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딕뎀] ETERNITY
2014년 8월 코믹월드에 배포본으로 냈던 딕뎀 소설입니다
배포본을 다시 재판할 일이 없을 것 같고, 짧은 소설이라 공개합니다
그 당시 이슈를 본 사람의 기분으로 봐주세요! 현재 진행되는 이슈와 차이가 있습니다
오래된 글이라 굉장히 민망하네요(...
001
유난히 잠에서 깨고 싶지 않던 아침이었다.
아니 항상 그랬었다. 눈을 뜨면 언제나처럼 지루하고 비슷한 생활만 반복되곤 했기에, 데미안은 반쯤 깬 정신을 다시 베개에 푹 파묻으면서 애써 아침을 외면했다. 어차피 이 상황에서 늦잠 좀 잔다고 혼낼 사람은 여기에 존재하지 않았다. 수명이 다 된 전등처럼 깜박 깜박 점멸되는 기억은 점점 늪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조금만 더 눈을 감고 있으면 늦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유난히 시끄럽게 울리는 시곗바늘 소계에 결국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보통 땐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소리였다. 조용한 공간을 가득 채우는 규칙적인 소리는 데미안의 심기를 건드리기 충분했다. 그 반동으로 침대가 크게 출렁거렸다. 새 것 같은 하얀 이불 위에 햇살이 곱게 쌓여있다 푸스스 흩어졌다.
“…….”
잠이 잔뜩 달라붙은 눈을 깜박이던 데미안이 천천히 왼쪽 손바닥으로 눈 주위를 꾹꾹 눌렀다. 아침엔 항상 약한 두통이 있었다. 가끔은 눈앞이 흐릿해지기도 했지만, 데미안은 항상 그런 현상은 아침잠에 취해서 그런 거라 말하곤 했다.
천천히 밝아지는 시야가 완전히 트이자 그제야 하얀 방이 눈에 들어왔다. 가구라곤 가장 필요한 것만 들어있는 삭막한 공간이었다. 오른쪽으로 크게 트인 창문에선 해가 구름을 가르고 기분 좋은 햇살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꿈을…꾼 거 같은데.”
데미안이 중얼거렸다. 불투명한 막에 한 겹 가려진 것처럼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생각하려고 하면 할수록 머릿속만 간질간질해질 뿐이었다. 익숙한 얼굴, 익숙한 공간, 그리고 평소와 다름없는 대화를 나눈 것 같았다. 하지만 단 하나도 제대로 기억을 할 수 없었다. 점점 멀어지는 꿈의 끝자락을 잡기를 포기했다. 데미안이 머리를 가볍게 흔들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푹신한 양탄자에 발이 닿은 순간이었다. 거짓말같이 새하얀 방에 색이 입혀진 것 같았다. 데미안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가구에 닿는 숨결마다 희미하게 색이 떠오르다가 다시 천천히 사라졌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런 것은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사실 이게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꼭 있어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데미안은 그제야 잊었던 것이 생각난 마냥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레이슨?”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레이슨? 어딨어!”
방 한가운데 서서 재차 이름을 불렀지만, 데미안의 귀엔 작은 인기척조차 들리지 않았다.
“…….”
낯선 소리만 가득 찬 방 안엔 데미안 혼자뿐이었다. 금방 다시 하얗게 바래버린 방 안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버석거렸다. 가구에 얹힌 빛이 방을 갉아먹었다.
''다른데 갈 곳이 없는데.”
솔직히 이상한 일이었다.
딕이 자신을 놔둔 채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분명 어제 옆에서 잠든 것까진 기억이 났는데, 아침까지 텅 비어버린 필름은 좀처럼 조각이 맞춰지지 않았다. 깨끗하게 가위로 잘라내고 이어버린 필름도 아니고, 까맣게 타버린 것이었다. 영사기에 돌려도 잔뜩 노이즈가 낀 까만 화면밖에 나오지 않는 기분을 그대로 느끼는 데미안은 그리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억이 사라지는 경험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었다.
“…….”
물론 딕이 잠버릇이 험한 것도 아니었고, 몽유병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데미안은 딕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자신했다. 만약 그런 병이 있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모를 리 없다고 생각했다. 작은 아이는 자체적으로 머릿속에서 결론을 내렸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그레이슨.”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그레이슨!!”
