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뉴트/톰늍] MAZE IN THE TRAP 003
+) NOTICE
둘이 멀쩡하게 연애하는게 보고싶어서 시작한 평범한 세계에 대학교 AU 입니다.
플레어는 발병하지 않았고, 다들 알아서 잘 살고 있는 세계.
적당한 망상과 설정 붕괴가 언제나 함께 합니다 ㅇㅅㅇ)9
톰늍 대학교 편까지 연재하고 대학교 졸업 이후 버전을 따로 추가해 회지로 만들 예정입니다.
연재한 분량 자체를 지우진 않습니다.
write. 환월
3.
입학식은 인터뷰를 기다리는 시간만큼 지루했다. 애초부터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생각보다 재미가 없었다. 감정하나 담기지 않은 눈이 점점 졸음에 눌리고 있었다. 으윽. 슬슬 몸이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손을 깍지 껴서 앞으로 쭉 내밀어 봐도 좀처럼 풀리지 않는 지루함은 점점 더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재미없어.’
몇몇 학생들은 예전부터 아는 사이였는지 서로 귀에 대고 소곤거리며 지루함을 달래고 있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새로 시작하는 대학 생활에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토마스는 아니었다. 삐딱하게 의자에 앉아서 한쪽 손으로 턱을 받친 채 연신 하품을 했다. 당연하지만 아는 사람도 없고, 이야기를 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
‘저번에 카페에서 만났던 학생이라는 사람은 오늘 여기 안온건가. 신입생이 아닌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조금 졸음이 가시는 것 같았다. 좌우로 시선을 돌려가며 익숙한 얼굴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분명 이 학교 학생이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는데, 왜 안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거짓말이라고 단박에 단정 지었을 말을 철썩 같이 믿고 있는 이유는 이 넓은 학교에서 유일하게 얼굴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연구 분야에서는 가히 천재라고 불리는 두뇌와 달리 토마스는 순수할 정도로 사회생활에 대한 지식이 백지에 가까웠다. 친구는 어떻게 사귀어야 하는지, 또래 아이들은 무엇을 하고 시간을 보내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토마스가 반평생을 넘게 살아온 연구소 내의 사귐이란 철저하게 지식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그다지 어려움이 없었다. 오히려 사귄다는 표현보다는 이익을 위한 비즈니스 적인 관계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곳이었다. 그리고 보통 때 남은 여가 시간엔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서 남은 연구를 계속 하거나 음악을 듣는 정도였다.
“…그럼 계속해서 총학생회에서 신입생 여러분께 여러 가지 사항을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멍하니 딴 생각을 하고 있던 토마스의 귀에 보통 사람보다 한 톤 높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눈만 살짝 들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학교 선배인 것 같은 사람들이 서류뭉치를 잔뜩 든 채 우르르 들어왔다. 하나 둘 셋. 사람들을 세던 눈이 중간에 뚝 멈췄다.
“아…….”
토마스의 까만 눈에 익숙한 머리색이 들어왔다. 서류를 두 손으로 잔뜩 든 채 옆에 서있는 학생들에게 무언가 지시를 하고 있었다. 마이크를 넘겨받은 사람은 총학생회장인 알비였다. 삼학년이라고 하는데, 워낙 두루두루 인기가 좋다는 소리가 주변에서 들렸다. 아마 신입생들한테도 꽤 이름이 알려져 있는 유명인사인가 싶었다.
“그러면 저 사람은 학생회에서 뭐하는 거지?”
토마스의 궁금함은 곧 해소되었다. 알비가 바로 옆에 서있는 사람은 뉴트라고 소개했다. 날카롭게 올라간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눈앞을 가득 메운 신입생들을 빤히 바라보던 뉴트가 씩 웃었다. 그 뒤로 규율부 책임자니, 회계팀장이니 하는 사람들이 빼곡하게 소개되었다. 한참 설명을 하던 알비가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대외 협력 책임자인 민호는 오늘 일이 있어서 부득이하게 입학식에 참가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대신 사과말씀을 드립니다.”
