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011] 브루딕 원고 샘플
이미 책으로 나왔던 것이지만 샘플 백업용
표지는 언제나 감사한 마이 노쏘님 ><
※ 가인 '돌이킬수 없는 mv' 모티브
어딘지 이상한 차림새였다.
입고 있는 수트며 신발은 모두 하나하나 저 몸을 위해 맞춘 것 이었다. 옷을 걸치고 있는 몸은 탄탄하게 올라붙은 근육과 날씬하게 빠진 허리에 곧은 다리가 눈에 띄게 비율이 좋았다. 아직 완전한 성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어린애도 아니었다. 묘하게 호리호리한 체격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곧잘 붙잡았다. 긴 손가락에 가지런히 다듬어진 손톱이 보였다. 그리고 조금 더 시선을 올리면 손목 부근에 셔츠에 반쯤 가려진 고급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깔끔하게 정리된 머리 스타일까지 어디 하나 빠질만한 구석이 없는 청년에게 묘한 위화감이 든 건 아마도 그런 남자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은 물건 때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입술을 살짝 가리면서 엉성하게 몇 번 두르고 아래로 축 늘어진 반투명한 빛깔의 스카프가 약한 겨울바람을 따라 흔들렸다. 밖에 산더미 같이 쌓아둔 매대에서나 볼 법한 싸구려 재질은 절대 아니었다. 고급스러운 천이 겨울 해를 받으면 반짝반짝 윤기가 났다. 푸른색에 검은색과 금실을 섞어 복잡하고 화려한 문양을 짜 넣은 스카프를 두르고 있는 청년의 눈도 회색의 도시가 가라앉은 푸른색을 띄고 있었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 장갑조차 끼지 않았는지 깍지를 낀 채 허벅지 위에 가볍게 올려놓은 손은 이미 빨갛게 얼어갔다. 엄지로 다른 엄지손가락을 문질렀다. 눈을 살짝 내리깔고 한숨을 쉬면 좁은 입술 틈 사이로 긴 숨이 하얗게 일어났다.
“…루스!!”
멍하니 초점이 풀린 눈에 생기가 돌았다. 굳게 닫혀있던 입술이 가볍게 올라갔다. 누군가를 부르는 동시에 튀어오르는 것처럼 일어선 남자가 눈앞에 있는 사람의 팔을 답싹 잡고 매달렸다. 웨인 기업의 앞마당이지만 그런 것 따윈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자신의 팔에 매달린 청년을 보던 브루스의 얼굴이 씰룩 움직였다.
“…집에 있으라고 했을 텐데?”
“브루스가 보고 싶어서 나왔어요. 오늘 스케줄 끝난 거 다 알고 있어요. 집으로 갈 거죠?”
“…….”
“네? 아저씨.”
“…….”
딕이 아저씨라고 말할 때 마다 눈이 곱게 휘어졌다. 잔뜩 들떠서 종알거리는 청년과 달리 아저씨라고 불린 브루스 웨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딕의 방문에 당황한 것이 틀림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브루스를 향했다. 브루스는 고담의 화제의 인물이었으니까. 눈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얼굴에 살짝 한숨을 쉬었다.
“딕.”
“네 아저씨.”
“집에 돌아가 있어라.”
“같이 가면 안 되나요?”
“난…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다.”
“거짓말!!!”
“…딕!”
“…….”
“집에서 보도록 하자.”
“…….”
딕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면서 고개를 푹 숙인 딕이 꽉 잡고 있던 팔을 놓았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가리는 스카프가 생경스럽게 휘날렸다. 브루스는 다시 짧게 집에 돌아가 있어라-. 라고 말한 다음 자신의 차를 타고 사라졌다. 그렇게 거리에 홀로 서 있는 딕은 한참동안 못이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잠깐 동안 딕에게 쏠린 시선은 이내 브루스가 자리를 뜨자 제 갈 길을 찾아 흩어졌다. 저러다 그대로 얼어버리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 때쯤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몸은 터덜 터덜 걷기 시작했다.
멋대로 저택을 나가면 안 된다고 하는 알피를 몇 번이나 설득하고 떼를 써서 물어물어 찾아온 길이었다. 생각보다 저택과 회사의 거리는 멀었고, 코트조차 제대로 입지 않고 나온 몸은 꽁꽁 얼어갔다. 브루스를 만나면 당연히 차를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기에 회사 앞까지만 오는데 집중했었다.
“어쩌지.”
낯선 도심을 홀로 걷는 딕의 눈이 조금 불안해 졌다. 모르는 사람이 많은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렇게 골목이 많은 곳은 별로였다. 몇 번이나 지우려 했지만 스멀 스멀 깊은 곳에서 기어 나오는 기억은 금방이라도 딕의 뒤통수를 쭉 잡아당길 것 같았다.
