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방 잠이 깬 것도 모자라 툴툴거리기까지 한다. 물론 저렇게 펄쩍 뛰는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언제는 늘 독자적인 히어로인 것처럼 굴다가도 어른이 있으면 여지없는 어린애가 된다. 그게 그저 토니의 눈에만 그렇게 보일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아까 차에서 피터를 깨우느라 조금 움직였을 뿐인데, 금방 눈을 뜬다. 하여튼 저 스파이디 센서는 이럴 때마다 눈치가 없다. 머쓱한 표정으로 서로 멀어진다. 어린애가 맬 것 같은 가방을 끌어안은 채 눈만 데굴데굴 굴리던 녀석은 어디로 내려야 할지도 감을 잡지 못했다. 예민하기만 할 뿐 아직 어려도 한참 어린애였다.
‘저…스타크 씨.’
‘왜?’
‘도착한 거 같은데…….’
‘어, 그렇네.’
‘내려야…….’
일부러 피터를 껴안는 것처럼 몸을 굽힌다. 그러면 또 펄쩍 뛴다. 별거 아니라는 말과 함께 차 문을 열어준다. 몇 번이나 반복된 행동인데 피터는 늘 처음인 것처럼 굴었다. 그렇게 훌쩍 날아온 업스테이트에는 늘 크고 웅장했다.
“저 놀러 온 거 아니니까. 언제든 필요한 걸 시키시면 되는데.”
“벌써 그런 생각을…….”
“…….”
“걱정하지 마. 이제 그만해달라고 할 때까지 훈련을 받게 될 테니까.”
“어우. 스타크 씨가 그렇게 말씀하시니 좀 무섭네요.”
“위에 올라가서 짐 풀어놓고 대기하고 있어. 여긴 사람이 좀 많아서 말이야.”
“…….”
그렇게 말하는 것과 달리 조용하긴 했다. 이곳은 거점과도 같은 곳이기에 많은 히어로들은 각자의 일정에 따라 바쁘게 움직이곤 했다. 그런 와중에 피터를 훈련하겠다며 부득불 이곳으로 데려온 토니 스타크는 이번 일정을 위해 다른 히어로들도 불러들이고 있었다.
“새로운 히어로를 소개하는데 이 정도 자리는 되어야지.”
“원래 다들 이렇게 해요?”
“그럼 안 할까?”
“…….”
“왜? 또 못 믿어?”
“그건 아니고…히어로 되는 일이 뭐 그렇게 크고 대단한 일이라고. 조금 민망해요.”
“언젠간 익숙해지겠지.”
“전 절대 안 될 거 같아요.”
피터는 자신을 잘 안다고 말하곤 했다. 토니는 그런 말을 슬쩍 흘려들으면서 피터에게 숙소를 알려줬다. 캐런 불러줘? 이 말에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물론 수트 안에 아직 내장되어있는 것은 맞지만, 피터는 수트 누나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신이 움직이길 원하고 있었다.
“저 혼자 할 수 있어요!”
“그래. 혹시 길 잃어버리면 전화해.”
“아이참.”
“어서 올라가 봐.”
“네. 이따가 내려올게요.”
“…….”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돌아선다. 하긴 막 어벤저스에 들어온 새내기들이 여기서 훈련을 받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이가 모여 있는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조금이라도 안면이 있는 쪽을 부르는 것이 맞았을까. 이렇게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런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것은 익히 알 수 있었다.
마법을 쓰는 사람은 자신이 지켜야 할 생텀에 돌아간 뒤로 딱히 연락할 방도가 없었다. 물론 그쪽에서 어벤져스에게 소식을 보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큰일이 지난 이후 복구할 일이 더 많았다. 그리고 마법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놈이 와봤자 스파이더맨에게 무슨 능력을 가르친단 말인가. 정말 쓸모라곤 없는 놈들이 많았다.
그렇게 따지자면 헐크도, 캡틴 아메리카도.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였다. 누굴 붙여놔도 헛소리를 할 것 같은 불안함에 휩싸인다. 사실 토니 스타크는 자기 스스로 컨트롤 프릭 기질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그걸 맘대로 멈출 수도 없었다. 그게 일찌감치 조절되었다면 애초에 작은 거미가 입을 슈트에 그 많은 기술을 접목해두지도 않았다.
“…이런 거 생각을. 해봤자 되는 것도 안 되는 법이지.”
사실 토니 스타크는 이런 말을 하기 전에 안 되는 일도 할 수 있게 만들 만한 사람이었다. 애초에 머리가 좋은 만큼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의 구분을 한다. 물론 그 많은 사건 중에 감정적으로 움직인 것도 없지 않았다. 그래도. 언제나 결과가 나쁘지 않았으니 지금까지 자기 생각을 관철할 수 있었지 않은가.
하지만 그런 와중에 피터를 만나고 나선 그런 결심이 약간 흔들리는 경우가 있었다. 큰일은 아니었다. 그저 걷다가 아주 잠깐 주저하는 정도라고 할까. 늘 앞만 보고 달려가던 사람이 뭔가 이상함을 느낀 채 발밑을 살펴보는 정도의 변화였다. 그러나 그 변화가 삶에 제법 많은 의미를 주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이래서 안 된다니까.”
감상적인 생각은 모든 일이 끝나고 해도 괜찮을 텐데, 저 녀석만 보면 자꾸 딴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좋은 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왜 하필 저 녀석이었을까. 사실 캡틴 아메리카를 견제하기 위해 데려왔을 때부터 그랬다. 그땐 누구보다 히어로로 활동하려던 느낌이 강했다. 그래서 많은 걱정을 하지 않았다. 설마 저렇게 어린애를. 이런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반쯤 가면이 벗겨진 채 바닥에서 버둥거리는 녀석을 봤을 때. 뭔가 잘못된 곳으로 방향을 틀었단 생각이 들었다. 히어로가 아닌 어린 애를 눈앞에서 만난 기분이랄까. 그 때부터 조금씩 깊어진 관계가 결국 여기까지 왔다. 이 일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타노스의 부하가 나타나고, 닥터 스트레인지가 붙잡혔다.
