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항상 그랬었다. 눈을 뜨면 언제나처럼 지루하고 비슷한 생활만 반복되곤 했기에, 데미안은 반쯤 깬 정신을 다시 베개에 푹 파묻으면서 애써 아침을 외면했다. 어차피 이 상황에서 늦잠 좀 잔다고 혼낼 사람은 여기에 존재하지 않았다. 수명이 다 된 전등처럼 깜박 깜박 점멸되는 기억은 점점 늪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조금만 더 눈을 감고 있으면 늦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유난히 시끄럽게 울리는 시곗바늘 소계에 결국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보통 땐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소리였다. 조용한 공간을 가득 채우는 규칙적인 소리는 데미안의 심기를 건드리기 충분했다. 그 반동으로 침대가 크게 출렁거렸다. 새 것 같은 하얀 이불 위에 햇살이 곱게 쌓여있다 푸스스 흩어졌다.
“…….”
잠이 잔뜩 달라붙은 눈을 깜박이던 데미안이 천천히 왼쪽 손바닥으로 눈 주위를 꾹꾹 눌렀다. 아침엔 항상 약한 두통이 있었다. 가끔은 눈앞이 흐릿해지기도 했지만, 데미안은 항상 그런 현상은 아침잠에 취해서 그런 거라 말하곤 했다.
천천히 밝아지는 시야가 완전히 트이자 그제야 하얀 방이 눈에 들어왔다. 가구라곤 가장 필요한 것만 들어있는 삭막한 공간이었다. 오른쪽으로 크게 트인 창문에선 해가 구름을 가르고 기분 좋은 햇살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꿈을…꾼 거 같은데.”
데미안이 중얼거렸다. 불투명한 막에 한 겹 가려진 것처럼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생각하려고 하면 할수록 머릿속만 간질간질해질 뿐이었다. 익숙한 얼굴, 익숙한 공간, 그리고 평소와 다름없는 대화를 나눈 것 같았다. 하지만 단 하나도 제대로 기억을 할 수 없었다. 점점 멀어지는 꿈의 끝자락을 잡기를 포기했다. 데미안이 머리를 가볍게 흔들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푹신한 양탄자에 발이 닿은 순간이었다. 거짓말같이 새하얀 방에 색이 입혀진 것 같았다. 데미안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가구에 닿는 숨결마다 희미하게 색이 떠오르다가 다시 천천히 사라졌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런 것은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사실 이게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꼭 있어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데미안은 그제야 잊었던 것이 생각난 마냥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레이슨?”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레이슨? 어딨어!”
방 한가운데 서서 재차 이름을 불렀지만, 데미안의 귀엔 작은 인기척조차 들리지 않았다.
“…….”
낯선 소리만 가득 찬 방 안엔 데미안 혼자뿐이었다. 금방 다시 하얗게 바래버린 방 안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버석거렸다. 가구에 얹힌 빛이 방을 갉아먹었다.
''다른데 갈 곳이 없는데.”
솔직히 이상한 일이었다.
딕이 자신을 놔둔 채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분명 어제 옆에서 잠든 것까진 기억이 났는데, 아침까지 텅 비어버린 필름은 좀처럼 조각이 맞춰지지 않았다. 깨끗하게 가위로 잘라내고 이어버린 필름도 아니고, 까맣게 타버린 것이었다. 영사기에 돌려도 잔뜩 노이즈가 낀 까만 화면밖에 나오지 않는 기분을 그대로 느끼는 데미안은 그리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억이 사라지는 경험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었다.
“…….”
물론 딕이 잠버릇이 험한 것도 아니었고, 몽유병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데미안은 딕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자신했다. 만약 그런 병이 있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모를 리 없다고 생각했다. 작은 아이는 자체적으로 머릿속에서 결론을 내렸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그레이슨.”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그레이슨!!”
하지만 납치라도 당한 것 마냥 흔적도 없이 사라진 딕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방 안에서 아무리 이름을 불러봤자 원하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데미안은 느리게 발을 움직였다. 방 한가운데서 문까지 가는 길이 꽤나 멀게 느껴졌다.
- 덜컥
손잡이 돌아가는 소리가 짧게 들렸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열릴 것 같던 문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가장 긴 바늘이 한 바퀴를 돌고나서야 묵직한 문이 소리 없이 밀렸다. 딱 한사람 나올 정도만 열린 틈으로 데미안이 슥 빠져나왔다. 복도에도 푹신하게 깔아둔 양탄자는 발소리조차 모두 먹어버렸다. 소리가 모두 사라진 집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소음이 사라진 공간은 도무지 사람이 사는 것 같지 않았다.
“…….”
