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리토마스/갤톰] The day when we first met 002
+) NOTICE
플레어가 나타나지 않은 현대 aU입니다
갤리는 인테리어 가게 사장 , 토마스는 위키드 연구소 직원입니다
실제 영화와 본 회지상의 나이 설정이 다릅니다
첫 만남 당시 나이차 갤리 >>> 토마스 >>>>>>>>>> 민호 뉴트
토마스가 어린 민호와 뉴트를 키우는 싱글 파파로 나옵니다.
셋은 혈연관계가 아닙니다
적당한 망상과 설정 붕괴가 언제나 함께 합니다 ㅇㅅㅇ)9
책은 금수본이 될 예정입니다만, 샘플은 지우진 않습니다.
write. 환월
The day when we first met 002
“저렇게 하면서도 몇 년 동안 사귄 거 보면 신기하지 않아?”
“저게 사귄 거야? 난 둘이 싸우면서 미운 정 든 줄 알았는데.”
“…….”
“왜?”
“아니야.”
“난 그런 줄 알았어.”
민호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물론 뉴트는 그런 민호의 말투에 이미 익숙했다. 넌 언제나 그래. 툴툴거리는 뉴트를 보며 웃는 녀석은 소파에 좀 더 늘어졌다. 방학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가벼운 과제 몇 개만 해치우면 나머진 자유 시간이었다. 토마스는 도우미가 오기 전 둘만 남아있는 시간을 내내 걱정했지만, 그렇다고 집에만 묶어두지도 않았다. 너무 멀리 나가지 말라고 아무리 말해도 놀러 갈 녀석들이었으니까. 둘은 보통 체육관에서 운동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이따 체육관이나 갈까?”
“또 뛰러?”
“딱히 할 일도 없잖아.”
“그렇다 해서 뛰러 가자고 하는 사람은 네가 처음일 거야.”
“뉴트도 싫어하진 않잖아.”
“너만큼은 안 좋아해.”
뭐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안 간다는 소리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나이 차이는 얼마 안 나기도 해서 친구처럼 형제처럼 자라고 있었다. 게다가 둘이 토마스를 만나게 된 경위는 거의 비슷했다.
민호는 가끔 이렇게 둘만 남게 되면 뉴트와 처음 만난 날의 이야기를 하곤 했다. 물론 그 이전 기억이 없는 부분은 둘 다 알 수 없었다. 뉴트는 아무런 낌새도 없이 민호 앞에 나타났다. 여느 때처럼 도우미에게 민호를 부탁하고 출근했다.
채 이십 대가 되지 못한 녀석이 키우는 어린아이는 주변 사람들의 걱정을 먹고 자랐다. 어떻게든 키워보겠다고 아등바등하던 토마스는 결국 모든 유급휴가와 무급휴가까지 다 끌어다 쓴 뒤 연구소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연구실을 비울 수 있던 것도 토마스가 워낙 중요한 프로젝트의 일원이었고. 그 정도 휴가를 주고도 잡을만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더는 휴가를 연장할 수 없었다.
연구소로 돌아갈 날이 정해지자 온종일 집안을 돌봐줄 사람을 찾아야만 했다. 민호는 처음 토마스의 품에 왔을 때보다 껑충 자랐다. 생각보다 철이 빨리 든 녀석은 어린 나이에도 그다지 떼를 쓰지 않았다. 물론 가지 말라고 옷자락쯤 쥐어볼 수도 있었지만, 그런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민호. 나 다녀올게.’
‘다녀와. 토마스.’
‘민호 잘 부탁해요. 직접 돌봐줘야 하는데, 제가 좀 바빠서. 최대한 일찍 퇴근할게요.’
‘알겠어요. 걱정하지 마시고 다녀오세요.’
언제나 민호가 안쓰러웠다. 토마스는 미안함을 가득 담고 민호를 품 안 가득 안아줬다. 빨리 올게. 하지만 그 말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안 그래도 갑자기 일이 많아져서 퇴근이 점점 늦어지곤 했다. 민호는 얌전히 자라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토마스의 마음이 편해지는 것도 아니었다. 여기까지 생각을 하던 민호는 뉴트를 쳐다보았다.
“왜?”
뉴트가 까만 눈을 깜박이며 시선을 맞췄다. 눈동자 색이 닮은 둘의 입가에 웃음이 피었다.
