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되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했다. 갤리는 딱 그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천사처럼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남한테 피해는 끼치지 않고 살아왔다고 자신할 수 있는 인생에 갑자기 커다란 돌이 콱 박히는 기분이었다. 박힌 걸 뽑아서 버릴 수도 없이 옹골차게 박혀있는 돌. 정확히 말하자면 굴러 들어와서 박혔다기보다는 신경도 쓰지 않던 돌이 툭 튀어나오더니 멀쩡히 걷던 사람 발에 걸렸다고 하면 맞을 것이다. 그리고 그대로 와장창 넘어졌다고나 할까. 나름 잘 포장된 도로를 걷고 있던 갤리의 눈앞에 먹구름이 드리우는 것 같았다.
“…….”
갤리는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 잘못이 있다고 한다면 미성년자 주제에 술을 마셨다는 것 뿐인데, 눈앞에 현실은 생각보다 혹독했다. 내가 아직 잠이 덜 깼나 봐. 하하. 술 좀 작작 처먹을 걸 애써 웃으면서 다시 침대에 누웠다. 일분. 이분. 삼분. 벌떡. 다시 이불을 박차고 일어난 갤리가 천천히 침대 오른쪽을 바라보았다. 불룩하게 이불이 솟아있는 것을 보니 분명 옆에 있는 것은 사람이었다.
“…….”
침착하게 숨을 고른 갤리가 조심스럽게 이불을 들쳤다. 베개와 이불에 푹 파묻힌 녀석의 짙은 머리카락이 살짝 보이자, 애써 침착하게 웃었다. 에이. 설마. 설마. 설마. 이불을 어깨까지 걷어낸 갤리는 다시 속으로 비명을 삼키며 뒤로 후다닥 물러났다. 커다란 몸이 벽에 쿵 부딪혔다. 더는 뒤로 물러날 곳도 없었다. 오, 하나님. 절로 신을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도대체…어제…무슨.”
갤리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채 끙끙거리며 어제 있었던 일을 생각해보려 했다.
분명 처음이자 마지막 기억은 확실했다. 친구들끼리 날 잡아서 놀러 왔을 뿐이었다. 물론 놀러 와서 조금 신난 나머지 얌전하게 하진 않게 논 것은 인정했다. 미성년자들이 어떻게 구해왔는지 술을 궤짝으로 들고 왔다. 이 미친놈들. 낄낄 웃으면서 술을 받아들었다. 물론 갤리는 거기에 흥이 나서 조금 보태긴 했다. 직접 만든 맥주라던가. 수상한 술이라던가. 소위 갤리주라고 하는 걸 마시면서 뿜는 애들도 있고, 맛이 이게 뭐냐고 타박하는 놈들도 있었다.
안주로 고기 좀 굽고, 과자 까서 늘어놓고 신나게 마시고 다들 하나 둘 그대로 쓰러져서 잠이 들었다. 추운지 서로 웅크리고 누워 있다가 손에 잡히는 점퍼를 끌어당겨서 덮기도 했다. 거실에 늘어진 놈이 넷. 식탁 의자에 앉아서 죽어있는 놈이 둘. 그리고 마지막까지 앉아있던 갤리가 슬슬 졸음이 오는지 천천히 일어섰다. 어이쿠. 발이 꼬여서 그대로 넘어질 뻔했다. 시체처럼 누워있는 애들을 아슬아슬하게 밟지 않고 지나간 갤리는 문이 열려있는 침실로 들어갔다. 그래도 따뜻한 곳이 좋다는 생각에 앞 뒤 보지 않고, 침대에 다이빙하는 것처럼 쓰러졌다. 술을 머리끝까지 차오른 상태였고, 침대는 따뜻하고 푹신했다.
“분명 그대로 얌전히 잠만 잔 거 같은데…….”
