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불안한 기운을 읽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일은 쉽게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하지만 신속하게. 왕윤은 주위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을 부르려다 이내 혼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봉황궁에 내려앉은 불행의 그림자는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봉황궁에 있는 그 누구도 불안함의 원인이 무엇인지 쉽게 짐작하지 못했다.
무언가 짐작하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예전 같으면 태오 장군이 나서서 할 일까지 직접 손대기 시작했다. 그 중엔 출전하는 것도 끼어 있었다. 이 사실을 알고 가장 먼저 달려온 사람은 태오였다. 태오는 자신이 가도 충분하다며 왕윤을 말렸지만, 별로 전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왕윤은 이번 아홉 고개에 나타난 놈들을 정리하고 국경을 돌아보고 온다는 말을 남기고 궁을 떠났다. 태오는 무척 따라가고 싶은 눈치였지만, 어린 초선을 궁에 홀로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한걸음 물러서면서 겨우 한마디를 덧붙였다.
‘사숙. 신수를 데려가시죠.’
‘나도 없는데 초선이를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
‘제가 있지 않습니까. 혹여 무슨 일이 있을까 봐 걱정이 됩니다.’
‘허허. 녀석 참.’
‘혹시 모르니 제 말대로 해 주세요.’
“…….”
“제 공연한 기우라면 다행이겠지만, 요새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사실 사숙이 이렇게 직접 나가실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꼭 가셔야 한다면 여포를 데려가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래. 알았다. 내가 널 이길 수 있나. 대신 초선이가 칭얼거리거든 네가 좀 잘 돌봐줘야겠다.’
‘물론입니다.’
‘언제 이렇게 컸을까.’
‘…….’
“예전엔 스승님 옷자락을 잡고 울던 어린아이였는데.”
“…그게 언제적 일이랍니까.”
“그냥 오늘 갑자기 보니 어른이 다 된 것 같아서 마음이 놓이는구나.”
갑자기 툭 던진 말이 너무 무거웠다. 이런 말을 안 들어본 것은 아니었지만, 오늘따라 굉장히 새삼스러웠다. 태오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다. 너는 아직 멀었다면서 이제 갓 솜털을 벗은 병아리 같다고 늘 말하던 왕윤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뭔가 먼 길을 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불안한 생각이 들어도 감히 군주가 가는 길을 막을 수 없었다. 그저 무사히 돌아오길 빌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왕윤이 아홉 고개로 떠났다. 갑자기 주인이 떠난 궁은 휑하니 비어서 유난히 더 커 보였다.
왕윤이 떠난 이후 대놓고 모든 사람을 의심하면서 초선이 생활하는 곳 앞을 지키는 남자는 한 사람만 보고 있었다. 신경 쓰는 것은 사마의 뿐이었다. 하지만 초선이 행여 큰일이라도 당한다면 더 큰 일이 생길 것이 분명하기에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많은 병력을 저 곳에 투입하지 않아도 태오가 붙어있는 것만으로 수백의 효과를 낸다. 물론 늘 함께 놀던 여포가 왕윤을 따라가서 실망한 눈치였다.
사마의의 생각대로다, 태오는 그리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날이 새고 다시 밤이 찾아오는 동안 늘 초선 옆에 붙어있었다. 눈치가 빠른 사마의는 그것이 자신에 대한 불안함과 의심에서 시작된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도발하지 않는다. 애초에 태오 장군이 마음먹고 자신을 물고 늘어진다면 귀찮아질 것이 뻔했다. 아무리 궁의 신선이라고 하지만 태오는 그것보다 한걸음 가까운 친족과 같은 사이였다. 물론 차라리 피라도 섞인 편이 나을지 몰랐다. 아무 인연도 아닌 남자가 이렇게까지 가까울 일인 것일까. 애초에 왕윤과 초선보다 중요한 것이 없는 남자이니 차라리 저렇게 얌전히 있어 주는 것이 더 편하다. 사마의는 당장 응룡궁을 무너뜨리고 싶을 뿐이지, 내부 인재를 솎아낼 생각은 없었다.
왕윤은 말을 꺼낸 날에 딱 맞춰서 환궁했다. 한걸음에 달려나간 태오는 군장을 하나하나 제 손으로 받아들면서 무사함을 확인하고 나서야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라는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몰랐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 피곤한 기색은 역력했지만, 크게 다친 곳은 보이지 않았다. 궁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하나 물어보고 나서야 옷을 갈아입으러 간다. 사마의에게 궁의 상황을 보고받기 위한 자리에서도 피곤함을 완전히 털진 못했다. 사마의는 준비해온 차를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제가 응당 따라가야 할 일이었는데. 송구합니다. 큰일은 없으셨습니까.”
“사마의 자네도 고생이 많았네. 아, 그러고 보니 응룡 군주를 만났지.”
“…예?”
“이쪽에서 내가 혼자 처리할 생각으로 굳이 알리지 않고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는데 말이지. 애초에 우리가 관리해야 할 땅이 아닌가. 그런데도 그 먼 길을 도와주러 왔다고 하지 않겠나. 정말 대단하지.”
“…….”
“물론 제갈량이 한소리 했다면서 웃더군. 그쪽 신선도 꽤나 골치를 썩이게 생겼어. 그래서 수월히 끝내고 돌아왔네. 시간이 더 걸릴 줄 알았는데, 하나보단 둘이 낫더라니.”
“…응룡 군주가 어째서.”
“늘 정의롭고 남 돕기 좋아하지 않나. 이번에도 그런가 보지.”
“…….”
“…태오에게도 저런 사람이 하나 있었으면 더 좋을 것 같다 느꼈네. 그 녀석 다 큰 것 같지만 속은 아직 어린애라서.”
“군주께서 무사히 돌아오신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응룡궁도 저 정도로 회복이 된 것을 보니 이제 우리 쪽에 과하게 부과되면 부담도 많이 줄어들 거야. 조만간 한번 더 만나기로 했으니. 이참에 세 군주가 같이 모여서 이야기를 해봐도 좋겠지.”
“너무 사람을 좋게만 보진 마십시오. 그쪽도 나름대로 무슨 수를 내려고 할 테니 말입니다.”
“…아냐. 그 눈을 보면 알지.”
“…….”
