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갤리의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토마스는 무사히 쇼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물론 다 들고 오지도 못할 만큼의 물품이 따로 도착할 예정이었다. 한참 끌려다니기 시작하고 한 시간이 지나자마자 이미 모든 정신이 휘발된 녀석은 내내 정신이 없었다. 사실 제대로 된 지식이 없으니 다 좋아 보이고, 괜찮아 보일 뿐이었다. 물론 그런 토마스와 달리 여성 연구원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마치 자기 아이 용품을 고르는 것처럼 하나하나 따지기 시작하고 놔주지 않았다. 결국, 강제로 주입된 각종 정보를 복습하고 나서야 간신히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
뭐가 그렇게 좋은지 내내 방글거리며 웃는 민호는 한결 편안하게 안겨서 잠이 들어 깨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려나. 조심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왔다. 민호가 깰까 싶어 빨리 걸을 수 없었다. 발끝으로 살금살금 걷던 토마스가 품 안에 아이를 보고 다시 한 번 웃었다.
“뭔가 굉장히 바빴는데.”
“…….”
“많이 힘들었나.”
몇 번 민호 등을 토닥거리던 토마스가 소파에 앉았다. 아. 절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젠 시끄러운 인파 속에 있지 않았지만, 아직도 귓가엔 그때 들리던 소리가 그대로 들리는 것 같았다. 무슨 사람이 그렇게 많고 시끄러운지. 토마스는 온종일 다녀도 도통 적응이 되지 않았다. 이젠 그만 집에 가고 싶다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데, 그렇게 끝날 것 같지도 않았다. 푹신한 소파에 온몸을 묻고 있으니 저절로 눈이 감겼다.
“같이 잘 살아야 할 텐데.”
물론 모든 사람이 걱정하는 말이었지만, 토마스는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사실 모든 것이 평탄할 거라곤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일단 책임지기로 한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해주리라 마음먹었다. 가족이란 단어가 아직은 조금 어색했다.
아직 말도 트이지 않은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던 토마스는 아이를 안고 일어섰다. 아기 침대가 빨리 와야 할 텐데. 일단 아쉬운 대로 침대 위에 눕혀 놨다. 추울까 싶어 이불까지 덮어준 토마스는 할 일을 하려 했지만 계속 걱정이 되어서 도저히 침대 곁을 떠날 수 없었다.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책상에 앉았다. 십 초. 삼십 초. 일 분. 오 분도 채 넘기지 못하고 온갖 나쁜 상상이 머리를 잡아먹을 것 같았다. 애써 마음을 다스리는 것도 슬슬 한계인지, 토마스의 안색이 점점 나빠졌다. 다리를 덜덜 떨면서 끙끙거리던 녀석은 결국 참지 못하고, 패드를 들었다. 그리고 침대 방으로 넘어왔다.
“안 되겠어.”
아무 일 없이 눕혀둔 그대로 잠을 자는 민호를 보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 아이는 눈을 떼면 안 되는 거야. 무슨 일이 날지 모르거든. 그 말이 왜 그렇게 기억에 남았는지 알 수 없었다. 옆에서 맞장구를 치며 웃던 사람 때문일까. 조금이라도 눈에 보이지 않으면 다칠 것 같은 불안함에 토마스는 침대를 떠날 수 없었다.
“여기서 해야겠네.”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런 자세로 할 만한 것도 아니었다. 영 자세가 못마땅한지 이리저리 뒤척거리던 토마스는 결국 베개는 등 뒤에 끼워 넣고 나서야 좀 편해진 눈치였다. 아이고. 짧게 한숨을 쉬고 패드를 켠 채 한참 동안 뭔가를 뒤적거렸다.
“…….”
하지만 정신은 온통 시계에 가 있었다. 분명 배달이 올 시간이 된 거 같은데, 아닌가. 맞나. 눈만 패드에 가 있을 뿐 계속 바깥에서 나는 소리에 신경을 쓰던 토마스는 밖에 초인종이 울림과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무릎에 얹혀있던 패드가 침대 위에 퍽 엎어졌다.
“흐앙.”
“아…미안.”
작은 반동에 반쯤 잠이 깬 민호가 칭얼거렸다. 토마스가 잔뜩 눈썹을 늘어뜨리며 민호의 등을 토닥였다. 간신히 울음이 잦아드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급하게 거실을 가로질렀다. 다시 한 번 초인종이 울리자 저 소리에 민호가 깰까 싶어 반쯤 나는 것처럼 달려가 문을 열었다.
“아, 들어오세요.”
커다란 상자가 문 앞에 가득 쌓여있었다. 꽤 무거운 소리가 집 안에 쿵쿵 울렸다. 엄청난 물건과 상자를 가지런히 쌓아준 직원은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토마스는 잠깐 고민하며 상자 더미를 바라보았다. 아, 이걸 다 어떻게 하지. 혼자 끙끙 앓으며 고민을 해봤지만, 아무리 봐도 오늘 민호가 잘 침대 하나 만들 수 없을 것 같았다.
“…어쩌지.”
머리를 긁으며 고민하던 토마스는 결국 다시 한 번 프라이네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 쭈뼛거리며 말을 더듬거리는 토마스를 보던 프라이는 사람 좋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부탁이 익숙하지 않은 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갈라지는 입술 끝으로 도움을 청했다. 물론 바쁘다고 할 수 있지만, 품 안에 안고 있는 아기한테 자꾸 눈이 갔다. 안 그래도 추운데 왜 자꾸 저렇게 데리고 다니는지. 프라이는 괜히 걱정을 사서 하는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혼자 사는 거 같더라. 아이가 어리더라. 온갖 걱정이 머릿속에 가득 차기 시작하자 프라이는 급히 입을 열었다.
“조립? 그러지 뭐.”
“아, 감사합니다.”
“이웃 좋다는 게 이럴 때 하는 말이지. 잠시만.”
토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프라이는 바삐 집 안으로 들어가더니 약간 남은 샌드위치를 꺼내왔다. 그걸 토마스 품에 안겨준 다음 빨리빨리 재촉하며 집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프라이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엄청난 양의 박스에 약간 질린 표정이었다. 가장 커다란 상자는 분명 아기용 침대일 것이 분명하고, 그 옆에 쌓인 것들은 지금부터 내내 쓸 생필품이었다. 한발 늦게 문을 닫고 들어온 토마스는 괜히 민망한 표정으로 헛기침했다.
“빨리빨리 해야 오늘 잘 수 있지 않을까?”
“네? 네.”
토마스가 그 한마디에 퍼뜩 정신이 든 것처럼 민호를 침대에 내려놓았다. 분명 무거울 테니 침대 방으로 상자를 끌고 와 조립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칭얼거리며 안아달라고 하지 않아서 다행이네. 프라이의 말에 잠깐 웃던 토마스는 조립할 물건을 열심히 꺼냈다.
혼자서는 엄두도 나지 않았는데 둘이 손을 대기 시작하니 그래도 진전이 있었다. 프라이도 없었으면 어떻게 했을지 알 수 없었다. 침대 프레임을 조립해서 세우고 위에 푹신한 매트리스를 얹었다. 손으로 꾹꾹 눌러보던 프라이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허리를 폈다. 뒤따라 침대를 쓰다듬는 토마스의 얼굴에도 한껏 만족스러움이 묻어났다.
“이 정도면 될 거 같은데.”
“감사합니다.”
“오늘 이거 조립 못 했으면 어쩌려고 했는지, 원.”
“침대에서 같이 잤겠…죠?”
“오늘 완성해서 다행이네.”
“…….”
프라이는 뻐근한 어깨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제법 힘이 들어가는 조립이었는지 온몸 근육이 고통을 호소했다. 토마스는 완성된 아기 침대를 질질 끌어 자기 침대 옆에 붙여놓았다. 그러더니 뿌듯한 표정으로 매트리스를 몇 번 눌렀다. 그리고 한쪽에 쌓아둔 작은 아이용 이불과 베개를 조심스럽게 침대 안으로 옮겼다.
“…….”
“아, 혹시 먹을 건 좀 있어?”
“네?”
어느새 말이 편해진 프라이가 친근하게 물었다. 토마스는 놀란 눈을 깜박거리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럼 뭐라도 좀 만들어 두고 갈까? 아이…아니지 민호는 초기 이유식해야 하는 정도인 것 같은데.”
“아마…맞을 것 같아요. 이것저것 사러 가면서 들었으니까.”
“그럼 됐네. 아이 침대에 눕혀보고 맘에 드는지 좀 살펴보고 있어. 난 잠시 부엌 실례 좀 해도 될까.”
“네…물론이죠.”
프라이는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거한 요리를 만들어놓고 갈 생각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하루 정도는 먹을 만한 음식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저번과 마찬가지로 냉장고는 여전히 음식재료만 가득했다. 그나마 재료라도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이것저것 재료를 꺼내보던 프라이는 잔뜩 피어나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저번보다 꽤 많네.”
