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013] Grand Guignol | 영저 배틀로얄au 샘플
몇분에게 문의가 있어서 재판 수요 조사중입니다.
이번 재판이후 따로 판매 예정은 없습니다 >< 한번 뽑는데 넘 부담이라..orz
재판은 최소수량(5권)이 차야 진행됩니다
최소 수량이 차면 선입금 후 제작해서 발송해 드립니다.
기한은 입금으로부터 약 2주정도 소요 될 예정입니다!
통판으로만 보내드립니다
재판을 희망하시는 분은 아래 양식은 복사해 joinsama@naver.com 으로 보내주세요
이후 모든 진행은 메일로 이루어 집니다.
질문이나 문의가 있으시다면 댓글로 달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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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 신청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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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가 명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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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The first night fall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시멘트벽이었다.
시야가 온통 회색으로 꽉꽉 들어차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답답했다.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생각만큼 움직이지 않았다. 비명을 지르며 축축 늘어지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을 때 속이 뒤집혔다. 비릿한 냄새가 울컥 목으로 올라왔다. 몇 번이나 헛구역질 하다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여기는.”
급하게 얼굴에 손을 가져갔다. 딱딱한 도미노가 손끝에 닿았다. 정신을 잃고 있는 사이 정체가 들키지 않은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넓지도 그렇다고 좁지도 많은 대피소는 희미한 전등 불빛이 바람에 흔들리며 어지러운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흔들리는 불빛에 의지해 쓰러져있는 사람들을 하나둘 세어보다 이내 머리를 붙잡으며 숫자 세기를 그만두었다. 징징 울리는 머리의 통증이 시선을 같이 흔들고 있었다. 두 개로 보이다 다시 하나로 보이는 사물은 어지럼증을 유발했다.
위치라도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벽에 있는 작은 창문을 넘겨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축축하게 내려앉은 회청색 하늘뿐이었다. 우글우글 모여 있는 불행이 만들어낸 기분 나쁜 하늘색은 보는 사람마저 우울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입을 다물고 있던 나이트윙이 다시 한 번 길게 신음을 뱉으며 벽에 기대앉았다. 시계조차 없는 허름한 대피소에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조차 알기 힘들었다.
“…으.”
하나둘 사람들이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몇몇은 머리를 잡고 구르기도 했고,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서로서로 도와주면서 일어나 앉았다. 나이트윙이 빠른 눈짓으로 인원수를 세었다. 하나. 둘. 셋. 불행일까 다행일까. 오늘 만나기로 했던 사람 중에서 빠진 인원은 없었다.
“여기가…어디지?”
“모르겠어. 내가…으.”
“갑자기 정신을 잃은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형.”
“…….”
“다들 무사한 거야?”
“아마도.”
짧은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못하고 툭툭 끊어졌다. 다들 정신이 없는 표정으로 서로 둘러보았다.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오는 시선에 익숙한 얼굴들이 하나 둘 나타났다. 메간 옆에 붙어 앉아있던 비스트 보이가 눈을 깜빡거리며 말을 걸었다.
“누나 목에…그거 뭐야?”
“응?”
“저기도…나도. 모두 목에.”
아무런 정보가 없는 곳에서 말 한마디는 생각보다 엄청난 효과를 발휘했다. 이 상황에서는 조금이라도 많은 정보가 필요했다. 다들 무의식적으로 목에 손을 가져갔다. 딱딱한 목걸이가 손끝에 닿았다. 겨우겨우 틈을 찾아 손끝을 집어넣어 당겨보았지만 딱 맞게 조여진 목걸이는 도저히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냥 이렇게… 풀면 되잖아?”
늘 하던 대로 빠져나오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슈퍼 파워가 모두 사라져 버린 몸은 조금도 빠르게 움직일 수 없었다. 두 손을 내려다보며 할 말을 잃은 임펄스를 바라보던 다른 멤버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
“…….”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금방이라도 해결될 것 같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평범한 사람이 된 것처럼 목걸이 하나 잡아 뜯을 수 없었다. 물론 일찌감치 목걸이 부수는 것을 포기한 나이트윙은 구석에 쌓인 상자 위에 올라가 앉았다. 손을 쥐었다 다시 폈다. 슈퍼 파워가 없는 평범한 사람에겐 아무런 영향이 없는 것 같았다. 무엇을 위해 이런 일을 벌인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모두에게 성의껏 초대장을 보내고, 억지로 한 자리에 감금시킨 장본인은 아직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기분 나쁜 연극을 한 편 보는 것 같았다. 평범한 빌런이나 범죄 끄나풀들이 만들 수 있는 무대는 결코 아니었다. 얼핏 보기엔 그저 질 나쁜 장난에 가까워 보였다. 납치를 당하거나 구금되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침울한 공간을 찬찬히 살펴보면 더 큰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 무대의 시작이 어디서부터였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하다못해 슈퍼 파워를 봉쇄하기 위한 대비도 완벽했다. 저스티스 리그, 혹은 배트 케이브의 메인 컴퓨터가 해킹당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런 시도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한없이 낮은 확률이었다. 가장 비밀스러운 곳에 들어가기 전에 분명 누군가가 알아챌 것이 뻔했다.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는 곳엔 언제나 사람들이 있었고, 보는 눈이 많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
“아스널?”
“레드애로우.”
“…다들 죽은 것 같진 않고. 기억하는 걸 말해봐.”
잠깐 손가락을 씹던 로빈이 입을 열었다. 낮고 조용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렇게 조용조용 말하는 말소리조차 좁은 곳에선 더 크게 들렸다. 희미한 기억을 더듬던 로빈이 가장 마지막 파편을 잡아내곤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기억나는 것은 없었다.
“가장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누군가 웃고 있었어요.”
“뭐?”
“웃으면서…잘 해보라고. 그다음 곧바로 시선이 흐려지고 정신을 잃는 바람에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
“도대체 이런 일을 꾸민 녀석이 누구야.”
“다들 몸에는 문제가 없는 거지? 이 수상한 목걸이라 우리의 능력을 제한하고 있는 것을 빼면 말이야.”
“일단은.”
“그럼 다들 평범한 상태인 건가.”
“이런 때라면 누가 덤벼도 나이트윙을 이기지 못할 것 같은데? 안 그래?”
“라군 보이. 농담은 그만둬.”
“농담 아냐. 다들 그렇게 생각하잖아. 나는 슈퍼 파워가 있는 상태로도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고?”
“…….”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이럴 때 시비를 거는 건 좋지 않아.”