왕윤의 말에 사마의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하긴 무사히 돌아왔으면 되는 일이었다. 궁을 떠나있었던 만큼 보고받을 것도 많았다. 그 이야기는 저녁 식사 전까지 이어졌다. 여독을 푸시라며 사마의가 만류했지만 들을 왕윤이 아니었다. 이럴 땐 꼭 군주의 조건 중 고집이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곤 했다. 유비가 어떻게 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왕윤은 그것까진 사마의에게 말하지 않았다.
“…사마의.”
“예. 태오 장군.”
“사숙은 별일 없으신가.”
“이렇게 걱정하실 줄 알았다면 같이 들어갈 것을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
대놓고 태오를 놀리는 말투를 못 알아볼 리 없었다. 태오는 오만한 신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마의는 그 이상 시비를 걸지 않았다. 다만 지나치려 하다 다시 말을 붙일 뿐이었다. 태오로서는 왕윤이 해줄 리 없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창구가 한정되어 있기에, 사마의의 말을 모두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차라리 조금이라도 힘이 있다면. 그런 생각을 했다.
“아, 맞다.”
“뭐지?”
“주군께서 아홉 고개에서 응룡궁 군주를 만났다고 하시더군요,”
“유비?”
“예. 이젠 좀 살 만하신가 본지 굳이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그곳에 나타나서 함께 아홉 고개 마수를 퇴치하셨다고 하셨습니다.”
“…….”
“두 분이 아홉 고개에서 독대하신 것 같은데, 자세한 일은 이야기를 하지 않으시니 저도 알 길이 없습니다.”
“뭐지.”
“저도 응룡궁의 의중을 모르겠습니다. 제갈량이 그런 곳에 주군을 보낼만한 성격이 아닌데…….”
“…….”
“아마 미리 이야기가 된 수가 아닐까 합니다.”
“…….”
“이젠 이쪽도 견제하려는 것이겠죠.”
태오의 표정이 구겨진다. 견제라니. 도통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다 무너져가던 응룡궁을 대신해 밤낮으로 움직이던 곳은 이쪽이었는데. 도대체 언제부터 저런 식으로 행동할 수 있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물론 사마의는 거짓말을 하진 않았다. 그저 진실을 아주 살짝 비틀어서 전했을 뿐이었다. 물론 이런 태도가 주변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은연중 그런 것을 바라는 사마의는 굳이 태오의 오해를 바로잡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왕윤은 더 바빠졌고, 유비와도 자주 만났다. 제갈량은 단 한 번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유비는 둘이서 만나려고 일부러 신선을 놔두고 왔다는 식으로 말하곤 했다. 아마 서로 불편해할까 봐 그런 것이겠지만, 왕윤은 그저 웃고 말았다. 유비와 왕윤이 많은 이야기를 하는 만큼 태오의 머릿속엔 오해가 쌓여갔다.
하지만 감히 왕윤에게 다른 군주를 만나지 말라고 할 수 없었다. 벙어리가 냉가슴을 앓듯. 태오는 뜻 없는 오해로 내내 속을 앓았다.
**
“…….”
늘 바쁘던 왕윤의 행보가 어느 순간 뚝 멎었다.
몇몇은 드디어 만족하신 모양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실제로 왕윤은 무관 출신이기에 안에서 서류를 보는 것보다 바깥에서 움직이는 쪽을 더 좋아했다. 그렇다고 해서 궁의 살림을 제대로 꾸리지 못한다는 말은 아니었다. 왕윤의 행보가 그렇게 특출난 것도 아니기에 별다른 일 없이 언제나 그런 날이 지나고 다시 새로운 해가 돋아났다.
“사마의를 불러라.”
“예, 군주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너 혼자 조용히 가서 신선을 불러오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그래. 어서.”
작은 시동이 급하게 뛰어간다. 왕윤은 한숨을 쉬면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사마의는 꼭 이런 연락이 올 것처럼 책상에 앉아있었다. 급한 목소리가 들리자 약간 뜸을 들인 후 밖으로 나갔다. 급히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어린 시동이 고개를 푹 숙인다. 궁의 신선은 놀란 기색조차 없이 뒤를 따랐다.
“무슨 일이라고 말하진 않으셨는가.”
“예. 그저 사마의님을 모셔오라고.”
“…….”
“전 잘 모릅니다.”
“그래. 알았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극비에 붙여진 일이라 왕윤을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는 태오 장군조차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사마의는 아이의 급한 걸음을 따라 자신도 조금 서둘렀다. 급하게 왕윤의 침실로 달려온 사마의는 놀라서 그 자리에 우뚝 설 수밖에 없었다. 침실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는 왕윤은 어두운 밤기운에 푹 잠긴 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주군?”
“소리 내지 말고 들어와라. 사마의.”
“예.”
“…….”
“어찌 불조차 켜지 않으셨습니까. 아니지. 지금쯤이면 침소에 드셨어야 하는 것을…….”
“…….”
“주군?”
“사마의.”
“예.”
“지금부터 보는 모든 것을 입 밖으로 낼 시 아무리 봉황궁의 신선이라 하더라도 내가 용서치 않을 것이다. 내 말 알아들었는가.”
“예. 주군.”
“…….”
“무슨 일이신지 감히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도통 이런 일이 없던 터라 소신을 그저…….”
“…….”
“명을 받들겠습니다.”
왕윤은 대답하지 않는다. 신선은 그 의미가 무엇인가 쉽게 알아차린. 군주가 손짓하자 사마의가 가까이 다가온다. 사마의는 조심스럽게 촛대에 불을 붙인다. 일렁이는 불꽃이 간신히 어둠을 밀어낸다. 그러자 희미한 불빛 아래 이곳저곳에 나타난 검붉은 반점이 보인다. 이미 팔까지 보일 정도면 심각한 상황이었다. 사마의는 놀랐지만 놀라지 않은 것 같았다.
“…주군 이건.”
“짐새의 독이군.”
“…….”
“내가 왜 이걸 몰랐을까. 이 상태가 될 때까지.”
“…….”
“응?”
“그거야…….”
“사마의. 난 지금 자네에게 묻고 있지 않은가.”
“…….”
