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에도 어김없이 같은 소리가 들렸다. 한 달에 한번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부터 묵직한 상자가 올라온다. 항상 정해진 시간은 아니지만 거의 비슷한 날짜에 배달되는 상자 속엔 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건과 함께 신입이 들어있다. 한명은 반쯤 정신을 잃은 채 올라왔었고, 보통은 기절한 채로 발견되곤 했다. 아직 제대로 된 집조차 만들지 못한 어린 아이들은 새끼 동물마냥 서로 뭉쳐있는 것이 전부였다. 그나마 나이가 많은 축이라 해도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살 곳은 고사하고 자신들이 있는 곳이 어딘지 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박스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 “알비 이번에도 뭔가 올라오나봐!”
햇살이 그대로 머문 것 같은 금발을 가진 아이가 그늘에서 톡 튀어나왔다. 통이 넓은 바지 아래로 길고 가느다란 발목이 몇 번이나 보였다 사라졌다. 현재까지 이 곳에 살아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랬기에 더욱 간절하게 친구가 올라오길 기다렸다. 한 달에 한 번 마치 선물이라도 하는 산타마냥 인심을 쓰는 사람들이 있었다. 항상 먹을 것이 떨어질 시기가 되면 누군지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몇 가지 식량과 새로운 친구가 배달되었다. 모두 친구가 되어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다고 해서 썩 나쁜 일은 아니었다. 아이들이 머물고 있는 곳은 너무 넓고 공허했다. 제대로 갖춰진 것이 하나 없는 곳에 내몰린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번엔 친구일까? 아니면 우리를 해치려고 하는 쪽일까.” “그야. 모르지.” “난 친구였으면 좋겠어.” “…….” “친구면…….” “너무 신나하지 마. 뉴트.”
저번에 당한 일이 기억도 나지 않는지 뉴트는 연신 눈을 반짝이면서 철문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얼마나 깊은 곳부터 올라오는지 알 수 없었지만, 영원히 올라오지 않을 것 같은 상자는 규칙적인 기계음과 함께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나. 둘. 셋. 속으로 시간을 셌다. 꽤나 큰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기계 소리가 멎었다. 무엇인가 실린 상자가 드디어 도착했다. 뉴트는 혼자서 철문을 들어 올리려다 곧 포기하고 몸을 틀었다. 그리고 가느다란 시선으로 뒤에서 느릿하게 걸어오는 둘은 채근했다.
“알비 도와줘!” “알았어.” “갤리도.” “먹을 것도 부족한데 저 새끼는 입 늘은 게 뭐가 좋다고. 저렇게 신나하는 거야.”
갤리는 입으론 투덜거리면서도 손은 착실하게 철망 손잡이를 그러쥐었다. 어린 아이들에겐 제법 버거운 무게였지만, 세 명이서 당기면 못 열만한 무게는 아니었다. 한 쪽을 열고, 허리를 한번 편 다음 반대쪽은 마저 열었다.
- 끼이익.
한 달 동안 열어볼 일이 없어 조금 녹슨 문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서 입을 벌렸다. 약간 튀어나온 턱이 만들어준 어둑한 그늘이 깔린 곳에서 비죽 튀어나온 작은 발이 보였다.
“이번엔 자면서 올라왔나봐.”
“…아직 잠깐만.”
알비가 익숙하게 뉴트를 막아섰다. 저번에도 친구가 도착했다며 무턱대고 안으로 들어갔다 패닉 상태에 빠진 녀석에게 그대로 목을 졸렸다. 공포에 질려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없는 녀석의 작은 손은 꽤 악력이 강해 뉴트는 스스로 뿌리치지 못했다. 보다 못한 알비와 갤리가 뛰어들어 간신히 둘을 떼어놓았지만, 뉴트의 목에 찍힌 손자국은 며칠 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그 일이 바로 저번 달에 있었는데,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여전히 잔뜩 호기심을 뿜어내는 친구를 보자니 알비는 조금 머리가 아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금 올라온 신입은 얌전히 자고 있는 것 같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한참 반스 안을 쳐다보고만 있었지만 잠이 깊게 든 모양인지 움직이지 않았다.
“설마 죽은 거 아니야?” “그럴 리가.” “그런데. 안 움직여. 응? 알비.” “…잠시만.”
알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뉴트가 막고있는 손을 피해 상자 안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뉴트! 뒤통수를 강하게 때리는 목소리를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당차게 뛰어내린 몸짓과는 달리 꽤나 조심스럽게 어둠 안쪽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별다른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괜찮은 거 같아. 아주 얌전한 걸? 자고 있어.” “너 정말…….” “알비. 얘 좀 귀엽게 생겼다. 나보다 어린 걸까?” “제대로 안 보이는 거 다 아니까. 좀 이 쪽으로 끌어내 봐. 언제까지 거기다 둘 거야.”