“맞아. 일단 무슨 일인지 알아보는 쪽이 먼저 아냐? 일단 우리는 마실 물도 식량도 없는데다 이곳 지리도 모른다고.”
“다들 흥분하지 마. 무슨 수가 있을 거야.”
아르테미스가 끼어들었다. 손버릇처럼 뒤에서 화살을 꺼내려 하다 멈칫했다. 무기가 없었다. 수족과 같이 들고 다니던 활도 없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좀 심각한 거 같아. 그 말을 끝으로 아르테미스는 입을 다물었다. 잘근잘근 입술을 뜯었다. 분명 무엇인가 할 말이 있는 듯 했지만 삼켜버렸다.
무슨 말을 들어도 나이트윙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말이 없었다. 조용히 높은 곳에 올라앉아 모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든 사람들은 서로서로 어깨를 마주 대고 앉았다. 로빈이 박스 밑으로 걸어갔다. 훌쩍 박스를 타고 올라갔다. 가볍게 로빈을 쳐다보던 시선이 다시 저 먼 곳을 바라보았다. 사방을 막고 선 시멘트벽 너머를 바라보는 나이트윙은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았다. 묘하게 익숙해 보였다. 그럴 리 없다고 고개를 휘휘 흔든 로빈이 상자에 등을 기댔다.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갔다. 사람들은 점점 초조해졌다. 다들 가지고 있는 GPS는 전원도 켜지지 않는 먹통이었다. 통신기는 이미 귀에서 빠진 상태였다. 이쪽에서 저스티스 리그 쪽으로 연락한 수단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해를 삼킨 어둠이 섞여 들어가 좀 더 짙어진 하늘은 음울한 기운을 잔뜩 담았다. 그리곤 작은 대피소를 삼켜버릴 듯 가까이 다가왔다.
◆ ◆ ◆
그 날은 그다지 이상할 것이 없는 평범한 하루였다.
다들 들떠있는 기분에 화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유난히 하늘이 맑았다. 잠시 발걸음을 멈춰 섰다. 그리곤 고개를 들었다. 구름 하나 지나지 않는 맑고 푸른 하늘을 쳐다보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았다. 바람조차 비켜 가는지 주변은 조용하기만 했다. 손끝에 말려드는 바람은 작은 꽃잎을 남긴 채 스르륵 빠져나갔다. 영 말이 없는 나이트윙이 걱정되는지 동료들이 어깨를 붙잡고 허리를 쿡쿡 찔러댔다. 미묘한 표정으로 옆에 붙어선 동료들을 바라보다 이내 피식 웃어버린 얼굴엔 그제야 화색이 돌았다.
“이런 날만 계속되면 좋을 텐데.”
“갑자기 무슨 사색에 빠져있고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이봐. 나이트윙. 자꾸 그렇게 숨길 거야? 우린 동료 아닌가? 가끔 그렇게 혼자 웃고 있으면 영 기분이 이상하다고.”
“죄라도 지었나 보지.”
“저게.”
시시한 농담이었다. 금방이라도 뒷목을 낚아챌 것 같은 손을 가볍게 허리를 숙이며 피했다. 둘 사이를 빠져나오자 뒤에서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를 들었다. 딱히 놀랄 것도 없는 평범한 일인지라 큭큭 웃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굳이 이런 식으로 시간을 내서 전·현직 사이드 킥들과 동료들이 모이는 일은 그리 흔치 않았다. 다들 임무를 수행하느라 바쁘기도 했고, 자타나는 리그의 일원이기도 했다. 하지만 딱히 거절할 명분도 없었고, 오히려 이런 공식적인 휴식이 반가울 정도로 과로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리그에서 무슨 생각으로 이런 자리를 마련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한마디 예고도 없었다. 그저 다들 한 통의 메일을 받았을 뿐이었다. 날짜와 시간. 그리고 모일 장소. 전용 회선을 열어 확인한 메일 안엔 짧은 내용만 간결하게 담겨있었다.
다들 모여서 걷는 도중 누군가 말했다.
“그런데 이 일은 누가 계획한 거야?”
그제야 사람들은 미묘하게 뒤틀린 계획의 틈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았다.
“나도 모르지. 난 당연히 나이트 윙이 알 거라고 생각했어.”
“물론 나도.”
“…….”
“이런 건 보통 나이트윙 쪽으로 내려오는 거니까 당연히 한번 거쳐서 연락을 받았거니 했지. 난 별다른 생각하지 않고 나왔는데.”
오히려 놀란 쪽은 나이트윙이었다. 당연하듯 바라보든 얼굴들을 쭉 쳐다보다 손을 설레설레 저었다.
“…아냐. 난 이런 모임 언질 받은 적 없어.”
“뭐?”
“그럼 도대체 누가 불렀다는 거야.”
“나도 모르지. 하지만…우리를 알고 있는 사람은 분명할 거야. 그게 아니라면 불러낼 수조차 없을 테니까.”
“…….”
“큰일은 아니겠지? 초대형 프로젝트에 투입이라던가?”
“그럴 거라면 자타나까지 모이라 하지 않았을 거야. 리그의 일원이잖아. 아.”
“리그의 일원도 모르는 일이라고? 이거 확실한 거 맞아?”
“하지만 리그 쪽에서 온 연락이었잖아.”
“…모르겠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그 양반들이 우리 놀라게 하려고 이런 걸 준비했을 리도 없고.”
“가보면 알겠지.”
애써 웃으며 불안한 기분을 눌렀다. 빌런의 습격도 없었고, 급하게 달려가서 구해줘야 할 사람들도 나타나지 않았다. 날씨는 딱 기분 좋을 만큼 부드러웠고, 동료들도 곁에 있었다. 하지만 한 걸음 한걸음 발길을 옮길수록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심장 깊은 곳에서 시작된 불안함이 온몸을 휘감았다.
“왜 그러니?”
“…….”
그 순간 비스트 보이가 앞으로 쓰러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나이트윙이 빠르게 전열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범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정체 모를 희뿌연 가스가 주위에 가득 차 있었다. 나이트윙이 급하게 호흡기를 찾았다. 그 손을 누군가 세게 내리쳤다. 짧은 신음과 함께 손에 힘이 빠졌다. 휴대용 호흡기가 바닥으로 떨어져 뿌연 연기 속으로 튕겨 나갔다.