왕윤의 목소리는 점점 서릿발처럼 변한다. 화를 내지도, 그렇다고 소리를 치지 않았다. 타고난 군주의 권위는 다 죽어가는 모습으로도 절대 사라지지 않았다. 사마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태도를 보아하니 오히려 어설프게 변명하는 것은 제 목을 죄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굳이 말을 하지 않았다.
“짐작이 가는군.”
“…….”
“안 그런가. 사마의.”
“무슨 말을 하시는지.”
“…….”
“이 신선은 모르겠습니다.”
“…….”
애초에 대답할 사람도, 그렇다고 질문을 할 사람도 없는 만남이었다. 그저 서로 짐작한 것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왕윤은 이제 나가보라는 듯 손짓을 한다. 사마의는 두말없이 그 명령을 따랐다. 나눈 대화는 얼마 없었지만, 둘 사이에 무슨 생각이 오갔는지는 확실해졌다.
**
“정말 제가 그렇게 말씀을 드렸는데…….”
“미안해 제갈량. 하지만 지금까지 받은 은혜는 갚아야 하잖아.”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자꾸 벌컥벌컥 뛰어나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
“제가 제발 걱정 좀 덜하게 해주세요. 신선 말라죽길 바라시는 걸 아니실 테죠?”
“잘…돌아왔으면 됐지 뭐.”
당당한 모습과는 다르게 목소리는 자꾸 기어들어 간다. 하긴 제갈량이 펄펄 뛰는 것도 이해가 간다. 갑자기 어디서 기운을 읽었는지 왕윤님을 도우러 가야 한다는 소리를 했다. 신선은 반대했지만, 주군의 고집을 도통 꺾을 수 없었다. 기운을 계속 속으로 품고 있으면 오히려 위험할 수 있으니 적절하게 풀어주는 것도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은 아니었다.
유비의 고집을 꺾지 못한 제갈량은 몇 번이나 부탁했다. 몸을 보하는 술을 몇 번이다 다시 걸었다. 하지만 혹시 모를 폭주에 대비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왕윤의 힘에 기대기로 했다. 어차피 어느 정도 군주끼리 힘의 상쇄하면서 견제하는 것은 당연한바. 혹여 유비가 그 자리에서 폭주한다면 충분히 왕윤이 제압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유비가 떠나고 제갈량도 홀연히 궁을 비웠다. 군주와 신선이 동시에 자리를 비운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렇게 자리를 비웠던 신선은 유비가 돌아오기 며칠 전 모습을 드러냈다.
“과하게 힘을 쓰지 말라고 말씀드렸는데…….”
“그래도 거기서 어떻게 그래.”
“지금 힘을 버티지 못하고 피부가 갈라지고 있는 것은 보이지 않으십니까. 충분히 무리하고 계시는 것이 맞습니다.”
“…….”
“이쪽은 어쩔 수 없겠네요.”
“응?”
유비의 손에 천으로 치료를 하던 제갈량이 한숨을 푹 내쉰다. 머리에 내려앉은 녹색의 머리카락이 한숨을 읽는 컷처럼 흔들렸다. 주군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웃기만 한다. 이렇게 다친 것도 가슴이 떨어지는데, 왜 자꾸 험한 곳으로 가려고 하는지. 물론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반대할 순 없었다. 군주가 가는 길이 곧 신선의 일생이었다.
“제가 제 명에 사려면 지금보다 더 건강하고 똑똑해야겠습니다.”
“제갈량은 지금도 똑똑한데…….”
“가만히 계세요. 상처가 덧날 수도 있으니까요.”
“…….”
손의 상처는 어쩔 수 없었다. 힘을 사용하면서 견디지 못한 것이 화근이니 이쪽은 신선이 감당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제갈량이 단정한 얼굴로 주군을 바라본다. 이럴 때마다 자꾸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유비는 괜히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서 손끝을 꼼지락거린다. 애초에 이다음 행동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더 부끄러웠다.
“…….”
“제갈량…….”
늘 그랬던 것처럼 눈가에 입술을 가져다 댄다. 제갈량은 꼭 얼굴에 난 상처를 먼저 수습하려고 한다. 눈가에 따뜻한 입술이 닿자 눈꺼풀이 저절로 파르르 떨린다. 처음엔 유비가 놀란 것 같으면 물러서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오히려 익숙해지라고 하는 것처럼 천천히 진득하게 붙어왔다. 눈가에서 시작한 접촉이 콧대를 따라 입술로 이어진다.
“으응.”
“보채지 마세요.”
“…….”
“…유비 님.”
제갈량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심장이 쿵쿵 뛰다가 죽은 듯 조용해진다. 제갈량의 몸에 하나둘 상처가 새겨지기 시작한다. 신선은 피가 흐르지 않으니 다행이라 해야 할 정도로 많은 수였다. 유비는 자신의 상처를 눈으로 보고 나서야 아주 약간 반성을 한다.
“이 정도면 되었습니다.”
“제갈량…….”
“화려하게 몸을 쓰셨군요. 응룡의 힘에 직접 닿은 부분은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손을 쓸 수 없습니다.”
“아냐. 괜찮아. 사실…….”
“예?”
“사실 이렇게까지 제갈량이 힘써주지 않아도 되는데…….”
“의미가 여러 가지가 있겠죠.”
“…….”
제갈량은 늘 의미를 알 듯 말 듯 한 소리를 한다. 유비는 괜히 입술을 꾹꾹 누르면서 얼굴만 붉힌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아서 지켜보는 제갈량은 나름 흥미로운 눈길을 보냈다. 제갈량의 말엔 수많은 감정이 함축되어있다. 하지만 유비는 그런 복잡한 감정을 하나하나 헤아리지 못했다. 그래서 늘 한걸음 늦게 의미를 알아차리곤 했다.
“그저 주군이 편하셨으면 합니다.”
“그래도. 그러면 네가 힘들잖아.”
“절 뭐로 보시나요. 전 선계 최고의 신선입니다. 이정도야 금방 낫겠죠.”
“…미안.”
“아닙니다. 제가 농담이 심했습니다. 굳이 주군께 사과를 받으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
제갈량이 유비 앞에서만 이렇게 말이 많아진다는 것을 이젠 알아차릴 때도 되었다. 하지만 유비는 이런 쪽으로 약간 느렸고, 제갈량은 지나치게 빨랐다. 삐걱거리면서도 어떻게 굴러가는 것을 보면 신기하긴 했다. 제갈량의 얼굴에 이리저리 상처가 수북하게 얹혔다. 괜히 미안한 마음에 유비는 손으로 제갈량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러면 신선은 조용히 눈을 감은 채 그 손길을 얌전히 받았다.