“그렇게 둘이 살던 집은 너무 컸어.”
“지금 이 집이랑 다를 거 없잖아.”
“하지만 너랑 갤리는 없었지.”
“그런가.”
“응. 굉장히 넓었어.”
“…사실 우리가 어려서 그랬던 거 아닐까?”
“…….”
뉴트는 민호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기억을 더듬었다. 솔직히 토마스의 손을 잡고 이 집에 오기 전 기억은 그다지 남아있진 않았다. 애써 기억하려 해도, 새까만 머릿속은 텅 비어있었다. 자신의 기억이었지만 도통 깊숙한 곳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사실 그다지 기억하고 싶지 않았기도 했다. 좋은 추억만 담는 것도 벅찼으니까.
게다가 기억을 더듬으면서 추억을 되새길 만큼 오래 산 것도 아니었다. 민호는 그런 동생을 바라보며 애늙은이 같다며 놀리곤 했다. 그럴 때마다 뉴트는 냅다 옆구리를 쳤다. 민호는 억 소리를 내며 몸을 웅크렸다. 눈물을 눈 꼬리에 매단 녀석이 억울한 표정으로 뉴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뉴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이 차이가 얼마나 난다고 동생이라고 그래.”
“동생이지 그럼 아니야?”
“아니야.”
“왜!”
화난 척 소리쳤지만, 그다음 바로 피식피식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쿠션을 끌어안고 끅끅거리며 웃음을 삼키면 둘은 또다시 늘어졌다. 방학은 이래서 좋다니까. 실없는 소리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모자랄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뉴트의 머릿속에 쌓여있는 기억 대부분은 이 집에서 만들어진 것뿐이었다. 민호. 토마스. 갤리. 추억은 사람 수 대로 차곡차곡 포개진 채 단단하게 굳어갔다. 그 아래 깔린 기억은 위키드 연구소에 있던 단편적인 기억이었다. 사실 어린아이들이 이런저런 걱정을 하는 것이 이상하긴 했지만, 둘은 가끔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했다.
“이따 운동하고 갤리네 가게나 놀러 갈까.”
“갑자기 왜?”
“그냥?”
저렇게 말하니 또 할 말이 없었다. 그러자. 뉴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집에서 딱히 할 일도 없는 데다, 갤리한테 가면 재밌는 것이 많긴 했다. 어차피 토마스는 늦게 올 테고. 시간이 맞는다면 셋이서 저녁을 먹고 들어와도 좋았다.
솔직히 낯설지 않았다고 말하면 거짓말이었다.
둘은 몇 년 동안 갤리를 서먹하게 대했다. 싫어서라기보단, 셋이서 살던 집에 낯선 사람이 불쑥 들어와 있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것도 몇 년 둘이 밀고 당기다 간신히 결론이 난 거긴 했다. 나중엔 민호와 뉴트가 나서서 뭐라고 할 정도였다고 할까. 둘은 그렇게 오랫동안 만났으면서 한없이 내외하고 있었다.
갤리는 굳이 합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토마스가 막무가내였다. 결국, 집이 조금 더 넓었던 토마스가 이겼다. 그 모습을 내내 지켜보던 둘은 생각보다 토마스가 나이가 많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하긴 서른 살 초반에 십 대 아들을 둔 사람이 흔하진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할수록 이상할 정도로 묘한 인연이 겹쳐져 만들어진 집이었다.
***
토마스가 민호를 처음 만난 날엔, 바람이 그렇게 불었다고 했다.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은 토마스는 학교를 조기 졸업하고 바로 연구소에 들어갔었다. 대학까진 필요도 없었다고 말하며 웃었다. 위키드는 직원을 위한 편의시설로 꽤 훌륭한 기숙사를 제공했다. 솔직히 연구소에 들어오면 바깥으로 나갈 필요가 없다고 할 정도로 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갖춰두고 있었다.
‘…답답해.’
하지만 토마스는 그곳이 답답해서 싫다고 말하며, 기어코 집을 구해서 나갔다. 어렸을 때부터 연구실을 오가며 살았더니 이젠 지겹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내내 연구소에서 살던 녀석은 바깥으로 나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도 항상 나가고 싶어 했다.
“…네?”
“…….”
“토마스 말씀이신가요?”
“그러네.”
