들어오는 팀을 잠시 바라보던 콘이 두 손으로 그 몸을 든 채 천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 납치였다. 뱃 케이브엔 통신 장치가 부서질 때 나는 작은 파열음이 들렸을 뿐이었다. 사람들이 무엇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팀은 사라지고 난 뒤였다. 잠시 패트롤을 중단하고 팀의 행방을 찾아 나섰지만 그 어디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이상하고 알 수 없는 밤이었다. 혹시나 어딘가 크게 부상을 당해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닐까 싶어 구석진 곳까지 찾아보았지만 소용없었다. 통신의 마지막 신호가 끊긴 지점으로 가보았지만 아무 것도 발견 할 수 없었다. 둥그렇게 뜬 달은 모든 것을 보고 있었지만 아무런 말을 해줄 수 없었다. 그렇게 갑작스레 한 사람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도시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천천히 움직이며 달려가고 있었다.
천천히 흐르듯 시작된 이야기는 몇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메트로 폴리스는 슈퍼맨이 수호하고 있었다. 총알도 막아내는 단단한 피부와 엄청난 괴력. 긴 망토가 부드럽게 휘날리며 하늘에서 천천히 활강하며 내려오는 슈퍼맨은 모든 이들의 찬사를 받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슈퍼맨이 있는 한 메트로 폴리스는 안전했다.
그리고 그 힘을 탐냈던 사람이 있었다. 렉스 루터. 겉으로는 커다란 루터 제약을 운영하면서 뒤로는 엄청난 무기를 생산해 내던 사람이었다. 좀 더 확실하고 강력한 무기를 만들기 위해 슈퍼맨을 필요로 했던 그는 머리가 비상하리만큼 좋은 사람이었다. 치밀한 계획으로 슈퍼맨의 유전자를 얻어내서 비밀리에 실험을 강행했다. 자신의 유전자와 슈퍼맨의 유전자를 섞어서 클론을 만들어냈다. 정상적으로 수태가 된 아이가 아니었으므로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과 지능을 주입하기 전부터 몸은 이미 만들어져 있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용액이 꽉 찬 커다란 유리관 안에서 자란 클론은 곧 입에 연결된 마스크로 천천히 숨을 쉬었다. 스스로 사고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이 그저 숨만 쉬고 있는 인형과도 같은 몸을 쳐다보는 렉스 루터의 입에선 뿌듯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지능과 기본적인 감정을 입력하는 것은 언제쯤 할까요?”
“천천히 하도록 해. 이 상태에서 머리가 좋아져 봤자 힘으로 탈출밖에 더하겠어?”
“…과연. 그렇군요.”
“무기는 적당히 머리가 나쁜 쪽이 나아. 그래야 다른 생각을 안해서 주인이 다루기 편하거든.”
“그럼 그렇게 지시하도록 하죠.”
클론이 희미하게 숨을 쉬는 대로 보글보글 거품이 올라오는 용액을 바라보던 루터가 주먹을 쥔 손등으로 유리관을 툭툭 쳤다. 그 소리를 느꼈는지 반사적으로 희미하게 눈을 뜬 실험체가 초점 없이 소리가 들리는 앞을 바라보았다. 슈퍼맨을 닮은 푸르고 깊은 눈은 몇 번 깜박이곤 다시 힘없이 스르르 내려앉았다. 지금 저 몸은 그저 자극을 주면 반응하는 고깃덩어리에 불과 했다. 뿌듯한 미소를 지은 루터가 실험실 밖으로 나가자 곧 몇 겹의 보안 장치가 가동 되었고, 조명이 짙은 붉은 색으로 바뀌었음. 웅웅 거리는 커다란 기계들의 진동소리만 가득한 곳은 인간과 사회에서 철저하게 격리된 공간이었다. 아무도 코너에게 인간답게 사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두 발도 서는 것도 읽는 것도, 하다못해 말을 하는 것조차 알려주는 것을 아까워했다. 그들에게 코너는 무기 혹은 실험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렉스 루터가 클론을 만들어 낸 것은 자신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웨인 기업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도 미묘하게 항상 우위를 선점하는 웨인 기업을 확실하게 제치기 위해 만든 계략이었다. 어떤 식으로라도 클론을 상용화 한다면 분명 세계를 주무를 만큼 큰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뿌듯한 계획에 루터는 책상 앞에서 창문 쪽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또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날아가고 있을 슈퍼맨을 생각하면서 루터가 가볍게 와인 잔을 들었다. 고급스런 와인의 향기가 뭉클 흘러넘치는 와인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가볍게 허공에 건배를 했다.
루터가 계획한 대로 실험은 착착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다. 콘-엘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실험체는 이제 유리관 밖으로 나와서 자신의 이름과 실험체 번호가 써진 옷을 입고 구속되어 있었다. 조금만 지나면 그 누구도 막지 못할 엄청난 병기가 탄생할 순간이 눈앞에 그려졌다. 슈퍼맨의 저력을 알고 있는 렉스 루터는 코너를 유리관에서 꺼냄과 동시에 붉은 조명이 켜진 곳에 감금했다. 아무리 반쪽짜리라 해도 일반인 한 둘이 달라붙어서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루터 제약 쪽에서도 극소수 뿐 이었다.
하지만 사람 사는 세상에 언제나 완벽할 수는 없는 법일지도 몰랐다. 천천히 너무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클론에게 지능을 주입하는 단계에서 사고가 터졌다. 단순한 합선에서 시작된 화재는 그대로 예민한 기계를 건드리고 폭발을 일으켰다. 이중 삼중으로 사고에 대비한 연구실에서 일어난 뜻밖의 사고는 코너가 구속되어 있는 방에도 영향을 미쳤다. 비상 전력이 가동되었지만 모든 기계를 돌릴 수 없었다. 이미 한 번의 폭발로 반파된 연구소는 엉망진창 이었고, 코너에게 신경을 쓸 수도 접근을 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코너가 기거하고 있는 연구실 바깥은 화염에 둘러싸였다. 살아있기만 기도해야할 상황이 분명했다.
“…그으으.”
크립토나이트와 붉은 조명에 힘도 한번 쓰지 못한 채 감금되어 있던 코너는 갑자기 자신을 무겁게 내리누르는 감각이 없어지자 천천히 눈을 떴다. 하지만 곧장 움직이지 않았다. 제대로 모든 것을 주입받지 못한 몸은 머리보다 본능에 따라 움직였다. 몸을 최대한 납죽 엎드린 채 바깥의 동태를 살폈다.
날카로운 청각과 후각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바깥의 정보를 전달했다. 무엇인가 타는 소리 녹아서 서로 눌어붙다가 이내 와장창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무엇인가 계속해서 펑펑 터졌고, 매캐한 냄새는 코끝을 알싸하게 감싸다 못해 꾸역꾸역 목 안으로 넘어왔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미 연기에 질식해 정신을 잃었을 정도였지만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는지 눈을 바로 뜬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을 구속하던 빛도 이상한 돌덩이도 어지럽게 떠들면서 괴롭히던 사람들도 없었다. 납작 엎드린 몸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둥글게 말아 쥐고 바닥에 붙이고 있던 손이 힘을 주자 그대로 바닥이 푹 파였다. 깜짝 놀라 손을 떼니 손자국이 완연한 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바닥을 망가뜨렸지만 아무도 달려오지 않았다.
일단 주위에 괴롭히는 것이 없어 안전하다고 생각이 되자 코너가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두발로 서는 것을 배우지 않았기에 가장 편한 자세로 본능에 따라 빠르게 움직였다. 단단한 몸으로 문에 몇 번 부딪히자 금방 철문이 부서져 내렸다. 앞을 가로막는 문을 부수고 두꺼운 콘크리트를 뜯어냈다. 그러자 바깥 냄새가 났다. 매캐한 연기와 불길, 그리고 녹아내린 플라스틱 냄새에 가려져 있었지만 분명 맡을 수 있었다. 조금씩 느껴지는 낯선 공기의 냄새가 코너를 자꾸 이끌었다. 좀 더 바깥으로 나오라는 듯 끊임없이 유혹했다. 홀린 듯 어디론가 향하는 몸은 불길조차 저지하지 못했다. 불길은 단단한 몸에 감겼다 이내 푸스스 다른 곳에 옮겨 붙었다.
한 걸음.
다시 두 걸음.
“…….”
멍하니 앞만 보고 급하게 움직이던 몸이 문득 멈춰 섰다.
처음 느껴보는 바람의 궤적을 따라 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등 뒤에선 시뻘건 화염이 넘실대고 있었지만 콘은 그렇게 웅크려 앉은 채 하염없이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푸른색의 비단이 겹겹이 겹쳐져 어두워진 것 같은 고운 하늘엔 하얀 각설탕을 부숴서 뿌린 것 같은 별이 곱게 깔려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커다랗게 뜬 둥그런 달이 코너의 눈 안에 깊게 박혔다. 연구실에선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하늘이었다. 푸르고 검은 하늘에 시뻘건 화염이 섞여 들어갔다. 탁탁 하면서 하늘로 하염없이 흩날려 올라가는 불꽃의 씨앗이 주황색으로 빛을 내다 스르르 사라져 버렸다. 한참동안 밤하늘을 쳐다보던 코너가 인기척이 들리자 급하게 높은 담을 뛰어넘었다. 담장에 몸이 부딪히면서 제법 큰 소리가 들렸지만 화재에 묻혀서 다행이었다. 담장 가장 높은 곳에 웅크린 채 멍하니 연구소 쪽을 바라보던 붉은 눈은 긴 궤적을 그리면서 휙 사라졌다. 그리곤 희미하게 보이던 모습도 곧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작지만 빠른 발소리가 몇 번 들리더니 이내 그조차 들리지 않게 되었다.
❋ ❋ ❋
화재가 모두 진압되고 나서야 연구소 직원들은 콘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몇 겹이나 세워진 철문은 제멋대로 화염에 녹아내렸지만 완력으로 구부러진 것이 눈으로 확연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코너의 힘을 제어하던 구속 실은 그을음과 폭발로 알아볼 수 없을 정로도 망가져 있었다. 클론이 나가고 나서 벽이 깨진 것인지 제어실 바닥에선 소량의 크립토나이트가 발견되었다. 어른 손바닥만큼이나 두꺼운 방탄유리는 마치 설탕 장식처럼 부서져 내렸다. 바닥에 푹 파인 손자국도 발견 되었는데, 아마 힘을 되찾으면서 주체하지 못하고 만든 것으로 보였다. 화재 현장에서 찾아낸 코너의 잠재 능력은 생각보다 훨씬 강력했다.
