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오늘따라 말이 없다. 흠. 흠. 몇 번 헛기침하고, 잘 닦아서 반질거리는 자신의 구두 코만 내도록 바라보았다. 그런 남자 앞에 서 있는 집사는 좀처럼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웨인 부부가 갑자기 떠난 후 이 넓은 집안을 한 톨 먼지 없이 관리하던 관리인에게도 이번 일은 꽤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도대체.”
“…….”
“…제가 물론 이제 슬슬 후사를 생각하셔야 한다고 말하긴 했습니다만.”
“알프레드. 그.”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주인님.”
“…….”
뭐라 한마디 거들어보려던 남자는 또 입을 꾹 다물어버린다. 물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긴 했다. 하지만 뭐라도 한마디 항변을 해야 할 것 같았다. 화려한 가십 기사가 휘몰아치는 한가운데 당당히 서 있던 남자는 어디 갔는지, 큰 덩치는 오늘따라 작아 보이기만 한다.
“미리 말을 해주셨어야죠.”
“…그걸 말면 내가 그랬을까.”
“…….”
“나도 몰랐어.”
“…….”
“…그.”
남자는 슬슬 답답해진다. 사실 뭐가 그렇게 잘못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미성년자도 아니고, 성인이었다. 서로 마음이 통하고 의사가 확실했는데 꼭 사고 친 십 대가 집으로 끌려들어 온 모양새였다. 지금까지 수많은 스캔들은 어떻게 봤는가. 브루스는 이 한마디가 하고 싶었지만, 굳이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긴 싫었다.
이렇게 혼나는 기분이 들었던 적이 있을까. 기억조차 가물가물했다. 알프레드는 늘 단호하게 브루스를 가르치긴 했지만, 이렇게 혼내는 투로 말하진 않았다. 게다가 지금은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서 어른이 되고도 한참 남은 시점인데. 브루스는 왜 절로 고개가 수그러드는지 아직도 알지 못했다. 마음으론 전혀 잘못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신발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어디 계십니까.”
“그러니까 내가. 응?”
“…설마.”
“내가 그렇게 예의 없는 사람은 아니야.”
“당연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하지만 미리 말해주셨다면 더 좋았을 텐데.”
“…내가 잘못했어. 잘못했네.”
브루스는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물론 알프레드가 한 말은 구구절절 맞았다. 선을 넘으면 그건 더는 둘 사이의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집안과 집안의 일이 되고 만다. 특히 손이 귀한 웨인가는 더했다. 알프레드는 브루스가 막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 늘 가족을 만들어야 한다고 한마디씩 첨언했다. 물론 작은 도련님이 너무 외로움을 타는 것도 있었지만, 둘이 지내기엔 이 저택은 너무 넓었다.
‘그랬는데.’
늙은 집사의 입가에 미미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렇게 이리저리 주선하고 자리를 만들었을 땐 그렇게 피해 다니기 일 수였던 도련님이었다. 몇 번이나 상대방을 바람맞히고 나자, 더는 자리를 주선하기도 힘들었다. 그리고 그 이후론 계속 배트맨으로 자경단 활동을 했다. 돌아온 박쥐가 카울을 벗으면 온몸에 화려한 상처가 가득했다. 다친 상처를 싸매던 집사는 입 밖으론 내지 않았지만, 반쯤 가문을 잇는 것을 포기하고 있었다. 브루스는 자경단 활동을 하면서 살기도 바쁜 양반이었다.
“저도 모르게, 언제부터 두 분이 그렇게.”
“…그게 말이네.”
브루스가 어쩐 일로 말을 아낀다. 알프레드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브루스는 집사를 이기지 못한다. 게다가 자리를 피할 수도 없었다. 꼭 부모 앞에서 첫 데이트를 들킨 아이마냥 구구절절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상대가 들으면 큰일 날 소리였지만, 어쩌겠는가. 몇 번이나 말했지만, 브루스는 알프레드 앞에만 서면 늘 작은 도련님으로 돌아가 버린다.
“제가 들으면 놀랄만한 사실인가요?”
“…그게. 음.”
“주인님이 이렇게 뜸을 들이시는 걸 보니, 이 집사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자네는 내가 반쯤 죽어서 케이브에 도착해도 놀라지 않고 응급처치를 했던 사람이네.”
“그건 이번 일이랑 다른 종류입니다.”
집사의 엄살에 브루스가 눈을 가늘게 흘긴다. 자꾸 저러면 안 그래도 어려운 말이 점점 꺼내기 힘들어진다. 물론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집사는 기분이 좋은 김에 자꾸 브루스를 놀리고 있었다. 그걸 말면서도 할 말이 없는 남자는 미간을 구긴 채 한숨만 푹푹 쉬었다.
“늘 말하지만 내 나이가 미성년자가 아니네.”
“물론입니다. 알고 있죠.”
“정말 못 이기겠군.”
“…주인님도 항상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렇게 이야기하면 할 말이 없어진다. 브루스는 마른 입맛만 다실 뿐이었다. 잘 닦인 거실엔 여전히 두 사람뿐이었다. 시계가 작은 소음을 만들면서 바늘을 바쁘게 움직였다. 넓은 창가엔 구름이 우글우글 모여있다가 한순간 불어온 바람에 그대로 날아갔다. 흐릿한 해가 비치는가 싶더니 또 그늘이 다가왔다. 고담은 늘 이런 곳이었다. 온 집안에 그늘이 빽빽하게 들어찼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 솔직히 그냥 입을 다물고 싶었지만, 마냥 숨길 수도 없는 일이었다.
“…마스터 브루스?”
“내가 직접 말하자니 너무 민망해.”
정말 민망했다. 하지만 한시라도 빨리 의논을 해야 했다. 클락은 어머니를 찾아가 보자고 말했지만, 브루스는 알프레드보다 클락의 어머니가 더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 한마디에 펄쩍 뛰면서 걱정 말라는 말과 함께 저택으로 돌아왔다. 물론 브루스는 늘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마디도 제대로 떼지 못할 만큼 당황하고 있었다.
“오늘따라 주인님 표정이 낯설군요.”
“다 자네 때문일세.”
“저 때문인가요?”
“…….”
괜히 한번 투정을 부리다가 또 고개를 푹 처박는다. 너무 민망하다. 정말 민망하다. 브루스의 머릿속엔 이 말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알프레드가 브루스 입에서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기까진 시간이 좀 더 걸렸다. 침착하게 브루스의 입술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늙은 집사는 늘 한결같은 표정이었다.
아니 항상 그랬었다. 눈을 뜨면 언제나처럼 지루하고 비슷한 생활만 반복되곤 했기에, 데미안은 반쯤 깬 정신을 다시 베개에 푹 파묻으면서 애써 아침을 외면했다. 어차피 이 상황에서 늦잠 좀 잔다고 혼낼 사람은 여기에 존재하지 않았다. 수명이 다 된 전등처럼 깜박 깜박 점멸되는 기억은 점점 늪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조금만 더 눈을 감고 있으면 늦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유난히 시끄럽게 울리는 시곗바늘 소계에 결국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보통 땐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소리였다. 조용한 공간을 가득 채우는 규칙적인 소리는 데미안의 심기를 건드리기 충분했다. 그 반동으로 침대가 크게 출렁거렸다. 새 것 같은 하얀 이불 위에 햇살이 곱게 쌓여있다 푸스스 흩어졌다.
“…….”
잠이 잔뜩 달라붙은 눈을 깜박이던 데미안이 천천히 왼쪽 손바닥으로 눈 주위를 꾹꾹 눌렀다. 아침엔 항상 약한 두통이 있었다. 가끔은 눈앞이 흐릿해지기도 했지만, 데미안은 항상 그런 현상은 아침잠에 취해서 그런 거라 말하곤 했다.
천천히 밝아지는 시야가 완전히 트이자 그제야 하얀 방이 눈에 들어왔다. 가구라곤 가장 필요한 것만 들어있는 삭막한 공간이었다. 오른쪽으로 크게 트인 창문에선 해가 구름을 가르고 기분 좋은 햇살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꿈을…꾼 거 같은데.”
데미안이 중얼거렸다. 불투명한 막에 한 겹 가려진 것처럼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생각하려고 하면 할수록 머릿속만 간질간질해질 뿐이었다. 익숙한 얼굴, 익숙한 공간, 그리고 평소와 다름없는 대화를 나눈 것 같았다. 하지만 단 하나도 제대로 기억을 할 수 없었다. 점점 멀어지는 꿈의 끝자락을 잡기를 포기했다. 데미안이 머리를 가볍게 흔들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푹신한 양탄자에 발이 닿은 순간이었다. 거짓말같이 새하얀 방에 색이 입혀진 것 같았다. 데미안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가구에 닿는 숨결마다 희미하게 색이 떠오르다가 다시 천천히 사라졌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런 것은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사실 이게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꼭 있어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데미안은 그제야 잊었던 것이 생각난 마냥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레이슨?”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레이슨? 어딨어!”