일단 아이용으로 만들 이유식 재료를 꺼냈다. 라이스 시리얼 종류가 있으면 편할 텐데, 보이지 않았다. 일단 아쉬운 대로 감자와 당근을 꺼냈다. 이쪽은 푹 삶아서 곱게 으깨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 그리 어려울 것이 없었다. 냄비에 물을 담아 불에 올려놓은 프라이는 물이 끓기를 기다리면서 토마스가 먹을 만한 음식을 고민했다.
“흠. 뭐가 좋으려나.”
가볍게 파스타나 샌드위치 종류를 만들까 싶었다. 냄비 안에 담긴 물이 조금씩 부글부글 거품을 만들기 시작하는 것을 바라보다 침대 방을 향해 조용히 토마스를 불렀다.
“토마스!”
“네?”
“파스타가 좋아, 아니면 샌드위치가 좋아?”
“어, 전 샌드위치요!”
“알았어.”
딱히 고민하지 않고 메뉴를 선택하자 프라이는 다시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 프라이가 부산하게 움직이는 소리를 한 귀로 듣던 토마스는 다행히 아직 깨지 않은 민호를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마음에 들까.”
침대에 눕히고 아기용 이불을 덮어주자 몇 번 뒤척거리던 아이는 순하게 잠이 들었다. 다행이다. 그래도 민호가 잘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는 안도감에 절로 다리가 풀렸다. 침대에 그대로 주저앉은 토마스는 멍한 표정으로 내내 아이를 바라보았다.
“다했어?”
“…네.”
“잘됐네. 다했어. 밥 먹고 또 하지?”
“…….”
어느새 친근하게 말을 거는 프라이가 침실을 들여다보았다. 새근새근 아기 숨소리가 들리는 방은 나름 평화로웠다. 물론 바닥에 잔뜩 널브러져 있는 박스와 스티로폼의 흔적을 제외하면 말이다.
“일단 먹고 천천히 치우도록 해. 오늘 저거 다 치우려면 밤에 잠도 못 잘 것 같으니까.”
“…….”
“이리와. 뭐해?”
프라이가 사람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토마스는 생각보다 얌전히 프라이의 말을 따르고 있었다. 식탁에 대충 걸터 앉아있다가 뭔가 생각난 듯 냉장고로 걸어갔다. 몇 번 뒤적거리더니 뚜껑을 따지 않은 주스를 두 병 들고 왔다. 어색하게 프라이에게 주스를 건넨 토마스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식탁에 놓여있는 접시를 바라보았다.
“뭐해. 먹어.”
“…….”
“아이가 잘 때 먹어야지. 일어나면 또 바빠진다니까.”
“그렇구나.”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던 토마스는 맞는 말이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주 잠깐 흐르던 평화의 기운도 잠시 침실에서 들리는 울음소리에 벌떡 일어난 토마스는 쌩하고 달려갔다. 좀처럼 잠이 들지 않는지, 결국 칭얼거리는 아이를 품에 안고 나타난 토마스를 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저렇게 손 타기 시작하면 힘들 텐데. 토마스는 민호를 어르며 급하게 밥을 씹어 넘겼다. 예상보다 늦게 집으로 돌아간 프라이는 몇 번이나 아쉬운 듯 토마스의 집을 바라보다 걸음을 옮겼다.
***
“…뭐?”
“뭐긴 뭐야. 어제 그 집에 갔었다니까?”
“그냥 호구를 잡혔네.”
“갤리.”
“호구 맞다니까. 정신 차려. 언제까지 그렇게 인심 좋게 퍼주고만 살래. 내 친구지만…참.”
“…….”
안 그래도 궁금해하는 눈치라 한마디 건네 본 것인데 확실히 괜한 말을 했나 싶었다. 하여튼 좋은 소리를 못하게 하네. 프라이는 얌전히 밥이나 먹으라며 종이 박스를 갤리 코앞에 들이밀었다. 종이 박스 안에 들어있는 파스타를 포크로 쿡쿡 찍던 갤리는 그런 프라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완전히 쓰레기는 아닌가 보네.”
“…응? 무슨 소리야?”
“애 엄마가 없는 걸 보니 분명 사고를 친 거잖아. 그래도 자기 새끼라고 거두고 있는 걸 보면 나쁜 놈은 아닌 거 같네.”
“…….”
“물론 육아 상식이 전혀 없는 거 같긴 하지만.”
“남의 일에 신경 쓰는 건 오히려 네가 더 심하다.”
“내가 뭘.”
툴툴거리며 파스타를 퍼먹기 시작하는 갤리를 바라보던 프라이는 괜히 입맛을 다셨다. 안 그래도 둘이 잘살고 있을지 궁금해지던 참이었는데, 저런 소리를 듣고 나니 좀 더 마음이 쓰였다.
그리곤 싫다고 하면 당장에라도 얼굴을 갈길 기세로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그런 토마스를 보고 있자니 절로 코웃음이 났다. 어린애도 아니고 도대체 무슨 생활을 했기에 저렇게 어린아이들이 보는 동화 같은 이야기만 줄줄 늘어놓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것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사내새끼가 말이다.
“하아.”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저런 소리를 한두 번 듣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져 왔다. 하지만 토마스는 내내 진지했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촘촘하고 길게 난 속눈썹에 길게 맑은 시선이 걸리곤 했다. 그 눈이 너무 곧아서 바라보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애써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버리자 빳빳하게 다려진 소매를 잔뜩 구기며 양팔을 꽉 잡고 있던 손이 아쉽게 떨어졌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하여튼 약속한 거야.”
“내가 왜.”
“약속한 거라고.”
“아, 이 미친 새끼가.”
짧게 타박을 하려는 순간 토마스는 한걸음 훌쩍 물러섰다. 아무리 키가 훌쩍 컸다 해도 눈앞에 보이는 녀석보단 작았다. 후끈한 여름 바람이 셔츠를 흔들었다. 도대체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듣고 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토마스가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역시 사람이 책만 읽으면 미치는 게 틀림없어. 잔뜩 빨갛게 변한 얼굴을 애써 가리며 뛰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녀석은 내내 제자리에 서 있었다. 사이가 안 좋아서 죽으라 싸우던 것을 잊기라도 했는지, 토마스는 내내 갤리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맴돌고 있다고 하기보단 갤리의 약점을 찾으려 하고 있었다.
“바보 같은 놈.”
물론 갤리도 만만한 성격은 아니었다. 토마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녀석이 싸우기 시작하면 둘 중 한 명은 피를 보고 나서야 끝이 났다. 민호나 뉴트가 내내 쫓아다니며 둘이 같이 있지 못하게 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굳이 싸우고 싶지 않으면 서로 모른 척하고 소 보듯 닭 보듯 하면서 생활하면 될 텐데 꼭 가서 옆구리를 쿡쿡 찌르곤 했다. 갤리도 끓는점이 낮아서, 그런 것을 쉽게 넘기지 못했다. 서로 주먹질을 하다 양호실에 끌려가는 것이 지겹지도 않으냐며 뉴트가 혀를 쯧쯧 찼다.
‘하여튼 너희 둘은 사이가 좋을 건지, 원수가 될 건지 하나만 정해서 행동해라.’
‘뭔 헛소리야.’
‘보는 사람이 답답하고 귀찮아서 그런다’
‘웃기는 소리 하네.’
‘너야말로.’
짜증이 빡 들어간 눈썹이 구겨지며 뉴트가 으르렁거렸다. 안 그래도 토마스 하나 간수하기도 힘든데, 너까지 왜 이러냐며 타박이었다. 하긴 토마스가 사고를 치는 것만큼 둘이 부딪히는 시간도 많았다. 갤리는 언제나 같이 뉴트의 말을 자연스레 흘려 넘겼다. 뉴트 넌 언제나 잔소리가 심해. 그런 말을 하며 하품을 하는 녀석을 보던 까만 눈이 샐쭉하게 길어졌다. 그런 눈빛이 너무 따가워서 갤리는 모른 척 자리를 떴다.
‘하여튼 사람 말이 말 같지 않지.’
뉴트는 그런 커다란 덩치를 다시 한 번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 이후 토마스는 갤리에게 시비를 걸지 않았다.
비가 오면 만나. 그 약속이 무엇을 뜻하는 진 알 수 없었다. 다만 갤리가 한마디만 하면 따박 따박 맞받아치던 것조차 줄어들자 친구들은 한시름 놓고 좀 더 학교생활을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둘이 잠시 싸우거나 주먹다짐을 하지 않을 뿐인데 이렇게 평화로울 수 없었다.
물론 일주일이 넘어가자 조금 불안해졌다. 하지만 뭐라고 말을 할 수 없으니 둘이 없을 때 자기들끼리 수군거릴 뿐이었다.
**
막 여름이 시작되려는 그 날은 유난히 하늘이 파랗고 맑았다.
울창하게 짙어진 나뭇잎은 커다란 그늘을 만들었다. 하루하루 착실하게 날짜가 지나가고 있었다. 날짜가 지나가는 만큼 여름은 바짝 말라갔다. 비가 올 것 같지도 않은 날씨가 이어지자 학생들은 하나둘 책상 위에 쓰러졌다.
