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히삼/제갈유비] 창공의 전기(蒼空之傳記) 외전 002
+) NOTICE
레전드 히어로 삼국전 2차 연성입니다.
유비와 제갈량 / 조조와 사마의 / 손책과 주유가 각각 궁의 주인과 신선으로 나옵니다.
동양 AU 및 설정 날조가 항상 함께합니다.
본편에서 못했던 이야기와 완결 이후 유장과 유비와 제갈량의 이야기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해당 글은 본편을 읽으셨다는 전제하에 진행됩니다.
적당한 망상과 설정 붕괴가 언제나 함께 합니다 ㅇㅅㅇ)9
write. 환월
“이제 무슨 일인지 들어야겠습니다.”
“…….”
“사실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직접 듣는 편이 나으니까요.”
“…….”
“옥새가 괜히 절 살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애초에 육체를 다시 만들어준다는 것은 그런 의미일 테니 말이죠.”
“그건…….”
“그래도.”
“…….”
“이젠 미련을 내려둘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응?”
“주군을 놔두고 갈 수 없었으니까요.”
“그러면서 그렇게 막아섰어?”
“…….”
유비는 가만히 되물어본다. 제갈량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꼭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궁에 다시 돌아왔을 때처럼 팔을 벌린다. 주군이 어리광이 느셨네요. 제갈량은 대답을 잠깐 반려하면서 그 어리광을 받아준다. 사실 이렇게 주군과 함께 있는 시간이 무엇보다 소중했다.
“주군은 아직도 어린애인 줄 아시는 것 아닌가요.”
“내가?”
“예.”
“아닌데…….”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
“그 목소리가 그립기도 했습니다.”
“아이참. 자꾸 놀리는 거 맞지?”
“…….”
“놀리는 거 맞는구나.”
입술이 비죽 튀어나온다. 키만 길쭉하게 큰 군주는 자신의 몸집이 얼마나 큰지 모르는 강아지처럼 제갈량의 품에 푹 안긴다. 어릴 때 품에 가볍게 안기던 기억만 남아있는 것 같았다. 그런 군주를 받아주는 제갈량의 표정은 하나도 흔들리지 않았다.
“주군 키가 더 크셨나요?”
“응?”
“점점 안아드리기 버거워지는군요.”
“…….”
“그래도 좋습니다.”
“제갈량도 변하는구나.”
“제가요? 신선이 변할 일이 뭐가 있습니까. 그저 옥새가 내려준 생을 살고 사라지면 그만인 것을.”
“…….”
“신선에겐 변화라는 단어가 적합하지 않습니다.”
“아냐. 변했는걸.”
“그렇다면 변화가 아닌 주군과 닮아가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날?”
“예. 주군은 느리지만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분이시니.”
“…….”
“주군을 따르는 저는 그저 그 길을 같이 걸을 뿐입니다.”
“…….”
제갈량이 웃는다. 유비는 신선의 웃음을 본 적이 손에 꼽았다. 물론 모든 신선이 감정이 풍부하지 않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제갈량이 유달리 그런 축에 속했다. 유비가 지닌 최초의 기억을 냉한 얼굴로 걸어오던 신선이었다. 그렇게 만난 신선이 이렇게 웃게 될 때까지 수많은 일이 있었다.
“그래도 제갈량이 웃는 쪽이 좋아.”
“…….”
“마음이 놓이니까.”
“주군이 좋으시다면 저도 좋습니다.”
“제갈량한테 좋은 냄새가 난다.”
“뭐 좋을 것이…….”
“…….”
“아닙니다.”
혹여 주군이 섭섭해할까 봐 말을 아낀다. 품 안 가득 들어찬 몸을 토닥거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대화가 끊어지기 마련이다. 그래도 그 상황이 마냥 좋은 유비는 좀처럼 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냥 이렇게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물론 옥새가 자신을 다시 살린 것을 안다. 그렇기에 이럴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뭐 어떤가. 평생을 욕심 없이 주어진 운명을 따르며 살았는데. 이런 생각조차 하면 안 되는 일일까. 제갈량은 때때로 이런 의문을 가지곤 했다.