“민…호?”
신기한 이름이었다. 토마스가 그 이름을 입으로 발음을 했을 때 낯선 느낌을 받았다. 혀가 한 번 걸렸다 넘어가는 민호라는 이름은 몇 번이나 불러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적당히 학생회 소개가 끝나자 알비는 신입생들에게 나눠줄 서류를 앞에다 잔뜩 쌓았다. 나갈 때 하나씩 들고 가라는 소리를 끝으로 길고 지루했던 입학식이 끝이 났다.
학생들이 절반도 넘게 빠질 때까지 토마스는 멍하니 자리에 앉아있었다. 눈은 바쁘게 움직이는 뉴트의 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 연신 웃으면서 사람들의 등을 팡팡 때리던 뉴트가 잠시 입을 다물고 뭔가 생각했다. 그 순간 고개를 휙 들어 토마스 쪽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토마스는 못 본 척하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분명 뉴트가 바보 같다고 생각했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람들도 거의 다 빠져나가서 체육관 안은 점점 조용해졌다. 토마스도 슬슬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써 모른 척하며 쌓여있는 종이 뭉치를 집으려고 하는 순간 눈앞에 누군가 서류 한 뭉치를 불쑥 내밀었다.
“응?”
“또 만났네. 신입생? 그때 마신 커피는 괜찮았어?”
“아, 예.”
“뭘 그렇게 딱딱하게 말해. 동갑인 줄 알았는데 선배라서 낯가리는 거야? 같은 과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즐겁게 지내라고.”
“…….”
뉴트가 하는 말이 귓속에 들어앉아 떠나지 않았다. 토마스의 손에 여러 가지 인쇄물을 잔뜩 올려준 뉴트가 또 한 번 씩 웃었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웃는 모습이 눈에 쿡쿡 박혔다. 인공적인 빛 아래에선 그때처럼 머리카락이 반짝이지 않았다. 신입생들과 첫 만남이라고 신경 썼는지 멀끔하게 입고 나온 뉴트를 보자 하려고 했던 말조차 잊어버렸다.
“신입생…아니지. 신입생이라 부르기도 그렇다.”
“…….”
“이름이 뭐야?”
“네?”
“네 이름 말이야. 어차피 사 년 내내 학교 오고 가면서 한두 번은 더 볼 텐데 미리 이름 정도 알아두면 편하지 않을까? 난 아까 들었지. 뉴트라고 부르면 돼.”
“…….”
“넌?”
“토마스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딱딱하긴. 그래. 토마스. 오늘은 여기서 공식적인 행사가 끝이니까 편하게 쉬고, 학교생활 빨리 적응하길 바랄게.”
“…….”
갑자기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스스럼없이 자신에게 다가와 말을 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토마스가 말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을 때면, 모두 좀 무섭다고 말하곤 했다. 안 그래도 긴장해서 표정이 더 딱딱했을 텐데, 뉴트는 그런 것쯤은 하나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시야를 방해하는 앞머리를 슥 쓸어 올리는 모습에 토마스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하고 허둥지둥 뛰어 나가는 토마스 뒤로 나중에 또 보자는 목소리가 따라왔다.
‘내가 왜 이러지?’
한참을 앞만 보고 걷던 토마스가 간신히 멈춰 서서 허리를 굽히며 크게 숨을 쉬었다. 심장이 지끈거리며 아팠다 다시 쿵쿵 뛰었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모습이 눈앞에 몇 번 왔다 갔다 하는 헛것을 보고 나서야 토마스는 자신의 얼굴이 온통 새빨갛게 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물론 누가 보면 급하게 뛰어왔나 싶은 꼴이었다. 몇 번이나 고개를 저었다.
꼭꼭 닫혀있던 토마스의 영역에 갑작스럽게 툭 굴러들어온 뉴트는 생각보가 엄청난 자극이었다. 아무도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은 곳에 멋대로 들어와서 온통 휘젓고 다시 사라져 버렸다. 뉴트는 다시 보자고 했지만, 정작 뉴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얼굴. 머리 색. 머리 스타일. 오늘 입은 옷. 목소리. 토마스가 알고 있는 정보는 이것뿐이었다.