“덥다.”
누군가 한마디 하자마자 여기저기서 동의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소나기라도 한 번 왔으면 싶은데, 쨍하니 맑은 하늘은 하얀 구름만 가득했다. 운동장에 내리쬐는 햇볕은 금방이라도 화상을 입을 것처럼 뜨겁기만 했다.
“…왜 비가 안 오냐.”
“모르지.”
“덥다. 진짜.”
“누구 때문일지도 모르지.”
그 소리가 들리자마자 애들의 입에서 웃음이 툭툭 튀어나왔다. 토마스는 여전히 미동도 없이 과학 논문을 읽고 있었고, 갤리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들으라고 하는 행동에 점점 표정이 구겨져 가던 갤리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너 때문이다.”
“내가 뭘. 그렇지 뉴트?”
“이번엔 네가 맞을 차롄가 보다.”
뉴트가 손으로 부채질하며 웃었다. 교실은 금방 시끄러워졌다. 시원한 거라도 마시러 가자는 목소리가 커질 무렵 토마스는 읽고 있던 논문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토마스도 챙기자며 다들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빈자리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
그렇게 기다리는 비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더욱 바짝 말라가는 공기에 숨쉬기도 힘들다는 듯 손사래를 치는 녀석들이 늘어났다. 덥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사는 친구들은 슬슬 토마스를 원망했다.
“네가 그런 소리 해서 비가 안 오는 거 아냐?”
“그게 무슨 소리야.”
“갤리한테 비 오면 만나자 운운해서 하늘이 노한 모양이지.”
“…….”
“역시 그 문젠 거 같아. 너희 둘이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니까 다들 놀란 거야.”
“그런 거 아니야.”
“맞는지 아닌지는 시간이 알려주겠지.”
토마스의 목을 와락 붙잡고 여기저기 공격을 하던 녀석들은 살이 닿으니 덥다면서 다시 밀어냈다. 잔뜩 헝클어져서 까치집이 된 머리를 손으로 쓱쓱 쓸어 넘기던 녀석은 잔뜩 볼멘소리로 항의했지만, 제대로 먹히진 않았다. 제멋대로 떠들기 시작하는 녀석들을 슬슬 피했다.
뉴트와 민호는 그런 토마스의 행동을 모두 보고 있었지만, 아는 척하지 않았다. 조용히 사라진 토마스의 뒤통수에 끝까지 달라붙던 목소리가 교실 문에 막혀 툭툭 떨어졌다.
토마스는 학교가 끝나고 내내 과학실에 있었다.
작은 창문 하나 없는 곳에서 연신 실험기구를 만지며 이것저것 체크를 했다. 여러 가지 색깔 물에서 거품이 끓어올랐다 배배 꼬인 유리관을 따라 움직이는 현상을 관찰하던 토마스는 시간이 얼마나 흐르고 있는지에 대해선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툭.
투툭.
오랫동안 기다리던 소리가 들렸다. 하긴 아까부터 하늘이 심상치 않던 것 같더니, 굵은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바짝 마른 운동장 위로 떨어지는 빗줄기가 점점 굵어졌다. 보도블록 위에 동그랗게 짙은 점을 만들며 내리던 비는 온 세상을 적시기 시작했다.
하지만 창문도 없는 깊은 방에 있는 토마스는 그런 상황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오히려 눈앞에서 움직이는 물의 흐름에 더 관심이 있었다. 잔뜩 찌푸린 채 안경을 고쳐 쓰던 녀석은 목이 아픈지 한숨을 쉬며 의자에 편히 기댔다. 안경을 벗고 콧잔등을 주물렀다. 아야야. 그제야 뻣뻣하게 긴장했던 목과 어깨에서 짜르르 아픔이 느껴졌다. 이리저리 목을 돌리고 어깨를 움직이던 녀석이 두 손을 깍지 낀 채 위로 쭉 폈다.
그리곤 의자에 걸터앉은 채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당연히 아무도 없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토마스는 자기가 무엇인가 놓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과학실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자신이 통제하고 있었다.
“…뭐지.”
자꾸 찝찝해지는 마음이 자꾸 불안해졌다. 엄지를 마주 비비며 다리만 덜덜 떨었다. 일분. 이분. 시곗바늘은 자꾸 움직이기만 하는데, 토마스는 이 불안한 기분의 근원을 찾지 못했다. 그때 귓가에 환청처럼 가는 빗줄기 소리가 들렸다.
“…….”
토마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그 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아. 토마스는 멍하니 눈을 크게 떴다. 그러더니 와장창 소리를 내며 과학실을 뛰쳐나갔다.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뛰었다. 학교를 빠져나오니 하얗게 물안개가 피어오를 정도로 시원한 비가 내리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비 오네.”
비가 오네. 토마스는 순간 머리에 번개가 스친 것 같았다. 우산도 없이 그대로 빗속을 뛰어갔다. 하얗게 부서지는 비는 그칠 생각을 하지 않고 더 거세게 내리기만 했다.
**
“…….”
우산을 든 채 서 있던 갤리는 시계를 한 번 더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무 밑으로 한 걸음 더 발을 옮겼다. 우산을 두드리는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는데, 토마스 이 새끼는 나타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 o가 속았네. 잔뜩 짜증이 난 갤리는 괜히 나무를 퍽 걷어찼다.
“나도 미쳤지. 그런 걸 믿고 오기나 하고.”
툴툴거리던 녀석은 이미 커다란 웅덩이가 생긴 길을 빤히 바라보았다. 먼저 와서 기다린다고 한 주제에 아직도 나타나지 않는 녀석은 역시 구제불능이라 생각했다. 뭐랄까. 비가 오면 신나는 강아지 같은 녀석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으니 짜증이 밀려왔다.
“젠장.”
휙 돌아서는 갤리의 눈에 쫄딱 젖은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카락을 완전히 젖어 얼굴에 찰싹 달라붙어 있고, 셔츠와 바지는 물에 빠진 것처럼 축축했다. 저 미친 녀석이. 갤리는 바지와 운동화가 젖는 것도 있고 첨벙거리며 뛰어갔다.
“야, 너 뭐하는 거야.”
“…….”
“다 젖어서. 늦어서 미안하라고 이러고 달려왔냐?”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따져 물었다. 토마스는 눈 바로 위까지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치우지도 않은 채 갤리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하얗게 피어나는 물안개가 뭉클 살아 올라왔다.
“비가 오는 줄 몰랐어.”
“그럼 약속은 왜 했냐?”
“…….”
“됐다. 집에나 가. 인마.”
갤리가 우산을 슬쩍 기울여줬다. 하지만 토마스는 이미 다 젖었다며 한 걸음 물러섰다. 저 새끼는 꼭 해줘도 난리지. 갤리는 잠깐 불쌍한 마음을 가졌던 것을 후회했다.
“좀 얌전히 있어라.”
“아니…난.”
“야! 토마스!”
둘이 엎치락뒤치락하다 결국 우산을 놓치고 말았다. 흙탕물에 거꾸로 나동그라진 우산엔 금방 빗물이 괴었다.
“아…씨.”
“그러기에 내가…….”
“넌 정말 짜증 나는 녀석이야.”
“…….”
갤리는 말없이 우산을 주워서 빗물을 털어냈다. 그리고 우산을 퍽퍽 접은 채 토마스의 손목을 잡았다. 깜짝 놀란 샴페인 색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갤리는 몇 년 동안 스승 가게에서 조수 노릇을 하며 하나하나 단계를 밟아 올라가다 겨우 자기 이름으로 된 인테리어 가게를 차렸다. 그런 갤 리가 토마스와 만난 것은 한참 조수 일을 할 무렵이었다. 언제나 비슷한 옷을 입고 같은 시간에 가게 앞을 지나갔을 뿐인 데다, 딱히 눈에 띄는 생김새도 아니었기에 그저 지나가는 행인처럼 시선이 머물지 않았다.
“…음?”
그런 갤리의 눈에 일주일 만에 보인 녀석은 굉장히 수상한 차림이었다. 보통 때라면 십 분 전에 지나갔어야 하는데, 오늘은 걸음조차 조심스럽게 걷고 있었다. 갤리는 그런 모습에 조금 호기심이 돋았다. 저 잠시 딴짓을 하며 시간을 보내려는 것일 뿐이라며 자기 위안을 했다. 이것저것 들고 있던 짐을 책상에 올려놓았다. 청소 한지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먼지가 폴폴 날리는 도면들이 책상에 와르르 쏟아졌다.
“…….”
갤리는 팔짱을 낀 채 하늘을 쳐다보는 기분으로 토마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앞만 보고 척척 걸어가던 녀석은 오늘따라 커다란 짐을 들고 잔뜩 당황한 표정이었다. 가방도 아닌 천 뭉치를 품에 안은 녀석의 얼굴을 발갛게 얼어있었다.