“주군.”
“응?”
“이제 슬슬 제게 해줄 말씀이 있지 않으신가요?”
“…….”
“이 이야기만 나오면 입을 다무시는군요.”
“내가 언제.”
“방금도 그러셨습니다.”
“그건…….”
“…….”
“그러니까.”
“…….”
“제갈량…그게.”
유비는 또 말을 빙빙 돌린다. 제갈량은 오늘도 유비가 이런저런 말을 해줄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쉽게 알아차렸다. 제갈량이 알아내고자 하는 일이 있다면 못할 것이 없다. 하지만 이렇게 유비의 입에서 굳이 듣고자 함은 다가올 시간을 최대한 늦추려는 꾀일 뿐이었다. 제갈량이 이런 식으로 나오다니.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주군은 정말 거짓말을 못 하시는군요.”
“…….”
“제가 이 정도로 집요하게 캐물었다면 뭐라고 한점 꾸며서 이야기를 하실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신 점이 더욱 주군답지만 말이죠.”
“…….”
“제가 주군을 떠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고.”
“…….”
“떠날 수 없게 단단하게 잡아주는 줄이기도 하고.”
“…….”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천천히 생각해볼까?”
“그렇게 허비할 시간이 많진 않을 것 같은데요.”
“그래도. 제갈량…다시 보면 해주고 싶은 일이 많았거든.”
“…….”
“응?”
“주군이 원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정말?”
“예. 하고 싶은 일 모두 하셔도 됩니다.”
“다행이다.”
물론 유비가 활짝 웃는 것을 보면 좋았다. 하지만 반대로 그런 웃음 뒤에 얼마나 큰 사건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유비는 남을 속이는 것엔 전혀 재주가 없다. 하지만 올곧게 앞으로 나아가면서 사고를 치는 것은 누구보다 뛰어났다. 그렇게 따지자면 그런 유비를 오냐오냐 키운 것이 제갈량이니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제가 주군이 하고 싶으신 일을 맞춰볼까요?”
“응?”
“저도 그 정도 눈치는 있답니다.”
“…….”
“예?”
“설마. 아무리 제갈량이 똑똑하다 해도 내 마음을 어떻게 알겠어.”
“정말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연하지!”
“좋습니다. 그럼 제가 한번 주군의 생각을 맞춰 보겠습니다.”
“…….”
자신만만하게 맞출 리 없다고 큰소리를 치긴 했지만, 막상 제갈량이 자신을 날카롭게 바라보니 자꾸 뒤통수가 간질간질해진다. 괜히 눈을 피하려고 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무슨 말이라도 한마디 꺼내면 조금 편할 텐데. 제갈량은 간단한 것도 늘 진중하게 대하곤 했다.
“…….”
“…….”
침묵이 계속되자 당황하는 것은 오히려 유비였다. 이리저리 몸을 뒤틀면서 제갈량이 뭔가 말하길 기대했지만, 쉽게 입은 열리지 않았다. 정말 마음을 읽는 능력이라도 있는 것일까. 신선에겐 모두 그런 능력이 있는데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번 의심을 하자 자꾸 엉뚱한 쪽으로 생각이 튀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도 제법 심각해진 유비에겐 제법 가능성 있는 소리 같았다.
“봉황궁과 백호궁에 들리셔야겠군요.”
“뭐?”
“아닌가요?”
“아니…그게.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제가 주군의 마음을 읽은 것이 맞나요?”
“아이참. 제갈량도.”
“…….”
“…틀리다곤 말 못 하겠어.”
“여전히 거짓말엔 서투르시군요.”
“…….”
“제가 맞췄으니 나중에 선물이라도 주시렵니까?”
“선물?”
“예. 저도 한 번쯤 선물이란 것을 받아보는 것도 좋겠네요.”
“좋아! 제갈량이 갖고 싶은 선물을 줄게.”
“약조하신 겁니다?”
“응!”