몇 번이나 둘러서 목에 감았던 스카프는 다 풀어져 바람에 풀려 날아가기 일보직전이었다. 꽁꽁 언 손으로 소중하게 스카프를 다시 목에 감은 딕이 살짝 눈을 감았다. 그제야 추위가 느껴졌다. 살이 에일 것 같은 겨울바람이 딕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눈물조차 얼려버릴 것 같은 추위에 가볍게 기침을 한 딕이 천천히 사람들 사이로 섞여들었다. 걷다보면 집이 나올 것이고 그래도 모르겠다면 아무나 붙잡고 웨인 저택을 물어보자는 속셈이었다. 웨인 저택은 딕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클 것이니 분명 아는 사람이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 ❋ ❋
딕이 저택에 돌아온 것은 이미 저녁시간을 훨씬 넘어서 밤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꽤나 헤맨 모양인지 몰골이 처참했다. 브루스는 거실 소파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읽고 있었다. 제법 굵어진 눈발을 바라보며 안절부절 하며 문가에 서있던 알피가 거지꼴로 꽁꽁 얼어서 돌아온 딕을 맞아주었다. 꽁꽁 언 얼굴이 따뜻한 집안의 공기에 녹아내리는지 살짝 부르르 떨며 신발을 벗었다. 그리곤 곧장 거실로 걸어가서 뒤도 돌아보지 않는 브루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천천히 걸어가 브루스가 앉은 소파 바로 옆에 앉았다.
“아저씨”
“…….”
“…아저씨.”
“…….”
“내가 싫어요?”
“그렇지 않다.”
“그러면…왜…….”
뭐라고 말을 덧붙이려던 딕은 입을 다물었다. 멋없는 아저씨가 대답을 해줄 것 같지 않았다. 이미 차고 넘치도록 학습된 기억은 더 이상 따지지도 못하고 지레 겁을 먹은 채 물러서게 만들었다. 하지만 가장 잡아주길 바라는 그 순간 브루스는 여전히 딕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조금 더 기다려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숨이 막힐 것 같은 정적뿐이었다. 브루스의 눈을 보는 것조차 무서워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낯선 사람을 보는 것 같은, 그것이 아니라면 잔뜩 실망한 눈초리를 받게 될 것이 분명했다. 차라리 모르는 척 하는 것이 나았다.
“…….”
“갈게요.”
“…….”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 신문만 바라보는 브루스의 손가락 끝만 겨우 보았다. 눈이 마주칠까 싶어 고개를 푹 숙인 채 소파에서 일어난 딕이 천천히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가벼운 발걸음이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고 나서야 브루스는 눈을 살짝 찌푸리며 들고 있던 신문을 내려놓았다. 미간에 잡힌 주름은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던 알프레드가 곧장 딕의 뒤를 따라 올라갔다. 알프레드는 역시 브루스의 마음을 읽어내는 훌륭한 집사였다.
“도련님?”
“…….”
“그렇게 주무시면 감기에 걸리실지 모릅니다.”
“…….”
뒤따라온 알프레드가 딕의 방을 열었다. 옷조차 제대로 벗지 않은 인영이 침대 위에 웅크리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수트는 이미 잔뜩 구겨진 채 몸에 깔려 있었다. 푹신한 이불이 깔린 침대 위에 약간 웅크린 딕이 눈을 가늘게 뜨고 스카프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따뜻한 공기에 몸이 급속도로 녹으면서 잠이 오는지 뻑뻑한 눈을 한 손으로 문질렀다. 젖은 머리를 말릴 수건과 따뜻한 차가 담긴 티 포트를 협탁에 올려놓은 알프레드가 딕을 바라보다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방 안에 다른 사람의 기척이 없어지자 그제야 딕이 뒤척이며 자세를 바꾸었다.
저택의 공기는 너무 무거웠다.
가늘게 떨리는 입술이 크게 숨을 들이 쉬었다.
품 안의 작은 새 같았던 아이가 독립을 했다. 언제까지나 로빈으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제법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직장에서 해고당하듯 로빈 옷을 벗어버리고 뱃 케이브를 나간 아이는 발길을 끊어버렸다. 갑작스럽게 사람이 하나 줄어버린 웨인저는 조용하다 못해 얼어붙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 브루스는 브루스대로 여전히 바빴다. 하긴 저 사람이 한가할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점점 더 침묵 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웨인 저택엔 브루스와 알프레드 두 사람의 대화 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웨인 저택에 사소한 일이 하나 생겼다.