방 한가운데 서서 재차 이름을 불렀지만, 데미안의 귀엔 작은 인기척조차 들리지 않았다.
“…….”
낯선 소리만 가득 찬 방 안엔 데미안 혼자뿐이었다. 금방 다시 하얗게 바래버린 방 안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버석거렸다. 가구에 얹힌 빛이 방을 갉아먹었다.
''다른데 갈 곳이 없는데.”
솔직히 이상한 일이었다.
딕이 자신을 놔둔 채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분명 어제 옆에서 잠든 것까진 기억이 났는데, 아침까지 텅 비어버린 필름은 좀처럼 조각이 맞춰지지 않았다. 깨끗하게 가위로 잘라내고 이어버린 필름도 아니고, 까맣게 타버린 것이었다. 영사기에 돌려도 잔뜩 노이즈가 낀 까만 화면밖에 나오지 않는 기분을 그대로 느끼는 데미안은 그리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억이 사라지는 경험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었다.
“…….”
물론 딕이 잠버릇이 험한 것도 아니었고, 몽유병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데미안은 딕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자신했다. 만약 그런 병이 있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모를 리 없다고 생각했다. 작은 아이는 자체적으로 머릿속에서 결론을 내렸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그레이슨.”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그레이슨!!”
하지만 납치라도 당한 것 마냥 흔적도 없이 사라진 딕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방 안에서 아무리 이름을 불러봤자 원하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데미안은 느리게 발을 움직였다. 방 한가운데서 문까지 가는 길이 꽤나 멀게 느껴졌다.
- 덜컥
손잡이 돌아가는 소리가 짧게 들렸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열릴 것 같던 문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가장 긴 바늘이 한 바퀴를 돌고나서야 묵직한 문이 소리 없이 밀렸다. 딱 한사람 나올 정도만 열린 틈으로 데미안이 슥 빠져나왔다. 복도에도 푹신하게 깔아둔 양탄자는 발소리조차 모두 먹어버렸다. 소리가 모두 사라진 집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소음이 사라진 공간은 도무지 사람이 사는 것 같지 않았다.
“…….”
데미안은 잡고 있던 손잡이에서 천천히 손을 뗐다. 그리고 문을 살짝 밀어서 닫았다. 방 안에서 규칙적으로 째깍대는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다. 데미안이 밖으로 나왔지만, 딕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항상 눈이 닿는 곳에 있던 사람이기에 이상한 기분은 더 빨리 작은 몸을 삼키기 시작했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지만 좀처럼 진정할 수 없었다. 점점 불안해지는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필사적으로 겉으로 티를 내지 않으려 하고 있지만, 잔뜩 주름진 미간부터 손톱자국이 남을 정도로 꽉 쥔 주먹까지 어디를 보더라도 진정하지 못하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어깨가 가늘게 떨리는 것은 숨길 수 없었다. 복도에서도 세 번 정도 딕을 불렀다. 처음은 그레이슨이라, 두 번짼 약간 화가 난 목소리로 재차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마지막엔 마지막 발음이 살짝 흔들릴 정도로 입술을 떨었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데미안이 급하게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계단을 급하게 뛰어 내려가는 그 순간에도 아무런 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화려한 장식이 조각된 계단의 끝에 다다르기 전에 훌쩍 뛰어내렸다. 작은 맹수처럼 몸을 굽히고 바닥에 착지한 데미안이 눈을 치켜뜨며 주위를 살폈다. 시릴 정도로 푸르게 빛나는 시선이 집안 구석구석 닿았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딕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았다.
아니 그런 흔적은 처음부터 이 공간에 없었던 것 같았다. 기묘하게 우그러진 공간을 헤매던 데미안이 거실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사람이 없었던 것 마냥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하다못해 스쳐 지나가면서 흐트러진 물건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아닌가.’
사실 스치는 것만으로 움직일 만한 작고 가벼운 물건은 이 공간에 없었다. 가장 필요한 가구만 몇 가지 채워 넣은 곳은 생각보다 훨씬 더 넓어 보였다. 커다란 유리를 통해 들어오던 해가 순간 가려졌다. 커다랗고 짙은 구름으로 들어간 해가 보이지 않자 세상은 일순간 어두운 그늘에 뒤덮였다.
“…….”
집 안 가득 따뜻하고 어두운 그늘이 퍼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 그늘의 끝에서 데미안은 한 가지 기억을 생각해 낼 수 있었다. 이 쉬운 것을 왜 그렇게 떠올리지 못했을까. 데미안은 스스로도 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아…….”
항상 딕은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가끔 다른 일을 하긴 했지만, 전체적인 생활 패턴은 크게 틀어지지 않았다. 그것을 기억해내자 데미안은 필사적으로 어제 아침을 떠올리려 했다. 하루가 지나면 그대로 기억이 녹아버리곤 했다. 아무리 잊어버리지 않으려 해도, 물에 닿은 설탕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갔다. 가늘게 눈을 찌푸리며 기억의 파편을 긁어모았다.
“…….”
아침에 항상 있었던 곳을 찾으려 했다.
데미안의 이상한 행동은 끝이 없었다. 끊임없이 생각하지 않으면 마치 이 공간이 사라진다고 믿는 것 같았다. 평소 이 시간. 혹은 아침. 아니면 잠에서 깬 직후.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키워드를 조합해가며 희미한 머릿속을 헤집었다. 좀처럼 잡히지 않는 어제의 기억은 답답하기만 했다. 자꾸 놓칠수록 데미안의 표정은 더욱 심각해졌다. 간신히 손끝에 닿을라치면 재빠르게 몸을 비틀며 빠져나갔다.
결국, 생각해냈다.
그레이슨은 이쯤이면 부엌에 있었다. 아니 있어야만 했다. 이 간단한 한 문장을 떠올리기 위해 데미안은 엄청난 시간을 쏟아야 했다. 하지만 원하는 것을 떠올렸으니 상관없었다. 데미안에게 시간보다 중요한 것은 더는 기억할 할 만한 것이 남아있지 않았다. 흘러가는 시간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간신히 부엌이라는 것을 떠올린 데미안은 그쪽으로 몸을 틀고 몇 번이나 이름을 불렀다. 아무도 없는 것 같은 곳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 순간 데미안의 눈에 안심의 빛이 떠올랐다.
“하…….”
음식을 하는 것 같진 않았지만, 분명 사람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의자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 공간에서 뭘 하는진 알 수 없었지만, 그레이슨을 찾은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약간 무겁게 끌리는 발을 움직여 부엌으로 걸어갔다.
식탁에 몸을 반쯤 가린 딕이 눈에 들어왔다. 앞치마를 하고 있지도 않았고, 아침 재료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데미안이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 움직이지 조차 않은 것 같았다.
딕은 그저 그 공간에 있었다. 데미안이 생각해낸 바로 그 모습 그대로 눈을 깜박이며 똑바로 푸른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눈앞에 보이지 않을 땐 그렇게 걱정을 했는데, 막상 사람을 찾아내자 데미안은 작은 심술이 솟았다. 잔뜩 짜증이 섞인 눈썹이 삐뚜름하게 치켜올라가는 것을 본 딕이 고개를 한쪽으로 살짝 숙였다.
“그레이슨! 귀가 먹었어?”
“…왜?”
“내가 몇 번이나 말을 했어. 부르면 대답을 하라고 했잖아!”
“날 부른 거 아니잖아.”
“널 불렀어. 몇 번이나.”
“그랬어? 근데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형한테 어리광이라도 부리고 싶었던 거야?
“…….”
“그렇다면 난 좀 기쁠 거 같은데.”
“됐어. 꺼져버려!”
그리고 데미안은 뭔가 잘못 한 것처럼 숨을 들이쉬며 입을 다물었다. 이 집에서 금기와도 같은 말이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낮게 짜증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정말?”
“아냐. 그럴 필요 없어.”
급하게 대화를 끊은 데미안이 밖으로 나가버렸다.
딕이 붙잡을만한 잠깐의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데미안의 뒤통수를 바라보던 딕은 가볍게 볼을 긁적였다. 익숙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익숙하다고 해도 도통 저 녀석의 기분을 짐작할 수 없었다. 언제나처럼 적당히 떨어져 있었다.