“신선은…힘든 거구나.”
“아닙니다.”
“그래도 제갈량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저도 유비 님이 계셔서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
그 순간 제갈량의 입술에 뭔가 툭 닿았다가 떨어진다. 제갈량의 눈이 동그랗게 변하기도 전에 화드득 물러선 얼굴은 또 잔뜩 새빨갛게 변해있었다. 제갈량은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굴면서도 이런 쪽으론 면역이 없었다. 눈가가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을 애써 무시한다.
“매일 고생하니까…….”
“…….”
“제갈량도 매일 하잖아. 뭐…그렇게 특별한 것도 아니고.”
“하지만…….”
“응?”
“조금…놀라니까 다음부턴 말씀을 좀…….”
“제갈량 얼굴 그렇게 된 거 처음 본다.”
“…….”
이젠 더는 같은 이유로 유비를 놀릴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대화의 주제를 바꿔보기로 했다. 제갈량은 소매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낸다. 그러더니 침상에 조심히 내려놓았다. 유비는 갑자기 제갈량이 내민 선물에 눈만 깜박거렸다.
“인간계에 놔두고 온 마초를 찾아왔습니다.”
“마초!”
“주군께서 출타하신 김에 다녀온 것이니 멋대로 궁을 비웠다고 혼내진 마시지요.”
“어떻게…알았어? 마초가 있는 곳.”
“주군에 대해 제가 모르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적당히 짐작했을 뿐입니다.”
“…….”
“인간계에서 각성하지 못하고 계실 때 머무시던 곳에 있더군요. 다행히 아직 깨어나지 못해서 아무 일 없이 들고 올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
“거기다 두고 올 생각을 하시다니. 정말…….”
“…….”
“정말 신의 한 수를 두신 것인지. 아니면 그저 잊어버리신 것인지 알고 싶네요. 지금 여쭈어봐도 완벽한 대답은 되지 않겠지만요.”
천천히 살아나는 마초를 보는 유비의 표정이 한층 밝아진다. 하긴 유비도 많은 일을 겪어서 마초를 찾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제갈량은 이러나저러나 유비가 웃는 편이 좋았다. 늘 행복하게 웃어야 하는 사람이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싶진 않았다.
“오늘은 약을 드셔야 합니다.”
“뭐?”
“어쩔 수 없습니다. 전 할 일이 있어서 먼저.”
“…….”
“손이 회복되는 동안은 힘을 쓰진 마세요. 지금이야 버텼지만, 어떻게 죌지 모르니까요. 차라리 그 시간에 무술 연습을 하시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알았어!”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저녁에 같이 밥 먹을까?”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녀와. 제갈량!”
금방 기분이 좋아진 채 제갈량을 배웅한다. 사실 제갈량은 딱히 유비와 떨어지고 싶진 않았지만, 이렇게라도 의식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제갈량은 확실한 것을 좋아하고 흐릿한 미래를 원치 않는다. 그러기에 유비와 함께 있을 때 흔들리는 감정이 두 사람에게 미칠 영향을 두려워했다. 물론 최선을 다해 자신의 애정을 표현하고 있지만. 신선과 군주는 태어난 사정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혼란한 머리를 정리하며 오늘은 밀린 문서를 정리하기로 한다.
첫사랑을 앓는 신선은 예전보다 조금 들떠있었다. 이런 감정을 옥새가 만들지 않았을 텐데.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제갈량은 가볍게 웃으면서 걸음을 옮겼다. 온몸에 들어앉은 상처가 쓰리고 아팠다. 그래도 유비가 앓아눕는 것보단 이쪽이 훨씬 나았다. 물론 신선이 꼭 이런 식으로 주군의 상처를 옮겨오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겠지. 유비는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제갈량은 유비의 성격을 잘 안다. 허둥지둥하면 해야 할 일도 그르치게 된다. 유비는 찻잔을 움켜쥔 채 말을 고른다. 하지만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도무지 어디서부터 이 실타래를 풀어야 할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데굴데굴 눈동자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
그런 유비의 모습을 보던 제갈량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물론 이런 식으로 주군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말하는 것은 누가 보면 펄쩍 뛸 일이었다. 하지만 이 상태로 계속 앉아있으면 밤을 새워도 모자랄 것 같았다. 복잡한 실타래를 풀기 위해 조금 도움을 주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주군.”
“응? 어…왜?”
“무사히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신 것을 다행입니다만, 아마 이렇게 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정말?”
“인간계에서 오래 계신 것도 크지만, 사기 혹은 사술에 노출되신 것이 큰 것 같습니다.”
“…사술?”
“예. 보통 인간계에선 잘 일어나지 않는 일이지만…….”
“…….”
“제가 직접 본 것이 아니니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 그것부터 이야기할까?”
“예?”
유비는 이제야 가장 먼저 이야기할 것을 찾은 모양이었다. 제갈량은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유비는 찻잔을 꾹 쥐었다가 다시 놓았다. 이 긴 이야기의 끝은 어디일까.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 모두 맞는 일일까. 이렇게 생각하니 모든 것이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이미 유비 개인의 문제가 아닌 궁 전체가 괴멸할 뻔한 사건이었다.
“여행을 떠나고 얼마 안 있어서……”
“…….”
“습격을 당했어.”
“네? 그럴 리가. 누가 감히 궁의 주인에게.”
“나도 몰라. 제대로 보이지 않고. 꼭 검은 안개에 가린 것처럼 눈이 보이지 않았고.”
“…….”
“그리고 그때 한번 죽었지. 아니 죽을 뻔했구나.”
“…….”
“처음이라 다들 꼼꼼하지 못했나 봐. 그래서 그 잠깐의 틈을 보고 영혼을 옮기는 형식으로 인간계에 숨어들었어.”
“…….”
