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015] The Circulation | 딕뎀
뎀른 환수 합작에 참가했던 글입니다
플롯을 쳐내고 합작 분량만큼만 쓴다는 것이 어째 넘 길어져서 쳐낸 이유가 없어지긴 했지만...
합작 주소는 이쪽 ^^)☞ http://sayangang.tistory.com/5
새로운 일이 생길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오만 삼천 번의 낮을 지내고, 뒤이어 오는 밤을 맞이하는 동안, 데미안에게 일어나는 일은 모두 과거에 시작된 사건뿐이었다. 재미는 찾을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모든 일에 흥미를 잃어갔다.
인간으로 치면 많은 나이이지만, 드래곤으로 보자면 한없이 어린 용은 그렇게 자신의 둥지에 틀어박힌 채 좀처럼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눈을 한번 감았다가 뜨면 며칠이 지나있기도 했고, 일 년이 지나기도 했다. 둥지에 새싹이 돋으면 그 다음 비가 내리고 나뭇잎이 떨어졌다. 이윽고 찾아온 추운 추위가 온 세상을 뒤덮었다. 동굴 가장 바깥쪽이 버석버석 소리가 나면서 얼어갈 때면, 어둠을 닮은 비늘을 가진 작은 용은 길게 하품을 하며 꼬리를 좀 더 말아버릴 뿐이었다.
- 귀찮아. 저리 꺼져.
가끔 겁 없는 산새들이 둥지 안으로 함부로 날아 들어왔다. 움직이지 않는 거대한 생명체는 새의 눈으로 볼 땐 그저 커다란 돌산과도 같았다. 인간들이 가진 가장 강한 방패보다 단단한 비늘을 연약한 부리로 콕콕 쪼며 잠에서 깨기를 종용했지만, 그런 하찮은 두드림은 느껴지지도 않는 것 같았다. 흥미를 잃어버린 새마저 떠나면 동굴 안은 적막에 휩싸인 채 그대로 굳어갔다.
숨소리마저 느껴지지 않는 동면은 너무나 길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도통 접근할 수 없는 깊은 곳에 있는 동굴에선 어떤 생명의 반응도 나타나지 않았다. 몇 년 동안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던 근육이 하나 둘 굳어갔다. 해가 바뀌고 봄이 돌아올 때까지 단단한 뼈에서 돋아난 날개를 펼치는 일도 없었다. 두꺼운 날개에서 버석버석한 소리가 날 정도로 긴 시간이 흘렀다. 둥지 바로 앞까지 흘러온 부드러운 봄 햇살을 따라 푸른 잔디가 피어났다.
몇 년 만의 움직임이었다.
절대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았던 눈이 긴 잠에서 깨어났다. 완전히 굳어버린 근육이 풀어지는 덴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자신이 깨어났음을 알리기라도 하듯 낮은 울음소리를 내뱉자 동굴 발치에 다닥다닥 돋아난 풀들이 그 기세에 쓸려 완전히 누워버렸다. 지진이 난 것이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로 땅이 울렸다.
부르르 떠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던 커다랗고 푸른 눈이 천천히 깜박였다. 곧 크게 하품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날개를 타고 자라나던 덩굴식물이 뚝뚝 소리를 내며 끊어졌다. 동굴 밖으로 나오자 햇빛이 화사하게 온몸을 감쌌다. 눈이 부셔 잠깐 표정을 찡그렸다. 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 크게 날갯짓을 몇 번 하곤 고개를 한쪽으로 천천히 기울였다.
“…….”
끝이 없을 것 같았던 긴 겨울이 지나면서, 세상을 얼릴 듯 휘몰아치던 추위가 점점 물러나기 시작했다. 겨우내 시끄러운 세상을 알기 싫어 반쯤 닫아버린 데미안의 귀에 미치지 않았던 작은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 당시엔 죽은 것과 마찬가지인 동면기를 지내고 있어서 알아차릴 수 없었다. 언제부터 시작 됐는지 모르는 규칙적인 소리가 끊임없이 누군가를 부르고 있었다.
‘이제야 불러주는 건가.’