브루스에게 선물이 들어오는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선물이나 답례품, 초대장이 하나도 도착하지 않는 쪽이 더 이상할 정도였다. 제법 큰 물건인 듯 낑낑거리는 배달부의 목소리를 들은 알프레드가 저택 문을 열었다. 엄청난 크기의 무엇인가를 들고 들어오는 배달부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천으로 푹 뒤집어씌운 것은 새장 같기도 했고, 조각품 같기도 했다. 커다란 리본으로 묶인 채 무슨 물건이라고 설명도 되어있지 않은 것을 쉽사리 집에 들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꽤나 무거운 것인지 배달원은 집사를 재촉했다.
“딕 그레이슨씨 댁 맞죠?”
“예?”
“딕 그레이슨 씨가 여기 사시는 분 아닌가요? 으음? 주소는 맞는데? 아닌가요?”
“아뇨. 맞긴 합니다만…….”
“그래요? 그럼 여기 사인 좀 해주시죠.”
“…….”
알프레드는 무슨 일인지 잘 알 순 없었지만, 이 물건을 돌려보내선 안 된다고 직감적으로 판단했다. 어쩔 수 없이 배달용지에 가볍게 사인을 하고 거실 쪽에 옮겨다두었다. 당장이라도 뜯어봐야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마 이 선물의 주인은 빠른 시일 내에 저택으로 돌아오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브루스가 오길 기다려야했다. 묘한 선물에 한참 신경을 쓰던 알프레드가 이내 그것에 익숙해질 무렵 브루스가 돌아왔다.
“저게 뭐지? 누가 보낸 건가.”
“누가 보냈는지는 모르지만 수신인은 도련님이시더군요.”
“뭐?”
“말씀드린 그대롭니다. 제가 펼쳐볼 것은 아니라 주인님께서 돌아오시길 기다렸습니다. 도련님께선 이곳에 한참동안 오시지 않을 것 같으니 주인님께서 처리하시지요.”
“딕에게 선물이?”
“리본까지 달아서 보낸 것을 보니 굉장히 귀한 것 인가봅니다.”
“…….”
거실 한 구석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선물을 바라보던 브루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렇다고 저런 것을 계속 집안에 둘 수도 없었다. 일단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침실로 옮기기로 했다. 알프레드에겐 커피를 한잔 부탁하고 수상한 선물을 계속 노려보았다.
알프레드가 건네주는 커피를 받아들곤 문을 닫았다. 꼼꼼하게 묶인 리본을 풀었다. 고급 공단으로 만든 폭이 넓은 붉은색 리본이 손을 대자마자 스르르 풀려서 손을 타고 흘러내렸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조차 내지 않고 카펫 위에 이리저리 흘러내린 리본을 빤히 바라보던 브루스가 푹 덮여진 천에 손을 댔다. 천을 벗겨내느라 안에 있는 것이 조금 흔들렸다. 희미하게 푸드덕 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 이어지는 페이지가 아닙니다 -
새가 배달 된지 다섯 밤이 되던 날이었다.
언제나처럼 패트롤을 돌고 돌아온 브루스가 뱃 케이브에서 저택으로 올라왔다. 자잘한 빌런들을 몇 명이나 아캄에 잡아넣고 온 브루스는 피곤함이 내려앉은 뻑뻑한 눈을 몇 번이나 비볐다. 그날따라 피곤함이 온 몸을 끈적끈적하게 잡아당기는 감각에 브루스는 침대를 찾고 있었다. 브루스는 워낙 운동도 많이 하고 자기 관리를 꼼꼼히 하는 사람이었지만 유독 이상한 날이었다. 약간 비틀거리는 발걸음이 침실로 향하던 그때 희미한 낯선 소리가 들렸다.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몸은 곧장 경계를 하며 천천히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
저택 안에서 들리는 소리는 아니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실내는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시계 바늘 소리 외엔 들리는 소리가 없었다. 조심스럽게 창가로 다가섰다. 구름에 가린 달은 제대로 어둠을 걷어주지 못했다. 항상 뿌옇고 어두운 고담의 하늘엔 군데군데 별이 박혀있었다. 소리는 확실히 외부에서 나는 것이었다. 좀 더 귀를 기울여보니 저택에서 제법 떨어진 곳인 듯 했다. 무엇인가 가로막혀서 잘 들리지 않는 것인지, 단순히 거리가 먼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저택 내부로 숨어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긴장을 풀 수는 없었다. 브루스 웨인도 배트맨도 항상 사방에 적이 많았으니까.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해 품 안에 배트랭을 하나 집어넣었다. 웨인 저택에서 배트랭을 쓸 일이 없기를 바랐지만 안타깝게도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었다. 어둠을 따라 능숙하게 몸을 숨긴 채 현관으로 향했다. 조심히 움직이는 와중에도 낯선 소리는 계속해서 들렸다. 조용히 울려 퍼지다가도 끊어질 듯 넘어갔고, 다시 희미하게 이어지는 소리는 높고 낮은 음색을 반복하며 집요하게 귀를 두드렸다.