기침소리가 점차 커졌다. 하나둘 동료들이 쓰러지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 하지만 이름을 불러서 확인할 수도 없었다. 간신히 숨을 참고 맑은 공기를 찾아 헤매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바닥에 녹아내리는 것처럼 무겁게 달라붙는 다리는 달리는 것을 방해했다. 시야가 흐려지고 꾹꾹 참던 기침이 터져 나왔다. 입을 벌림과 동시에 가스가 울컥 새어 들어왔다. 이미 양껏 들이마신 가스는 폐가 가득 들러붙어 밖으로 다시 나오지 않았다.
“…….”
왼쪽 뺨이 세차게 바닥에 부딪힌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온몸에 감각이 없었다. 손가락을 겨우 움직일 정도의 의식밖에 남지 않았다. 눈앞에 쓰러진 로빈이 보였다. 그 옆에 희미하게 보이는 다리도 눈에 들어왔다. 아마 슈퍼보이일 것이다. 당장 도와주러 가야하는데 몸이 맘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힘들게 내뱉은 숨엔 가스가 가득 섞여 나왔다. 스르르 눈이 감기고 이내 의식이 아득히 멀어졌다. 오감이 모두 사라지고 가장 마지막까지 열려있던 귀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자 끝없는 어둠 속으로 쭉 빨려 들어갔다.
◆ ◆ ◆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억 전부였다.
아무리 머릿속을 박박 긁어내도 더 이상의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가스로 정신이 없는 사이에 능력을 제한할 수 있는 목걸이를 채운 걸까, 꽤 오랜 시간 의식을 되찾지 못한 탓이 컸다.
‘비가 오려나.’
저 멀리서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흐린 비 냄새를 맡았다. 불안한 마음에 화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날씨는 점점 나빠졌다. 날씨마저 따라주지 않는 이 상황에 슬슬 불안한 표정이 얼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나마 경력이 긴 사람들은 괜찮은 축이었다.
문제는 이제 막 멤버에 들어오거나 경험이 적은 녀석들이었다. 갑작스러운 돌발 상황에 대처할 능력이 떨어졌다. 서로서로 어깨를 맞댄 채 추위를 피하는 어린 동물같이 모여든 녀석들은 좀처럼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슨 위험이 있을지 모르는 곳에서 그나마 가장 안전한 곳을 쉽게 떠날 수 없었다. 작은 단서라도 찾기 위해 구석구석 뒤져보았지만 있는 것은 상자 몇 개가 전부였다. 이대로 밤까지 기다려봐서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곳을 떠나는 쪽이 현명한 생각일 것이다. 몇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잠깐.”
“왜 그래?”
“다들 조용히 해봐. 방금 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렸어.”
“스피커 소리?”
“비슷해. 여기서 가까워. 어느 쪽이지.”
“…….”
그 순간 스피커가 퍽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낯선 소리에 바짝 긴장한 사람들 머리 위로 낯선 목소리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온갖 잡음이 섞여 들어간 형편없는 스피커에서 들려 더욱 소름이 끼치는 목소리였다. 마이크를 이리저리 움직이는지 그럴 때마다 귀를 찢는 소음이 터져 나왔다. 아. 아. 흠흠. 몇 번 헛기침 하던 목소리가 좁고 더러운 대피소 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내가 준비한 파티가 맘에 드나?”
“…….”
“좋아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뭐 상관없어. 이제부터 파티를 즐기면 되는 거니까!”
“누구냐!!”
“모습을 밝혀!”
웅성거리는 동료들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모두 뒤를 돌아보았다.
“…조커.”
드디어 나이트윙이 입을 열었다. 바닥에 깔리는 나지막한 목소리를 알아들었는지 스피커 너머로 숨이 넘어 것 같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허리를 젖히고 웃다가 책상을 쾅쾅 치기도 했다. 귀를 따갑게 때리는 웃음은 좀처럼 멎지 않았다. 겨우겨우 진정한 조커가 마이크를 확 잡아챘다. 시끄러운 파열음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뭐…좋아. 슬슬 파티를 시작해볼까? 다들 대기하느라 심심했을 텐데 말이야.”
“푸딩! 룰 설명을 내가 할래!”
냉큼 마이크를 빼앗은 여자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까르르 웃으며 한껏 상기된 목소리는 정말 파티를 즐기고 있는 듯했다. 무엇인가 뒤적뒤적 종이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아, 아. 여기 있다. 지금부터 룰 설명을 하겠어요!”
“잠깐. 도대체 무슨 장난을 하려는 거야. 할리퀸!”
“참가자는 잠자코 듣기나 해!”
“…….”
빽 소리를 지르던 할리퀸이 다시 생글생글 웃으며 종이를 펼쳐 들었다. 종이 구겨지는 소리가 귓가에 추가됐다.
“설명은 한 번만 할 거니까 모두 잘 듣도록 해. 이거 못 알아들어서 죽거나 하는 건 전~혀 책임지지 않으니까. 아 물론, 너희가 그냥 죽어도 책임은 안 질 거야.”
“…….”
“너희는 10일 동안 진행되는 파티에 초대받은 거야. 지금부터 살아남기만 하면 돼. 아주 쉽지 않아? 살아남으면 이기는 거야. 파티의 주인공이 되는 거라니까? 주인공이 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해. 주인공은 한 명이어야 멋있잖아? 여기 초대받은 사람 중 딱 한 명만 영광의 승리자가 될 수 있어. 무슨 소린지 알겠지? 10일 동안 무슨 짓을 해서든 살아남으면 되는 거야. 물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조용히 해!”
“…젠장.”
“물론 이렇게만 말한다면 모두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어? 우리 모두 힘을 합쳐서 싸우지 말고 10일 동안 뭉쳐서 이겨내자. 같이 살아서 가는 거야. 아 이 얼~마나 가슴 뜨거워지는 우정이람. 안 그래? 그래서 룰을 추가했어. 주인공이 둘이 넘어가면 그 사람들은 그 목걸이가 폭발해서 죽는 거야. 산채로 펑! 하고 터지겠지. 그러니까 이곳에서는 한 명만 살아서 나갈 수 있어. 그리고 한 장소에 숨어서 마지막 날까지 버티면 안 되니까 방송으로 하루에 두 번씩 금지 구역을 지정해 줄 거야. 물론 금지구역은 랜덤으로 설정해서 알려줄 거고. 금지 구역이 풀리기 전에 들어가면 자동으로 목걸이와 반응해서 터지니까 조심해야 해. 아 재밌겠다. 그리고 이곳이 혹시나 육지와 가깝지 않을까 하고 헤엄쳐서 도망가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 게 좋아. 밖으로 나가려 하면 목걸이가 터질 거니까. 뭐 근데 무서워서 일찍 죽고 싶다면 자살해도 괜찮아. 자살하는 방법이야 여러 가지가 있을 테니까. 음…푸딩 나 다 알려 준걸까?”