어느새 사람의 모습으로 현신한 작은 아이가 새파란 눈을 들어 저 멀리 인간들이 사는 곳을 바라보았다. 한없이 가깝지만, 막상 다가가기엔 먼 곳은 아주 느리게 변해가고 있었다.
‘너무 늦었잖아.’
드래곤이 듣기에는 굉장히 작고 약한 소리는 끊어질 것 같으면서 좀처럼 끊어지지 않았다.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심장은 항상 불안정 했다. 멋대로 뛰는 소리를 생각보다 규칙이었지만, 데미안이 신경을 쓰기 시작하면 곧바로 불규칙하게 뛰곤 했다.
드래곤과 비교하자면 한없이 약하고 작은 몸을 따라 도는 자신의 피가 끊임없이 주인을 부르고 있었다. 게다가 주인이 깨어난 것을 아는지 점점 더 강해졌다. 무시하려면 당연히 그럴 수 있었지만, 할 수 없었다. 결국, 그 부름에 답하듯 데미안이 절벽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데미안은 그 날 이후 몇 년 동안 머물던 자신의 둥지를 떠나 긴 여행을 시작했다.
***
드래곤이란 존재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지식보다 훨씬 상위의 개념을 가지고 있는 생물이었다. 어떤 사람은 그들이 이 세상을 지켜주고 있다고 믿기도 했고, 또 다른 사람은 세상의 멸망을 가져오는 악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대다수의 드래곤은 그런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자신들을 악이라 해도 그다지 상관없었다. 모든 것을 듣고 볼 수 있는 생물에겐 그런 자잘한 것은 하루에도 몇 번이나 일어나는 작은 소란에도 못 미치는 일일 뿐이었다.
‘재밌는 일이야.’
그들의 지식은 인간을 훨씬 능가했다. 종족이 가질 수 있는 지식이라는 것을 수치화한다면 아마 같은 선상에 놓기도 힘들 정도였고, 한 번 본 것은 절대 잊지 않았다. 그리고 찾고 싶은 것이 있다면 시간이 얼마나 들더라도 찾아낼 수 있었다. 자신들만의 통찰력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인간들을 관찰했다.
가끔 드래곤과 친해지는 인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이상의 관계로 발전하긴 힘들었다. 영생에 가까울 정도의 긴 세월을 살아가는 종족에게 인간이랑 순간 스쳐 지나가는 작은 경험을 뿐이었다. 그들은 가끔 인간들에게 이 세계의 지식을 알려주곤 했다. 그 가르침을 받은 사람 중엔 후에 현자라고 불리는 이들도 있어, 인간세계에서 높은 사람으로 추앙받기도 했다. 하지만 인간에게 허락된 지식과 가르침은 그들이 가진 것의 한 줌도 되지 못할 양이었다. 그저 드래곤들의 작은 취미 생활이었고, 소소한 즐거움일 뿐이었다.
하지만 어린 드래곤들을 말하자면 조금 달랐다. 충분한 경험을 하지 못한 어린 용들은 가끔이지만, 인간에게 과한 친절을 베풀곤 했다. 쉽게 친해지고 싶어 했고, 그들의 생활에 관심을 가졌다. 데미안도 그런 경우였다. 처음 만난 인간을 한 눈에 마음에 들어 한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일 것이다.
‘난 잘못되지 않았어.’
데미안을 말려줄 어른 드래곤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아이는 혼자서 커갈 뿐이었다. 어른들이 데미안을 찾았을 땐 이미 손을 쓰기엔 너무 늦은 사고를 친 후였고, 몇 번이나 어린 녀석을 설득했지만, 한마디 들으려 하지 않았다.
‘왜요? 왜 안 되는 일이죠?’
‘이건 그렇게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다.
‘그러면 그 전에 미리 알려주셨어야죠. 이미 끝난 일을 자꾸 뒤집으라 하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데미안!’
‘…아버지가 그러셨죠. 인간은 찰나보다 짧은 생을 사니까 친해지지 말라고.’
‘…….’
‘하지만 이미 제 피가 그 심장 속에서 돌고 있는데 그걸 다시 가져올 수는 없잖아요.’
‘…….’
결국. 아이가 이겼다.
