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해가 뜨고도 한참 동안 조용한 집에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렸다. 크게 울린 소리는 순식간에 공중으로 흩어져 버렸다. 그리고 잠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엄청난 적막이 찾아왔다. 하나. 둘. 셋. 겨우 5초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 새를 참지 못하고 다시 엄청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굳이 비유하자면 지붕이 들썩거릴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이게 지금 몇 시야!”
“…왜 그래.”
“…….”
“토마스. 왜 그러냐고.”
옆에서 등을 돌리고 누워있던 사람이 몸을 일으켰다. 왜 그래. 잠이 덜 깬 목소리가 이불에 내려앉았다. 단단하고 큰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이 주르르 흘러내리며 상체가 훤히 드러났지만, 정작 옆에서 괴로워하는 사람은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왜 알람이 안 울렸지. 오늘 아침에 진짜 중요한 전체 회의 있는데, 난 총장님한테 죽었다.”
“…….”
“갤리. 내 핸드폰 어디 있어?”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아…….”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토마스가 괴로운 신음을 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 급하게 일어나서 그런지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져 왔다. 그 와중에 부드러운 브루넷 머리카락이 손끝에서 뚝뚝 떨어졌다. 완전히 패닉에 빠진 토마스는 움직이지도 않고 멍청하게 침대에 앉아있을 뿐이었다. 그런 토마스의 등을 짝 소리 나게 때린 갤리가 한숨을 푹 쉬었다. 이럴 때마다 당황한 채 그대로 굳어있는 녀석을 깨워줘야 했다.
“준비 안 해? 늦었다면서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어…어.”
“지금 8시 40분이야.”
“아악!”
또 한 번 소리를 지른 토마스가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 혀를 쯧쯧 차며 허겁지겁 뛰어들어가는 갈색 뒤통수를 바라보던 녀석이 침대에서 내려왔다. 저 녀석 핸드폰이. 적당히 옷을 주워 입으며 방 안을 둘러봤지만, 안 그래도 저번에 떨어뜨려서 다 망가져 가는 토마스의 핸드폰이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안 들고 온 거 아냐?”
토마스라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방 안 어디에도 핸드폰이 없었다. 하긴 갤리도 알람 소리를 듣지 못했으니, 확실히 가까이 있는 것은 아닌지 눈에 도통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예민한 편은 아니지만, 알람을 듣고 깨지 않을 정도로 무딘 사람도 아니었다.
“…도대체 어디다 놔두고, 이 난리야.”
결국 거실에 나온 갤리는 장식장부터 탁자까지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제법 소란스러운 소리가 나자, 이 층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아. 갤리는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저 녀석이 문제야. 애들 잠까지 다 깨우고 다니네.”
물론 입으로는 당장에라도 토마스의 멱살을 잡을 것처럼 투덜거리지만, 눈과 손은 계속 핸드폰을 찾고 있었다. 일단 저 녀석을 무사히 출근시키고 나야 한숨 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갤리. 무슨 일이야.”
소란스러움이 잠이 깬 듯 잔뜩 졸음 가득한 하품을 하는 두 녀석이 계단을 내려왔다. 으그그.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며 내려온 녀석들이 갤리의 시선을 쫓아갔다.
“네 녀석 아빠 좀 어떻게 해봐라. 핸드폰을 어디다 버려뒀는지, 알람 소리가 안 들려서 지각했단다.”
“토마스가?”
“그래. 지금 씻으러 갔으니 곧 나오겠지.”
“오늘 토마스 회의 있다고 했는데.”
“…그러게 말이다.”
셋은 곧 입을 다물고 핸드폰 찾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지금 당장 찾지 못하면 토마스는 모든 걸 내던지고 출근할 기세였으니까. 결국 소파 쿠션 가장자리에 전원이 꺼진 채로 박혀있는 핸드폰을 찾긴 찾았다. 이게 왜 여기에 들어있냐. 한숨을 푹푹 쉬는 갤리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냉큼 빼앗아간 뉴트가 전원을 켰다.
“…이거 배터리도 없는데. 아, 아니다. 조금 있네.”
“이 녀석은 도대체 어제 뭘 한 거야!”
“토마스, 오늘 혼나겠구나. 갤리. 오늘은 우리 외식이라도 할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아무리 봐도 오늘 제시간에 퇴근하긴 그른 것 같아서.”
“…….