주군이 이렇게 순수하셔서야. 제갈량은 입술 끝을 비집고 나오는 뿌듯한 웃음을 숨기기 위해 부채를 들었다. 하늘하늘 움직이는 깃털로 입을 가린 채 가만히 유비를 바라본다. 인간계에서 키우겠다며 데려온 강아지와 참으로 많이 닮았다. 아. 그 아이는 어디 있더라. 이쪽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서야 다시 유비와 하던 대화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약속했으니까. 물어봐도 괜찮아?”
“무엇을 말씀이신가요?”
“어떻게 알았어?”
“…….”
“정말 신선한테는 마음을 읽는 능력이라도 있는 거야?”
“…….”
“옥새가 그런 것도 해줘?”
“…….”
“그것도 아니면…제갈량이 똑똑해서 그런 걸까.”
“…….”
제갈량은 대답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주군의 심각함에 잠시 말문이 막혔을 뿐인데, 유비는 그걸 또 금방 알아채고 주눅이 든다. 어떻게 이런 쪽으로만 눈치가 빠르신지. 제갈량의 눈매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이제 무엄하게 주군을 놀리는 것은 이쯤에서 그만두어야했다. 하긴 신선의 몸으로 정도를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자꾸 잊어버린 듯 행동하는 제갈량이 할 말은 아니긴 했다.
“신선이 그런 능력이 있을 리 없지 않습니까.”
“…뭐? 그러면 어떻게 안 거야?”
“그야…….”
“빨리 말해봐. 응?”
“당연히 제 마지막 기억으론 두 군주가 모여 계셨고, 눈을 뜨니 어느 정도 사건이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두 군주께서 개입한 것이 맞는 데다, 응룡궁을 도와주셨다는 말과도 같겠지요.”
“…….”
“게다가 제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시간이 길었으니 주군께서 절 두고 어딜 다니실 생각도 하지 않으셨을 테지요. 그러다 보면 저절로 인사가 늦어지지 않겠습니까.”
“…….”
“그렇기에 응당 해야 할 일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뭐?”
“사실입니다.”
“제갈량. 이러기가 어디 있어~.”
“주군께서 먼저 절 신기한 능력을 쓰는 신선으로 보셨기에.”
“…….”
“조금 장난을 쳤을 뿐입니다. 하지만 선물을 주신다는 말을 잊지 않겠습니다.”
유비는 듣고 보니 그럴싸한 말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놀라웠다. 하지만 이미 약조를 했으니 무를 수도 없었다. 하긴 제갈량은 늘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지. 뭔가 진 것 같아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하지만 제갈량도 알지 못 하는 일이 분명 있었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린 것은 상황에 대한 설명일 뿐.”
“…….”
“봉황궁과 백호궁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인사를 가기 전 준비할 것이 많습니다. 주군께 감히 도와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거야 당연하지. 나 그런 거 잘 해!”
“감사합니다.”
“오늘은 밥 같이 먹을까?”
“주군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만, 신선은 밥을 먹지 않아도…….”
“…….”
“알겠습니다.”
“좋아. 그렇게 하자!”
제갈량은 못 이기는 척 유비의 제안을 승낙한다. 사실 신선이 주군의 말을 거절하는 일은 없으니 승낙이라 하기에도 뭐하지만 말이다. 유비는 제갈량에게 하나라도 더 먹이고 싶어 했고, 한 가지라도 더 해주고 싶어 했다. 정에 고파하는 군주는 주변 사람을 아끼는 것으로 그 쓸쓸함을 억누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마음을 알기에 제갈량도 더는 길게 말을 하지 않았다.
“아픈 곳은?”
“없습니다.”
“기억이 안 난다던가.”
“괜찮습니다.”
“…….”
“왜 그러시죠?”
“아니 늘 아는 제갈량이라서…이제 다 돌아온 것 같아서 기쁘네.”
“저의 따끔한 한마디가 그리우셨다면 얼마든지 해드리겠습니다. 특히 오늘부터 무술 연습을 하시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만…….”
“아냐. 밥 먹자. 제갈량!”
“…….”
“응?”
“주군은…참.”
