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한계까지 몰려있던 친구는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의식을 놓아버렸다. 그 모습이 꼭 죽은 시체 같아 스티브는 와칸다로 이동하는 내내 가슴을 졸일 수밖에 없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윈터솔저가 된 버키를 만나고, 하이드라의 비밀을 알게 된 이후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다. 조금이라도 의연하게 대처하고 싶었지만, 버키를 본 순간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런 둘에게 와칸다 행을 권한 쪽은 티찰라였다. 방패도 없이 맨몸으로 친구를 둘러업고 걸어 나오는 캡틴 아메리카를 가만히 바라보던 티찰라가 둘을 불러 세웠다. 당연히 무시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한다. 그러면 쫓아가서 억지로 명령이라도 해야 하나. 이렇게 생각하던 순간 캡틴 아메리카가 티찰라를 바라보았다. 잔뜩 상처 입은 푸른 눈이 추위에 닿아 형형하게 빛났다.
“폐하?”
“내가 제안할 것이 있어 불렀네.”
“말씀하시면 됩니다.”
“…….”
“괜찮습니다.”
“그래.”
티찰라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할 말이 있지만, 일단 이 녀석을 안전하게 넘겨서 심판을 받게 해야 한다. 기다려 줄 수 있겠는가.”
“…….”
“그대의 친구에겐 해가 가지 않게 하겠네.”
“…그렇다면야.”
“그래 내 전용기 안쪽으로 들어가면 비밀 공간이 있지. 이 녀석을 인도할 때까진 그곳에 있으면 된다네. 응급 처치를 할 사람을 보내주겠다.”
“그러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군인은 딱딱하게 거절한다. 티찰라는 유난히 흔들리는 캡틴 아메리카의 표정을 그대로 읽을 수 있었다. 캡틴 아메리카의 가면을 쓴 스티브 로저스가 말을 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저 내 착각인가. 왕은 갑자기 어려운 문제를 골라잡은 기분이 들었다.
“그럼 일단 움직이지.”
“예, 폐하.”
물론 이렇게 쉽게 사람을 믿을 순 없었다. 하지만 몸이 성치 않은 버키를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은 힘들 것 같았다. 퀸젯이 있었지만, 이미 추적을 당하고도 남았을 것 같아 쉽게 사용할 수 없었다. 최대한 버키가 안전한 곳으로 피하고 싶었다. 그런 캡틴의 마음을 알기도 하듯 티찰라는 기꺼이 자신의 전용기 한쪽을 내주었다.
“좀 쉬고 있거라.”
“아닙니다. 폐하.”
“…걱정되는가.”
“안된다고 하면 폐하를 기만하는 것이 될 테니, 그렇게 말하진 않겠습니다.”
“그런가.”
티찰라는 미세하게 떨리는 군인의 목소리를 완벽하게 알아들었다. 캡틴 아메리카로서 감정을 숨기고 있지만, 친구를 걱정하는 친우로선 그렇지 못했다.
“이대로 영영 일어나지 않을까 항상 그런 생각을 합니다.”
“…….”
“예전엔 버키가 제게 해줬던 걱정입니다만…….”
“그랬군.”
“그게…아닙니다.”
“왜 그러지?”
“남자답지 못하게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하던 것이 떠올라서 그만.”
“…….”
“웃으셔도 됩니다.”
“…….”
“…괜찮습니다.”
“…….”
티찰라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계속 둘을 바라보자 약간 민망한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군인은 말을 길게 잇지 않았다. 티찰라는 예상외의 대답에 약간 놀란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누가 누굴 걱정한 것인지 다시 생각하려는 그 순간 버키의 몸이 축 늘어졌다. 마치 숨이 끊어진 것 같아 급히 코 밑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희미한 숨이 손가락에 닿고 나서야 간신히 안심했다. 가짜 혈청을 맞았지만, 그것이 죽음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스티브도 그랬고, 버키도 그랬다. 주렁주렁 매달린 수액 병에선 계속 약이 떨어져 내렸다. 깨어있는 것이 고통스러울 테니 진통제와 수면제를 같이 처방해 달라 말한 것은 자신이지만, 막상 재워놓고 보니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불편 할 테니 이리 와서 앉아있으란 소리도 극구 사양했다. 티찰라는 몇 번 권하다 입을 다물었다. 그 캡틴 아메리카가 이렇게 싸고돌만한 인물이면 분명 이유가 있겠지. 적당히 둘에 대해 듣긴 했지만, 둘 사이의 기구하고 끈끈한 운명을 모두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티찰라는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었기에, 일단은 모른척하기로 정했다.
“…버키.”
스티브의 손이 잔뜩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얼굴에 피 칠갑을 한 채 슬쩍 웃고 있던 표정이 또 아프게 살아났다. 심장에 쿡 박힌 채 움직이지 않는 거대한 파편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단단하게 박혔다. 반대쪽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무슨 감정일까. 스티브는 알 수 없었다. 분노도 아니었고, 슬픔도 아니었다. 좀 더 복잡하고 묘한 감정이었다.