여기가 기억의 끝이었다. 침대에 누운 그 순간부터 기억을 빨아 먹히기라도 했는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하다못해 꿈을 꾼 기억도 나지 않았다. 정말 뇌의 전원을 껐다 켠 것처럼 텅 비어있었다. 얼마나 깊게 잠이 들었는지 알만했다. 하긴 마신 술의 양이 어마어마했다. 친구들끼리 흥이 나서 더 퍼부은 것도 무시 못했다. 얼마나 떠들면서 마셨는지, 술병이 쌓이는 것도 몰랐으니까.
“…….”
“…으음.”
그 순간 옆에 누워있는 녀석이 추운지 이불 속으로 파고들면서 빙글 돌아누웠다. 하지만 이미 어깨까지 내려가 있던 이불은 돌아눕는 것에 떠밀려 허리까지 주르르 미끄러졌다. 아악. 갤리는 이 상황을 어떻게 만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분명 술이나 좀 깨자고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자기 침대 옆엔 옷을 다 벗은 토마스가 누워있었다. 솔직히 하반신은 벗고 있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걸 확인하자고 이불을 걷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으응.”
“얘가 여기 왜 있냐.”
다시 한 번 꿈틀거리던 토마스가 더듬더듬 이불을 찾았다. 아직도 술이 덜 깼는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베개에 절반쯤 묻혀있었다. 가늘게 내뱉는 숨엔 아직도 술 냄새가 났다. 좀 더 웅크린 놈이 좀 불쌍해 보였다. 갤리가 떨떠름한 손으로 이불을 덮어주려는 그때 방문을 박차고 들어온 녀석들이 냅다 소리를 질렀다.
“야! 일어났…….”
“…….”
“응?”
“…….”
“너네 뭐하냐?”
“…히익”
갤리의 손은 허공에 이불을 들고 멈춰버렸다. 그 이불 아래는 알몸의 토마스가 있었다. 이것 봐라? 뉴트가 건수를 잡았다는 듯 민호의 어깨에 손을 얹고 갤리를 노려보았다. 아마 프라이가 아침을 했으니 둘 다 깨워오라고 보낸 것이 틀림없었다.
‘아, 젠장. 문부터 잠갔어야 했는데.’
물론 문을 잠그고 잔다는 자체가 더 수상하다는 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으면, 여기서 이러고 잠을 안 잤을 것이 분명했다. 갤리가 겨우겨우 이불을 토마스에게 덮어주었다. 으응. 또 한 번 토마스가 신음인지 만족감인지 모를 숨소리를 내뱉었다. 갤리는 자기 인생이 통째로 구겨져서 세탁기에 들어가는 것 같았다.
“둘이 뭐 좋은 일 있었나 봐?”
“미쳤냐?”
“아니면 토마스 꼴이 그게 뭔데.”
“…….”
“안 그러냐? 민호?”
뉴트가 또 민호를 보면서 낄낄거렸다. 이쪽도 술이 덜 깬 것 같은데 뭐 멀쩡히 서 있으니 됐다 싶었다. 뉴트는 문간에 서서 내내 갤리를 쳐다보았다. 도대체 이 상황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갤리는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뭐 생각나는 것이 있어야 변명이라도 할 텐데, 머리는 텅 비어있었다. 끙끙거리는 갤리를 보던 둘은 흥미가 돋는 모양이었다. 무슨 아침 전 애피타이저를 먹는 마냥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사고 쳤네. 사고 쳤어. 그러게 작작 먹으라고 했지.”
“아니거든!”
“괜찮아. 괜찮아. 뭐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고 그러다 성 정체성도 확인하고 그러는 거지.”
“야 이 미친놈아!”
“난 내 친구들의 성 정체성을 존중해. 진짜야.”
“큰 소리로 말하지 말라고!”
갤리가 저 새끼 입을 틀어막아야겠다고 침대에서 일어서자 뉴트는 재빠르게 뒤로 빠졌다. 아. 갤리는 침대에 걸터앉아서 머리를 쥐어뜯었다. 같이 아니라고 변명해줘야 하는 놈은 아직도 술에 잔뜩 취해서 이불과 짙은 만남을 가지고 있었다. 완전 망했다. 저 녀석이 깨면 물어보리라 다짐했지만, 점심도 넘어서 간신히 일어난 토마스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