“과라도 물어볼 걸 그랬나.”
아쉬운 마음이 한층 더 진해졌다. 저번에 헤어질 때도 몇 번이나 후회했던 주제에 이번에도 제대로 통성명할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 버렸다. 또래를 대하는 말재주가 없는 토마스는 답답할 뿐이었다. 볼을 긁적이며 해결 방안을 생각했다.
‘그래. 학생회라고 했지.’
좋은 생각이 났다. 뭔가 찾아보기로 한 토마스가 급히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집이 아닌 곳을 가본 기억은 카페뿐이었다. 다른 곳을 찾지 못해 결국 다시 카페로 향했다. 주문한 커피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면서 구석 자리를 잡고 앉았다. 테이블에 머그잔을 내려놓자마자 옆 테이블에서 까르르 웃는 여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선 생각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알 수 있었다.
“있지. 아까 부학생회장 봤어.”
“응. 그 사람 유명하다며. 나 분명히 저번에 무슨 의상 모델로 나온 거 봤다니까.”
“정말?”
“그래. 내가 여기 선배 중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들은 게 있는데, 이번 총학생회에 그렇게 대단한 사람들만 모여 있대.”
여학생 둘은 나름대로 비밀을 전한다고 소근거렸다. 하지만 바로 옆에 있는 토마스의 귀에 충분히 들릴 정도의 목소리였다. 여학생들은 순간순간 놀랄 때마다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래서 정보를 모으려면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라는 건가. 새삼스러운 지식을 직접 경험한 토마스는 생각을 남에게 들킨 것처럼 급하게 머그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뉴트는 생각보다 이 학교에서 유명한 것 같았다. 모델이니 뭐니 그런 것을 빼고 보더라도 충분히 인기가 있을 법했다. 매너 좋고 성격 시원시원하고, 학생회까지 하고 있으니 학교에 아주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모를 수가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뉴트에 대한 정보 하나를 입수한 토마스는 웃으면서 패드를 꺼내 들었다.
“…그러니까.”
몇 번 검색하자 곧 원하는 결과가 패드 화면에 주르륵 나열됐다. 이 정도 되는 학교의 총학생회가 홈페이지 하나 만들지 않았을 리 없었다. 별 어려움 없이 홈페이지에 들어간 토마스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늘 그랬던 습관처럼 한쪽 손을 볼에 댄 채 고개를 조금 꺾었다. 오른손으로 화면을 드래그해서 내리자 곧 임원 명단을 볼 수 있었다. 가장 위에 있는 사람은 당연히 학생회장인 알비일테고, 그다음은 뉴트였다.
‘부학생회장이라. 그런 사람이 할 일이 없어서 대낮에 신입생을 납치하기나 하고…….’
혼잣말을 주절주절 내뱉으며 옆에 적힌 전공을 넘겨다보았다. 영화나 연극을 전공하지 않을까 했던 상상과는 다르게 미술사를 전공하고 있었다. 하지만 토마스는 미술사라던가 인문학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런 과목이 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실험과 윤리의식에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거의 찾아보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미술사라. 생각 외의 전공인걸’
다시 학교 홈페이지로 들어가 캠퍼스 지도를 열어보았다. 그리곤 인문대와 자신이 속한 생명과학 건물 간의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음. 하지만 우연히 라도 만날 가능성이 한없이 낮아 보였다.
뉴트는 다시 만나자고 했지만, 이 정도 되는 거리라면 학생식당에 온종일 처박혀 있지 않고서는 얼굴도 보기 힘들 것 같았다. 물론 그 방법도 뉴트가 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온다는 전제하에 성립되는 일이었다. 토마스는 두 손으로 연거푸 마른세수했다. 간신히 식었던 얼굴이 다시 따끈따끈하게 데워졌다.