마법사를 구하라고 했더니 그걸 붙잡고 우주까지 날아가던 녀석을 만든 것도 자신이었다.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이럴 땐 어른의 책임감을 느껴야 했다. 그렇게 여기까지 왔으니 끝도 마무리를 잘해야지. 토니는 또 딴생각으로 빠졌다는 것을 인식하고 괜히 헛기침한다. 자꾸 이러는 버릇을 고쳐야 하는데, 과한 관심은 사그라들 줄을 모른다.
*
“갑자기 우린 왜 소환한 거지?”
“이곳이 너무 유명무실하잖아. 가끔 들렀다 가면 좋은 거 아닌가?”
“굉장히 변명 같군.”
“뭐, 그렇게. 생각해도 좋고.”
아직 어색한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얼굴을 안 보고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주변에서도 그랬고, 개인적인 판단도 비슷했다. 시간이 진기 전에 모든 일을 끝맺었어야 했다. 그렇지 못하고 시간만 흐르느냐고 민망한 마음이 커진다. 결과적으론 좋아졌다고 하지만, 완벽하게 예전 관계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혹자는 다 커서 사춘기 같은 일을 겪는다고 말한다. 세상을 사는데 이런저런 일이 있는 법이라고 하지만 이쪽은 유독 큰일이 많았다.
“어린 애들 훈련을 시켜야지.”
“또 큰일이 일어날 때를 대비하는 건가?”
“언제는 우리가 그런 거 생각하고 살았나. 어차피 늘 큰일은 생기는 거니까.”
“잊을 순 없지.”
“…거 참. 나이 티 내긴.”
“자네만 하겠나.”
묘한 가시가 느껴지지만, 늘 듣던 것과 다르지 않다. 차라리 이런 쪽이 나았다. 굳이 바깥에 나가 있던 어벤져스를 불러모은 속셈이 훤하다는 말을 여섯 번쯤 받았던 것 같다. 당장 움직이지 못하는. 멤버를 빼고 이리저리 모여든 사람들은 이젠 익숙한지 낯선지 가늠도 되지 않는 건물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아니 도대체 뭘 하려고, 사람을 오가라 하는 거야.”
“가끔은 이렇게 친목 도모를 해줘야 팀이 잘 굴러가지.”
“방금 그 대사.”
“…왜.”
“굉장히 사업가 같았어.”
“내가 좀 그렇잖아.”
“말이라도 못하면, 여기서 한 대 쳤을 거야.”
“그것도 꼭 기억해 두지.”
오랜만에 돌아온 나타샤는 한결같았다. 그나마 말주변이 있는 사람이 오자 분위기가 나아진다. 어린애들 가르치는 것이 뭐 어려울까 하지만, 그것이 히어로 일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완다도 처음 이곳에 데려와서 훈련을 시켰었는데, 이번엔 더 어린애였다. 스티브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지만, 한마디 긁지 않는 것으로 충분히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런 이들을 보면서 나타샤가 하는 말이 늘 한결같았다. 어린애들한테 모범을 보이지 못하는 사람이 수두룩하다며 혀를 찬다. 맞는 말이라 딱히 반박하지 못하고 괜히 딴 곳만 바라보는 일이 늘었다.
“세상에.”
“벌써 왔나?”
“스타크 씨가 이렇게 라인업이 휘황찬란 할 거라고 말해주시진 않았는데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듣고 여기까지 온 건지 알만하네.”
“내가 뭘?”
“사업가로서 성공하기 딱 좋은 말솜씨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아뇨. 제 말은 그러니까.”
“변호하지 않아도 괜찮아. 스타크 여름방학 프로그램이 좀 화려하긴 하지.”
“…….”
당황스럽기는 피터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업스테이트에 오는 것만으로도 좋았기에 더 큰 환영이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자마자 본 것이 어벤져스라니. 물론 피터가 자기도 다 큰 히어로라고 하지만 여기 모여있는 사람에 비하면 한없이 어리기만 했다. 얼굴도 공항에서 몇 번 본 것이 전부인 쪽도 있다. 낯을 가린다고 하기는 뭐하지만 어쨌든 아주 편하게 대할 수도 없었다. 그런 복잡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토니는 해줄 수 있는 걸 다 해주 했다.
“그래서 제가 여기서 훈련을 해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그렇지? 힘들게 모인 만큼 확실한 성과가 있는 편이 났지.”
“정말 늘 저를 놀라게 하시네요.”
“반대로 말하면 익숙해질 때도 된 거란 소리지.”
“애 놀리는데 취미를 붙였네.”
다들 한마디씩 얹으면 말이 한없이 길어진다. 사실 훈련이라고 해봤자 기본적인 내용뿐이었다. 각자 추구하는 전술이 다른 이상 완벽한 조언을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토니 스타크가 어벤져스를 불러 모은 것은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 목적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가장 열성적으로 가르치는 캡틴을 뺀 나머지 중 한 명을 슬그머니 불러내기 시작했다. 물론 그런 행동에 미심쩍은 눈을 하는 멤버도 많았다.
“온 김에 정비나 받고 가지.”
“갑자기 왜 이러실까. 낯설게.”
“나중에 또 이런 걸 부탁하려면 미리미리 접대해놔야 하거든.”
“…허어. 그래. 그렇다 이거지. 저 작은 거미가 스타크 사를 완전 뒤집어 놨군.”
“…….”
짧은 말엔 늘 뼈가 있다.