모두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갔다. 과연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일까. 갑작스러운 정보들은 엄청난 경우의 수로 조합되며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모두 사실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었다. 물론 조커라면 군데군데 함정을 심어뒀을 수도 있다.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주위 공기가 점차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할리퀸 비켜봐.”
“왜? 왜? 다 알려줬어.”
“아니잖아. 제일 중요한 걸 빠뜨렸어!!!”
“푸딩 화내지 마~”
냉큼 애교를 부리며 달라붙는 할리퀸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잠깐 멈췄던 설명은 곧 다시 시작되었다. 잔뜩 엉킨 머릿속에 정보가 마구잡이로 흘러들어왔다. 상황 판단을 하기란 쉽지 않았다. 다시 마이크를 잡은 조커가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대충은 다 알아들었겠지? 서로 죽여서 살아남으면 되는 아주 재밌고 간단한 파티야. 이제 저번과 달리 추가한 룰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겠어. 한 번만 말할 거니까.”
“…….”
“좋아. 좋아 다들 아주 얌전하네. 박쥐가 잘 가르쳤나 봐? 목에 차고 있는 목걸이는 분해하거나 벗으려 하면 곧바로 터지게 설계되어있어. 벗으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 것이 좋아. 그리고 너희 메타 휴먼들이 이 파티에 그대로 참가하면 너무 쉬울 거 같아서 적당히 장난을 쳐놨지. 모두 인간과 똑같은 상태로 이 파티를 즐기는 거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또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하지. 박쥐 아들이나 저기 활 쏘는 양반들 같은 경우는 인간이지. 인간으로 살아남기 위해 단련이 되어있으니 아무것도 못 하시는 메타휴먼들보다 우위에 설 수 있겠지. 그럼 또 재미가 없잖아. 난 재미가 없는 파티는 만들지 않아. 4일과 8일째 되는 날엔 슈퍼 파워를 일부 돌려주도록 하겠어. 자정부터 일몰 때까지야.”
“…잠깐. 정말 시작하겠단 소리야?”
“내가 거짓말하는 거 봤나? 설마 이 조커가 리그 뒤꽁무니에 선물을 바치려고 너희와 거짓 파티를 꾸미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뭐 그렇게 생각한다면 재밌는 걸 하나 보여줄게.”
쌓여있는 상자의 문이 와장창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 속에서 먼지를 잔뜩 쓴 채 굴러 나온 것은 꽁꽁 묶인 사람이었다. 손과 발을 단단히 묶였고 입엔 재갈이 물려있었다. 어딜 봐도 평범한 사람이었다. 도시를 하루 종일 걸어 다닌다면 비슷한 사람을 열 명쯤 만날 수 있을 법한 평범한 외모였다.
“이게 무슨 짓이냐! 저 사람을 당장 풀어줘!”
“내가? 내가 왜?”
“우리가 목적이라면 민간인들은 끌어들이지 마! 일반인을 끌어들여서 무슨 짓을 할 생각이지?”
또 한 번 숨이 넘어가는 웃음소리가 쏟아졌다. 책상을 발로 차고 주먹으로 두들겼다. 한참이나 웃고 흐느끼던 조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목소리였다.
“이런 상황에도 영웅 놀이라니 정말 잘 가르친 모양이야. 하지만 풀어줄 수 없어. 저 녀석은 축제의 신호탄 같은 존재니까.”
“뭐?”
“우리 어린 히어로들께서 아직 상황 판단을 잘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특히 너 마음에 들지 않아. 박쥐가 이런 상황에서 그렇게 하라고 가르쳤나?”
“…….”
귀에 낯선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의 목걸이에서 나는 소리였다. 모두 소리의 시작점을 찾았다. 규칙적으로 울리는 알람 소리는 점차 커지며 또렷하게 들렸다. 일 초에 한 번씩 들리던 소리는 점차 빠르게 울리기 시작했다. 일 초에 두 번. 일 초에 세 번. 이윽고 잠시의 여유도 두지 않고 시끄럽게 귀를 두드렸다. 눈을 가린 불투명한 필름 위로 붉은빛이 어렸다. 점차 빨라지는 불빛의 깜박임에 사지가 묶인 몸을 버둥대기 시작하는 사람의 눈엔 공포가 잔뜩 들어찼다.
“모두 눈 감아!!!!”
나이트윙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직후였다. 무엇인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시끄럽게 울리던 소리와 불빛이 모두 사라지고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눈을 감기도 모자란 시간인지라 자리를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저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
“…….”
“…….”
누군가 뒤늦게 비명을 질렀다.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들은 고스란히 피와 살점을 뒤집어썼다.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죽음의 조각은 그대로 길게 붉은 길을 만들며 뚝뚝 바닥에 떨어졌다. 완벽하게 터져버린 사람은 더 이상 생전 모습을 찾기 어려웠다.
아수라장이 된 대피소는 통제하기 힘들었다. 조금이라도 참혹한 현장에서 벗어나려고 뒤로 물러서던 자타나가 누군가에게 부딪혀 그대로 주저앉았다. 얼굴에 묻은 것을 닦아내야 하는데 손을 댈 수 없었다. 메간이 비스트 보이를 끌어안았다.
“자!”
조커의 단말마였다.
“이제 거짓말이 아니란 건 똑똑히 알겠지? 목걸이는 같은 종류야. 저렇게 고깃덩어리가 되고 싶지 않다면 열심히 발버둥 쳐야 하지 않겠어? 물론 맨손으로 하라는 건 아니야. 이 파티를 즐기는 데 필요한 것을 챙겨줄 테니까.”
한참 동안 떠벌떠벌 떠드는 조커의 목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잠깐의 휴식이었다. 물론 이 상태론 쉬어도 쉬는 것이 아니겠지만,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런데 왜 넌 안 놀라지.”
“…뭐가.”
“지금 이 상황이 이상하지 않아?”
“…….”
“어떻게 저 목걸이가 정말 폭발할 거라고 짐작하고 눈을 감으라고 소리를 질렀지?”
싸늘하게 날이 선 목소리는 항상 가지고 다니는 화살만큼 날카로웠다. 그 한마디가 들리자마자 수많은 눈이 나이트윙을 쳐다보았다. 색색의 눈은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친구로서 물어보는데, 정말 아무 일 없었어?”
“…….”
“만약 키드 플래시가 너에게 물어봤어도 이렇게 묵묵부답으로 대처했을까? 나이트윙.”