이런 상황이었지만 나서서 코너를 찾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누가 감히 인체실험을 통해 만들어낸 무기를 공공연하게 수소문 할 수 있을까. 그것도 슈퍼맨의 유전자가 섞인 클론을. 이러저러한 이유로 루터는 조용히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괜히 허술하게 움직였다가 슈퍼맨의 눈에 띄는 것은 사양이었다. 다만 조금 아까운 것이 있다면 잠재된 힘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풀어줘 버렸다는 것이었다. 렉스 루트는 쓴 입맛을 다셨다. 조금만 더 자신의 손에 있었다면 훨씬 좋은 자료를 충분히 얻을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아까운 무기지만 포기해야겠군.”
“정말이십니까?”
“떳떳하게 알릴 것도 아니지 않나. 데이터만 무사하다면 충분해. 어차피 그건 제대로 완성되지 않아서 오래 살아남지 못 하겠지. 배운 거라곤 엎드려서 짖는 것 밖에 못하는 놈 아닌가.”
“알겠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그 날 왜 화재가 났었던 걸까.”
“…….”
“알 수 없는 일이야.”
“그렇습니다.”
루터는 코너가 아마 산으로 갔을 거라 추측했다. 연구소는 산기슭에 지어져서 나갔다면 산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그 산엔 아직 늑대와 거대한 늑대 우두머리가 산다는 전설이 있었다. 하얀 털을 가진 늑대가 산 깊은 곳에서 늑대를 이끌고 가끔 보름달이 뜨는 밤 그 모습을 나타낸다고도 했다. 루터는 씩 웃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천하의 내가 그런 전설 따윈 믿지 않지. 루터는 빠르게 연구실을 복구하라고 명령했으며 그와 동시에 콘-엘이 평생을 살았던 연구실을 폐쇄하고 묻어버리라고 지시했다. 데이터만 챙기면 충분했다. 코너가 없는 반파된 연구실은 보존할 가치조차 없었다. 아마 보존하는데 더 많은 돈이 들겠지.
루터 제약에서 만들어낸 클론 1호 - 정식 이름 콘-엘 - 은 사실상 폐기 상태로 적당히 서류가 꾸며졌다. 물론 이 서류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아주 소수에 불과 했고, 몇 번 고위층에서 클론에 대한 말이 오간 이후엔 다시는 열리지 않을 금고에 처박혔다.
그리고 그런 일이 있고나서 얼마 되지 않아 너무나 우습게도 세간엔 깊은 숲속에서 늑대들과 함께 산다는 소년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적당히 사람들의 호기심을 돋우면서도 절대 꼬리가 잡히지 않는 소문은 잠들 줄 모르고 천천히 메트로폴리스 전체에 퍼져나갔다. 그 촌극을 바라보던 루터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The time between dog and wolf
❝ The time between dog and wolf ❞
002 - 000
_____________ (Full name)
noted for approval by : _____________ Manager
잠깐만. 그럼 이 일의 시작이 루터 제약이란 건가?
네, 맞아요. 지금까지 이야기 다 들으셨잖아요?
그런데 웨인 제약 쪽은 이 일을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거지?
그야 당연히 서로 목덜미에 이빨을 대고 있는데 이 정도는 알고 있어야
서로서로 공략을 하겠죠. 기업차원에선 당연한 일이에요.
회사 일이란 것이 가끔은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해야 하고, 모르지만
다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해야 하는 법입니다. 안 그래요?
그렇지.
그럼 이야기를 계속 해보도록 할까요? 이 이야기는 꽤 길거든요.
정말 이렇게 다 말해도 괜찮은 건가?
글쎄요. 그건 일단 이 이야기가 모두 끝나고 난 다음 생각해보기로 하죠.
팀 드레이크 웨인.
그는 웨인 기업의 수장인 브루스 웨인의 세 번째 양자이자 웨인 제약에 새로 입사한 연구원이었다. 웨인이란 성은 잘 쓰지 않으려 했지만 연구실에 소속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팀 드레이크가 차기 회장후보 중 한 사람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대놓고 티를 내는 쪽은 아니었다. 오히려 학문적 호기심이 깊었고, 누구보다도 성실했다. 그리고 그만큼 머리도 좋았기에 팀은 어린 나이에 이례적인 승진을 할 수 있었다. 웨인 가의 공작이 있었을 거라고 몇몇 사람들은 떠들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가져오는 연구 성과에 할 말을 잃곤 했다. 이 쪽 업계에서 천재 소리를 듣는 만큼 팀에겐 필요한 만큼 아낌없는 지원이 내려왔다. 신 약품을 개발하는 연구실로 옮긴 것도 팀이 자신이 해보고 싶다고 직접 요청했다는 말이 있었다.
팀이 연구실에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연구실 쪽으로 극비 정보가 입수 되었다. 가만히 듣기만 하면 굉장히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다. 마치 여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휴게실에서 커피 한 잔씩 들고 할 법한 이야기와도 같았다. 각자 의자에 앉아서 프린트 된 것을 돌려보던 직원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은데요?”
“맞아요.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살아있겠어요?”
“…….”
“그 때 그 쪽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벌써 몇 년이나 지났어요. 숲속은 생각보다 위험 할 테고…….”
“그러니까 속는 셈 치고 받아들여보자 이거지.”
“…….”
“재밌긴 하겠네요.”
손끝으로 프린트를 넘겨보던 팀이 조용히 웃으면서 손으로 턱을 괴었다. 분명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소재였다. 팀도 물론 루터 제약이 비밀리에 행했던 실험의 전말을 대충은 알고 있었다.
서로서로 급소를 대주면서 경쟁하고 있는 두 회사는 끊임없이 스파이를 양성해 냈고, 아무리 비밀리에 행하는 실험이라도 쌍방에 모두 흘러들어가기 마련이었다. 브루스와도 몇 번 이야기했던 주제이기도 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꼭 한번 데이터를 보고 싶은 실험이기도 했다. 반인륜적인 행위라는 것을 모두 내려놓은 순수한 학문적 호기심 이었다. 프린트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눈으로 훑은 팀이 잠시 말을 멈추고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실험체가 숲 속에 살아있다…라. 그것도 몇 년째.’
“이미 목격자를 찾아놨다고 하더군.”
“정말?”
“그래. 커다란 늑대의 흔적을 따라 올라갔는데 분명 사람의 모습을 한 물체가 네발로 움직이고 있었다고 했어.”
“…잘 됐으면 좋겠네요.”
“역시 팀도 구미가 당기는 거지?”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죠. 데이터 상으로도 중요하게 작용 할 수 있는 문제기도 하고…….”
다리를 한쪽으로 꼰 채 의자에 몸을 묻어버린 팀이 프린트를 흔들면서 피식 웃었다. 팀은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솔직히 잔뜩 흥분하고 있었다. 신약 개발도 더딘 상태에 따로 공부할 만한 것을 찾지 못해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그에게 하늘이 내려준 기회 같았다. 이 프로젝트를 꼭 해보고 싶었다.
‘제발 있어라. 제발.’
팀은 속으로 몇 번이나 빌었다. 팀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원하는 것을 가지지 못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오히려 그런 걱정을 하는 것이 우스울 정도였다. 브루스 웨인은 팀의 머리를 높이 평가하면서 아끼지 않는 지원을 해주곤 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달랐다. 가지고 싶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설사 산 속으로 들어간다 해도 실험체를 포획할 수 있을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비밀리에 포획대가 산으로 떠난 이후로도 줄 곧 팀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잔뜩 챙겨다 놓은 관련 자료는 책상에 쌓여만 갔다. 그리고 하다하다 못해 늑대 다큐멘터리까지 빌려와 돌려보면서 포획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늑대와 같이 살았다는 소문으로 미루어 볼 때 인간성을 기대하긴 힘들 것이란 자체적인 판단 때문이었다. 게다가 루터 제약이 실험체 따위에게 제대로 된 지식을 심어줬을 것 같지도 않았다. 화면 안에서 끊임없이 울어대는 늑대 소리를 멍하니 듣던 팀이 눈을 깜박깜박 하면서 정신을 차렸다. 순간 지나가는 화면 속에서 울린 울음소리는 굉장히 길고 구슬펐다. 손에 편하게 괴고 있던 얼굴을 들어 올린 채로 멍하니 그 소리를 돌려보던 팀이 눈만 깜박깜박 하며 침대에 앉아있었다. 가슴 속에서 간질간질하게 늑대 울음소리에 반응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순 없었지만, 적어도 환희나 기쁨은 아니었다.
그렇게 방에 처박혀서 늑대 다큐멘터리를 하루 종일 돌려보던 팀은 그 날 기숙사에서 머물지 않고 저택으로 돌아갔다. 문을 열자마자 답싹 달려들어서 죽일 듯 으르렁 거리는 막내 동생을 간신히 떼놓은 팀이 소파에 앉아서 브루스를 기다렸다. 귀찮게 치대는 몸을 몇 번 눌러 떼어냈다. 죽일 거야 드레이크! 그 전에 너부터. 죽일 거라고! 적당히 얼러주며 놀아주면 시간은 금방금방 가곤 했다.
그리고 몇 시간이 지나서 집으로 돌아온 브루스와 함께 늦은 저녁식사를 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 그리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편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할 말이 많았다. 잘 구워진 스테이크를 포크로 찔러서 고정시킨 채 가볍게 칼질을 했다. 부드러운 고기가 잘리고 쇠와 유리가 부딪히는 소리가 짧게 들렸다. 그리곤 나이프가 접시 옆에 달칵 소리를 내며 놓였고, 곧 손이 포크가 들어 올려졌다. 작게 잘린 고기를 입에 넣으려던 팀이 잠시 멈칫 하더니 브루스를 불렀다. 낮은 목소리는 조용한 식탁위에 도르르 굴러내렸다. 그리고 시선을 마주쳤다. 언제나 봐도 푸르고 깊은 눈이었다. 브루스의 푸르고 시린 눈에 바다색 시선을 고정한 채 팀이 작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거 맡아서 해보기로 했어요.”
“그러냐.”
“그런데 포획을 해와야지 제대로 진행 될 거 같아요. 못하면 그냥 끝인 거니까.”
“아마 잘 될 거다. 충분한 조사로 했고 저지할 만한 수단도 들고 들어갔으니까.”
“브루스가 직접 보낸 사람들 말이죠?”
“그래. 아무 업체한테나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정보가 새어나가면 곤란하니까. 내 쪽에서 직접 연락을 했다.”
“그런데 그렇게 데리고 오면 뭘 하죠? 인간으로 만들어 봐요? 몇 년 동안 짐승처럼 살았던 걸요?”
“글쎄다. 그건 네가 알아서 할 일이겠지.”
“그런가요. 흐음.”
오물오물 입을 움직이면서 팀은 또 생각에 잠겼다. 호기심으로만 생각해 보자면 해보고 싶은 것은 굉장히 많았다. 그 슈퍼맨의 유전자를 계승한 클론이라니. 어디서 감히 만져나 볼 수 있을까. 하지만 뭔가 석연치 않았다. 모두들 그 것이 인간이 아닌 짐승이라고 치부하고 있었다. 물론 팀도 마찬가지였다. 가슴 속에서 묘하게 피어오르는 불안함을 꾹꾹 누르기라도 하듯 팀이 꿀꺽 고기를 마저 삼켰다.