“그 누가 군주에게 덤빌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 신수를 데려가지 않은 것. 제갈량은 궁에 두고 온 것. 모두 내 잘못이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갈량의 목소리엔 비통함이 묻어났다. 이제야 알게 된 비어버린 시간의 조각이 심장에 비수처럼 박혔다. 도대체 저런 일을 왜 몰랐을까. 누가 장난을 쳐서 하늘의 눈을 가렸는가. 가슴이 옥죄는 것 같아 숨을 쉴 수 없었다. 고통 다음엔 분노가 찾아왔다. 주먹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오히려 그런 제갈량을 보는 유비가 오히려 침착해진다.
“그렇게 인간계에 숨어들었지. 그런데 꼭 기억을 찾을 정도가 되면 그들이 다시 찾아왔어.”
“…….”
“웃기지. 꼭 알고 있는 것처럼 점점 집요하게 움직이더라고.”
“…….”
“그리고 다시 옮겨가고. 또 옮겨가고.”
“그래서…….”
“이러다 보니 점점 기억을 되찾는 기간이 느려지고, 힘도 그렇고. 이번이 아마 마지막이었을 거야. 다행히…서서가 찾아와줬지만.”
“왜 제겐 아무런 이야기가 들리지 않았을까요.”
“…….”
“어떻게…신선이 된 자가. 주군이 그런 식으로…….”
“제갈량 탓이 아니야. 아까 말했지. 사술이 있었다고.”
“…….”
“신선이라면 당연히 몰랐을 테니까.”
제갈량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심장은 분노로 일렁이는데 머릿속은 놀랍도록 차분해진다. 이제야 비어버린 기억의 조각이 하나하나 맞춰져 간다. 도대체 이 시간 사이에 끼어 들은 것이 누군가. 그러고 보니 특정 시기에 인간계에 마물이 날뛴다는 보고를 받은 기억이 났다. 물론 그동안 칩거하는 터라 다른 궁에서 지원을 나갔다고만 알고 있었다.
“…….”
“제갈량. 왜 그래?”
“아뇨. 조금 더 생각해볼 일이 있어서요.”
“그래도 이렇게 돌아왔으니 다행이지?”
“당연한 소리를 하십니다. 주군이 계셔야 궁이 유지되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슬슬 봉황궁이랑 백호궁도 가봐야지.”
“아직은 몸을 좀 더 보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아냐. 다들 내 귀환을 알고 있는데 언제까지 궁에 숨어있을 수는 없지.”
“하지만…….”
주군이 다치시면. 저는. 제갈량은 차마 말을 맺지 못한다. 신선이 가지는 감정보다 상위의 것이 이리저리 섞여 들어간다. 물론 신선에게 군주를 막을 권한 따윈 없었다. 그래도 아직은. 그나마 안전한 궁의 보호 아래 있기를 원한다. 한 번 잃을 뻔한 사람이었다. 간신히 다시 돌아온 분이었다. 조금 과보호를 한다고 해서 그 누가 손가락을 할 리 없었다.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고 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주군이 걱정되어서 싫습니다.”
“…….”
“또 사라지실까 봐. 차라리 이곳에서 계속 계셨으면 합니다.”
“제갈량…그건.”
“네. 제가 지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것도 충분히 알고 있죠.”
“…….”
“이런 말을 할 정도로 주군이 다른 궁의 영지로 가는 것이 싫습니다.”
“괜찮아. 백호 궁엔 손책이 있고, 봉황궁은 다른 쪽은 몰라도 왕윤 님이 계시는걸.”
“사람을 너무 믿는 것도 그리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왕윤 님은…괜찮아. 제갈량이 걱정할만한 일은 하지 않을게.”
“그리고 절 여기에 떼어두고 가시겠죠.”
“…….”
정곡을 찔린 표정이었다. 제갈량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유비를 바라본다.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히자 유비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허둥지둥 말을 잇는다. 물론 이렇게 말을 하면 보통 이리저리 꼬여서 결론적으론 별로 볼 것 없는 말이 되곤 했다.
“그야. 내가 제갈량이 싫어서 그러는 것이 절대 아니고.”
“…….”
“저번에 왕윤 님도 혼자 오셨잖아.”
“…….”
“그…근데 내가 신수며 신선이며 주렁주렁 달고 가봐.”
“…….”
“다들 뭐라고 생각하겠어. 안 그래? 서로 믿지 못한다고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잖아.”
“그 당시와 지금은 다르다고 생각하는걸요.”
“물론 왕윤 님이야 별다른 소리를 하지 않으시겠지. 주변 사람 문제란 소리야.”
“아…….”
“내 말 맞지? 그러니까 빨리 다녀올게.”
“…….”
“아이참. 제갈량. 그런 표정을 하고 있으면 내가 잘못 한 것 같잖아.”
“…….”
“…응? 표정 풀어. 금방 온다니까?”
“…….”
“이젠 힘도 어느 정도 돌아왔고, 제갈량이 도술도 걸어줬으니 내 몸에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아차릴 수도 있잖아.”
“어차피 제가 말려도 고집을 꺾지 않으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미안.”
“신선이 군주가 가는 길을 방해할 수 없는 법.”
“그런 뜻은 아니었어.”
“알고 있습니다. 부디 무사히 돌아오시길.”
“배웅 안 해줘?”
금방 또 어리광이 늘었다. 제갈량은 허탈하게 웃고 만다. 그제야 다 죽어가던 표정이 나아진 유비는 괜히 따라 웃었다. 사실 유비가 한 말이 다 맞는 말이긴 했다. 하지만 그 예절과 법도보다 제갈량에겐 유비의 안위가 더 소중했다. 그런 것을 하나하나 따지다가 주군을 다시 잃어버리느니 무례한 쪽이 훨씬 나았다.
“그래도 영 마음이 놓이지 않으니 모셔다드리고 돌아가겠습니다.”
“…….”
“이런 주군을 모시고 있는 제 운명이겠지요.”
“정말?”
“싫으시면 그만둘까요?”
“아냐. 괜찮아. 준비할까?”
“예. 저도 준비하겠습니다.”
한순간 훅 풀린 표정을 보며 제갈량은 고개를 숙이며 미소를 지었다. 이리도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주군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남부러울 것 없는 궁의 군주로 군림하면서 늘 이렇게 정에 고파 허덕인다. 그래서 인간계에 자꾸 정을 붙이려고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저 속의 깊음을 어찌 다 헤아리겠느냐마는. 제갈량은 적어도 그 넓은 속에서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섬이 되고 싶었다.