그리곤 멍하니 데미안이 지나간 흔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볼에 닿았던 손이 절로 떨어졌다. 어색하게 공중에 멈춰 있던 두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부엌을 떠난 데미안은 빠른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대로 척척 걸어다 소파에 앉았다. 성인 두 사람이 앉아도 넉넉한 소파는 데미안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푹 감쌌다. 거칠게 앉는 반동으로 쿠션이 굴러떨어졌다.
“…….”
푹신한 쿠션을 끌어안은 데미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파 너머로 언뜻 보이는 까만 뒤통수를 찾아 걸어온 딕은 언제나처럼 웃음을 입가에 가득 머금고 있었다. 칠흑같이 까만 머리카락이 하얀 소파에 옅은 그림자를 만들다 이내 사라졌다.
딕은 조용히 발걸음을 내디뎠다. 작은 소리 하나 남기지 않고 걸어갔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모습으로 소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곤 조용히 손을 뻗어서 데미안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약간 움찔하던 어깨가 조용하게 가라앉았다. 작은 얼굴은 도통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딕은 충분히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데미안.”
“…….”
“데미안?”
딕의 이마가 어깨에 닿자 다시 한 번 파르르 떨렸다. 이마를 댄 채 웃을 때마다 숨이 피부에 닿았다. 싸늘한 것 같기도 하고, 부드러운 것 같기도 했다. 이럴 때마다 데미안은 딕을 밀어낼 수 없었다. 자신의 곁에 남아있는 형이란 작자는 그걸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 기억하는 것만큼, 딕도 데미안에 대한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을 거라 믿었다. 아니 믿어야만 했다.
“난 이 시간이…그러니까 기적이 말이야. 나에게 와 준거라고 생각해. 데미안.”
“…….”
“솔직하게 말하자면…한 때는 싸우기도 했고, 서로 틀어지기도 했지만 적어도 지금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잖아.”
“…….”
"안 그래?”
“…….”
“응?”
“그래.”
조용히 한마디 내뱉은 입은 또다시 고집스럽게 다물어졌다. 사소한 대답 하나라도 신중하게 해야 했다. 별생각 없이 말한 한마디가 미래를 바꿀 수도 있었다. 마치 나비효과처럼 밀려오는 가장 나쁜 미래를 상상하던 데미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음. 딕이 간지럽다는 듯 웃었고, 데미안은 고개를 숙인 채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몇 번째 봤던 기시감인지 알 수 없었다. 처음부터 시작하면 이 모든 것이 잘 되리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어린아이의 소망에 지나지 않았다. 기적은 가장 힘든 순간 다가와서 불안감을 함께 심어주었다. 기쁨으로 가득 찼던 머리가 조금씩 식어 가면 그 남은 공간을 불안이 채워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눈앞에 다가온 것을 내칠 만큼 상황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데미안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폐에 가득 찼던 불안감이 끈적끈적하게 묻어나왔다.
“데미안?”
“왜.”
“나 좋아해?”
“…….”
“좋아하지?”
“…….”
나른하게 감기는 목소리는 언제나 듣기 좋았다.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고, 보고 싶었던 미래이기도 했다. 저 질문에 할 수 있는 대답은 한가지 밖에 없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딕이 다시 푸르게 웃으면서 어깨를 와락 잡아당겼다. 소파에 등을 완전히 맡긴 채 넘어간 데미안의 시선이 천장을 향했다. 어깨에 닿아있던 이마가 떨어졌다. 곧이어 시야가 까맣게 가려졌다. 아무런 맛도 향기도, 짜릿함도 남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가볍게 닿았다 아무런 감촉 없이 떨어져 나간 입술이 또다시 데미안을 불렀다. 대답이 없자 다시 불렀다. 지치지도 않는지 계속 같은 말을 반복했다. 길게 이어지는 질문과 대답은 해가 긴 그림자로 온 세상을 덮고 사라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조용하고 느릿하게 거실을 가득 채우는 목소리는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실 대답을 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
"하루 이틀 이런 사이도 아니었잖아. 안 그래? 고분고분 말을 잘 들으면 조금 당황스럽기까지 하단 말이지.”
“그레이슨!!!”
“이것 봐.”
“내가 말을 말지.”
또다시 붙어오는 머리를 있는 힘껏 밀어냈지만 소용없었다. 끈덕지게 붙어오는 딕을 밀어내는 것을 포기한 데미안이 눈을 감아버렸다. 눈을 감고 있으니 졸음이 밀려왔다. 보통 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이젠 익숙하기만 했다. 잠깐 사이에 온몸을 갉아먹는 졸음이 주렁주렁 늘어졌다. 간신히 떠보던 눈이 힘없이 감긴 채 좀처럼 뜨지 못했다.
***
“아, 잔다.”
“…….”
“잠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아.”
“…….”
딕이 또 한 번 웃었다. 허공에 스치는 바람만큼 허무한 웃음이었지만, 괜찮았다. 이 정도만 남아있어도 상관없었다. 이젠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데미안에게 다가갔다.
소파에 가볍게 걸터앉았다. 자신 쪽으로 기울어진 작은 몸은 한참 바라보다가 한 쪽 어깨 내주었다. 무게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가볍게 얹힌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손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머리카락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짧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 데미안이 귀찮다는 듯 고개를 흔들자 곧 그만두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니 곧 심심해졌다. 딕도 함께 눈을 감았다.
이 공간에서 졸리다-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품이 나온다거나 눈이 뻑뻑한 전조증상도 남아있지 않았다. 멀쩡하게 걸어 다니던 사람이 갑자기 쓰러지는 것처럼 잠에 빠져들었다. 둘 사이엔 이미 익숙한 일이라 놀라지 않았다. 뒤척거리지도 않고 죽은 듯 잠든 아이는 나직하게 숨만 내쉴 뿐이었다.
“심심한데.”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있다가 떴지만, 데미안은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조심조심 어깨에서 데미안을 떼어내서 소파에 눕혔다. 여전히 잠에 취해 있는 얼굴에 가볍게 입을 맞춰주곤 조용히 일어섰다. 딕의 입술이 닿은 자리마다 파랗게 얼어붙는 것 같았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런 것도 느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정말…잘 자네.”
나직나직 혼잣말을 했다. 방으로 들어갔다 나온 딕의 손엔 커다랗고 포근한 담요가 들려 있었다. 두 팔로 펼쳐도 모자랄 만큼 큰 담요를 질질 끌어왔다. 데미안을 안아서 자신의 허벅지를 빌려주었다. 한참 어려 보이는 손이 허벅지에서 살며시 움직였다. 그리고 곧 다시 미동도 없었다. 담요로 데미안을 푹 덮어씌웠다. 따뜻한 담요가 온몸에 닿자 작은 몸이 슬슬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이미 태양은 저 멀리 넘어가고 까맣게 어둠이 깔린 하늘엔 희미한 눈썹달이 거꾸로 걸려있었다. 주변에 설탕을 부숴놓은 것처럼 흘러넘치는 별은 금방이라도 정원에 와르르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파란 눈에 가득 담긴 어둠이 볼을 타고 왈칵 흘러내리자 거실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 하얗고 길게 뻗는 달빛을 바라보던 딕이 가늘게 웃으며 담요를 조금 더 끌어당겨 덮었다.
002
언제 잠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처음으로 느낀 감각은 온몸을 휘감는 바람의 차가움이었다. 뼛속에 시리는 추위를 피하고자 아무리 달려보아도 벗어날 수 없었다. 입을 열면 폐를 얼려버릴 듯한 겨울바람이 왈칵 목으로 넘어갔다. 숨을 내쉬기도 전에 몸 안으로 흘러 들어간 겨울의 파편은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천천히 데미안을 얼려갔다. 온몸이 얼어가기 시작하자 땅에서는 성에가 돋았다.
발을 디딘 곳에 하얗게 일어나는 성에가 발목을 휘감고 종아리를 타고 올라왔다. 하얗게 얼어가다 못해 보라색으로 죽어가는 발은 감각이 없었다. 버석버석 소리가 나는 천이 결국 이기지 못하고 뚝 부러졌다. 그대로 드러난 살을 베고 지나가는 겨울바람은 매섭기만 했다.
“…….”
입을 열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미 뿌리까지 완전히 얼어버린 혀가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간신히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그만두었다. 분명 찾아야 할 것이 있었는데 추위에 뇌마저 얼어버린 듯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생각이라도 계속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아 억지로 발을 움직이면서 누군가를 불렀다. 너무나 익숙한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 이름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억지로 부르려 하면 이내 머릿속에서 사라지는 이름은 그 시작도 끝도 알 수 없었다. 알싸하게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의 정체를 생각했다.