돈이라도 훔쳤나 싶었다. 그런데 그 순간 천 뭉치 안에서 조그만 손이 쑥 올라왔다. 갤리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토마스는 잔뜩 놀라서 갤리 가게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아이는 토마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버둥거렸다. 찬바람에 금방 빨갛게 얼어가는 손을 어떻게든 이불 안으로 집어넣으려 했다. 하지만 아기는 도와주지 않았다.
“아…미안.”
토마스가 억지로 이불을 닫으려 하자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금방 울음을 터뜨렸다. 갤리는 문틈으로 흘러들어오면 아기 울음소리에 눈을 찌푸렸다. 도대체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저 멀대같은 녀석이 하는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이는 점점 크게 울기 시작하고 토마스는 당황해서 계속 헛손질을 했다. 갤리는 저러다 애를 떨어뜨릴 것 같은 불안감에 뚜벅뚜벅 문 앞으로 걸어갔다.
“저기요.”
“…….”
딸랑. 종소리가 울리면서 문이 활짝 열렸다. 하지만 토마스는 그런 소리도 듣지 못한 채 어설프게 아기를 달래고 있었다. 조금 더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갤리가 다시 한 번 토마스를 불렀다.
“저기요.”
“…네?”
토마스가 잔뜩 당황해서 반쯤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갤리를 쳐다보았다. 그런 얼굴을 보니 어쩐지 한숨부터 나왔다.
“밖에서 그러면 애가 추워서 더 울잖아요.”
“……”
“들어와서 정리하고 가요. 아직 손님 없어서 비어있으니까.”
“하지만…….”
우물쭈물 눈만 깜박이는 모습에 갤리는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때마침 다시 울음소리가 커지는 아기 때문에 토마스는 허둥지둥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바깥하곤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후끈한 공기가 온몸을 감쌌다. 토마스는 꽁꽁 언 손이 녹는 것이 느껴졌다.
“…….”
“저기 책상에 내려놓고 다시 정리해요.”
“…감사합니다.”
“아니 도대체 이 추운 날에 그렇게 대충 애를 데리고 나오면 어떡합니까. 어른들도 다니기 힘든 날씨에.”
갤리가 타박하자 토마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게…집에 아무것도 없어서…….”
또 우물우물 말을 삼켰다. 허둥지둥 이불에 싸여있는 아기를 들어 올렸다. 따뜻한 곳에서 몇 번 얼러주자 곧 울음을 그친 아이가 생글생글 웃었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쉰 토마스가 아이를 꽉 껴안았다. 갤리는 그런 아기 얼굴을 바라보다 아빠 되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하나도 안 닮았네.’
정말 닮은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동양인 아기를 안고 있는 남자는 영 어설퍼 보였다. 그런 꼴을 보고 있으니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갤리가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들고 다가올 때까지 토마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어차피 늦은 거 커피 한 잔 마시고 몸 녹이다 가요.”
“…….”
“댁이 잘나서 그러는 게 아니고, 이 상태로 나가봤자 아이가 또 울 거 같아서 그러는 거니까 이상한 생각 말고.”
“…….”
머그잔을 토마스 옆으로 슥 밀어준 갤리는 괜히 딴짓을 했다. 겨우 아이를 안은 채 의자에 엉덩이를 붙인 토마스가 커피를 입에 댔다. 그리곤 한 모금 넘기기가 무섭게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알기 쉬운 행동에 갤 리가 한발 먼저 입을 열었다.
“가려고?”
“네. 사실 지금도 많이 늦었는데…….”
“택시라도 부르지 그래요?”
“아, 그러면 되는구나.”
갤리는 답지 않게 계속 신경 쓰고 있었다. 아. 토마스의 얼굴에 화색이 도는 걸 보니 당황해서 그런 선택지는 생각도 못 한 것이 틀림없었다. 결국, 가게 전화까지 빌려서 택시를 부른 토마스는 내내 아이를 어르려 했지만, 어색하지 짝이 없었다.
“이렇게 된 것도 인연인데 통성명이나 하죠.”
“…….”
“어차피 이웃 사촌 아닌가?”
“토마스. 토마스라고 합니다.”
“난 갤리라고 부르면 돼요.”
어색하게 악수를 했다. 그 와중에도 아이는 자꾸 칭얼거렸다. 아무래도 토마스가 안아주는 것이 편하지 않은 것 같았다. 갤리는 자꾸 참견하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렀다.
“얜 민호라고 해요.”
묻지도 않은 말을 넙죽넙죽 했다. 토실토실한 아기 볼을 살살 만지던 녀석이 또 바보같이 웃었다. 민호. 역시 아빠와 아들이라고 하기엔 너무 닮은 점이 없었다. 좀 더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때마침 가게 앞에 택시 한 대가 섰다.
“아, 왔다.”
“들어가요.”
“감사…했습니다.”
“다음부터는 조심해서 다녀요.”
토마스가 고개를 끄덕끄덕하다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리곤 곧장 문은 열고 나가 잔걸음으로 택시 앞으로 걸어갔다. 문이 열리고, 다시 닫혔다. 택시는 한 줌 미련도 남기지 않고 자리를 떴고, 갤리는 텅 빈 거리를 내내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뭐하는 녀석이지.’
왜 이렇게 호기심이 돋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궁금함이 커져도 이 이상 물어볼 사람이 남아있지 않았다. 괜히 뒤통수를 긁으며 입맛을 다시던 갤리는 싸늘하게 식어있는 커피 잔을 들어 올렸다. 아주 조금밖에 줄지 않은 커피를 싱크대에 쏟아버리며 애써 딴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것은 또 아니었다. 컵이 부서지라 선반에 내려놓았다.
“아…괜한 짓을 했다.”
약간 늦어진 청소를 마무리하는 갤리는 연신 툴툴거렸다. 한번 신경 쓰이기 시작하자 자꾸 호기심이 생각의 끝을 물고 구불구불 살아 올라오는 것 같았다. 당장 눈앞에 토마스가 있다면 어서 말해보라고 탈탈 털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일이라도 시작하지 않으면 오늘 하루 저 생각을 하며 보낼 것 같았다. 그러나 갤리의 복잡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필 오늘따라 일은 그다지 않지 않았고, 남아 있는 것도 모두 가게 안에서 처리할 수 있는 종류뿐이었다. 갤리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이마를 책상에 쿵쿵 박았다. 이마는 얼얼하게 아파졌지만, 한번 생긴 호기심이 사라지지도 않았다.
어쩐지 오늘 하루는 굉장히 길 것 같았다.
***
토마스는 생각보다 훨씬 늦게 연구소에 도착했다.
아침부터 다급한 전화를 받았던 선임 연구원은 믿어지지 않는 표정으로 로비에 서 있었다. 택시에서 엉거주춤 내리는 녀석을 보고 나서야 급히 마중 나왔다. 금방 볼이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발갛게 물들었다. 이렇게까지 추우리라 생각을 하지 못해서일까. 토마스의 입술 사이로 하얗게 얼어버린 긴 한숨이 흘러나와 공기 중에 섞여들었다.
“토마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
“일주일 동안 연락도 없이 출근도 하지 않고, 그리고…….”
“미안해요. 카릴.”
“미안한 것보다…그러니까.”
카릴은 토마스 품에 안겨있는 작은 아기를 발견했다. 당황스러운 표정이 한층 더 깊어졌다. 때마침 칭얼거리기 시작한 아이를 어르던 토마스가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들어가서 설명할게요.”
“…….”
따뜻한 실내에 들어와서 아이를 소파 위에 내려놓았다. 연구소에 퍼지는 낯설 울음소리에 사람들이 힐끗거리며 셋을 쳐다보았다. 토마스는 아이를 몇 번 어르다 한숨을 쉬었다. 카릴은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토마스.”
“…….”
“그렇게 안으면 안 되지.”
결국, 답답함을 참지 못한 카릴이 아이를 받아 안았다. 익숙한 포즈로 아이를 안고 달래자 금방 울음이 잦아들었다. 그래. 그래. 통통한 아이의 볼을 몇 번 쓸어주고 조심스럽게 소파 위에 내려놓았다. 이젠 혼자서 손을 꼬물거리며 놀기 시작하는 아이를 보고서야 토마스는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토마스?”
“네? 네.”
“이제 말해봐.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갑자기 휴가를 달라고 떼를 쓰질 않나. 그리고 아이를 안고 나타나질 않나.”
“…….”
“우리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전화는 왜 안 받았어?”
“자꾸 깨서 울기에 전화선을…….”
“너 정말.”
카릴이 토마스의 두 볼을 잡고 고개를 돌리지 못하게 막았다. 으. 카릴. 잠시만요. 토마스가 버둥거렸지만, 벗어날 수 없었다. 오히려 점점 더 엄해지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식은땀이 흘렀다.
“정확히 말해봐. 토마스.”
“그러니까.”
“대충 넘어갈 생각 하지 마. 너 혼자 아무것도 모르는데 아이까지 일주일이나 같이 있었다니 큰일 났으면 어쩔 뻔했어.”
“그건…옆집에서.”