“아니, 그 녀석이 바깥에서 어떻게 산다고,”
물론 연구소를 나가겠다고 한 당사자보다 걱정하는 쪽은 같은 팀에 소속된 어른들이었다. 안 그래도 아이 때부터 키우다시피 데리고 다녔던 녀석인지라, 스무 살이 다 돼가는 상황에도 항상 어린애 같았다.
그런 토마스가 대뜸 바깥에 집을 구하겠다고 고집을 피우기 시작하자 한숨만 늘어갔다. 그렇다고 알아서 하라며 보내줄 수도 없는 일이었다. 토마스가 손대고 있는 프로젝트는 이번 해의 메인이었고, 실패하면 안 되는 중요한 실험이었다. 총장까지 직접 내려와 설득하려 했지만, 도통 이 녀석의 질긴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결국, 두 손을 든 어른들은 몇 가지 제안하며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왜요?”
“넌 우리 연구소의 중요한 일원이고 안전하게 보호받을 권리와 의무가 있단다.”
“…….”
“집은 위키드 측에서 관리할 테니, 다른 것은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
“하지만…….”
“지금까지 내내 기숙사에 살다가 혼자서 처리하려면 힘들 거야. 토마스. 총장님 말씀을 듣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
몇 사람이 달라붙어서 설득하고 난 뒤에 토마스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토마스는 분명 놓치기 아까운 인재였다. 어렸을 땐 그렇게 고집이 세지 않았다. 하지만 늦게 온 사춘기라도 되는지 내내 어른들을 귀찮게 했다. 결국, 최대한 연구소와 가까운 곳에 집을 구했다. 이 녀석이 밥이라도 잘 챙겨 먹고 다닐 수 있는진 알 수 없었지만, 어느 정도 내버려 두기로 했다. 정 못 버틸 것으로 보이면 억지로라도 끌고 올 생각이었다.
“그럼 저 가서 짐 정리 좀 할게요.”
“그렇게 해라. 왜 이렇게 걱정이 되는지 모르겠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저러다 힘들면 돌아오겠지. 어차피 외근이나 출장용으로 사용하는 아파트도 따로 있으니 그쪽으로 알아봐 주면 될 것 같네.”
“알겠습니다.”
“아, 잠깐만. 토마스.”
토마스가 자리를 뜨려는 그 순간 들린 목소리가 발목을 콱 붙잡았다. 토마스는 눈만 깜박거리다 어정쩡한 자세로 다시 소파에 주저앉았다. 소파 앞에 놓여있는 탁자엔 서류가 잔뜩 밀려왔다.
“일단 우리 쪽에서 보유하고 있는 사옥 리스트란다.”
“…….”
“어차피 연구소 명의로 되어있는 건물이니 원하는 곳을 선택해서 편하게 살도록 해라.”
“물론 필요하다면 애완동물을 키워도 괜찮고.”
“그건 좀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은데요.”
애써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눈앞에 보이는 서류를 집어 들었다. 위키드에서 내준 곳은 연구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건물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안쪽으로 조금 들어가 한적한 곳이라고 할까. 연구소에서 가는 방법이 담긴 간단한 약도와 함께 최근 리모델링을 했다는 전개도도 함께 첨부되어 있었다. 혼자 살기엔 쓸데없이 넓어 보이는 집이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급하게 다른 곳을 구할 길이 막막한 것은 사실 이었다. 기숙사를 떠나고 싶어서 고집을 부렸던 건데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살게 될 줄이야.
‘…….’
토마스는 눈을 살짝 찌푸리며 약도를 다시 살펴봤다. 하지만 저 집은 너무 크고 넓었다. 물론 좁은 곳을 선호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과한 크기를 원한 것도 아니었다. 혼자 집에 있다면, 전등이 닿지 않는 곳에서 생겨난 어둠이 금방이라도 구물 구물 기어 나올 것 같았다. 토마스는 그런 식의 침묵을 싫어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가져가야 할 짐이 무엇인지도 알기 어려웠고, 제대로 정리하지 않고 잔뜩 방에 늘어둔 개인 짐들이 뇌를 스치고 지나갔다. 끄응. 고민 섞인 신음을 내내 내뱉던 토마스가 먼저 가보겠다고 일어섰다. 조금이라도 이곳을 빨리 빠져나가고 싶었다. 에바 페이지는 허락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아기 새가 둥지를 나가는 기분이 드는군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녀석이 왜 갑자기 저런 바람이 불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뭐, 어릴 적 치기일 수도 있고, 다들 그렇게 크는 거겠죠.”