이 이후로 일어날 일을 모두 알려준 브루스가 아들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고집스러운 푸른 눈매를 꼭 닮은 아들을 보며 브루스 또한 이젠 언제 적인지 제대로 생각나지 않는 기억을 끄집어 올렸다. 데미안보다 열 배도 넘는 시간을 살아온 브루스에게 조차 이번 일의 결과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더는 어긋나지 않게 인과율을 잡아주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후회하지 않겠느냐?’
‘해도 이미 돌이킬 수 없을 테니까요.’
‘그래.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일 것이고, 네게 주어진 운명일 수 있겠지.’
‘아버지는 혹시 이런 경험이 없으신가요.’
‘있었지.’
데미안은 아주 잠시 알려달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유난히 쓸쓸해 보이는 브루스의 얼굴을 보자 곧 입을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그때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이미 두 사람을 기준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인과율은 다른 사람이 간섭할 수 없었다.
***
인간들이 사는 마을로 들어오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었었다. 데미안이 자신의 둥지로 돌아가기가 쉬웠다. 그늘에 스미는 것처럼 마을에 발을 디딘 데미안은 익숙하게 마을 정중앙을 향해 걸어갔다. 미묘하게 달라진 마을이 낯설었다. 천천히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 마을에선 어린아이가 혼자 돌아다니는 일이 흔하지 않은지 다들 흘낏흘낏 데미안을 쳐다보았다. 물론 그런 시선 따윈 상관없었다. 몇몇 사람들이 데미안에게 말을 걸어왔지만, 딱히 좋은 대답을 들을 순 없었다. 광장 한가운데 만들어진 분수는 길게 물줄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데미안이 걸터앉기엔 좀 높아 보이는 곳에 훌쩍 뛰어 올라가 앉았다. 공중에 붕 뜬 발을 까닥거리며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
몇 번 신경을 쓰던 사람들도 곧 익숙해진 건지 데미안의 곁을 하염없이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하늘에 노랗게 떠 있던 태양은 정점을 찍고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피처럼 붉은 노을이 마을 전체를 감쌌다. 그런 와중에도 데미안은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태양이 저 산 너머로 사라지고, 하나둘 등불이 켜질 때까지 작은 아이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파란 눈을 태우며 하염없이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늦어.’
안대로 가려진 눈에 손을 잠시 댔다. 한쪽 눈으로 보는 세상은 생각 외로 불편했다. 사람들은 제 갈길 가기 바빴다. 기다리는 사람은 올 생각도 안 하는데 애꿎은 밤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기만 했다. 그렇게 어둠과 동화된 것처럼 하루를 지냈다.
다음 날도 해가 지나는 길목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렸다. 가까워질 듯 가까워지지 않는 심장 소리는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좀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사 일째 되던 날이었다. 사람들이 며칠째 같은 자리에 앉아있는 작은 아이를 보며 수근 거리기 시작했다. 죽은 건 아닌데, 한 곳만 바라보면서 움직이지 않았다.
작은 마을에 갑자기 나타난 아이는 충분히 눈에 띄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한쪽 눈을 가린 안대 끈이 바람을 따라 날리다 천천히 어깨에 내려앉았다. 새파랗게 타오르는 눈은 고집스럽게 휘어졌다. 쉽게 말을 할 수 없는 분위기가 내려앉은 분수대는 하염없이 솟아오르는 물줄기만 파스스 흩어지곤 했다.
“무슨 일 있어요? 오늘 마을 분위기가 왜 이래?”
“…….”
“이상하네.”
저 멀리에서 누군가 다가왔다. 인파를 헤치면서 데미안 앞에 선 순간 주위 사람들이 숨을 삼켰다. 땅바닥만 보고 있던 시선이 천천히 남자를 타고 올라갔다. 치켜뜬 한쪽 눈이 얼굴에 닿는 순간이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데미안의 눈이 흔들렸다. 그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해를 등진 채 데미안을 바라보던 남자가 파랗게 웃으면서 허리를 살짝 굽혔다.
“저기 너 말이야.”
“응? 뭐야.”
“부모님 잃어버렸니? 왜 혼자 그렇게 앉아있어?”
“알 바 아니잖아.”
“하지만 어린애가 이러고 있으면 어른들은 걱정된단 말이지. 안 그래?”
“…….”
“아이는 어른 말을 들어야 하는 거야.”