“그 녀석 이야긴 하지마.”
“왜? 난 알 권리가 있어.”
또박또박 말을 하는 아르테미스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키드 플래시의 이름을 입에 올릴 땐 살짝 눈을 감고, 입술을 떨었다. 하지만 그런 아르테미스를 보면서도 딕은 좀처럼 정보를 내놓지 않았다. 보면 볼수록 이상한 일이었다.
모두 공포에 질려 떨고 있는 공간에서 유일하게 호흡 하나 흐트러트리지 않은 채 박스 위에 앉아있는 사람이었다. 물론 나이트윙이 조커와 손을 잡을 리는 없었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럴 리 없겠지만, 의심이 피어올랐다. 누군가 말했다. 나이트 윙을 믿지 못하겠다고. 이 중에서 그나마 연차가 오래 된 히어로라고 해도 어떻게 이 상태에서 저렇게 침착할 수 있느냐며 날카롭게 따져 물었다. 몇몇은 동조했고, 몇몇은 그런 사람들을 말리며 나이트윙을 두둔했다. 하지만 그런 소란 속에서 나이트윙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나이트윙!!!”
“…….”
“우리가 만났을 때도 좀 이상했어. 쓸데없는 의심은 빨리 버리는 게 좋잖아. 어서 아무 말이라도 해보라고!”
“…….”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대답을 듣는 것은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뒤였다.
“난…….”
어렵게 뗀 첫마디는 쉽사리 이어지지 않았다. 로빈이 반쯤 울 것 같은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았을 때 나이트윙은 가볍게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곤 입을 다시 열었다.
“난…이 게임에 참가했던 적이 있다.”
“뭐?”
“말 그대로야. 두 번째란 소리지.”
“말도 안 돼. 그런 소리는 듣지 못했어.”
“당연히 모르겠지. 숨겼어. 그건 조커가 벌인 비공식적인 미친 짓이었으니까.”
“…….”
“뭐라고?”
“우리가 겪고, 리그에서 그 사실을 은폐한 다음, 내가 기억을 일부러 잊었다.”
끔찍했던 과거를 기억하려던 나이트윙은 결국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계속 귓가에 따라붙는 처절한 비명 소리는 두 번째로 떨어진 지옥에서도 계속되었다. 눈을 감으면 기억하기 싫어도 그날의 상황이 생생히 떠올랐다. 어릴 적 몇 번이나 가위에 눌리고, 헛구역질하다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강력한 수면제를 몇 개나 먹었다. 그렇게 억지로 저 아래로 가라앉혔던 지옥이었다.
“난 그 당시 로빈이었고, 일반인들과 함께 납치되었지.”
“…….”
“다들 처음 듣는 이야기일 거야.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모든 사람이 숨을 멈춘 채 눈을 크게 떴다. 몇몇 여자아이들이 바들바들 떠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힉힉 새어나오는 신음 소리를 듣던 나이트윙이 로빈을 좀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난 첫 번째 열린 파티에서 열다섯 명의 목숨을 버리고 지옥에서 살아나왔다. 반은 스스로, 반은 타의로 버려야 했지.”
“…….”
“그 중엔 내 친구도 있었어. 너희가 과연 내 마음을 반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까?”
“…….”
“이 지옥 같은 살인 파티에 또 끌려올 줄이야. 정말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지.”
“…….”
“난 정말…다신 오고 싶지 않았어.”
나이트윙이 품 안에 있던 로빈을 살짝 밀어 떼어내고 박스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곤 천천히 밖으로 걸어나갔다. 아무도 저지할 수 없었다. 익숙한 손길로 문 앞에 있는 배낭을 하나 들어 어깨에 둘러멨다. 그리고 잠시 사방을 둘러보는가 싶더니 휙 사라져 버렸다.
1 일차 게임이 시작되었다.
◆ ◆ ◆
“자, 한 명씩 이름을 부르겠어. 이름을 들으면 곧장 밖으로 나가서 가방 중 하나를 골라서 들고 가고 싶은 곳으로 가면 되는 거야.”
“…….”
“그럼 누굴 먼저 부를까.”
“앗차. 이걸 잊었군. 모두 이 대피소를 떠난 다음 정확히 삼십 분 후에 금지구역을 발표하겠어. 그대로 터져 죽고 싶지 않으면 운이 따라주길 빌어보라고.”
이내 부스럭거리는 종이 소리가 잦아들었다. 이런 나이트윙을 먼저 부르려 했는데 멋대로 이탈해버렸잖아. 계획이 어그러졌다며 투덜대는 목소리는 짜증이 섞이긴 했지만, 한없이 느긋했다. 결국, 몇 번이나 종이를 뒤적거리고 나서 한 사람을 호명했다.
“좋아. 어서 밖으로 나가서 아무거나 골라 들어.”
“…….”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만 잠자코 날카로운 눈으로 소리가 나는 스피커를 잠시 쏘아보았다. 저벅저벅 밖으로 나간 레드애로우가 잔뜩 쌓인 가방 더미중 하나를 들었다. 제법 묵직했다. 몇 번 손에 들고 흔들어보니 이것저것 들어있는지 물건끼리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문을 나선 바로 이 순간부터 게임은 시작되었다. 당장 뒤에 나오는 녀석이 자신의 등 뒤에 칼을 찔러 넣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과연 저 안에 있는 녀석들을 믿을 수 있을까.”
아무도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부질없는 혼잣말이었다. 결국 몇 번 망설이다 앞을 보고 걸어갔다.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바로 다음 나오는 사람을 지켜보았다. 몸집이 작았다. 살짝 한숨을 쉰 레드애로우가 좀 더 깊은 곳으로 이동했다. 대피소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두꺼운 나무 뒤에 조심스럽게 몸을 숨기고 가방을 열었다.
“…하.”
그나마 당장 굶어 죽지 않게 일말의 자비를 베푼 것일까. 손에 잡혀 나온 것은 허기를 면할 수 있는 식량이었다. 개별 포장이 된 에너지 바를 하나둘 손가락으로 세어보았다. 아무리 세고 또 세어도 개수가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하루에 하나씩 먹어도 한참 부족해. 다 떨어진 이후엔 알아서 식량을 구하란 것인가.’
솔직히 이 섬에서 뭐가 안전한지 알 수 없었다. 아무거나 주워 먹다가 비명에 갈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자체조달할 정도로 섬에 식량이 넉넉한 것 같지도 않았다.
‘죽은 놈 식량이라도 꺼내지 않는 이상 마지막 날까지 버티진 못할 것 같은데.’