하지만 노련한 사업가는 그런 말을 자연스럽게 넘긴다. 그러면 다른 말이 붙진 않았다. 기장 기본적인 전술 지도를 하는 것도 시간이 많이 필요한 일이라 업스테이트는 밤늦게까지 북적인다. 어린애가 얼마나 체력이 좋은지 지치지도 않았다. 물론 평범한 인간이 아니기에 그럴 수 있지만, 작정하고 훈련소로 내몬 것 치곤 바짝 따라오는 중이었다.
“다른 히어로들도 늘. 이렇게 훈련을 하나요?”
“응?”
“…뭔가 굉장히. 장난 아닌 거 같은데.”
“뭐,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난 처음부터 실전에 투입되었지만.”
“…어. 그런 건 다시 겪고 싶지 않아요.”
하루종일 싸울 수도 있다던 캡틴과 옆에 붙은 블랙 위도우를 동시에 상대한다. 봐주는 부분도 있고, 미숙한 부분이 있는 것도 맞았다. 하지만 이 정도까지 따라오는 건 분명 피터의 능력이 맞았다. 먼저 바닥에 누운 쪽은 피터였다. 더는 못하겠어요. 두 손을 들고 항복 선언을 하는 어린애를 보던 어벤져스는 그냥 허허 웃고 말았다.
“정말 노력했는데, 이 이상은 안 될 거 같아요.”
“왜? 아주 잘하고 있는데.”
“솔직히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을 줄 몰랐거든요. 이젠 걸을 힘도 없는 것 같아요.”
“이 건물이 무너지지 않은 것도 다행이고 말이지.”
“아니. 훈련을 시키랬더니 이게 뭐 하는 일이야.”
캡틴의 방패를 들고 나타난 토니 스타크가 주변을 둘러보며 혀를 찬다. 사방에 붙어있는 거미줄부터 미세하게 파손된 벽까지. 어지간한 재질이 아니면 이미 이 건물은 기둥부터 폭삭 무너져 내렸을 것이 분명했다. 바닥에 누워있는 녀석이 어딘가 익숙하게 본 느낌이었지만, 애써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캡시클은 이거 받고, 아니 애를 아주 완벽히 잡아놨네.”
“제대로 가르쳐달라고 했던 사람이 누군데 우리한테 이러실까.”
“제대로 했으면 이 정도로 안 끝나지.”
“내가 저 녀석 몸은 지킬 줄 알아야 하니까 도와달라고 했지. 이렇게 굴리라고는 말 안 했어.”
“…….”
순간 수많은 눈이 토니를 향한다. 피터도 가면을 쓰고 있어서 그러지, 아마 슈트를 벗고 있다면 눈이 등잔만 하게 커졌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토니의 표정은 그 누구보다 진지해서 차마 뭐라고 말을 할 수 없었다. 토니 스타크가 언제부터 이런 식으로 말을 하던 사람이었을까. 그런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나타샤였다.
“저기. 토니 스타크 씨.”
“왜 또.”
“저기 누워있는 어린 거미가 우리보다 더 강한 메타 휴먼이라는 사실은 인식하고 있는 거 맞아?”
“어린애라니까.”
“…….”
말이 안 통한다는 표정을 한 나타샤가 한걸음 물러섰다. 자발적인 콩깍지는 타인이 벗겨주기 힘들다더니. 지금이 바로 딱 그 꼴이었다. 아무래도 저. 아이언맨. 토니 스타크의 눈엔 스파이더맨이 그냥 어린 남자애로 보이는 것이 확실했다. 그러면 스파이더 보이라고 부르던가. 나타샤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이런 상황에 당황한 쪽은 오히려 피터였다. 허둥지둥 일어나서 괜찮다는 걸 보여주려 했지만, 잔뜩 혹사당한 몸은 맘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결국 털썩 주저앉은 채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 짜낸다.
“그래도 예전보다 나은데요. 우주 갈 때 말이에요.”
“농담도 잘하는군.”
“정말인데, 이렇게 훈련하면 분명 좋은 일이 있겠죠?”
“…없는 편이 낫지만. 혹시 모르지.”
외계인이 계속 쳐들어온 횟수만 세어봐도 이후 더 위험한 일이 없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아무리 좋은 기술로 보호막을 만든다고 해도 그것이 모두에게 먹힐지도 알 수 없었다. 당장 타노스가 쳐들어왔을 때도 그랬다. 운이 좋아서 어떻게든 좋은 결과를 끌어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희생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정말 괜찮아요. 멀쩡하다고요.”
“그건 다행이네.”
“아마 우리를 여기 부른 이유가 따로 있는 거 같네. 안 그래요. 캡틴?”
“그야. 모르지.”
토니 스타크 얼굴만 봐도 할 말을 안다고 했다. 나타샤는 일이 있어서 내일 아침에 떠난다고 했고, 캡틴은 곧 와칸다로 넘어가 봐야 한다는 말을 한다. 저 인간들이 순순히 말을 들을 리 없다고 생각했는지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저 바쁜 인간들이 이곳에 얌전히 있기도 힘든 일이었다. 그래도 잠깐이나마 도움을 줬으면 된 거지. 언젠가는 다시 만날 일이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한다.
“무기 개량은 고마워. 훨씬 가벼운걸?”
“미운 놈 간식이라도 하나 더 주는 셈 치지.”
“허어. 그렇다 이거지. 캡틴도 미운 놈인가 봐?”
“밉기만 하겠어.”
이런 말도 서로 얼굴을 보면서 할 수 있으니 농담이 맞았다. 급히 떠난 나타샤를 배웅하고 온 캡틴은 와칸다에서 무슨 연락이 왔는지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러자 넓고 견고한 훈련실엔 작은 거미와 아이언맨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이제야 좀 호흡이 돌아온 모양인지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줄어든다.
“가면 벗어도 될까요?”
“나야 상관없는데, 네가 문제 아닐까.”
“…….”
“우리처럼 얼굴 내놓고 활동하는 쪽 하곤 다르지. 사실 이제 남아있는 사람이 몇 없긴 하지만.”
“캡틴은 아직 제 정체 모르죠??”
