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오늘따라 말이 없다. 흠. 흠. 몇 번 헛기침하고, 잘 닦아서 반질거리는 자신의 구두 코만 내도록 바라보았다. 그런 남자 앞에 서 있는 집사는 좀처럼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웨인 부부가 갑자기 떠난 후 이 넓은 집안을 한 톨 먼지 없이 관리하던 관리인에게도 이번 일은 꽤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도대체.”
“…….”
“…제가 물론 이제 슬슬 후사를 생각하셔야 한다고 말하긴 했습니다만.”
“알프레드. 그.”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주인님.”
“…….”
뭐라 한마디 거들어보려던 남자는 또 입을 꾹 다물어버린다. 물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긴 했다. 하지만 뭐라도 한마디 항변을 해야 할 것 같았다. 화려한 가십 기사가 휘몰아치는 한가운데 당당히 서 있던 남자는 어디 갔는지, 큰 덩치는 오늘따라 작아 보이기만 한다.
“미리 말을 해주셨어야죠.”
“…그걸 말면 내가 그랬을까.”
“…….”
“나도 몰랐어.”
“…….”
“…그.”
남자는 슬슬 답답해진다. 사실 뭐가 그렇게 잘못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미성년자도 아니고, 성인이었다. 서로 마음이 통하고 의사가 확실했는데 꼭 사고 친 십 대가 집으로 끌려들어 온 모양새였다. 지금까지 수많은 스캔들은 어떻게 봤는가. 브루스는 이 한마디가 하고 싶었지만, 굳이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긴 싫었다.
이렇게 혼나는 기분이 들었던 적이 있을까. 기억조차 가물가물했다. 알프레드는 늘 단호하게 브루스를 가르치긴 했지만, 이렇게 혼내는 투로 말하진 않았다. 게다가 지금은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서 어른이 되고도 한참 남은 시점인데. 브루스는 왜 절로 고개가 수그러드는지 아직도 알지 못했다. 마음으론 전혀 잘못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신발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어디 계십니까.”
“그러니까 내가. 응?”
“…설마.”
“내가 그렇게 예의 없는 사람은 아니야.”
“당연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하지만 미리 말해주셨다면 더 좋았을 텐데.”
“…내가 잘못했어. 잘못했네.”
브루스는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물론 알프레드가 한 말은 구구절절 맞았다. 선을 넘으면 그건 더는 둘 사이의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집안과 집안의 일이 되고 만다. 특히 손이 귀한 웨인가는 더했다. 알프레드는 브루스가 막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 늘 가족을 만들어야 한다고 한마디씩 첨언했다. 물론 작은 도련님이 너무 외로움을 타는 것도 있었지만, 둘이 지내기엔 이 저택은 너무 넓었다.
‘그랬는데.’
늙은 집사의 입가에 미미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렇게 이리저리 주선하고 자리를 만들었을 땐 그렇게 피해 다니기 일 수였던 도련님이었다. 몇 번이나 상대방을 바람맞히고 나자, 더는 자리를 주선하기도 힘들었다. 그리고 그 이후론 계속 배트맨으로 자경단 활동을 했다. 돌아온 박쥐가 카울을 벗으면 온몸에 화려한 상처가 가득했다. 다친 상처를 싸매던 집사는 입 밖으론 내지 않았지만, 반쯤 가문을 잇는 것을 포기하고 있었다. 브루스는 자경단 활동을 하면서 살기도 바쁜 양반이었다.
“저도 모르게, 언제부터 두 분이 그렇게.”
“…그게 말이네.”
브루스가 어쩐 일로 말을 아낀다. 알프레드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브루스는 집사를 이기지 못한다. 게다가 자리를 피할 수도 없었다. 꼭 부모 앞에서 첫 데이트를 들킨 아이마냥 구구절절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상대가 들으면 큰일 날 소리였지만, 어쩌겠는가. 몇 번이나 말했지만, 브루스는 알프레드 앞에만 서면 늘 작은 도련님으로 돌아가 버린다.
“제가 들으면 놀랄만한 사실인가요?”
“…그게. 음.”
“주인님이 이렇게 뜸을 들이시는 걸 보니, 이 집사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자네는 내가 반쯤 죽어서 케이브에 도착해도 놀라지 않고 응급처치를 했던 사람이네.”
“그건 이번 일이랑 다른 종류입니다.”
집사의 엄살에 브루스가 눈을 가늘게 흘긴다. 자꾸 저러면 안 그래도 어려운 말이 점점 꺼내기 힘들어진다. 물론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집사는 기분이 좋은 김에 자꾸 브루스를 놀리고 있었다. 그걸 말면서도 할 말이 없는 남자는 미간을 구긴 채 한숨만 푹푹 쉬었다.
“늘 말하지만 내 나이가 미성년자가 아니네.”
“물론입니다. 알고 있죠.”
“정말 못 이기겠군.”
“…주인님도 항상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렇게 이야기하면 할 말이 없어진다. 브루스는 마른 입맛만 다실 뿐이었다. 잘 닦인 거실엔 여전히 두 사람뿐이었다. 시계가 작은 소음을 만들면서 바늘을 바쁘게 움직였다. 넓은 창가엔 구름이 우글우글 모여있다가 한순간 불어온 바람에 그대로 날아갔다. 흐릿한 해가 비치는가 싶더니 또 그늘이 다가왔다. 고담은 늘 이런 곳이었다. 온 집안에 그늘이 빽빽하게 들어찼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 솔직히 그냥 입을 다물고 싶었지만, 마냥 숨길 수도 없는 일이었다.
“…마스터 브루스?”
“내가 직접 말하자니 너무 민망해.”
정말 민망했다. 하지만 한시라도 빨리 의논을 해야 했다. 클락은 어머니를 찾아가 보자고 말했지만, 브루스는 알프레드보다 클락의 어머니가 더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 한마디에 펄쩍 뛰면서 걱정 말라는 말과 함께 저택으로 돌아왔다. 물론 브루스는 늘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마디도 제대로 떼지 못할 만큼 당황하고 있었다.
“오늘따라 주인님 표정이 낯설군요.”
“다 자네 때문일세.”
“저 때문인가요?”
“…….”
괜히 한번 투정을 부리다가 또 고개를 푹 처박는다. 너무 민망하다. 정말 민망하다. 브루스의 머릿속엔 이 말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알프레드가 브루스 입에서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기까진 시간이 좀 더 걸렸다. 침착하게 브루스의 입술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늙은 집사는 늘 한결같은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