하지만 납치라도 당한 것 마냥 흔적도 없이 사라진 딕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방 안에서 아무리 이름을 불러봤자 원하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데미안은 느리게 발을 움직였다. 방 한가운데서 문까지 가는 길이 꽤나 멀게 느껴졌다.
- 덜컥
손잡이 돌아가는 소리가 짧게 들렸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열릴 것 같던 문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가장 긴 바늘이 한 바퀴를 돌고나서야 묵직한 문이 소리 없이 밀렸다. 딱 한사람 나올 정도만 열린 틈으로 데미안이 슥 빠져나왔다. 복도에도 푹신하게 깔아둔 양탄자는 발소리조차 모두 먹어버렸다. 소리가 모두 사라진 집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소음이 사라진 공간은 도무지 사람이 사는 것 같지 않았다.
“…….”
데미안은 잡고 있던 손잡이에서 천천히 손을 뗐다. 그리고 문을 살짝 밀어서 닫았다. 방 안에서 규칙적으로 째깍대는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다. 데미안이 밖으로 나왔지만, 딕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항상 눈이 닿는 곳에 있던 사람이기에 이상한 기분은 더 빨리 작은 몸을 삼키기 시작했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지만 좀처럼 진정할 수 없었다. 점점 불안해지는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필사적으로 겉으로 티를 내지 않으려 하고 있지만, 잔뜩 주름진 미간부터 손톱자국이 남을 정도로 꽉 쥔 주먹까지 어디를 보더라도 진정하지 못하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어깨가 가늘게 떨리는 것은 숨길 수 없었다. 복도에서도 세 번 정도 딕을 불렀다. 처음은 그레이슨이라, 두 번짼 약간 화가 난 목소리로 재차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마지막엔 마지막 발음이 살짝 흔들릴 정도로 입술을 떨었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데미안이 급하게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계단을 급하게 뛰어 내려가는 그 순간에도 아무런 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화려한 장식이 조각된 계단의 끝에 다다르기 전에 훌쩍 뛰어내렸다. 작은 맹수처럼 몸을 굽히고 바닥에 착지한 데미안이 눈을 치켜뜨며 주위를 살폈다. 시릴 정도로 푸르게 빛나는 시선이 집안 구석구석 닿았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딕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았다.
아니 그런 흔적은 처음부터 이 공간에 없었던 것 같았다. 기묘하게 우그러진 공간을 헤매던 데미안이 거실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사람이 없었던 것 마냥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하다못해 스쳐 지나가면서 흐트러진 물건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아닌가.’
사실 스치는 것만으로 움직일 만한 작고 가벼운 물건은 이 공간에 없었다. 가장 필요한 가구만 몇 가지 채워 넣은 곳은 생각보다 훨씬 더 넓어 보였다. 커다란 유리를 통해 들어오던 해가 순간 가려졌다. 커다랗고 짙은 구름으로 들어간 해가 보이지 않자 세상은 일순간 어두운 그늘에 뒤덮였다.
“…….”
집 안 가득 따뜻하고 어두운 그늘이 퍼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 그늘의 끝에서 데미안은 한 가지 기억을 생각해 낼 수 있었다. 이 쉬운 것을 왜 그렇게 떠올리지 못했을까. 데미안은 스스로도 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아…….”
항상 딕은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가끔 다른 일을 하긴 했지만, 전체적인 생활 패턴은 크게 틀어지지 않았다. 그것을 기억해내자 데미안은 필사적으로 어제 아침을 떠올리려 했다. 하루가 지나면 그대로 기억이 녹아버리곤 했다. 아무리 잊어버리지 않으려 해도, 물에 닿은 설탕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갔다. 가늘게 눈을 찌푸리며 기억의 파편을 긁어모았다.
“…….”
아침에 항상 있었던 곳을 찾으려 했다.
데미안의 이상한 행동은 끝이 없었다. 끊임없이 생각하지 않으면 마치 이 공간이 사라진다고 믿는 것 같았다. 평소 이 시간. 혹은 아침. 아니면 잠에서 깬 직후.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키워드를 조합해가며 희미한 머릿속을 헤집었다. 좀처럼 잡히지 않는 어제의 기억은 답답하기만 했다. 자꾸 놓칠수록 데미안의 표정은 더욱 심각해졌다. 간신히 손끝에 닿을라치면 재빠르게 몸을 비틀며 빠져나갔다.