“그렇지.”
“안 되겠네.”
반쯤 가면을 벗은 채 앉아있던 녀석이 주변을 돌아본다. 사실 처음부터 토니가 데려왔으니 다른 사람이 피터의 정체를 알 리 없었다. 게다가 숙모를 위해서라도 신분을 밝히고 싶지 않았다. 캡틴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상황에 팔자 좋게 가면을 벗고 쉴 수도 없었다. 차라리 방으로 올라갈까 싶었지만, 밤에 힘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적당히 하고 들어가서 쉬어. 아마 내일 다들 떠나면 가상훈련 쪽으로 노선을 변경할 거니까.”
“…가상훈련이요?”
“그래. 새로 만들고 있는 프로그램인데, 일단 건물이 무너질 확률은 조금 더 낮아지지.”
“…….”
“왜 또 그런 표정이야.”
“만들고 있다는 게 제가 가장 먼저 데이터를 제공한다는 말과 같은 걸까 해서요.”
“불안하다는 거네.”
“에이. 그럴 리가요.”
이제야 농담이 나온다. 조금 살아난 모습에 토니는 그냥 픽 웃고 말았다. 돌아온. 캡틴이 토니에게 무엇인가 말을 전한다. 대충 무슨 일일지는 예상이 간다. 와칸다 쪽 일이겠지. 그쪽도 피해가 어마어마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비브라늄으로 누구보다 강성한 나라를 꾸리고 있지만, 집요한 폭격을 모두 피할 수는 없었다. 아직 제대로 복구되지 않은 부분을 도와달라는 이야기일 것이 뻔했다. 그러면 당연히도 이곳에 오래 머무르진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언제까지 할 텐가? 하루종일?”
“캡시클. 돌아왔네?”
“용건만 끝나면 바깥으로 다닐 일이 없으니까 말이지.”
“필요하면 온종일 해도 괜찮은데. 아마 저 녀석이 못 버틸걸?”
“제발 도와주세요. 캡틴.”
어린 거미가 죽는소리를 한다. 사실 잘 따라오기에 조금 더 몰아 부쳐본 것이 맞긴 했다. 하지만 저렇게 지친 아이를 억지로 일으킬 생각은 없었다. 캡틴이 허허 웃는 것을 본 피터는 그대로 바닥에 늘어졌다. 꼭 어디서 본 광경이었다.
“저번에 만났을 때보다 이게 더 힘든 것 같아요.”
“그건 아닐 텐데?”
“그땐 힘든 줄도 몰랐거든요.”
“놀라긴 했지?”
“네. 그렇죠.”
피터는 힘들어하면서도 대답은 꼬박꼬박한다. 그런 둘 사이를 자연스럽게 막아선 토니 스타크는 이제 이 대화의 끝을 알린다. 두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노친네도 밥을 많이 먹어야 하는 거 아냐?”
“자네. 정말.”
“어린애는 많이 먹어야 잘 클 거고.”
“스타크 씨!”
“그렇다면 됐네. 난 오늘 같이 밥을 먹어줄 사람이 필요하거든. 어때?”
“식사 초대치곤 제법 막말이라고 생각하네.”
“맞아요.”
“익숙하잖아.”
“…….”
“…….”
토니는 두 사람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손가락을 튕긴다. 가벼운 움직임 하나만으로도 업스테이트 본부의 모든 것을 움직일 수 있는 존재였다. 피터는 여전히 헉헉거리면서 바닥에 앉아있었고, 스티브는 못 말린다는 표정을 숨기지도 않았다.
피식 웃고 만다. 편히 이야기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 말엔 서늘한 비수가 가득했다. 필요에 의해 모인 사람이었다. 자신의 이익을 가장 우선시하기에 한마디도 쉽게 할 수 없었다. 그런 곳에서 허허실실한 농담 속에 들어있는 진심은 생각보다 날카로웠다. 토니 스타크는 발을 빼야 할 곳을 잘 알았다. 바쁘다는 이유로 먼저 자리를 뜬다. 이 정도면 되겠지. 뭐든 적당한 편이 좋았다.
“…….”
건물을 완전히 벗어나기 전까지 아무것도 손에 쥐지 않았다. 작은 행동 하나만으로 충분히 약점을 잡힐 수 있다. 그렇게 건물에서 내려온다. 아래층으로 이동한다. 또 한참을 걸어가야 타고 온 자동차가 있었다. 프라이데이. 가볍게 부른다. 그러자 차 문이 열린다. 그렇게까지 하고 나서야 간신히 안전한 곳에 앉을 수 있었다. 후우.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단단하게 목을 죈 넥타이를 적당히 풀면서 깊게 넣어둔 핸드폰을 꺼낸다. 전원을 꺼둔 채 방치되어있던 핸드폰은 차갑기만 했다. 하긴 이런 것 들고 다니지 않아도 토니 스타크가 원한다면 뭐든 연락을 할 수 있다. 프라이데이를 만들었고, 자비스를 만들었다. 아이언맨을 만든 천재. 그 무슨 수식어를 갖다 붙여도 모자람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핸드폰을 하나 들고 있는 것은 누군가를 위한 마지막 아날로그적인 면모였다. 전원이 켜지는 짧은 순간 토니 스타크는 많은 생각을 했다. 작은 거미가 얼마나 많은 연락을 했을까. 아니면 아직도 다 컸다고 주장하는 그 말 때문에 꾹 참았을까. 이렇게 웃을 일이 생기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
물론 그 웃음이 점차 사라진 것은 끊임없이 갱신되는 문자 때문이었다. 처음엔 늘 오던 만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밑으로 내려도 끝나지 않는 스크롤 바를 보면서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이런 불안감이 들기 시작했다. 차라리 누가 토니 스타크의 핸드폰을 해킹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 녀석이.”