“그렇습니까.”
급하게 방문을 여는 애제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에바 페이지는 내내 굉장히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물론 걱정이 되진 했지만, 이렇게라도 연구소와 끊어지지 않는 줄이 있다면 상관없었다. 많은 이야기를 하느라 차갑게 식어버린 잔을 들었다.
연구소 내에서 토마스는 여전히 착하고 귀여운 연구원이었다.
“…생각보다 가져갈 짐이 없네. 나 여기서 뭐 하고 살았지.”
토마스는 일인용 침대에 걸터앉은 채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방안을 둘러보았다. 어쩐지 마음에 돌덩이가 하나 더 들어앉은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완전한 독립을 하지 못하는 것도 신경이 쓰였는데, 지금 개인실 꼴을 보고 있으니 더 답답해졌다. 이 커다란 방에 가득 차있는 물건중 토마스가 가지고 들어온 것은 몇 가지 없었다. 애초에 연구소에 들어올 때부터 따로 물건을 챙길 필요가 없었다. 정말 필요한 개인 소품 외에 생활에 필요한 각종 용품은 모두 위키드가 지급한 것이었다.
“내가 이렇게 위키드에 의존하고 살았었나.”
토마스는 갑자기 혼란스러웠다.
“정말 모르겠다.”
정리할 생각을 포기하니 마음이 좀 편해졌다. 어차피 재택근무를 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짐을 다 챙길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애초에 이곳에 들어올 때 뭐하나 제대로 들어온 것이 없다는 걸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개인실에서 지내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가까이 있는 복지과에 말하면 그만이었다. 위키드는 직원들의 복지를 위해선 돈을 아끼진 않았다. 게다가 중요한 위치에 있는 연구원의 부탁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잠만 자고 연구소로 출근할 거면…일단 그냥 나가서 필요할 때마다 사는 것도 방법이겠네.”
물론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받는 월급은 한 푼도 새어나가지 않고 차곡차곡 통장에 쌓이고 있었지만, 정작 토마스는 그 돈을 꺼내 쓸 일이 별로 없었다. 딱히 가지고 싶은 것도 없었고, 그렇다고 연구소 내에서 제공하는 물건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지내왔던 나날은 토마스의 손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일단 뭐라도 챙겨봐야겠다.’
개인실에서 밖으로 가지고 갈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하나둘 챙기다 보니 짐이 자연스럽게 늘어갔다. 커다란 가방에 이것저것 되는대로 집어넣던 토마스가 잠시 침대를 바라보며 손을 멈췄다. 딱 한 번 통장에서 돈을 꺼내 샀던 태블릿 PC가 눈에 들어왔다. 왜 굳이 샀냐고 물어본다면 갑자기 사고 싶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충동구매였다.
어차피 지금 가는 집에는 필요한 컴퓨터가 설치되어있을 것이 분명하지만, 새로운 기계를 만지는 것보다 손에 익은 쪽을 가져가는 것이 편했다. 물론 집에서까지 일할 생각은 없었다.
“이것만 들고 나가면 되겠네.”
그리고 정말 마지막으로 할 것이 있었다. 되는대로 구겨서 침대 위에 던져둔 가운을 집어 들었다. 옷걸이에 적당히 걸어서 구김을 펴고 옷장에 집어넣었다. 그러고 나니 영 어색했다. 토마스는 엄지손가락으로 마른 입술을 쓸었다. 그리곤 가방을 들고 방을 나섰다. 옆에 달린 패널에 연구원 카드를 갖다 대자 짧은 전자음과 함께 문이 잠겼다. 아마 이사 겸 휴가 기간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문이 열리진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이제 진짜 가는 건가. 이삿짐이 없어서 편하긴 하네.”
여전히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보는 것처럼 전전긍긍하는 어른들은 토마스가 기숙사를 떠날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스무 살이 다 되어가는 녀석이었지만, 한없이 어려 보이기만 했다.