어물어물 입을 결기 시작한 토마스는 계속 눈을 굴리며 빠져나갈 구멍을 찾았지만, 이번만큼은 무리인 것 같았다. 반쯤 포기한 채 민호를 만난 이야기를 시작했다.
“풀숲에 있었어요.”
“아기가? 그 추운 날에?”
“네. 그래서 차마 내버려둘 수 없어서 데려오긴 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일단 재우고……”
“그럼 연락을 해야지.”
“조금만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도 울었단 말이에요.”
“…….”
“며칠만 있으면 집이 적응되지 않을까 해서…….”
“넌 정말 어릴 적부터 대책이 없었어. 그러나 큰일 나면 어쩌려고 그랬어. 아이가 얼마나 약한데.”
“하지만…….”
“하지만이 아니야. 다행히 아무 일이 없는 것 같긴 하지만, 아무런 지식 없이 아이를 데리고 들어오면…….”
“하지만 당장 이쪽으로 전화했으면, 바로 병원으로 데려간 다음 다시는 만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잖아요.”
“…….”
“제가 발견했어요.”
“뭐?”
“민호가…제가 발견해주기를 바라고 그렇게 울었다고요. 이젠 우리는 가족이에요.”
“토마스.”
“내가 키울 수 있어요. 민호는 누구도 나한테서 못 뺏어가요. 절대. 부모가 없는 아이가 얼마나 슬픈지는 연구소에서 내가 제일 잘 알아요.”
“…….”
“아는 것이 없다면 지금부터 배워서라도 키울 거예요.”
“토마스.”
“할 수 있어요. 아니 할 거니까…….”
토마스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그러나 민호가 또다시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허겁지겁 아이를 안은 채 살짝 웃던 녀석은 여전히 고집을 꺾을 생각이 없었다.
“내가 키울 거예요. 민호의 아빠는 나니까.”
물론 연구소가 발칵 뒤집혔다.
스무 살도 되지 않은 녀석이 갑자기 아빠가 되겠다니. 그것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이를 데리고 말이다. 토마스의 의중은 아무도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어른들은 토마스의 고집을 꺾을 수도 없었다. 몇 번이나 설득하려 했지만, 들으려 하지 않았다.
물론 작은 아이가 굉장히 귀엽다는 사실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아이를 키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첫째로 토마스는 누구를 보살피는 것보다 보살핌을 받는 쪽이 익숙했고, 둘째론 아이를 키우면서 생길 수 있는 일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이 것 만으로도 굉장히 힘든 일이 될 것이 확실한데, 여기서 더해 어려도 너무 어렸다.
“아무도 못 데려가요,”
물론 토마스가 왜 이렇게 가족과 정에 대해 집착하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래서 빼앗아 올 수 없었다. 불편하게 안아주는 녀석이 뭐가 그렇게 좋은지 방싯방싯 웃고 있는 아기는 토마스 품에 꼭 안겨 있었다.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결국 총장이 한걸음 물러섰다.
“그래. 네 고집을 아니 함부로 데려올 수도 없구나.”
“그럼…….
“대신. 연구소로 들어오던지, 아니면 아이와 네 생활을 돌봐줄 사람을 고용하던지 둘 중 선택을 해라.”
“…….”
“아이를 제대로 키우고 싶으면 내 말대로 하도록 해. 더는 물러서지 못할 것 같구나.”
“알았어요.”
겨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긴 토마스가 연구소에 들어오면 밤이 늦어서야 퇴근을 하는데 그동안 텅 빈 집에 아기 혼자 둘 수 없는 노릇이었다. 주위엔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고 면역력이 약한 아이를 환기도 되지 않는 곳에 데리고 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찬찬히 머리를 식힌 녀석은 생각보다 빨리 수긍했다.
“일주일 동안 아이한테 뭘 먹인 거야. 네 집에 아이가 먹을 만한 것이 없었을 텐데.”
“옆집에서 많이 도와줬어요.”
“여러 군데 폐를 끼치는구나. 정말 못 말리는 녀석이야.”
“…….”
모른 척 시선을 돌리는 녀석을 바라보던 총장이 일어섰다. 지금까지 토마스에 대한 모든 보증은 총장이 담당했었다. 그만큼 연구소에서 중요한 인물이었고, 그럴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자잘한 사고를 치면 쳤지, 이런 핵폭탄 같은 일을 저지를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결국 이번 일도 마찬가지였다. 위키드 총장이 승인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뭐 어쩔 수 없죠.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한마디씩 보태면서 자리를 떴다.
졸지에 결혼도 안 하고 아이 아빠가 된 녀석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내내 웃고 있었다. 가족이란 단어를 끔찍하게 여기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그걸 확인시켜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일단 아이 입힐 옷이라도 하야하지 않겠니. 언제까지 그렇게 이불에만 싸서 다닐 거야.”
“아…….”
“도대체 이러고 다녔는데 감기가 안 걸린 게 용하다. 용해.”
“당장 옷이랑 또 뭘 사야 할까요? 집에 정말 아무것도 없어서.”
“참 이런 녀석이 아이를 키우겠다고.”
“…….”
토마스가 또 꼬물꼬물 아이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이미 얼굴은 민호한테 푹 빠졌는데, 정작 다른 준비는 하나도 되어있지 않았다. 그런 녀석을 보다 못한 결혼한 여성 연구원들이 하나둘 나서기 시작했다.
“같이 갈까?”
“네?”
“넌 어차피 가봤자 뭐가 필요한지 모를 거 아냐.”
“…그렇긴 한데.”
“어차피 오늘은 토마스 덕분에 다들 일찍 퇴근할 텐데 같이 나가보자. 하나부터 열까지 사려면 지금 가도 빠듯하겠네.”
“…….”
“어서 일어서.”
“…….”
아이에게 잔뜩 관심을 보이던 연구원들이 토마스 주위에 몰려들었다. 아니, 됐습니다. 제가 할게요. 하지만 여러 사람을 이길 수 없었다. 반쯤 강제로 끌려나가는 토마스를 보던 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저었다. 좋은 핑곗거리가 생긴 기분이네. 다들 웃으면서 가볍게 말하는 것 같았지만, 심각한 표정은 가시지 않았다.
“걱정이네요.”
“마찬가집니다.”
“토마스 저 녀석은 도대체 어쩌려고.”
혹시 가벼운 동정심 때문에 아이를 데리고 오려는 것은 아닐까. 몇 번이나 걱정했다. 무작정 애정을 주다 버티지 못하고 포기하는 것만큼 아이의 인생에 상처가 되는 것이 없다고 설명했지만, 토마스의 생각은 흔들리지 않았다. 절대 포기하지 않아요. 미래에 대해 얼마나 확신이 있는지. 토마스의 목소리는 한 번도 떨리지 않았다.
“갑자기 저렇게 나올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네요.”
“그러게 말이다.”
“잘 키울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위키드 연구소엔 걱정만 푹푹 쌓이고 있었다.
***
“그 녀석을 알아?”
“물론이지.”
“…….”
“넌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그쪽이 더 신기한걸.”
갤리가 토마스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알게 된 것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통해서였다. 여느 때처럼 점심 도시락을 들고 가게 문을 열던 프라이는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갤리를 보며 오늘은 또 어떤 손님이 귀찮게 했는지 생각했다.
“또 누가 귀찮게 했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점심 도시락.”
“아, 고마워.”
갤리는 익숙하게 프라이가 건네주는 것을 받았다. 딱히 약속한 것은 아니지만, 프라이는 언제부턴가 갤리의 점심을 챙겨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종이봉투 안을 뒤적거리며 샌드위치를 꺼내 든 갤리는 아직도 미간의 주름이 펴지지 않았다.
“이야기 좀 해봐. 뭐 때문에 그러는 거야.”
“아, 그게.”
갤리는 아침에 있었던 일을 잠깐 되돌아보았다. 과연 이런 일을 그대로 말했을 때 믿을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쩝. 괜히 입맛을 다시던 갤리는 프라이의 채근에 결국 입을 열었다.
“오늘 아침에 좀 이상한 사람이 가게에 들렀다 가서 그래.”
“무슨 소리야?”
“아기를 대충 안고 가던 녀석이었는데, 나이도 그렇게 많지 않았고. 게다가 아이랑 전혀 닮지도 않았어.”
“흐응.”
“그리고 이름이…….”
“혹시 토마스야?”
“어, 맞아. 토마스…응?”
“왜?”
“네가 그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어?”
갤리가 입으로 가져가던 샌드위치를 베어 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입을 크게 벌렸다. 프라이는 오히려 그런 갤리가 더 신기하다는 듯 바라볼 뿐이었다. 아무리 봐도 둘은 딱히 성격이 맞아 보이지 않았다.
“프라이, 네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이웃 사촌이니까.”
“뭐?”
“키만 커서 아기 안고 다니는 녀석 말하는 거 아냐? 이 동네에 그런 사람이 둘일 리가 없는데.”
“그건…맞아.”
“역시.”
프라이의 이야기는 예상보다 길었다.