변하시지 않는군요. 변하면 안 되는 전 자꾸 변하는 것 같은데. 끝까지 말을 하지 않고 꿀꺽 삼킨다. 정신을 차린 후 시간이 지날수록 수많은 정보가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온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지만, 아직은 그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어느 궁으로 가더라도 군주가 직접 요리를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애초에 군주라는 지위가 굳이 손에 물을 묻히면서 살진 않는다. 수많은 권속에 궁에 사람을 들이기 위해 시종을 뽑아서 올려보낸다. 그 숫자를 세자면 천차만별이긴 하다. 허나 아무리 작은 궁이라도 백 명은 충분히 넘을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응룡궁처럼 큰 세력을 지닌 쪽은 정말 턱 끝으로 모든 이를 부릴 수도 있었다. 아무리 그런 대접이 어색한 이라 해도 언젠가는 익숙해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유비는 좀 달랐다.
사람이 그렇게 쉽게 바뀌진 않는 모양이었다. 어느 누가 군주가 직접 만들어준 요리를 먹어본 적이 있겠는가. 제갈량은 몇 번이나 펄쩍 뛰었다. 그런 신선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이는 이럴 때만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렇게 한번. 두 번. 다시 한번. 그렇게 어색한 식사 시간이 이어진다. 그러다 보니 송곳 같은 제갈량 마음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실금을 따라 스며든 익숙함은 생각보다 단단하게 온몸을 얽어나가기 시작한다.
“제가 자꾸 주군을 부려먹는 것 같아 민망하군요.”
“아냐. 절대 아냐. 내가 좋아서 하는 건데.”
“하지만 다른 이들의 눈이 많습니다.”
“…….”
“군주란…무릇…….”
단아한 말끝이 휙 끌려나간다. 마지막 단어를 다 말하지 못한 제갈량은 순식간에 잡아당긴 힘에 앞으로 푹 쓰러진다. 그렇게 닿은 곳은 유비의 품 안이었다. 도대체 주군은 언제부터 이렇게 놀랄만한 행동을 하게 된 걸까. 의도적이어도 놀랄 일이고, 그렇지 않아도 놀랄 일이었다. 제갈량의 눈이 깜박거리는 만큼 유비의 힘이 점점 강해진다.
“여기에 우리 둘 말고 누가 있다고 그래.”
“…….”
“응?”
“주군. 그건…….”
“어차피 아무도 없으니 스스로 해야 한다고 말한 쪽은 너였어. 제갈량.”
“…….”
“맞지?”
“…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번엔 내 말대로 해. 응?”
“…….”
“제갈량. 응?”
“…….”
이럴 때마다 유비는 세상 불쌍한 표정으로 제갈량을 바라본다. 그럴 때마다 솔직히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속일 수 없었다. 눈을 깜박거리면서 눈썹을 축 늘어뜨린다. 꼭 비 맞은 강아지가 불쌍하게 올려다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럴 때마다 없는 심장이 쿵 떨어진다. 아. 위험하다. 신선의 본능이 그렇게 말을 건다. 하지만 제갈량은 온몸에 파고든 유비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 좀 더 맘대로 살 순 없는 것일까. 해선 안 되는 불경한 생각을 하면서 슬며시 웃어 보인다.
“그럴 거지?”
“예. 그러겠습니다. 주군.”
“좋아. 내가 이번엔 제갈량 빨리 일어나라는 의미에서 제일 좋아하는 걸 만들어줄게!”
“…….”
“잠시만 기다려?”
“예.”
“빨리 움직여야겠다. 배고프지?”
그러니까. 신선은 기본적으로 음식을 먹지 않아도 됩니다. 이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 이젠 셀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유비가 좋아하는 표정이니 그만두기로 했다. 애초에 먹지 않아도 살 수 있기에 생각하지 않는 쪽이지. 먹는다고 죽는 것은 아니었다. 굳이 맛을 볼 것이라면 최대만 흡족한 쪽을 택한다. 제갈량이 신선의 삶을 살면서 늘 말하던 부분이었다.