하지만 문자에 꼭꼭 박힌 피터 파커란 이름은 이것이 해커의 공격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럴 때 마나 관자놀이가 욱신거리며 아팠다. 흔히 있는 두통이라고 하지만, 피터와 엮이면 조금 달라진다. 토니는 나이를 이만큼이나 먹고서 어린애처럼 군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조차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뭐든 할 수 있다고 말하던 토니 스타크는. 지금. 한 가지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핸드폰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있을 뿐이었다.
“…아.”
이제야 간신히 진동이 멎는다. 작은 거미는 말이 많다. 꼭 말을 하지 않으면 숨을 쉬지 못하는 것처럼 굴었다. 물고기는 물에서 살아야 한다고, 거미는 땅에 붙어있어야 한다고. 그랬던 말을 꼭 이렇게 돌려받곤 한다. 그러면 그 녀석이 어땠더라. 작은 머리통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그리고 가볍고. 재빠르고.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동안에도 입을 쉬지 않았다. 토니 앞에서 그랬으니, 떨어져 있어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핸드폰 사용법도 성격을 따라간다.
“그런데 말이지.”
“…….”
“도대체 저 녀석한테 내 번호 알려준 사람 누구야.”
“…….”
“응? 프라이데이. 왜 그러는데.”
기계에 감정이 있다면 바로 이런 식일 것이다. 프라이데이는 잠깐 뜸을 들이다 다시 말을 이어간다. 토니는 나름 심각했고,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그 철두철미한 성격이 이렇게 물렁물렁해지는 것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단단하던 토니 스타크의 성격도 이렇게 물러진다. 그 매개체가 작은 거미라는 사실은 토니 빼고 모든 이들이 안다. 그러나 굳이 입 밖에 내지 않는 이유는 서로 민망해하는 분위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프라이데이는 그런 인간 사이의 일을 생각할 만큼 깊은 사고를 하지 않는다. 아무리 정교한 기계라고 해도 인간의 복잡한 생각을 따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보스가 직접 적어주셨습니다.”
“…….”
토니는 갑자기 말이 없어진다. 프라이데이는 그 침묵을 잘못이라고 인식한 모양이었다. 바로 맞는 답을 구하기 위해 그 날의 메모리를 이리저리 헤집기 시작했다. 물론 여기서 토니가 말려야 했다. 그러나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 어쩔 수 없다. 이럴 땐 그저 시간이 약이었다.
“죄송합니다. 보스.”
“응? 무슨 일이지?”
“저장된 메모리를 확인했습니다. 보스가 직접 적어주신 것은 아니고, 파커 군이 요청했군요. 이후 보스가 번호를 알려주신 모양입니다.”
“…프라이데이.”
“네, 보스.”
“아니야.”
“좀 더 정확한 정보가 필요하신가요?”
“아니. 아니야. 굳이 그때 기억을 상기시켜주지 않아도 괜찮아.”
“알겠습니다.”
“…….”
프라이데이가 가져온 그 날의 기억은 제법 생소했다. 이젠 모두 잊어버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불현듯 떠오른 채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억지로 다른 생각을 하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선명해진다. 피터 파커가 어떻게 움직였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자신의 눈을 쳐다보았는지. 아닌지. 하나하나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입꼬리가 씰룩 움직인다.
“내가 미쳤군.”
자조적인 말이었다. 차라리 과학에 미쳤다고 평가받던 적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그땐 이런 식으로 정신을 빼놓고 다니는 사내라는 말은 듣지 않았으니 말이다. 어쩔 수 없었다. 피터 파커. 스파이더먄. 작은 거미. 어린애. 여러 가지 단어로 불리는 그 녀석을 생각하면 가끔 심장이 간질거린다. 이런 감정은 이미 다 타버린 줄 알았는데 용케 심장 한구석에 살아있었다.
“날씨가 좋아야 할 텐데.”
뜬금없이 날씨 걱정을 한다. 그 녀석은 방학이 되면 업스테이트로 놀러 온다. 아니 놀러 온다는 표현은 잘못된 것 같아서 다른 단어로 정정한다. 그 녀석은 어엿한 히어로였다. 물론 눈엔 차지 않는다. 그 녀석을 데뷔시키려고 기자를 불러 모았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거절했고, 새로 만든 슈트도 받지 않았다. 물론 예전에 쓰던 건은 선물로 안겨줬다. 이곳에 오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서 늘 그 시간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래도 아직 학생인 거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학교이니 멋대로 빠지라고 할 수도 없었다. 물론 그렇게 되었다면 토니 스타크는 저 작은 아이의 보호자에게 멱살을 잡혔을지도 모른다.
“거미는 습기랑 비에 약하지.”
딱히 의미가 있는 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토니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괜히 피터가 업스테이트에 올 시기의 날씨를 예상해 본다. 날씨가 맑으면 거미도 신이 나겠지. 아주 하늘을 날아다닐 수도 있다. 그러면 혹시 다치지 않도록 낙하산이라도 달아줘야 하나. 몇 년 전 토니에게 이런 꼴을 보여주면 있을 수 없는 미래라고 딱 자를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인간이 변하는 존재인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 전제에 가장 부합하는 형태로 천천히 변해가는 토니 스타크는 생각보다 훨씬 더. 작고 어린 거미에게 온갖 신경을 쓰고 있었다. 정말이었다.
*
업스테이트는 늘 바쁜 곳이었다.
어벤져스 본부가 생긴 이후 조용할 날이 없는 곳이기도 했다. 물론 이 곳에 제일 늦게 발을 디딘 스파이더맨도 마찬가지였다. 피터가 업스테이트에 온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어린 히어로를 가르쳐야 한다는 구실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직 학교에 다니는 녀석을 데리고 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전 괜찮은데요.’
‘내가 안 괜찮다. 꼬맹아.’
‘학교가 다 뭐라고…….’
‘그런 마음으로 잘도 히어로를 하겠다.’
‘…….’