하도 아이가 우는 소리가 들려 밖을 내다보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아이를 어르고 있는 녀석을 보았다. 이 추운 날 집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고 거리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다 못해 밖으로 나왔다.
‘그러면 감기 걸리는데.’
프라이의 한마디에 토마스는 잔뜩 당황했다. 마치 조언자를 발견한 것처럼 팔을 덥석 붙잡았다. 결국, 그 손을 뿌리치지 못한 프라이는 토마스의 안내대로 집안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집안은 정말 형편없었다고 회상했다. 도대체 뭘 먹고 사는지도 알 수 없는 곳은 사람 냄새라곤 나지 않았다. 아이 옷도 한 벌 없는 곳에 간신히 몇 가지만 쟁여둔 채였다. 아기가 제대로 먹은 것이 없어 보였는지, 처음 보는 사람에게 부엌을 써도 되느냐고 물었다.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는 토마스는 아직도 칭얼거리는 아이를 껴안았다.
‘가만있어 봐. 먹을 만한 재료가 있긴 하려나.’
프라이는 부엌에서 바삐 움직이며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토마스는 그런 질문에 넙죽넙죽 대답했다. 프라이는 한 시간도 안 되어서 토마스와 민호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민호가 이런 걸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
최대한 부드럽게 만든 이유식을 식히던 프라이가 잔뜩 난감한 표정으로 토마스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이유식을 할 단계였는지 민호는 투정을 부리지 않고 잘 받아먹었다. 뭐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 일주일 동안 프라이를 토마스의 집으로 출퇴근하게 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 연구소로 출근하다 갤리를 만난 것이었다.
“한마디로 너 코 꿴 거잖아.”
“뭐라고? 기껏 이야기를 해줬더니.”
“그게 코 꿴 거 아니면 뭐냐. 네가 일주일 동안 둘을 먹여 살렸다는 거 아냐. 하여튼 성격만 좋아서.”
“넌 그렇게 성격이 삐딱해서 뭐 하고 살래?”
“이런 거 하고 산다.”
프라이는 이야기를 해줘도 저런다며 혀를 찼다. 저렇게 삐딱해서 누가 데려가려는지. 그런 친구를 보던 갤리는 다 먹었으니 어서 네 가게로 가라며 다시 타박했다.
갤리는 어쩐지 더 의심이 깊어지는 모양이었지만, 프라이는 이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알아서 알아내겠지, 껄껄 웃던 친구는 저녁 먹을 거면 가게에 들르라는 말을 남긴 채 돌아갔다.
민호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물론 뉴트는 그런 민호의 말투에 이미 익숙했다. 넌 언제나 그래. 툴툴거리는 뉴트를 보며 웃는 녀석은 소파에 좀 더 늘어졌다. 방학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가벼운 과제 몇 개만 해치우면 나머진 자유 시간이었다. 토마스는 도우미가 오기 전 둘만 남아있는 시간을 내내 걱정했지만, 그렇다고 집에만 묶어두지도 않았다. 너무 멀리 나가지 말라고 아무리 말해도 놀러 갈 녀석들이었으니까. 둘은 보통 체육관에서 운동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이따 체육관이나 갈까?”
“또 뛰러?”
“딱히 할 일도 없잖아.”
“그렇다 해서 뛰러 가자고 하는 사람은 네가 처음일 거야.”
“뉴트도 싫어하진 않잖아.”
“너만큼은 안 좋아해.”
뭐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안 간다는 소리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나이 차이는 얼마 안 나기도 해서 친구처럼 형제처럼 자라고 있었다. 게다가 둘이 토마스를 만나게 된 경위는 거의 비슷했다.
민호는 가끔 이렇게 둘만 남게 되면 뉴트와 처음 만난 날의 이야기를 하곤 했다. 물론 그 이전 기억이 없는 부분은 둘 다 알 수 없었다. 뉴트는 아무런 낌새도 없이 민호 앞에 나타났다. 여느 때처럼 도우미에게 민호를 부탁하고 출근했다.
채 이십 대가 되지 못한 녀석이 키우는 어린아이는 주변 사람들의 걱정을 먹고 자랐다. 어떻게든 키워보겠다고 아등바등하던 토마스는 결국 모든 유급휴가와 무급휴가까지 다 끌어다 쓴 뒤 연구소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연구실을 비울 수 있던 것도 토마스가 워낙 중요한 프로젝트의 일원이었고. 그 정도 휴가를 주고도 잡을만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더는 휴가를 연장할 수 없었다.
연구소로 돌아갈 날이 정해지자 온종일 집안을 돌봐줄 사람을 찾아야만 했다. 민호는 처음 토마스의 품에 왔을 때보다 껑충 자랐다. 생각보다 철이 빨리 든 녀석은 어린 나이에도 그다지 떼를 쓰지 않았다. 물론 가지 말라고 옷자락쯤 쥐어볼 수도 있었지만, 그런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민호. 나 다녀올게.’
‘다녀와. 토마스.’
‘민호 잘 부탁해요. 직접 돌봐줘야 하는데, 제가 좀 바빠서. 최대한 일찍 퇴근할게요.’
‘알겠어요. 걱정하지 마시고 다녀오세요.’
언제나 민호가 안쓰러웠다. 토마스는 미안함을 가득 담고 민호를 품 안 가득 안아줬다. 빨리 올게. 하지만 그 말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안 그래도 갑자기 일이 많아져서 퇴근이 점점 늦어지곤 했다. 민호는 얌전히 자라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토마스의 마음이 편해지는 것도 아니었다. 여기까지 생각을 하던 민호는 뉴트를 쳐다보았다.
“왜?”
뉴트가 까만 눈을 깜박이며 시선을 맞췄다. 눈동자 색이 닮은 둘의 입가에 웃음이 피었다.
“그렇게 둘이 살던 집은 너무 컸어.”
“지금 이 집이랑 다를 거 없잖아.”
“하지만 너랑 갤리는 없었지.”
“그런가.”
“응. 굉장히 넓었어.”
“…사실 우리가 어려서 그랬던 거 아닐까?”
“…….”
뉴트는 민호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기억을 더듬었다. 솔직히 토마스의 손을 잡고 이 집에 오기 전 기억은 그다지 남아있진 않았다. 애써 기억하려 해도, 새까만 머릿속은 텅 비어있었다. 자신의 기억이었지만 도통 깊숙한 곳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사실 그다지 기억하고 싶지 않았기도 했다. 좋은 추억만 담는 것도 벅찼으니까.
게다가 기억을 더듬으면서 추억을 되새길 만큼 오래 산 것도 아니었다. 민호는 그런 동생을 바라보며 애늙은이 같다며 놀리곤 했다. 그럴 때마다 뉴트는 냅다 옆구리를 쳤다. 민호는 억 소리를 내며 몸을 웅크렸다. 눈물을 눈 꼬리에 매단 녀석이 억울한 표정으로 뉴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뉴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이 차이가 얼마나 난다고 동생이라고 그래.”
“동생이지 그럼 아니야?”
“아니야.”
“왜!”
화난 척 소리쳤지만, 그다음 바로 피식피식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쿠션을 끌어안고 끅끅거리며 웃음을 삼키면 둘은 또다시 늘어졌다. 방학은 이래서 좋다니까. 실없는 소리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모자랄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뉴트의 머릿속에 쌓여있는 기억 대부분은 이 집에서 만들어진 것뿐이었다. 민호. 토마스. 갤리. 추억은 사람 수 대로 차곡차곡 포개진 채 단단하게 굳어갔다. 그 아래 깔린 기억은 위키드 연구소에 있던 단편적인 기억이었다. 사실 어린아이들이 이런저런 걱정을 하는 것이 이상하긴 했지만, 둘은 가끔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했다.
“이따 운동하고 갤리네 가게나 놀러 갈까.”
“갑자기 왜?”
“그냥?”
저렇게 말하니 또 할 말이 없었다. 그러자. 뉴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집에서 딱히 할 일도 없는 데다, 갤리한테 가면 재밌는 것이 많긴 했다. 어차피 토마스는 늦게 올 테고. 시간이 맞는다면 셋이서 저녁을 먹고 들어와도 좋았다.
솔직히 낯설지 않았다고 말하면 거짓말이었다.
둘은 몇 년 동안 갤리를 서먹하게 대했다. 싫어서라기보단, 셋이서 살던 집에 낯선 사람이 불쑥 들어와 있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것도 몇 년 둘이 밀고 당기다 간신히 결론이 난 거긴 했다. 나중엔 민호와 뉴트가 나서서 뭐라고 할 정도였다고 할까. 둘은 그렇게 오랫동안 만났으면서 한없이 내외하고 있었다.
갤리는 굳이 합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토마스가 막무가내였다. 결국, 집이 조금 더 넓었던 토마스가 이겼다. 그 모습을 내내 지켜보던 둘은 생각보다 토마스가 나이가 많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하긴 서른 살 초반에 십 대 아들을 둔 사람이 흔하진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할수록 이상할 정도로 묘한 인연이 겹쳐져 만들어진 집이었다.