브루스가 천천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얼굴에 달라붙는 어둠은 머금은 습기를 내뱉으며 끈끈하게 늘어졌다.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매끄럽게 닫히는 문은 별다른 소음 없이 단단하게 닫혔다. 다시 어둠의 길목을 따라 건물에 바짝 붙어 섰다. 배트맨이 아닌 브루스 웨인으로서 이런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은 좋지 않은 행동 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칠흑 같은 밤이 날랜 몸놀림을 감춰 주었다. 소리가 들리는 곳을 찾아 천천히 그러나 날렵하게 움직였다. 어둠은 사람의 시각을 무디게 만들기에 귀를 믿었다. 귀로 집중된 신경은 예민하게 소리의 위치를 파악했다.
그리고 그 소리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나자 브루스는 그대로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눈으로 보지 않고 귀로 들으며 찾아온 곳은 식물원이었다. 희미하게 들렸던 까닭은 유리로 막혀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끊어질 듯 높고 깨끗하게 올라가던 울음소리가 브루스가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기라도 하듯 조금 더 커졌다. 마치 어서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는 것 같은 소리가 유리를 지나 천천히 퍼져나갔다.
“…내가 생각보다 굉장히 피곤하나 보군,”
생각보다 쉽게 풀린 일에 맥이 탁 풀렸다.
하긴 찬찬히 생각해보면 빌런이나 웨인 기업을 위협할 만한 외부 세력이 집안에 침투 했는데 팔자 좋게 노래 따위를 부를 것 같지는 않았다. 브루스는 솔직하게 자신이 지나치게 예민해져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아무리 피곤하다해도 새의 노랫소리와 침입자를 구분 못할 정도라니. 입맛이 썼다. 여기까지 왔으니 그래도 얼굴이라도 보고 갈까 싶어서 식물원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물기를 머금은 잔디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축축하게 신발에 감겨들었다.
“그러고 보니…이 녀석 예민해서 목소리를 듣기 어렵다고 했던 것 같은데. 놀랄만한 일이군.”
“…….”
브루스가 자신이 내뱉은 말에 놀라 입을 다물었다. 달이 유난히 밝은 것 같더니 자신도 그 달빛에 홀려버린 것이 틀림없는 듯 했다. 눈가에 스미는 달빛을 애써 털어냈다.
“너무 감상적이었어.”
가볍게 터치 패드를 눌러 식물원의 문을 열었다. 흔한 마찰음 하나 없이 조용히 열린 문을 지나자 좀처럼 보지 못했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새 구름이 걷혔는지 식물원 천장 유리를 통해 달빛이 하얗게 쏟아져 내렸다. 달빛이 가루처럼 부서져내려 나무가 뽀얗게 빛나는 것 같아 브루스는 눈을 몇 번이나 감았다 떴다. 세상에 둘도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지만, 그다지 현실감이 없었다.
* * *
찬찬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광경이었을 것이다. 고담의 하늘은 언제나처럼 뿌옇고 어두운 것이 당연했고, 달이 그렇게 크고 밝게 쏟아질 듯 뜨는 날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비현실적이라고 느낄 정도로 크고 밝은 달에 홀리기라도 한 듯 브루스는 그렇게 한참동안 식물원을 바라보기만 했다. 바다를 닮은 푸른 눈에 달빛이 천천히 스며들었다. 설탕이 녹아들 듯 푸른 눈동자에 점점이 박혔다 사라지는 달빛이 보였다.
하얀 달빛으로 표면이 반짝거리는 나무 사이에 무엇인가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 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움직였을 때 브루스는 감상에 젖어있을 상황이 아니란 것을 느꼈다. 생각보다 큰 그림자가 달을 등지고 움직였다. 새가 움직이는 것보다 훨씬 커다란 움직임이었다. 그 것이 사람의 그림자라는 것을 안 브루스가 급하게 배트랭을 꺼냈다.
“…!!”
다시 생각해도 기가 찰 일이었다. 무성한 나뭇잎 사이에서 쑥 나온 것은 사람의 팔이었다. 긴 손가락이 달빛을 쫓는 듯 허공을 헤집다 나무 둥치를 단단히 붙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천에 물이 들 듯 조용히 어둠 속에서 빠져나온 몸은 매끄러웠다. 옷을 입은 것인지 조차 구분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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