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이 이상으로 스티브를 건드릴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자신 외엔 그 누구한테도 보이지 않는 지옥이었다. 예전처럼. 늘 그랬던 것처럼 행동하면 그만이었다. 버키가 어느 한 곳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는 것을 알아챈 스티브는 고개를 숙여 시선을 맞춰가며 웃었다. 어제의 그 날카로운 기운은 오간 데 없고, 해바라기같이 밝고 따듯한 친구가 있었다.
“…버키?”
“응?”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아직 피곤이 덜 풀렸나봐.”
“…….”
“정말이야. 스티브.”
“아닌 거 같은데.”
“…….”
이럴 때만 눈치가 빠르다. 버키는 애써 웃어 보였지만, 친구는 영 못 믿는다는 눈치였다. 그리고 버키의 얼굴을 조목조목 뜯어보고 나서 또 강아지 같은 눈을 한다. 어젯밤 일을 짚어줄까 하다 말았다. 지금 기분이 좋은 것 같은데, 굳이 이 아침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스티브.”
“버키. 괜찮은 거 맞지?”
“물론.”
살짝 말끝을 흐리는 친구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던 스티브는 영 의심쩍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을 보며 웃어주는 얼굴을 보자마자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스티브가 조금 더 다가서니 이불이 줄줄 흘러내렸다.
“…아.”
“…….”
스티브는 자신이 만들어놓은 어젯밤 흔적을 찬찬히 뜯어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불시에 얼굴이 벌겋게 익어버린다. 어젯밤에 봤던 스티브는 꼭 다른 사람 같았다. 이렇게 상반된 반응을 보고 있으면 당황할 만도 한데, 버키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겠지.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불안한 마음을 다독였다. 물론 그 기저엔 캡틴 아메리카는 이렇게 억지로 누군가를 내리누를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당연한 믿음이 깔려있었다. 오히려 그래서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뭘 그렇게 쳐다봐?”
“아니…그러니까.”
“…….”
“…….”
두 사람이 입이 불시에 멎었다. 울긋불긋한 자국을 보고 있는 스티브는 얼굴이 화끈거려서 도통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버키의 몸에 남은 흔적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올 때마다 어젯밤 일이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어떻게 끌고 들어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옷을 벗겼는지. 무슨 말을 했었는지. 이럴 땐 기억력이 좋은 것이 원망스러웠다. 버키가 말하고 움직이던 모습 하나하나가 잔상처럼 눈앞에 맺혀있었다. 그리고 그 기억이 뚝뚝 흘러내리면 눈앞에 버키가 또렷하게 보이곤 했다.
“나도…자연 치유력이라면 나쁘지 않긴 한데…….”
“…….”
“아무래도 센티넬한테 물린 자국은 오래 가나 봐.”
“…….”
“하나도 안 지워지고 점점 짙어지네. 멍이라도 들려나.”
“…….”
버키의 무심한 목소리마저 너무 뜨거웠다. 스티브는 활활 타는 볼을 꾹꾹 누르며 고개를 푹 숙였다. 도저히 제정신으로 친구를 바라볼 수 없었다. 지켜준다는 말을 하고, 며칠 된 것도 아닌데 이런 식으로 일을 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버키와 했던 모든 기억은 이리 또렷한데,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짚을 수 없었다. 어느 순간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화가 났다. 그리고. 아. 절로 눈이 찌푸려졌다. 아무리 화가 났어도 하면 안 되는 행동이었다. 죽을 것 같이 끙끙거리는 스티브를 보던 버키의 입술이 슬쩍 올라갔다.
“재밌어?”
“…….”
그 순간 귓가에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피가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목소리가 귀를 통해 흘러들어왔다. 버키는 눈을 꾹 감았다. 여기서 내색하면 진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을 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미안해.”
“…….”
“버키. 많이 화났어?”
“…….”
잔뜩 움츠러든 금발 청년이 친구의 눈치를 살핀다. 하지만 친구의 눈은 저 멀리 허공에 떠 있었다. 곡 예전에 세뇌당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스티브는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냉큼 버키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버키. 왜 그래.”
“어…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왜 그렇게 멍하니 허공을 쳐다봐.”
“내가 가끔 이래. 머리가 온전하지 못해서.”
저기에 내가 날 보고 있어. 차마 할 수 없었던 말이 목으로 꿀꺽 넘어갔다. 피를 토하며 버키의 옆을 스쳐 지나간 윈터 솔져는 어둠에 몸을 숨긴 채 죽일 듯 버키를 노려보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면 당장 비집고 들어와 이 몸을 차지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서 더 내색할 수 없었다. 스티브는 버키가 윈터 솔져라도 공격하지 못한다. 임무가 아니라면 절대 손 하나 댈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친구에게 이 이상으로 무거운 짐을 지워줄 수 없었다.
“난 괜찮아.”
“웃기고 있네.”
“정말?”
“괜찮으니까, 어제 일도 그렇게 마음에 담아두지 마.”
“…….”
“역시 위선자는 태도부터 다르네.”
“응? 스티브. 스팁. 내 스티비.”
“…버키.”
“이런다고 내가 포기할 것 같아?”