❋ ❋ ❋
연구실은 빠르게 확장 공사 중이었다. 워낙 연구실이 커다란 건물이라 제대로 쓰지 않는 곳이 제법 있었는데 그런 곳을 터서 격리실을 만들었다. 격리실 안쪽엔 붉은 조명을 꼼꼼하게 설치했다. 그리고 구속을 하기위한 이런저런 물건을 다 들인 다음 어른 손바닥만큼 두꺼운 아크릴 유리로 마지막 마무리를 했다. 그런 공사를 하나도 빠지지 않고 지켜보던 팀은 붉은 조명이 방안 가득 퍼지는 것을 보고서야 밖으로 나갔다.
‘공사가 마무리 될 때 쯤 소식이 들렸으면 좋겠는데.’
흰 가운을 다시 고쳐 입고, 주머니를 뒤져서 출입 카드를 꺼낸 팀이 밖으로 나갔다. 예의 그 건을 맡기로 하면서 안 그래도 그다지 많지 않았던 일은 다른 부서로 모두 넘어갔다. 중요한 일이니 이쪽에만 신경 쓰라는 의도였지만, 팀의 귀에 희망적인 소식이 들려오지 않으니 그저 지루한 하루일 뿐 이었다.
어차피 잠시 뒤면 미친 듯이 바빠지니 쉴 수 있을 때 몰아서 쉬어두라는 선배들의 반쯤 진심어린 농담이 뒤통수에 달라붙었다. 점심도 먹어야했고, 외부 도서관에서 잔뜩 빌려온 책들도 이번 주엔 반납해야 해야 했다. 도서관에 다녀오는 김에 겸사겸사 점심까지 해결하기로 정한 팀이 바쁘게 개인 실로 걸어갔다.
한참 도서관에서 책을 찾고 있을 때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이 부우웅 진동을 했다. 꺼내려던 책을 다시 선반에 꽃아 넣은 팀이 휴대폰을 꺼내 발신 번호를 확인했다. 그러더니 곧 급하게 밖으로 뛰어나갔다. 커다란 기둥에 몸을 기댄 채 전화를 받은 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리곤 책을 빌리는 것도 잊은 듯 급하게 도서관을 떠났다.
“팀, 어디 갔었어.”
“죄송해요. 도서관에 좀 다녀오느라.”
“이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텐데 괜찮겠어?”
“전 환영입니다. 정말 포획에 성공한 건가요?”
“그래. 방금 도착해서 조금 있으면 격리실 쪽으로 옮긴다고 하더라. 아직 우리도 말만 듣고 실제로 보지도 못했어.”
“격리실 쪽에 들어가면 이제 우리 보안 등급 세 단계 상승 하는 거 알아? 아마 집에도 제대로 못 갈걸?”
“어차피 잘 들어가지도 않잖아요.”
“아니야!”
팀은 두근거리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참을 수 없었다. 흥분에 못 이겨 가늘게 떨리는 손을 마주잡았다. 하지만 좀처럼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쿵쿵 터질 것 같은 심장 소리가 혹여 곁에 있는 동료들에게 들릴까 신경이 쓰일 정도였다. 한쪽에 잘 걸어둔 자신의 가운을 휙 걷어와 걸쳐 입은 팀의 얼굴에선 호기심이 뚝뚝 흘러내렸다.
포획대가 연구실로 돌아온 것은 한 시간 정도 전이었다.
이중 삼중으로 보안이 강화된 차는 은행 현금 수송차보다 훨씬 단단한 강도를 자랑했다. 빛이 들지 않게 만들어진 우리엔 예의 그 것이 들어있었다. 브루스가 특별히 이번 일을 위해 주문했다는 목걸이를 채운 채 조심스럽게 옮기는 중이었다.
솔직히 수색대들조차 반신반의 하면서 들어간 산이었지만. 산 중턱 쯤 도달했을 때 소문이 마냥 헛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하얗고 부드러운 털을 가진 거대한 늑대가 산다는 산은 소문에 걸맞게 신비로웠다. 나무들이 발을 움직이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빽빽하다가도 어느새 평지가 나타났고 다시 넝쿨이 엉켜들거나 갑자기 동굴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렇게 헤매며 들어간 곳은 부드러운 풀이 잔뜩 나있는 요새 같은 공간이었다. 사방엔 수직으로 깎아 세운 절벽이 빙 둘러져있었고 엄청난 수풀이 충분히 몸을 숨길 수 있을 만큼 풍성했다. 물도 있었고, 몸을 숨길만한 동굴도 존재했다. 둥치가 굉장히 두껍지만 야트막하게 수평으로 가지를 뻗은 나무 아래 수풀엔 커다란 것에 오랫동안 눌린 자국이 발견되었다. 그 눌린 크기는 상상보다 훨씬 커서 아마 전설 속의 늑대의 흔적이 아닐까 했다.
“여기가 맞는 걸까요?”
“아마도.”
“…이런 곳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습니다.”
“다들 조심해서 주변을 살펴봐라. 분명 근처에 있을 거다.”
- 발견했습니다!
전파가 잘 통하지 않는지 약하게 노이즈가 이는 무전기에서 급박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 멀리 않은 곳에서 목표물을 발견했다. 늑대의 생활 사이클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인지 좀처럼 움직이지 않은 채 잠을 자고 있었다. 야생동물처럼 몸을 웅크린 채 잠을 자고 있는 것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움찔 움찔 하면서도 잠에서 깨지 않는 실험체의 목에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목걸이를 채웠다.
“!!!!”
그 순간 눈을 번쩍 뜨고 급하게 저항을 했지만, 곧 목걸이에 무슨 약이라도 탄 듯 흐물흐물 힘이 없어지며 푹 주저앉았다. 흡사 마취 총을 맞은 것처럼 팔다리부터 힘이 풀리기 시작하더니 힘없이 땅바닥에 쓰러졌다. 목 안에서 울리는 그르릉 거리는 위협소리는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미약했다. 애꿎은 땅만 긁어대는 손가락은 푹푹 힘이 들어가는 대로 깊은 골을 만들 뿐이었다. 이내 그마저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늘어진 몸을 질질 끌어서 은신처에서 끌어냈다.
노련한 수색대들은 소기의 목적을 이뤘으니 다른 맹수의 습격이 있기 전 빠르게 물러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실험체를 옮길 차량까지 질질 끌어왔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에 두 손엔 수갑을 채웠다. 또 야생동물 같은 것이 흥분해서 혀를 물거나 하는 자해를 할 수 있으니 동물들이 쓰는 것 같은 재갈을 물렸다. 낮게 울리는 위협적인 울음소리가 끊임없이 수색대의 솜털을 바짝 세우긴 했지만 그뿐 이었다.
“어서 우리에 집어넣어. 그리고 빠르게 이곳을 떠난다.”
“네!”
제대로 힘 한번 주지 못하는 것을 우리 안에 밀어 넣었다. 급하게 집어넣느라 와장창 하고 우리에 처박히는 소리가 들렸지만 튼튼하다고 들었으니 그 정도는 상관이 없을 듯 했다. 몇 번이나 주의를 받은 대로 해가 실험체에게 닿지 않게 이중문을 닫은 후 걸쇠를 걸었다. 귀한 실험체가 사방이 막힌 곳에서 행여 질식하는 일이 없도록 산소 발생 장치를 툭툭 켜주고 난 뒤 재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소문의 실체가 끌려가고 남은 자리엔 길고 긴 맹수 울음소리가 한동안 맴돌았다. 누군가를 찾는 것 같기도 하고 울부짖는 것 같기도 한 늑대 무리의 울음소리는 푸른 하늘에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 ❋ ❋
눈을 가리고 입에 재갈을 물렸다. 일어서지도 못하는 몸을 짐짝처럼 들것에 실어서 끌고 왔다. 익숙한 손길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커다란 몸뚱이를 곧바로 격리실에 수감했다. 잔뜩 흥분한 숨소리가 그릉그릉 실험실 안에 울렸다. 입에 가득 들어찬 구속구가 불편한지 연신 벗겨내려고 땅바닥에 목을 비벼댔다. 보통 사람의 피부라면 찢어져서 피를 보았을 것 같은 움직임이었지만 다행히도 커다란 상처는 나지 않았다. 사지를 결박했던 것은 풀어줘서 자유로웠지만 좀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비척비척 몸을 끌면서 구석으로 기어들어가서 몸을 웅크리는 것이 전부였다. 설치되어 있는 조명은 퇴근을 할 때도 절대 끄지 말라는 주의를 몇 번이나 읊어주는 목소리에 머리가 띵해진 연구원들이 설레설레 손사래를 쳤다. 뭔가 엄청난 것이 들어온 것은 확실했다.
끙끙 거리며 구석에 처박혀 있는 저 녀석이 그렇게 강한가 싶었지만, 비밀리에 보내져온 보고서에 의하면 조명과 제어 목걸이가 없으면 성인 남자 서넛으로는 어림도 없는 완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게다가 야생에서 오래 살아서 그 힘을 제어하는 법조차 제대로 배우지 못했을 것이란 추측도 빨간 글씨로 적혀 있었다. 한마디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격리실이 제대로 돌아가면서 그 엄청난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할 정로도 눌러 준다는 것일까. 끙끙거리는 소리에 괴로운 듯 길게 내쉬는 숨소리가 섞여들었다. 웅크리고 있는 것도 힘이 드는지 이내 바닥에 길게 늘어졌다. 간신히 뜨고 있던 눈은 곧 감긴 채 다시 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크게 들이쉬는 것에 비해 형편없이 얕게 내뱉는 날숨은 고통의 크기를 대변하는 것 같았다. 몸은 뒤척이는 것도 불편하고 말은 할 줄 몰랐다. 숫제 짐승처럼 몸의 불편함과 고통을 표현했지만 그걸 알아줄만한 사람도 주변에 없었다.
이 시간을 기다리던 사람은 잠시 일이 있어서 호출을 받고 자리를 비운 상태였던지라 그렇게 고대하던 순간을 직접 보지 못했다. 팀이 급하게 연구실로 내려왔을 땐 이미 상황이 모두 종료된 상태였다.
“아.”
“조금만 일찍 오지 그랬어.”