퍼뜩 정신이 들었다. 터무니없이 모자란 식량의 의미가 새삼스럽게 이해되었다. 몇 개 있지도 않은 식량이 없어지는 것을 지켜봐야한다니. 생각 외로 끔찍했다.
레드애로우가 작은 주머니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오른쪽 보조 주머니엔 여러 번 접힌 지도가 있었다. 지도를 펴고 빠르게 눈으로 훑어 내렸다. 섬은 생각보다 거대했다. 대피소도 두 군데나 있었다. 아마 여기저기 뒤지기 시작하면 무기 하나라도 더 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크게 격자무늬로 표시되어있는 것은 금지 구역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단 모든사람들이 다 나올 때까지 좀 더 주위를 살펴보기로 했다. 지형을 빠르게 익히는 것은 기본 중 기본이었다. 공격하기 쉬운 곳이나, 방어에 적합한 곳을 찾아야 밤을 보낼 수 있었다. 혹시나 주변에 나이트윙이 있지 않겠느냔 일말의 희망을 품었지만, 나뭇가지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숲 속은 고요하기만 했다.
“정말 미친 짓이야.”
사람의 인기척이 들리자 레드애로우가 좀 더 깊숙하게 몸을 숨겼다. 그나마 무기가 익숙한 활이라 다행이었다. 조용히 시위를 당기며 바깥 상황을 살폈다. 흐리게 보이는 인영과 목소리로 미루어볼 때 가까이 있는 사람은 아쿠아래드였다. 잠깐 가방을 뒤지던 손이 지도를 찾아내자마자 곧장 시작 지점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약간의 시간을 두고 아쿠아래드가 움직인 방향을 가늠해보았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뒤를 쫓기 시작했다. 너무 가까이 가지도 그렇다고 멀어지지도 않은 상태로 두 사람은 더 깊은 숲으로 사라졌다.
호명하는 이름에 따라 사람들이 밖으로 걸어 나왔다. 곧장 어디론가 숨어드는 사람도 있었고 머뭇거리며 주변을 빙빙 돌기도 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곳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그리고 가장 위험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위치에 머물러 있는 것은 그냥 죽겠다는 의사 표시였다.
여자아이들이 앞마당에서 서성이다 서로 뭉쳐서 북쪽으로 이동했다. 일단은 하루 정도 같이 모여 있는 쪽이 습격을 피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본부에 있을 때처럼 서로 붙지 않았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서로 미묘하게 간격을 벌린 채 조심스럽게 풀숲을 헤치며 걸었다. 손마다 든 무기는 금방이라도 눈앞에 보이는 상대의 심장을 노릴 것 같았지만, 아직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불가침조약은 아슬아슬하게 서로의 손목에 걸려있었다.
“…….”
끝에서 네 번째로 나온 사람은 로빈이었다. 바짝 마른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당연히 옆에 있을 거로 생각했던 나이트윙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곳에 홀로 떨어진 로빈이 조심스럽게 가방을 어깨에 멨다. 아까 잠시 확인을 했지만, 유틸리티 벨트에 들어있는 것은 모두 빼앗겼으니 부족한 대로 살아남아야 했다.
건물 뒤로 걸어가 조심스럽게 가방을 열었다. 손에 들려 나온 것은 직접적인 살상무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없는 것보단 나았다. 오히려 기습엔 효과적일지도 몰랐다. 가장 빠르게 손에 쥘 수 있는 위치로 무기를 조심스럽게 옮겼다. 보관이 편리하게 포장된 스틱형 식량 몇 개와 지도를 발견했다. 현재 있는 곳의 위치를 파악하고 나자 오히려 훨씬 막막해졌다. 동쪽 끝에 위치한 곳에서 어디로 가더라도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
반대쪽 보조주머니에 들어있는 손전등을 발견했다. 손전등에 손을 뻗다 문득 손목을 바라보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차고 있던 GPS를 켜보았다. 당연하게도 통화권 이탈에 전파 수신도 되지 않았다. 먹통이 된 GPS와 통신 장치는 쓸모가 없는 짐이었다.
잠깐 부풀었던 희망이 덧없이 흩어졌다. 한숨을 쉬며 가방을 탈탈 털자 가장 밑바닥에 굴러다니던 동그란 나침반이 데굴 굴러 나왔다. 가진 것은 이것이 전부였다.
순간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가까이 있는 것을 틀기지 않기 위해 숨을 죽인 채 몸을 웅크렸다. 망토로 한껏 몸을 감싼 채 이쪽으로 사람이 오지 않기만을 빌었다. 다행히 반대쪽으로 멀어져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드문드문 발에 밟혀 꺾이는 마른 나뭇가지 소리도 점차 들리지 않았다. 로빈은 다시 한 번 잔뜩 참았던 숨을 쉴 수 있었다.
“저기…같이 가.”
“따라오지 마.”
“…스캐럽이 움직이지 않잖아.”
“그래서 날 먼저 죽여 볼 생각이야?”
“제발 내 말 좀 들어!”
“하여튼 따라오지 마.”
“…….”
“경고하는데 계속 따라오면 내가 널 죽일 수도 있어.”
“…….”
바닷가로 내려가는 길목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리더니 수풀 아래로 하이메의 얼굴이 언뜻 보였다. 자세를 낮춘 로빈이 조심스럽게 둘의 대화를 엿들었다. 급하게 가방을 들고 따라 나온 임펄스가 하이메를 잡아 세웠다. 잔뜩 흥분한 하이메가 그 손을 세차게 뿌리쳤다. 물론 냉정하게 생각하자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스캐럽이 하이메를 보호하기 위해 움직이거나 대화를 하지 못한다면 하이메는 일반인과 다름없었다. 스스로 그것을 알기에 조금이라도 이곳에서 멀리 떨어질 예정이었다. 일방적으로 한쪽이 쫓아가는 모양새긴 했지만, 바닷가 쪽으로 멀어져가는 둘의 모습을 확인했다. 저쪽으로 움직이는 것은 위험할 것 같았다.
‘이제 두 사람 남았던가.’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살려 사람 수를 셌다. 금지구역이 어디가 될지는 모르지만 일단 자신보다 뒤에 나오게 된 사람들이 향하는 방향을 보고 나서 갈 곳을 정하는 쪽이 좋을 거라 판단했다.
아직도 코끝에 맴도는 역한 피 냄새는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망토 끝을 붉게 물들였던 피와 살점은 이미 빳빳하게 말라붙었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꿈에서 깨지 않을까. 한없이 눈을 감으며 몇 번이나 기도했다. 하지만 그런 두 눈에 담기는 것은 음울한 회색 하늘이 잔뜩 내려앉은 섬 풍경뿐이었다.