***
토마스가 민호를 처음 만난 날엔, 바람이 그렇게 불었다고 했다.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은 토마스는 학교를 조기 졸업하고 바로 연구소에 들어갔었다. 대학까진 필요도 없었다고 말하며 웃었다. 위키드는 직원을 위한 편의시설로 꽤 훌륭한 기숙사를 제공했다. 솔직히 연구소에 들어오면 바깥으로 나갈 필요가 없다고 할 정도로 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갖춰두고 있었다.
‘…답답해.’
하지만 토마스는 그곳이 답답해서 싫다고 말하며, 기어코 집을 구해서 나갔다. 어렸을 때부터 연구실을 오가며 살았더니 이젠 지겹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내내 연구소에서 살던 녀석은 바깥으로 나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도 항상 나가고 싶어 했다.
“…네?”
“…….”
“토마스 말씀이신가요?”
“그러네.”
“아니, 그 녀석이 바깥에서 어떻게 산다고,”
물론 연구소를 나가겠다고 한 당사자보다 걱정하는 쪽은 같은 팀에 소속된 어른들이었다. 안 그래도 아이 때부터 키우다시피 데리고 다녔던 녀석인지라, 스무 살이 다 돼가는 상황에도 항상 어린애 같았다.
그런 토마스가 대뜸 바깥에 집을 구하겠다고 고집을 피우기 시작하자 한숨만 늘어갔다. 그렇다고 알아서 하라며 보내줄 수도 없는 일이었다. 토마스가 손대고 있는 프로젝트는 이번 해의 메인이었고, 실패하면 안 되는 중요한 실험이었다. 총장까지 직접 내려와 설득하려 했지만, 도통 이 녀석의 질긴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결국, 두 손을 든 어른들은 몇 가지 제안하며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왜요?”
“넌 우리 연구소의 중요한 일원이고 안전하게 보호받을 권리와 의무가 있단다.”
“…….”
“집은 위키드 측에서 관리할 테니, 다른 것은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
“하지만…….”
“지금까지 내내 기숙사에 살다가 혼자서 처리하려면 힘들 거야. 토마스. 총장님 말씀을 듣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
몇 사람이 달라붙어서 설득하고 난 뒤에 토마스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토마스는 분명 놓치기 아까운 인재였다. 어렸을 땐 그렇게 고집이 세지 않았다. 하지만 늦게 온 사춘기라도 되는지 내내 어른들을 귀찮게 했다. 결국, 최대한 연구소와 가까운 곳에 집을 구했다. 이 녀석이 밥이라도 잘 챙겨 먹고 다닐 수 있는진 알 수 없었지만, 어느 정도 내버려 두기로 했다. 정 못 버틸 것으로 보이면 억지로라도 끌고 올 생각이었다.
“그럼 저 가서 짐 정리 좀 할게요.”
“그렇게 해라. 왜 이렇게 걱정이 되는지 모르겠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저러다 힘들면 돌아오겠지. 어차피 외근이나 출장용으로 사용하는 아파트도 따로 있으니 그쪽으로 알아봐 주면 될 것 같네.”
“알겠습니다.”
“아, 잠깐만. 토마스.”
토마스가 자리를 뜨려는 그 순간 들린 목소리가 발목을 콱 붙잡았다. 토마스는 눈만 깜박거리다 어정쩡한 자세로 다시 소파에 주저앉았다. 소파 앞에 놓여있는 탁자엔 서류가 잔뜩 밀려왔다.
“일단 우리 쪽에서 보유하고 있는 사옥 리스트란다.”
“…….”
“어차피 연구소 명의로 되어있는 건물이니 원하는 곳을 선택해서 편하게 살도록 해라.”
“물론 필요하다면 애완동물을 키워도 괜찮고.”
“그건 좀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은데요.”
애써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눈앞에 보이는 서류를 집어 들었다. 위키드에서 내준 곳은 연구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건물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안쪽으로 조금 들어가 한적한 곳이라고 할까. 연구소에서 가는 방법이 담긴 간단한 약도와 함께 최근 리모델링을 했다는 전개도도 함께 첨부되어 있었다. 혼자 살기엔 쓸데없이 넓어 보이는 집이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급하게 다른 곳을 구할 길이 막막한 것은 사실 이었다. 기숙사를 떠나고 싶어서 고집을 부렸던 건데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살게 될 줄이야.
‘…….’
토마스는 눈을 살짝 찌푸리며 약도를 다시 살펴봤다. 하지만 저 집은 너무 크고 넓었다. 물론 좁은 곳을 선호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과한 크기를 원한 것도 아니었다. 혼자 집에 있다면, 전등이 닿지 않는 곳에서 생겨난 어둠이 금방이라도 구물 구물 기어 나올 것 같았다. 토마스는 그런 식의 침묵을 싫어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가져가야 할 짐이 무엇인지도 알기 어려웠고, 제대로 정리하지 않고 잔뜩 방에 늘어둔 개인 짐들이 뇌를 스치고 지나갔다. 끄응. 고민 섞인 신음을 내내 내뱉던 토마스가 먼저 가보겠다고 일어섰다. 조금이라도 이곳을 빨리 빠져나가고 싶었다. 에바 페이지는 허락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아기 새가 둥지를 나가는 기분이 드는군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녀석이 왜 갑자기 저런 바람이 불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뭐, 어릴 적 치기일 수도 있고, 다들 그렇게 크는 거겠죠.”
“그렇습니까.”
급하게 방문을 여는 애제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에바 페이지는 내내 굉장히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물론 걱정이 되진 했지만, 이렇게라도 연구소와 끊어지지 않는 줄이 있다면 상관없었다. 많은 이야기를 하느라 차갑게 식어버린 잔을 들었다.
연구소 내에서 토마스는 여전히 착하고 귀여운 연구원이었다.
“…생각보다 가져갈 짐이 없네. 나 여기서 뭐 하고 살았지.”
토마스는 일인용 침대에 걸터앉은 채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방안을 둘러보았다. 어쩐지 마음에 돌덩이가 하나 더 들어앉은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완전한 독립을 하지 못하는 것도 신경이 쓰였는데, 지금 개인실 꼴을 보고 있으니 더 답답해졌다. 이 커다란 방에 가득 차있는 물건중 토마스가 가지고 들어온 것은 몇 가지 없었다. 애초에 연구소에 들어올 때부터 따로 물건을 챙길 필요가 없었다. 정말 필요한 개인 소품 외에 생활에 필요한 각종 용품은 모두 위키드가 지급한 것이었다.
“내가 이렇게 위키드에 의존하고 살았었나.”
토마스는 갑자기 혼란스러웠다.
“정말 모르겠다.”
정리할 생각을 포기하니 마음이 좀 편해졌다. 어차피 재택근무를 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짐을 다 챙길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애초에 이곳에 들어올 때 뭐하나 제대로 들어온 것이 없다는 걸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개인실에서 지내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가까이 있는 복지과에 말하면 그만이었다. 위키드는 직원들의 복지를 위해선 돈을 아끼진 않았다. 게다가 중요한 위치에 있는 연구원의 부탁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잠만 자고 연구소로 출근할 거면…일단 그냥 나가서 필요할 때마다 사는 것도 방법이겠네.”
물론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받는 월급은 한 푼도 새어나가지 않고 차곡차곡 통장에 쌓이고 있었지만, 정작 토마스는 그 돈을 꺼내 쓸 일이 별로 없었다. 딱히 가지고 싶은 것도 없었고, 그렇다고 연구소 내에서 제공하는 물건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지내왔던 나날은 토마스의 손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일단 뭐라도 챙겨봐야겠다.’
개인실에서 밖으로 가지고 갈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하나둘 챙기다 보니 짐이 자연스럽게 늘어갔다. 커다란 가방에 이것저것 되는대로 집어넣던 토마스가 잠시 침대를 바라보며 손을 멈췄다. 딱 한 번 통장에서 돈을 꺼내 샀던 태블릿 PC가 눈에 들어왔다. 왜 굳이 샀냐고 물어본다면 갑자기 사고 싶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충동구매였다.
어차피 지금 가는 집에는 필요한 컴퓨터가 설치되어있을 것이 분명하지만, 새로운 기계를 만지는 것보다 손에 익은 쪽을 가져가는 것이 편했다. 물론 집에서까지 일할 생각은 없었다.
“이것만 들고 나가면 되겠네.”
그리고 정말 마지막으로 할 것이 있었다. 되는대로 구겨서 침대 위에 던져둔 가운을 집어 들었다. 옷걸이에 적당히 걸어서 구김을 펴고 옷장에 집어넣었다. 그러고 나니 영 어색했다. 토마스는 엄지손가락으로 마른 입술을 쓸었다. 그리곤 가방을 들고 방을 나섰다. 옆에 달린 패널에 연구원 카드를 갖다 대자 짧은 전자음과 함께 문이 잠겼다. 아마 이사 겸 휴가 기간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문이 열리진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이제 진짜 가는 건가. 이삿짐이 없어서 편하긴 하네.”