맹랑하게 말하는 녀석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 튕겨줬다. 아파! 부스스한 금발이 눈앞에서 흔들리나 싶더니, 그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던 눈썹이 잔뜩 찡그려졌다. 그나마 이 녀석들이 방학이라서 다행인 건지 아닌지. 아침에 갑자기 푸닥거리를 하고 나니 긴장이 확 풀렸다. 그제야 몰려오는 아침잠에 갤리가 하품하며 기지개를 쭉 켰다.
“토마스…이 녀석은…….”
“나 다녀올게!!”
언제 튀어나왔는지 겨우 겉옷만 걸친 녀석이 신발을 구겨 신고 있었다. 당장 달려가려는 녀석을 불러 세웠다. 어? 어? 응? 토마스가 잔뜩 급한 얼굴로 휙 돌아봤다.
“이거 가져가.”
“뭐…뭔데!”
“핸드폰!”
갤리가 휙 던져주자 간신히 두 손으로 움켜잡았다. 망가지기 일보 직전인 핸드폰을 이렇게 휙휙 던지다 큰일이 날 게 뻔한데. 하지만 토마스는 그런 말을 할 만큼 정신이 남아있지 않았다. 허겁지겁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문을 열었다.
“나, 다녀올게!”
“그래라.”
“셋이서 밥 좀 먹고, 그러니까…….”
“알아서 할 테니까 빨리 출근이나 해. 지금 몇 시냐면…….”
“아아악!”
그 소리에 다시 정신을 차린 토마스가 문이 부서지라 닫으며 뛰어나갔다. 문밖으로 들리는 목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에야 멀뚱히 서 있던 셋이 소파에 주저앉았다.
민호는 등을 푹 기댄 채 자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내내 웃고 있었다. 갤리는 아직도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내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둘 사이에 앉아있던 뉴트는 피식 웃으며 다리를 한쪽으로 꼬았다. 긴 손가락으로 볼을 툭툭 쳤다. 그러더니 손바닥으로 턱을 괴었다.
“토마스 출근 잘하려나.”
“…모르지.”
“한참 집에 못 들어오는 거 아냐?”
“…….”
어린아이들이 전혀 어린애답지 않은 걱정을 했다. 물론 토마스가 몇 번 이렇게 지각을 하면서 사고를 쳤었다. 그리고 밥도 제대로 못 먹을 녀석을 위해 갤리가 도시락을 들고 연구소로 몇 번 찾아가기도 했다.
‘이러나저러나 둘이 닮은 건가.’
뉴트와 민호는 괜히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이럴 때마다 집이 시끄러워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짜증이 나진 않았다. 둘은 소파에 편할 대로 기대서 조용조용 문자를 주고받았다.
「토마스 오늘 진짜 못 들어올까?」
「내가 아냐. 근데 진짜 중요한 회의면 혼나지 않을까?」
「역시 그런가.」
「그렇지. 적당히 혼나고 들어오면 좋겠다. 토마스가 연구소에서 밤새는 거 별로야.」
그건 나도 싫은데. 뉴트가 괜히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며 툴툴거렸다. 둘이 소곤거리는 걸 알아챈 갤 리가 일단 밥이라도 먹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따로 음식을 만든다고 하기보단 준비된 음식을 데운다고 표현하는 쪽이 맞았다. 물론 여기까지 합의를 보는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은 사실이었다.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접시 소리가 들렸다. 아마 오늘 저녁은 어제 만들어 놓은 스튜일 것이 분명했다. 샐러드용 채소도 아직 충분히 남아있었고, 토마스가 집에 오면서 사 왔다는 빵도 있었다.
“아침은 결국 어제랑 똑같은 거야?”
“그렇겠지 뭐. 토마스는 밥이라도 먹고 해야 할 텐데.”
“…….”
“토마스 배고픈 거 못 참잖아.”
익숙한 듯 말을 주고받던 둘은 눈이 마주치자마자 와르르 웃었다. 반바지 아래로 보이는 탄탄한 다리가 소파를 걷어찰 것처럼 흔들렸다. 갤리가 아침을 먹으라며 둘을 부를 때까지 웃음소리는 잦아들지 않았다. 평범하다면 평범한 풍경이었다.