허락도 하지 않았는데 천연덕스럽게 바로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런 남자를 가늘게 흘겨보던 데미안이 다시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 시선을 졸졸 쫓아가던 눈이 다시 한 번 데미안을 붙잡았다. 옆에 있는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던 데미안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런 작은 움직임을 놓칠 사람이 아니었다.
한쪽 눈에 안대를 하고 뾰루퉁하게 입을 다문 아이는 이곳에 속해있지만 그렇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묘하게 사람들 사이에서 튀는 아이는 몇 년 째 조금도 자라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데미안 앞에 또다시 딕 그레이슨이 나타났다. 언제와 같은 일상이었고, 인과율이었으며, 바라던 일이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그런 모든 마음을 꾹꾹 누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쉽게 말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나 아직 네 이름을 모르는데. 이름이 뭐야?”
“알 거 없어.”
“하지만 이름을 모르면 널 마땅하게 부를만한 호칭이 없는걸. 야 라던가 저기 라고 부르는 건 너도 싫을 것 아냐.”
“…….”
“혹시 이름이 없어? 그럼 내가 하나 지어줄까?”
참 쓸데없는 오지랖이라고 생각했다. 짜증스럽게 찡그리는 얼굴을 긍정의 의미로 해석했는지 딕이 씩 웃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런 딕의 얼굴을 바라보던 데미안은 다시 한 번 한숨을 쉬었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항상 새로운 기분이었다.
“으음.”
‘바보 같아.’
가늘게 눈을 흘기는 것을 알아챘는지 딕이 다시 한 번 푸르게 웃으며 데미안을 쳐다보았다. 그 허물없는 웃음에 속으로 하던 생각이 들킨 것 같아서 눈을 약간 크게 떴다.
“리틀 디.”
“뭐?”
“널 리틀 디라고 부를까 해.”
“…….”
“마음에 안 들어? 하지만 다른 건 딱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데.”
“…….”
“아냐. 잠시만! 다른 거 생각해 볼까?”
데미안이 처음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딕은 그런 표정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아냐. 역시 그게 제일 잘 어울릴 것 같아.”
“…그러면 그렇지.”
데미안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따로 대답하지 않고 앉아있던 곳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리틀 디! 잠깐만! 질리도록 들었던 호칭이 귀에 끈적끈적하게 붙어왔다. 내일도 만나자는 말을 한쪽 귀로 흘린 채 데미안은 날쌔게 사람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
데미안이 딕을 만난 지 삼 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날도 여전히 한쪽 눈을 가린 채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아이는 작은 야생동물 같았다. 쓰다듬어줄까 싶어 뒤통수에 손을 데려다 되게 얻어맞은 딕이 눈을 찡그리며 손목을 흔들었다.
“손대지 마.
“리틀 디. 너무 한거 아냐?”
“언제부터 친했다고.”
툴툴대는 말과는 다르게 예전보다 훨씬 얌전한 데미안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눈은 다친 거야?”
“아냐.”
“그럼 왜 가리고 있어?‘
“알게 뭐야. 몰라도 돼.”
“하지만…….”
딕이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말을 할 때마다 데미안은 심장이 떨어질 것 같았다. 애써 아무 일도 아닌 척 표정을 가다듬었다. 금방이라도 멱살을 잡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기억을 쏟아 붓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이 쪽 눈도 이렇게 파랗고 예쁜데, 반대쪽을 안대로 가리고 있어서 좀 궁금했어. 다친 게 아니라면 두 눈을 같이 보는 쪽이 훨씬 예쁠 거 같은데.”
“계집애도 아니고 눈이 예뻐서 뭐해.”
“그리고 안대를 볼 때마다 이상하게 심장이 아프단 말이야. 묵직하고 저릿하게 누군가 틀어쥐는 느낌이 들어.”
“…….”
“리들디. 넌 내게 뭐야?”
“…….”
“마치 뭐랄까…….”
“…….”
차마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이번엔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딕 앞에서 데미안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주 잠깐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렸을 때, 일이 벌어졌다. 아주 잠깐 눈을 돌려 신발 앞 코를 봤을 때 뒤통수에 단단히 매여 있던 매듭이 휙 들려 올라갔다. 그대로 훌렁 벗겨진 안대가 데미안의 눈앞에서 흔들렸다
“뭐하는 짓이야!”