결국, 생각해냈다.
그레이슨은 이쯤이면 부엌에 있었다. 아니 있어야만 했다. 이 간단한 한 문장을 떠올리기 위해 데미안은 엄청난 시간을 쏟아야 했다. 하지만 원하는 것을 떠올렸으니 상관없었다. 데미안에게 시간보다 중요한 것은 더는 기억할 할 만한 것이 남아있지 않았다. 흘러가는 시간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간신히 부엌이라는 것을 떠올린 데미안은 그쪽으로 몸을 틀고 몇 번이나 이름을 불렀다. 아무도 없는 것 같은 곳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 순간 데미안의 눈에 안심의 빛이 떠올랐다.
“하…….”
음식을 하는 것 같진 않았지만, 분명 사람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의자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 공간에서 뭘 하는진 알 수 없었지만, 그레이슨을 찾은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약간 무겁게 끌리는 발을 움직여 부엌으로 걸어갔다.
식탁에 몸을 반쯤 가린 딕이 눈에 들어왔다. 앞치마를 하고 있지도 않았고, 아침 재료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데미안이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 움직이지 조차 않은 것 같았다.
딕은 그저 그 공간에 있었다. 데미안이 생각해낸 바로 그 모습 그대로 눈을 깜박이며 똑바로 푸른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눈앞에 보이지 않을 땐 그렇게 걱정을 했는데, 막상 사람을 찾아내자 데미안은 작은 심술이 솟았다. 잔뜩 짜증이 섞인 눈썹이 삐뚜름하게 치켜올라가는 것을 본 딕이 고개를 한쪽으로 살짝 숙였다.
“그레이슨! 귀가 먹었어?”
“…왜?”
“내가 몇 번이나 말을 했어. 부르면 대답을 하라고 했잖아!”
“날 부른 거 아니잖아.”
“널 불렀어. 몇 번이나.”
“그랬어? 근데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형한테 어리광이라도 부리고 싶었던 거야?
“…….”
“그렇다면 난 좀 기쁠 거 같은데.”
“됐어. 꺼져버려!”
그리고 데미안은 뭔가 잘못 한 것처럼 숨을 들이쉬며 입을 다물었다. 이 집에서 금기와도 같은 말이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낮게 짜증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정말?”
“아냐. 그럴 필요 없어.”
급하게 대화를 끊은 데미안이 밖으로 나가버렸다.
딕이 붙잡을만한 잠깐의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데미안의 뒤통수를 바라보던 딕은 가볍게 볼을 긁적였다. 익숙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익숙하다고 해도 도통 저 녀석의 기분을 짐작할 수 없었다. 언제나처럼 적당히 떨어져 있었다.
그리곤 멍하니 데미안이 지나간 흔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볼에 닿았던 손이 절로 떨어졌다. 어색하게 공중에 멈춰 있던 두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부엌을 떠난 데미안은 빠른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대로 척척 걸어다 소파에 앉았다. 성인 두 사람이 앉아도 넉넉한 소파는 데미안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푹 감쌌다. 거칠게 앉는 반동으로 쿠션이 굴러떨어졌다.
“…….”
푹신한 쿠션을 끌어안은 데미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파 너머로 언뜻 보이는 까만 뒤통수를 찾아 걸어온 딕은 언제나처럼 웃음을 입가에 가득 머금고 있었다. 칠흑같이 까만 머리카락이 하얀 소파에 옅은 그림자를 만들다 이내 사라졌다.
딕은 조용히 발걸음을 내디뎠다. 작은 소리 하나 남기지 않고 걸어갔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모습으로 소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곤 조용히 손을 뻗어서 데미안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약간 움찔하던 어깨가 조용하게 가라앉았다. 작은 얼굴은 도통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딕은 충분히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데미안.”
“…….”
“데미안?”
딕의 이마가 어깨에 닿자 다시 한 번 파르르 떨렸다. 이마를 댄 채 웃을 때마다 숨이 피부에 닿았다. 싸늘한 것 같기도 하고, 부드러운 것 같기도 했다. 이럴 때마다 데미안은 딕을 밀어낼 수 없었다. 자신의 곁에 남아있는 형이란 작자는 그걸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 기억하는 것만큼, 딕도 데미안에 대한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을 거라 믿었다. 아니 믿어야만 했다.