한참 뒤 바닷가 쪽 대피소로 움직이는 아스널을 목격했다. 순간 돌아보는 시선에 화들짝 놀라 몸을 납죽 엎드렸다. 숨 막히는 긴장감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들킨 다음 일은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들키지 않았겠지?’
금방이라도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얼마나 엎드려 있었을까. 천천히 멀어지는 아스널의 뒤통수를 확인하고 나서야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지금이라도 이 자리를 피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바로 한 순간 어깨를 누군가 두드렸다.
“누구야!!!!!”
“…….”
“쉿.”
“누나.”
“그래 나야 일단 아무도 없긴 하지만 누군가 듣고 올지도 모르니 조용히 해.”
“…어떻게.”
“주변을 둘러보던 중에 우연히 돌아들어 온 거야. 괜찮아?”
바짝 긴장하던 어깨가 조금 누그러졌다.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의 의미로 해석한 배트걸이 로빈의 손을 잡아서 일으켰다.
“어디로 갈 거야?”
“…모르겠어.”
“…….”
“형은 정말 돌아오지 않을 생각일까.”
“아마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우리 중에 아무도 몰랐어. 게다가 내색도 하지 않았다고. 그러면…….”
“일단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야. 움직이자. 아니면 여기서 하루를 보내던가. 살아야지.”
“…….”
“불행인지 다행인지 오늘은 아까…그 사람이 죽어서 사망자가 나오지 않아 랜덤으로 목걸이가 폭발하는 건 없다고 했어.”
“…….”
“금지구역을 듣고 이동하자.”
로빈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에게 등을 잡히지 않게 벽에 바짝 붙어 섰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만일에 상황에 대비했다. 몇십분의 일 확률이지만 이곳이 금지구역으로 설정되면 빠르게 빠져나가야 했다. 제한시간 내에 벗어나지 못하면 끝이었다.
배낭에 들어있던 아날로그식 시계를 연신 쳐다보며 시간을 가늠해보던 배트걸이 스피커에 귀를 기울였다. 곧 첫 번째 금지 구역 방송이 나올 시간이었다.
“다들 꽁무니 빠지게 열심히 도망 다니고 있나? 내가 너무 넉넉하게 시간을 준 건 아니겠지? 오늘은 전야제라 이렇지만, 내일부터는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할 거야.”
조커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컴퓨터로 입력한 목소리가 천천히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감정이라곤 섞여 있지 않은 음성이었다.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는 담담하게 금지구역을 말했다.
[이번 금지구역은 B2 구역과 C1 구역입니다. 다시 한 번 알려드립니다. 금지구역이 발표되었습니다.]
“다행이야. 시작 지점에서 먼 쪽이라니.”
“이게…랜덤이라 그랬나?”
“그랬지. 그것도 믿을 수 없지만.”
“아직 저기까지 움직인 사람은 없겠지?”
“아마도. 시간이 그다지 많이 흐르지 않았으니까 아마 선두로 나선 그룹 중엔 강 가까이 다가간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
“일단 오늘은 여기에 있도록 하자.”
“응.”
한고비 넘겼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시체가 있긴 해도 그것만 제외한다면 이곳은 제법 안전했다. 주변에서 두 사람 외의 사람 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배트걸이 먼저 벽에 등을 댄 채 자리를 잡았다. 가까이 다가가 어깨를 마주하고 앉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 옆에 한 걸음 정도 간격을 두고 로빈이 주저앉았다. 무릎을 모으고 깍지를 낀 채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어깨 한번 두드려 주기가 힘들었다.
굳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배트걸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밖으로 나왔을 땐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명단에서 가장 마지막에 불린 터라 다른 사람들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였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듣고 어림짐작으로 건물을 돌아들어 갔다. 혹시 몰라 칼자루를 손에 쥔 상태였다.
다행히 건물 뒤에 있는 사람은 팀이었다. 순간 손이 먼저 나갈 뻔했다. 물론 팀인 것을 알고 곧장 칼을 거뒀다. 적어도 오늘 하루는 같이 어깨를 맞댔던 집안 식구들과 싸우고 싶지 않았다. 당장 내일부터, 아니 해가 뜨자마자 지옥이 펼쳐질지 몰라도 오늘은 무사히 지나가길 빌었다.
◆ ◆ ◆
섬의 밤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사방이 바다인 곳은 해가 수평선 뒤로 넘어가자마자 미처 대비할 새도 없이 새까만 어둠이 울컥 흘러들었다. 모래사장을 휘감았다 다시 쓸려나가는 바닷물처럼 조용히 섬에 내려앉은 밤은 어느새 한치 앞을 분간할 수 없게 만들었다. 안 그래도 낮부터 내내 흐렸던 하늘은 달마저 삼켜버렸다. 옅은 구름 사이로 흐릿하게 보이는 달빛의 윤곽을 쫓던 시선이 푹 사그라졌다.
“누나.”
“응?”
“이제부터…어쩌지.”
“모르겠어.”
“리그에선 이 일을 알고 있을까? 와치 타워에서 보이지 않는 건 없다고 했잖아.”
“…….”
“…우리 모두 무사히 돌아갈 수는 없는 걸까?”
“일단 오늘 살아남는 걸 생각하자. 그리고…….”
또 말이 없어졌다.
까만 먹빛 하늘엔 이런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잔별이 하염없이 반짝였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별을 다섯 개쯤 세다 그만두었다. 자고 싶어도 잘 수 없었다. 하지만 긴장이 순간 풀어지자 졸음이 왈칵 몰려왔다. 선잠이 들었던 로빈이 바람에 흩날리는 수풀 소리에 퍼뜩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다시 몸을 웅크렸다. 빌런의 눈을 피하고자 바깥쪽을 어둠의 색으로 만든 망토가 마른 몸을 푹 감쌌다.
“잠깐 주변을 둘러볼게.”
“응.”
“이럴 때 나이트윙이 있었다면…아니다.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해서 뭐하니. 다들 말이 아닐 텐데.”
“형은…….”
“응?”
“형은…아니 형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랬는데 내색조차 안 하고 지금까지 살아온 걸까?”
“그놈 속을 누가 알겠어.”
“…….”
“나중에 만나게 되면 꼭 물어보도록 해.”