“이러지 않으면 안 보여 줄 거잖아.”
“너!!”
급하게 한 손으로 눈을 가렸다.
어지간히 딕이 귀찮게 해도 절대 보여주지 않았던 사나운 표정이 절로 흘러나왔다. 금방이라도 손끝을 물어뜯을 것 같은 입 꼬리가 바짝 당겨 올라갔다. 하지만 그레이슨은 한 손에 안대를 든 채 살짝 웃으며 움직이지 않았다.
딕은 자신에게 영감 같은 것은 없다고 쭉 생각해왔었다. 육감 혹은 센스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영적인 감각은 제로에 가까울 거라 단정했었다. 하지만 딕의 눈엔 데미안의 손가락 사이를 타고 흘러내리는 푸른 기운이 똑똑히 보였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절로 속이 울렁거리는 묘한 기운은 데미안의 손등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리다 그대로 공중에서 흩어졌다.
“…….”
“이게 무슨 짓이야!”
바락바락 으르렁거리는 작은 아이는 좀처럼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평범하지 않은 상황에 놀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이 상황을 이성적으로 이해했다. 마음은 점점 침착해지고 편해졌다. 딕이 조심스럽게 한 걸음 다가서자 데미안이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딕이 다시 한 걸음 크게 내디뎠다. 천천히 손을 뻗어 데미안을 붙잡으려 했다.
데미안은 필사적으로 뒤로 물러섰지만, 하지만 곧 따라 잡히고 말았다. 딕이 무엇인가에 홀린 듯 데미안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따뜻하기보단 살짝 차가운 손에 입술이 차지게 붙어왔다. 떨어질 듯 떨어지지 않는 따뜻한 입술이 오랫동안 데미안의 손등에 머물렀다. 간신히 떨어져 나가나 싶더니, 곧 손가락 끝에 다시 붙어왔다. 남들이 듣기에 조금 민망한 소리가 났다.
“…….”
데미안은 이 상황이 뭔가 잘못됐다고 느끼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눈을 가리던 손에 힘이 쭉 풀렸다. 주인의 말을 듣지 않는 손이 스르르 아래로 떨어졌다. 손등에서 손가락으로 이어지는 기묘한 감촉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다.
딕은 자신이 데미안의 두 볼을 감싸 쥐고 고개를 들게 했을 때, 당연히 걷어차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과 다르게 순순히 자신의 손길을 따르는 것을 보며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생각을 했다. 그렇다 해도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
“멍청이.”
“…예쁘다.”
“그레이슨 넌 정말 멍청하고 생각이 없어!! 내가…!!…
안대로 꽁꽁 감추고 있던 눈은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을 가지고 있었다. 어두운 밤에 바라보는 맹수의 눈이 저렇지 않을까 잠시 생각을 했다.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눈에선 데미안이 화를 내며 입을 열 때마다 새파란 기운이 뚝뚝 떨어졌다.
“됐어.”
“리틀 디?”
“넌 알 필요 없어. 알았어?”
“…….”
딕은 도통 데미안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인간의 말이 아닌 단오를 끊임없이 내뱉던 아이는 딕의 손에서 안대를 낚아채고 그대로 뒤로 돌아서 달려가 버렸다. 데미안이 움직이는 궤적을 따라 푸른빛의 꼬리가 생겼다 사라졌다. 그런 데미안의 뒤통수를 바라보던 딕은 도저히 잡아 세울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도 없었다.
***
다음날 데미안은 딕의 곁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며칠 동안 데미안의 얼굴이 보이지 않자 초조해진 딕은 항상 만나던 곳을 빙빙 맴돌며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뭐지.’
어느새 나타난 새카만 사람이 팔짱을 끼고 딕을 한참 동안 노려보고 있었다. 삐뚜름하게 기울어진 시선과 잔뜩 찡그린 표정까지 보아하니 얽혀봐야 좋은 소리를 못들을 것 같았다. 최대한 시비가 걸리지 않기 위해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별로 효과적이지 못했는지, 뚜벅뚜벅 소리가 들릴 정도로 거친 발걸음을 가진 채 걸어온 사람이 딕의 어깨를 콱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엄청난 힘으로 딕을 끌어당겼다. 몸이 한 바퀴 돌아간 딕은 낯선 사람과 시선을 맞부딪힌 채 어색하게 웃었다.