안타깝게 탄식을 흘리는 팀을 보는 선배들은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팀의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격리실 구석에 늘어진 채 숨만 가늘게 쉬고 있는 물체였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힉힉 부풀어 오르는 가슴을 빤히 바라보다 격리실 전면 유리 가까이 가서 손으로 유리를 짚었다. 눈을 가늘게 찌푸리며 안을 들여다보았다. 팀이 숨을 쉴 때마다 유리에 하얀 김이 서렸다. 반짝거리는 눈은 호기심에 가득 차있었다. 완벽하게 방음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또 아닌지 팀의 귀에 약하게 깔리는 신음소리가 들렸다. 다큐멘터리에서 몇 번이나 들었던 늑대 울음소리와 비슷한 것 같기도 하면서도 웅얼거림이 섞인 소리는 묘한 흥분을 선사했다. 울음소리는 길게 늘어지다가도 짧게 끊어졌다. 그리곤 다시 바닥에 낮게 깔리는 목소리는 야생동물을 닮아있었다. 아마 저런 목소리로 여자에게 말했다면 넘어오지 않을 여자가 없었을 거라 생각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팀이 화들짝 놀라서 머리를 흔들며 쓸데없는 생각을 지워버렸다.
“…….”
팀의 잔뜩 흥분해서 기분이 좋은 것과는 별개로 콘은 하염없이 스트레스만 쌓이고 있었다.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었던 며칠 전과는 다르게 온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콘은 굉장히 불편했고 고통스러웠지만 왜 자신이 그런 일을 겪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온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이상한 감각과 호흡을 방해하는 재갈에 잔뜩 성이 나서 으르렁 댈 뿐이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어려운 공간에서 예민할 대로 예민해진 콘은 누구도 쉽게 건드리지 못했다. 보금자리가 바뀌어 한껏 예민해진 시기에 콘을 만난 팀은 그저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
“너무 가까이 가지마라.”
“네? 왜죠?”
“스트레스가 쌓이는지 신경이 아주 바짝 서있어.”
“그렇겠죠.”
그제야 유리 앞에서 물러선 팀이 따끈한 김이 올라오는 머그잔을 받아들고 의자에 앉았다. 후 불어서 살짝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넘긴 팀이 며칠간은 지켜보자면서 의자에 몸을 좀 더 기댔다.
“사람도 적응 기간이 필요한데 짐승이라면 더하겠죠. 조금만 지켜보도록 하죠.”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급하게 서둘러서 연구를 망치느니, 시간을 좀 더 들이고 확실한 쪽을 택하려는 것 뿐 인걸요.”
“넌 못 당하겠다.”
“하하하.”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시는 구할 수 없는 귀한 개체인 만큼 조심히 다루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팀의 말처럼 며칠 동안은 새로운 보금자리 적응 훈련이라고 말하며 콘을 저 좋을 대로 하라고 내버려 두었다. 물론 풀어둔다고 해서 마음껏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연구실에서 키우는 강아지가 아니었으니까.
격리실 내에는 위험할만한 모서리나 기구는 모두 치워버려서 조명이 닿지 않는 곳은 없었다. 자연히 조명 세기가 조절 될 때마다 거친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갑갑하게 조이는 목걸이를 벗고 싶은지 곧잘 목 부근을 움켜쥐고 버둥거렸지만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가락은 툭툭 바닥으로 떨어지기 일쑤였다.
그런 모습을 묵묵히 차트에 기록하던 팀이 볼펜을 손끝으로 돌리며 잠시 콘을 바라보았다. 딱히 애정을 줄만한 상대는 아니었지만 계속해서 들리는 신음소리와 일단 먹으라고 주는 밥도 거부한 채 물만 간신히 넘기는 불쌍한 모양새를 보니 영 마음이 쓰였다. 자연히 좀 더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넘겨다보게 되었다.
그러던 중 목걸이를 체크하러 들어갔던 연구원이 대차게 공격당한 일도 있었다. 파지직 튀는 눈의 불꽃이 보였다고 생각한 그 순간 연구소 직원은 붕 뜬 채 벽에 처박혀 있었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뿌리치긴 했는데 그 이후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비틀 그러며 다시 쓰러진 눈에선 파란 안광이 번쩍였다.
“어딜 봐도 늑대네요. 야생 늑대 그 자체.”
“말도 마라. 너 없을 때 푸닥거리를 얼마나 치렀나. 난 쟤 당분간 보기도 싫다.”
“그렇게 심했어요?”
“벽에 처박힌 두 사람 중 하난 응급실로 실려 갔다. 힘을 거의 못 쓰는 와중에도 어른 하나를 그냥 날려버리던 걸”
“와우.”
“그러니 너도 어지간하면 가까이 가지마. 저건 아무도 못 다뤄. 그냥 저렇게 가두고 관찰해야 하는 거야.”
“…….”
입을 삐죽 내밀면서 입을 다물어 버린 팀의 얼굴을 살피던 선배가 팀의 어깨를 팡팡 치면서 다시 말했다.
“너 다치면 진짜 불호령 떨어진다고. 팀 드레이크씨. 어지간하면 호기심은 접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생각해 볼게요.”
“넌 그러다 분명 크게 한번 당할 거다. 선배 말은 들으라고 있는 거니까 제발 좀 들어.”
“하지만…궁금하잖아요.”
저걸 누가 말리겠어. 선배들이 손을 절래절래 흔들었다. 최대한 팀이 멀리서 연구를 진행하길 기대했지만,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아마 보는 눈이 없으면 격리실 안으로 들어가고도 남았다. 어제와 비교해서 오늘 상태를 체크하던 팀이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아무래도 뭔가 달라진 부분이 있는 듯 볼펜 끝을 탁탁 튀기면서 다시 두 차트를 비교했다. 그리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불러세웠다.
“선배. 지금 세끼 모두 제대로 들어가고 있는 거 맞죠?”
“그래. 근데 안 먹더라.”
“…….”
“아주 고집이 대단해. 먹는 건 고사하고 물이나 마시면 다행인 상태로 저렇게 시름시름 앓고 있다.”
“역시 그게 문제인가.”
“응? 뭐가?”
혼잣말인지 대화를 거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화법에 사람들이 하나 둘 팀을 바라보았다. 차트를 한손에 든 팀이 말을 이어서 했다.
“저러고 있으니까 스트레스가 더 쌓여서 아무것도 입에 안대는 거 아닐까요?.”
“무슨 소리야.”
“눈가리개도 그렇고 재갈도 그렇고, 야생동물과 같은 상태라면 모르는 장소로 끌려왔을 때의 불안감이 얼마나 큰지 알 것 같아서요. 집에서 키우는 개도 집이 바뀌면 불안해하잖아요.”
“하지만 아무도 못 건들인 다니까. 이미 몇 명이나 물어뜯길 뻔 하고 병원 신세를 졌다고.”
“맞아. 저 격리실이 완벽하게 힘을 제어해주고 있어서 이정도지, 안 그랬으면 벌써 연구실이 반쯤 날아갔을 걸?”
“하지만…….”
하긴 정말 다친 사람이 있는데 저런 곳에 들어가는 것은 무서울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팀은 계속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쉽게 들어갈 사람은 없어보였다.
“그럼 제가 들어가 보죠.”
“야, 야 아서라!”
“괜찮다니까요? 어차피 힘도 못쓴다면서요. 눈가리개라도 벗겨서 환경에 익숙하게 만들면 조금 더 나을 수도 있잖아요.”
“그러다 진짜 다쳐. 호기심이 드는 건 알겠는데 그건 아니야.”
“혹시 큰일 나면 조명이나 더 세게 틀어주세요. 이러고 있다간 아무것도 안 될 거 같아서 그래요.”
자신을 막아서는 사람들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간 팀이 격리실에 달린 터치패드에 손을 가져다 댔다. 가벼운 기계음이 보안이 해제 된 것을 알렸다. 육중한 유리문이 천천히 열렸다. 한 사람 들어갈 정도만 문을 연 팀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격리실 안은 팀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답답했다. 아마 사방에 달라붙은 붉은 조명 때문일거라 생각했다. 팀이 걸치고 있는 흰 가운은 붉은 빛을 듬뿍 받아서 붉게 변했다. 낯선 냄새에 흥분한 것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부들부들 떨면서 일어서는 폼이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것 같아서 조명을 좀 더 세게 올렸다. 그러자 팔이 푹 꺾이면서 그대로 턱부터 바닥에 부딪혔다. 그대로 쓰러진 채 온몸을 비틀면서 축 늘어졌다. 그리고 입에서 괴로운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목 안에서 울리는 고통이 섞인 목소리에 팀이 인상을 찌푸렸다.
사람들이 바깥에서 보던 것 보다 훨씬 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버틸만해서 버티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잘 망가지지 않는 튼튼한 몸이 의자와 상관없이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애잔함도 잠시 낯선 발자국 소리와 냄새가 가까워져 오자 바짝 경계하기 시작한 것은 인간이 아니라 늑대에 가까웠다. 비록 눈은 가려져서 안보이지만 저 안대를 벗겨내면 사람을 잡아먹을 듯 형형한 눈이 이글거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쉬…가만있어. 그러면 괜찮을 거야.”
“…….”
“쉿…가만 가만.”
“…….”
알아듣는 것은 아닌데 바짝 굳어있던 어깨가 살짝 누르러 졌다. 콘이 자신의 냄새에 익숙해지도록 팀은 잠시 격리실 가운데 멈췄다. 그리곤 콘을 바라보았다. 바닥을 파낼 것처럼 바짝 긴장한 손가락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몇 번이나 타일을 긁어내리던 손가락에 힘이 슬쩍 풀리면서 손바닥이 땅에 닿았다. 그대로 팔이 꺾여서 푹 쓰러졌다 억지로 힘을 주면서 일어나려는 몸뚱이가 괴롭게 움직였다. 더 이상 버둥댈 힘도 없는지 옆으로 쓰러진 채 숨만 헐떡거렸다. 그리고 그것도 힘든지 미동조차 하지 않고 가만 누워있었다. 손가락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걸 눈으로 보고 나서야 팀이 조심스럽게 한걸음 더 콘에게 다가갔다.
한걸음. 그리고 또 한걸음. 긴장한 구두 발자국 소리가 점차 크게 울려 퍼졌다. 손만 뻗으면 머리를 쓰다듬어 줄 수 있을 만큼 가깝게 다가갔다. 그리고 팀이 조심스럽게 한 쪽 무릎을 꿇고 시선을 낮췄다. 빳빳한 가운이 구겨지는 소리에 콘의 몸이 움찔했지만 그 이후 큰 움직임은 없었다. 까만 뒤통수를 바라보다 조금 시선을 틀자 날렵하게 쭉 뻗은 콧대가 눈에 들어왔다.
“…널 해치려는 게 아니야.”
“…….”
“알았지?”
콘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혼잣말을 하는 팀의 손끝에 닿은 것은 단단한 가죽이었다. 입 주위에서 시작된 재갈은 귀 뒤를 돌아들어가 뒤통수에 걸쇠로 단단히 매어져 있었다. 좀처럼 끊어지지 않는 질긴 가죽은 좀처럼 늘어나지도 않아서 계속 얼굴을 파고드는 것처럼 찰싹 붙어오며 호흡을 방해했다.
“…….”