“…….”
심장에 한기가 닿은 것 같았다, 피가 흐르는 곳부터 천천히 얼려가며 온몸을 잡아먹는 추위는 마치 죽음과도 같았다. 익숙했다. 새까만 입을 한껏 벌리고 다가왔다. 데미안의 머리부터 천천히 내려앉기 시작했다. 추위는 죽음을 동반했고, 오감을 먹어치웠다.
죽음의 공포가 눈을 덮었을 때 더는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새까만 공간에 홀로 서 있는 작은 아이를 지켜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누군가 데미안의 손을 스치고 지나갔다고 생각했지만, 눈이 보이지 않아 알 수 없었다. 거센 바람 소리가 가득한 공간에서 낯설지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바람에 섞여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가려는 순간 귀가 먹먹해졌다. 점점 멀어지는 소리를 더는 쫓을 수 없었다.
“━━━ ━ ━.”
“…….”
“━ ━━ ━━.”
움직일 수 없어 그대로 멈춰 섰다. 손끝에 남아있는 감각을 기억하려 했지만, 그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모든 감각이 사라지고 나자 데미안은 자신이 나무토막이 된 기분을 받았다. 어디로 움직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손을 더듬어 보아도 걸리는 것이 없었다. 아무런 정보를 얻지 못한 채 정처 없이 헤매던 발길이 무언가에 툭 걸렸다.
발을 헛디딘 것 마냥 데미안이 앞으로 넘어졌다. 하지만 아프지 않았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더듬더듬 바닥을 손으로 헤집으며 무엇이라도 알기 위해 애썼다. 순간 머릿속에 지나쳐가는 이름이 있었다. 아. 데미안이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레이슨.’
돌아오는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그레이슨 여기 있었어?’
암흑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만난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차갑게 가라앉았던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손끝을 스치고 지나간 감촉, 그리고 바람 속에 섞여서 들어오던 희미한 목소리. 더는 만날 수 없다는 불안감까지 무엇 하나 데미안을 안심시켜 주는 것이 없었다. 몇 번이나 확인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이 검은 공간에 남아있는 아이는 데미안뿐이었다.
***
몇 번이나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온몸을 얽는 끈끈함을 벗어날 수 없었다. 딕이라고 추정되었던 물체는 이미 곁을 떠난 지 오래였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캄캄한 공간에서 버둥대던 몸이 축 늘어졌다. 그 순간 바닥이 조각조각 금이 가더니 푹 내려앉았다. 생각할 시간도 없이 떨어지기 시작한 몸은 끝없는 어둠으로 빨려 들어갔다.
묵직한 소리조차 나지 않은 늪에 닿은 몸은 꾸물꾸물 어둠에 먹혀들어갔다. 입으로 울컥 들어오는 것을 뱉어내지도 못한 채 그대로 삼켜야 했다. 폐를 감싸는 기묘한 감각에 한 번 더 손을 뻗으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작은 손끝까지 한 번에 삼켜버린 공간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조용하기만 했다.
“허억!!”
벌떡 일어난 작은 몸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렸다. 크게 뜬 눈엔 핏발이 자글자글 올라왔다. 거칠게 내뱉는 숨에는 아직도 꿈 조각이 묻어나왔다. 생각할수록 기분 나쁜 꿈이었다. 왈칵 기침하자 몸 안에 들어있었던 어둠이 투명한 숨에 섞여 침대에 와르르 쏟아졌다.
“여긴.”
그제야 정신을 차린 데미안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침대 안 이었다. 입술을 파르르 떨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항상 날카롭게 올라가 있던 눈매는 사정없이 망가진 채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좀처럼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눈 끝에 맺혀있던 불안감이 뚝 떨어져 내렸다.
“그레이슨?”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나자 딕 생각이 났다. 왈칵 걱정이 몰려들자 손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리기 시작했다. 혹시나 자리에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번에도 그랬고, 일주일 전도 마찬가지였다. 딕이 자꾸 제 자리를 벗어나는 빈도가 높아지고 있었다. 죄 없는 이불을 쥐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부드러운 이불에 주름이 와르르 졌다 다시 풀어졌다. 이불을 움켜쥔 손이 벌벌 떨렸다.
익숙한 걱정이라 몇 번이나 다짐했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이 넓은 공간에 데미안 혼자만 존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곳은 너무 크고 넓어서 작은 몸 하나로는 이 방 하나도 가득 채울 수 없었다. 생기도 사람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공간을 가득 채울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또다시 꿈의 기억이 데미안을 압박해왔다. 머릿속에서 직접 울리는 것 같은 괴상한 소리는 데미안을 붙들고 놔주지 않았다. 넌 혼자야. 곁에 아무도 없어. 점점 부서지고 갈라지는 소리는 더는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조차 없었다. 몇 번이나 고개를 흔들고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잘못 송신된 주파수 마냥 지직거리는 소리는 한참이나 방 안에 머물렀다.
“그레이슨”
“…….”
“그레이슨!!”
몇 번이나 부르고 나서야 봉긋하게 솟아오른 이불이 바스락거리면서 조금 구겨졌다. 이 소동에도 깨지 않은 딕이란 놈은 아직도 한참 꿈 속에서 헤매는 중이었다. 그런 딕의 뒤통수를 바라보던 푸른 눈은 이 상황이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날카로운 눈매를 조금 찡그린 채 딕을 쳐다보았다.
태아처럼 웅크린 채 잠을 자는 딕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죽은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움직임이 없어 데미안을 아직도 가늘게 떨리는 손을 뻗어 어깨를 잡았다. 숨은 쉬는 것 같은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심장은 뛰고 있지만, 피가 도는 느낌이 나지 않았다.
덜컥 겁이 난 데미안이 그대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 반동으로 침대가 제법 흔들렸지만, 딕은 여전히 일어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은 채 그렇게 누워있기만 했다.
어깨를 잡은 채 한참동안 부들부들 떨던 데미안이 손을 거두었다. 손은 제멋대로 차갑게 식어갔다. 그대로 두 팔로 어깨를 감싸 안았다. 최대한 방어적인 자세를 취해보아도 이 불안함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
요즘 들어 악몽을 자주 꾸곤 했다. 기적이 다가온 것과 동시에 함께 도착한 악몽은 집요하게 데미안의 속을 파먹었다. 아프지는 않았다. 하지만 악몽이 새까만 입을 벌리고 한입 물어서 떨어져 나간 것은 좀처럼 회복이 되지 않았다. 너덜너덜해진 속에 똬리를 틀고 자리를 잡은 것은 새까맣게 웃으면서 데미안을 괴롭혔다.
데미안이 딕의 어깨를 잡고 세게 흔들었다. 어제까지 맞대고 있었던 몸이 아니었다. 이상하리만큼 몸이 차갑고 낯설었다. 천천히 흔들어도 별다른 반응이 없자 점점 세게 흔드는 데미안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핏줄이 잔뜩 선 눈에선 금방이라도 붉은 액체가 흘러내릴 것 같았다. 꽉 다문 입술에선 뿌득뿌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
아무리 깊이 잠이 들었다 해도 이렇게까지 반응이 없을 수 없었다. 점점 더 조급해지는 손이 이불 위에서 몇 번이나 미끄러져 내렸다. 물리적인 방법으로는 딕을 깨울 수 없었다. 눈을 깜박거리며 입술을 깨물던 데미안이 무엇인가 생각난 것처럼 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레이슨.”
“…….”
“그레이슨!!”
“…….”
“일어나!!! 일어나라고!!”
“…….”
“그레이슨! 이 멍청아!!”
쩌렁쩌렁하게 데미안의 목소리가 울리고 나서야 딕이 눈을 떴다. 푸른 눈은 잔뜩 흐려져 있었고, 까만 속눈썹엔 잠이 가득 걸려있었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눈길이 낯설었다. 데미안을 보는 것 같으면서도 미묘하게 빗겨나가는 흐린 시선을 애써 똑바로 바라보았다.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돌려서 몇 번이나 이름을 말해주었다. 다섯 번도 넘게 이름을 부르자 겨우 데미안이 알고 있는 푸른 눈으로 돌아왔다.