“응. 스티브.”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스티브의 말에 섞여 들어왔다. 점점 미쳐가는 건지. 아니면 실제 상황인지. 버키는 여전히 혼란스러웠지만,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그래도 스티브가 옆에 있고 다독거려주니 마음이 많이 가라앉았다. 점점 흐릿해지는 환각은 끝까지 버키의 머리카락이라도 잡아채려는 듯 허우적거리면서 사라졌다. 핏자국 하나 남아있지 않은 방 안엔 여전히 둘밖에 없었다.
“버키. 내가 정말…미안한데.”
“무슨 일이야.”
“오들도 나가봐야 할 것 같아서.”
“…….”
태연한 척 하려 했는데, 얼굴이 먼저 굳어버렸다. 스티브가 옆에 있어도 슬슬 무의식을 비집고 나오는 환각이 보였다. 이런 상황에 스티브가 없으면 어떻게 될까.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버키의 표정을 찬찬히 뜯어보던 스티브는 한숨을 푹 쉬었다.
“역시 내가 안 가는 것이 낫겠어.”
“…….”
“그렇지?”
“아냐. 스티브. 그럴 필요 없어.”
“버키.”
“괜찮아. 오늘 나도 할 일이 있는 걸.”
“…무슨.”
“저번에 다 못 본 자료를 빨리 읽어둬야지. 빌려온 건데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이곳에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나, 네가 너무 걱정되어서…….”
“괜찮을 거야.”
“…….”
버키는 애써 친구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친구는 걱정이 되어서 떠나지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스티브는 그런 버키를 잘 알고 있었다. 둘은 서로를 너무 잘 알아서 탈이었다. 아무리 상대방을 안심시키려고 해도, 다 아는 성정이니 좀처럼 뜻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일부러 그러는 거 다 알아. 버키.”
“…….”
“그래서 내가 더 걱정하는 거야.”
버키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저번처럼 회담이 있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스티브는 캡틴 아메리카로서 해야 할 일을 굳이 알려주지 않을 것이 확실했다. 아쉬운 듯 버키를 안고 입술로 콧대를 쓸었다. 따뜻한 태양이 온몸을 감싸는 느낌이었다. 한동안 버키를 물고 빨던 스티브가 아쉬운 듯 떨어져 나갔다. 그 순간 빙하기가 찾아온 것 같았다. 버키는 더한 추위가 오기 전에 잠자코 옷을 주워 입었고, 스티브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팔짱을 낀 채 내내 인상만 찌푸렸다.
‘역시 지금 가면 안 될 것 같은데.’
스티브는 어젯밤부터 내내 후회할만한 선택을 하는 것 같았다. 어떤 것을 골라도 나쁜 일이 생기고 말았다. 물론 버키와 몸을 섞은 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건 좋았다. 하지만 그 외에 모든 행동은 있어선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계속 끙끙 앓고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캡틴 아메리카로서 가야 하는 일이 겹치고 말았다.
‘난 어쩌면 좋을까.’
헬리 캐리어에서 단호하게 버키를 떼어내고, 같이 죽으려고 했던 캡틴이 오간 데 없다고 나타샤가 웃을 것 같았다. 물론 그녀가 이런 식으로 반응할 것이란 보장도 없었다. 이럴 때 자꾸 주변에 있던 다른 사람이 생각나는 건 그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어졌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언제 출발하는데?”
“…어? 아침 먹고?”
“언제 돌아와?”
“일이 끝나는 대로. 아마 이번에도 일찍 올 것 같아. 사실 이렇게 와칸다 쪽에 섞여서 움직이는 것도 아직은 위험하거든.”
“그래서 전쟁터에 나가는 것처럼 유니폼을 입지 않는 거네. 캡틴.”
“…그렇게 부르지 마.”
“어째서?”
“너랑 있을 땐 그냥 스티븐 로저스이고 싶어서.”
“…….”
버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가 그렇다고 하는데 굳이 고집을 피울 필요는 없었다. 스티브는 언제나처럼 친절했고, 부드러웠다. 늘 하는 말이었지만, 버키는 그런 태양 같은 스티브를 거부할 수 없었다. 식물은 빛을 따라 자란다. 빛이 없으면 식물은 길쭉하게 키만 웃자라버리고 만다. 그리고 있는 힘것 몸을 틀어 태양을 따르려고 한다. 둘의 관계는 꼭 그것과 같았다.
“얌전히 할 일 하고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넌 지금까지 일을 보고도 그렇게 말하더라.”
“그렇게라도 해야지.”
“…….”
“내가 좀 편해.”
슬쩍 흘린 진심에 스티브는 웃고 말았다. 걱정하면 되는 일도 안 될 처지기에, 그냥 버키의 말을 한 번 더 믿어보기로 했다. 괜찮을 거야. 괜찮겠지. 계속 이런 생각을 한다.
“나 없는 동안 뭘 할 건데?”
“센티넬과 가이드에 관한 책을 계속 읽어야지.”
“…….”
“난 센티넬과 싸워야 해. 스티브.”
“…….”
“그러려면 그것의 실체를 알아야 하고. 물론 거기까지 가는 일이 어렵겠지만, 포기하고 싶진 않아.”
“나도 그 마음 잘 알아. 버키.”
“…….”
“나도 그랬어.”
오랜만에 또 과거 이야기를 한다. 군데군데 불에 탄 것처럼 구멍이 숭숭 난 낡은 일기장을 넘겨보던 브루클린 소년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