“저…….”
“…….”
“누구를 찾으시는진 모르겠지만,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은데.”
“뭐?”
“사람을 잘못 보신 거 같습니다.”
“…쯧.”
눈앞에 사람을 두고 혀를 차던 사람이 눈을 찌푸렸다. 딕은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어딘가에서 만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했다. 낯설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는 사람의 얼굴은 아니었다. 점차 혼란이 가중되는 표정을 보고 있던 사람이 다시 혀를 쯧쯧 차더니 입을 열었다.
“너 때문에 성장기가 와버렸잖아.”
“…네?”
“멍청하신 딕 그레이슨 덕분에 말이야.”
“저기…누구신지.”
“자기가 저질러 놓고 사람도 못 알아보다니. 정말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
딕은 도대체 눈앞에 새까만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 순간 눈앞에서 흔들거리는 익숙한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그나마 자유로운 반대쪽 손으로 안대를 흔들어 보이던 사람이 낮은 목소리로 재차 말을 걸었다.
“이젠 리틀 디라고 부르지 마. 알았어?”
데미안은 딕과 만나지 않던 기간 동안 자신의 둥지에서 지독한 성장통을 겪었다. 자연스럽게 성장해도 힘든 것을 몇 번이나 억지로 눌렀으니, 더 심했다. 며칠 동안 정신도 차리지 못하고 끙끙 앓던 데미안이 눈을 떴을 때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의 높이가 바뀌어 있었다. 낯설고 낮은 목소리가 나오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손으로 목을 잡았다.
성장기가 끝났으니 인간으로 현신하더라도 어린애로 변할 순 없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성장기에 데미안도 당황하고 있었다.
“…데미안?”
“이제야 이름을 불러주는 거냐. 너무하다고 생각 안 해? 하긴 인간의 기억력이란 그 정도 수준밖에 안 되니까 내가 이해해야지.”
“너…그러니까…예전엔…….”
“아니 도대체 뭘 들었냐고. 그레이슨! 네가 저지른 일은 제발 좀 기억할래?”
“데미안 맞네.”
“이젠 의심까지 하네? 그만둘까?”
몸만 잔뜩 커졌지 속은 그대로인 것 같았지만,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딕이 연신 웃음을 삼키는 것을 보던 데미안이 눈을 찌푸리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왔다. 이젠 딕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져서 예전처럼 머리를 쓰다듬어주기도 힘들었다.
“이제 어린애 아니라고 했지?”
“내 눈엔 아직 한참 어려 보이는 걸?”
“나이로 치면 난 네 조상뻘이거든?”
“하지만 여기는 전혀 안 자랐잖아. 안 그래?”
“아 진짜!”
당장에라도 자리를 떨치고 일어날 것 같은 데미안을 억지로 눌러 앉혔다. 완전히 기억이 돌아온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데미안은 기억할 수 있었다.
“난 널 찾을 동안 단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어.”
“알아.”
“…….”
“늦게 기억해서 미안해.”
“알면 됐어.”
“근데 나 죽고 다시 태어나면 또 잊어버릴지도 몰라.”
“내가 알아서 찾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다음번에 만나면 이 모습이야?”
아마도. 딱히 성장기를 보내고 싶진 않았어. 왜냐면 너랑 처음 만났을 때 난 너보다 훨씬 작았으니까.
“…….”
“근데 뭐 어쩔 수 없지.”
느릿느릿 대화를 끊은 데미안이 쑥 자라버린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딕은 아무 말 하지 않고 데미안의 어깨에 잠시 얼굴을 기댔다. 그러다 다시 일어났을 때, 딕의 두 손은 데미안의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이젠 두 손으로 잡기 조금 벅차긴 했지만, 딕의 눈엔 여전히 작고 어린아이였다. 엄지손가락으로 데미안의 입술을 쓸어보던 용의 피가 섞인 인간이 가늘게 웃었다.
데미안의 고개가 살짝 아래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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