“난 이 시간이…그러니까 기적이 말이야. 나에게 와 준거라고 생각해. 데미안.”
“…….”
“솔직하게 말하자면…한 때는 싸우기도 했고, 서로 틀어지기도 했지만 적어도 지금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잖아.”
“…….”
"안 그래?”
“…….”
“응?”
“그래.”
조용히 한마디 내뱉은 입은 또다시 고집스럽게 다물어졌다. 사소한 대답 하나라도 신중하게 해야 했다. 별생각 없이 말한 한마디가 미래를 바꿀 수도 있었다. 마치 나비효과처럼 밀려오는 가장 나쁜 미래를 상상하던 데미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음. 딕이 간지럽다는 듯 웃었고, 데미안은 고개를 숙인 채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몇 번째 봤던 기시감인지 알 수 없었다. 처음부터 시작하면 이 모든 것이 잘 되리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어린아이의 소망에 지나지 않았다. 기적은 가장 힘든 순간 다가와서 불안감을 함께 심어주었다. 기쁨으로 가득 찼던 머리가 조금씩 식어 가면 그 남은 공간을 불안이 채워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눈앞에 다가온 것을 내칠 만큼 상황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데미안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폐에 가득 찼던 불안감이 끈적끈적하게 묻어나왔다.
“데미안?”
“왜.”
“나 좋아해?”
“…….”
“좋아하지?”
“…….”
나른하게 감기는 목소리는 언제나 듣기 좋았다.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고, 보고 싶었던 미래이기도 했다. 저 질문에 할 수 있는 대답은 한가지 밖에 없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딕이 다시 푸르게 웃으면서 어깨를 와락 잡아당겼다. 소파에 등을 완전히 맡긴 채 넘어간 데미안의 시선이 천장을 향했다. 어깨에 닿아있던 이마가 떨어졌다. 곧이어 시야가 까맣게 가려졌다. 아무런 맛도 향기도, 짜릿함도 남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가볍게 닿았다 아무런 감촉 없이 떨어져 나간 입술이 또다시 데미안을 불렀다. 대답이 없자 다시 불렀다. 지치지도 않는지 계속 같은 말을 반복했다. 길게 이어지는 질문과 대답은 해가 긴 그림자로 온 세상을 덮고 사라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조용하고 느릿하게 거실을 가득 채우는 목소리는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실 대답을 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
"하루 이틀 이런 사이도 아니었잖아. 안 그래? 고분고분 말을 잘 들으면 조금 당황스럽기까지 하단 말이지.”
“그레이슨!!!”
“이것 봐.”
“내가 말을 말지.”
또다시 붙어오는 머리를 있는 힘껏 밀어냈지만 소용없었다. 끈덕지게 붙어오는 딕을 밀어내는 것을 포기한 데미안이 눈을 감아버렸다. 눈을 감고 있으니 졸음이 밀려왔다. 보통 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이젠 익숙하기만 했다. 잠깐 사이에 온몸을 갉아먹는 졸음이 주렁주렁 늘어졌다. 간신히 떠보던 눈이 힘없이 감긴 채 좀처럼 뜨지 못했다.
***
“아, 잔다.”
“…….”
“잠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아.”
“…….”
딕이 또 한 번 웃었다. 허공에 스치는 바람만큼 허무한 웃음이었지만, 괜찮았다. 이 정도만 남아있어도 상관없었다. 이젠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데미안에게 다가갔다.
소파에 가볍게 걸터앉았다. 자신 쪽으로 기울어진 작은 몸은 한참 바라보다가 한 쪽 어깨 내주었다. 무게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가볍게 얹힌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손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머리카락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짧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 데미안이 귀찮다는 듯 고개를 흔들자 곧 그만두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니 곧 심심해졌다. 딕도 함께 눈을 감았다.
이 공간에서 졸리다-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품이 나온다거나 눈이 뻑뻑한 전조증상도 남아있지 않았다. 멀쩡하게 걸어 다니던 사람이 갑자기 쓰러지는 것처럼 잠에 빠져들었다. 둘 사이엔 이미 익숙한 일이라 놀라지 않았다. 뒤척거리지도 않고 죽은 듯 잠든 아이는 나직하게 숨만 내쉴 뿐이었다.