더이상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한 손에 칼을 든 배트걸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쯤 몸을 내밀어 건물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다시 돌아와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팽팽한 긴장의 줄다리기 속에 밤은 더욱 깊어갔다. 점차 흐려지는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듯 말 듯하며 섬 전체를 압박했다. 제대로 비를 피할만한 곳도 찾지 못한 상태에서 거센 비라도 맞았다간 큰일이었다.
“따라오지 말라고 했잖아!”
바닷가 모래사장에 다다른 하이메가 아직도 자신을 쫓아오는 임펄스를 휙 밀어냈다. 손에 떠밀려 두 걸음 뒤로 물러난 임펄스의 발에 부드러운 모래가 감겨들었다. 가방은 무거웠고, 모든 능력을 봉인 당한 온몸엔 도무지 일정이상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여전히 불신의 눈길로 쳐다보는 하이메를 설득하려 했지만 도무지 듣지 않았다
“난 널 죽이지 않아. 블루.”
“그러면 왜 따라왔어.”
“그야…….”
“너도 알고 있는 거지. 이 상황에서 가장 밑바닥을 헤매는 사람이 나라는 걸 말이야. 안 그래? 무기도 한 번도 사용해보지 않은 거야. 내가 누굴 믿어야 하지?”
“음…저기. 블루?”
“왜?”
“내가 정말 널 해칠 거라 생각하는 거야?”
“당연하지. 여기서 믿을 사람이 누가 있지? 하다못해 나이트윙조차 우리를 떠났는데. 안 그래?”
“…블루. 난 말이지”
“…됐어.”
긍정의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까만큼 밀어내진 않았다. 임펄스가 잠자코 하이메 곁에 한 발자국 다가섰다. 그러자 한걸음 물러난 하이메는 임펄스가 그 자리에서 비켜서지 않을 것을 알았다. 저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누가 등 뒤에 칼을 들이댈지 모르는 상황에서 계속 같은 장소에 있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조금이라도 떨어져 있기 위해 제2 대피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블루. 잠깐.”
“?”
그 순간 임펄스가 하이메의 손목을 휙 잡아챘다. 깜짝 놀라 뭐라 한 마디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다른 쪽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리곤 억지로 몸을 끌어당겨 구름이 만들어준 어둠 속으로 움직였다. 어둠에서 반짝거리는 임펄스의 눈이 날카롭게 대피소를 노려보았다.
간신히 손을 뿌리친 하이메가 뒤로 휙 돌아섰다. 멱살을 잡으려는 순간 임펄스가 자기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대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조용조용 귓가에 스며드는 임펄스의 목소리는 예전보다 훨씬 낮았고, 두려움이 한 움큼 담겨있었다.
“지금 나가면 안 돼.”
“뭐라는 거야.”
“대피소에 누군가 있어. 방금 움직이는 사람 그림자를 봤어.”
“…….”
“당장 공격을 하지 않는 걸 봐선, 그쪽도 가까이 올 생각은 없는 거 같아. 오늘은 여기 있는 쪽이 안전해.”
“…….”
“블루. 오늘 하루만, 한 번만 날 믿어봐.”
“…….”
사실 어디로 가든 마찬가지였다.
먼저 출발한 사람들이 어느 곳에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가방엔 무전기가 들어있기 있지만, 누구와 연결이 되어있는지조차 불분명했다. 혹시라도 위치를 노출할까 싶어 한 번도 켜보지 않았다. 이래저래 절망적인 상황뿐이었다. 조커가 무슨 장난을 친 것인지 스캐럽과 전혀 소통되지 않는 하이메는 그나마 호의를 보여주는 사람과 같이 있는 편이 조금이나마 안전했다.
“눈치 한번 더럽게 빠르네.”
대피소의 작은 창문으로 모래사장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검은 인영이 조용히 사라졌다. 벽으로 바짝 붙어선 아스널이 그림자가 어른거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곁눈질로 바깥 상황을 지켜보았다. 기왕이면 조금이라도 승산이 있는 쪽을 덮쳐보려 했는데, 둘이라면 상황이 달라졌다. 게다가 자신이 있는 곳을 간파당했으니 덤벼들 수도 없었다.
“손도 말썽이고, 되는 일이 없네.”
기절한 사이에 조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오른쪽 팔은 겨우 움직이기만 할 뿐 다른 기능을 하지 못했다. 제대로 작동만 했어도 이 죽음의 파티에서 높은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을 텐데, 이래서는 능력을 봉인 당한 메타휴먼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
그나마 완전히 부숴버린 것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감도를 확인했다. 내장된 다른 무기를 사용할 순 없지만. 악력만큼은 보통사람보다 강했다. 무기가 익숙한 활이었다면 좋겠지만, 그런 행운은 없었다. 모래사장과 대피소는 제법 떨어져 있었다. 게다가 그 사이 어둠이 섞이자 공격은커녕 움직임조차 잡아내기 어려웠다. 이 상태에서 활이 아닌 무기로 상대방을 노리기는 힘들었다. 날이 밝자마자 해변 쪽으로 이동하기로 정한 아스널이 긴장을 풀지 않은 채 잠깐 잠을 청했다.
◆ ◆ ◆
밤은 속절없이 어두워졌고, 피곤과 긴장을 덮어쓴 몸은 날이 지날수록 축축 쳐졌다. 결국, 새벽 어스름이 될 무렵까지 대피소 주변을 살피며 버티던 두 사람은 잠시 잠을 청했다. 채 삼십 분이 지나기도 전에 밤하늘을 찢으며 날아오르는 새 날갯짓 소리에 배트걸이 졸다 벌떡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발로 밟고 있던 칼을 찾았다. 다행히 누군가 칼에 손댄 흔적은 없었다. 건물을 오른쪽으로 돌아서 망을 보던 배트걸이 짧게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렸다.
“…팀?”
“…….”
“팀?”
옆에 웅크리고 있던 로빈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망을 보러 갔나 싶어 시작 지점을 한 바퀴 돌았지만, 건물 안에서 역한 피 냄새만 울컥 흘러나올 뿐이었다.
로빈은 이곳에 없었다. 언제 자리를 떴는지 발자국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조용히 떠난 것은 나름대로 배려인지, 아니면 이기적인 판단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배트걸은 이곳에 잔류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움직이려면 새벽이 더 밝기 전에 갈 곳을 정해야 했다. 조심스럽게 망토로 손전등 불빛을 가린 뒤 지도를 살폈다. 곧 갈 곳을 정했는지 어둠에 몸을 숨긴 채 조심스럽게 수풀을 해치며 숲으로 걸어갔다. 망토가 쓸리는 소리가 점차 멀어져가다 이내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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