또 볼이 불퉁하게 부어오른다. 하긴 저번에도 그랬다. 세상 분간을 못 하는 녀석을 잡아 누르기도 힘이 들었는데, 녀석은 그런 것도 잔소리라고 느끼는 모양이었다. 피터가 학교에 가지 않으면 메이가 걱정한다. 그 걱정은 바로 토니에게 전해질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여기까지만 생각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져 왔다. 그래서 잡은 약속이 바로 이때였다.
‘방학…이요?’
‘그래. 방학.’
‘왜. 굳이…….’
‘학생은 학교에 가야지.’
‘…….’
‘그때부터 움직여도 충분하다. 알았어?’
‘…….’
‘제발 어른이 하는 말 잘 듣고, 내가 할 것 같은 일은 하지 말고. 내가 안 할 것 같은 건 절대 하면 안 되는 거야.’
‘…….’
‘대답.’
‘알았어요. 스타크 씨.’
‘그래.’
‘하지만…….’
‘절대. 안 돼.’
‘…….’
‘방학 전에 거미가 움직인다는 소리 들으면 줬던 슈트도 다시 뺏을 줄 알아.’
‘…….’
물론 슈트가 없어도 히어로인 것은 맞다. 하지만 제법 잘 먹히는 협박이었다. 피터는 그런 토니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피터의 달력 한 귀퉁이에는 작은 별표가 생겼다. 물론 달력이 몇 장은 넘어가야 한다. 그렇게 하루하루 길고 긴 날을 보냈다.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 오지 않을 것 같던 날짜도 어느새 오기 마련이었다. 피터는 불쑥 다가온 날짜를 손으로 짚어보면서 점점 들뜨고 있었다. 오히려 몇 달 남았을 땐 그렇게 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눈앞에 보일 정도로 가까이 오니 오히려 시간이 늦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아.”
피터는 괜히 침대에서 뒹굴었다. 이렇게 조바심을 내봤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늘 그랬다. 오히려 지금은 조용한 슈트 누나가 이런 모습을 모두 찍어서 토니에게 보고할 수도 있었다. 버둥거리며 팔다리를 휘저어봐도 딱히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진짜 시간 안 간다.”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 누워버렸다. 이젠 이런 것도 익숙하다. 하루가 48시간으로 변한 걸까. 아니면 유독 자기한테만 시간이 느리게 지나가는 걸까. 똑똑한 녀석은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 차라리 언제 불러줄지 모르던 쪽이 나을지도 몰랐다. 물론 그런 식이었을 때도 시끄럽게 히어로 일은 언제 할 수 있느냐며 연락을 하긴 했다. 보통은 해피가 그 연락을 받았다.
“…….”
갑자기 억울해진다. 스타크 씨가 얌전히 있으라고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무거워지면 누가 손해 보는 걸까. 매일 운동을 하거나 사람들의 눈을 피해 짧은 훈련을 반복하긴 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일주일. 이주일.”
정말 얼마 남지 않았지만 까마득하게 멀게만 느껴졌다. 토니 스타크가 제발 얌전히 있으라고 한 이유도 알고 있었다. 짐작이 간다. 직접 물어보진 않았지만, 아마 피터가 생각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렇지만. 피터는 지금 당장 뉴욕으로 뛰어가고 싶었다.
“정말 미치겠다.”
“피터?”
“네? 네!”
“무슨 일이 있니?”
“아뇨! 그럴 리가요!”
“…….”
“침대에서 떨어질 뻔했거든요!”
“그래. 알았다. 조심해라.”
“네. 알겠어요.”
천장에 붙은 채 넉살스레 대답한다. 물론 메이가 이런 꼴을 봤으면 당장 쓰러질 것이 분명했다. 아니. 저번에도 들킬 뻔했다. 네드한테는 이미 들켰고. 그래서 혼자 쓰는 이 방에서 움직이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이렇게 하루를 보내고 다시 하루를 보내면 되겠지.
결국, 늘 생각의 종착지는 같았다. 피터는 계속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럴 때면 똑똑한 아이는 할 일을 만들어낸다. 토니 스타크가 이 모급을 본다면 그저 어린애 같은 놀이겠지만 피터에게는 누구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뉴욕에 어떻게 갈지 검색이나 해볼까?”
이 생각이 드니 머리가 조금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하긴 피터는 퀸즈에 살았고, 어벤져스 본부는 업스테이트에 있었다. 제법 먼 거리이기에 어린애가 심심하다고 놀러 갈 만한 수준이 되지 않았다. 보통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도 피터는 상황이 약간 달랐다. 메이는 늘 피터를 걱정했고, 피터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지간하면 숙모에게 이런 일을 들키지 않았으면 했고, 걱정하지 않기를 원했다.
그러다 보니 멋대로 퀸즈를 떠나 며칠씩 다른 곳에 머무는 것을 꺼렸다. 그렇다고 메이가 무조건 막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어디로 가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최소한의 정보를 알기 원했다. 피터가 토니 스타크와 약속한
날을 기다리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늦게 가면 안 되니까.”
피터는 급하게 자판을 두드렸다. 퀸즈에서 뉴욕으로 가는 길. 차편. 머물 곳. 들릴 곳. 숙모가 걱정하지 않게 꾸밀 변명도 필요했다. 정말 놀러 가는 것도 아닌데 그것보다 훨씬 복잡했다. 찾아가기 어려운 곳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허무맹랑한 곳은 안 된다. 게다가 피터가 관심이 없는 곳도 안 된다. 갑자기 관심이 간다고 해봤자 숙모는 믿지 않을 것이 뻔했다.
“아…이걸 어쩌지.”
교통편만 알아봤는데. 벌써 머리가 지끈거린다. 피터는 다 때려치우고 다시 침대에 눕고 싶었다. 아니면 학교에 가서 거미줄 용액이나 좀 더 업그레이드하고 싶었다. 아무것도 알 수 없는데 하고 싶은 일만 잔뜩 생긴다. 피터는 겨우 두 줄 정도 적어둔 채 다시 컴퓨터를 껐다.