“심심한데.”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있다가 떴지만, 데미안은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조심조심 어깨에서 데미안을 떼어내서 소파에 눕혔다. 여전히 잠에 취해 있는 얼굴에 가볍게 입을 맞춰주곤 조용히 일어섰다. 딕의 입술이 닿은 자리마다 파랗게 얼어붙는 것 같았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런 것도 느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정말…잘 자네.”
나직나직 혼잣말을 했다. 방으로 들어갔다 나온 딕의 손엔 커다랗고 포근한 담요가 들려 있었다. 두 팔로 펼쳐도 모자랄 만큼 큰 담요를 질질 끌어왔다. 데미안을 안아서 자신의 허벅지를 빌려주었다. 한참 어려 보이는 손이 허벅지에서 살며시 움직였다. 그리고 곧 다시 미동도 없었다. 담요로 데미안을 푹 덮어씌웠다. 따뜻한 담요가 온몸에 닿자 작은 몸이 슬슬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이미 태양은 저 멀리 넘어가고 까맣게 어둠이 깔린 하늘엔 희미한 눈썹달이 거꾸로 걸려있었다. 주변에 설탕을 부숴놓은 것처럼 흘러넘치는 별은 금방이라도 정원에 와르르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파란 눈에 가득 담긴 어둠이 볼을 타고 왈칵 흘러내리자 거실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 하얗고 길게 뻗는 달빛을 바라보던 딕이 가늘게 웃으며 담요를 조금 더 끌어당겨 덮었다.
002
003
그날은 데미안의 생일이었다.
좀처럼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딕은 다른 선물을 준비할 수 없었지만, 데미안과 둘이서 축하하기로 몇 달 전부터 약속을 했었다. 이번 생일은 꼭 함께 보내자고 몇 번이나 되묻고 또 물었다. 대답을 들으면 들을수록 가슴 깊은 곳에서 불안감이 스물스물 흘러나왔다. 하지만 딕도 데미안도 꾹꾹 참을 뿐이었다. 하루만 넘기면 그 다음날은 어떻게 해서라도 헤도 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
“또 무슨 일이야!”
“아니 그게….”
“왜 평소에 하지도 않던 짓을 해서 다치고 그러는 거야? 언제부터 밥을 먹었다고!”
“…난 그냥.”
“됐어. 이리와. 넌 나 없으면 어떻게 살래.”
“그래서 내가 여기 있잖아.”
“징그러워.”
“정말?”
“…….”
모른 척 딕의 손가락을 잡았다. 그리고 슬슬 끌어당기며 거실로 나갔다. 반대쪽 손끝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바닥에 생기는 얼룩 따윈 상관없는 듯했다. 한마디도 하지 않고 붕대만 묶는 데미안을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데미안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물에 닿은 고양이 마냥 펄쩍 뛰어오른 데미안이 잔뜩 놀란 눈으로 딕을 쳐다보았다.
“몇 번이나 해도 왜 그렇게 놀라는 거야.”
“그…럴 수도 있지! 멍청아.”
“자꾸 형한테 멍청이라 할래? 이러다 갑자기 내가 사라지기라도 하면 어쩔 건데.”
“…….”
갑자기 눈에 띄게 어두워진 표정에 딕은 뭔가 말실수를 했나 싶었다. 하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평소에 주고받던 지극히 평범한 말일 뿐이었다.
하여튼 데미안의 속은 종잡을 수 없다면서 웃어넘겼다. 손가락에 붕대를 둘둘 감고 나서도 작은 사고가 끊임없이 일어났지만, 딕은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데미안도 바깥출입은 잘 하지 않았다. 몇 달 만에 처음으로 잠시 나갔다 왔을 때 사고가 벌어져 있었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듯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눈만 깜박였다.
“그레이슨?”
“왜?”
“너 몸이….”
“응?”
“젠장.”
“아…….”
뭐라고 말을 할 수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몸은 이미 반쯤 사라진 상태였다. 입을 열어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시간은 그 찰나조차 기다려주지 않았다. 뭐라 한마디 하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딕은 이 공간에 존재하지 않았다. 데미안은 놀라거나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그저 악몽이라고 생각했다. 자고 일어나면 이 악몽에서 깰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섭도록 끔찍한 악몽은 항상 기적과 함께 다니곤 했다. 기적의 달콤함을 앞세워 스물스물 집 안으로 들어온 새까만 것은 어느새 공간 하나를 통째로 삼키고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딕까지 삼켜버렸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딕이 데미안을 떠날 리 없었다. 이름을 부르면 금방 웃으면서 뒤에서 안아올 것 같았다.