유비가 기분이 좋아지면 제갈량도 그 모습을 보며 행복해하곤 했다. 군주와 신선이라는 연으로 만났다고 하지만, 그 이상의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비록 신선은 군주의 모든 것을 보좌하는 도구라고 하더라도. 마음은. 제갈량은 여기까지 생각하고 더는 깊게 들어가지 않았다. 생각이 많아지면 손끝에 실수가 잦아진다. 아직은 유비에게 해줄 일이 많았다. 참는 것이 특기라고 할 정도로 익숙한데, 고작 이런 일로 모든 것을 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정도가 좋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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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는 봉황궁으로 돌아왔다.
물론 말처럼 쉽게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이미 억지로 힘을 쥐어짜서 버티던 몸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형편 없었다. 하지만 그런 몸으로 조금이라도 더 버티는 것은 오로지 작은 궁주 때문이었다.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신선은 찾을 길이 없었다. 애초에 제대로 된 승계가 아니다 보니 어디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궁을 지키는 대들보가 사라졌다는 것은 그 모든 것을 조조 혼자서 떠받쳐야 한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물론 따지자면 궁의 정당한 후계자는 조조가 아니라 초선이었다. 허나. 아직 채 자라지도 않은 아이에게 이런 짐을 물려줄 수는 없었다. 군주를 정하는 과정에서도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사마휘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비록 그대의 죄는 무거우나. 봉황궁 재건을 위해 그곳에 남아있을 것을 명한다. 다행히 신수도 후계자 곁에 머물고 있으니. 잘 키워서 봉황궁을 물려주도록 하여라.’
‘…….’
‘때가 되면 봉황궁의 신선이 다시 태어날 것이다. 그때까지. 아이를 잘 지키도록 해라.’
그 당시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듣고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을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아주 조금씩 열에 들뜬 머리가 가라앉는다. 그렇게 되고 나서야 무슨 일이 생겼는지 다들 알 수 있었다. 한참 주저앉아 있다가 천천히 일어섰다.
궁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기만 했다. 아차 싶었다. 초선에게 안아주랴. 하고 물었지만 아이는 그새 철이 들었는지 고개를 흔든다. 그런 모습마저 조조에겐 시퍼런 칼날이 되어 심장에 푹 박히고 말았다. 언제부터 아이가 이렇게 눈칫밥을 먹었던가. 그것조차 하나 살피지 못했던 나날이 아까워서 참을 수 없었다.
‘초선아.’
‘응. 아저씨.’
‘아저씨가 안아줘도 괜찮은데.’
‘…….’
‘아저씨는 괜찮아. 그러니까 힘들게 걷지 말고. 응?’
‘…….’
아이가 대답하지 않자 조조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괜히 손을 꼭 쥐어본다. 험한 곳만 다니고 칼을 쥐던 손이었다. 게다가 잔뜩 피가 말라붙어서 볼품없었다. 그 손이 뭐 그리 좋은지 아이는 혹여 놓칠까 봐 몇 번이나 다시 쥐곤 했다. 그렇게 돌아가는 길이 멀고 멀었다. 애초에 모든 힘을 빼앗긴 상태니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는 데다가 아이의 걸음에 맞추다 보니 한없이 느려지기만 했다.
‘초선아.’
‘…응.’
‘늦게 와서 미안하다.’
‘…….’
‘많이 미안해.’
아냐. 그런 거. 아이의 짤막한 대답엔 많은 감정이 스며있었다. 사마휘가 말하길 봉황궁 신선이었던 사마의는 이미 그 지위를 박탈당해 마땅했다. 그런 데다 이미 군주가 무너졌으니 더는 이곳에 신선으로 살아남을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소멸할 것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얌전히 그 시간을 기다리리란 보장 또한 없었다.
이제 이 작은 아이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인데, 모든 것이 무력해 참을 수 없었다. 검 한 자루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 몸이 얼마나 빠르게 회복될 수 있을까. 지금 와서는 아무것도 확실치 않았다. 조금이라도 미래에 대한 보장이 있었으면 했다.