**
“응룡궁 군주께서 여긴 어쩐 일로…….”
“왕윤 님을 만나러 왔지.”
“…….”
“안에 안 계시는가.”
“계시긴 합니다만…….”
봉황궁의 신선도 자존심이 높았다. 신선이 이렇게 군주의 앞길을 막는 것도 쉽게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마의는 뒷짐을 진 채 꼿꼿하게 서서 제갈량과 유비를 바라보았다. 쉽게 들어갈 수 있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이런 식으로 문전박대를 당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오히려 침착한 유비와 달리 제갈량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누굴 하나 잡아 죽일 것 같았다.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놀란 유비가 뒤를 돌아본다. 그리곤 제갈량의 표정을 보자마자 휙 고개를 돌린다. 아무리 오랫동안 제갈량을 알고 지냈지만, 저런 표정은 도통 익숙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사마의는 여전히 비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물러서라. 사마의.”
“이게 누구야. 다시는 얼굴을 볼 줄 몰랐던 제갈량 아닌가.”
“군주의 길을 가로막다니.”
“그야 서로 약속이 없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유비 님은 잠시 물러서 계시죠.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해결?”
제갈량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선다. 그러자 사마의는 코웃음을 친다. 저 방자한 신선이 제 주군이 돌아왔다는 소리에 이리도 신이 나서 앞뒤를 모르고 뛰노는 것 같았다. 어차피 반쪽인 것을. 왜 저렇게 집착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궁에 스스로 유폐한 채 그대로 소멸하는 쪽을 기대했는데, 목숨이 질겨도 너무 질겼다. 그런 사마의의 생각을 읽은 것인지 제갈량의 표정이 한층 더 사납게 변했다. 부채를 쥔 손에서 뿌득뿌득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해결? 제갈량. 허풍 치는 성격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
“궁에 혼자 있다 보니 머리가 약간 이상해진 것이 아닌가.”
“좀 가만히 계시죠.”
“…뭐라?”
“유비님은 당신의 주군을 뵈러 온 것이지. 그쪽과 실랑이를 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
대놓고 사마의를 후려친다. 사마의는 늘 꼿꼿하고 단정한 모습을 유지하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끓는점이 약간 낮았다. 제갈량이 무슨 의도로 저런 말을 던졌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저 녀석이라면 그 생각을 알아주길 바라면서 대화를 이어갈 것이 분명했다. 제갈량은 금방 우위를 점한 채 가늘게 웃기 시작했다. 사마의는 그 말에 한마디도 반박하지 못한 채 분노를 삼키며 부들부들 떨었다.
“무슨 일이지?”
“…태오 장군?”
하필 이럴 때. 사마의는 오늘따라 차오르는 짜증을 억누를 수 없었다. 제갈량에게 한 방 먹은 것도 모자라서 이런 모습을 들키기까지 했다. 정말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태오 장군은 이럴 때마다 뭔가 신념이라도 있는 것처럼 참견하곤 했다. 물론 사마의가 보기엔 그저 자신을 믿지 못하는 일개 장군의 조급함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자꾸 귀찮게 한다면 말이 조금 달라진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
“사마의.”
“응룡궁에서 방문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그야 미리 언질 된 바가 없기에 신선 된 자로 궁을 수호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
“하다못해 주군께 보고해야 하는바.”
“됐다.”
“예?”
“내가 책임지도록 하지.”
“…….”
사마의의 표정이 숨길 수 없을 정도로 변한다. 당장이라도 태오 장군을 공격하고 싶은 마음이 만만이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오는 길을 열고 유비를 바라보았다.
“들어오시죠. 사…아니 왕윤 님껜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
“그대가 나를 의심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에 계속 서 있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응룡궁의 신선이여.”
“그렇긴 합니다.”
“어쩔 셈인가. 내가 여기서 넘어가면 더는 기회가 없을 것 같은데.”
“제갈량.”
“예, 주군.”
“괜찮아. 다녀올게.”
“…….”
제갈량은 좀처럼 의심을 풀지 못했다. 저곳에 유비가 홀로 들어가면 자신은 더는 궁에 출입할 수 없다. 사마의가 지키고 서 있는 한 다른 신선에게 입궁 허가를 내주지 않을 것이 확실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군은 당장에라도 궁 안으로 들어갈 것처럼 굴었다.
“주군. 신중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진심을 보여야지.”
“…….”
“이렇게 해서는 아무것도 진전이 없잖아. 안 그래?”
“…그 진심으로 제가 불안해하는 것을 봐주시면 안 됩니까?”
“응?”
“…….”
“제갈량?”
“아닙니다. 그래도 응룡의 힘이 있으니 일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혹여…무슨 일이 생기신다면…….”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
유비가 제갈량은 덥석 껴안는다. 그리곤 안심하라는 것처럼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준다. 훤칠하게 키가 큰 남자가 악의 없이 하는 행동은 늘 주변을 놀라게 한다. 제갈량도 마찬가지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를 법도 한데, 제갈량은 눈썹을 아주 조금 추어올렸을 뿐 많은 변화가 없었다. 어찌 보면 대단한 인내심이었다. 한참 제갈량을 안고 있던 유비가 한발자국 물러서면서 씩 웃었다.
“다녀올게.”
“…….”
“괜찮아. 나 믿지?”
“솔직히 완전히 믿진 못하겠습니다.”
“…….”
“저번에도 이렇게 말하고 나가셨거든요. 주군.”
“아이참. 그걸 여기서 말하면 어떡해.”
“예,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다녀올게. 괜찮을 거야.”
“네.”
제갈량이 고개를 숙이면서 물러선다. 유비는 사마의를 지나쳐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사마의는 제갈량을 쏘아본다. 당장이라도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은 표정이었다. 태오는 유비가 계단을 올라오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다 한걸음 먼저 앞서기 시작했다. 유비가 봉황궁 안으로 들어서자 문이 스르르 닫히기 시작한다. 사마의는 여전히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군. 사마의.”
“세상 모든 일에서 손을 놓은 채 궁 안에 처박혀 있던 제갈량. 자네만 하겠나.”
“겨우 그것 때문에 이러는 것인가?”
“설마.”
사마의가 낮게 혀를 찬다. 물론 제갈량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예민할 필요는 없잖아. 안 그래?”