아주 조금 안심이 되었다. 느리게 깜박이는 시선이 겨우 데미안을 바라보고 웃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아이는 웃지 않았다. 오히려 원망에 가까운 눈을 하고 딕을 쳐다볼 뿐이었다. 이럴 때 화를 풀어주는 방법은 한 가지 뿐이었다. 딕이 입 꼬리를 살며시 올리면서 웃었다. 푸른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지기 시작하자 데미안의 눈썹이 따라 움찔거렸다. 일부러 잠에 잔뜩 취한 목소리로 데미안의 이름을 불렀다. 눈에 띄게 움찔하는 자신의 동생을 보자 이내 활짝 웃으며 푹 끌어안았다. 그리고 품 안으로 당겼다. 모른 척 딸려간 몸이 푹신한 이불 위에 쓰러졌다.
“아침부터 왜 그래?”
나름대로 가장 친절한 목소리로 물어보았지만,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재차 품 안으로 끌어당겨 숨이 막힐 것 같이 안아주고 나서 다시 한 번 물었다.
“아침부터 왜 그랬어?”
“…….”
“말 안 해줄 거야?”
“악몽을 꿨어.”
뜻밖의 대답에 그레이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순순히 두 번 만에 대답을 한 것도 놀랐지만, 그보다 더 놀란 것은 대답의 내용이었다.
“천하의 데미안이 악몽 따위에 이렇게 놀란 거야? 다른 사람들이 보면 놀랄게 분명한데.”
“그런 거 아냐”
“그러면 왜 그러는 건데?”
“…그레이슨이…….”
“내가?”
“날 떠나는 꿈을 꿨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넌 날 떠날 수 없어 안 그래?”
어린애다운 고집스러운 말이었다. 하지만 딕은 그 말에 부정하지 않았다. 목 안으로 웃으면서 데미안의 정수리에 코를 묻었다. 짧은 머리카락이 얼굴을 간지럽혔다. 그 상태로 웃기 시작하자 데미안이 온몸을 버둥대며 품 안을 빠져나가려 했다. 이제 이 작은 아이가 두 팔을 벗어나기 전에 원하는 대답을 해줘야 했다.
“맞아. 난 어디 안 가. 데미안이 내 이름을 불러주는 동안 널 떠나지 않을 거니까.”
“…….”
“이제 좀 진정이 되는 거 같아? 아직도 기분이 이상하다면 난 이대로 좀 더 있어도 상관없는데.”
“비켜. 나갈 거야.”
“에이.”
괜히 심술을 부리는 동생을 꾹 끌어안았지만 더는 잡아둘 순 없었다. 억지로 몸을 비틀어 작은 틈을 만들어내자마자 몸이 쑥 빠져나갔다. 데미안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휙 나가버린 침실은 곧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이불을 두르고 침대에 누워있어도 좀처럼 한기가 가시지 않았다.
“추운데…….”
결국 버티다 못 한 딕이 움직였다. 따뜻한 난로를 찾는 것처럼 침대에서 일어났다. 약하게 떨리는 차가운 몸에 이불을 두르고 데미안의 걸어간 곳을 향에 발을 옮겼다. 발자국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공간은 또 다시 텅 비어버렸다.
003
그날은 데미안의 생일이었다.
좀처럼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딕은 다른 선물을 준비할 수 없었지만, 데미안과 둘이서 축하하기로 몇 달 전부터 약속을 했었다. 이번 생일은 꼭 함께 보내자고 몇 번이나 되묻고 또 물었다. 대답을 들으면 들을수록 가슴 깊은 곳에서 불안감이 스물스물 흘러나왔다. 하지만 딕도 데미안도 꾹꾹 참을 뿐이었다. 하루만 넘기면 그 다음날은 어떻게 해서라도 헤도 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
“또 무슨 일이야!”
“아니 그게….”
“왜 평소에 하지도 않던 짓을 해서 다치고 그러는 거야? 언제부터 밥을 먹었다고!”
“…난 그냥.”
“됐어. 이리와. 넌 나 없으면 어떻게 살래.”
“그래서 내가 여기 있잖아.”
“징그러워.”
“정말?”
“…….”
모른 척 딕의 손가락을 잡았다. 그리고 슬슬 끌어당기며 거실로 나갔다. 반대쪽 손끝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바닥에 생기는 얼룩 따윈 상관없는 듯했다. 한마디도 하지 않고 붕대만 묶는 데미안을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데미안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물에 닿은 고양이 마냥 펄쩍 뛰어오른 데미안이 잔뜩 놀란 눈으로 딕을 쳐다보았다.
“몇 번이나 해도 왜 그렇게 놀라는 거야.”
“그…럴 수도 있지! 멍청아.”
“자꾸 형한테 멍청이라 할래? 이러다 갑자기 내가 사라지기라도 하면 어쩔 건데.”
“…….”
갑자기 눈에 띄게 어두워진 표정에 딕은 뭔가 말실수를 했나 싶었다. 하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평소에 주고받던 지극히 평범한 말일 뿐이었다.
하여튼 데미안의 속은 종잡을 수 없다면서 웃어넘겼다. 손가락에 붕대를 둘둘 감고 나서도 작은 사고가 끊임없이 일어났지만, 딕은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데미안도 바깥출입은 잘 하지 않았다. 몇 달 만에 처음으로 잠시 나갔다 왔을 때 사고가 벌어져 있었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듯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눈만 깜박였다.
“그레이슨?”
“왜?”
“너 몸이….”
“응?”
“젠장.”
“아…….”
뭐라고 말을 할 수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몸은 이미 반쯤 사라진 상태였다. 입을 열어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시간은 그 찰나조차 기다려주지 않았다. 뭐라 한마디 하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딕은 이 공간에 존재하지 않았다. 데미안은 놀라거나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그저 악몽이라고 생각했다. 자고 일어나면 이 악몽에서 깰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섭도록 끔찍한 악몽은 항상 기적과 함께 다니곤 했다. 기적의 달콤함을 앞세워 스물스물 집 안으로 들어온 새까만 것은 어느새 공간 하나를 통째로 삼키고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딕까지 삼켜버렸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딕이 데미안을 떠날 리 없었다. 이름을 부르면 금방 웃으면서 뒤에서 안아올 것 같았다.
“그레이슨.”
“…….”
“이 멍청아!”
“…….”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그저 잠시 사라진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이름을 잊어버리면 끝이었다. 그레이슨. 그레이슨. 딕 그레이슨. 딕. 속으로 이름을 수백 번 되뇌었다. 몇 번을 죽고 다시 눈을 뜨더라도 잊을 수 없는 이름을 심장에 새기고 뫼비우스의 띠의 끝을 찾았다. 그 어딘가에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보이지 않아 결국 그대로 소파에 주저앉았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말도 안 되는 꿈이야. 꿈이겠지. 그렇지 않아? 그레이슨? 네가 들어도 웃기잖아.”
“…….”
“대답 좀 해봐. 아냐 안 해도 괜찮아. 내가 다시 한 번 눈을 감고 널 찾아갈 거니까.”
“…….”
“몇 번이라도 말이야.”
너무 달아서 행복하고, 그래서 두 배로 끔찍했던 기억의 처음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이 생활의 처음이자 마지막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억을 더듬는 일은 쉽지 않았다.
뫼비우스의 띠 위에 선 것처럼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작점을 찾을 수도 없었다. 많은 일이 있었고, 중간 중간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텅텅 비어있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대로 미쳐버릴 것 같았다. 구멍이 숭숭 뚫린 기억의 필름 위를 헤매던 데미안은 좀처럼 눈을 뜨지 않았다.
***
데미안이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시간의 흐름은 이 공간에선 전혀 소용없었다. 이미 멈춰버린 공간은 시간조차 빗겨가곤 했다. 바람조차 들지 않는 곳에 죽은 듯 앉아있던 데미안이 아주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뻣뻣하게 굳어있는 몸은 좀처럼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에 그레이슨이 있으면 충분했다.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간신히 손을 들어 올렸다. 이젠 자라지 않는 손을 보면서 살며시 미간을 구겼다. 몇 번이나 반복된 일인지라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다시 그것을 눈으로 본다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잔뜩 표정을 구기고 있는 데미안의 몸이 뒤로 와락 끌어당겨 졌다. 힘차게 끌어안는 가벼운 감각에 고개를 젖히자 푸른 시선이 얼굴 위로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언제나 같은 얼굴이 데미안을 보면서 서글서글 웃었다.
“나 찾았어? 데미안?”
“그래. 아주 오랫동안.”
“얼마나?”
“기적과 악몽이 섞인 현실이 끝났다 다시 시작할 때까지.”
“그래서 악몽은 어땠어?”
“너무 달아서 괴로울 정도였어.”