총장은 마련해준 집까지 편하게 타고 가라며 연구소 차를 내주었다. 보안이 철저한 연구소를 완전히 빠져나오기까지 몇 번이나 카드를 사용해야 했다. 밖으로 잘 나가지 않아 귀찮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었는데, 정말 귀찮을 정도로 복잡한 보안체계였다. 마지막으로 커다란 유리문을 열고 나왔을 때, 제법 쌀쌀한 가을바람이 토마스의 앞머리를 훑고 지나갔다. 이제 막 울긋불긋 물들기 시작한 나무들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벌써 가을이긴 했구나.”
토마스는 멍하니 주변을 바라보았다. 조금 더 두꺼운 옷을 입고 나오는 것이 나았을까. 하도 연구실에만 있었더니 영 날씨에 대한 감각이 사라진 기분이었다.
“이쪽으로 오시죠.”
운전기사가 다가왔다. 토마스는 그런 남자를 바라보며 꾸벅 인사했다. 밖으로 나갈 때마다 함께하던 기사였다.
“잘 부탁합니다.”
“뭘요.”
처음 연구소에 들어왔을 때부터 내내 타고 다녔던 차였다. 익숙한 얼굴로 뒷좌석에 편하게 등을 기대고 앉았다. 무릎에 올린 손가락을 몇 번 움직이더니 다리를 꼬았다. 안쪽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어두운 유리를 통해 토마스는 바깥을 보았다. 빠르게 움직이는 거리에 흐릿한 초점이 잡혔다 다시 사라졌다. 가을은 생각보다 짧을 것이 분명했고, 날씨가 조금 추워진다 싶으면 금방 겨울이 올 것이다. 토마스는 새삼스레 계절이 지나가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겨울이 오면.’
뭘 해야 할까. 막상 연구소를 떠나려 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온갖 감정이 뒤섞인 마음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차라리 잠을 자는 쪽이 나을 것 같아 눈을 감았다. 어깨에 걸고 있던 가방끈이 차가 흔들리면서 버티지 못하고 스르르 흘러내렸다.
‘…겨울이 오면 뭘 할까.’
토마스는 몸이 이리저리 흔들거리는 것도 모른 채 잠이 들었다. 기사는 힐끗 거울을 통해 토마스의 얼굴을 보더니 마치 아들을 보는 표정으로 웃고 말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집에 도착했다는 기사의 목소리를 저 멀리서 들었다. 으으. 잠이 잔뜩 붙은 얼굴로 하품하던 토마스가 머리를 긁적이며 차에서 내렸다.
“바로 보이는 입구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이 부근은 모두 위키드 쪽 사옥이니 이름만 말한다면 그쪽에서 다 알아서 해주실 겁니다.”
“…….”
“그럼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토마스는 멍한 표정으로 듣고 있다 화들짝 놀랐다. 아직도 잠이 안 깬 것이 확실했다. 그런 얼굴을 보던 기사가 한마디 더 건넸다.
“혹시 급한 일이 있다면 연구소 쪽으로 연결된 유선 전화나, 아래쪽 경비 업체를 이용해 주시면 됩니다.”
“총장님은 날 너무 어린애로 보셔.”
작게 투덜거리는 소리는 금방 목 안으로 넘어갔다. 물론 말은 그렇게 하는 녀석은 도움을 받는 생활에 익숙했다. 어렸을 땐 연구원들이, 나이를 먹고 나서는 복지과가 그랬다. 그렇게 고집을 부려 얻어낸 자유는 시간이 지날수록 묘한 기분을 동반했다.
***
민호를 만난 날은 바람이 많이 불었다.
나날이 추워지는 날씨는 금방이라도 눈을 뿌릴 것처럼 흐려지기만 했다. 사람들은 하나둘 두꺼운 옷을 꺼내 입었고, 하얀 입김을 뿜으며 거리를 걸어 다녔다. 토마스는 집에서 오래 머무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내내 비워두지도 않았다.
유난히 바람이 세게 부는 통에 냉큼 집 안으로 들어왔다. 온도를 조금 높이고 커피를 한잔 내려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을 날씨는 출퇴근 하기 딱 좋았는데, 슬슬 추워지기 시작하니 귀찮음이 온몸을 타고 올라왔다. 얼굴을 강하게 때리는 바람은 겨울을 담고 있었고, 며칠 전부터 점점 짧아지는 해는 금방 어둠을 몰고 왔다.