“내가 그저 궁 밖의 일이 많아서 이럴 거라 생각하는가. 이거 천하의 제갈량도 이젠 머리가 단단하게 굳어버렸군.”
“더는 할 말이 없네.”
“나도 그렇지.”
서로 이야기가 끝난다. 신선끼리 한 말은 공중으로 흩어진다. 사마의는 무슨 생각인지 곧장 궁 안으로 들어간다. 제갈량은 여전히 사마의를 믿지 못해서 오랫동안 궁 앞을 지키고 있었다.
“…저.”
“…….”
“왕윤 님이 응룡궁에 오셨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
“그땐…….”
“저한테 하실 말은 아닌 것 같군요.”
“…….”
“왕윤 님께 가시면 될 겁니다. 전 그저 이곳 군대를 움직이는 장군이니.”
“…….”
“다른 것을 들을 이유가 없군요.”
“…….”
쌀쌀하게 내려앉은 목소리가 너무 서늘했다. 유비는 절로 고개를 숙이며 앞서 걷는 태오의 눈치를 보았다. 태오를 몇 번 본 적은 있었지만, 좀처럼 친해질 수 없었다. 애초에 서로 관리하는 분야가 너무 다르기도 했고, 태오는 봉황궁 외에 다른 쪽 일은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그래도…….”
“말씀하시죠.”
“아까 도와줘서 고마워요.”
“…….”
“그리고…….”
“다 왔습니다.”
“아.”
“들어가 보시죠. 아마 집무실에 계실 텐데.”
“…….”
“아닙니다. 앞장서죠.”
말끝이 사라지기도 전에 걸음을 옮긴다. 유비는 허겁지겁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그 뒤를 따랐다. 이제 막 복원을 시작하는 응룡궁에 비하면 위엄이 넘치고 단정한 곳이었다. 어쩐지 왕윤의 힘에 그대로 내리눌리는 것 같아서 심장이 답답해졌다.
‘…이래서 제갈량이 걱정을 했나.’
작은 불안이 피어오르다가 이내 사라진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던지 모든 책임은 유비가 져야 한다. 애초에 제갈량은 이번 일을 말리는 입장이었다. 고집을 부린 것은 유비이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이미 이곳에 발을 들인 이상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젊은 군주는 부지런히 발을 옮기며 앞서가는 장군의 뒤를 따랐다.
봉황궁은 응룡궁보다 더 컸다. 애초에 대대로 강건한 군주를 골라서 배출하던 곳이었다. 사마의가 그런 곳에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한참 걸어도 편전이 보이지 않았다. 유비는 자꾸 몸을 감고 늘어지는 봉황의 힘을 열심히 뿌리쳤다. 상극은 아니지만 분명 서로 물고 늘어지며 견제하곤 한다. 몸이 축축 늘어지는 기분에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걸음을 옮겼다.
“사숙.”
“…태오냐?”
“예.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응룡궁에서…….”
“아, 알았다.”
“네.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방문을 타고 넘는 중후한 목소리가 들린다. 안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잔잔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또 초선이 안에 있는 모양이었다. 태오는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유비를 돌아보았다. 미미하게 변하는 표정을 다행히 유비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안쪽으로 가시죠. 모시겠습니다.”
“…아, 알겠어요.”
“궁주께서 같이 계시는 모양이니 바로 접대실로 오실 겁니다.”
“…….”
“이쪽으로 오시죠.”
“응.”
태오는 미련 없이 자리를 뜬다. 유비는 굳게 닫힌 방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안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가족이 있다는 기분은 또 어떤 것이지. 젊은 군주는 궁금함을 숨기지 못했다. 물론 그런 태도가 봉황궁 장군에겐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일개 신하가 궁의 군주에게 큰 소리를 낼 수 없는 노릇이니 그저 빨리 이곳에서 떼어내는 수밖에 없었다. 몇 번 재촉하니 그제야 따라온다.
겨우 유비를 앉히고 한 걸음 물러섰다. 차를 권했지만, 유비는 받지 않았다. 괜찮다고 사양하는 것을 보며 여전히 표정을 풀지 않았다. 눈을 떼면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서 왕윤이 이곳에 당도할 때까지 계속 지켜볼 작정이었다.
“장군은…….”
“예?”
“봉황궁을 좋아하나 보네요.”
“제가 나고 자란 곳이니 당연합니다.”
“…….”
“궁에 속한 이들은 모두 그곳에 애착이 있을 테니.”
“…….”
“곧 오실 겁니다.”
“혼자 오는 것이 처음이라. 갑자기 찾아와서 놀랐죠?”
“군주가 방문하는 것에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
“…….”
“괘념치 마시지요.”
“…….”
유비는 어쩐지 자꾸 주눅이 든다. 제갈량은 그럴 때마다 누누이 잔소리하곤 했다. 세상 모든 것을 발아래에 둘 수 있는 군주가 왜 자꾸 남의 눈치는 보냐고 한다. 하지만 유비는 모든 것을 함부로 대할만한 성정을 지니지 못했다. 물론 다른 군주도 마찬가지지만 유비는 좀 더 그랬다. 그런 와중에 홀로 봉황궁 한가운데 앉아있으려니 자꾸 주변을 살피게 되었다.
“내가 늦었네.”
“오셨습니까.”
“그래. 응룡궁 군주를 이렇게 다시 만나니 기쁘지 그지없군요.”
“오랜만입니다. 왕윤님.”
“허허. 그래도 얼굴이 좋아지셨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유비는 왕윤을 보자마자 잔뜩 긴장한 얼굴이 풀어진다. 조금이라도 익숙한 얼굴을 보는 것이 나았다. 그런 유비를 곁눈질로 보던 태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벌써 바깥으로 나가 궁을 지키는 것이 당연했지만, 오늘따라 그러지 않았다. 꼭 접견실에 있는 조각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태오를 먼저 발견한 쪽은 오히려 왕윤이었다.
“태오?”
“예, 사숙.”
“응룡궁 군주와 둘이서 할 이야기가 있으니 잠깐 자리를 비켜주겠나?”
“…….”
“전 괜찮습니다. 그게…….”
“아닙니다. 태오 초선이를 부탁하마.”
“…네.”
“그래. 아마 네가 오길 기다리고 있을 거야.”
“…….”