“스타크 씨가 나빴어.”
이건 정말이야. 이 생각을 하며 문자를 보낸다. 하루에 여섯 통쯤은 괜찮겠지. 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그 주기가 점점 빨라지고 있는데 피터만 그 사실을 모른다.
*
“피터.”
“…….”
“피터. 오늘 그 날 아니니?”
“…으. 무슨 일이에요.”
“어제까지 뭔가 급하기 가방을 싸면서 준비하던 거.”
“…….”
“피터. 늦는다.”
“…그거 아직 시간이.”
“오늘 스타크 씨랑 약속이 있었던 거니?”
“…….”
잠이 덜 깬 귓가에 흐릿하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피터는 늘 그랬던 것처럼 이불을 돌돌 감은 채 눈만 깜박였다. 조금 더 자고 싶은 마음과 이젠 일어나야 한다는 이성이 부딪힌다. 어제 늦게 잔 편도 아닌데 왜 이렇게 졸음이 쏟아지는지. 정말 알 수 없었다.
“아직 버스 시간…아닌데.”
“지금 우리 집 앞에 와서 기다리고 계신걸?”
“…….”
“피터? 자니?”
“…….”
“피터?”
“으악!”
저 멀리서 피터의 비명이 들린다. 메이는 익숙한 일이라는 듯 허리에 손을 얹은 채 고개를 저었다. 저 녀석은 꼭 시간이 안 간다면서 버둥거리다 막상 그 날이 오면 이렇게 대차게 사고를 치곤 한다. 그러니까 일찍 자라고 했는데. 하지만 이미 늦은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저 애가 아직도 저런다니까요.”
“괜찮습니다. 뭐, 더 그러면서 크는 거죠.”
“스타크 씨가 직접 오셨는데.”
“아닙니다. 뭐 이 정도쯤이야.”
토니 스타크는 허허 웃기만 한다. 자신의 시간은 금보다 비싸다고 말하던 사람은 간 곳이 없었다. 하긴 이날을 위해 몇 달 전부터 일정을 조정해둔 것도 맞았다. 피터가 연락이 잘 안 된다면서 툴툴거렸던 그 시간에 토니는 하루를 세 갈래로 쪼개서 움직였다. 단지 그걸 주변이 모를 뿐이었다.
“저 녀석이 정말…….”
“괜찮습니다. 제가 먼저 제안한 일인걸요.”
“하지만…….”
“제안한 사람이 기다려야 하는 거죠. 저런 인재를 이쪽으로 데리고 오기 위해선?”
“세상에.”
“파커군이…아주 똑똑합니다. 벌써 여기저기서 탐을 내고 있어요.”
물론 뒤에 붙을 말이 더 있겠지만, 애써 삼킨다. 별로 다른 것은 아니었으니 괜찮으려니 한다. 쿵쾅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을 보니 이제 준비를 끝낸 것 같았다. 하나. 둘. 셋.
“안녕하세요!!! 스타크 씨!”
“어, 그래. 오랜만이다.”
“제가…좀…늦었죠. 늦잠을…자서.”
“…….”
“근데 제가 타고 갈…버스는 아직…시간이…….”
“좋아. 파커군. 밀릴 수도 있으니 이동하면서 이야기를 할까?”
“예? 예?”
“그럼 파커군 얌전히 데려갔다가 무사히 돌려놓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니…저 그게.”
“서둘러야 할 거다.”
“…….”
피터 파커는 메이와 토니 스타크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하지만 스타크의 움직임이 좀 빨랐다. 커다란 가방을 등에 맨 작은 거미가 질질 끌려간다. 숙모는 아무것도 모른 채 손을 흔든다. 파커는 여기서 토니 스타크의 손을 뿌리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저…근데.”
“왜?”
“스타크 씨가 여긴 어쩐 일로.”
“오늘 업스테이트 오는 날이잖아.”
“그건 그런데…….”
“…….”
“왜? 뭔가 잘못된 것이라도 있어?”
“아뇨.”
사실 처음부터 끝까지 이상하기만 한데 뭐라 콕 집어낼 수 없었다. 그렇게 아차 한 순간 차 뒷좌석에 밀어 넣어진다. 제 몸만 한 가방을 든 채 안쪽으로 굴러 들어간 피터는 눈만 깜박이면서 토니를 바라본다. 당연한 듯 그 옆자리를 차지한 토니가 운전석을 툭툭 두드린다.
“…….”
피터가 눈만 데굴데굴 굴리면서 콕 박혀 있는다. 익숙한 뒷모습을 보아하니 앞에 있는 사람은 해피였다. 당연한 소리이긴 했다. 토니 스타크의 경호실장이니 여기에 같이 왔을 것이고. 그러니까. 음. 피터는 머리에 과부하가 걸리는 느낌이었다.
“조그만 녀석이 뭘 그렇게 생각을 해?”
“네? 제가 뭐요.”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
“그러니까 얌전히 좀 있으라고 했지.”
얌전히 있던 저를 뒤흔든 쪽은 토니 스타크 씨인데요. 억울함이 절절하게 배어 나온다. 그렇게 가고 싶어 하던 업스테이트였는데. 약속한 날까지 얌전히 기다렸을 뿐이었다. 그런 고뇌는 스타크씨한데 별로 큰일이 아닌 듯싶었다.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많이 했지.”
“…….”
“버스며 갈 곳이며.”
“…….”
“많이도 찾아놨던데,”
“그거야!”
“그거야.”
“그거야…….”
피터는 말끝을 흐린다. 내가 이 이야기를 스타크 씨한테 했던가. 아닌가. 이젠 그것조차 헷갈린다. 가방을 끌어안은 손이 꼼질 거리며 당황스러움을 그대로 표현했다. 토니는 그런 모습을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지켜볼 뿐이었다.