뉴트가 낑낑거리며 끌고나온 아이는 생각보다 훨씬 작았다. 물론 뉴트도 몸집이 큰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서양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알비와 닮은 것도 아니었다. 까만 머리가 푹 젖어 이마에 몇 가닥 붙어있는 것을 손으로 살짝 치워주었다. 항상 비슷한 나이의 또래가 올라오곤 해서, 다들 친구이겠거니 하고 생각하고 살았다.
“알비. 얜 우리보다 동생인거 같아. 한참 덜 자란 거 같은데.” “…….” “그렇지 않아? 빨리 일어나면 좋겠다.” “우리도 그렇게 나이를 많이 먹은 게 아니야 뉴트.” “알아. 하지만 이 녀석은 나보다 작은 걸,”
웅크린 채 자고 있는 녀석을 낑낑 거리며 셋이서 옮겼다. 집이라기 보단 구덩이에 가까운 곳까지 데려왔다. 몇 장 없는 모포를 꺼내 바닥에 깔고 눕혔다.
글레이드에 올라온 모든 사람들은 잠에서 깨거나 익숙해 질 때 까지 한참동안 놔두곤 했다. 물론 말로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먹을 것. 잠잘 곳을 찾는 것 만해도 하루가 모자랐다. 손이 딸리는 상황에서 신입을 하나하나 챙길 만큼 세심하지 않았다. 새로 온 녀석이 퍽이나 마음에 드는지 얼굴에 마냥 웃음을 띤 뉴트가 옆에 주저앉아서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보았다. 까실 까실하게 솟은 머리카락 속으로 손가락이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다. 영 귀찮은지 미간을 찡그리며 담요를 둘둘 말아 감았다. 결국 그 미간까지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보고 나서야 뉴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더 놀다간 오늘 저녁 먹을 시간도 없을 것 같았다.
***
새로 온 녀석이 눈을 뜬 것은 점심이 막 지났을 무렵이었다. 이불 더미가 유난히 크게 움직인다 싶더니 조그맣고 까만 머리통이 불쑥 밖으로 튀어나왔다.
“어, 신입 깼다.” “생각보다 일찍 깼네.” “…….” “또 숲속으로 뛰어 들어갈 지도 몰라. 누가 빨리 가서 저 녀석 좀 잡아봐.”
이 상황이 매우 혼란스러운지 덮고 있던 모포를 꾹 쥐었다. 그리고 몸을 웅크리고 최대한 숨기려 했다. 하지만 누군가 좀 붙잡으라는 말을 듣자마자 달려온 뉴트가 모포를 휙 걷어버리고 잔뜩 힘이 들어간 작은 손을 쥐었을 때 반쯤 벌어진 입에서 소리 없는 비명이 새어나왔다. 까만 눈동자가 쉼 없이 떨리고 있었다.
“널 해치려는 게 아니야. 뭔가 기억나는 단어가 있어?” “…….” “아무거나 괜찮아. 머릿속에 생각나는 단어를 이야기 해주면 되는 거야.” “아무…것도. 여긴…어디.” “이제부터 네가 살 곳?” “…….”
뉴트가 계속해서 말을 붙였지만, 도통 듣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쉼 없이 주위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또래 몇 명. 그리고 높고 커다란 벽, 나무 들이 전부였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려는 녀석을 잡아끄는 뉴트가 연신 알비를 불렀다.
“알비!” “알았어 간다. 가.” “…….” “우린 이제 친구야. 동료라고 해도 될까? 다들 함께 여기서 계속 살아야 하거든.” “…….” “빨리 이름이 기억나면 좋을 텐데. 너무 무서워하지 않아도 괜찮아. 나도 처음 왔을 땐 너보다 심했거든.” “…….” “그 사람들은 적어도 이름정도는 기억할 수 있게 해주니까.” “그…사람들?”
앵무새처럼 뉴트의 말을 따라하는 발음은 잔뜩 긴장해 어눌했다. 뉴트보다 한 뼘은 작은 것 같은 몸이 점점 더 움츠러들었다.
“우리를 여길 보낸 사람들 말이야.” “모르겠어.” “나도 모르니까 괜찮아. 이름은 아마 하루 이틀이면 기억이 날거야. 너무 억지로 생각하려 하지 않아도 돼.”
자신의 손을 잡고 재잘거리는 금발 소년을 바라보았다. 얼굴은 자잘한 상처투성이인데다가 입고 있는 옷도 형편없었지만, 어쩐지 태양처럼 빛난다 생각했다.