‘아, 춥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 달리 집안은 빠르게 훈훈한 공기로 채워지고 있었다. 추위를 많이 타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따뜻한 온기가 있어야 하는 건지. 토마스는 열심히 위키드의 재산을 낭비 중이었다.
“…음?”
토마스는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섞인 낯선 소리를 들었다. 눈을 깜박이며 창밖을 바라보았지만, 세차게 유리를 때리는 바람뿐이었다. 잘못 들었나. 몇 번이나 귀를 기울였지만, 이렇다 할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결국, 들고 있는 커피 잔에 다시 집중하려는 그 순간, 또다시 바람 사이로 희미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들어도 울음소린데?”
하지만 이미 어둠이 내린 거리에서 아이가 울고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길고양이가 발정기라도 온 건가. 토마스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끊어질 것 같으면서 계속 들리는 소리가 내내 신경 쓰였다. 고양이 울음소리가 어린아이의 목소리와 비슷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좀처럼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안 되겠다.”
애써 다른 곳을 보면서 다리만 떨던 토마스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되는대로 옷을 걸쳐 입었다. 비록 고양이가 우는 것이라 해도 두 눈으로 보고 마음이 편해지는 쪽이 나을 것 같았다. 토마스는 이런 일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꽤 차가운 바람이 온몸에 스며들었다. 어, 추워라. 토마스는 저도 모르게 팔짱을 끼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렇게 추운데 가늘게 이어지는 울음소리는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이 울음소리인지, 아니면 정말 착각해서 들은 고양이 소리인지. 토마스는 소리가 들리는 대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미 어둠이 내린 곳은 어둡기만 했다. 군데군데 켜진 가로등에 의지해 여기저기를 둘러봤지만, 딱히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토마스는 이리저리 소리의 근원을 찾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금방 흥미가 사라졌다.
“역시 잘못 들었나.”
슬슬 한기가 온몸에 들러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인제 그만 들어갈까. 토마스는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아무래도 벌써 겁을 먹고 도망을 갔는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인 채 한참을 풀숲만 쳐다보다 이내 몸을 돌려 돌아가던 토마스의 뒤통수를 쭉 잡아당기는 울음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발걸음을 멈추자 다시 한 번 귀를 찌르는 소리가 발걸음을 턱 잡아 세웠다.
“…….”
토마스가 뒤를 돌아서 풀숲을 이리저리 해치기 시작했다. 그리곤 깜짝 놀라며 무엇인가를 안아 올렸다. 두 눈이 심하게 흔들리는 데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이…어떻게.”
품 안 가득 들어오는 천 뭉치를 품 안에 안고 당황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살펴보던 토마스는 다시금 울음소리가 들리자 퍼뜩 정신이 든 것처럼 냅다 집으로 달려갔다. 무슨 정신으로 문을 열고 들어왔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벌벌 떨리는 팔은 금방이라도 천 뭉치를 떨어뜨릴 것 같았다. 소파에 그것을 내려놓고 허둥지둥 자신이 사용하던 이불을 꺼내온 토마스는 정신없이 천을 벗겨냈다.
“…….”
얇은 천으로 몇 겹이나 쌓여있던 아이는 파랗게 얼어있었다. 버석버석 소리가 날 정도로 얼어버린 천을 벗기고 이불로 푹 감싸 안았다. 따뜻한 곳에 들어와서 안심되는지 칭얼거리기 시작하는 아이의 손은 얼음장 같았다. 토마스는 품 안에 아이를 푹 안은 채 눈만 깜박일 뿐이었다.
“도대체…누가.”
물론 부모를 알 순 없었다. 하지만 이 아이는 상당히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그나마 얼어 죽기 전에 발견된 아이는 잔뜩 언 몸으로 울어대다 어설픈 손길을 받고 나서야 간신히 잠이 들었다.
“…….”
토마스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아이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조용히 눈치를 살피며 아이가 깨지 않는지 살폈다. 다행히 잠투정을 많이 하진 않는지 곧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토마스의 손이 바닥에 떨어진 옷을 뒤적거리며 연신 뭔가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찾았다.
“…….”
알아낸 것은 아기의 이름뿐이었다. 작은 쪽지엔 생일이나 다른 말은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민호. 민호. 토마스는 세상 모르고 잠이든 아이의 뺨을 살살 쓸어보며 낯선 이름을 불렀다. 어떻게 해야 할진 아직 확실하게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아이를 밖에 그냥 둘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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