“역시 스타크 씨한테 그거 말 안 한 거 같아요!”
“응?”
“제가 언제 어떻게 업스테이트에 간다고 말 안 했잖아요.”
“그래. 뭐 나한텐 말 안 했지.”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알고 여기 왔냐. 이걸 묻고 싶은 거겠지.”
“…그렇죠.”
“네 녀석 머릿속은 훤하지.”
“…….”
“그걸 하기 전에 좀 더 빨리 움직였을 뿐이야.”
“…….”
약간 이상한 말이 끼어든 것 같지만,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역시 억울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렇게 며칠 동안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한 번에 해결해줄 거였으면서. 약간 억울해진 입술이 쭉 튀어나온다.
“그래서. 싫어?”
“아뇨. 그렇다기보다.”
“…….”
“자꾸 제가 어려 보이잖아요.”
“어린 거 맞는데?”
“…….”
“넌 그냥 그렇게 있으면 된다.”
“지금은 히어로 훈련하러 가는 거잖아요!”
“그것도 맞지.”
“…….”
“그냥 그렇다는 거야.”
“스타크 씨가 자꾸 절 흔들어요.”
“내가?”
“…네.”
“자꾸 기대하면 안 되는데, 이렇게 쉽게 쉽게 해결되는 거에 익숙해지는 것도 안 좋고.”
“기대를 해?”
“기대하죠. 안 해요?”
“모르겠네.”
정말. 또 속았다. 피터는 어색하게 시선을 바깥으로 옮긴다. 쉭쉭 지나가는 풍경이 눈에 맺힌다. 이렇게 한참 달리면 업스테이트에 도착하겠지.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면 히어로들이 있을 거고. 그러면. 여기까지 생각하던 도중 가볍게 차체가 흔들린다.
“어이쿠.”
“…….”
“도로가 안 좋네. 무슨 일이 있나.”
“…….”
약간 가까워진 둘 사이의 거리는 아직 어색하기만 했다. 피터는 숨을 죽이며 토니 눈치를 본다. 원래 이런 적이 없는데, 이상하게 토니가 보이면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부담감인지. 동경인지. 그것도 아니면 묘한 애착인지. 아직 둘은 서로의 감정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업스테이트에 가면.”
“네. 네!”
“엄청난 훈련을 하게 될 거야. 그땐 힘들다고 울어도 안 봐줘?”
“당연하죠! 저도 뭐…….”
“히어로라고?”
“네. 히어로. 그거 맞아요. 맞죠!”
“한참은 어린 녀석이.”
“…….”
넌 언제쯤 어른이 될 거냐고 묻던 토니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이런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이 작은 거미만 보면 자꾸 잔소리하게 된다. 어린 녀석이라서. 스스로 그렇게 말해보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숙모는 제가 방학 맞이 인턴 학습을 하러 간 줄 아세요.”
“그렇겠지. 그래서 내가 직접 왔잖아.”
“보통 그렇게 큰 회사는 인턴 한 명을 데리러 오려고 거물이 움직이진 않거든요.”
“그런가?”
“물론이죠. 이렇게 큰 회사에서. 높은 사람이 왜 여길 와요.”
“…….”
“자동차를 대동하고서 말이에요.”
괜히 말끝이 기어들어 간다. 반쯤 농담으로 말한 거지만 정말 이상하긴 했다. 평생 가도 TV에서나 얼굴을 볼 것 같은 인물이었다. 그런 사람이 이렇게 덥석 찾아와서 차로 일개 고등학생을 모셔간다. 정말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좋은 점이 없었다.
“그래서 싫어?”
“아니.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스타크 씨.”
“그럼 왜 그렇게 낯을 가려.”
“스타크 씨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거죠!”
“내가? 왜?”
“저 놀리는 거 재밌는 거잖아요! 안 그래요?”
“그럴지도 모르지.”
“진짜 너무 한다. 당연히 주변 보는 눈도 있고, 괜히 신경 쓰이니까 그러죠.”
“정말 그런 걸로?”
“…그리고 스타크 씨 시간도 뺏는 거 같고, 음. 혼자서도 갈 수 있는데, 저도 다 컸는데.”
“정말 어린애가 할 만한 말이다.”
“…….”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눈치를 보다 입을 다물어버린다. 이러나저러나 이미 차에 탔고, 불편하다고 해서 멋대로 내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차라리 혼자 업스테이트를 찾아가는 편이 낫지. 이렇게 편하면서 불편한 자리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졸리면 그냥 한숨 자 둬.”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애들은 잠이 많다며. 그리고 멀미를 할 수도 있지.”
“저 멀미 안 하거든요.”
“당장 도착하면 힘들 거란 이야기야.”
“…….”
“자라. 그냥.”
슬쩍 손으로 어깨를 끌어당긴다. 펄쩍 뛰어오르는 몸이 그대로 느껴진다. 이 녀석은 너무 예민해서 이렇게 움직이는 것도 빠르게 알아챈다. 예전엔 그러지 않았는데, 능력이 점점 성장하고 있었다. 몸속에 들어있는 거미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지만, 토니 옆에선 조금 누그러진다.
‘안 졸리다 더니.’
토니는 속으로 웃는다. 몇 번 어깨를 토닥거리자 빳빳하게 굳어있던 몸이 조금씩 말랑하게 늘어진다. 그러더니 조그만 녀석은 잠을 이기지 못하고 가방을 껴안은 채 고개를 푹 숙인다. 이 정도 되면 어깨에 기대도 될 텐데, 아직 그런 사이는 아닌 모양이었다.
생각대로 가까워진다면 이렇게 끙끙 앓을 필요가 없을 테니, 그저 인간 군상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편이 나았다. 토니는 동그랗게 몸을 웅크린 채 자는 녀석을 바라보다가 따라서 눈을 감았다. 이 짧은 평화가 지나면 또 시끄러운 사회 속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냥 이 시간을 즐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