데미안이 한 박자 쉬고 겨우겨우 말을 이었다. 단단하게 굳은 혀가 풀리기 까진 제법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 데미안의 입술을 손끝으로 살살 쓸어주던 딕이 귓가에 입술을 가볍게 가져다 댔다.
“나도 그랬어.”
안녕하세요. 환월입니다. 배포본이지만 후기를 쓰고 싶다는 욕심에 어떻게는 페이지를 구겨넣어 봤습니다.
원래는 조금 길게 나올 예정 이었는데, 이래저래 일이 있어서 최대한 내용을 쳐내봤습니다. 결과적으로 저 둘이 뭘하고 있냐 싶은 원고가 된 거 같은데, 둘은 시간의 굴레에서 돌고 있습니다. 원고 안에서 데미안은 죽은 상태, 딕은 데미안이 자신의 공간에서 만들어낸 환상입니다. 둘이 기거하는 공간은 뭐..죽음의 공간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나름 직접적인 떡밥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계속 춥다 차갑다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같은 말과 밥도 안 먹고 살죠..(... 이렇게 무식한 떡밥이 있나! 아이고 부끄러워라.
모티브가 된 빅스의 뮤비에서 시간술사라는 설정을 듣는 순간 둘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다만 그 시간을 돌리는 데미안의 시간도 같이 멈춰있다는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좀 더 길고 천천히 풀었으면 어땠을까 합니다만, 부디 이런 불친절한 책이라도 마음에 드셨으면 합니다.
감상 혹은 멱살잡이는 트위터로 부탁드립니다! 사실 전 놀아주시면 많이 좋아해요!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미래에서 왔다는 누군지도 모를 녀석이 집 안에 들어앉아 나가질 않았다. 나이트윙와 로빈, 그리고 비스트 보이가 본부에 있을 때 나타났다는 녀석은 미래에서 온 시간여행자라고 했다. 시끄럽고, 산만하고 작은 녀석은 빠르게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면서 사고를 치기 시작했다. 영 저스티스로 굴러들어온 임펄스가 치는 사고의 강도가 점점 높아질수록 나이트윙의 미간에 하나둘 깊은 주름이 내려앉았다.
“저기…나이트윙? 내가 왜요?”
대뜸 눈앞에 들이밀어 진 낯선 갈색 물체를 두 손으로 쭉 밀어내며 뒷걸음질을 했다. 두 눈을 반짝이며 자신의 두 손을 잡고 붕붕 소리가 날 정도로 흔드는 녀석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누가 제일 익숙하냐고 물어봤더니 블루비틀을 콕 집어서 이야기하기에 데려왔다.”
“전 저 녀석 누군지 모르는데요.”
“…응?”
“저쪽에서 일방적으로 아는 거 아닌가요. 전 정말…….”
“아 저기 블루? 블루? 블루? 블루? 그렇게 말하면 내가 섭섭하지. 물론 날 모를 수도 있어. 지금부터 알면 되는 거 아닐까?”
“…….”
할 말을 잃었다.
어느새 엉겨 붙은 둘을 바라보던 나이트윙이 무선 통신기를 켰다. 물론 한쪽이 일방적으로 끌어당기고 있는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비록 통신기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그런 사소한 사실은 역시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예? 뭐라고요? 알겠습니다. 나이트윙 아웃,”
여기서 한 번 태클을 걸었어야 했다.
하지만 눈앞에 바로 얼굴을 들이밀고 정신을 쏙 빼놓는 녀석 때문에 슬슬 멀어지는 나이트윙에게 말을 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나이트윙이 웃는 얼굴로 손을 들어 보일 때는 이미 늦어 도저히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먼 거리가 벌어져 있었다.
아차, 하는 순간 사라진 나이트윙은 간 곳이 없었고, 황량한 공터엔 시끄러운 갈색 생물체만 남아있었다. 조용한 장소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점점 빨라지자 머리가 어지러웠다. 두 팔을 꽉 잡고 있는 손을 억지로 떼어내고 입을 막았다.
“입 좀 다물어봐. 시끄러워.”
“으어흐어.”
“말하지 말라고! 야, 간지러워!”
끊임없이 웅얼대는 입술이 가끔 손바닥에 붙어올 때마다 하이메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몇 번이나 손바닥으로 꾹꾹 눌렀지만, 도저히 입을 다물 기미가 보이지 않아 결국 포기했다. 가까운 벤치에 털썩 주저앉아 한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입에서 손이 떨어지자 약간 아쉬운 표정으로 하이메를 바라보던 임펄스가 쪼르르 옆에 와서 앉더니 또다시 귀찮게 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시크릿 아이덴티티가 탄로 날까 봐 잔뜩 신경을 쏟고 있는데 눈앞에 왔다 갔다 하는 녀석은 그런 건 안중에도 없어보였다.
“근데…어…이름이 뭐라고 했지?”
“응? 바트 앨런. 물론 저쪽에선 날 임펄스라고 부르기도 하더라고. 근데 둘 다 상관없어.”
“저기…시크릿 아이덴티티는?”
“그게 뭐가 중요해? 하. 정말 이 시대는 쓸데없는 걸 너무 신경 쓴다니까. 안 그래? 친구.”
언제부터 우리가 친구였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그런다고 들을 만한 녀석도 아닌 것 같았다. 결국, 이런 일방적인 상황에 먼저 항복한 쪽은 하이메였다. 벤치에 앉아 부산스럽게 다리를 움직이고 있는 임펄스는 조금만 바라봐도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그래. 우리 통성명은 제대로 안했지만 친구라고 치고, 시크릿 아이덴티티 오픈했다고 치자.”
“응? 블루. 왜?”
“일단…일단 말이야. 너 혹시 다른 옷은 없냐?”
“왜?”
“그렇게 입고 다니면 튀잖아. 미래에선 뭐 그다지 상관없다 하더라도 여긴 아냐. 알았어?”
“…딱히 가져온 거 없는데?”
‘얘…어쩌면 좋지.’
일말의 고민도 하지 않고 넙죽넙죽 대답하는 얼굴을 보니 갑자기 서러워졌다. 시간 여행자씩이나 되는 녀석이 이렇게 대책이 없을 수가. 한참 말을 고르던 하이메가 바트의 손을 덥석 잡고 일으켰다. 순순히 따라오는 녀석을 흘겨보며 한마디 했다.
“그럼 일단 우리 집으로 좀 가자.”
“왜?”
“제발 토 달지 말고 얌전히 좀 따라와.”
“하지만 블루? 그러니까 우린…….”
“아냐. 그냥 제발 좀 따라와. 우리 친구지? 부탁한다.”
“…….”
웅얼웅얼하는 소리가 여전히 뒤통수에 따라붙었지만, 하이메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최대한 빨리 이 녀석을 집 안으로 데려가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해야 했다. 크림색과 붉은색이 섞인 옷은 가만히 있어도 존재감을 나타냈다. 도저히 길로 나갈 수 없었던 하이메는 결국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입고 있던 후드 점퍼를 벗어 바트의 머리 위에서부터 푹 덮어씌웠다. 시야를 가린 옷을 멍하니 쳐다보던 바트가 손으로 주섬주섬 후드를 집어 들었다. 고개를 기울이며 용도를 묻자 하이메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제발 이거 좀 입고, 조용히 얌전히 따라와. 알았어?”
“알았어.”
“제발 그 약속이 이십 분 쯤 가길 빌어볼게.”
“응? 지금 뭐라고 했어. 친구?”
“아냐.”
납치하는 것도 아닌데, 도통 바트가 정신을 집중하지 않아 억지로 밀고 끌었다. 누가 보더라도 굉장히 수상한 모습으로 걷는 두 사람은 하염없이 거리를 걸었다. 집 앞으로 오기까지 바트는 단 한 번도 입을 다물지 않았다. 간신히 자신의 방에 바트를 밀어 넣은 하이메는 그대로 침대에 쓰러진 채 한참 일어서지 못했다. 쫄쫄이에 후드를 입은 괴상한 모습의 친구는 그 옆에 냉큼 올라앉아 하이메를 쳐다보았다.
***
한참 침대에 늘어져 있던 하이메가 돌아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사람 하나 집으로 끌고 들어왔을 뿐인데, 밤새 작전에 투입된 것보다 더한 피로가 몰려왔다.
‘임펄스를 제거해라 하이메 레이예스.’
지금까지 얌전히 있던 스캐럽이 시끄럽게 훈수를 구기 시작하자 머리는 점점 더 복잡해졌다.
‘임펄스가 이 스트레스의 원인이다. 그를 제거해라.’
“아…좀 가만히 있어.”
“응? 뭐가?”