그렇게 따지자면 애초에 봉황궁으로 돌아가면 안 될 일이었다. 그곳은 정말 단 한 점도 둘을 지켜 불만한 방어 체계가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곳에 부득불 돌아가는 것은. 그곳이 둘의 처음이자 끝을 함께할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전 군주의 힘이 아직 남아있는 곳. 조조가 태오였을 무렵 대다수의 기억이 차올라 있는 곳. 초선이 태어나고 자란 곳. 아무리 황폐해진 곳이라 하더라도 다른 궁보다는 숨쉬기 편할 것 같았다.
‘아저씨.’
‘응?’
‘이제 계속 같이 있는 거지?’
‘당연하지.’
‘…….’
‘사숙한테도 가야 하고. 할 일이 많다.’
‘…….’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지킬 수 있으니까.’
아이에게 조조의 말은 퍽 위안이 되는 모양이었다. 누구보다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표정이었다. 사실 조조는 여기까지 말을 꺼내고 살짝 후회했다. 생각해보면 초선을 먼저 데려올 일이 아니었다. 자신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궁도 제법 무너진 곳이 많았다. 그곳이 더 좋아졌을 리는 없으니. 정말 큰일이었다. 오히려 아이가 충격을 받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미치자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이내 조조가 멈춰 서자 아이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다 뒤를 돌아본다.
‘왜?’
‘초선아. 아니 궁주님.’
‘으응. 그런 거 싫어. 초선이라고 불러줘. 응?’
‘…….’
‘응? 아저씨.’
‘그래. 초선아.’
‘응?’
‘아무리 생각해도 많이 위험할 것 같은데.’
‘…….’
‘아저씨가 궁을 정리할 동안만. 아주 잠깐이야.’
‘…….’
‘안전한 곳에 가 있는 것은 어떨까?’
‘…….’
‘초선이가 싫어서 그러는 거 절대 아니야. 그저 걱정되어서 그래.’
‘싫어.’
‘초선아…….’
조조는 자신의 목소리가 이만큼 떨리는 것을 처음 느꼈다. 그 어떤 전쟁에 나가서도 두려움이라곤 모르고 살았던 이였다. 하지만 이제 초선에게 조금이라도 위해가 되는 일이 생긴 하면, 도저히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타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세차게 고개를 흔든다.
사실 아이에게 불안증을 심어준 원인이 자신이니 할 말이 없긴 했다. 이렇게 훌쩍 떠나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 불안을 겪은 아이는 잡고 있는 손을 놓치길 싫어했다.
‘괜찮아. 아직 여포도 있고.’
‘…….’
‘아저씨도 있고.’
‘…….’
‘응?’
조조는 더는 뭐라 할 수 없었다. 하긴 이제 초선에게 무언가 하자고 이야기가 할 수 없었다. 걱정이 되긴 하지만.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아이의 몸이 아픈 것과 마음을 다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위험한 일일까. 아이라고 본 것이 초선뿐이니 이렇다 할 지표가 없었다. 다만. 아이가 불안해한다면 곁에 있는 것이 더 나으리라 생각을 할 뿐이었다.
아마 왕윤이 살아있어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그랬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었으니, 몇 번이나 생각해도 이룰 수 없는 미래였다. 조조는 그럴 때마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왜 이렇게 마음이 허한지. 꼭 새까만 구멍이 뚫려서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차라리 그럴 것이면 감정도 쓸려가게 둘 것이지. 꾸역꾸역 살아남은 감정은 몸뚱이를 잠시라도 편하게 살 수 없게 만든다. 이것이 벌이라면 어쩔 수 없을 것이고, 선물이라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했다.
“돌아가면 뭘 할까?”
“응?”
“아저씨가 지금까지 초선이한테 못 해준 것이 너무 많아서…….”
“…….”
“솔직히 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어.”
“…….”
“그러니까 초선이가 말해주면 안 될까?”
“정말?”
“응. 정말.”
멀쩡한 목소리를 꾸며내는 것도 점점 힘에 부친다.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이젠 거리도 가늠하기 어려워진다. 이래서야 아이를 데리고 한참 헤매게 생겼으니, 이보다 더 당황스러운 일은 없었다. 금방 도착할 것처럼 말한 주제에 이리도 무력하다니. 조조는 이런 상황이 당황스럽기만 했다.