데미안은 잡고 있던 손잡이에서 천천히 손을 뗐다. 그리고 문을 살짝 밀어서 닫았다. 방 안에서 규칙적으로 째깍대는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다. 데미안이 밖으로 나왔지만, 딕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항상 눈이 닿는 곳에 있던 사람이기에 이상한 기분은 더 빨리 작은 몸을 삼키기 시작했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지만 좀처럼 진정할 수 없었다. 점점 불안해지는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필사적으로 겉으로 티를 내지 않으려 하고 있지만, 잔뜩 주름진 미간부터 손톱자국이 남을 정도로 꽉 쥔 주먹까지 어디를 보더라도 진정하지 못하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어깨가 가늘게 떨리는 것은 숨길 수 없었다. 복도에서도 세 번 정도 딕을 불렀다. 처음은 그레이슨이라, 두 번짼 약간 화가 난 목소리로 재차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마지막엔 마지막 발음이 살짝 흔들릴 정도로 입술을 떨었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데미안이 급하게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계단을 급하게 뛰어 내려가는 그 순간에도 아무런 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화려한 장식이 조각된 계단의 끝에 다다르기 전에 훌쩍 뛰어내렸다. 작은 맹수처럼 몸을 굽히고 바닥에 착지한 데미안이 눈을 치켜뜨며 주위를 살폈다. 시릴 정도로 푸르게 빛나는 시선이 집안 구석구석 닿았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딕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았다.
아니 원래 그런 흔적은 이 공간에 없었던 것 같았다. 기묘하게 우그러진 공간을 헤매던 데미안이 거실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사람이 없었던 것 마냥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하다못해 스쳐 지나가면서 흐트러진 물건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아닌가.’
사실 그렇게 움직일 만한 작고 가벼운 물건이 없었다. 가장 필요한 가구만 몇 가지 채워 넣은 곳은 생각보다 훨씬 더 넓어 보였다. 커다란 유리를 통해 들어오던 해가 순간 가려졌다. 커다랗고 짙은 구름으로 들어간 해가 보이지 않자 세상은 일순간 어두운 그늘에 뒤덮였다.
“…….”
집 안 가득 따뜻하고 어두운 그늘이 퍼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 그늘의 끝에서 데미안은 한 가지 기억을 생각해 낼 수 있었다.
“아…….”
항상 딕은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가끔 다른 일을 하긴 했지만, 전체적인 생활 패턴은 크게 틀어지지 않았다. 그것을 기억해내자 데미안은 필사적으로 어제 아침을 떠올리려 했다. 하루가 지나면 그대로 기억이 녹아버리곤 했다. 아무리 잊어버리지 않으려 해도, 물에 닿은 설탕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갔다. 가늘게 눈을 찌푸리며 기억의 파편을 긁어모았다.
“…….”
아침에 항상 있었던 곳을 찾으려 했다.
데미안의 이상한 행동은 끝이 없었다. 끊임없이 생각하지 않으면 마치 이 공간이 사라진다고 믿는 것 같았다. 평소 이 시간. 혹은 아침. 아니면 잠에서 깬 직후.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키워드를 조합해가며 희미한 머릿속을 헤집었다. 좀처럼 잡히지 않는 어제의 기억은 답답하기만 했다. 자꾸 놓칠수록 데미안의 표정은 더욱 심각해졌다. 간신히 손끝에 닿을라치면 재빠르게 몸을 비틀며 빠져나갔다.
결국, 생각해냈다. 그레이슨은 이쯤이면 부엌에 있었다. 이 간단한 한 문장을 떠올리기 위해 데미안은 엄청난 시간을 쏟아야 했다. 하지만 원하는 것을 떠올렸으니 상관없었다. 데미안에게 시간보다 중요한 것은 더는 기억할 할 만한 것이 남아있지 않았다. 흘러가는 시간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간신히 부엌이라는 것을 떠올린 데미안은 그쪽으로 몸을 틀고 몇 번이나 이름을 불렀다. 아무도 없는 것 같은 곳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 순간 데미안의 눈에 안심의 빛이 떠올랐다.
“하…….”
음식을 하는 것 같진 않았지만, 분명 사람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의자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 공간에서 뭘 하는진 알 수 없었지만, 그레이슨을 찾은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약간 무겁게 끌리는 발을 움직여 부엌으로 걸어갔다.
식탁에 몸을 반쯤 가린 딕이 눈에 들어왔다. 앞치마를 하고 있지도 않았고, 아침 재료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데미안이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 움직이지 조차 않은 것 같았다.
딕은 그저 그 공간에 있었다. 데미안이 생각해낸 바로 그 모습 그대로 눈을 깜박이며 똑바로 푸른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막상 그렇게 걱정을 했는데, 막상 찾아내자 데미안은 작은 심술이 솟았다.
“그레이슨! 귀가 먹었어?”
“…왜?”
“내가 몇 번이나 말을 했어. 부르면 대답을 하라고 했잖아!”
“날 부른 거 아니잖아.”
“널 불렀어. 몇 번이나.”
“그랬어? 근데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형한테 어리광이라도 부리고 싶었던 거야?
“…….”
“그렇다면 난 좀 기쁠 거 같은데.”
“됐어. 꺼져버려!”
그리고 데미안은 뭔가 잘못 한 것처럼 숨을 들이쉬며 입을 다물었다. 이 집에서 금기와도 같은 말이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낮게 짜증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정말?”
“아냐. 그럴 필요 없어.”
급하게 대화를 끊은 데미안이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리고 그런 데미안의 뒤통수를 바라보던 딕은 가볍게 볼을 긁적였다. 익숙하긴 해도 도통 저 녀석의 기분을 짐작할 수 없었다. 멍하니 데미안이 지나간 흔적을 바라보고 있으니 손이 절로 얼굴에서 떨어졌다. 어색하게 공중에 멈춰 있던 두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