“널 다시 볼 수 있어서 다행이야.”
“…….”
“버키.”
“…….”
수면제를 맞고 잠이 든 사람에게 들릴 리 없지만, 계속 이름을 불렀다. 완전히 날아간 왼쪽 팔은 쳐다볼 수 없었다. 깨끗하게 잘린 것도 아니라 군데군데 끊어진 전선에선 연신 마찰열이 일어났다. 이식한 메탈암이라 해도 신경은 살아있었다. 팔이 잘리는 순간부터 무슨 생각을 했을지 알 수 없었다. 한번이 아닌 고통을 또 받았을 것을 생각하니 심장이 저릿했다.
고통을 참는 것이 익숙했던 친구는 바득바득 발걸음을 옮기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면서 스티브를 먼저 챙겼다. 괜찮아? 그 한마디를 듣는 순간 눈앞이 뿌옇게 변했다. 누가 할 소리를. 울먹이지 않으려고 애써 천천히 한마디씩 끊어서 말을 했다.
아직 기억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친구는 그 순간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짧은 신음과 함께 한숨을 훅 토해냈다. 지칠 대로 지친 몸뚱이는 한 번에 무너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애써 잊어버리고 있던 고통이 밀려왔다. 신경이 연결된 부분이 그대로 파괴되면서 온몸을 잡아먹고 있었다. 있어야 할 것을 다시 잃어버린 버키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땅바닥을 긁었다. 결국, 진통제를 몇 번이나 맞고 수면제를 처방받은 후에야 기절하듯 잠을 잘 수 있었다.
“널 재우고 싶진 않았어.”
“…….”
“다시 못 일어날까 봐.”
“…….”
“하지만 고통스럽다는데, 내 욕심만 챙길 순 없었으니까…….”
“…….”
“날 이해해?”
“…….”
스티브의 목소리에 물기가 서렸다. 나직하게 말하는 목소리는 너무 무거웠다. 뚝뚝 떨어지는 온갖 감정은 그대로 뒤섞인 채 굳어갔다. 채 지워지지 않은 핏자국을 몇 번이나 지워보고, 얼굴을 만져봤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버키가 맞는데, 왜 이리 낯선지 알 수 없었다. 금방이라도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갈 것 같았다.
‘혼자서 생각을 거듭하면 점점 깊게 파고들어 가더라.’
스티브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분명 버키가 말을 걸었다. 하지만 무릎을 베고 누워있는 친구는 여전히 잠이 든 상태였다. 환청이라도 들었나 싶어 머쓱해졌다. 방금 들린 말은 어느 날 버키가 자신을 보며 흐르듯 한 것이었다. 혼자 속으로 삭이면 힘들다면서 어깨를 툭툭 치던 모습이 선했다.
“…버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눈을 감은 스티브가 고개를 숙이며 친구를 찾았다. 눈앞에 있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이 고통이 끝나면 우린 어떻게 될까. 답을 해줄 수 없는 질문을 자꾸 던지기만 했다. 차라리 목 놓아 울기라도 하면 이 답답함이 조금은 가실까 싶었다. 하지만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아니 울 수 없었다. 어린애처럼 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때가 언제였을까. 이런 생각을 했지만, 그것조차 너무 먼 과거의 이야기였다. 이젠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잠들기 전에 나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까.”
“…….”
“물어보려 했는데, 자려는 걸 깨울 수 없어서…….”
“…….”
“그래서 되묻지 않았어. 일어나서 이야기를 해줬으면 하는데…….”
“…….”
듣는 이 없는 일방적인 대화가 띄엄띄엄 이어졌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말은 점점 작아지더니 이내 들리지 않았다.
스티브는 꿈을 꾸었다. 어릴 적 이유도 모른 채 앓아누운 자신과 그 옆을 지키는 버키가 있었다. 느릿느릿 흑백 영화처럼 흘러가는 공간에 그저 존재할 뿐인 스티브는 과거의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괜한 말을 꺼냈던 것이 틀림없었다. 몇 번이나 제 손을 이마에 대보고, 그것도 마땅치 않은지 이마와 이마를 맞닿으면서 연신 걱정을 하던 친구는 대뜸 손가락을 내밀었다.
‘뭐야.’
‘약속해.’
‘…….’
‘건강해지란 소린 안 해.’
‘…….’
‘계속 나랑 같이 있어 준다고 약속해.’
‘계집애처럼…그게 뭐야. 됐어.’
‘안 할 거야?’
‘…….’
하지만 버키를 이길 수 없었다. 겨우겨우 손가락을 걸고 고개를 끄덕였다. 흐릿하게 남은 기억이 이리도 생생하게 꿈으로 나타나는지 알 수 없었다. 꿈속의 어린 버키는 내내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너무 따뜻해서 마냥 햇살 아래 있는 것 같았다. 어린 스티브는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