여전히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보는 것처럼 전전긍긍하는 어른들은 토마스가 기숙사를 떠날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스무 살이 다 되어가는 녀석이었지만, 한없이 어려 보이기만 했다.
총장은 마련해준 집까지 편하게 타고 가라며 연구소 차를 내주었다. 보안이 철저한 연구소를 완전히 빠져나오기까지 몇 번이나 카드를 사용해야 했다. 밖으로 잘 나가지 않아 귀찮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었는데, 정말 귀찮을 정도로 복잡한 보안체계였다. 마지막으로 커다란 유리문을 열고 나왔을 때, 제법 쌀쌀한 가을바람이 토마스의 앞머리를 훑고 지나갔다. 이제 막 울긋불긋 물들기 시작한 나무들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벌써 가을이긴 했구나.”
토마스는 멍하니 주변을 바라보았다. 조금 더 두꺼운 옷을 입고 나오는 것이 나았을까. 하도 연구실에만 있었더니 영 날씨에 대한 감각이 사라진 기분이었다.
“이쪽으로 오시죠.”
운전기사가 다가왔다. 토마스는 그런 남자를 바라보며 꾸벅 인사했다. 밖으로 나갈 때마다 함께하던 기사였다.
“잘 부탁합니다.”
“뭘요.”
처음 연구소에 들어왔을 때부터 내내 타고 다녔던 차였다. 익숙한 얼굴로 뒷좌석에 편하게 등을 기대고 앉았다. 무릎에 올린 손가락을 몇 번 움직이더니 다리를 꼬았다. 안쪽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어두운 유리를 통해 토마스는 바깥을 보았다. 빠르게 움직이는 거리에 흐릿한 초점이 잡혔다 다시 사라졌다. 가을은 생각보다 짧을 것이 분명했고, 날씨가 조금 추워진다 싶으면 금방 겨울이 올 것이다. 토마스는 새삼스레 계절이 지나가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겨울이 오면.’
뭘 해야 할까. 막상 연구소를 떠나려 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온갖 감정이 뒤섞인 마음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차라리 잠을 자는 쪽이 나을 것 같아 눈을 감았다. 어깨에 걸고 있던 가방끈이 차가 흔들리면서 버티지 못하고 스르르 흘러내렸다.
‘…겨울이 오면 뭘 할까.’
토마스는 몸이 이리저리 흔들거리는 것도 모른 채 잠이 들었다. 기사는 힐끗 거울을 통해 토마스의 얼굴을 보더니 마치 아들을 보는 표정으로 웃고 말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집에 도착했다는 기사의 목소리를 저 멀리서 들었다. 으으. 잠이 잔뜩 붙은 얼굴로 하품하던 토마스가 머리를 긁적이며 차에서 내렸다.
“바로 보이는 입구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이 부근은 모두 위키드 쪽 사옥이니 이름만 말한다면 그쪽에서 다 알아서 해주실 겁니다.”
“…….”
“그럼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토마스는 멍한 표정으로 듣고 있다 화들짝 놀랐다. 아직도 잠이 안 깬 것이 확실했다. 그런 얼굴을 보던 기사가 한마디 더 건넸다.
“혹시 급한 일이 있다면 연구소 쪽으로 연결된 유선 전화나, 아래쪽 경비 업체를 이용해 주시면 됩니다.”
“총장님은 날 너무 어린애로 보셔.”
작게 투덜거리는 소리는 금방 목 안으로 넘어갔다. 물론 말은 그렇게 하는 녀석은 도움을 받는 생활에 익숙했다. 어렸을 땐 연구원들이, 나이를 먹고 나서는 복지과가 그랬다. 그렇게 고집을 부려 얻어낸 자유는 시간이 지날수록 묘한 기분을 동반했다.
***
민호를 만난 날은 바람이 많이 불었다.
나날이 추워지는 날씨는 금방이라도 눈을 뿌릴 것처럼 흐려지기만 했다. 사람들은 하나둘 두꺼운 옷을 꺼내 입었고, 하얀 입김을 뿜으며 거리를 걸어 다녔다. 토마스는 집에서 오래 머무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내내 비워두지도 않았다.
유난히 바람이 세게 부는 통에 냉큼 집 안으로 들어왔다. 온도를 조금 높이고 커피를 한잔 내려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을 날씨는 출퇴근 하기 딱 좋았는데, 슬슬 추워지기 시작하니 귀찮음이 온몸을 타고 올라왔다. 얼굴을 강하게 때리는 바람은 겨울을 담고 있었고, 며칠 전부터 점점 짧아지는 해는 금방 어둠을 몰고 왔다.
‘아, 춥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 달리 집안은 빠르게 훈훈한 공기로 채워지고 있었다. 추위를 많이 타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따뜻한 온기가 있어야 하는 건지. 토마스는 열심히 위키드의 재산을 낭비 중이었다.
“…음?”
토마스는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섞인 낯선 소리를 들었다. 눈을 깜박이며 창밖을 바라보았지만, 세차게 유리를 때리는 바람뿐이었다. 잘못 들었나. 몇 번이나 귀를 기울였지만, 이렇다 할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결국, 들고 있는 커피 잔에 다시 집중하려는 그 순간, 또다시 바람 사이로 희미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들어도 울음소린데?”
하지만 이미 어둠이 내린 거리에서 아이가 울고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길고양이가 발정기라도 온 건가. 토마스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끊어질 것 같으면서 계속 들리는 소리가 내내 신경 쓰였다. 고양이 울음소리가 어린아이의 목소리와 비슷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좀처럼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안 되겠다.”
애써 다른 곳을 보면서 다리만 떨던 토마스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되는대로 옷을 걸쳐 입었다. 비록 고양이가 우는 것이라 해도 두 눈으로 보고 마음이 편해지는 쪽이 나을 것 같았다. 토마스는 이런 일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꽤 차가운 바람이 온몸에 스며들었다. 어, 추워라. 토마스는 저도 모르게 팔짱을 끼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렇게 추운데 가늘게 이어지는 울음소리는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이 울음소리인지, 아니면 정말 착각해서 들은 고양이 소리인지. 토마스는 소리가 들리는 대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미 어둠이 내린 곳은 어둡기만 했다. 군데군데 켜진 가로등에 의지해 여기저기를 둘러봤지만, 딱히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토마스는 이리저리 소리의 근원을 찾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금방 흥미가 사라졌다.
“역시 잘못 들었나.”
슬슬 한기가 온몸에 들러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인제 그만 들어갈까. 토마스는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아무래도 벌써 겁을 먹고 도망을 갔는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인 채 한참을 풀숲만 쳐다보다 이내 몸을 돌려 돌아가던 토마스의 뒤통수를 쭉 잡아당기는 울음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발걸음을 멈추자 다시 한 번 귀를 찌르는 소리가 발걸음을 턱 잡아 세웠다.
“…….”
토마스가 뒤를 돌아서 풀숲을 이리저리 해치기 시작했다. 그리곤 깜짝 놀라며 무엇인가를 안아 올렸다. 두 눈이 심하게 흔들리는 데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이…어떻게.”
품 안 가득 들어오는 천 뭉치를 품 안에 안고 당황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살펴보던 토마스는 다시금 울음소리가 들리자 퍼뜩 정신이 든 것처럼 냅다 집으로 달려갔다. 무슨 정신으로 문을 열고 들어왔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벌벌 떨리는 팔은 금방이라도 천 뭉치를 떨어뜨릴 것 같았다. 소파에 그것을 내려놓고 허둥지둥 자신이 사용하던 이불을 꺼내온 토마스는 정신없이 천을 벗겨냈다.
“…….”
얇은 천으로 몇 겹이나 쌓여있던 아이는 파랗게 얼어있었다. 버석버석 소리가 날 정도로 얼어버린 천을 벗기고 이불로 푹 감싸 안았다. 따뜻한 곳에 들어와서 안심되는지 칭얼거리기 시작하는 아이의 손은 얼음장 같았다. 토마스는 품 안에 아이를 푹 안은 채 눈만 깜박일 뿐이었다.
“도대체…누가.”
물론 부모를 알 순 없었다. 하지만 이 아이는 상당히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그나마 얼어 죽기 전에 발견된 아이는 잔뜩 언 몸으로 울어대다 어설픈 손길을 받고 나서야 간신히 잠이 들었다.
“…….”
토마스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아이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조용히 눈치를 살피며 아이가 깨지 않는지 살폈다. 다행히 잠투정을 많이 하진 않는지 곧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토마스의 손이 바닥에 떨어진 옷을 뒤적거리며 연신 뭔가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찾았다.
“…….”
알아낸 것은 아기의 이름뿐이었다. 작은 쪽지엔 생일이나 다른 말은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민호. 민호. 토마스는 세상 모르고 잠이든 아이의 뺨을 살살 쓸어보며 낯선 이름을 불렀다. 어떻게 해야 할진 아직 확실하게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아이를 밖에 그냥 둘 순 없었다.