***
이 집에서 네 사람의 음식을 담당하는 사람은 고용인이었다. 처음 집을 합쳤을 때 갤리는 그런 것에 영 적응하지 못했다. 굳이 도우미가 필요 없다고 했지만, 토마스가 음식 재료로 가축 사료만도 못한 것을 만들어 내오는 것을 보고 나서 결국 일주일 만에 마음을 바꿔먹었다. 갤리야 어느 정도 음식을 할 수 있지만, 혹시 자기가 집을 비우면 이 녀석은 분명 죽어서 발견될 거라며 덤으로 혀를 찼다. 민호와 뉴트는 딱히 부정하지 않을 채 토마스한테 매달려 있었다.
‘도대체 넌 어떻게 평생 밥을 먹고 살았냐?’
‘…….’
‘이런 솜씨로 이 녀석들도 먹여 살렸어?’
‘…….’
처음 넷이서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기 전 갤리가 했던 말이었다. 간신히 떡이 되기 직전 살아남은 파스타 면을 그릇에 담고 토마토소스를 얹었다. 파슬리를 뿌리려다 잘못해서 군데군데 초록색이 뭉쳐있었고, 바게트는 잘못 구웠는지 한쪽이 새카맣게 타 있었다. 약간 처참해 보이는 메뉴와 비슷한 표정의 토마스는 나름 필사적이었다. 그런 얼굴을 보고나니 먹기 싫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마치 벌칙을 받는 것처럼 포크를 들었다.
셋은 그날의 저녁이 꽤 끔찍했다고 회상했다. 먹고 죽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맛이 있다고 하긴 미묘했다. 식사를 끝내고 커피와 차를 타서 소파에 앉아있는 내내 넷은 별로 말이 없었다. 물론 갤리가 한마디 타박한 것 외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탄 빵까지 싹싹 긁어먹고 포크를 내려놓는 갤리를 보던 토마스의 눈이 심상치 않았다.
그렇게 어느 순간 셋이 살던 집엔 사람이 하나 늘었다. 물론 둘 다 한 성격을 하는 탓에 목소리가 높아질 때도 있었다. 사소하겐 빨래부터, 신발장을 정리하는 것까지 어느 것 하나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그런 둘을 보던 뉴트는 매일 어깨를 으쓱거리며 둘을 타박했다. 조금 더 머리가 굵어진 민호는 딱히 말을 거들지 않았다.
“저럴 거면 뭐하려고 집을 합쳤대.”
“…응?”
“어차피 거의 옆집에 살다시피 하는 데 좋을 때만 와도 되는 걸 집을 합치더니 매일 싸우잖아.”
“그렇게 살면 같이 사는 게 아니니까 그러지.”
“난 아직도 이해를 못 하겠어.”
“뉴트는 어려서 그래.”
“민호랑 내가 몇 살이나 차이가 난다고.”
또 툴툴거리는 녀석의 목소리가 귀에 스며들었다.
***
갤리는 느지막하게 먹은 접시를 치우고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민호와 뉴트는 방학을 만끽하며 소파에서 뒹굴 대고 있었다. 둘의 시선이 출근 준비하는 갤리를 따라갔다. 너무 답답하지도, 그렇다고 캐쥬얼 하지도 않은 차림이었다.
“오늘도 나가?”
“그래야 돈을 벌지. 자기 가게 돌리는 사장이 귀찮아하고 게으르면 망하는 지름길이야.”
“흐응.”
“너희도 해야 할 일 하고 있고, 멀리 놀러 나가지 말아라. 안 그렇게 보여도 토마스가 내내 걱정해.”
“아냐. 토마스는 언제나 걱정덩어리야.”
“이 녀석이 말이나 못 하면.”
피식거리며 웃는 녀석의 머리를 커다란 손으로 마구 헝클어뜨렸다. 으악. 버둥거리는 녀석을 옆에서 은근히 눌러주던 민호가 갤리와 시선을 교환하며 낄낄 웃었다. 물론 갤리는 민호에게도 똑같은 것을 선물했다. 사이좋게 까치집을 지은 녀석들이 잔뜩 뚱한 표정으로 갤리를 노려봤다.
“그럼 나 다녀온다.”
“다녀와요.”
“사고나 치지 말고 있어라.”
갤리는 다시 한 번 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문을 나섰다. 소파 등받이에 팔을 늘어뜨린 채 배웅을 한 녀석들이 금방 깔깔 웃으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항상 이렇게 출근 시간이 지나면 둘만 남게 되었다. 조금 있으면 청소를 도와주는 분이 오지만, 이 짧은 시간은 오로지 둘만의 것이었다. 물론 이쪽도 그렇게 얌전한 녀석들이 아니었기에 내내 소란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