반걸음 더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콘의 볼에 댔다. 생각보다 반응이 없자 팀은 이번엔 좀 더 대담하게 움직였다. 손가락이 하나 둘 볼에 붙어오다 이내 손바닥을 대고 손가락으로 감싼 다음 천천히 얼굴을 들어올렸다. 이미 고개를 지탱할 수 없을 만큼 힘이 빠진 목은 조금만 힘을 빼도 고개가 휙휙 꺾여 넘어갔다.
안대가 두 눈을 단단히 조이고 있어 눈을 볼 순 없었다. 평범한 애완동물이라고 생각할 만큼 얌전했다. 여전히 목 안에서 울리는 울음소리는 팀을 경계하고 있었지만, 몇 명이나 병원 신세를 지게 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끙끙거리면서 한 손으론 목을 둘러서 고정시키고 다른 손으론 뒤통수를 더듬어 들어갔다. 엉망으로 길게 자란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으면서 안대의 끝을 찾았다. 손끝에 모든 신경을 집중해서 머리카락 속에 숨겨진 걸쇠를 찾았다. 차가운 쇠가 손끝에 걸리자 팀이 손가락에 힘을 줘서 꾹 눌렀다.
달칵.
밀폐된 공간에 울리는 작은 소리와 함께 눈을 가리고 있던 안대가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팀은 그날 처음 콘의 눈을 볼 수 있었다. 엉망인 머리카락에 안대가 걸렸는지 한쪽 눈만 슬쩍 보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한동안 안대에 가려져서 빛을 보지 못해 흐릿해진 눈은 몇 번 깜박깜박 감았다 뜨면서 점차 또렷하게 초점이 잡혔다. 그리고 그 눈으로 팀을 쳐다보았다. 어쩐지 팀은 호랑이의 눈을 바로 본 것처럼 온몸에 소름이 돋고 오스스 솜털이 섰다. 몸은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고 어색하게 안대 끝을 잡고 있는 손은 아직도 콘의 뒤통수에 머무르고 있었다. 푸른 눈과 푸른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날카롭게 가늘어지는 바다를 닮은 눈에선 푸른 안광이 울컥 흘러나왔다. 팀은 콘의 눈이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와 같다고 생각했다. 일렁이는 안관은 파도처럼 몰려왔다 쓸려내려가곤 했다. 안대를 꾹 붙잡고 있던 팀의 손에 힘이 스르르 빠진 잠깐의 순간이었다. 눈앞에 푸른빛이 순식간에 긴 꼬리를 그리며 다가왔다.
“!!!!”
그리고 팀은 곧바로 등과 뒤통수에 엄청난 충격을 느꼈다. 처음엔 등이 으깨질 것처럼 바닥에 사정없이 처박혔고, 그 반동으로 머리를 세 개 부딪혔다. 머리는 아파서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초점은 맞지 않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너무 놀라서 그대로 잡아채버린 안대가 손에서 떨어졌다. 잡아 뜯긴 머리카락이 후두둑 쏟아져 내렸다. 팀은 무엇인가 협박이라도 당한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자신의 위를 올라타서 뼈를 부술 기세로 내리누르는 것은 인간의 눈을 하고 있었지만 그 안엔 맹수의 눈빛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파랗게 타오르는 눈은 쳐다보기만 해도 아찔했다. 간신히 손을 움직여 밀어내려고 했지만 그 조차도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팀!!!”
“…….”
격리실 밖은 이미 난리가 난지 오래였다. 하지만 저기서 더 자극하면 정말 팀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팀은 뻣뻣하게 굳은 손을 천천히 콘의 가슴 쪽에 대고 밀어보았다. 부질없는 행동은 몇 번 하다 이내 포기한 듯 늘어졌다. 밀어낼 수 있을 거라 생각도 안했고, 손이 닿았을 때 다시 한 번 그걸 깨달아버렸다. 붉은 조명이 효과적으로 콘의 힘을 차단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평범한 일반인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악력이 좋았다.
자신에 비하면 한없이 가냘픈 양 어깨를 아프게 짓누르고 있는 콘은 팀을 내려다보았다. 무엇인가 킁킁하며 냄새를 맡던 콘의 눈이 샐쭉하게 얇아졌다. 그러다 이내 다시 눈을 사납고 날카롭게 치켜뜨고 천천히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지금까지 부상당한 사람들이 그대로 벽에 처박혔던 것에 비하면 굉장히 얌전한 태도였지만 그렇다고 한바탕 놀고 나오라며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언제나 침착하고 차분한 팀이었지만 갑작스런 위협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쇳소리가 날만큼 놀란 목소리가 콘의 귀에 날카롭게 파고들었지만 딱히 행동을 멈추려고 하지 않았다.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의 언어 따위는 콘의 귀엔 그저 시끄러운 소음일 뿐이었다.
“…잠깐. 콘! 콘-엘!”
“…….”
“그만해!!”
“…….”
어딜 봐도 명백한 공격 의지에 팀은 잠깐 정신을 놓을 뻔했다. 목덜미 가까이에 얼굴을 바짝 대고 울었다. 흥분한 맹수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귀를 파고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입에 채워진 재갈 덕분에 큰 상처는 입지 않았다는 점 정도일까. 사람보다 훨씬 뜨거운 체온이 손바닥을 통해 어깨로 스며들었다. 불에 덴 것 같은 통증에 팀이 어깨를 뒤틀었지만 소용없었다.
거칠게 팀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며 낮게 으르렁 거리던 콘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서로 눈을 마주쳤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팀은 똑똑하게 볼 수 있었다. 순간 보이던 원해 눈 색은 이제 붉은 조명에 완전히 먹혀들어갔지만 유난히 맑고 깊은 눈이 날카롭게 팀을 쳐다보았다. 늑대와 같지만 조금은 공허해 보이는 그런 눈이 어쩐지 무섭지 않아서 멍하니 바닥에 누운 채 올려다보았다. 그런 팀의 기분을 느꼈는지 콘의 살기도 조금 누그러졌다.
“…….”
“…무서운 사람 아니야.”
“…….”
“콘. 콘-엘.”
“…….”
“내 말만 들으면 괜찮아.”
느릿느릿 아주 천천히 흘러나온 말이었다. 콘보단 조금 높은 팀의 목소리가 그르렁 거리는 목소리를 진정시키려는 듯 바닥에 부드럽게 깔렸다. 그러다가도 어느새 바닥에서 치고 올라오며 콘의 목소리를 잡아 누르곤 했다. 그런 팀의 말이 한마디 두 마디 들릴 때 마다 으르렁대는 목소리가 점자 낮아졌다.
날카롭게 바짝 섰던 공기가 누그러지고 조금 숨이 트이자 팀이 조금씩 고개를 움직였다. 천천히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푸스스 흐트러지는 머리카락 사이에서 보이는 목덜미는 까칠하고 단단한 가죽이 잔뜩 비비고 지나가서 쓸리고 부어올라 있었다. 그런 목덜미를 보던 콘이 핥아주기라도 하려는지 다시 한 번 입을 가까이 가져갔지만 가죽이 먼저 살에 닿았다. 아찔하게 가죽이 쓸리는 감각에 팀이 약하게 신음을 내뱉자 화들짝 놀라며 얼굴을 들었다.
“괜찮아.”
“…….”
“진정하고, 날 믿어. 괜찮아.”
마법과도 같은 말이었다. 콘이 알아듣는지 조차 알 수 없었지만 계속해서 말을 반복하던 팀이 팔을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돌리지 않고 바닥부터 더듬거리며 콘의 팔뚝을 찾아 잡았다. 괜찮아. 몇 번이나 진정시키려고 건네는 차분한 말에 눈에 띄게 진정된 콘이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하얀 손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
“…….”
그 순간 아무 것도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았다. 순간 콘의 얼굴에 스치는 울 것 같은 표정을 보았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에 좀 더 가까이 보려고 조심스럽게 콘의 손에 잡힌 어깨를 빼려는 그 순간 콘의 몸이 앞으로 푹 쓰러졌다.
그제야 팀의 귀에 어지럽게 들리는 소리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밝기가 최대로 올린 붉은 조명과 엄청난 구타 소리에 귀가 트인 팀이 무의식적으로 콘을 끌어안았다. 하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급하게 들어온 사람들이 팀을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둘을 강제로 뜯어냈다. 어차피 모두들 콘이 쉽게 다치지 않는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아마 그랬기에 마음 놓고 매로 제압을 했을 것이다.
“괜찮다니까요!! 잠시만요!!”
“팀, 진정하고 어서 나와요. 팀!”
“난 충분히 진정했어요! 지금 이게 무슨 짓이에요!!”
질질 끌려가던 팀이 발을 땅에 붙이고 버텼다. 불시에 가격당한 머리에 충격이 갔는지 멍하니 웅크린 콘을 보던 팀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보통 때의 팀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생각하지도 못 할 만큼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거기 뭐해요! 때리지 말라고요!!!!”
“팀, 진정해. 팀!! 팀 드레이크!!”
“저 녀석 그냥 놀라서 그런 거예요. 이제 괜찮으니까 그러지 말아요! 내 말 듣고 있어?”
하지만 동료들은 팀이 놀라서 그런가보다 하며 강제로 격리실 밖으로 끌고 나왔다. 다시 들어가려는 듯 버둥대던 팀을 의자에 눌러 앉혔다. 씩씩 거리며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는 팀이 오히려 맹수 같았다. 엉망으로 더러워지고 구겨진 가운을 보던 연구원들이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러니까 들어가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거 아니에요.”
“네?”
“그냥 놀란 거였어요. 콘의 눈을 직접 봤어요? 날 죽이려면 처음 날 넘어뜨렸을 때 목을 비틀었겠죠.”
“…….”
“하지만 안 그랬어요. 잘 알아듣진 못하지만 내 말에 따라 진정하는 것도 확인 했어요. 그만 때려요!!”
날카롭게 반응하는 팀의 모습에 어물어물 사람들이 격리실 밖으로 빠져나왔다. 끙끙 거리며 누워있던 녀석은 미동이 없었다. 눈은 보이지 않지만 잔뜩 상처받았을 것이 분명했다. 제압하던 사람들이 모두 나간 후에야 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야생 동물을 모르는 곳에 잡아와서 멋대로 구속했으니 당연한 행동이었어요. 오히려 내가 성급하게 행동한 쪽이에요.”
“그래도 우린 연구원들을 서로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어.”
“…….”
“네가 아니고 누구라도 그렇게 위협을 당하고 있었다면 똑같이 행동했을거야.”
“그러니까 그게…….”
“팀.”
“미안해요. 내가 좀 흥분해서.”