왕윤이 말하는 것을 거부할 수 없었다. 태오는 잔뜩 굳은 표정으로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한다. 그리고 바로 몸을 돌려서 발걸음을 옮긴다. 갑옷이 철컹거리는 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을 가만히 듣던 왕윤은 허허 웃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제가 아끼는 아이인데, 아직 혈기왕성해 가끔 이런답니다.”
“아, 예.”
그러고 보니 유비보다 태오가 나이가 더 많은 것 같지만 여기서 뭐라고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응룡궁도 많은 일이 있으셨다지요?”
“예. 저번에 제가 마중을 나갔어야 했는데, 몸이 좋지 않아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무례라뇨. 몸이 좋지 않으면 당연한 것을.”
“…….”
“그래서 오늘 오신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아…그건.”
유비는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하긴 제갈량이 걱정한 부분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유비는 솔직함이 장점이지만 동시에 단점이기도 했다. 왕윤은 교활한 술수를 쓰는 군주가 아니었다. 하지만 특유의 침착하고 강직한 말투로 하는 말을 듣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쪽의 의견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유비는 제갈량에게 걱정을 끼칠만한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주군. 사마의입니다.”
“지금 응룡궁 군주와 독대 중이다. 물러가 있거라.”
“차만 두고 나가겠습니다.”
“…….”
유비가 큰 결심을 하고 입을 열려는 순간 문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꼿꼿하고 자신감에 가득 차 있는 말투. 동시에 자신이 속한 곳이 아닌 다른 모든 곳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자존심. 목소리만 들어도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알 것 같았다.
“괜찮겠습니까?”
“예. 전 괜찮습니다.”
“들어오라. 사마의.”
“예, 주군.”
방문이 열리자 사마의가 직접 차를 내온다. 신선이 이런 식으로 움직이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사마의는 굳이 자신이 직접 챙기고 싶어 했다. 제갈량에게 듣기론 저런 성격이 아니라고 했는데. 유비는 사마의의 뜻밖의 모습을 보면서 약간 의문이 들었다. 이런 것에 절대 익숙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손에 든 차는 꼭 이미 준비된 것처럼 정갈하기만 했다.
“응룡 군주께서 몸이 좋지 않으시다는 소식을 들어 기운을 보할 수 있는 차로 준비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전 물러갈 테니 말씀들 나누시지요.”
“그래. 고맙네. 사마의.”
“아닙니다. 그저 신선의 의무.”
“…….”
“그럼.”
사마의는 다른 생각이 없었다는 것처럼 바로 접견실을 빠져나갔다. 유비는 괜히 찻잔을 만지작거린다. 왕윤은 그런 유비의 모습을 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찻잔들 들어 한 모급 먼저 마신다. 유비가 의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생각해서 먼저 아무 일이 없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유비의 찻잔이 멀쩡하다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다. 왕윤은 궁 안 사람들을 모두 믿고 있었다.
“잠깐 대화가 끊겼는데…그래서 무슨 일로.”
“아, 저번에 찾아와주셨다는 말을 들어서 몸이 움직일 만 해지기에 찾아왔습니다.”
“그런 일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데…….”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인데, 제가 몸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피한 것이니까요,”
“그렇습니까. 그러면 오늘이 더욱 좋은 날이군요.”
“…….”
“정말 듣고 싶은 말은 따로 있으시지 않습니까.”
“아…그건.”
왕윤은 눈썰미가 좋았다. 유비의 희미한 표정을 읽고 바로 속에 다른 뜻이 있음을 알아낸다. 유비는 이 말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했다. 과연 다른 궁 군주에게 이런 답을 구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하지만 하루종일 고민할 수 없었다. 왕윤은 자신을 마주 보면서 앉아있었고, 유비 또한 이곳에 계속 머무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겨우겨우 말을 꺼낸다. 왕윤은 가볍게 웃으면서 유비의 이야기를 들었다. 젊은 군주가 대뜸 찾아와서 하는 말 치곤 조금 낯설었지만, 왕윤은 그 안에 섞인 진심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유비는 방금까지 의심하던 것도 잊은 채 목이 타는지 차를 들이켰다. 왕윤은 가볍게 입술을 대고, 한 모금 넘기는 거로 대신한다. 찻잔이 비고, 약간 남아있는 왕윤의 차는 완전히 식어버렸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왕윤님.”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이군요.”
“시간을 너무 오래 빼앗은 것 같아 민망합니다. 저도 기다리는 신선이 있으니…이만.”
“자주 놀러 오셔도 됩니다. 어차피 궁은 넓고 사람은 적으니까요.”
“예.”
“제갈량에게도 안부 전해주시지요.”
“알겠습니다.”
“밖까지 배웅하겠습니다.”
“….”
물론 그럴 필요 없다고 손사래를 치는 유비를 가볍게 제압한다. 유비는 이상하게 왕윤만 보면 기를 펴지 못했다. 아마 관록이라는 것을 무시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바깥으로 나오니 아무도 없었다. 태오 장군은 아마 궁주를 만나서 간 모양이었다. 당연히 자신을 믿지 못해 앞을 지키고 있으리라 생각한 사마의조차 간 곳이 없었다. 왕윤은 일부러 모든 이를 불린 것이라 설명한다. 유비를 위한 배려였다.
“들어가세요. 이렇게까지 해주시지 않아도.”
“궁에 온 손님을 홀로 보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
군주는 손수 문 앞까지 따라 나온다. 유비는 어쩐지 그런 대접이 민망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빠르게 이곳을 벗어나려 했다. 궁 밖으로 나오자 심장을 옥죄던 기운이 푸스스 사라진다. 이제야 조금 숨을 편히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늘을 찌를 듯한 대문은 단단히 닫힌 채 궁을 지킨다. 유비는 그런 봉황궁을 한 번 더 돌아보고 돌아갈 채비를 했다.
“…어.”
“…….”
“태오 장군.”
“…….”
“여긴 어떻게.”
“…안녕히 가시지요.”
“…….”
분명 일부러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저렇게 완전 무장을 한 채 조용히 그늘 속에 숨어있을 리 없었다. 물론 유비를 해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저. 봉황궁의 안녕과 응룡궁의 군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유비는 그런 직접적인 감정을 모를 정도로 둔감하진 않았다.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으니 가볍게 예를 차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