“내 이름은 뉴트야.” “난…….” “넌 신입이고.” “…….” “그냥 뉴트라고 불러. 네가 이름을 기억해 내면 나도 불러줄 테니까. 그럼 슬슬 일어서.” “응?” “일어났으니 정식으로 동료들한테 인사를 해야지.” “…….”
생각보다 빠르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모습을 보며 뉴트는 속으로 휘파람을 불렀다. 혼란스러워 하는 것은 모두 비슷했지만, 이렇게 빠르게 적응하려고 하는 녀석은 또 처음이었다.
물론 뉴트의 생각은 완벽하게 빗겨나갔다. 저녁을 먹을 때만해도 침착하던 녀석은 해가 지고 어둠이 밀려오자 엄마 품에서 떨어져 나온 강아지마냥 끙끙거리기 시작했다. 모포를 연신 고쳐 덮으며 뒤척거리는 소리가 뉴트의 가는 신경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
당장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넉넉하지 않았지만, 알비가 올라오고, 뉴트가 이 곳에 발을 디딘 이후로 계속 지키고 있는 약속이 하나 있었다. 신입이 올라오면, 잠자코 모포 하나를 통째로 내주는 일이었다. 물론 그렇게 한 장을 넘겨 주고나면 남은 사람들은 조금 빡빡하게 잠을 자야했지만, 아무도 불만을 내뱉지 않았다.
‘갑자기 모르는 곳으로 떨어져서 혼란스러운데 움켜쥘만한 것이 하나쯤은 있어야지.’
뉴트가 몇 번이나 말했던 일이었다. 신입들은 벌벌 떨면서도 담요 안에서 웅크린 채 밤을 보내곤 했다. 살아남은 갤리와 뉴트가 그러했고, 버티지 못하고 죽은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는 놈들도 있었고 기절한 것처럼 잠이 들기도 했다. 조금 덜 자란 것 같이 보이는 이번 신입은 끙끙거리면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만들어냈다. 가장자리에서 모포 귀퉁이를 덮고 누워있던 뉴트가 결국 버티지 못하고 일어났다. 조용한 밤하늘에 발자국 소리가 사분사분 새겨졌다. 웅크린 채 얼굴도 보여주지 않는 신입 앞에 쭈그리고 앉아 노크를 하는 것처럼 모포를 두드렸다.
“저기요. 안 자는 거 다 알거든요,” “…….” “같이 자줄게. 일어나봐.” “…….”
비척비척 일어나 앉는 폼을 보니 잠을 잔 것 같지도 않아 보였다. 뉴트가 잔뜩 구겨진 모포를 다시 펴고 옆에 누워서 손만 까닥거리며 신입을 불렀다.
“이리와. 내일부터 일하려면 빨리 자야할거 아냐.” “…….” “싫으면 나만 잔다?”
남의 잠자리를 뺏은 것 치곤 뻔뻔한 말이었지만, 생각보다 먹힌 것은 분명했다. 여전히 잔뜩 웅크린 채 등을 보이고 누운 녀석을 곁눈질로 쳐다보다 목안으로 작게 웃었다. 그 꼴이 꼭 강아지 같았다. 저 쪽에서 껴서 자느니 이쪽이 훨씬 몸은 편했지만, 뭔가 못할 짓을 했나 싶어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달이 저물고, 해가 어둠을 몰아냈다. 언제나 가장 먼저 일어나는 알비는 옆자리가 비어있는 것을 보고 손으로 바닥을 더듬었다. 싸늘하게 식어있는 감촉이 밤새 사람이 없었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뉴.”
허탈하게 웃음을 터뜨린 알비가 사람들이 깨지 않도록 조심 조심 걸어 나왔다. 뉴트의 허리를 껴안고 잠이 든 신입이 있었다. 그리고 불편한 지 미간에 주름이 쫙 가있는 뉴트는 연신 끙끙 앓아댔다. 신입이 뉴트의 말랑한 배를 만지면서 좀 더 잠을 자려다가 그새 벌떡 일어난 뉴트에게 얻어맞았다. 자다 말고 얻어맞은 얼굴은 억울해 죽을 것 같아보였다.
“같이 자준다 했지 날 만지라는 소리는 아니었어.” “…….” “일어나. 밥 먹고 오늘부턴 너도 일을 해야지.”
이러니 저러니 해도 꼭 뒤에 신입을 달고 다니기 시작하는 뉴트는 이것저것 챙겨주기 바빴다. 신입도 별다른 사고를 치지 않고 적응을 해가고 있어 알비는 더는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