단호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한숨을 푹 쉰 팀이 의자에 몸을 묻었다. 귓가엔 으르렁 대며 살짝 떨리는 목소리가 계속해서 맴돌았다. 가까이 오지 말라고 온몸으로 위협했지만 오히려 더 다가가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의 눈동자에 쨍하게 부딪히던 시선이 생각났다. 아마 연구를 하기위해선 여기서 그만둬야 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일단 그 눈을 본 팀은 푹 빠져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눈은 야생동물이 낯선 곳에 잡혀와 당황하는 눈빛과 꼭 닮아있었다. 잔뜩 사납게 눈을 치켜뜨고 안광을 번뜩여도 위협일 뿐이었다.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는 팀을 보고 있던 최고참 연구원이 오늘은 좀 쉬라며 팀을 기숙사로 올려 보냈다. 오늘은 이정도로 하고, 내일 진정이 되면 찬찬히 이야기해보자는 말도 덧붙였다. 팀은 허공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다가 의무실에서 목덜미 치료 하고 가라.”
“…네?”
“완전 다 쓸렸더라. 안 아프니?”
“아, 그러고 보니. 네. 알겠어요. 선배.”
“제발 좀 막무가내로 들이대지 마세요. 팀 드레이크 씨.”
“알았다니까요. 그리고…아니에요.”
뭐라 한마디 덧붙일까하다 이내 잠자코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끈거리는 목덜미는 생각보다 심하게 쓸린 것 같았다. 목에 붕대를 둘둘 감은 팀이 자신의 기숙사에 도착한 것은 생각보다 시간이 좀 지난 후였다. 혼자서 쓰기엔 지나칠 정도로 넓고 깨끗한 1인실에 들어선 팀이 가운을 벗어서 의자에 걸어두고 침대에 누웠다. 온 몸이 출렁 거릴 정도로 푹신한 침대가 잔뜩 긴장했던 몸을 부드럽게 감싸왔다. 슬슬 풀리기 시작한 근육이 뻐근하게 비명을 지르는 것을 느끼던 팀이 천천히 자세를 바꿔 돌아누웠다. 그러다 제대로 삐끗한 건지 허리가 결려와 이리저리 뒤척거리며 편한 자세를 찾아보던 팀이 모든 자세를 포기하고 대자로 늘어졌다.
‘브루스가 여기만 새 침대를 넣어준 건가. 너무 푹신한데.’
그대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까 있었던 일을 찬찬히 다시 생각했다. 나쁜 것은 아닐 것이다. 그저 자신의 힘을 제어하지 못하고 모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두려워했을 뿐이란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다.
“…….”
몇 번 눈을 깜박깜박하던 팀이 천장을 바라보며 크게 숨을 쉬었다. 그리곤 목덜미에 감긴 붕대 위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그르렁 거리는 숨결이 아직도 붕대에 달라붙어있는 것 같았다.
안전한 방으로 돌아와 몸에 긴장이 풀리자 슬슬 졸음이 밀려왔다. 이불을 끌어다 덮어야 한다고 마음속으로만 생각하던 팀은 어느새 고른 숨소리를 내면서 잠이 들었다. 약간 추운지 몸을 웅크린 팀은 커다란 침대에 한구석을 겨우 차지할 정도로 작아보였다.
허겁지겁 운동화를 신은 아이가 신발코를 몇 번 툭툭 차보더니 문을 벌컥 열고 뛰어 나갔다. 뒤에서 뭐라 뭐라 소리치는 소리가 시끄러웠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아들만 넷인 집안에선 언제나 일어나는 흔한 일이었다. 가장 바쁠 것 같은 고3인 딕은 뻔뻔하게 식탁에 앉아서 밥을 먹고 있었다. 퍼먹던 시리얼을 내려놓은 딕이 알프레드를 바라보았다.
“팀은 오늘도 아침을 거를 모양이죠?”
“항상 그러시죠.”
“뭐 굶고 다닐 것 같진 않지만요.”
뭐가 그렇게 느긋한지 종알종알 떠들며 시리얼 그릇을 정리하던 딕의 뒤통수를 퍽 때리는 목소리가 집 안에 울렸다. 나 먼저 간다. 일방적인 통보였다. 뜨악한 얼굴로 급하게 설거지 거리를 던지듯 가져다 둔 딕이 소파에 올려둔 자신의 가방을 들었다. 어깨에 둘러매면서 알프레드에게 인사를 했다. 알피! 다녀올게요. 딕이 밖으로 나왔을 땐 이미 시동이 걸린 오토바이 소리가 시끄러웠다. 막 빨간 헬멧을 쓰던 제이슨이 출발하려는 찰나, 가방을 턱 잡혔다. 아 또 시끄러운 저놈의 주둥이가 열리겠구나 싶어 한숨을 푹 쉬었다.
“제이, 등교할 때 바이크 타고 다니지 말라고 했지. 저번에 한번만 더 걸리면 그거 부숴버린다고 했어 안했어?”
“아 좀 내버려 둬! 학교 까지 안타고 가고 가다가 대놓고 걸어서 들어간다고!! 그렇게 무서우면 너 혼자 버스나 타고 다녀!”
“너도 버스 같이 타고 다니면 되겠네.”
“난 사람 많은 거 질색이거든.”
가방을 움켜잡은 손을 탁 쳐낸 제이슨이 시동을 마저 걸었다. 다시 한 번 잡히기 전에 재빨리 엑설레이터를 밟았다. 쌩하니 큰 길로 돌아나가는 빨간 바이크를 바라보던 딕이 한숨을 푹 쉬었다.
“저러다 끌려가서 맞지.”
“제 생각엔 말입니다.”
“응 알피?”
“도련님께서도 학교에 지각을 하실 것 같은데요.”
“어? 뭐? 아…제이!!! 말해주고 가야지!!!”
핸드폰을 급하게 켜보니 이미 버스 한 대는 족히 시나갔을 시간이 지나있었다. 급하게 뛰기 시작하는 딕의 뒤통수를 바라보던 알프레드가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 형제로 말할 것 같으면, 이 거리에서 굉장히 유명한 자제분들이었다. 첫째가 고3 둘째가 고2 셋째가 이제 막 고등학교에 들어갔고, 그 밑에 나이 터울이 많이 나는 막내가 하나 있다지. 막내는 이제 초등학생이던가? 첫째는 고3이긴 한데 이래저래 일이 있어서 일 년 유급을 했다. 나이로 치면 둘째와 두 살 터울인데 딱히 신경을 안 쓰려한다. 물론 학교에 가면 다들 형이라고 부른다지만 말이다. 자기 동생한테도 못 듣는 형 소리를 신나게 듣는다고 당황하고 있지만 말이다.
둘째는 보시다시피 고담에서 손꼽히는 일진이었다. 완전 막나가고 어긋난 학생은 아닌데, 좀 끓는점이 낮다고 해야 할까. 어울리는 친구들끼린 사이가 좋은 모양이지만 영 다른 형제들한텐 서먹하게 대하는 모양이었다. 학교에 바이크 몰고 오지 말라고 학생부에 끌려가기도 하고 혼나기도 하면서 그나마 학교를 다니는 것이 용하다라는 말을 듣곤 했다.
셋째는 막 고등학교에 입학한 나이였다. 차분하고 머리 좋고 얌전하긴 한데, 유난히 막내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큰 형을 워낙 따르고 좋아해서, 다른 고등학교로 갈 수도 있는 것을 부득불 시험을 보고 같은 학교에 입학했다. 보통은 제이슨이 바이크를 타고 나가면 딕과 함께 학교로 향하곤 했지만, 오늘은 주번이라나 뭐라나 하는 소리를 내뱉으며 먼저 일어섰다.
막내는 이제 초등학생인데 형들이 다니는 학교와 같은 재단인 초등학교에 다닌다. 어차피 가는 방향은 같지만 스쿨버스가 오기도 하고, 초등학생은 등교시간이 한참 늦었다. 본인은 자기만 어린 것이 영 맘에 안 드는지 맨날 짜증을 냈다. 드레이크자식! 또 먼저 학교가고! 어쩌겠는가. 그게 현실인데. 형들이 우르르 학교를 가고 느지막하게 일어난 데미안은 교복을 챙겨 입고 식탁에 앉았다. 우물우물 빵을 씹는 볼이 한껏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꿀꺽. 빵을 삼키고 우유를 마시자 입술 근처에 하얗게 우유가 묻었다. 흥. 나도 일찍 일어날 수 있는데.
굳게 다문 연인의 입술을 한참동안 응시하던 콘이 조용히 과거를 회상했다. 어디부터 잘못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만은 확실했다. 살짝 감은 눈은 좀처럼 떠질 줄 몰랐고 그렇게 계속 침대 위에 앉아있었다. 저스티스 로드에서 배트맨이 쫓겨났다. 이유는 간단했다. 복종을 하지 않았다. 모두를 배신하고 저스티스 리그와 긴밀하게 연락을 취하며 로드에게 반하는 행동을 했다. 자신도 어차피 저스티스 로드에 속한 인간 주제에 하늘이 높은 줄 모르고 계략을 꾸몄다. 배트맨은 저항하지 않았다. 순순히 모든 것을 인정했다. 어차피 계획이 들통 난 이상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다. 다만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어서 서로 연결된 배트 케이브에 최대한 많은 정보를 보내야했다. 바이러스를 세팅해 두었으니 아마 맡은 임무를 끝내면 곧 모든 정보를 깨끗하게 없애줄 것이다. 그정도의 시간만 벌면 충분했다. 나머지는 자신이지만 자신이 아닌 사람들이 알아서 해주리라. 제 품안의 사람들만 거두던 로드가 처음으로 그 중 하나를 버렸다. 당장이라도 배트맨의 목을 비틀 것 같던 로드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대와 아들들의 안전을 보장하도록 하지. 배트맨은 자신을 쫓아낸 자의 커다란 그림자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
“헛소리.” “물론 공짜로 해주겠다는 것은 아닐세. 오고 가는 것이 있어야지. 그리고 그대가 또 배신을 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
배트맨은 침묵을 지켰다. 여기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로드는 배트맨에게 인질을 요구했다. 배트맨의 활동을 막고 여차하면 방패 막으로 내세울 수 있는 최선책이었을 것이다. 배트맨은 순순히 그 계략을 인정했다. 하지만 인질로 보낼 사람의 이름을 듣는 순간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불현듯 깨달았다. 팀 드레이크. 일방적인 통보였다. 배트맨과 팀의 의견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고, 로드가 들어줄만한 가치도 지니지 않았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안을 빙자한 명령이었다. 아마 거부하면 이 자리에서 죽겠지. 한걸음 떨어져서 흰 망토를 만지작거리던 팀이 피식 웃었다.
“아,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어쩐지 놀랍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그거 올 것이 왔구나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편해졌다. 언제 일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았으니까. 이렇게 될 일을 대비해서 몇 번이나 계획을 세우고 그에 따른 세부 루트를 구축해 두었다. 팀의 예상은 거의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콘이 몇 번이나 배트맨에게 자신을 달라고 요구한 것도 물론 알고 있었다. 사랑도 증오도 아닌 애매한 감정이 뒤섞인 요구는 번번하게 거절당했다. 그럴 때마다 푸르고 깊은 바다를 연상케 하는 눈동자가 날카롭게 휘어지는 눈매에 감춰져 사라지곤 했다. 순순히 물러난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마주할 줄이야. 콘은 결국 그날 자신이 그렇게 원하던 대로 팀 드레이크를 품에 안을 수 있었다.