잠깐 바트가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밖으로 소리를 툭 내뱉던 하이메가 시선에 잡히는 얼굴을 보고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가만히 있으라고?”
“어…그래. 어…응.”
대답을 얼버무렸다. 바트는 그다지 깊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았다. 여전히 등 뒤에선 스캐럽이 당장 무장을 할 것처럼 굴었지만, 꾹꾹 눌렀다. 여기서 소란이 일었다간 정말 끝이었다.
“그래서 내가 할 말이 뭐였냐면…….”
“응!”
“계속 그러고 다닐 수 없잖아?”
“왜? 난 이게 편한데?”
“아니 편하다고 하지만…….”
하이메가 또 머리를 감싸 쥐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바로 앞에서 반짝거리는 눈을 쳐다보다 결국 말로 설득하는 것을 포기했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다짜고짜 유니폼부터 벗기려는 하이메의 손을 덥석 잡은 바트가 눈을 크게 뜨며 수다스럽게 입을 열었다. 스캐럽처럼 한 번에 벗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좀처럼 벗겨지지 않는 유니폼을 찢을 듯 잡아당겼다.
“잠깐 내가 벗을게! 내가 벗으면 되잖아 응? 안 그래? 그렇지? 블루? 우리 처음 만났다며.”
“나랑 친하다고 한 게 누군데. 그래 그럼 옷 벗고 있어봐.”
“…….”
“도망가지 말고.”
“…….”
유니폼을 잡아당기던 손을 툭 놓은 하이메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꼼지락거리는 모습을 잠시 살펴보다 이내 벽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냥 이대로 임펄스를 제거해라. 하이메 레이예스.’
‘아 좀 가만히 있어봐. 쟨 위험한 게 아니고 그저 부산하고 정신 사나운 거라고.’
‘내 말을 들어라. 하이메 레이예스.’
‘아니라고!!’
‘넌 분명히 후회하게 될 것이다. 내 말을 들어야 한다. 지금 이 상황은 좋지 않다.’
‘제발 너도 좀 가만히 있어봐.’
머리 안팎으로 울리는 소리는 서로 섞여서 하이메를 공격했다. 벽장 안을 뒤지던 손길이 점점 거칠어졌다. 원하는 물건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서랍을 열고 모든 물건을 꺼내보았다. 이 서랍이 아닌 듯 물건을 대충 쑤셔 넣고 쾅 닫았다.
“도대체 어디다 둔거야.”
두 번째 서랍에선 자질구레한 잡동사니가 쏟아져 나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정리를 좀 해둘걸. 제대로 들어가지도 않는 것들을 억지로 서랍에 다시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서랍에서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없었다. 잠깐 굽혔던 허리를 펴는데, 뒤에서 그 사이를 못 참고 침대에서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체중에 눌려 이불이 구겨지는 소리에 눈매를 잔뜩 찡그린 하이메가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어디 가지 말고 그 위에 있어.”
“들렸어?”
“이 좁은 곳에서 그게 안 들리면 어쩌자는 거야. 얌전히 있어.”
“옷 다 벗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괜히 귀가 달아올랐다. 맨살에 스치는 이불소리가 너무 적나라하게 들리는 바람에 어이없게 헛웃음을 삼켰다. 이불을 둘렀는지 침대에선 연신 천 구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일부러 그 소리를 없애기 위해 쿨럭쿨럭 기침을 했다. 헛기침을 마지막으로 두 번 정도 더하고 나서 다시 허리를 숙인 채 무엇인가 찾기 시작했다.
‘…심심한데.’
이불을 머리끝까지 둘러쓰고 뒹굴던 바트는 벽장 안에 들어있는 모든 짐을 들어낼 것처럼 움직이는 하이메의 등을 바라보았다. 목에서 쭉 시선을 타고 내려오면 중간쯤에 스캐럽이 있겠지. 블루비틀. 잠깐 생각한 단어 하나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잠시 얼굴에서 장난기가 가신 바트가 입술을 앞으로 쭉 내밀며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아니 도대체…아 찾았다.”
가장 안쪽까지 뒤지던 하이메가 드디어 원하는 걸 발견했는지 작게 탄성을 질렀다. 손에 무엇인가 들고 침대 앞으로 척척 걸어왔다. 차마 얼굴을 보긴 그랬는지 어색하게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바트의 얼굴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이거 입어.”
“이게 뭔데?”
“뭐긴 뭐야. 평상복 아냐. 물론 새것은 아니긴 한데…….”
눈앞에 들이댄 것은 옷이었다. 까무잡잡한 손에 들린 옷을 한참 바라보던 바트는 쉽게 그것을 받아들지 않았다.
“깨끗하게 빨아서 둔 거야. 의심하지 말고 입어줄래?”
“아니 그게 아니고. 난 이런 거 없어도 괜찮은데.”
사실 그것도 맞는 말이긴 했다. 바트는 딱히 영저스티스 본부에서 나가서 할 만한 일이 없었다. 혹시나 할 일이 있다면 유니폼을 입고 나갈 것이기에 딱히 이곳에 있는 동안 평상복을 입을 거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집스럽게 자신에게 옷을 건네는 하이메를 보면서 다시 한 번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왜? 난 거기서 안 나갈 거고, 하, 어차피 투입될 땐 유니폼을 입잖아. 별로 그런 거 필요 없다고. 설마 나 옷 갈아입히려고 여기로 부른 거야? 오 블루. 난 정말…….”
“그냥 좀 입어라!”
“응?”
“그러다 잠입 미션이라도 받으면 내가 히어로다 하고 그 옷 그대로 입고 갈 거야?”
“그야…….”
“그러니까 일단 주는 대로 입으라고. 시간의 여행자 씨.”
볼을 꾹꾹 누르는 손길에 못 이겨 옷을 받아들었다.
“음…근데 블루. 네 뜻은 잘 알겠어. 근데 질문이 있는데 말이야. 이거 디자인이 좀 어린애 거 같은데.”
“…….”
“맞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진 하이메가 낮게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귀 끝이 좀 붉어지는 것을 본 바트가 좀 더 짓궂게 물어왔다. 결국, 손가락 사이에서 죽을 것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게…내 옷은 안 맞을 거 같아서 그렇지 않아? 내가 더 크잖아. 그래서 옛날에 입었던 좀 작은 옷에서 찾았거든?”
“정말? 이거 블루가 입던 옷이야? ”
“그래!”
“오…디자인이 좀…….”
“그대로 그것마저 뺏고 창문으로 내쫓기 전에 얌전히 받아 입어. 바지는 모르겠다. 맞을 거 같긴 한데.”
“안 맞으면?”
“그러면 다음에 옷이라도 사러 가자.”
“오 블루. 이제 진짜 친구가 된 거야? 하긴 내가 널 끝까지 지켜 줄 거라고 했지? 나만 믿으라고 친구!”
“그래 믿을 테니까 옷 좀 입어줄래?”
킬킬 웃으면서 옷을 받아 입은 바트가 조금 큰 바짓단을 걷고 나서 침대에서 내려왔다. 이리저리 몸을 돌려가면서 괜찮은지 살펴보다 다시 하이메를 바라보았다.
익숙한 옷을 낯선 사람이 입고 있다는 생각을 하자 뭔가 묘한 감각이 스물스물 기어올랐다. 두 가지 색이 다른 회색이 들어있는 티셔츠의 소매 끝을 문지르던 바트가 재차 재촉했다.
“괜찮아?”
“으…응?”
“괜찮냐고.”
“그래…뭐…봐 줄만은 하네.”
“바지는 좀 큰데. 벗겨질 거 같기도 하고.”
허리를 쭉 당기니 티셔츠와 바지 사이에 속살이 보였다. 의도치 않게 남의 속살을 정면에서 봐버린 사춘기 청소년은 짧은 비명과 함께 다시 손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말았다. 하이메가 침대에 거의 쓰러질 것처럼 누워서 간신히 말을 이었다. 사실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이메 레이예스. 심박동 수가 증가하고 있다. 원인은 임펄스다. 당장 그를 없애라.’
‘제발 조용히 좀 해.’
‘하이메 레이예스. 임펄스는 위험하다. 당장 없애.’
‘좀.’
‘임펄스는 위험해.’
“아…….”
“그래서 어쩔 거냐고!”
하이메가 열심히 스캐럽과 대화를 하는 사이 앞에 서 있던 바트가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까부터 계속 혼자 중얼중얼 혼잣말하는 것 같은데 아무리 불러도 반응을 하지 않았다. 뭐냐고! 바트가 지르는 소리에 퍼뜩 둘만의 세계에서 빠져나온 하이메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럼 당장 바지부터 사러 가자.”