‘…교양 과목을 인문학으로 신청할걸 그랬나.’
자신에 시간표에 대해 괜한 후회가 들었다. 물론 굳이 관심 없는 과목을 찾아다니는 타입은 아니었다. 세상에는 토마스의 관심을 받는 과목들이 널려있는데, 인문학까지 들은 생각은 없었다. 마음 한구석에 남은 아쉬움을 애써 달랬다. 아직 시간은 많았다. 천천히 생각해보기로 했다. 토마스 자신도 자신이 왜 이러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뭐, 나중에 한 번은 만나겠지.’
결국, 내린 결론은 간단하기 그지없었다. 그 이후로 별 소득 없이 카페에 두 시간 동안 앉아서 온갖 생각을 했다. 하지만 뾰족한 수가 도통 생각나지 않아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 시끌시끌한 목소리가 일순간 주위에서 사라졌다. 시끄러운 소리에 시달린 머리가 아팠다.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던 토마스는 집으로 돌아갔다.
✗ ✓ ✗
혹시나 하고 기대를 했지만, 일 학년 수업은 정말 쉬워도 너무 쉬웠다. 옆에서 울상을 하고 필기를 하는 몇몇 학생과 달리 토마스는 느긋한 표정으로 교수님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차라리 삼 학년쯤으로 편입하게 해달라고 말이라도 해볼걸. 뒤늦은 후회는 시시각각 밀려왔다.
애초에 일 학년들이 배우는 것은 전공 지식 중에서도 아주 기초적인 학문이었다. 제대로 된 심화 과정은 이 학년 말이나 되어나 배울 것이 분명했다. 그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토마스 필기 안 해?”
그래도 신입생 중에 활발하고 붙임성이 좋은 아이들이 때때로 토마스에게 말을 걸어왔다. 교수님의 필기와 목소리를 들으며 수업을 따라가던 토마스가 눈을 깜박거리며 오른쪽을 돌아보았다. 짙은 갈색 곱슬머리를 가진 남학생이 조용히 웃고 있었다.
“어, 응. 해야지.”
“좀 일찍 끝내주시지 않을까 했는데 완전 잘못 짚었어.”
“그래?”
“응.”
짧은 대화를 끝으로 토마스는 가방에 처박아 뒀던 필기구를 꺼냈다. 막상 말은 했지만 뭘 필기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넋 놓고 있지 말라며 등을 두드려준 녀석이 웃기기도 하고 재밌기도 했다. 수업이 언제 끝났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다들 하나같이 신입생이라 서먹한 사이지만, 시간이 지나가 서로서로 같이 다닐 그룹을 만들곤 했다. 토마스는 딱히 그런 것을 필요로 하지 않았지만, 누군가에게 팔을 붙잡혀 끌려갔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같이 밥을 몇 번 먹다 보니 조금 친해지긴 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뭐가? ”
“뉴트 선배는 학교에서 유명한가 봐?”
“아, 얘가 멀리서 이 학교에 와서 아직 그걸 모르나 보다. 새끼. 언제쯤 세상 물정을 알래.”
“내가 뭘!”
“그러니까 지금 학생회 사람들이 다들 쟁쟁하단 소리는 들었지? 그중에서 알비 선배야 다들 좋아하고 두루두루 인기가 있고, 공부도 잘하고 이것저것 외부에서 하는 일도 많아. 아마 졸업하자마자 회사에서 데려간다는 소문이 있다니까.”
“뉴…….”
“그리고 입학식엔 안 왔는데 민호 선배도 장난이 아니던데. 전공이랑은 다르게 운동을 엄청 잘해서 큰 대회에서 상도 몇 번 타서 신문에 났었다더라. 에이전시가 찾아와서 학교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운동하자고 했었는데 선배가 학교 졸업은 해야 한다고 거절해서 지금 다들 누가 전속 계약으로 채가지 않을까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더라.”
“넌 무슨 소문만 듣고 다니냐. 그 정신머리로 공부를 해라.”