***
안내에 따라 콘의 방에 들어간 팀이 한숨을 쉬면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반쯤은 자의로 온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해야만 했다. 자신이 콘의 곁에 있으면 적어도 가족들의 안위는 보장받을 수 있었다. 물론 감시는 심해지겠지만 그것이 어딘가. 그리고 박쥐는 고개를 숙였지만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있었다. 조심스럽게 품속에 숨기고 들어온 통신장치를 꺼냈다. 아주 작은 마이크로 장치를 침대 밑에 붙였다. 언제 들킬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얌전히 굴면 콘은 모른 척 눈감아 줄 것 같기도 했다. 로드와 콘은 인간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중 콘은 그 혐오 현상이 더 심했는데, 그것은 아마 그의 반쪽을 이루고 있는 것이 인간의 유전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에게 쓸모없는 유전자가 담겼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간의 몸으로 로드까지 올라온 배트맨을 싫어했고 결국 꼬투리를 잡고, 함정을 파서 밀어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숨이 컥 막혀왔다. 무엇인가 목에 꽉 걸린 것처럼 숨을 쉴 수 없었다. 간신히 밭은 숨을 내뱉었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에 걱정이 잔뜩 내려앉았다.
단단히 잠겨있던 문이 열렸다. 흰 망토의 끝이 보였다. 조용하지만 묵직한 발걸음을 안으로 들어온 콘이 시리도록 푸른 눈으로 팀을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올라앉았다고 생각했다. 침대위에 걸터 앉아있던 팀의 몸의 기울기 시작하다 이내 털썩 소리를 내며 이불 위로 쓰러졌다. 하늘하게 기른 검은 머리카락이 흰 이불 위에 어지럽게 흐트러졌다. 불빛을 막아선 커다란 몸 그림자가 팀의 온몸을 천천히 먹어 들어갔다. 천천히 조용히 빠져드는 늪처럼 팀을 먹어치웠다. 팀의 눈 안에 가득 들어온 콘은 훨씬 더 커보였다. 커다란 손으로 팀의 손목을 내리 눌렀다. 허리를 굽히자 매트리스가 두 사람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푹 꺼졌다. 푹신한 감각에 허리가 붕 뜨는 느낌이었다. 작은 흔들림이었지만 팀은 어쩐지 현기증을 느꼈다. 콘의 어깨에서 흘러내린 하얀 망토가 길게 얽혀들었다. 좀 더 가까이 다가온 콘이 팀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잘근잘근 목덜미를 깨물자 마지 사냥하는 맹수를 배 위에 올린 느낌이 들었다. 그대로 급소를 물어뜯길 것 같은 긴장감에 팀이 몸을 살짝 움츠렸다. 귓바퀴를 혀로 쓸어 올렸을 때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나랑 있으면 불행해 질 텐데…….” “알아.”
무섭도록 싸늘하고 감정 없는 대답이었다. 마치 이렇게 말하기를 기다렸다는 듯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었다. 콘의 입술이 팀의 콧날에 머물렀다 눈꺼풀에 가만 닿았다. 파르르 떨리는 얇은 피부 밑에서 움직이는 안구의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입술위에 따끈하게 퍼지는 체온은 팀이 살아있음을 알려주었다. 가만히 입술을 떼자 푸르게 빛나는 눈동자가 나타났다. 푸른 하늘을 담은 눈동자엔 안타깝게도 해가 들진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사랑스러워서 손목을 잡았던 손을 옮겨서 깍지를 꼈다. 지긋하게 힘을 주면서 꾹 잡았다.
“이 상황도 너도 좀 이상해.” “그래.”
딱히 부정은 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제정신이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아마 없겠지. 너도 나도. 자신 아래 깔린 채 누워있는 저 작은 울새도 마찬가지 였다. 친절함을 가장하고, 반항하지 않고 얌전히 누워있었지만 그것은 굳이 콘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제 아비와 형제들을 위한 것이었다. 팔려온 새는 자신의 처지를 너무나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영악하게도 자신이 얌전히 있으면 굳이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는 것조차 본능적으로 알아차려 버렸다. 눈웃음을 치거나 교태를 부리지 않는다. 어차피 반한 것은 상대방이었으니까. 쉴 새 없이 머리를 굴리고 할 말을 고르는 것이 제법 유능하고 귀여웠다. 새 주제에. 좀 더 손에 힘이 들어가자 희미한 신음소리가 울음소리마냥 흘러나왔다.
“나 같은 거랑 해봤자…….”
띄엄 띄엄. 한마디가 끝나고 꼭 한 번씩 숨을 내뱉으며 천천히 말하는 팀의 목소리가 조각조각 쪼개져 콘의 심장에 푹푹 박혔다. 콘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곤 키스라도 할 듯 입술 가까이 다가갔다. 닿을 듯 말듯 한 거리에서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보았다
“너나 나나 어차피 행복해 질 수 없는 운명이었어.” “…….” “같이 불행해지자.”
팀 드레이크가 하얀 방에서 짧은 생애를 사는 동안 유일하게 들은 청혼의 말이었다.
***
죽은 듯 누워있던 팀이 천천히 눈을 떴다. 하얀 천장이 핑글 돌더니 이내 또렷하게 초점이 잡혔다. 욱신거리는 허리 통증과 물먹은 듯 무거운 팔까지 어디 하나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오른쪽 팔을 들어보려고 하다 신음을 쿨럭 내뱉었다. 잘 드는 칼로 살과 뼈를 발라내는 것처럼 날카로운 통증이 온몸에 짜릿하게 퍼져나갔다. 팀은 왜 온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을까 끊임없이 생각을 했다. 머리마저 굳어버렸는지 기억은 조각조각 부서져 원하는 정보를 제대로 알려주지 못했다. 간신히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자 자신의 오른 팔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나서야 알아차렸다.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 팔다리는 시커멓게 피가 차서 퉁퉁 부어있었다. 이내 움직이는 것을 이내 포기하고 힘을 쭉 뺀 채 눈을 감았다. 사실 몸을 움직일 수 있다고 해도 갈 수 있는 곳이 없었다. 푹신한 침대에 늘어진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까닥거리면서 팀이 깨어있다는 것을 조금씩 알려주었다. 콘의 방엔 흔한 시계하나도 없었다. 죽음과도 같은 정적은 조금씩 팀을 갉아먹고 있었다. 눈을 감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하얀 방에 누워있으면 온몸을 짓누르는 공기가 숨을 쉬지 못하게 했다. 그리곤 목을 조르며 천천히 팀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럴 때 마다 심장이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것 같아 팀은 숨을 쉴 수 없었다. 간신히 숨을 쉬기라도 하면 물속에 있는 것처럼 왈칵 공기가 입안에 가득 차곤 했다. 이대로 공기에 질식해서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편할 텐데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의미 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으면 콘이 돌아왔다. 콘이 돌아오는 시간은 보통 일정했지만 가끔 오늘처럼 늦어질 때가 있었다. 아마 로드 쪽에 일이 쉬이 끝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팀은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가슴께로 흘러내린 이불을 다시 당겨 덮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죽은 듯 누워있었다. 아니 이불을 잡을 수도 없었다. 온몸에 퍼진 불긋한 자국은 불에 덴 것처럼 아려왔다. 지나치게 푹신한 침대는 허리의 통증을 완화시켜주다 못해 힘조차 줄 수 없게 쿨렁댔다. 희미한 신음소리가 입가에 머물렀다. 끈 떨어진 인형 꼴로 전락해버린 자신의 모습이 너무 웃겨서 견딜 수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스티스 로드에 속했던 그는 이젠 모든 지위를 박탈당하고 이 방에서 맘대로 나갈 수조차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팀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봤자 이 방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콘뿐이었으니까. 보고 싶지 않았다. 눈조차 돌리지 않고 그저 멍하게 천장을 바라보았다. 빛을 잃어버린 푸른 눈이 천천히 감겼다 다시 나타났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자신의 미래처럼 그저 하얗게 들떠 보이는 천장을 바라보던 팀의 시선이 오른쪽으로 홱 돌아갔다. 커다란 손에 잡힌 머리카락이 뚝뚝 소리는 내면서 끊어졌다. 약하게 표정을 찡그렸다.
“아직 살만 한가보지?” “…….”
“네가 지금 대답을 하지 않아도 되는 정도의 지위가 아닐 텐데.” “죽이지 그랬어.” “뭐?” “그냥 죽이지 왜 살렸어.” “그야.”
콘의 손이 머리카락을 놔주었다. 침대에 누운 팀이 길게 신음을 했다. 제대로 움직이지 조차 못하는 몸뚱이는 숨만 붙어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침대 위로 올라온 콘이 팀의 위로 올라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푸른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 “넌 마음대로 죽을 권리가 없어. 팀 드레이크.”
콘의 다리 사이에서 늘어진 몸은 성한 곳이 단 한군데도 없었다. 울긋불긋한 멍이 꽃처럼 피어난 것도 모자라 피딱지가 올라앉았다. 그나마 성한 곳은 얼굴뿐이었다. 붉게 부어오른 한쪽 뺨을 보던 콘이 무릎에 좀 더 힘을 주면서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거부하는 턱을 단단하게 틀어쥐고 입을 맞추었다. 질척거리는 물소리가 방안에 퍼졌다. 상대방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페이스에 팀의 가슴이 연신 급하게 부풀어 올랐다. 팔을 움직일 수 없으니 밀어낼 수도 없었다. 제대로 삼키지 못한 타입이 입가에 흐르고 호흡이 불안정해 눈꼬리에 눈물이 맺힐 때가 되어서야 콘이 물러났다. 붉게 부어오른 입술은 허옇게 떠버린 얼굴에 이질감을 선사했다. 눈꼬리에 맺혀 있던 눈물은 좁은 물줄기를 만들며 시트로 떨어졌다. 팀은 눈을 감은 채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쉽게 진정되지 않는 호흡에 팀이 쿨럭 거리며 입을 열었다. 여전히 감정이 모두 빠져버린 딱딱한 회색빛 톤의 목소리엔 잔뜩 갈라진 쇳소리가 섞여 들어갔다.
“이것도 꿈인가?” “그래.”
콘이 그 말에 맞장구를 쳐주며 피식 웃었다. 천하의 팀 드레이크가 꿈 운운을 하면서 말을 하다니. 제 아비와 형제들이 보았으면 놀라서 뒤로 넘어갔으리라. 재미있었다. 좀 더 해보라는 듯 콘이 불긋한 상처가 잔뜩 들어앉은 목덜미에 이를 세웠다. 파르르 떨리는 피부 밑에서 심장 고동이 들렸다. 조금만 힘을 주면 그대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급소였다. 천천히 먹이를 맛보는 맹수처럼 급소를 잘근거렸다. 잔뜩 괴롭힘을 당해 쇳소리가 나는 목소리는 한층 더 심해로 가라앉아있었지만 콘의 귀에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섹시했다.