“궁이 예전과 다를 수도 있어. 놀라지 않을까?”
“초선인 그런 거 괜찮은걸.”
“…….”
“정말이야.”
“미안하구나.”
“그런 말 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아이는 누구보다 어른스러웠다. 그러면서도 옆에 서 있는 조조의 손을 놓지 못한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걷다 보니 슬슬 눈에 익숙한 곳이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부터 봉황궁의 영지였던가. 아니면 저쪽부터였나. 광활해서 제대로 눈에 담기지도 않던 영토는 살아날 기운을 받지 못해 조금씩 죽어가고 있었다. 사마의가 조조를 허상 군주로 올리기 위해 이리저리 힘을 끌어다 쓴 탓이었다.
게다가 소진한 힘을 군주가 채워줘야 하는데, 그것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궁에서 흘러나오는 사술과 사기가 땅의 기운을 어지럽혔다. 종래엔 권속을 잡아먹는 것이 그대로 모두 땅에 부담이 되었다. 군주의 자리가 비워진 터라 제대로 회복할 수도 없었다.
“아무래도 여긴 초선이 발이 지저분해지겠다.”
“…….”
“아저씨가 안아줄까?”
“괜찮은데.”
“아저씨가 싫어서 그래. 응?”
“…….”
“어서.”
이번엔 조조가 이겼다. 초선을 안아든 채 질척거리는 땅을 밟았다. 꼭 살아있는 것처럼 느리게 뭉그러지는 흙이 발목을 잡고 늘어진다. 조조의 생기라도 빨아들이려는 것일까. 점차 깊게 빠져드는 발을 어렵게 움직인다. 무르게 무너지는 땅의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졌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버티고 버티다 속부터 무너진 땅은 회복조차 느렸다.
“빨리 돌아가면 좋겠다.”
“…….”
“궁 영지가 넓어서 한참 걸어야 하네. 곧 좋아지겠지.”
“여포는…….”
“아까 초선이 옷자락 안에서 자고 있던걸.”
“그렇구나.”
“어딜 갈까 봐?”
“…응.”
“…….”
초선이 유독 여포를 아끼는 이유는 안 봐도 뻔했다. 왕윤의 마지막 유품과도 같은 신수이니 더더욱 마음이 갈 수밖에 없었다. 조조도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군주를 잃은 여포의 힘이 점점 쇠약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렇게 도착한 궁은 생각보다 더 황폐했다. 이미 절반도 넘는 담장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그러졌고, 그새 자라난 풀은 사기에 물들어 이리저리 엉킨 채 자라났다. 넓은 마당에 깔았던 돌은 하나도 남김없이 금이 간데다. 주저앉은 가옥은 셀 수도 없었다.
애써 초선에게 보여주지 않으려고 품에 꼭 안는다. 단단한 갑옷이 불편할 법도 한데 아이는 조조의 옷깃을 붙든 채 얌전하기만 하다. 아마 초선이 머물던 가장 안쪽 건물은 대부분 건물의 형체를 유지하고 있을 것 같았다. 조조가 아무리 정신을 놓았다고 해도 거기까지 움직이진 않았으니, 그대로 아이에게 따뜻한 이불 하나쯤을 둘러줄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궁을 다시 단장할 때까지 예전에 있던 곳에서 있어야 하겠다.”
“난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은걸.”
“그래. 그럼 거기서부터 시작하자.”
“응.”
“초선이한테 항상 미안해. 아저씨가 좀 더 일찍 정신을 차렸어야 했는데.”
“…….”
“아니다. 이런 이야기도 그만해야겠지.”
“…….”
애초에 모든 것은 자신이 짊어져야 할 일이었다. 아이는 알 필요가 없다. 애초에 어른들의 사정 때문에 이리저리 휘둘리기만 한 불쌍한 궁주가 아니던가. 초선도. 왕윤도. 하나같이 남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는 이들이었다. 조조는 가늘게 한숨을 쉬며 아이를 고쳐 안았다. 비명을 지르며 뒤틀리던 몸이 아주 약간. 괜찮아진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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