“아, 웃기고 있네. 에이든. 너나 잘하시지.”
“그리고? 계속해봐.”
“봐봐. 토마스도 궁금하다고 하잖아. 근데 넌 이런 거 한 번도 못 들어봤어? 진짜?”
“응? 어…어.”
“신기한 사람이네. 하여튼 뉴트 선배는 말이야.”
드디어 먼 길을 돌아 뉴트 이야기가 나왔다. 토마스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그런 모습을 눈치챈 사람도 있었고 아닌 사람도 있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선배는 원래 민호 선배랑 같이 운동했다는 소문도 있고, 다른 일을 했다는 소문도 있어. 그런데 언제부턴가 전공만 하면서 사는 거 같다던데. 사실 뉴트 선배는 나도 잘 몰라. 밖으로도 잘 안 나오고, 나와도 선배들끼리만 어울려 다녀서 우리가 말 붙일 일이 거의 없거든.”
“아…….”
“선배가 워낙 얼굴도 괜찮고 해서 의상 모델도 몇 번 했었고. 예전에 학교 대표로 홍보 사진 찍었잖아. 너 이것도 모르냐?”
“응.”
“뭐 아는 게 없네. 고등학교에서 대학교 자료 보여줄 때 우리 반에 뉴트 선배 사진보고 여기 꼭 간다고 우는 계집애들 진짜 많았는데.”
“…….”
“왜?”
“아, 난 고등학교 안 다녀서 잘 몰라.”
“이건 또 뭔 소리야.”
웃기는 농담 그 정도만 하라면서 등을 세게 쳤다. 제대로 얻어맞았는지 비명을 지르면서 허리를 푹 숙인 토마스가 농담 아니라고 소리쳤지만 누구 하나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런 손길에 토마스는 곧 설명하는 것을 포기했다. 식당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주변을 둘러싼 친구들이 낄낄거리며 이것저것 떠들기 시작했다.
토마스는 열심히 들은 정보를 정리하고 있었다. 물론 정리해봤자 남는 것은 거의 없었다. 다시 만나고 싶다는 목표가 생기자 그것을 이루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루트를 찾아보고 있었다. 좋게 보면 뚝심이 있는 것이고, 나쁘게 보자면 멍청할 정도로 집착이 강했다. 멍하니 또 하늘만 바라보는 토마스의 눈앞에 손을 휙휙 흔들어 보던 녀석이 토마스의 볼을 쭉 잡아당겼다. 불시에 당한 기습에 눈썹을 잔뜩 찡그렸다.
“얜 가끔 이렇게 넋을 놓더라.”
“넋 놓는 거 아니야. 생각 중이거든.”
“무슨 생각?”
“저기 총학생회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해?”
다짜고짜 질문을 던지는 토마스의 물음에 같이 가던 남학생들이 눈이 등잔만 해졌다. 그리고 질문을 한 당사자를 동시에 쳐다보았다.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다. 하지만 한없이 진지한 짙은 눈을 보고 있자니 순순히 답을 알려줄 수밖에 없었다.
“좀 있다 인턴 뽑을걸?”
“인턴?”
“일 학년들이 뭐가 잘났다고 학생회를 시켜 주겠냐. 일 년 정도는 허드렛일 하면서 구르다가 이 학년 되면 자격을 얻는 거야. 근데 워낙 힘들어서 다들 하다가…….”
“고마워!”
“아니 지금 말고 좀 있다 이 바보야.‘
“아, 그러니까 알려줘서 고마워!”
반짝반짝 생기가 도는 얼굴을 보던 학생들은 기가 막혔다.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놈이었다. 수업시간 내내 필기 한 자도 하지 않고 딴생각만 줄곧 하는 것 같더니, 지금은 갑자기 총학생회에 들어간다고 했다. 먼저 간다며 재빠르게 사라진 토마스 뒤로 남은 세 명의 학생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혀를 찼다.
“…하긴 학년마다 하나씩 좀 이상한 애들이 있다잖아.”