“내가 왜…이 꿈을 꾸는지 잘 모르겠어.” “…….”
정말 정신이 돌아버린 건가 했다. 좀처럼 볼 수 없었던 희미한 미소가 걸렸던 입 꼬리는 이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콘은 이런 일이 처음이었고, 좀 호기심이 생겼다. 인간이라는 종족은 나약하고 쓸모가 없었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감정은 콘의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 했었다. 태어날 때부터 지배자의 자리에 앉아 감정의 교류 따윈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남자에게 팀 드레이크란 존재는 자극 그 자체였다. 슬슬 정신을 쓸어주면 제법 원하는 대로 반응을 해주곤 했다. 인간이란 참 신기한 존재야.
감은 눈에서 눈물이 배어나왔다. 감정을 숨기려고 억지로 꽉 깨문 입술을 핏기가 하나도 없이 하얗게 변해있었다. 콘이 혀로 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따뜻하고 물컹한 것이 천천히 눈가를 쓸고 지나갔다. 팀의 눈꺼풀은 좀처럼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콘이 주문을 외우듯 팀의 귀에 입술을 바짝 대고 밀어를 속삭였다. 밀어라고 하기엔 달콤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말이었지만, 귀에 한마디씩 박히는 콘의 말은 절대적이었다. 낮으면서도 온몸을 꽉 누르는 중압감이 팀의 머리를 잡아 눌렀다.
“어디서 내숭이야.” “…….” “모르는 척 하지 마. 다 알고 있잖아.” “…미안해요.” “…….”
콘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어느새 가늘게 뜬 팀의 눈은 콘을 넘어서 저 멀리 무엇인가를 보고 있었다. 커졌다 다시 작아지기를 반복하는 동공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한 점 바람 없는 푸른 호수에 돌을 던진 것 마냥 파르르 파장이 이는 눈은 한층 깊어져 있었다.
“…미안해요.”
연신 사과하는 팀의 말은 콘을 스쳐 지나갔다. 허망하게 공기 중에 훅 풀어져버린 말은 희미한 울음소리를 남겼다. 들어줄 사람이 없는 말은 그렇게 오래오래 방안에서 빠져나가지 못했다. 콘도 팀의 정신이 망가져 가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딱히 고쳐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고쳐줘 봤자 로드에 반하는 행동밖에 할 줄 모르는 안타까운 인간이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시커멓게 피가 찬 팔을 잡고 들어 올리자 예상하지 못한 고통에 팀이 비명을 질렀다. 콘은 팀이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만족하는 듯 잔뜩 상처가 올라앉은 가슴에 입술을 묻었다.
어디서부터 일이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저스티스 로드에 속해 생활하는 것에 단 한 번의 의심도 품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가끔 볼 수 있는 로드의 옆엔 항상 콘이 있었다. 지긋지긋한 악연은 이쯤부터 시작이 되었던 것 같았다. 사실 평생 말을 섞지 않고 살았더라면 이렇게 까지 굴러떨어지지 않았을 지도 몰랐다. 콘은 자라온 환경이 팀과 달랐다. 자신을 신처럼 받들고 추앙하는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다. 모두들 로드와 콘을 신처럼 보았다. 그랬기에 감정을 내비칠 일이 없었다. 마음대로 친구를 사귈 수도 없었고, 사귈 생각도 없었다. 감정 같은 쓸모없는 것을 배우기 전에 먼저 사람을 대하는 법을 배웠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항상 주위에 적이 많았다. 공적인 사람을 대하는 처세술은 날로 늘어갔지만 그 이외엔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감정 같은 것은 차라리 배우지 않는 편이 나았다. 제 때 습득하지 못한 감정은 씨조차 틔워보지 못하고 그대로 가슴 깊은 곳에 가라앉았다. 감정이나 표정을 표현해야할만한 사건이 그다지 많지 않았기에 콘은 겉만 큰 어린아이와도 같았다. 사랑도 증오도 슬픔도 모른 채 살던 콘에게 이상한 기분이 들게 한 것은 팀이었다. 팀도 그렇게 감정 표현이 탁월한 편은 아니었다. 날카롭게 뻗은 눈은 차갑게 타인을 내려다보았고 얇고 매끈하게 그려진 입술은 항상 무표정 했다. 아주 가끔 팀이 웃을 때가 있었다. 입 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가는 정도였고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그 날 콘은 그것을 똑똑하게 보았다. 전혀 알지 못했던 정보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잠깐.” “…….”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팀을 불러 세웠다. 자신의 이름이 들리자 순순히 발걸음을 멈춰선 팀이 무표정한 얼굴로 빙글 돌아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아까 보았던 미소는 벌써 사라졌지만, 자신을 보면서 깜박거리는 눈엔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무슨 일이지?” “…….” “장난 이라면 그만 돌아가겠어.” “아까…….”
답지 않게 무엇인가 설명하는 콘은 바라보던 팀이 방금 전과 똑같이 웃었다. 사실 비웃는 것에 가까웠지만. 입 꼬리가 쭉 울러갔다 다시 내려왔다.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이내 꼿꼿하게 세웠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듯한데…….” “…….” “내가 왜 너한테 감정을 낭비해야 하지?” “…….” “그럼 이만.”
휙 돌아서서 걸어가는 팀의 하얀 망토가 콘의 눈에 오래오래 박혔다. 그리고 자꾸 그 웃음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이것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는 몰랐지만, 분명 콘이 아는 지식 내에선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팀을 다시 만나면 해결이 될 거라 믿었다. 힘과 권력을 가진 사람이 무엇인가를 원하기 시작하면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팀 정도라면 지위도 있었고 능력도 있었다. 게다가 로드의 친우인 배트맨의 아들이 아닌가. 이정도면 자신의 곁에 둬도 괜찮을 거란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다. 제대로 피지 못한 감정은 지배욕과 소유욕으로 발현되었다. 몇 번이나 배트맨에게 팀을 요구했지만 단박에 거절당했다. 거절당한다는 것도 콘에겐 매우 생소한 일이었다. 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그 날 이후 콘의 이해 범주를 벗어난 일이 계속 생기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
결국 콘이 처음으로 가지고 싶었던 것은 팀이었다. 게다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데 계속해서 생각이 나는 것은 속된 말로 한눈에 반했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런 개념이 콘에겐 아직 없었다. 그러던 중 결국 기회가 왔다. 배트맨이 저스티스 리그와 연락을 하던 것이 발각되었다. 곧장 스파이 혐의가 씌워진 배트맨은 저스티스 로드의 모든 지위를 박탈당하고 출입 금지를 당했다. 그의 아들들도 마찬가지였다. 로드는 분노했고, 배트맨을 직접 끌고 와서 꿇어앉혔다. 그는 변명을 하지 않았다. 배트맨이 자신의 집에 구금당하는 동안 콘은 로드를 설득했다. 그리고 어차피 곧 죽을 울새 따위 뭐 쓸모가 있겠냐는 로드의 말에 콘은 결국 팀을 얻어냈다.
***
팀을 침대에 눕히고 옷을 벗겼다. 엄청난 악력에 상반신을 감싸고 있던 붉은 천이 조각조각 찢겨서 피처럼 이불위에 뿌려졌다. 자신의 처지를 알고 있는 팀은 눈을 꿈 감은 채 저항하지 않았다. 콘의 기분이 틀어진다면 당장이라도 배트맨과 형제들에게 피해가 갈 것이 분명했다. 귓가에 들리는 천이 찢어지는 소리에 팀이 미간을 찌푸렸다. 꼭꼭 싸고 있던 천이 모두 찢겨져 나가고 하얀 피부가 나타나자 콘이 손으로 슬슬 쓸어올렸다. 자잘한 상처가 손끝에 걸렸다. 가슴을 주무르다 천천히 손을 미끄러뜨렸다. 예쁜 근육이 잡혀 날씬하게 들어간 허리에 손바닥을 대고 꾹 누르자 바르르 떨리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침대 위에서 이뤄지는 행위에 그리 많은 대화는 필요 없었다. 둘이서 죽을 만큼 좋아서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지배자가 피 지배자에게 자신의 것이라고 온몸에 천천히 낙인을 새기는 과정 이었다.
반쯤 기절한 팀의 위에 대충 이불을 덮어둔 콘이 욕실로 들어갔다. 다시 나와서 침대 위에 앉았을 때 팀은 완전히 잠이 든 상태였다. 콘의 손이 닿은 곳마다 벌겋게 달아오른 자국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좀 더 자신의 것이란 것을 저 몸에 새기고 싶었다. 누가 와도 뺏을 수 없을 만큼 확실하게 해야 했다. 침대에 누운 콘이 팀을 뒤에서 끌어서 당겨 안았다. 품안에 쏙 들어오는 새가 통증이 오는지 가늘게 신음소리를 냈다. 한 손으로 허리를 끌어안은 채 반대 쪽 손으로 배를 더듬었다. 보통 사람의 체온보다 살짝 낮은 팀의 몸은 맨살에 닿으면 기분이 딱 좋을 정도였다. 강제로 했던 일이지만 자신의 씨를 품은 새가 사랑스러워보였다. 과거에도 미래도 자신의 앞에 펼쳐진 길로 걸어가기만 하면 되는 콘에게 팀은 새로운 자극이었다.
이 비틀어진 관계에서 더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팀은 여전히 정보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다행히 팀에게 정신이 팔린 콘에게 아직 통신장치를 들키지 않았다. 몸을 내줘가면서 모든 것을 기록한 음성파일이 조용히 나이트 윙의 손에 쥐어졌다.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그 파일을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벌벌 떨 리는 손으로 이어폰을 귀에 꽂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이후로 나이트 윙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책상에 머리를 박으며 가늘게 흐느꼈다. 너무 괴로워서 그만 듣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제 동생의 몸을 팔아가며 얻는 정보는 한없이 적기만 했다. 낮게 흐느끼는 목소리와 온갖 담지 못할 말이 그대로 들려왔다. 가끔 들리는 콘의 말에서 추리고 또 추려 모은 정보는 조심스럽게 저스티스 리그로 옮겨졌다. 이미 모든 것을 들켜 부숴버린 메인 컴퓨터를 사용할 수 없었다. 메인 컴퓨터와 대지도 못할 만큼 열악한 간이 통신 시설을 구축해 정보를 보냈다. 저스티스 로드의 눈을 피하기 위해 여러 번 우회 하다 보니 그만큼 시간이 더 걸렸다. 팀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자신들은 어떻게 될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이 모든 것이 끝나기 전에 해결을 봤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