“응?”
“…어?”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는 하이메가 눈을 마주치면서 허탈하게 웃었다. 임펄스가 나타난 이후로 뭔가 자꾸 이상한 일이 생기고 있었다. 단단히 말려들었다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스캐럽은 못마땅한 듯 연신 거부 의사를 밝혔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 없었다. 하이메는 약속을 지켜야 했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얻어 입은 것 같은 차림의 바트를 끌고 나갔다.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은 바지를 벗기고 새것을 사 입히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
“임펄스 언제 그런 옷을 샀어?”
“응? 이게.”
“아 저기 임펄스 잠깐 이야기 좀.”
“어, 블루! 이거 그러니까…읍!!!”
“잠깐 중요한 일이 있어서 이 녀석 좀 빌려 가도 될까?”
과자를 까먹으면서 입을 열려고 하는 임펄스를 급히 막아섰다. 두 손으로 단단하게 입을 막은 블루비틀이 웃으면서 저 구석으로 임펄스를 질질 끌고 갔다. 그런 모습이 너무나 의도적이라 여자애들이 까르르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모든 영 저스티스 멤버들은 잠깐 그 둘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별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 곧 주의를 딴 곳으로 돌렸다.
저 한구석까지 임펄스를 끌고 가다 그것도 모자라 밖으로 나온 블루비틀이 연신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터덜터덜 끌려 나온 임펄스가 손에 들고 있던 초콜릿 쿠키를 마저 입안에 집어넣었다. 손가락에 붙은 과자 가루를 털어내는 것까지 보고 나서야 하이메가 입을 열었다.
“내가…뭐라고 했지?”
“뭐? 아, 말하지 말라고. 아직 말 안 했어.”
“내가 막아서 안 한 거잖아! 그 시기에 막지 않았으면 내 옷이라고 주절주절 다 이야기했을 거 아냐.”
“근데 그게 뭐가 어때서?”
“…….”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말문이 막혔다. 이상하게 벌린 채 굳어버린 입을 바라보던 임펄스가 한마디 더 덧붙였다.
“그냥 빌려준 거 아니야? 뭘 그렇게 신경 써?”
“…….”
“응? 블루? 친구? 또 정신이 나갔네. 역시 스캐럽이 문제가 되는 거 아냐? 내 말 들려? 블루? 블루? 응? 블루!!”
시뻘겋게 변한 얼굴 앞에 손을 붕붕 움직이던 임펄스가 한발자국 가까이 다가왔다. 순간 온몸에 열이 확 올라왔다. 임펄스에게 잡히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하이메가 급하게 블루비틀로 변해 저 멀리 날아갔다. 따라가 볼까 생각을 했지만 어쩐지 그러면 안 될 거 같아 그만두었다.
“…이상하네.”
이미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하이메를 바라보던 바트가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돌아섰다.
꽤 멀리 날아온 하이메는 그대로 숲 속에 추락하듯 떨어졌다. 단단한 장갑에 가려진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엉망이었다. 부장을 해제하고 손으로 얼굴을 감싸 안았다.
‘그러게 내가 그걸 왜 신경 쓰고 있지.’
친구 사이에 옷 빌려주는 게 뭐가 그렇게 특별한 일이라고 부득불 입을 막으려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괜히 신경이 쓰이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신경을 쓰고 있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한 채 한참 동안 숲을 빙빙 돌았다. 바트도 딱히 특별한 의미를 두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미쳤구나. 하이메. 아주 미쳤어.’
‘그게 다 임펄스 때문이다.’
‘아니라고.’
몇 번이나 볼을 찰싹찰싹 때리고 얼굴을 진정시키고 나서야 다시 바트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어색하게 다시 물러내서 말을 붙였다. 여전히 같은 옷을 입은 채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빙글빙글 웃는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욱신거렸다.
“저…혹시 위에 옷도 사러 가지 않을래?”
“왜? 난 이게 좋은데. 편하고.”
“그게…….”
“이 옷 급하게 써야 해? 뭐 그러면 할 수 없지.”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럼?”
또 바보 같은 소리를 한 하이메가 그대로 무너졌다. 얼굴을 들지 못하는 하이메의 어깨를 팡팡 치며 웃던 바트가 옆에 같이 주저앉았다. 그리곤 들고 있던 과자봉지를 내밀었다.
“너 이거 좋아하지?”
“먹을 기분 아니야.”
“근데 내가 이 옷 입는 거 별로인가? 왜 자꾸 그렇게 신경을 써? 응? 혹시 불편한 거야? 응? 블루 말 좀 해보라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니고…….”
“흐응.”
“그러니까. 그게…….”
이 마음을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결국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지도 못한 채 입에 나오는 대로 바트한테 내뱉은 하이메는 또 한 번 자신의 입을 탓했다.
그 날 이후 바트가 하이메와 좀 더 붙어 다니게 된 것은 케이브에 퍼진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
“하이메, 이거 더 없어?”
“작작 좀 먹어라. 과자 다 털고 갈 거야?”
“하지만 너무 적은데.”
봉지를 탈탈 털어보고, 안쪽을 확인한 바트가 입가에 묻은 과자 가루를 혀로 슥 핥았다. 짭짭한 소금기가 혀에 가득 묻어나왔다. 조금 모자란 듯 입맛을 다시면서 주위를 살펴보다가 남은 과자를 발견했다.
“하나 남았네. 이거 마저 먹는다?”
“그래. 먹어라. 먹어.”
“그럼 사양하지 않고,”
탁자 위에 하나 남은 과자 상자에 손을 뻗으려 몸을 돌리자 이불 사이로 허벅지가 그대로 드러났다. 귀찮고 불편하단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방에 들어오자마자 바지를 벗어 던지고 티셔츠만 걸친 바트는 침대를 점거한 채 뒹굴고 있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던 하이메가 기함을 하며 이불을 푹 눌러 덮었다.
“아니 바지를 입던가!”
“귀찮잖아.”
정말 말도 안 되지만 반박할 수 없는 이유였다.
‘아니 난 네가 더 귀찮은데…….’
마음의 소리를 속으로 꾹 집어삼켰다. 사실 하이메가 바트에게 뭐라고 하기엔 좀 뭐한 차림이었다. 상의를 벗고 침대에 걸터앉아있는 하이메를 바라보던 바트가 킬킬 웃으면서 돌아누웠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스캐럽이 당장이라도 튀어나려고 했다. 묘한 분위기가 흐르고 말랑말랑 해질 무렵 하이메는 어디에 눈을 둬야 할까 계속 고민 중 이었다.
그 순간 과자봉지 뜯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손에 들고 있는 과자 상자를 어느새 해체하던 바트가 하이메를 보면서 씩 웃었다. 덕분에 말랑할 뻔했던 분위기는 깨졌지만, 썩 나쁘진 않았다.
“그래. 많이 먹어라.”
“어도 머으래?”
“뭐?”
“너도 먹을 거냐고.”
입안 가득 든 과자를 꿀꺽 삼킨 바트가 입을 열었다. 과자는 이미 반도 넘게 빈 상태였다. 플래시들은 원래 이렇게 많이 먹던가. 그 모습을 멍청하게 바라보던 하이메가 허탈하게 웃었다. 쉴 새 없이 먹을 것이 입으로 들어가긴 하는데 도통 살이라곤 붙어있지 않는 이 녀석의 소화체계가 조금 신기해지기 시작했다.
이 과자 맛있다는 소리가 덤으로 귀에 들렸다. 다시 한 번 선심 쓰듯 물어보는 목소리에 홀린 것이 분명했다. 고개를 끄덕인 하이메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
“어느다며.”
“어…으…읍! 어!!”
“어늑다며!!”
그대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입에 반쯤 물고 있던 과자를 푹 집어넣었다. 그리고 과자를 씹을 생각도 못 하고 그대로 굳어있는 하이메를 보고 있던 바트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 순간 입술과 입술이 스치고. 심장이 세게 뛰기 시작했다.
“헤헤…나쁘지 않은데.”
“…….”
뭐라 말도 못하고 허우적대는 하이메의 입술에 한 번 더 쪽 소리가 날 정도로 뽀뽀하고 깔깔거리며 돌아누웠다. 물론 하이메는 보지 못했지만, 바트의 얼굴도 만만치 않게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이메의 입술에서 과자 맛이 났다.
슬그머니 입술을 만져보던 바트가 숨죽이고 웃기 시작했다. 여전히 정신이 나간 하이메는 머릿속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스캐럽의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