“그레이슨.”
“…….”
“이 멍청아!”
“…….”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그저 잠시 사라진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이름을 잊어버리면 끝이었다. 그레이슨. 그레이슨. 딕 그레이슨. 딕. 속으로 이름을 수백 번 되뇌었다. 몇 번을 죽고 다시 눈을 뜨더라도 잊을 수 없는 이름을 심장에 새기고 뫼비우스의 띠의 끝을 찾았다. 그 어딘가에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보이지 않아 결국 그대로 소파에 주저앉았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말도 안 되는 꿈이야. 꿈이겠지. 그렇지 않아? 그레이슨? 네가 들어도 웃기잖아.”
“…….”
“대답 좀 해봐. 아냐 안 해도 괜찮아. 내가 다시 한 번 눈을 감고 널 찾아갈 거니까.”
“…….”
“몇 번이라도 말이야.”
너무 달아서 행복하고, 그래서 두 배로 끔찍했던 기억의 처음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이 생활의 처음이자 마지막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억을 더듬는 일은 쉽지 않았다.
뫼비우스의 띠 위에 선 것처럼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작점을 찾을 수도 없었다. 많은 일이 있었고, 중간 중간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텅텅 비어있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대로 미쳐버릴 것 같았다. 구멍이 숭숭 뚫린 기억의 필름 위를 헤매던 데미안은 좀처럼 눈을 뜨지 않았다.
***
데미안이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시간의 흐름은 이 공간에선 전혀 소용없었다. 이미 멈춰버린 공간은 시간조차 빗겨가곤 했다. 바람조차 들지 않는 곳에 죽은 듯 앉아있던 데미안이 아주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뻣뻣하게 굳어있는 몸은 좀처럼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에 그레이슨이 있으면 충분했다.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간신히 손을 들어 올렸다. 이젠 자라지 않는 손을 보면서 살며시 미간을 구겼다. 몇 번이나 반복된 일인지라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다시 그것을 눈으로 본다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잔뜩 표정을 구기고 있는 데미안의 몸이 뒤로 와락 끌어당겨 졌다. 힘차게 끌어안는 가벼운 감각에 고개를 젖히자 푸른 시선이 얼굴 위로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언제나 같은 얼굴이 데미안을 보면서 서글서글 웃었다.
“나 찾았어? 데미안?”
“그래. 아주 오랫동안.”
“얼마나?”
“기적과 악몽이 섞인 현실이 끝났다 다시 시작할 때까지.”
“그래서 악몽은 어땠어?”
“너무 달아서 괴로울 정도였어.”
데미안이 한 박자 쉬고 겨우겨우 말을 이었다. 단단하게 굳은 혀가 풀리기 까진 제법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 데미안의 입술을 손끝으로 살살 쓸어주던 딕이 귓가에 입술을 가볍게 가져다 댔다.
“나도 그랬어.”
안녕하세요. 환월입니다. 배포본이지만 후기를 쓰고 싶다는 욕심에 어떻게는 페이지를 구겨넣어 봤습니다.
원래는 조금 길게 나올 예정 이었는데, 이래저래 일이 있어서 최대한 내용을 쳐내봤습니다. 결과적으로 저 둘이 뭘하고 있냐 싶은 원고가 된 거 같은데, 둘은 시간의 굴레에서 돌고 있습니다. 원고 안에서 데미안은 죽은 상태, 딕은 데미안이 자신의 공간에서 만들어낸 환상입니다. 둘이 기거하는 공간은 뭐..죽음의 공간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나름 직접적인 떡밥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계속 춥다 차갑다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같은 말과 밥도 안 먹고 살죠..(... 이렇게 무식한 떡밥이 있나! 아이고 부끄러워라.
모티브가 된 빅스의 뮤비에서 시간술사라는 설정을 듣는 순간 둘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다만 그 시간을 돌리는 데미안의 시간도 같이 멈춰있다는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좀 더 길고 천천히 풀었으면 어땠을까 합니다만, 부디 이런 불친절한 책이라도 마음에 드셨으면 합니다.
감상 혹은 멱살잡이는 트위터로 부탁드립니다! 사실 전 놀아주시면 많이 좋아해요!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디 책이 마음에 드셨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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