“신입생 중 그게 쟤냐?”
“아무래도 좀 그런 거 같은데. ”
“그래도 애는 착하니까.”
“토마스가 총학생회에서 며칠 만에 뛰쳐나오는지 내기라도 하자는 소리에 다들 하나 둘 모여들어서 돈을 걸기 시작했다.”
세 명은 이주일 뒤 학생회 인턴에 합격했다고 바보같이 웃는 녀석을 만났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 웃고 있는 녀석의 목을 감싸 쥐고 고생문이 열렸다면서 놀리기 시작했다.
토마스도 사실 자신이 합격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인터뷰는 모두 대본을 보고 연습했고, 길게 말하는 것은 모두 전공지식뿐이라 뭐라고 하면서 면접을 봤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면접을 보던 시간만 깔끔하게 오려내 구겨버린 것처럼 뻥 뚫려있었다.
“무슨 소리를 했는지 모르면 어때. 합격했으면 된 거지.”
“그런가?”
“커피 정도는 돌려야 하지 않겠냐. 친구야.”
시끌시끌한 사내놈들이 사라지자, 학생회가 있는 건물 앞은 여느 때처럼 조용해졌다.
“그 녀석은 왜 붙이자고 했어? 말하는 게 완전 엉망이던데.”
“그런 애가 하나 있어야 재밌는 거야. 알비.”
“네 사심은 아니고?”
“사심이면 취소하게? 아까 보니까 진짜 좋아하던데 취소 통보가 날아가면 그 덩치로 울지도 모르는데.”
“난 정말 네 생각을 알 수가 없다.”
“괜찮아 나도 모르겠으니까.”
알비가 인턴에 합격한 학생들의 서류를 정리하는 동안 소파에 길게 누운 뉴트가 온몸을 쭉 뻗으며 뒹굴 댔다. 오늘도 가볍게 전공 수업을 재끼고 학생회 실에 눌어붙어있는 뉴트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민호와 알비가 잔소리를 시작했다. 하지만 당사자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뉴트 내가 수업 빠지지 말라고 했지.”
“오늘 안 나가도 성적은 나올 만큼 나와,”
“나올 만큼 나와가 아니잖아. 너 내가 대회 나간동안도 내내 수업 안 들어갔다며.”
“민호가 내 엄마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어차피 한 학기 용 프로젝트라 몇 번 빠져도 전~혀 상관없거든요. 성실한 학생 씨.”
“난 정말 걱정스럽다.”
“걱정 안 해도 괜찮아. 알아서 잘살고 있으니까.”
실실 웃으며 돌아누운 뉴트의 머리통은 큰 손으로 덥석 잡았다.
“아, 아파!!”
“아픈 만큼 공부 좀 해라. 이 새끼야.”
맘대로 뉴트의 머리를 헝클어뜨린 민호가 한숨을 쉬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안 그래도 귀찮은 면접에 끌려 나온 데다 뉴트마저 저러고 있었다. 잔뜩 헝클어진 새집 같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자신을 노려보는 눈을 가볍게 흘려 넘겼다.
“그나저나 토마스. 토마스. 스티븐 토마스라. 분명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아는 사람이야?”
“아니 뭐 아는 사람은 아니고. 미묘하게 이름이 익숙해서.”
“토마스란 이름은 흔하니까 스치면서 들은 거 아냐?”
“그런가. 왜 이렇게 들어본 거 같지.”
눈을 깜박이며 잠시 기억을 더듬던 뉴트는 금방 기억을 떠올리는 것을 포기하고 눈을 감았다.
“뉴트 자지 말고 오후 수업 들어가라.”
“한숨만 자고 들어가겠습니다. 대외 활동 책임자님.”
“저걸 그냥.”
뉴트가 고집을 피우기 시작하면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알비도 민호도 수업을 들어간 학생회 실은 텅 비었다. 그 고요함을 한껏 즐기며 소파 위에서 온몸을 나른하게 늘어뜨리고 있던 뉴트가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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